오후의 명화
- 작성일 2008-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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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가 시끄러웠다. 김 경사는 아득해졌다. 빌어먹을, 비번인 날도 시원찮을 판에 무슨 날벼락이야. 그는 경찰특공대 차량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혹시 예전에 일요일 오후 낮에 하던 주말의 명화인가? 아, 이건 밤에 하는 거였던가? 아무튼 그런 프로그램이 생각났다. 드라마 재탕보다는 훨씬 나았던 것 같았다. 그건 아닌가? 갑작스레 터져버린 사건은 그 때의 액션영화를 생각해내게 했다. 보통 그 때는 성룡 영화를 틀었던가? 김 경사는 이 순경에게 물어보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끌어내렸다.
택배 왔습니다. 일요일 날 택배가 오는 경우도 있나? 그들은 이상한 위화감을 느꼈다. 아, 어쩌면. 이 집의 장녀이기도 한 수희는 서둘러 현관문을 열었다. 분명히 쇼핑몰에서 주문했던 옷일 것이다. 바락바락 우기면서, 다신 이 쇼핑몰에 주문따윈 하지 않을 사람처럼 그렇게 욕을 해대면서 빠른 배송을 부탁했었다. 우리나라는 목소리가 큰 사람이 왕이었고, 손님 역시 그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분 좋은 마음. 그러나 큰 기대는 언제나 실망을 부르는 법이었다.
쉿.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까지 한 남자는 상자대신 수희에게 칼을 들이댔다. 누……누구세요? 그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무슨 일이니? 그의 어머니인 반숙자 여사는 잠깐 고개를 내밀었다가 곧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소리 지르면 죽여버리겠어. 그는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수희의 목에다가 칼을 들이댔다. 그녀는 침을 삼키면서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또 누구있어? 그의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사실 한 명이 더 있었다. 수희의 아버지이신 박태욱은 소파 옆에 놓아두었던 골프채를 조용히 꺼내들고 서 있었다. 마치, 사바나에서 맹수를 사냥하는 마사이족과 닮았다. 하지만 그의 배는 그들의 비해 너무 불룩했다. 두꺼비처럼. 칼날을 더 가까이 들이대면서 그는 천천히 딸을 앞장세웠다. 한걸음, 한걸음. 엄마, 배고파. 수희의 남동생이자, 박씨의 아들인 박수철의 등장이었다. 아빠, 왜 골프채는 들고있어? 잠이 덜 깬 눈으로 기지개를 피는 아들의 모습에 말을 잃은 박태욱씨는 골프채를 내려놓고 말았다. 모두들 마루에 앉아있어, 이 년 죽는 꼴 보기 싫으면. 모자를 푹 눌러쓴 사내를 보고나서야 아들은 분위기를 파악한 듯 하얗게 질렸다. 그는 수철에게 가방을 던졌다. 묶어.
꽁꽁 묶인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고 있는 심정은 뭐랄까? 고소하긴 했다. 그렇지만 역시 상황은 상황인지라 조금 티를 낼 수는 없었다는 안타까움이 있었지만. 내가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것이 아니야. 칼을 든 사내는 겁먹은 수희에게 빌듯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좀 빚이 있는데, 그게 좀 급하게 갚아야 할 거라서 그래. 너도 나이가 들고, 좀 가난했으면 알거야. 내 말만 잘 들어준다면 몸에 칼 끝 하나 대지 않고 나갈테니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아저씨, 다 묶었어요. 조금 헐거운 듯 했지만, 사내는 상관하지 않았다. 너는 이 가방에다가 신용카드하고 패물이나, 현금같은 거 넣어와. 네. 수철은 너무도 순순히 안방으로 들어갔다. 너무나도 태연해 보이는 뒷모습을 보면서 부부는 뭐라 말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그러다가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는 것이었다. 지 누나가 인질로 잡혀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렇게 순순히 말을 따르는 것이라고.
한편 인질로 잡힌 수희는 뭐랄까? 이 사내에 대해서 궁금했다. 칼끝이 덜덜덜 거리면서 떨리는 것도 그렇고, 계속 자신에게 변명조로 이야기를 하는 것도 그랬다. 아저씨, 나이가? 자꾸 아저씨, 아저씨 하지마. 나 그래도 아직 군대도 안 갔다왔단 말이야. 몇 살인데? 그는 우물쭈물하다가 대답했다. 23살. 어라? 나 21살인데. 그럼 오빠라 불러도 되는거야? 응. 그의 입 꼬리가 조금 올라간 듯 했다. 그런데 오빠, 마스크 답답하지 않아? 나 얼굴 보고 싶은데 보여주면 안 돼? 확실히 그의 모습은 초가을의 오후날씨에 입은 옷 치고는 조금 더워보이긴 했다. 지문을 감추려는 모양인지 구해온 장갑은 공사판에서나 볼 법한 빨간 목장갑이었고, 긴팔에 청바지에, 심지어 어디서 구해온건지 택배회사의 조끼까지 입고선 얼굴에는 하얀색 마스크까지 하고 있는 것이었다. 저기, 답답해도 하고 있어야 해. 그래야 늬가 신고하려고 해도 너희는 날 모를 거 아냐. 그럼 신고 안할게. 어? 부부는 커다란 눈을 뜨고서 딸을 쳐다보았다. 설마, 저 애가 미친 걸까? 신고를 안 하겠다니? 집안을 거덜내고, 단란한 가족의 오후를 파괴한 남자를 신고하지 않겠다니? 그렇지만 다시금 그들을 나름의 합리화를 시작했다. 나중에라도 신고를 하기위해서 거짓말을 하는거다. 그녀는 지금 고도의 심리전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그렇지만 이번에는 조금 힘들었던 것은 그녀의 표정이 너무나도 천진난만했기 때문이었다.
정말이지? 신고 안하기다. 사내는 너무도 순순히 마스크를 벗었다. 심지어 목에 칼을 댔던 식칼마저도 내려놓고 말이다. 하지만 수희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 채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생각 외로 준수한 외모. 우와. 험상궂은 사람일 줄만 알았는데 의외다. 오빠, 꽤 근사한데? 그래? 그런 말 조금 듣긴했어. 그는 쑥스러운지 그녀의 눈을 피하면서 대답했다. 뒷머리를 긁는 모습을 보면서 그녀는 깔깔거리면서 웃었다. 오빠, 귀엽다. 그런데 왜 칼을 든거야? 무슨 일인데? 아아.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말을 했다. 웃지 않을 거지? 응, 도대체 뭔데? 아저씨, 다 쌌어요. 어라? 마스크 벗었네? 어느새 가방을 두둑이 채워넣은 수철은 사내의 얼굴이 신기한 듯 쳐다보았다. 와, 형 잘 생겼다. 형, 모자도 좀 벗어봐요. 수철은 대뜸 다가가선 모자를 벗겼다. 와, 형 완전 모델이다, 모델. 죽인다. 그는 감탄을 연발하면서 사내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사내는 수줍은 듯 했지만 입가에 번진 웃음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오빠, 그러니까 칼을 왜 들었냐고? 수희는 눈을 반짝이면서 집요하게 물었다. 아, 맞다. 그러니까....... 여행 가려고. 어디로? 쿠바 쪽이나 남미. 왜? 체게바라처럼 여행해보고 싶어서. 그런데 돈이 마땅히 구할만한 곳이 없더라고. 왜? 오빠정도면 쇼핑몰모델해도 되겠다. 그걸로는 좀 부족해. 사실 모델이라는 게 이름 있는 애들이 아니면 거의 안 팔리는 옷 몇 벌 챙겨서 받는 정도지, 별 거 아냐. 그렇구나. 오, 형 멋있다. 자메이카나 뭐 그런 곳도 가볼꺼야? 당연하지. 레게의 나라인데, 빼놓고 가면 섭하지. 그래서 돈이 많이 필요해. 가서 이쁜 여자도 꼬셔보고. 그럴라고 어학원도 다니고 있어. 진짜 돈 많이 필요하겠다. 그래서 지금 얼마나 모았어? 나? 이번이 처음이야. 정말? 응. 사실 되게 떨렸거든. 이렇게 쉽게 돈이 생길 줄은 몰랐어.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이렇게 할꺼였나봐. 아냐, 오빠가 잘생겨서 내가 잘 해주는 거지. 수희는 그의 품 안에 있다는 것이 꽤 즐거웠는지 계속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수철 역시도 가방을 그에게 밀어주고서는 강아지처럼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부부는. 그래 부부가 있었다. 그런데 이 상황은 어떻게 머리로는 이해가 되질 않았다. 분명히 자신들은 강도를 당한 사람이었고, 딸은 분명히 인질이었고, 아들은 가족의 재산을 챙겨주었고. 테이프에 입이 봉해진 채, 박태욱씨는 얼굴이 벌개져만 갔다. 반숙자씨는 그가 가방을 열어보고 가지고 온 것을 계산하는 모습에 얼굴이 하얘져만 갔다. 자식새끼라고 키워놓은 것들은 죄다 쓸모가 없었다. 묶인 팔과 다리만 풀 수 있다면 부부는 당장에 자식새끼부터 요절을 내주리라 다짐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 이유야 다르긴 했지만.
참, 그런데. 형 어쩌지? 왜? 나 신고했어. 사내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뭐, 괜찮을 거야. 잘못 신고했다고 하지 뭐. 그렇게 쉽게 번복이 되는 거야? 셋은 고민에 빠진 듯 각자의 표정을 지어보였다. 뭐, 오빠에 대해서야 나나 수철이는 별 상관이 없는데 저 분들이 걱정이네. 어쩌지? 음...... 뭐, 잠깐 숨겨뒀다가 나중에 꺼내드리면 되지 않을까? 이 말은 이 집안의 장남 격이라 할 수 있는 수철의 입에서 나왔다. 그 사실에 부부는 다시금 말을 잃었다. 그거 좋겠네. 그럼 얼른 하자, 경찰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그들은 무척이나 즐거운 게임을 하는 것 같은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다리를 잡을테니까, 너희는 한쪽 팔씩 맡아서. 하나 둘 응차. 그들은 수희의 방으로 옮겨졌다. 반숙자씨는 너무도 어처구니없었는지 그냥 순순히 들려나갔지만, 박태욱씨만은 예외였다. 얼굴이 벌게진 채로 요동을 치면서 반항을 하는 것이었다. 늬네 아버지 진짜. 미안, 원래 좀 고리타분하셔. 수희는 애써 웃음지어보이면서 사내에게 사과했다. 아빠는 하여튼 진짜....... 아들은 말을 하다 말고 한숨을 내쉬었다. 야, 이 씨발새끼들아, 내가 늬네 이러라고 지금 20여 년 동안 너희를 키워준 줄 아는게냐! 그는 자식들에게 쌍욕이나 매를 들어본 적이 없던 매우 성실하고 예의바르던 아비라 자부했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이 테이프만 떼어내 버린다면 그 자부심 다 반납하고, 병원신세를 지게 할 만큼 패버리고 싶었다. 그걸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셋은 마치 아버지를 짐짝 취급하듯이 내던져버리고는 문을 닫아버렸다.
김 경사는 조금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인질이라니, 그것도 일요일 오후다. 어느 바보강도가 이 사람 많은 시간에 들이닥쳐서는 인질극을 벌이겠는가이고. 둘째는 그 신고자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차분했다는 것에 있었다. 이거 장난전화아닙니까? 이 순경은 짐짓 귀찮다는 식으로 말했다. 너는 조용히 해, 이것아. 너 여기로 떨어진 지 얼마나 됐어? 아직 석 달도 안 된 애송이가 뭘 안다고. 김 경사는 이 순경을 타박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까? 인질극이 났다면 벌써 끝나서 갔겠죠. 지금 신고접수되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데요. 적어도 십분입니다. 이러면 이미 게임끝이예요. 지금까지 범인이 거기 있다면 그건 바보거나, 미친놈인거죠. 미친놈? 이 순경은 핸들을 좌측으로 돌리면서 말을 이었다. 그렇죠, 미친 놈. 한번 TV에 나와보려고, 쇼하는 것들. 영화 같은데서 나오잖아요? 뭐, 결국은 죽곤 하지만. 폰부스인가 하는 영화 보셨어요? 그 영화는 이상하게 안 죽더라고요. 그 범인이. 몰라. 차나 똑바로 몰아. 자꾸 타박하는 통에 이 순경에 입은 삐쭉 튀어나왔다. 그 와중에 그들은 곧 아파트에 도착했다.
일단은 이 순경이 경비실에 들렸으나, 딱히 별 말이 없었다. 김 경사는 그 말을 듣자, 자신도 모르게 긴장한 자신을 보면서 조금 우습다고 생각이 들었다. 이 순경은 아예 이 사건자체를 생각지도 않는 것처럼 무척이나 편안해 보였던 것이었다. 이제 감이 다 녹슬었나? 서에도 근무해보고, 지구대 생활도 꽤 오래했다고 자부했지만 세월 앞에 무뎌져가는 것은 어찌하지 못한다는 마음은 조금 서글펐다. 하지만 절차라는 것이 존재했고, 무엇보다도 조금은 확실하게 해두자는 마음에 귀찮아하는 이 순경을 끌고서 향했다.
딩동. 딩동. 김 경사는 현관문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발소리. 누구세요? 여자의 목소리였다. 대뜸 이 순경이 나섰다. 신고 받고 왔는데요, 문 좀 열어볼 수 있을까요? 끼이익. 조심히 문이 열렸다. 걸쇠가 걸려 있는 채 였다. 예, 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죠? 수희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이 순경은 웃음을 띤 채 서 있었다. 수희가 꽤 이뻤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 순경을 보면서 표정을 구기다 말고, 김 경사가 말을 이었다. 신고가 접수돼서 말인데요, 저기 별 일 없는거죠? 예. 그녀는 문을 닫으려고 했다. 저기 죄송한데, 저희가 확실히 해야 돼서 말이죠, 잠깐 집에 들어갈 수 없을까요? 이 순경은 계속 실실거리면서 대뜸 말하는 것이었다. 김 경사가 그런 그를 노려보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잠시만요, 그녀는 문을 닫았다.
어쩌지? 그녀는 황급히 그에게 물었다. 딱히 둘은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었지만, 이대로 그냥 보낸다면 조금 모양새가 안 좋아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뭐. 걱정하는 사내 옆에서 수철이 이야기했다. 알았어, 일단 들여보낼게. 수희는 걸쇠를 풀고서 문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요새 강도사건이 좀 많아야죠. 이 순경이 자꾸 웃는 통에, 김 경사는 가만히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찔러보았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집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눈에 수철과 사내가 눈에 띄었다.
이분들은? 동생하고 남자친구예요. 사내의 눈이 잠깐 커진 듯 했지만, 이내 어색한 웃음을 띠면서 서로 팔짱을 꼈다. 일요일 오후인데 부모님은 어디 나가셨나봐요? 이 순경의 얼굴이 갑자기 딱딱해진 것을 보고는 김 경사는 조금 웃음이 삐져나왔다. 거봐라, 늬 놈이 그렇지. 그는 차마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자꾸만 그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웃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부모님이 없다고 외간남자 아무렇게나 집에 초대해도 되는 거예요? 아니, 무슨 상관이예요. 내 집에 내가 좋아서 남자친구 초대한다는데. 김 경사는 이 순경과 수희 사이에 섰다. 죄송합니다. 이 친구가 좀 고지식한 면이 있습니다. 그는 이 순경을 밀치면서 현관으로 이끌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수고하세요. 수희는 개나 줘라 는 시늉으로 나가는 그들을 마중했다. 그 와중에 김 경사는 현관에 놓인 신발을 보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 순경이 잡아끄는 통에 어쩔 수 없이 집을 나서야 했다.
휴~ 셋은 경찰관들이 나가자 한숨을 쉬었다. 근데, 왜 나보고 남자친구라고 한거야? 사내는 수희에게 말을 했다. 아니, 그냥. 뭐 생각이 안 나서. 그나저나 나 싫어? 수희는 대뜸 사내에게 물었다. 아냐, 그런 건. 그럼 뭔데? 응? 사내는 어느새 얼굴이 벌개져서는 아무 말도하지 못했다. 에이, 형. 남자답지 못하다. 내가 형 정도면 우리 누나 남자친구로 인정해준다. 어때? 나중에 여행갈 때도 둘이서 같이 다니면 좋잖아. 응. 사내는 고개를 숙인 채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고, 수희는 대뜸 팔짱을 끼워서는 미소를 띠는 것이었다. 그럼, 이제 우리 사귀는거다? 알았지. 응. 속전속결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왠지 수철은 그림이 좋은 커플의 탄생에 자신이 큰 공을 세웠다는 것인 냥 의기양양해 했다.
잘 들 논다. 집 안에 꼬라지가 아주 좋아. 엉! 갑작스러운 목소리의 출현에 셋은 당황했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익숙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바로 여태껏 침묵 속에 가려져있던 박태욱씨, 가장의 부활이었다. 그는 어느새 사내가 들고 나온 칼을 쥔 채 벌게진 얼굴을 하고서 서 있었다. 아빠. 수희와 수철은 동시에 외쳤다. 이 쌍것들. 20여년을 키워준 나한테 이딴 식으로 대접해! 아니, 그게 아니라. 사실 그렇잖아. 우리 인질이었다니까. 그게 인질들의 모습이냐?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수희가 하소연을 해봤지만 먹히지 않았다. 아저씨, 아무도 안 다쳤잖아요. 저 그냥 나갈게요. 예? 그러니까 그 칼 내려놓으세요. 돈도 안 가져갈게요. 사내는 서둘러서 현관으로 나가려 했다. 너도 가만히 있어. 늬가 문제의 원흉이야. 어! 아휴, 이 양반. 왜 그래. 반숙자씨는 지금껏 보지 못했던 남편의 과격한 모습에 놀라했다. 언제나 말도 조용조용히 했고, 자식들에게 그 흔한 손찌검한 번 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부부싸움도 별로 없었고, 사실 그래서인가 조금 부부관계가 거친 맛이 없고 매번 물 흐르듯이 심심한 느낌이어서 불만이긴 했다. 하지만 그건 그거였고, 집 안의 평화를 수호하는 정도에서는 적당한 수준이었다. 남자는 섹스라는 것이 꽤나 중요한 삶의 요소였지만, 여자는 어느 정도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있는 법이었다. 아무튼, 그가 일생일대에 화를 내고 있는 것이었고, 모두들 그의 그런 모습을 이해할 수 없어했다.
사실 반숙자씨 역시 화가 나긴 했다. 무엇보다도 지금껏 피 땀 흘려 번 돈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줘버리는 자식들의 태도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돈을 놓고 간다하지 않았던가?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그냥 손님으로 생각해도 될 일이었다. 그리고 사내의 눈이 참 착해보였다. 무슨 나쁜 짓을 할 만한 위인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맞다, 생각해보면 딸을 인질로 잡았을 때, 그 칼끝이 떨린 것을 보고서 알아차렸어야 했다. 어쩌면 기구한 사연을 가진 아이일지도 몰라. 그녀는 나름의 드라마 속에서 보던 스토리에 자신을 끼워 맞추기 시작했고, 어느새 눈시울까지 붉어져버리는 것이었다. 여보, 우리 저 애 보내줘요. 괜히 애 인생 하나 망칠 필요 없잖아요? 네? 반숙자씨는 남편의 칼을 잡은 손을 꼭 잡았다. 그러나 반응은 모두의 예상을 뒤엎었다.
놔. 지금 장난하는 걸로 보여? 그는 손을 내쳤다. 너도 제정신이 있는 거냐? 지금 이 녀석은 강도라고. 우리 목숨을 들었다 놨다 하던 강도! 그는 소리를 질러댔다. 뻘게진 얼굴로 침을 튀겨가면서. 아무도 다치지 않았고, 아무것도 없어진 게 없잖아요. 그런데 뭐가 문제예요? 그녀 역시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니, 당신은 뭐가 그렇게 매정해요? 사람이 실수를 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뭐가 그렇게 꼬여가지고서는 이렇게 칼을 들이대고 사람에게 겁을 줘요, 겁을! 시끄러. 칼끝이 그녀에게 향했다. 언제나 당신은 그랬어. 항상 자기만 옳다고 떠들어대고, 돈이나 벌어오라고 밀어내기만 했지, 나를 생각한 적 따위는 한 번도 없었던 거지. 아니, 여보. 무슨 소리예요. 칼 치워요. 높아지던 목소리는 잦아들었다. 내가 아까 몇 번이고 넘어져가면서 겨우 줄을 풀어줬어. 근데 당신은 뭐야, 어느새 그랬던 건 모두 다 잊어버리고, 지금도 돈 밖에 모르지. 당신은 나도 그렇게 보이지? 내 감정 따윈 아무런 상관이 없고. 아녜요, 그런 게 아니라고요. 제발, 그 칼 좀 내려놓고 이야기하면 안돼요? 나, 너무 무서워 죽겠어요. 이 집안에 내 편 따윈 없어. 다들 투명인간 취급이나 했지. 이참에 위계질서를 바로 잡아야겠어.
씨발. 누군 주말에도 좆뺑이까는데, 어떤 새끼는 여친이랑 집에서 놀고 있고. 팔자가 좋아. 시끄러, 이것아. 이 순경은 차에 시동을 걸고서 차를 몰아 아파트를 빠져나갔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 집 딸. 꽤 이쁘지 않았습니까? 그러게. 요새 애들 모델이 따로 없다니까, 뭘 먹어서 그렇게 키들이 큰지 원. 김 경사는 곧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자신의 딸을 상상했다. 지금은 작고 귀엽지만은 언젠가 커서는 저렇게 어느 날인가 남자친구를 집으로 초대할 지도 모른다. 어쩌면 결혼을 하게 되고, 하얀 면사포를 쓴 딸을 식장에서 다른 남자에게 배웅하는 날도 올 것이다. 그 생각에 뭔가 가슴이 먹먹해왔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십니까? 아냐, 아무것도. 김 경사는 생각을 지웠다. 잠깐, 차 세워봐. 그는 갑자기 스친 생각에 순찰차를 세웠다. 무슨 일인데요, 뭐 놓고 오신 거라도 있으신지? 김 경사는 문득 아까 현관문에서 얼핏 보았던 신발을 기억해냈다. 아까 분명히 부모님이 집에 없다고 했지? 예, 그랬죠. 그런데 이상한 건 신발이 다섯 켤레였단 말이지. 에이, 뭐 다른 거 신고 가셨겠죠. 아냐, 뭔가 이상해. 차 돌려서 다시 가보자. 뭔가 느낌이 들어. 것, 참. 알았습니다. 이 순경은 무전기를 들어서 지구대에 연락을 취하고는 다시금 아파트로 향했다.
딩동. 모두들 마루에 무릎을 꿇어앉아서는 손을 들고 있었다. 박태욱 씨는 갑작스러운 벨소리에 조금 놀라는 눈치였다. 인터폰을 들었다. 누구십니까? 아까 왔었던 경찰입니다. 아까 들렸을 때 제가 뭘 놓고갔던거 같아서 말입니다.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는 고민하다말고 딸에게 고갯짓을 했다. 늬가 가서 말 해. 뭘 놓고 간 건지, 그리고 지금 곧 나갈꺼라서 들어오시지 못한다고. 그녀는 저린 발을 두들기면서 겨우겨우 발을 띄어서 현관으로 나섰다.
철컥. 걸쇠에 걸린 현관문이 갑자기 열리는 바람에 그들은 조금 놀랐다. 저기 뭐 놓고가셨는데요? 저희가 곧 나갈꺼라서 들어오실 수가 없는데, 찾아서 드릴게요. 아까와는 달리, 그녀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겁에 질려있었고,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했다. 김 경사는 손짓으로 이 순경에게 계속 말을 시키게 했다. 이 순경은 이런저런 의례적인 말을 물어보기 시작했고, 그 와중에 김 경사는 수첩을 꺼냈다.
-혹시 인질극입니까? ―
수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질은 총 몇 명입니까? 고개를 끄덕이세요-
그녀는 네 번을 끄덕였다.
-곧 다시 오겠습니다. 괜히 범인을 자극하지 마시고 침착하게 행동해 주세요. ―
이 순경은 질문을 끝마쳤고, 조심히 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들은 서둘러 경찰서로 무전을 날렸다.
TV에 모두들 모여서 영화 같은 한 장면을 보고 있었다. 한국에서 인질극이라니. 웬 남자가 한 여자에 목에 칼을 갖다 대고는 그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 높이가 꽤 되어서인가, 남자가 하는 말은 들리지 않았다. 카메라는 아파트 위를 잡았다. 그가 다시 베란다 안으로 자취를 감췄다. 보는 이들은 숨을 죽였다. 갑자기 아파트 위에서 줄이 떨어졌고, 검은 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창문을 깨서는 들이닥쳤다. 창문 바깥으로는 하얀 연기가 퍼져나왔다. 모두들 불이 난 걸까하고 있었지만, 이윽고 아나운서는 시위진압용 최루탄이 터지면서 발생하는 연기라고 했다. 아나운서는 긴급히 범인을 잡았다는 말을 전했다. 그 때 시간이 오후 3시 10분. 이제야 끝이 났구나, 김 경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친 사람은 없는 듯 했다. 오늘도 이렇게 잘 마무리 되는구나. 그는 혹시나 표창장 같은 것을 받게 되지 않을까하는 마음에 조금은 두근거렸다. 김 경사님, 이거 보셨습니까? 이 순경은 DMB를 꺼내 보여주었다. TV에서 특공대가 들어가는 장면을 보여주는데, 이거 완전 영화인데요, 영화. 김 경사는 갑자기 문득 KBS에서 했던 오후의 영화프로그램이 떠올랐다. 그때, 그거 좋았는데 말이지. 간만인데. 예? 무슨 소리세요? 아냐, 아무것도. 그들은 시끄럽게 떠들면서 순찰차에 올랐다. 그림자가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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