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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러문

  • 작성일 2009-04-29
  • 조회수 368

내 이름은 이미래. 일곱살이며 파랑새유치원 튼튼반을 다니고 있다. 가족은 아빠와 엄마가 계시고 언니가 있고, 나는 귀엽고 소중한 막내이다.
언니는 대학생이다. 
나는 언니가 대학생이 된 것이 불만이다. 어느날부터 화장품이 한개 두개 늘고, 일요일에는 더이상 나랑 놀아주지 않는다. 나랑 너무 놀아주지 않는다.
얼마전에는 화가 많이 나
 분홍 립스틱 한개를 화장대에 꾹 눌려놓고, 연필같이 생긴 까만건 스케치북에 마구마구 그리고 연필깍이에 돌려 몽땅몽땅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언니는 여전히 나랑 놀아주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다. 분명히 '멍멍 의사선생님'책을 읽어주고, 같이 무지개가 뜬 하늘을 그리자고 해놓고 저녁도 먹지 않고 외출준비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만은 순순히 물러날 수 없다. 함께 따라가겠노라고 마구 졸랐다. 너무 애같은 행동이라 맘에 걸렸지만 오늘 따라 언니는 너무나 파랗고 긴 치마를 입고, 긴 머리카락도 샤라락거려 더욱 더 따라가고 싶었다. 그래서 현관에 선 언니의 치마자락을 꼭 붙들고 놓지 않았다. '오늘따라 왜이래.' 지켜보던 엄마가 의아해했다. 언니도 처음엔 곤란해 했지만 표정이 데려갈까 변하고 있길래, 때를 놓칠세라 얼른 언니 다리를 꼬옥 안았다. 그러자 언닌 내 팔을 풀고 가만히 눈 앞에 마주하고 앉아 '그렇게 가고 싶어' 묻는다. 나는 끄덕끄덕 거렸고 언니는 미소를 보일듯 말듯 지으며 대답 대신 내 손을 잡았다.
불고기 먹으러 갈거야 그리고 노래방에 갈거고, 이왕 따라가는 거니깐 얌전히 있어야 돼 맛있게 먹고 노래도 마음껏 부르고 재밌게 보내야지. 알았지? 언니는 또각또각 걸으며 잡은 손에 힘을 꼭 주고 말을 했다. 손에 피가 안 통할 것 같이 너무 아파서 나는 그냥 나에게 하는 말이 아니네 대답해 주지 않았다.
멀지 않은 곳에 고기를 굽고 먹고 마시는 시끌법적한 식당에 도착했다.

영선언니와 홍현오빠가 안쪽자리에 나란히 앉아 있다가 똑같이 손을 들어 보였다. 언니는 그제야 내 손을 놓고 '가자'했다. 신발을 벗고 몇몇 무리를 지나 자리에 앉았다.

"많이 기다렸어? 미래가 자꾸 따라오려고 해서"
"괜찮아. 괜찮아. 미래야 어서와. 파란 머리삔했네. 예쁘다."
영선언니는 빨간 얼굴을 하고선 들었던 손을 내릴 생각도 않고 자꾸 팔랑팔랑 흔들며 말했다.
고깃집에선 시시했다.
사람들이 너무 많고 시끄럽고 불고기는 너무 달고 달았다. 영선언닌 계속 머리삔 예쁘다 예쁘다 양념이 묻은 손으로 자꾸 내 머리를 만졌다. 언니랑 홍현오빠는 말없이 고기를 굽고 잘 먹지도 않으면서 번갈아가며 맛없는 고기를 몇번이나 내 쪽으로 밀어줬다.
"언니 노래방 언제가?"
얼른 노래방에 가고 싶었다.
오늘은 꼭 '세일러문'노래를 부를것이다. 요사이 개미만큼 놀아주던 언니가 실로폰을 치며 가르쳐 준 유일한 노래다. 제대로 불러보리라 단단히 다짐을 했다. 
드디어 노래방에 왔다.

그런데 나는 왜 언니가 노래를 부르지 않을까 점점 궁금했다. 우리 언니는 내가 들어도 노래를 아주 잘 부른다. 목소리가 깨끗하고 맑고 참 듣기좋다. 어떤 노래를 부르든 진지하게 듣는 사람을 끌어당기고 집중하게 만든다. 그런 언니가 왜 노래를 부르지 않을까. 대신 영선언니는 고기먹을 때부터 너무 명랑하고 많이 웃더니 마이크를 잡으면 서너곡은 기본으로 부르고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기,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기. 꽥꽥 큰소리로 노래부르기. 정신없었다. 노래라기보다 거의 고함이나 비명처럼 들렸다. 그래도 홍현오빠는 두곡을 불렀다.

영선언니가 계속 마이크 주인처럼 굴며 내게는 주지 않자 파란머리핀을 신경질적으로 확 잡아빼서 호주머니에 숨겨버렸다. 우리 언니는 고깃집에서부터 유난히 조용하더니 노래방에서도 계속 조용했다.
"나갈래"
한참을 방방 뛰고 소리치며 노래하던 영선언니가 갑자기 노래를 뚝 정지시키고 휘적휘적 나가버렸다. 뒤이어 홍현오빠가 조용히 일어났다.

그리고 나가려다말고 언니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언니의 어깨를 톡톡쳤다. 언니가 '응?' 고개를 들다 홍현오빠의 눈과 마주쳤다. 싸악 굳어진 언니가 무섭게 보였다. 오빠는 미안한 듯 할 말이 있는 표정으로 잠시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
바로 그때 밖에서'우당탕' 큰소리가 나고 비명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높아진 영선언니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홍현오빠는 말을 접고 그대로 달려나가버렸다.
오분쯤 정적이 흘렀을까. 먼저 나간 영선언니와 홍현오빠의 목소리가 멀리 어른어른 들려왔다. 그때까지 입도 방긋하지 않고 돌처럼 앉아 있던 언니가 길고 낮은 한숨을 푸우 쉬었다. 그리고
"노래 부르자"
나를 보며 말했다.
"나 세일러문 노래 부를래. 번호 눌러줘 언니."
언니는 내 말은 들은 체도 않고 꾹꾹 번호를 누르고 혼자 노래를 부르기 시작해 자꾸 부르고 또 불렀다. 아프다고 말하면 정말 아플것 같아서..심장이 없어.. 뭐 이런 재미없는 노래를 나를 무시하고 순전히 혼자서만 자꾸 불렀다.
"언니! 세일러무우운!"
나는 화가 나 마이크를 쥔 손을 잡아 흔들었다. 그제서야 언니는 노래를 끝내고 세일러문 노래를 눌려줬다.
"미안해. 솔직하지 못한 내가 지금 이 순간이 꿈이라면 살며시 너에게로 다가가 모든 걸 고백할텐데. 전화도 할 수 없는 밤이 오면 자꾸만 설레이는 내 마음.
동화 속 마법의 세계로 손짓하는 저 달빛. 밤하늘 저 멀리서 빛나고 있는 꿈결같은 우리의 사랑. 수없이 많은 별들 중에서 당신을 만날 수 있는 건 결코 우연이라 할 수 없어. 기적의 세일러문"
나의 노래를 가만히 멍한 눈으로 듣던 언니가 갑자기 두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고개를 숙였다.
"언니. 잠와?"
언니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언니이이. 뭐해."
언니의 얼굴을 가린 손밑으로 억지로 머리를 넣어 올려다보았다. 이마 위로 미지근한 물방울이 착 떨어졌다.
"언니 울어? 왜? 왜울어?"
내 말이 끝나자, 곧 언니의 얼굴이랑 어깨가 조금씩 흔들리며 손바닥 너머로 엉엉엉 큰소리가 새어나왔다. 
"왜그래 언니 무서워. 왜 울는거야. 이제 노래 안부르면 되잖아! 언니가 많이많이 다 불러!"
빰빠밤 빰빰빰빰빠밤 팡파레가 언니의 울음을 감싸고 크게 쩌렁쩌렁 울렸다. 세일러문노래는 90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