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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리통

  • 작성일 2008-10-31
  • 조회수 391

검은 개 한마리가 으르렁 거리며 다가온다. 하얀 이빨과 새빨간 혀의 대조가 눈부시다.순식간에 크게 도약하더니 내 왼팔을 콱 문다. 넘어진 몸 위로 개의 새끼들이 와글와글 몰려든다. 맨숭한 개의 발바닥이 여기저기 발자국을 남긴다. 어딘가 물렸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감각'은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꼬집어말할 수 없는 간지러움만이 유일한 느낌이다. 몸을 일으켜 개들을 털어내본다. 개들은 까만밍크코트처럼 털을 세우고 주렁주렁 매달려있다. 한마리를 손으로 집어 떼어내자 어느새 양순한 토끼로 변해 품에 안긴다. 보드라운 털에 얼굴을 묻는 순간 날카로운 발톱으로 가슴을 할퀴고 도망간다.

 

시계를 보니 새벽 2시 41분이다. 잠이 든지 2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 오른손은 아랫배 위에 놓여있고 왼손은 머리 뒤쪽에 눌려있다. 머리와 바닥사이에 물린 꼴이 되어 저린 팔에 감각이 없다. 무감각한 팔을 나무막대기를 들듯 오른손으로 잡고 아래 위로 움직이자 지릇지릇한 간지러움이 팔 전체로 번진다. 팔이 정상으로 돌아오자 이번에는 배가 문제다. 망할 개새끼가 배 아래쪽을 잡아뜯었는지 살살 아프고 허리도 뻐근하다. 몸을 곧게 뻗은 채로 통증에 정신을 집중하자 아랫배 한쪽에 송곳으로 툭툭 치듯 얄팍하고 근지러운 감각이 응축된다. 찌르는 감각은 시계 초침의 속도로 탁.탁.탁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고통을 조절한다.  

 

-2시 45분 53초에 일어난 일

 

53.2초 :

사무라이 백은 나를 부모의 원수로 여긴다. 무력하게 누워있는 나를 보며 씩 웃는다. 이제 당할 차례야. 눈으로 말한다. 달빛을 받은 칼이 예리하게 빛나며 내 배에 푸욱 꽂힌다. 배에 꽂힌 것은 기다란 바늘하나다. 배꼽 아래 10cm를 조준한 바늘이 엉치뼈까지 단숨에 꿰뚫는다.  

 

53.6초:

백은 확인사살을 하듯 바늘머리를 온 힘을 다해 눌러대더니 조금씩 애태우듯 잡아뺀다.

바늘이 빨판처럼 달라붙는 연한 살을 밀쳐내고 핏물이 밴 맨질한 끝을 드러냈을 때, 처음으로 생명을 앗아간 무기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53.9초:

피가 돌고 살들이 엉겨붙어 배의 구멍이 매워진다. 고통은 구멍과 함께 서서히 사라진다. 백의 얼굴은 슬픔으로 일그러지고 그 슬픔에 나는 안도감을 느낀다. 그러나 여전히 구멍 사이로 시린 바람이 분다. 백은 웃고 있다.

 

- 2시 45분 54초에 일어난 일 : 사무라이 백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1초간격으로 고통은 강화되고 약화되며 얼핏 무감각한 순간도 온다.

사무라이 백은 어느 순간 이가의 얼굴로 바뀐다. 젠장, 부두인형이라도 하나 만들어놓고 있는건가.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8:30

 

눈을 뜨니 방안이 환하다. 몇 번 눈을 깜빡거리다 얼핏 시계를 보니 8시가 넘었다. 그럴리 없는데. 오늘 휴일인가. 중얼거리다 일어나 앉는다. 아무래도 믿을 수가 없다. 나 지각한건가. 번개가 치듯 정신이 들었다. 허겁지겁 옷을 주워입고 내달렸다. 꿈이라면 얼마나 좋을까하면서. 결국 생리때문이다. 그리고 알람때문이다. 하필 이럴 때 고장날 게 뭐람. 평소보다 15분 절약했으나 30분 지각이다.

 

9:30

 

이가가 말없는 비난의 눈초리를 던진다. 모른 척 가방을 정리한다. 옆자리의 김가가 안부를 묻는다. 생리때문에. 또 아파? 어차피 한 달에 한 번이니까. 진지하게 병원에 가라고 하지만 현대의학의 힘을 빌리든, 한방의학에 기대든 효과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고, 여전히 앙금처럼 긴 고통만이 일정했다. 너만 아프니? 한마디 쏘아붙이는 이가한테 한마디 해주고 싶었다. 너때문에 잠설쳐서 그래. 위로 치켜올라간 눈은 역시 사무라이 백이다. 칼을 들고 설치는 사무라이 이가의 모습을 상상하자 진정으로 오싹해졌다. 뭐하냐는 듯 흘겨보는 그녀를 향해 비굴한 웃음을 짓는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10: 30

 

슬슬 입질이 오기 시작했다. 피라미들이 자궁근처에서 살을 뜯어먹고 있는 기분이다. 몇 마리라도 죽여 없앨 듯이 다소 비장한 마음으로 아랫배를 힘주어 누르자 통증이 감소되는 듯 하다가 손을 떼면 지르르하게 연약하고 끈질긴 생명체의 움직임이 느껴진다. 손가락 사이로 얍삽하게 빠져나가는 물고기의 꼬리를 잡아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 나무토막에 손가락 하나로 구멍을 내는 기인처럼, 손끝으로 물이 가득한 항아리를 부숴버리는 쿵푸도사처럼 날렵하고 단단하게 단련하지 않는다면. 김가가 나를 보더니 안됐다는 듯 슬몃 미소를 짓는다. 남자인 그로서는 생리통이 어떤 것인지 짐작조차 못할 것이다.

 

초경은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평소처럼 사방으로 뛰어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몸이 살짝 쑤셨다. 공을 가지고 뛰다 흙바닥에 무릎을 긁어버린 터라 그 때문이라 마음편히 여겼다. 요의를 느껴 서둘러 집으로 뛰었고, 문득 아랫도리가 축축했고, 팬티에는 검붉은 것이 묻어있었다. 피라는 것을 알았지만 놀라지 않았다. 아, 그런가보다 했을 뿐이었다. 성교육을 따로 받지는 않았지만, 책을 통해 생리를 알았고, 초경을 하며 죽을 병에 걸린 줄 알고 울고불고했다는 사례를 읽고 참 바보같은 애도 있다며 비웃었다. 그 이후, 한 달에 한 번 못 먹을 것을 먹은 것처럼 배가 아팠다. 나는 불규칙적으로 엉겨붙은 시뻘건 피의 기둥이었다.

 

10:40

 

결국 의자를 밀어넣고 보건실로 향했다. 복도는 길었고, 미로처럼 구비구비 엉겨있었다. 내 내장들도 이렇게 비틀리고 꼬여 피를 뿜어줘야 할 곳에 뿜을 줄 모르고, 엉뚱한 데서 당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보건실의 낡은 초록문처럼 내 피도 퍼렇게 녹이 슬어 콱 죽기 직전인걸까. 간호사는 좁살만한 돌맹이들이 가득 들어있는 찜질용 팩을 건네준다. 보온기에서 막 나온 돌들은 부대낄때마다 뜨끈한 숨을 내뱉었고 햇빛이라도 먹은 양 누랬다. 하얗고 차가운 몸뚱이에 닿은 팩은 맥을 못추고 식어갔고, 물색없이 경쾌한 돌맹이들만이 좋다고 서걱서걱했다. 간호사처럼 단정한 모습으로 개켜진 이불을 펼쳐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이불 밖으로 겨우 얼굴을 내밀고 나니 옴짝달싹 못하고 변태만 기다리는 번데기가 된 것 같았다.

 

하얀 양호실은 학창시절 단골 장소였다. 한 달에 꼭 한 번 들르곤 했던. 그러나 보통은 나보다 먼저 온 학생이 하나뿐인 침대를 차지하고 있었고, 그녀들이 코를 골며 숙면을 취하는 동안 보건실처럼 하얘진 나는 의자에서 벌벌떨며 기다리곤 했다. 이제나 저제나 앞차가 출발할 때까지 한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는 뒷차의 무명人처럼. 다섯달만에 최고로 아팠던 98년도 9월, 몇 번이나 계단을 헛짚으며 양호실에 도착했던 28일 오후. 수능을 앞둔 고3 대선배가 생리중이라며 간발의 차로 먼저 도착해있었다. 나는 꺼져가는 불씨처럼 메말라 약을 달라했고 평생 생리통이라고는 겪어본 일이 없을 것 같은 양호선생은 약이 하나밖에 없다며 지극한 고통 앞에 선후배를 따졌다. 먼저 온 순이라 하면 억울함이나 덜했을 것을, 선생은 굳이 '선배먼저'를 무슨 공약 세우듯 기계적으로 발음했고, 순간 꺼져가는 불씨에 기름이 붙어 아래로 철철 흐르는 피를 한움큼 집어던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누렇고 퉁퉁한 얼굴위로 시뻘건 핏덩이가 더덕더덕 붙은 상상을 하며 약을 기다렸다. 1분을 백만초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을 그 때 처음 알았다.

 

10: 50

 

진통제를 받았다. 하얀 알약은 겉면만 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다. 입안에 던져넣고는

야금야금 씹어먹는다. 단단한 몸체가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신경세포에 달라붙는다. 먼지처럼 풀풀 쓴 내를 풍기며 서서히 세포를 마비시킨다. 고통도 마비된다. 몸을 끈질게 잡아당기던 자력이 사라졌다. 이제 청산을 날아다니는 한마리 나비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고통 뒤에 찾아오는 無통의 상태. 그러나 고통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 것을 안다. 다만 내가 '느낄 수 없을'뿐이다. 나는 속고 있는 것이다. 하얀 알약에. 그래서 사람들도 '하얀약'을 먹는 걸까. 고통을 잊기 위해.

 

김가는 회사동기다. 땅딸막한 키에 후덕한 외모는 부장님의 포스를 풍겼고, 곧잘 우스개소리를 하는 통에 부장님,부장님 놀리며 금세 친해졌다. 그는 나보다 불과 3살 위다.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많이 해서 경박해 보이기도 하지만 알고보면 푸른 산처럼 싱그럽고 바다처럼 깊은 사나이. 그 사나이는 내 맘에 쏙 들었다. 매달 오는 불청객에 대해서도 편하게 얘기할 만큼 하늘처럼 탁 트인 사나이. 더운 여름, 달리는 차안에서 그와 난 우리의 인생에 대해 이야기했다. 생리 둘째날이었다. 패드에 쓸린 피부가 따갑고 간지럽고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혹여 냄새날까 창가쪽으로 바싹 붙었다. 그는 그날따라 말이 많았고, 묻지 않은 일들까지 다 말하고 죽을 것처럼 토해냈다. 그의 혀가 바싹 말라 가뭄든 논처럼 쩍쩍 갈라지는 상상을 해본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비의 신이 내린 듯 축축했다. 나 했었어. 아랫배가 살살 아파지려던 찰나, 그는 나 밥 먹었어, 나 똥눴어, 나 친구를 사귀었어. 와 같은 울림으로 말했다.

 

뭐? 당황한 내가 되묻자 그는 태연한 얼굴로 '미국에 있을 때 해봤었다구,지금은 아니구' 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우리는 친한 동료이지만 묻지 않은 자신의 치부를 말하기에는 먼 사이였다. 상식을 벗어난 일을 할 때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물끄러미 그를 보자 음영을 드리운 옆모습이 생경하다. 미국에서 대학까지 나온 그는 그곳이 너무나 좋았단다. 파티에 어울려 다니다 우연히 약에 손을 댔고, 한번 하니 계속하게 되었고, 그러다 중독이 되었단다. '천국은 어떤 곳일까' 그의 얼굴에는 아무 표정도 없다. '나는 약을 하면서 그런 종류의 쾌락이 있는 줄 처음 알았어. 그런데도 끊을 수 밖에 없었던 건 쾌락만으로는 살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야. 나는 거의 미쳤었지만 지금은 여기 있어' 뒷말을 묘하게 끌며 그는 웃었다. 그것은 무대 위에 홀로 남겨진 광대의 웃음이었다. 지금은 여기 있어라고 입 속으로 따라해보았다. 그는 슬펐던 것일까. 천국의 쾌락을 느꼈으나 그것을 고스란히 반납할 수 밖에 없었던 그는 그 후로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그의 내면에 도달할 수 없었기에 그는 그저 미친놈처럼 광대노릇을 해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무엇을 알 수 있었을까. 우리는 '지금 여기 있는 것'에 안도와 비애를 느끼며 밤의 도로를 지구끝까지라도 달릴뿐이었다.

 

11:20

 

배가 쑥 꺼졌다. 살살 만져보니 동그랗게 들어간 모양이, 이제 용암이 다 흐르고 그다음 폭발을 기다리고 있는 분화구 같다. 분화구 주위에는 구멍 숭숭 뚫린 새까만 돌들이 굴러다니고, 그 틈에는 슬며시 노란 유채꽃이 피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제주도를 떠올리고 있었나보다. 유채꽃 사이에 누워 재들을 떨어내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해본다. 문득 김가의 물음이 떠올랐다. 천국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냐고. 격심한 고통 끝에 찾아온 꽃같은 평화. 고통은 소나기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것을 견딘 사람만이 맞이할 수 있는 눈부신 하늘. 그러나 생리의 나쁜 점은 원하든 원치 않든 겪어내야 한다는 것이고, 그 고통 역시 견디지 않을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대학생이 되면서 생리통을 견디기가 더 힘들어졌다. 매 수업은 학점과 연관이 되었고, 소규모 클래스는 몰래 빠질 수도 없었다. 약을 사려면 학교 밖까지 30여분을 걸어 나가야했고, 편하게 누울 만한 공간조차 없었다. 뚱한 얼굴의 양호선생이 그때만큼 보고싶은 적도 없었다. 유일하게 위안이 되는 공간은 화장실이었다. 반평도 안되는 자그마한 공간은 아무도 터치하지 않는 나만의 것이었다. 문을 걸어잠그고 1시간이든 2시간이든 통증이 가라앉을 때까지 바닥에 앉아 버텼다. 더러움도 대기자에 대한 조바심도 느낄 수 없었다. 나는 그저 네모난 공간 한 구석에 몸을 의지하고 가쁜 숨을 내쉬는 피난민이었다. 화장실 신세를 면하게 된 것은 2학년이 되면서부터이다. 든든한 남자친구가 생겼다. 지방에서 올라온 남자친구는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차고 더러운 화장실 바닥보다는 폭신한 침대쪽이 고통을 참는데에 좋았다. 이불을 뒤집어 쓰고 누워있으면 풀죽은 얼굴로 손을 꼭 잡아주던 그. 손이 참 따뜻했다. 고통이 다하면 그가 만들어놓은 죽을 먹었고, 늦게까지 TV를 보다 역까지 함께 걸었다. 고통은 나누면 줄어든다는 사실을 새로 안 기분이었다. 그때까지 내게 생리통은 오로지 혼자서 감내해야 할 고통이었다. 집에서 자다가 새벽에 배가 아파 일어나는 날이면 혼자 일어나 약을 먹고 손을 따보기도 하고, 방을 서성대다 겨우 잠이 든다. 지하철을 타고가다 아프면 역무실에 신세를 지기도 한다. 학교에서 아프면 양호실에서 끙끙 앓는다. 그러나 누구도 고통을 함께 하지는 못했다. 찬 손을 자기 손에 넣어 부벼주던 그는 자신이 그 아픔을 알 수 없어 초조하다 했다.

 

11:30

 

자리에서 일어나 신발을 꿰어신는다. 구겨진 이불을 대강 구색만 맞추어 접어놓는다. 거래처에서 오전에 방문전화를 한다고 했는데 미처 신경쓰지 못한 것이 걸렸다. 이가의 눈초리를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다. 아프다고 한 것을 엿들었을 테니 심하게 뭐라 하지는 않을 거라고 편하게 생각해본다. 나보다 1년 먼저 들어온 이가는 싹싹하고 일잘하는 여자로 평판이 좋다. 그러나 유난히 나한테는 까탈스럽게 군다. 웃으며 넘기는 것도 한두번이지 별 시덥잖은 것으로 시비를 거는 것은 못 참아줄 지경이다. 아니, 이제 안 참을 거다. 선배도 선배나름이다! 올 때는 길었던 복도가 시원하게 뚫린 도로처럼 편안하다. 햇살이 좋다. 눈을 감으면 나무사이로 햇살이 비쳐드는 숲을 걷는다고 해도 될 것 같다. 아, 고통없는 세상은 이렇게나 아름답구나.

 

회사에 들어오기 전, 여기저기 면접을 보러 다녔다. 평소 관심이 많던 NGO기구 중 하나에 원서를 냈고 드디어 면접을 보러가는 날. 컨디션이 안 좋더니 해당 역에서 고통이 극에 달했다. 면접장까지는 역에서 도보로 20분 거리였고 간다고 해도 말한마디 할 수 없을 것 같았다.벽을 짚고 역무실까지 가, 쇼파에 웅크리고 누워 내내 울었다. 나는 왜 이리 속수무책인가. 그 다음 면접이 현재의 회사였다. 일도 보수도 만족스럽다. 서글픈 광대 김가도, 시어머니 이가도 모두 좋은 동료. 남자친구와는 그 후로도 5년을 사귀다 헤어졌고, 나에게는 이제 따뜻한 손대신 다정한 간호사가 있는 하얀 보건실이 생겼다. 마음만큼 예쁜 얼굴의 간호사와는 종종 함께 밥을 먹는 사이가 되었고 보건실은 아플 때뿐만 아니라 피곤할 때, 농땡이를 부리고 싶을 때 들르는 단골장소가 되었다. 그녀는 하얀 계란형 얼굴이고, 선후배를 가리지 않으며, 자리가 없다고 의자에서 대기하게 놔두지 않는다. 보건실에는 비상용 침대가 뒷 창고에 숨어있으므로. 침대에 누워 홀로 아픔을 참을 때면 커튼 너머로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는 그녀의 실루엣이 비친다. 그러면 나는 위안을 얻게 된다. 커다란 손이 전신을 감싸주는 나른한 안도감. 하얀 알약들은 가루가 되어 심장박동을 따라 전신으로 퍼지고 사부락대는 찜질팩을 만지작거리면서 어느새 나는 잠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