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솟대

  • 작성일 2008-11-12
  • 조회수 338

 

솟대 


햇살이 비스듬히 창을 비추고 있다. 몇 번이고 뒤척이다 일어나 베란다 문을 열자 공기가 싸하게 밀려온다. 하늘은 차고 시린 표정을 짓고 있다. 이불을 털어 침대위에 가지런히 펼쳐놓고 핸드폰의 시간을 보니 7시다. 매신저를 닫고 휴대폰을 받지 않자 밤새 그가 보낸 문자가 13통이다. 수신문자를 열어보려다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서 전체 삭제버튼을 누른다. 엄마가 남긴 쪽동백나무로 된 솟대가 TV위에 앉아 나의 이런 행동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삼우제를 지내고 가방을 꾸리고 있을 때 오빠가 따로 싸 주었던 것이다. 문득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눈물이 나오지 않아 스스로 무안해하던 뫼르소가 생각난다.

“어무이가 정 뗄라꼬 그라는 갑따.”

오빠는 발인까지 미동 없이 앉아 있던 내게 말했었다.

“그래도 오는 손님들도 있고 한데 넘 보기에도 좀 그렇다 아이가.”

올케는 입을 삐죽거리며 나대신 오빠에게 쏘아 붙였다.

“서울 있을 때야 그렇다치지마는 거기서 울산이 머 짜다라 멀어싸서.....”

“......”

“이 만치 살아도 내사 이런 모녀지간은 첨 본다 카이”

“고마해라!”

오빠가 낮은 목소리로 나무랐다.

“형제끼리 서분한 것도 오늘 같은 날은 다 이해하고 마음을 모아야 할 판에 아즉 어무이 초상도 안 �는데......”

그때 이모가 국물이라도 뜨라며 가까이 오지 않았더라면 또 무슨 말들이 오고 갔을지 모를 일이었다. 쌀쌀맞고 정 없는 시누이에게 질렸다던 올케는 서럽게 목을 꺾고 울다가도 장의사가 오자 제반용품에 대해 흥정을 맡아했었다. 하긴 물러터진 오빠에게 맡겼다간 된통 바가지 쓸게 분명했으리......

어제저녁 아파트 구석구석을 대청소 하느라고 무리했던 것일까, 어깨와 허리가 ‘끙’ 하고 신음소리가 나올 정도로 뻐근하다. 겨우 일주일동안 비워두었는데 온통 먼지가 버석거렸다.

여전히 향냄새가 배여 있는 것 같아서 다시 샤워를 한다. 바디샴푸거품을 씻어 내리는 물줄기가 몸을 타고 내린다. 봉긋해진 가슴과 살이 오른 듯 허리선 전체가 통통해져 있다.

벌써......


“우리병원엔 처음 오셨나요?”

접수처 여직원이 무표정하게 물었다. 그녀의 말투는 얼굴에 보송보송한 솜털이 가시지 않은 얼굴과 대조를 이룬다.

“네”

“여기다 이름하고 주민등록번호하고 기록해주시죠.”

그녀는 명함크기만한 쪽지를 내밀곤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 좀 전에 하던 자료를 출력하기 시작한다. 의료보험증을 일부러 안 가져왔는데 이렇게도 진료카드가 작성해지는가 보다. 혼자 산다고 해서 부인병질환이 오지 않는 건 아닌데 보험증 비고란에 XX내과라든지 치과 따위 보다 어쩐지 산부인과방문내역이 적히는 건 그랬다. 요즘은 시어머니가 며느리한테 출산 장려금을 지급해야한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지만 이 병원은 이른 시각인데도 온통 임산부로 벅적인다. 조금 전 또 문을 밀고 들어 온 청바지를 입은 단발머리여자는 아랫배가 도톰하게 솟아오른 걸 보니 임시 4개월쯤 된 것 같다. 스물서너 살쯤으로 보이는데 같이 온 남자는 삼십대 중반쯤으로 보인다. 그녀가 신발을 질질 끌며 화장실 쪽으로 가는 사이 남자가 대신 접수를 한다. 씨름선수 같은 그의 덩치에 가려 접수처여직원이 보이지 않는다. 예정일이 경과하면서 내 몸은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우선 유방이 커지고 아랫배도 단단해져오는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돼지고기와 관련된 간판만 봐도 속이 울렁거리는 것이었다. 손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열어본다. 포기를 한 건지 K에게서 더 이상 문자가 없다. 그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출근을 했을 것이고 회의를 주재할 것이고 담배를 물고 서서 탁상용 다이어리에 오늘 처리해야할 일들을 적고 있을 것이다. 며칠째 매신저가 꺼져있고 문자의 답을 보내지 않는 나에 대해 어떤 상상을 하고 있을까, 나는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을까......


“최대리! 포스사에 제출하는 견적서는 어떻게 됐소?”

2년 전 본사에 있던 부서가 통합되면서 울산지사로 내려와 처음 맡았던 보직의 부서장이 그였다. 생활해야 할 오피스텔을 구하는 것도 그렇고 갑자기 바뀐 환경과 업무파악 하느라고 정신없던 사이 이틀 전 그가 내린 지시사항을 깜박 잊고 있었다.

“예, 오늘 중에 작성해서 결재 올리겠습니다.”

“그것 작성하는데 몇 시간이 걸리나? 이미 결정되어 있는 우리 단가를 그냥 리포트해서 공문으로 작성하면 되는 거 아니가? 아무것도 모르는 중학생에게 시켜도 벌써 해치웠겠다. 이 사람아!”

“죄송합니다.”

“일이 싫거나 적성에 맞지 않으면 그냥 조용히 집으로 가라. 여기 있는 사람 모두 마찬가지다. 자신과 코드가 맞지 않은 회사면 당연히 나가야 하고... 더구나 자신의 능력이 따라가지 못하면 최소한 동료들을 위해서라도 그만둬야 하지 않겠나?”

새로 전입한 여사원의 실수가 회의분위기를 망쳐놓은 것 같아 몸 둘 바를 모르겠는데 끝내 그의 입에서 확인 사살하는 말이 터져 나왔다.

“부장님이 얼마 멋있는 분이신지 겪어보면 알게 될 거요.”

모두들 상기된 표정으로 회의장을 빠져 나가고 혼자 멍하니 앉아있는 나를 보고 황과장이 다가왔다.

“그나마 우리 남자직원들과 동등하게 대우한다는 의미 아니겠소. 최대리를 여사원으로만 취급했더라면 그런 말이 나왔겠소?”

그가 내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했지만 어쩐지 나이 많은 여직원이니 사표를 쓰라는 말로만 느껴져서 서럽기도 하고 실제로 그의 의중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 무렵 더 이상의 변화가 두려워 울타리를 치고 그 속에 갇혀있던 나는 곁에 아무도 없다는 것에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직장은 희망이고 연인이었다. 몇 주일을 배려다 그에게 퇴근 후 업무상담 형식의 만남을 요청했다. 도로에 빼곡히 주차된 차 때문에 겨우겨우 운전해서 찾아간 곳이 시내 일식집이었다.

“식당이 주차장에서 좀 멀지요?”

 방에 난 창을 통해 나를 내려다보고 있은 듯 물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그가 말했다. 나는 고개만 까닥했다.

“시골이라 답답하기도 할 것이고......”

“아니요, 오히려 잔잔해서 참 좋습니다.”

“그렇담 다행이고......”

“서울생활은 늘 쫓기죠.”

그때 아오자이 같은 옷을 입은 여종업원이 오자 내게 물어보지도 않고 메뉴를 주문했다. 그는 푸른빛이 도는 와이셔츠에 옆선이 그어진 푸른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평소생활에서는 부하 직원에게 그렇게 모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치곤 너무 조용한 성격이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더니 나보다 겨우 네 살 연상인데도 침착하고 알 수 없는 기품이 서려있었다.

“현재 우리부서에서 어떤 문제점 같은 거 발견했소? 허심탄회하게 말씀해보시오.”

“분위기야 무척 인간적인 것 같습니다. 모난 성격을 가진 분도 없는 것 같고......”

“조직이 유지되려면 그게 기본이 되어야 하지 않겠소.”

“오늘 뵙고자 한 것은......”

그는 손을 닦던 물수건을 오른쪽에 가지런히 놓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물론 실수했던 부분은 인정합니다.”

그는 다시 ‘그래서?’하는 표정을 지었다.

“작은 의미로는 제 개인적인 일로 치부될지도 모르겠는데요, 아무리 상사라도 아랫사람에게 할 수 있는 말씀이 따로 있고 ......”

“견적서일 말인가?”

“네, 그날은 솔직히 잠을 잘 수 없었던 만큼 자존심 상했습니다.”

“최대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는데 내가 여직원을 받지 않으려고 하는 이유가 그것이란 말이오. 사내놈 같으면 술 한 잔하고 맞담배 피우고 나면 끝날 일을, 그래 그동안 속이 쓰려서 무척 고생했겠구먼.”

그는 백포도주 잔을 내게 내밀며 허허 웃었다.


“최수연님!”

하얀 가운을 입은 간호사가 내 이름을 부른다.

“상담실로 가시죠.”

그녀는 대기실 의자에서 일어서는 나를 발견하곤 손으로 방향을 가리킨다.

“최종 월경 시작일이 언제죠?”

혈압을 체크하고 나서 그녀가 진료카드를 책상위에 놓으며 말한다.

“지지난 달 23일요.”

“월경 주기는 정확했나요?”

“네, 그런 편입니다.”

“출산경험은?”

“임신초기에 유산한 적이 있습니다.”

그녀는 가족들의 병력과 혈액형과 키와 몸무게까지 꼼꼼하게 기록한다.

“오늘은 어떤 용무로 오셨습니까?”

“생리가 없어서......”

“남편과 관계할 때는 피임을 합니까?”

남편이라......

그녀는 잠시 말을 잊은 나에게 고개를 들어 다시 물었다

“관계를 할 때 피임을 하느냐구요.”

“주로 생리 주기를 이용합니다만.”

“만약 임신이라면 낳을 건가요?”

“그건...... 의논해야할 것.......”

“됐어요.”

그녀는 콧잔등으로 내려온 안경을 중지로 밀어 올리며 나의 말을 가로막는다.

“밖에 나가 오른쪽 복도로 돌아가면 3호실이 나오는데 진료실 앞 대기의자에 앉아 기다리세요.”

그리곤 이내 다른 사람의 진료카드로 교체를 한다. 3호실 앞에서는 빈 의자가 없어서 한동안 서 있어야 했다. 내 옆에서 겨우 걸음마를 뗀 꼬마가 만삭으로 아랫배를 손으로 감싸 안은 엄마의 치맛자락을 잡고 아이스크림을 물고 있었다. 어디선가 아빠인 듯 남자가 다가오더니 아이를 달랑 안곤 아이스크림이 흘러내린 손바닥을 씻기려 세면실로 데리고 간다. 곧 이어 50대 후반의 여자가 신경질적으로 걸어왔다가 탁자 앞에 놓인 신문을 휙 채가며 나를 힐끗 쳐다본다. 그리고 몇 걸음을 걷다말고 다시 돌아본다. 짙은 화장에 걸맞게 머리에 감고 있던 롤들이 부산스럽게 보인다. 그녀는 임신하기엔 아무래도 너무 늦은 나이 아냐? 하는 표정이다.


“어무이가 돌아가셨다.”

지난 금요일 둔탁한 오빠의 음성이 수화기속에서 들려왔을 때 잠시 멍한 상태가 되었다. 엄마는 고혈압으로 두 차례 고비를 넘겼다. 그러나 그때마다 오뚝이처럼 자리에서 툭툭 털고 일어나 자라나있는 흰머리를 염색하고 서랍장을 정리했다. 한 달 전 휴가를 받아서라도 꼭 다녀가라던 오빠의 전화를 받고 찾아갔을 때 엄마는 방안에서 나뭇가지를 잘라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

“엄지손가락 같은 이건 뭐유?”

“새 몸통이다.”

“뭔 새?”

“솟대라는 긴데 예전부터 소원을 담고 만들면 들어 준다 카는 기다.”

“엄마가 이제 와서 무슨 소원이 있어? 오빠도 그만하면 자리 잡았고, 손자 민우도 잘 크고......”

“갸들이사 부부지간 정이 도탑응께네 그렇지만......”

엄마는 새 몸통의 구멍에 본드를 넣었다.

“우짠지 니 키우는 기 그리 힘들더마는 이즉까지 ......”

“요즘은 돈만 있으면 좋은 세상 아니우, 내 걱정은 말라니까.”

“휴, 모르것따 인자 훨훨 날아서 내 가고 싶은 데를 갈 수 있을랑가도 싶고.”

“도대체 어딜 그렇게 가고 싶소?”

“내 마음 가고 싶은 데라 안카나”

엄마는 힘에 부치는지 사포위에 조각하던 칼을 놓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내가 방안에 어지럽게 널려있던 나무쓰레기를 치우는 동안 그냥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운제 갈끼고?”

“내일은 출근해야지......”

“주말에 또 올래?”

“못 와, 직원들과 등산 약속이 있어.”

“그래 재미있게 살아라.”

마치 유언처럼 엄마는 내게 재미있게 살라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다시 쓰러진지 사흘 만에 이승을 떠나는 배로 갈아타셨다. 엄마는 아주 가끔씩 외가댁으로 다니러 갈 때면 어린 나를 이웃집에 맡겨두고 언제나 단정하게 교복을 입힌 오빠만 동행시켰다. 성장기에 들어서기 전부터 오빠와 달리 나는 왜 엄마 성을 따라야하고, 기억에 전혀 없는 아버지는 누굴까 하는 의문이 자주 지치게 만들었다. 교과서를 읽으며 ‘아버지’라는 용어가 나오면 내 목소리는 기어들어가 모기만한 소리로 변했다. 알 수 없는 모멸감을 느끼게 하던 이모들의 수군거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유를 물어보기 전에 엄마와 나 사이엔 이미 절망적인 단절이 가로막고 있었다. 어쩐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만화방을 운영하던 엄마는 내가 어느 정도 자라자 화장품 외판원을 시작했다. 화장품이 가득 든 가방을 들고 가가호호 방문해 마사지도 해주면서 단골들을 만들어 나갔다. 저녁이면 마루에 걸터앉아 퉁퉁 부은 다리를 찬물에 담가 주물곤 했는데 한겨울에도 반드시 그렇게 식힌 다음 방으로 들어갔다. 중학교에 올라와 나는 생리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 팬티에 묻었던 거무스름한 흔적을 보고 낭패스런 표정을 짓던 엄마는 그 후로 사사건건 나에 대한 간섭을 하기 시작했다. 친구 집에도 가지 못하게 하고 더구나 해가 지고나면 어떠한 경우든 집 밖을 나가지 못하게 했다. 친구아빠든, 친구오빠든 다 도둑이었다. 심지어 선생님까지 믿어선 안 된다고 틈만 나면 얼굴을 바싹 들이대며 다짐 받았다. 여학교 때 생활복이라고도 했던 체육복은 흰 면바지였다. 등교를 하면 으레 생활 복으로 갈아입고 수업을 시작했다. 교실 뒤쪽 담장 안엔 주교관이 있었고 그래서 근처언덕은 학생들 출입금지 구역이었다. 우리는 또래의 신성한 비밀이나 고민이 생기면 선생님의 눈을 피해 주교관 담장을 사이에 두고 깔려있던 잔디밭으로 가곤 했다. 하루는 마당에서 빨래를 하다말고 엄마가 나를 불렀다.

“이거 어디서 묻은 거니?”

“이게 왜?”

“그러니까 왜 생활 복에 풀물이 묻어있냐 말이다 흙이라면 몰라도”

“아, 그거 잔디밭에 앉았을 때 묻었나보다 친구끼리 이야기하다 드러눕기도 하지 뭐”

“정말이지?”

“도대체 왜 그래!”

그날 취조하듯 묻던 엄마의 눈빛은 내가 생물학적으로 여자인 것에 대해 오래도록 모멸감을 느끼게 했다. 고2 초여름이 시작될 무렵, 엄마의 든든한 기둥이 되어주었던 오빠가 군에 입대를 했다. 매달 오빠에게 보내던 하숙비와 등록금을 마련하느라 허덕이던 엄마는 비로소 한숨을 돌렸다. 나 역시 이런 형편에 대학에 가선 무엇하나싶어 잠시 다른 생각을 하던 터였다. 화장대위엔 싸구려 스킨 로션대신 팔러 다니던 유명상품의 화장품이 놓이기 시작했다.

“수연아, 이뿌나?”

어느 날 저녁 엄마는 못 보던 연분홍색 블라우스를 받쳐 입곤 환하게 웃으며 내게 물었다.

“응 그렇게 입으니 우리엄마도 참 곱다.”

“오늘 화장품 팔러갔다가 품앗이로 하나 샀다.”

앞뒤로 비춰보며 몇 번이고 장롱 거울 앞으로 왔다 갔다 하던 엄마의 변화가 어쩐지 싫지 않았다. 나를 향해 그렇게 밝은 웃음을 보여 주었던 때가 언제 적이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 했다. 기숙사 뒤를 돌아가면 학교 일을 봐주던 소사아저씨 집 마당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 집 앞마당을 가로질러 골목을 빠져나오면 대로가 나오고 바로 마주보는 골목 안에 우리 집이 있었다. 간혹 준비물을 안 가져갔다든지 생리로 옷을 버리게 되는 등 급한 상황이 생기면 선생님의 눈을 피해 그 통로로 살짝 집에 다녀오곤 했다. 그날도 점심시간을 이용해 집에 갔을 때였다.

“이 개 쌍놈이 넘볼 걸 넘봐야지.”

찢어지는 엄마 음성에 동네아주머니들이 웅성거리며 우리 집 대문을 싸고 있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사람들을 비집고 마당으로 들어섰을 때 엄마는 수동이 엄마에게 두 팔을 잡힌 채 미친 여자처럼 씩씩대고 있었다.

“엄마 왜 그래.”

내가 울면서 엄마 앞으로 다가갔을 때 중절모를 쓴 남자가 상기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옷매무새가 좀 흐트러져 있었다.

"수연아 빨랑 학교가 얼릉”

나를 보자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던 엄마는 반 울음 섞인 목소리를 내며 퍼석 주저앉았다.

“네 이름이 수연이냐?”

남자가 내 이름을 부르며 다가오려 하자 엄마는 다시 결사적으로 내 앞을 가로막고 섰다.

"이놈이 지금 뭐하는 짓이고?"

엄마는 손톱을 앞세워 다시 그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도로가 점포에서 반찬가게를 하던 수동이아빠가 달려오고 그제야 구경하던 아주머니들도 같이 말리면서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그날 저녁 소식을 듣고 외삼촌이 달려왔을 때 엄마는 모로 누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일이 이렇게 크게 될 줄 몰랐다.”

“......”

“수연이가 이만치 클 때까지 지도 속이 있을 낀데......”

외숙모가 미음그릇이 얹힌 상을 놓으며 말했다.

“......”

“다시는 그런 일 없을 끼다 했응께 마음 풀고 한 술 뜨이소”

외숙모는 다시 엄마를 조용히 흔들었다.

“친정 피붙이는 다 싫소.”

서늘했던 엄마의 음성에 외숙모도 그만 움찔했다.

“니 또 그 얘기 할라꼬 그라나?”

“......”

“낼 모레 사위 볼 나이가 되어가지고 이제 와서 우짜란 말이고?”

“......”

“니도 어미가 되어봐서 알겠지마는 너를 그렇게 내쫓고 아부지 어무이 두 분 다 평생 한을 품고 살다 가셨다.”

“......”

“이제는 두성이도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니 주소를 가르쳐준 내 잘못이다.”

“그렇다고 해서 두성댁까지 알게 된 거는 아이고요, 그래도 핏줄인데 시포서.”

“시끄럽소, 누가 누구 핏줄이란 말인교 나는 종놈 자슥 낳은 적 없소.”

엄마는 벌떡 일어나 부르르 떨리는 음성으로 외숙모를 노려보았다. 외삼촌은 지쳤는지 그만 외숙모에게 일어서자는 눈짓을 했다. 젊은 날 대를 이어 외갓집에서 머슴살이하던 그 남자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이웃마을 초상집에 간 사이에 엄마를 범했다. 당시 엄마는 이씨문중으로 시집을 갔으나 남편을 병으로 잃고 젊은 과부가 되어 다섯 살 난 오빠와 함께 친정에 내려와 지내고 있었다.

“어떤 방법으로든 우리가문을 이길 수 없기 때문에 대신 나를 범했다고 하더라, 썩어 죽을 그놈이”

며칠 뒤 몸이 회복되었을 즈음 엄마는 나를 앉혀놓고 말했다.

“그 상황에서 놀랬을끼고 외삼촌이나 외숙모말을 듣고 니가 혹 소용돌이에 말릴까 싶어서 하지 말아야 될 말인 줄 알면서도 한다.”

“그 사람이 그럼 내 아버지란 말이야?”

“아니다! 그건 아니다 너는 내 자식이다.”

너무 단호하게 부인했던 바람에 그 다음에 내가 물어보고 싶었던 말까지 막혀버렸다.

“갈래머리에다 세일러복을 입은 너거 어매가 주말에 다니러 대문을 들어서면 꼭 천사 같았는기라.”

언젠가 다니러 온 외삼촌이 나를 무릎에 앉혀놓고 했던 말이 어린 내 마음에도 참 슬프게 들렸던 것도 후회스러웠다. 이번엔 엄마대신 내가 아주 오랫동안 몸살을 했다. 그 후로도 엄마는 그날의 사건과 관련해서 나에게 한마디도 꺼낸 적이 없었다. 아니 들을 기회가 없었는지 모르겠다. 서둘러 집을 내놓고 낯설기 그지없는 울산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나는 기숙사로 들어갔다.


“최수연님 들어오세요.”

간호사가 문을 반쯤열고 고개를 내밀며 내 이름을 부른다.

머리가 희끗거렸으나 선 한 표정을 가진 남자의사다.

“출산 경험은 없으시고......”

그가 차트를 들여다보며 말한다.

“태아가 몇 개월 때 자연유산이 되었나요?”

“3개월로 접어들 즈음요.”

“네, 임신 초기가 가장 위험할 때죠.”그가 자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10년이 지났는데 그동안 불임에 대해 치료를 받아 본적도 없습니까?”

“이혼한 후 최근에 재혼했습니다.”

나는 재혼이란 단어로 바꾸어 말했다.

“아,예.”

“혹시 임신 테스트를 해보셨습니까?”의사가 다시 묻는다.

“아니요.”

“그럼 일단 검사부터 해 보죠.”

사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구석의 옷걸이에 알록달록한 통치마가 걸려있다.

“아랫부분을 다 벗으신 후 치마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우세요.”

간호사는 대사를 외듯 또박또박 말한다.

“다리를 세우시고 벌린 상태에서 그대로 계세요”

훅 모멸감이 밀려온다.


남편은‘대불연’이라는 동아리 선배였다. 대학에 들어와서도 딱히 내 시선을 끌만한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저 하루하루 사는 것에 까닭 없는 회의를 느끼던 나는 학교게시판에 붙여진 ‘참 나를 찾아서’라는 문구에 이끌려 불교 동아리에 가입했다. 회원들은 방학동안 사찰에서 큰스님의 법문을 듣고 참선을 하는 등 수련대회를 통해 저마다의 정신적 자유를 갈구하고 있었다. 그러던 3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인간이 끝까지 파고 들어가 진실로 더 이상의 의심이 없을 만큼 해볼 만한 공부가 불법공부다.”

수련대회 마지막 날 1080배 철야정진을 앞두고 강주스님이 하신 법문은 내 귀를 번쩍 뜨이게 했다. 어쩌면 불법이라는 이 공부가 내가 태어난 의미에 대한 해답을 명쾌하게 풀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너는 도대체 개념과 사실을 혼돈 하고 있어.”

차츰 너무 빠져든다고 느꼈는지 동아리회원이던 남편은 내가 절에 너무 자주 가는 것을 염려하며 빠르게 다가왔다.

“산다는 것에 대해 의식이 생기고부터 내 삶은 유보되었어.”

“왜 그리 복잡하게 사냐. 모두 그냥이지.”

“그게 선배와 나의 차이야, 수수께끼 같은 이 불균형의 근원이 뭔지......”

“흘러가는 이 세상의 허상조차 여여 부동한 진실이라고 하지 않았니.”

마치 금방이라도 출가해버릴 것 같은 후배의 변화를 바라보다 도저히 안 되겠다고 여겼는지 그는 아예 적극적으로 나섰다. 내게 허용되어있지 않은 것을 포함해서 잃어버린 것 까지 채워주겠다고 했다. 남편 말대로 개념 속에 깊이 오염되어있었는지도 몰랐다. 나는 말없이 그의 선택을 따랐다. 거기에는 어떻게든 부자연스럽기 그지없는 지금의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있었다. 남편과 데이트 중에도 엄마의 감시망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리고 오래된 소설내용처럼 첫날밤이 되어서야 비로소 처녀를 벗어났다. 시트에 묻은 혈을 보고 남편은 상기되어 나를 꼭 껴안았지만 그것뿐이었다. 이상하게도 내가 엄마의 덫이 되었던 그 상황이 자주 꿈속에서 재현되었다. 섹스는 더러운 굴욕을 느끼게 했고 아픔과 두려움에 떨면서 지쳐갔다.

“다른 여자들은 남자들이 피곤할 만큼 그걸 즐긴다는데 당신은 왜 그래.”

“모르겠어, 나도 왜 그런지.”

“나를 거부할 때마다, 의무적으로 응해준다고 느낄 때마다 얼마나 비참한지 아나?”

“노력해볼게, 정말 미안해”

어느 날 그는 포르노 비디오를 구해왔고 그것을 본 저녁 나는 밤새 토해내고 앓아누웠다. 설상가상으로 3년 만에 가졌던 아이마저 임신 3개월 접어들 즈음 유산되었다. 차츰 남편의 귀가시간이 늦어지고 자주 바깥으로 돌기 시작했지만 밤마다 보채지 않는 그가 오히려 고마웠다. 가로수로 심어져 있던 벚꽃이 눈발처럼 날리던 어느 날 남편사무실에 경리로 근무하던 미스 조가 다방으로 나를 불러내었다. 여상을 다니면서 실습 나왔을 때 한 번 보곤 처음 이었다.

“제가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서 찾아왔어요.”

그녀의 표정이 너무 비장해서 오히려 긴장되는 건 나였다.

“사장님은 사모님보다 저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쌍까풀이 또렷해서 영리하게 생긴 그녀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사장님이 시켰니?”

“아니요, 사장님만 믿고 있다간 죽도 밥도 안 될 것 같아서요.”

“이제 갓 스물을 넘긴 네 나이가 아깝지 않니?”

“저도 사장님을 사랑해요, 그리고 지금 사장님 아기도 가졌어요.”

젊은 패기 탓일까 너무 당당해서 앞에 앉은 내가 주눅이 들 지경이었다.

“그럼 어떻게 해줄까? 집? 돈?”

“사모님은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왜 같이 살죠? 다 필요 없고 사모님이 이혼만 해주시면......”

나는 일어서서 그녀의 뺨을 강하게 한차례 때렸다. 가정이라는 울타리에만 집착하는 나에 비해 다 필요 없고 사랑만 원하는 당당함이 그토록 내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 그리고 남편을 떠나왔고 취직을 했다.


견적서사건 만남이후 k와 가끔 둘 만의 술자리를 가졌다.

“최대리 닮은 꽃이니 잘 키워보소”

어느 날 그는 연한 분홍색을 띈 작은 꽃 화분을 내게 내밀었다.

“예쁘네요, 얘 이름은 뭐죠?”

“노루귀라는 건데 햇볕을 싫어하지”

“저를 닮았다니 괜히 싫어지는 데요”

“그러나 이른 봄 얼음이 녹지 않은 추운 날씨에도 화사한 꽃을 피울 줄 아는 강인함이 있소”

그의 말에 괜히 서글퍼진 나는 스스로 내 잔에 술을 따랐다.

“세상엔 좋은 사람도 많은데 우선 본인이 마음을 열어야 하지 않겠소.”

그도 스스로 자기 잔에 술을 따랐다.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현생에 짊어져할 것들로부터, 운명 따위로부터 벗어나고 싶다고 말했다.

“안다는 것과, 체험하고 통한다는 것의 차이가 뭔지 아시오?”

“......”

“전자는 생각이 장난을 치는 것이고 후자는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이오.”

“그런 법칙과 제 삶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모르겠는데요.”

“당신은 설치된 무대와 각본에만 꺼둘릴 뿐 정작 본인이 주연배우란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잖소.”

역할에 속지 말고 주인공으로 존재하는 것 자체로 통해보라고 했다.

“헤매고 다녔지만 원래 그것뿐이오, 고귀할 수밖에 없는 당신의 본질”

“제 마음을 열기위한 연습 파트너가 먼저 필요 한데요 부장님”

그는 약간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내 육체에 대한 전속계약이 성립되지 않는 조건의......”

“흠......”

그는 허리를 곧추 세웠다.

술기운을 빌리긴 했어도 내 정신은 갈수록 말짱해졌다.

“내 앞에서 옷을 벗고 싶소?”

그가 다시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날 밤 우리는 같이 지냈다. 그는 결코 성급하지 않았다. 매 순간 내 감정이 정리되는 것을 지켜보며 기다릴 줄도 알았다. 나는 처음으로 거칠고도 깊게 남자의 몸을 탐닉해보기 시작했다. 그것은 당초 내 의도와는 달리 정신까지 묶어버리는 이상한 현상을 몰고 왔다.

“너를 사랑하지만 내게 있어 가장 최우선은 가족이다”

조금씩 만남이 잦아질 즈음 침대에 누워 내 머리칼을 쓸어주며 그가 말했다.

“그리고 네 선택에 대해서도 나는 바라만 볼 뿐이다.”

언제든 우리는 상대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그것은 나로 하여금 세속이 금그어놓은 제도적 기준에서 그다지 죄책감이 들지 않게 한 요인이기도 했다.


“임신은 아니군요.”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의사가 말한다.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거나 스트레스 때문에 생리불순이 오기도 하는데 그다지 염려할 사항은 못됩니다.”

그는 차트에 무엇이가를 기록하고 6개월에 한번 씩 정기검사를 하는 게 좋다는 말을 남긴다.

“주사를 맞으면 일주일 이내로 생리가 있을 겁니다.”

침대에서 일어나 몸을 추스르는 동안 의사도 검사실 안쪽에 나있는 간이 문을 열고 진료실로 돌아간다. 나는 옷을 갈아입고 계산을 하고 병원을 나선다. 간호사가 몇 차례 내 이름을 부를 것이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손님이 주사도 안 맞고 그냥 가셨다고 동료 간호사에게 말할 지도 모른다. 조만간 이곳이 정리되는 대로 나는 서울로 올라가게 될 것이다. 정신이든 육체든 깔끔하게 정리된 내 무대에서 유연하게 춤추는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것이다. 그리고 진짜 내가되어 날아보는 거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