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해지는 방법
- 작성일 2010-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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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그만두고 하루 종일 멍하게 드라마나 보며 반쯤은 방구석 폐인처럼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두달 전 헤어진, 정확히는 일을 그만두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내 심신을 잔뜩 괴롭히고 코 푼 휴지처럼 간단히 내팽개친 남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조금은 방심한 상태에서 연락이 온 탓일까, 아니면 길어지는 방구석 폐인 생활이 필연적으로 안겨준 외로움 탓일까. 어찌되었든 난 그 뼈째 발라 먹어도 시원치 않을 남자를 만나기 위해 꾸물꾸물 머리를 만지고 외출복을 꺼내 입고 화장을 하고서 정말 오래간만에 집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사실 약간의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좋은 여자였는지 드디어 깨달은 그 남자가 무릎을 꿇고 석고대죄 하는 건 아닐까, 어쩌면 그 일방적이었던 이별 선고 자체가 깜짝쇼여서 오늘은 그 결과를 아주 멋지게 선보이려는 속셈인 건 아닐까, 아니면 눈물로 보내야 했던 두 달 간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태연히 사랑한다고 말해주려는 건 아닐까.
갖가지 망상에 부풀어 그에 대한 여러 가지 감동적인 반응들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약속장소인 OO백화점 안 카페에 도착했다. 아직 남자가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우선 라떼 한 잔을 주문했다. 이곳의 라떼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 중 하나였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라떼의 향과 맛을 천천히 즐기며 남자를 기다렸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조금 헝클어진 머리도 매만지고 화장도 새로 고치고 옷매무새도 가다듬었다.
하지만 핸드폰 액정의 시계가 약속 시간으로부터 30분이나 지날 때까지 남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혹시 오늘 약속을 잊어버린 걸까. 사귈 때도 종종 있었던 일이라 조금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태연을 가장한 채 얌전히 앉아있었다.
그래도 얼마 남지 않은 라떼가 식어가듯 머리 한구석이, 가슴 한구석이 싸늘하게 가라앉는 건 막을 수가 없었다.
잠시 후 문자가 도착했다.
남자에게서다.
[일이좀생겨서못가겠다전에내가줬던빽말인데그것좀택배로보내줘착불로보내도괜찮으니까최대한빨리좀부탁한다]
[서울성북구동선동***]
습관대로 띄어쓰기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문자 두 통이 연달아 들어와 있는 것을 눈이 아프게 읽고 또 읽었다. 오늘 남자가 날 보자고 한 이유가 그 놈의 빽을 돌려받기 위해서란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머리는 이미 인정하고 원래 그런 놈이었다고 열심히 매도하고 있는데도 마음이 인정 하지 못한다. 그럴 리가 없다며 부정한다. 남자에게 있어 내가 고작 이 정도밖에 되지 못했다는 것을, 지금까지 수도 없이 당해놓고도 여전히 믿을 수가 없다.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하던 그 날처럼, 미안하다는 말은 한 마디도 적혀 있지 않은 문자를 다시 한 번 읽었다.
이제껏 어째서 내가 버림 받아야 했는지 이해하지 못 해 단 한 번도 흘린 적 없는 눈물이 추하게 눈과 얼굴을 적실 때까지 읽고 읽었다.
이런 남자에게 그토록 목매던 내가 한심하고 분해서 한 번 터진 눈물은 쉽게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결국 근처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향하거나 말거나 테이블에 푹 얼굴을 파묻고 소리 내 울음을 터뜨려버렸다.
그때였을 거다. 누군가가 내 어깨를 툭툭 치던 것은.
그냥 울게 좀 놔뒀으면 좋겠는데 집요하게 건드리는 손길에 보란 듯 눈물 콧물 범벅인 얼굴을 닦지도 않고 쳐들었다.
그러자 난감과 반가움이 교차한 얼굴 하나가 날 보며 빙긋이 웃는다.
“틀리면 어쩌나 했는데, 역시 선화였어. 나 기억 안나? 고등학교 때 전학 갔던 주영윤, 너랑 심심하면 벌청소하던 짝꿍이었는데.”
주영윤?...아, 그렇구나. 잠깐 멍해져 있던 머릿속에 떠오른 기억 하나에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영윤이가 내 앞에 자리를 잡은 뒤였다.
# 행복해지는 방법 [짧은 이야기] #
“이게 대체 몇 년 만이래. 팔년, 구년만인가. 여튼 거의 십년 만이네. 어쩜 그동안 한 번 연락할 생각을 안 했을까.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첨엔 나도 긴가민가해서 계속 쳐다보고 있었는데, 넌 전혀 모르더라. 묘하게 둔한 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네. 아참, 이런 얘기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의자에 앉은 탓에 더욱 그 존재감이 확연히 드러나는 눈앞의 부푼 배를 멍하게 보고 있는데, 갑자기 영윤이가 손뼉을 짝 소리 나게 치고는 내게 티슈 뭉치를 건넨다.
“오랜만에 만나서 대뜸 물어볼 말은 아니란 거 알지만 아무래도 신경 쓰여서. 무슨 일 있어?”
내 우울한 기운 따위 전부 몰아낼 기세로 쾌활하던 얼굴이 진지하게 묻는다. 대답을 해야 할까, 해야 하는 걸까.
아니, 난 지금 누구에게든 좋으니까 이 분하고 슬픈 기분을 말하고 싶다.
받아든 티슈 뭉치로 대충 얼굴을 문지르며 입을 열려는 찰나였다.
“잠깐, 잠깐. 나 오렌지 쥬스 마실 건데, 넌 뭐 마실래? 오랜만에 이렇게 만난 것도 보통 인연이 아닌데, 축하하는 의미로 내가 살테니까 뭐든 말해봐.”
“응? 아...라떼.”
“라떼? 정말 라떼 좋아하는구나. 하긴 넌 뭐든 하나에 삘이 빡 꽂히는 애였지.”
내 앞에 놓여있는 라떼 컵을 흘깃 본 영윤이가 방금 전의 진지함은 찾아볼 수도 없는 얼굴로 빙글빙글 웃으며 몸을 일으킨다. 그게 좀 힘겨워 보여서 내가 대신 가려 했지만 뭐가 괜찮다는 건지 계속 괜찮아, 괜찮아를 연발하는 바람에 뻘쭘하게 일으켰던 몸을 도로 앉혀야 했다.
결혼 했었구나. 만삭이 가까워 보이는데 혼자 나왔을 리는 없고, 남편은 근처에 있는 건가.
뒤뚱뒤뚱 무거워 보이는 몸을 끌고 주문대에 서 있는 영윤이의 뒷모습이 조금 부럽다.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는 그 일련의 과정들이 지금의 내게는 너무 먼 이야기처럼 느껴진 탓이다. 하긴 나도 헤어지지 않았다면 그 남자와 지금쯤 본격적으로 결혼 얘기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이런 남자와 결혼을 했더라면 내 미래는 얼마나 끔찍해졌을까라고 생각하니 차라리 잘 된 일인지도 모른다. 잘 된거라 생각하기로 했다.
“문자 누구한테 온 거야?”
내 앞에 라떼잔을 놓으며 영윤이가 가볍게 묻는다. 계속 보고 있었다더니, 내가 혼자 문자를 노려보다 울음을 쏟는 과정을 전부 지켜봤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랬으면서 이토록 가볍게, 직구로 물어올 줄이야. 하지만 생각해 보면 영윤이는 옛날에도 이랬던 것 같다. 그래서일까. 나도 조금 가벼워진 기분으로 답했다.
“헤어진 남자친구.”
“흐응... 그래서?”
“오늘 갑자기 먼저 보자고 하더니 뭔가 일이 생겼대.”
“그래서 울고 있었던 거야? 헤어졌는데도 그 남자친구를 보지 못하게 돼서? 에구, 어린 것. 이래서 남자한테 너무 빠지는 것도 문제라니까.”
웃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는다. 아무런 거리낌 없는 동작에 일순 이 곳이 어느 백화점 안의 고급 카페가 아닌 싸구려 분식집이고, 지금 나와 영윤이가 입고 있는 것이 나이를 고스란히 반영한 옷이 아닌 풋풋한 교복처럼 느껴졌다.
오로지 대학에 가는 것만이 목표고, 성적표에 찍혀 나오는 숫자들만이 걱정이던 시절.
그 때로 되돌아간 것만 같은 작은 향수를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전에 숄더백 하나를 받았는데, 그게 좀 비싼 거였거든. 아무래도 오늘 보자고 한 건 날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 가방을 받고 싶었던 모양이라. 그게 억울하고 분해져서, 그래서...”
“우리 일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박가은이라고 기억 해?”
갑작스런 화제전환에 잠시 멍해졌다. 말해 보라더니, 이래서야 처음부터 들어줄 생각조차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임산부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예민하고 자기중심적으로 변하는 법이니까.
“응.”
“걔가 2학기 시작했을 때 즈음이던가, 답지 않게 무단으로 학교 늦게 와선 막 울기 시작했던 건 기억해?”
“응.”
“혹시 그 이유가 뭐였는지는 알고 있어?”
“...아니.”
“이주 전인가, 남자친구랑 헤어졌었대. 그런데 그 때는 뭐가 뭔지도 몰랐던 탓인지 조금도 슬프지 않았는데 그 전 날 날아온 핸드폰 고지서에 그 남자친구랑 열심히 통화하면서 쌓인 요금이 이십만원 넘게 찍혀 나온 거 보니까 미친 듯이 눈물이 나오더래. 그 날도 걔, 품에는 핸드폰 고지서 안고 있었어.”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다지 다른 애들의 개인사에 관심이 없었던 탓에 조금 놀랐다. 하지만 놀란 나와는 달리 영윤이는 이미 중간부터 키득대는 중이었다.
“근데 진짜 웃긴 게 뭔지 알아?”
“뭔데?”
“한 달도 안 돼서 새 남자 친구 사귀더라, 박가은. 마치 고지서 부여안고 울던 일 같은 거 첨부터 없었다는 것처럼 완전 샤방샤방하게 날아다녔어. 내가 걔 보면서 얼마나 웃었는데.”
뭐가 그리도 웃긴 건지 내가 벙쪄 있거나 말거나 영윤이는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는다. 그러더니 싸악 표정을 바꾸고서 시선을 맞쳐온다.
“그 때 배웠어. 지금 당장 죽을 것 같아도 낫지 않는 상처는 절대로 없다는 걸. 오늘 슬펐다고 내일도 슬플 거라는 보장은 없는 거고, 오늘 아팠다고 내일도 반드시 아픈 건 아니니까. 물론, 오늘 죽었다면 내일도 죽어있겠지만. 그러니까, 음...에이, 오랜만에 만나서 이런 우중충한 얘기만 하고 있다니. 시간이 다 아깝네.”
정말 시간이 아까워진 건지 영윤이는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보며 혀를 한 번 찬다. 하지만 날 위로해 주고 싶어 한 영윤이의 의도를 이해한 난 아까보다 한결 기분이 가라앉을 수 있었다. 그래서 조금 늦은 축하 인사를 하기로 했다.
“결혼 축하해.”
“응?”
하지만 영윤이는 쑥스러워 하거나, 기뻐하는 대신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되물을 뿐이다.
“결혼? 누구? 나? 아하, 이거말이구나.”
이거라며 자신의 부른 배를 가리키는 모양에, 오히려 내가 머쓱해져버렸다.
“쌍둥이래. 성별은 일부러 듣지 않아서 아직 몰라. 태어나야만 알 수 있다는 게 어딘지 복불복 게임 같아서 재밌잖아. 그리고 나 결혼 안 했어. 결혼은커녕 아직 처녀야. 그리고 얘들도 내 애가 아니고.”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말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디서부터 무엇을 물어야 할지조차 알 수가 없어져 가만히 쾌활하게 웃는 얼굴만 봐라봐야 했다.
“대리모라고 들어본 적 있지?”
순간 들려온 단어에 내 귀를 의심했다. 설마, 라는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자도 난자도 살아있는데, 선천적으로 착상이 잘 안 되는 불쌍한 사람들이 있어. 다른 경우는 잘 모르겠지만, 내 경우엔 우선 그런 사람들에게서 착수금을 받으면 체외수정을 한 수정란 자체를 병원에 가서 몸에 넣고 임신을 해. 그리고 열 달 뒤에는 애기를 낳아주고 나머지 금액을 받는 걸로 끝. 말 그대로 배만 빌려주는 거지.”
“그런 건...”
“나쁜 짓이라고? 아니면 옳은 짓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거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영윤이가 먼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꺼내놓는다.
“하지만 난 지금 행복해. 굉장히 행복해. 정말 많이 행복해.”
다시 한 번 시계를 본 영윤이는 아직 한 번도 마시지 않은 쥬스를 한 모금 마신다. 그 모습에서 약간의 초조함이 느껴진다.
“있잖아, 선화야. 나도 첨부터 이렇게 살 생각은 없었어. 너와 같은 반이었을 때의 난 굉장히 꿈이 많았어. 하고 싶은 것도 많았고, 좋아하는 것도 굉장히 많았어. 같은 교복을 입고 같은 교실에서 같은 선생님에게 같은 것을 공부하는 것도 좋았고, 너랑 툭하면 이것저것 사고치고 벌로 청소하는 것도 좋았고, 심심하면 선생님한테 장난칠 궁리하는 것도 좋았고, 쉬는 시간만 되면 누가 월담해서 간식을 사올지 내기하는 것도 좋았어. 다 좋았고, 하나도 나쁜 건 없었어. 그런데도 내가 왜 그때 그렇게 갑자기 전학을 가야했는지 알고 있어? 마치 도망가듯이, 그렇게.”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영윤이는 정말로 도망가듯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별다른 거 없는 어느 날 아침 담임이 영윤이의 전학을 알리는 것으로, 나를 포함한 우리는 강제로 영윤이의 전학이라는 사실을 인식 당했다. 그리고 난 그때 잠깐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고, 이후엔 천천히 잊어갔다. 주영윤이란 친구의 존재 자체를 지금 다시 만나게 될 때까지 완벽하게 잊고 있었다.
“계속 신세지고 있던 고아원에서 더는 있을 수가 없게 되어서 멀리 지방에 취업을 해야 했어. 선생님께는 자퇴가 아닌 전학으로 말해달라고 부탁했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던 거지. 원래는 2학년은 마치고 갈 예정이었는데, 모든 게 너무 순식간에 정해져 버렸었어. 그래서 작별 인사를 할 시간같은 건 없었어. 혹시라도 서운했다면 미안.”
마음이라고는 조금도 담겨있지 않은 사과가 붙어있는 엄청난 고백에 우선은 대꾸할 말을 찾았다. 하지만 대체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 좋을까.
내 온 몸과 마음을 짓누르던 슬픔과 우울이 윤영이의 앞에서 순식간에 자그마해진다.
“하지만 말야. 그때의 내겐 두고 온 사람들을 그리워하는 것조차 사치였어. 그렇게 떠난 곳에서 홀로 남은 내게는 아무 것도 없었으니까. 취업했던 곳은 채 두 달도 넘기지 못하고 망해버렸고, 당장 집세를 낼 돈은커녕 한끼 먹을 돈도 없었어. 다시 취업을 하려 해도 중졸의 미성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없었고. 나중엔 그나마 살던 집에서도 쫓겨나서 추운 겨울 밤 거리에 혼자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데, 왜 사나 싶더라. 어쩌면 지금이 딱 죽을 때인지도 몰라, 싶더라. 그래서 죽을까 했는데 산 목숨 끊기가 왜 그리도 힘든지. 누구는 놀러가서도 쓰나미에 잘만 쓸려가더만, 난 이제 죽는구나 싶을 때 꼭 누가 나타나서 깨우거나 병원에 실어다 놓거나 이랬거든. 운이 나빴지.”
살아버린 것을 운이 나빴다고 말하는 건가.
죽지만 않으면 오늘 슬프고 아파도 내일은 괜찮아질 거라는 말은 이미 공기 중에 흩어진 지 오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이 묵직한 고해성사를 말없이 듣는 것 뿐.
“그렇게 병원에 있을 땐데, 거기 의사 중 하나가 혹시 대리모를 해보지 않겠냐고 하더라. 육체관계 없이 애만 낳으면 된대. 승낙만 하면 임신을 할 때부터 애기를 낳을 때까지 밥도 주고, 집도 제공하고, 태교를 비롯한 필요한 교육도 전부 시켜준대. 그리고 애를 낳으면 태어난 애가 아들인지, 딸인지, 쌍둥인지에 따라 돈도 준다는 거야. 선화야, 너라면 말야. 니가 이때의 나였다면 뭐라고 대답했을 것 같아? 죽으려고 해도 죽을 수 없고, 살려고 해도 집도 돈도 뭣도 없이 그냥 세상에 내던져진 채로 있어야 한다면 넌 뭐라고 할래?”
가만히 듣고만 있었던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지, 답을 강요한다. 하지만 아무리 답을 내놓으라 강요한들 내가 할 수 있는 답이란 게 과연 있을까.
“나는...”
있을 턱이 없다.
“좋더라. 난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가족이란 게 이런 거구나 했어. 애기의 아빠 될 사람은 선생님이라 부르고, 엄마 될 사람은 언니라고 불렀어. 먹는 것부터 입는 것, 듣는 것 하나하나 다 신경 써주고, 마치 내가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대해줬어. 그건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기분이었어. 이제껏 그 누구도 날 필요로 한 적 없었으니까. 난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필요 없는 애였으니까. 그래서 뱃속에 있는 아기가 정말 내 애였으면 좋겠다라고 많이 빌었어. 제발 나도 가족으로 받아들여 달라고 많이 빌었어. 하지만 애를 낳자마자 엄청난 금액이 찍힌 통장을 쥐어주더니 그냥 쫓아내더라. 마치 가족이라도 된 것처럼 잘 해 주더니 애를 낳자마자 바로 안면몰수더라. 내가 원한 건 돈이 아니었는데...소원은 소원일 뿐이었던 거야. 그래도 겨우 갖게 된 소원이니까, 이룰지도 모를 소원이니까, 마치 가족을 찾듯 다시 대리모를 원하는 사람을 찾았어. 생각보다 대리모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이번이 벌써 세 번째가 되었고.”
“낳은 애기들을 보고 싶지는 않아?”
메이는 목을 가다듬으며 할 수 있는 말이 고작 이것뿐이라는 게 좀 안타깝다. 하지만 목이 타는지 이제는 벌컥벌컥 쥬스를 들이키던 영윤이가 눈을 똥그랗게 뜨고서 날 바라본다.
“내 핏줄이 섞인 것도 아닌데 보고 싶을 리가 없잖아.”
단호한 말투에 조금 소름이 돋았다.
“니가 부모에게 버림 받았듯 그 애들도 너에게 버림 받은 거잖아.”
“자기 핏줄조차 태연히 버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왜 처음부터 배만 빌려주기로 계약하고 낳아주기만 한 남의 핏줄에 대해 그런 생각을 해야 해?”
틀린, 말은 아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아무렇지 않게, 오히려 의문스럽다는 듯 물어오는 영윤이의 모습에 다시 왈칵 눈물이 차오른다.
영윤이는 아마 평생 가족을 원하기만 할 뿐, 가족을 갖는 일도 가족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일조차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어 다시 슬퍼졌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이번 가족들은 감시가 좀 심한 편이라 이제 그만 일어나야 겠다.”
마지막 남은 쥬스를 입 안에 털어 넣듯 전부 마신 영윤이가 무거운 몸을 천천히 일으킨다. 기분 탓이겠지만 가족이란 단어가 유난히 귀에 와서 박힌다.
영윤이를 배웅할 생각으로 나도 따라 일어났다. 지금 내 얼굴에는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다는 미안함과 함께 방금 전까지 세상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던 남자에 대한 내 슬픔과 분함을 순식간에 잊게 해주었다는 고마움이 교차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영윤이의 뒤만 쫓아갔다.
유리문 밖에서는 어떤 여자가 운전석에 앉아 이쪽을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혹시 저 사람이 영윤이가 말하던 ‘이번 가족’ 중 하나인걸까.
갑자기 영윤이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빙글 뒤로 돈다. 방금 전까지와는 달리 임산부 답지 않은 날렵함에 조금 놀라 있는데 영윤이는 태연히 손을 내민다. 악수를 하자는 의미였다.
“오늘 만나서 정말 반가웠어. 요즘 거의 갖혀 지내다 시피해서 누군가와 이렇게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거든. 그런데 오늘 내가 했던 말들은 원래 전부 비밀이어야 하는 거라서... 이렇게 엄청난 이야기를 해놓고 나에 대해 떠들지 말라는 건 처음부터 무리겠지만, 너무 대놓고 말하지는 말아줘. 그리고 말야.”
시종 쾌활하게 웃던 영윤이의 표정이 처음 내 사정을 묻던 때처럼 싸악 굳는다.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말자.”
그리고 더는 나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는 듯, 아니 내 존재 자체를 몰랐다는 듯 그렇게 등을 돌려버린다.
“영윤아!”
조금 충동적인 기분으로 이름을 불렀다. 다행히 영윤이를 뒤를 돌아봐 주었다. 하지만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행복하니?”
라는 멍청한 질문 밖에 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무슨 소리냐며 헛웃음이나 칠 줄 알았던 내 예상과는 달리 영윤이는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응. 행복해. 굉장히 행복해. 예전에는 그토록 바래도 행복해질 수 없었는데, 지금은 언제나 행복해. 왜냐면 난 사람이길 포기했으니까.”
사람이길 포기했다고 말하며 영윤이는 정말 행복하다는 듯 자신의 부른 배를 한 번 쓰다듬는다. 자신의 피는 하나도 섞이지 않은 자신의 쌍둥이들을.
“사실 행복해지는 방법이란 참 간단했던 거야. 사람이길 포기하면 돼. 사람으로 살아갈 것을 포기하면 그 순간부터 사람은 행복해져. 응, 그래서일 거야. 지금의 넌 불행하지만 지금의 난 행복한 이유는... 그럼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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