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2
- 작성일 2010-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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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추운 겨울이 막 시작될 쯤 무렵 또다시 작은 사건이 일어났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우연이었다.
그날은 평일 저녁으로 나는 여느 때처럼 배달을 가고 있었다. 다른 게 있다면 처음 배달하는 곳이었다. 한정거장정도 떨어져 있는 지역에 있는 빌딩건물 3층 영업 관리팀이 주소였다. 하지만 하루에 몇 번이나 새로운 곳에 배달하는 게 익숙했던지라 평소와 다름없이 업무를 위해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장소로 향했다.
그 빌딩건물은 생각보다 멀었다. 이렇게 먼 곳에서 주문을 하다니 의외였다. 왜냐하면 내가 일하고 있는 가게는 유명한 체인점도 아니었고 그저 각종 분식과 식사를 제공하는 아담한 규모의 식당이었다. 배달원은 나 혼자로 나중에 다 먹은 그릇을 수거하는 것도 내일이었다.
그 빌딩은 생각보다 컸다. 밑에서 올려다보니 거의 10층은 되는 것 같았다. 내가 일하는 식당 근처에 이렇게 큰 건물이 있었다니 새삼 놀라게 되었다. 그런데 귀찮은 문제가 발생했다. 로비에 있던 경비원이 날 보자마자 올라가지 못하게 막은 것이다.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에게 이유를 장황하게 설명했다.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기에 별로 당황하지 않았다. 나는 별수 없이 경비원 옆에서 음식을 받아갈 사람이 내려오길 기다려야 했다.
경비원의 통화가 끝나자 곧 왼쪽 편에 있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서 젊은 여자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런데 그 여자를 보자마자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처음엔 착각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여자와 바로 눈앞에서 마주쳤을 때 익숙함은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정우?”
수연이의 입에서 내 이름이 튀어 나왔다. 머리를 기르고 화장을 했을 뿐 고등학교 시절과 똑같았다. 수연이가 내 이름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도 의외였지만 더 놀라운 것은 나도 아직 수연이의 얼굴과 이름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흔히 볼 수 있는 그저 그런 드라마 같은 내용이 나에게 일어난 것이다. 그 당황스러움에 눌려서 나와 수연은 한참을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멀뚱멀뚱 쳐다봐야만 했다. 경비원은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우리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 후로도 나는 자주 배달 때문에 그 빌딩에 가게 되었다. 로비에서 서성거리면 항상 엘리베이터를 타고 수연이가 내려왔다. 활짝 웃으며 음식을 주고받는 과정을 통해 나와 수연이는 어느 샌가 고등학교 시절보다 더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오분도 안 되는 짧은 순간을 통해서 학창시절보다 수연이와 가까워진 것이다.
물론 주로 둘이서 나누는 대화는 ‘바쁘네’, ‘언제 퇴근해’, ‘힘내’라는 말이 전부이다. 하지만 학창시절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진전이다. 내 방안에는 수연이가 준 꽃다발이 아직도 걸려있다. 말라 비틀어져서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지만 내가 누군가에게 받은 유일한 선물이기에 일부러 남겨둔 것이다.
수연이와 재회하면서 나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 나는 분명 수연이를 좋아하고 있었다. 방문을 열면 정면에서 축 늘어져서 벽에 걸려있는 꽃다발이 보인다. 수연이와 재회한 날 집으로 돌아와 그 꽃다발을 보았을 때 내가 생각보다 수연이를 오랫동안 좋아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 저 꽃다발을 주었을 때 수연이도 나에게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 둘 다 당시 순수한 감정을 가졌던 고등학생이 아니다. 나에게 필기노트를 조심스럽게 건네주었던 과거의 수연이가 지금의 수연이가 같다고 결코 보장할 수 없다.
수연이와 재회한지 한 달이 되었을 때 나는 결심했다. 거창하게 고백은 못하더라도 감사의 표현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수연이를 위해 뭔가를 주고 싶었다.
어느 날부터 내 주머니 안쪽에는 항상 작은 상자가 나와 24시간을 함께하게 되었다. 여자용 손목시계로 별로 비싸지는 않지만 돈을 건네주는 수연이의 손목이 허전해 보여서 마음먹고 산 것이다. 최근 수연이의 회사로의 배달이 뜸해져 만약을 위해 항상 소지하고 있다.
오늘은 평소보다 손님이 적었다. 나는 오랜만에 가게 한구석에서 짬을 내며 나름대로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가게에는 몇 명의 단골손님만이 눈에 띄었다. 작업복을 입은 두 명의 중년의 남자와 젊은 청년이 조용히 끼니를 채우고 있었다. 모두 우리가게의 몇 안 돼는 단골손님이다.
하지만 역시 기회는 오늘도 오지 않았다. 오늘은 배달도 별로 없어서 본의 아니게 틈틈이 쉴 수 있었다. 하지만 내손은 하루 종일 주머니 안에 있는 시계에 가있었다. 결국 오늘도 건네주지 못했다. 퇴근 후에도 허탈한 마음에 바로 집에 갈 수 없었다. 내 몸은 어느새 집근처에 있는 공원으로 향해있었다. 한밤중이라 공원에는 아무도 없었다. 공원 양 끝에 있는 벤치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오늘은 가로등조차 켜있지 않아서 공원은 어둡고 싸늘했다.
벤치에 앉자마자 주머니 안쪽에 있는 상자케이스를 꺼냈다. 상자를 여니 시계몸체가 보였다. 거의 한 달 동안 상자 안에 갇혀 있는 시계는 이미 처음 샀을 때와 달리 볼품없고 싸구려처럼 보였다. 왜 직접 찾아가서 전해주지 못하고 이렇게 멍청하게 구는지 나 자신도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손안에 있던 시계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멍하니 손바닥을 바라보는데 머리 위에서 낄낄거리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드니 역시 그녀석이 눈앞에서 버티고 있었다.
“요즘 왜 날 피해 다니나 했더니 연애질하느라 그러셨군. 딱 보니 여자시계네.”
나는 그녀석의 말을 무시하고 시계를 다시 뺐기 위해 손을 뻗었으나 금방제지당하고 말았다.
“무슨 짓이야!”
그 녀석을 노려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역시나 그 녀석은 별반 응을 보이지 않았다.
“당장 꺼져! 왜 갑자기 나타나서 무례하게 구는 건데?”
재빨리 일어나서 그녀석의 멱살을 잡았다. 그런데 멱살을 놓기도 전에 머리를 강타당해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나는 다시 땅바닥에 누워 쓰러져 있었다. 왼쪽 뺨과 입술부분에 통증이 느껴졌다. 입술이 터진듯했다.
“넌 지금 착각하고 있어.”
무기력한 내 모습이 느껴져 좀처럼 일어날 힘이 나지 않았다. 그런 나를 내려다보면서 그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연애 같은걸 할 자격이 된다고 생각해?”
네가 뭔데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라고 소리치기도 전해 그녀석이 재빨리 말을 토해냈다.
“넌 저번에 살려달라는 여자를 외면하고 도망이나 쳤어. 그렇게 나약하고 이기적이면서 뭘 누리시겠다고? 넌 그때 그 일 따위는 다 잊어버린 거냐?”
그놈의 말이 커다란 바늘이 되어 내 가슴을 찔렀다. 마음 한 구석에 저 멀리 묻어두었던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건...부추겨서...”
“이제는 내 탓이라고 하는 거냐? 찌질 한 녀석 같으니라고.”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놈의 매서운 눈빛이 느껴져 제대로 눈을 들 수 없었다. 결국 그놈 말이 맞다. 어쨌든 최종 선택을 한 것은 나 자신이다. 곤경에 처한 사람하나 돌아보지 못하면서 누군가를 위해 무엇을 해준다니 정말 모순적인 일이다. 내가 그동안 허황된 기대와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제야 주제파악이 된 거냐?”
‘툭’하는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그게 무슨 소리인지는 눈을 감고 있어서 알 수 없었다. 한참 후에 눈을 뜨고 일어나니 그놈은 사라진 상태였다. 자리를 떠나려는데 벤치 옆에 있는 쓰레기통이 눈에 띄었다.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니 시계처럼 보이는 물건과 빈 상자 케이스가 아무렇게 놓여 있었다. 아까 났던 소리는 그놈이 시계를 쓰레기통 안에 던진 소리였다.
하지만 나는 쓰레기통을 무시하고 발걸음을 집으로 향했다. 내가 갈 곳은 거기밖에 없었다. 집으로 가는 내내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 후로 나는 더욱더 무기력해지고 의욕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실연을 당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실망해서였다. 그 후로 일을 그만두었기 때문에 수연이를 더 이상 만날 수 없었고 만나고 싶지도 않았다. 모든 게 허무하게 느껴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일을 구할 의욕이 없어지자 점점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오후까지 잠을 자고 일어나 밥을 대충 때우고 TV를 보다가 저녁을 먹고 다시 TV를 보며 잠드는 게 하루 일과가 되었다.
집에서 노닥거리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점점 어머니의 불만도 커져갔다. 처음에는 아무말씀도 안하시더니 보름이 지나자 점점 잔소리가 심해졌다. 처음에는 빨리 직장을 구하라는 말만 돌려서 말하더니 나중에는 내 행동하나하나에 불만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결국 내가 너무 게으르고 한심하다는 이야기였다.
처음에는 백수처지에 미안한 마음이 있어서 어머니의 푸념을 잠자코 들어주었으나 점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어느새 미안한 마음은 저 멀리 사라지고 원망하고 야속한 마음이 커졌다. 어느 순간부터 어머니와 마주치게 되면 언성이 높아졌고 화가 나서 물건을 던지기까지 이르렀다.
어머니에게 누구보다도 미안하고 잘해주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점점 어머니에게 함부로 대하게 되었고 사소한 일에 예민해져갔다. 매일 밤 잠들기 전에 내일은 절대 어머니에게 대들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나 소용없었다. 다음날 눈 뜨기 무섭게 어머니와 노려보고 있는 내가 있었다.
더 이상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인터넷을 통해 직장을 찾기 시작했다. 몇 시간을 검색하며 찾아본 결과 집 근처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구한다는 광고를 발견했다. 다음날 희망을 갖고 면접을 보러 갔지만 결과는 허탕이었다. 이미 사람을 구했다며 주인은 고개도 안 들고 단 몇 초 만에 나를 다시 돌려보냈다. 주인에게 욕을 퍼붓고 싶었으나 그렇게 하면 내 꼴이 더 처량해질 것 같아 이를 악물고 집으로 돌아갔다. 가는 도중에 화가 나서 길가에 있는 쓰레기통을 발로 차버렸다. 쓰레기통이 흔들거리면서 쓰레기가 길가로 튀어 나왔다. 주변에서의 따가운 눈초리가 느껴졌지만 무시하고 앞을 향해 걸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방문 너머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까지 뭐하다 온 거니?”
뭐하다 왔나니, 기껏 힘들게 일자리 알아보러 갔다 온 사람에게 그게 할 소린가? 갑자기 짜증이 밀려왔다. 그런데 갑자기 방문이 열리더니 어머니가 방으로 들어왔다.
“왜 아무 말 안하니?”
어머니의 목소리와 표정이 어느 때보다 어둡고 무거웠다. 어머니는 평소에 내 방에 거의 들오시지 않는다. 분명히 뭔가를 의심하는 표정이었다. 설거지를 하고 있었는지 손에 물 묻은 고무장갑이 끼어 있었다.
“내가 밖에서 뭐하다 왔겠어요? 내가 오늘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기나 해요?”
“부탁인데 제발 정신 좀 차려라. 내가 그동안 말은 안했지만...”
순간적이었다. 어머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을 하고 말았다. 눈 깜짝할 시간에 어머니는 바닥에 쓰러져 몸을 웅크린 상태가 되었다. 어머니의 신음소리가 집안 곳곳에서 울러 퍼졌다. 넘어지면서 허리를 부딪쳤는지 어머니의 손은 허리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어머니의 눈물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보자 비로소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집안에는 어머니의 울음소리만 들렸다. 나는 도저히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어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예전처럼 집안에 어머니만 남기고 그렇게 또다시 도망쳤다.
내 마음속 저편에서 엄청난 증오가 새어 나왔다. 방금 전 나는 내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달리면서 내가 왜 이렇게 됐을까 계속 되짚어보았다. 정답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바로 그놈 때문이다.
바로 그놈을 찾아갔다. 그놈은 갑자기 내가 제 발로 찾아온 게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놈에게 달려들었다. 갑작스러운 내 공격에 그 녀석은 무척 당황해하며 평소처럼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다. 어느새 내 손은 그놈의 목을 강하게 짓누르고 있었다.
“가...갑자기 무슨...”
“내 인생을 망쳤어!”
평소에 없던 힘이 솟아나와 그놈을 압박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놈도 그대로 당하지 않는지 그 순간에도 있는 힘을 짜내 저항했다. 그놈 손이 내 얼굴을 치는 바람에 손이 목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놈은 거친 기침을 뱉으면서 나를 노려보았다.
“웃기고 있네. 또 지가 못난 걸 내 탓으로...”
또 순식간에 일이 터지고 말았다. 그 놈이 눈앞에서 배를 잡고 쓰러져 있었다. 배 주변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놈의 몸과 눈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내 오른손에는 어느새 칼이 쥐어져 있었다. 피가 묻은 칼끝을 보자마자 나도 정신을 잃고 말았다. 눈을 감기 직전에도 그놈의 눈빛은 나를 향해 있었다.
주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눈앞을 깜깜했다. 아무래도 나는 눈을 감고 있는 것 같았다. 눈을 뜨기도 두려웠지만 몸에 힘이 다 빠져나간 상태라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었다.
쓰러지기 직전에 광경들이 어둠 앞에서 펼쳐졌다. 내가 흉기를 들고 누군가를 향해 미친 듯이 소리치고 있었다. 상대방은 그런 나를 공포와 두려움이 섞인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재빨리 배를 향해 손을 뻗었다. 곧 피가 보였다. 새빨간 피가...배에 손을 대니 손이 붉은색으로 물들어있었다. 그리고 나는 정신을 잃었다....
갑자기 따뜻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니였으면 했으나 처음 듣는 남자 목소리였다.
“정신 들었어요?”
목소리의 주인은 아주 가까이 내 곁에 있는 것 같았다. 나보다 나이는 훨씬 많아보였지만 정확한 발음과 굵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목소리를 통해서 전문직에서 오랫동안 경력을 쌓은 연륜이 느껴졌다.
“어머니는요?”
다행히 말을 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먼저 기운을 차려야 어머니를 만나죠.”
어머니의 단어를 듣자 갑자기 눈물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나는 아직 살아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할 수도 들을 수도 울 수도 있었다.
“나는 어떻게 된 거죠?”
말이 끝나자마자 배 쪽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역시 나는 배를 다친 것이다. 아마 나는 배를 붕대에 칭칭 감고 누워 있는 것 같았다.
“배에 부상을 입었어요. 쇼크 때문인지 며칠 동안 눈을 뜨지 못해서 어머니가 계속 곁에 있었습니다. 그래도 깨어나서 다행입니다. 생명에는 별 지장 없으니 걱정 마세요. 혹시 깨어나기 직전에 말한 것 생각나나요?”
“내가 말을 했나요?”
“한심하다. 살려줘...뭐 이런 말들이었어요. 그리고 정우라는 단어도 몇 번 나왔고요. 본인의 이름이죠?”
내 이름을 들으니 또 다시 눈물이 흘러 나왔다. 그토록 미워하고 혐오했던 이름을 다른 사람을 통해 들으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결국 실패했네요. 이번에야 말로 성공할 것 같았는데.”
자조적인 웃음이 흘러나왔다. 눈만 못 뜨고 배만 다쳤을 뿐이지 모든 것은 다 정상인 것 같았다.
“왜 자살을 시도하는 거죠? 이번엔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
목소리에는 궁금함 보다는 안쓰러움이 묻어있었다.
곧바로 대답하지 않아 침묵이 생겼다. 나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냥 죽고 싶었습니다. 일도 잘 안 풀리고...무엇보다도 원인이 모두 저한테 있었죠.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좋은 점들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정말 필요 없는 인간이..”
갑자기 목이 메어서 말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또다시 눈물이 나왔다. 무능력하고 소극적이고 겁 많고 남 탓만 하는 한심한 내 모습이 생각나 슬퍼졌다. 평생 안고 살아야만 했던 탁하고 우울한 내 본성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알게 되었다. 그런 것들은 나의 일부분이나 저 멀리 숨겨져 있는 게 아닌 나 자체였다. 이를 잘 알고 있었기에 나는 나를 늘 증오할 수밖에 없었다.
“뻔한 말이지만 세상에 필요 없는 사람은 없어요.”
나는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실질적으로 위로가 되는 말은 아니었기에 그저 잠자코 목소리를 듣기만 했다. 하지만 이런 한 말이야말로 내가 듣고 싶은 말이 아니었을까? 정말 흔한 말인데도 나는 지금 이 말을 처음 듣는다.
“정말 당신이 필요 없다면 의사나 간호사들이 당신을 치료하지도, 어머니가 뜬 눈으로 잠도 안자며 울면서 환자를 간호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사람은 누구나 다 자신의 가치와 장점을 지닌 채로 태어나요. 환자분은 그 사실을 외면한 것뿐입니다.”
목소리는 분명 나를 진심으로 위로하고 있었다. 처음 듣는 다정한 위로의 말이었다. 갑자기 내가 살아있다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 걱정 마세요. 지금 깨어났습니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느껴졌다. 목소리가 문을 향해 뛰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구두와 슬리퍼가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이제 어머니를 보셔야죠.”
눈앞에 어머니가 있었다. 어머니의 흐느끼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나는 다행히 눈을 다친 게 아니었다. 이제 눈을 떠서 어머니를 봐야 했다. 꽉 닫힌 눈을 천천히 열기 시작했다. 드디어 빛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곧 병실 창을 통해 흘러 들어오는 환한 빛에 반사된 어머니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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