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상(火傷)
- 작성일 2009-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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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상(火傷)
너는 여인숙 입구에서 비를 긋고 서있었다.
빗방울이 후드덕거리며 잦아지더니 곧 쏴아 하는 소리를 내며 쏟아져 내렸다. 옥상위로 번개가 번뜩였고 간혹 피뢰침위로 내리 꽂히기도 했다. 나는 너보다 한 발자국 늦게 차에서 내렸다. 내가 방값을 치루는 동안 너는 어둑한 복도 끝을 멍하니 바라봤다. 재떨이속의 가루찌꺼기와 수챗구멍의 냄새가 합쳐져 퀴퀴하게 콧속을 스몄다. 내가 먼저 방에 들어섰다. 낡고 너덜너덜한 벽지, 간유리처럼 부연 거울, 전등 스위치 주변은 손때가 묻어 말할 수 없이 더러웠다. 내가 매고 있던 가방을 티비 옆에 신주단지 모시듯 세우고 있을 때에도 너는 복도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나는 층층이 쌓여있는 이불 위에 뙤똑 앉아서 마른 수건으로 머리를 털었다. 네가 들어왔다. 네가 입은 내 코트는 벌써 젖어있었다. 너는 건드리기만 해도 툭하고 부러질 것 같은 옷걸이의 불안한 가지에 코트를 걸었다. 네 교복은 아직 마르지 않은 상태였다. 너는 흔들리는 나침반 바늘마냥 방안을 두런거렸다. 신발장에 달려있는 길고 호리호리한 구두주걱에 네 시선이 멈췄다.
나는 네가 건네준 구두주걱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가늘게 떨었다. 우렛소리와 함께 좁은 창으로 삼 뿌리처럼 생긴 번개 섬광이 내리치는 게 보였다. 너는 무릎걸음으로 성큼 성큼 다가오더니 팔꿈치를 기대 엎드렸다. 너는 내 허리께에 엉덩이를 치켜세웠다. 나는 구두주걱으로 네 볼기를 때리기 시작했다. 찰싹. 찰싹. 너는 살맞은 짐승처럼 꿈틀거렸다. 거울에 비친 우리 모습이 방바닥의 그림자와 겹쳐 괴괴했다. 너는 이를 앙물고 웅얼거렸다.
“고마워 아빠…아빠…사랑해…….”
어둠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시선들을 네가 느꼈는지 모르겠다. 여인숙 입구 맞은편에 죽은 듯 서있는 봉고차에서였다. 라이트와 시동을 모두 꺼놨지만, 그래서 차안의 두 사내가 어슴프레하게 보였다. 주차장에서 한 시간째 우리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얼굴 주름에 비해 머리가 유난히 쉰 오십 줄의 기사는 뭐가 좋은지 실쭉 웃고 있었고, 조수석에서 초조한 표정으로 담배를 태우고 있는 내 또래의 사내는 J라고 후배피디였다. 우리가 예고도 없이 불쑥 나온 것에 놀랐는지 녀석은 재떨이로 쓰던 콜라 캔에 허둥지둥 담배를 비벼 껐다. 카악, 하고 가래침을 뱉는 그를 등지며 나는 너의 어깨를 둘렀다.
아차차 핸드폰……!
내가 과장되게 머리를 치며 소리를 지른 건, 승용차 조수석에 너를 앉히고 나서였다. 나는 여인숙 입구를 향해 내달렸다. 동시에 J가 봉고차의 차창을 열었다. 나는 손에 든 가방을 그의 무릎 위로 집어던지고 그것과 똑같이 생긴 가방을 건네받았다. J와 나는 이러한 일에 익숙했기에 내가 승용차로 돌아왔을 때 채 몇 초가 지나있지 않았다.
J는 내가 놓고 간 가방에서 손바닥만 한 캠코더를 꺼냈다. 먹잇감을 손에 쥔 승냥이처럼 입맛을 다셨다. 어디…자알 찍혔나 볼까? 그가 카메라 전원을 켜자 빨간 사각 램프가 정서불안처럼 깜박거렸다. 테이프가 없다는 표시다. 어라, 왜 이럴까…….
“선배. 몰래 카메라에 테잎이 없는데요!”
“그렇게 됐다. 내일 설명할게.”
빗속에서 나는 핸드폰을 껐다. 바지 뒷주머니에 핸드폰을 찔러 넣으며, 나는 그 안에서 명함 크기만 한 6mm 비디오테이프를 끄집어냈다. 새 가방에 흘려 넣고는 승용차 뒷좌석에 가방 채 던졌다.
내가 운전석에 앉았을 때 너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졸려?”
“나 뒤에서 좀 잘게요.”
너는 운전석과 조수석사이의 좁은 틈으로 빠져나갔다. 너의 입김에서 비린내가 났고, 봉긋한 가슴이 내 코에 닿을 뻔 했다. 너는 모로 누웠다.
“좁을 텐데 안 불편해?”
너는 내 가방에 얼굴을 파묻은 채 저어했다. 구겨져 오른 네 교복 치마아래 허벅지가 박꽃처럼 하얬다. 우리가 출발하고 나서도 한참 동안 J는 어이없어하고 있었다.
“뭐야, 이 인간…….”
“왜왜? 왜 테잎을 뺏대?”
기사가 진진하게 물어왔다. J는 담배에 불을 붙여 한 모금을 쭉 빨더니 내뱉듯이 말했다. “왜겠어요? 인터뷰 한다고 여관 데리고 들어갔다가 뻘 짓한 거죠. 뻔할 뻔자…….”
J는 기사를 빤히 봤다.
“…가 아니지! 이건 원조교제잖아.”
녀석의 이마에서 땀이 송골거리다가 바닥으로 똑 떨어졌다. 에이. 설마. 김 피디가……. 기사는 사람 좋게 웃었지만 J는 그래서 더 섬뜩했다고 했다.
우리는 너의 아파트 앞에 멈춰 서있었다. 비는 서서히 그쳐가고 있었지만 바람이 몹시 불었다. 내 차의 낡은 와이퍼도 요란하게 빗물을 좌우로 떨어뜨리어댔다. 흔들리는 빗방울에 투영된 헤드라이트의 입자가 선명했다. 아파트 하수구에선 뜨뜻한 물이 콸콸거리며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나는 한참을 넋이 나간 채 앉아있었다. 내릴래요? 네가 물어왔다. 우리 집에서 자고 갈래요? 나는 망설였다. 아니야. 그냥 갈게. 너는 잠시 망연한 표정이었다. 비 맞지 않게 얼른 뛰어가. 너는 내렸다. 돌아볼 듯 주춤하더니 이내 추스르고 빗속을 질러갔다. 나는 네가 블랙 홀 같은 거먼 구멍 속으로 쏘옥 들어가 사라져 버리는 걸 꼼짝도 안하고 지켜봤다. 열린 차문이 된바람에 삐걱거렸고 내 귓속에선 윙윙거림이 멈추지 않았다. 그 날 밤, 나는 아내를 거칠게 안았다. 당신 오늘따라 왜 이래……. 라고 말하면서도 아내는 내 등을 옥죄인 두 팔을 좀처럼 풀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 밑과 머리를 동시에 흔드는 이 강렬한 힘의 정체는 뭔가. 아내는 모처럼의 희락을 단 한 방울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보였다.
생리가 멈춘 지 두 달이 넘었어. 크리넥스 티슈로 몸을 닦으며 아내가 말했다. 내일 병원에 가보려고……. 피임을 그만두고 삼년이 되도록 아이가 들어서지 않던 참이었다. 아내가 내 표정을 궁금해 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지만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아내는 그때까지 몰랐다. 두어 달 전 나 혼자 병원을 찾아갔다는 사실을. 내게 내려진 진단은 무정자증이었다. 뭐 귀찮게 병원까지 가봐. 그냥 오줌이나 묻혀보고 말지. 나는 눈을 질금 감았다. 너의 흰 허벅지가 떠올랐지만 머릿속을 도리질했다. 너는 종종 가위에 눌려 고통스러운 나날들이라고 했었다. 나도 그날 밤 악몽을 꿨다. 내 매질은 멈추지 않고 있었다.
“너 이 새끼. 치사하게……. 내가 다 설명해준다니까!”
나는 J의 멱살을 비틀어 잡고 편집실 벽에 몰아붙였다. 녀석 뿐 아니라, 내가 맞닥뜨린 모든 사무실 사람들이 나를 경원시하고 있었다. 어떤 치는 벌레 보듯 미간을 찌푸렸고 어떤 치는 적의에 찬 시선을 애써 숨기려 하지 않은 채 내 발치에 내리깔았다. 화장실에서 세안을 하고 있을 때, 등 뒤로 들어온 K는 나더러 립스틱 자국을 지우고 있냐며 비아냥거렸다. 그는 시사 프로그램 메인 피디답지 않게 장발로 유명했다. 간밤에 좋았대매? 취재원이랑? 비누거품이 눈에 쓰라렸다. 책임CP인 차 부장은 프로그램 셔터 내리려고 작정했냐며 내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 취재원이 여고생이라는 게 사실이야? 날밤을 새워 편집하느라 눈이 벌건 J는 내 손에 멱살 잡힌 게 억울하다는 듯이 팔을 휘휘 내저었다. 아이 참 선배, 제가 소문낸 게 아니고요…….
전 날, 너와 나를 뒤쫓을 땐 조수석 서랍에 폐기 처분되어있던 우리 방송국 마크가 봉고차 앞 유리창에 붙어있었다. 성격이 유들유들하기로 소문난 기자, P가 아침 일찍 그 차량에 올랐다. 그는 초로의 기사에게 깍듯이 예의를 갖췄다. 아이고 형님. 일찌감치 나오시느라 고생하셨겠네. 어제도 늦게까지 도셨담서요? 그러자 기사의 눈이 반짝 빛났다고 했다. 어후 말도 마셔. 간밤에 김 피디가 말이지……!
너의 기억이 궁금하다.
너의 기억 속에서 나는 어떻게 유영하고 있을까. 네 기억에서 벗어난 나는 실험실의 쥐처럼 버석거리며 서있었다. 내 기억을 읽으려는 사람들은 하나 둘이 아니었다. 후배 피디들과 취재를 나갔어야 할 기자들, 방송을 하루 앞두고 종합편집실에 가 있어야 할 편집 피디들과 구성작가들까지 사무실을 가득 채우고 앉아 나를 빠끔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심지어 외주 전문촬영 감독들까지 한 자리씩 차지하고 앉아있는 꼴이 팀 회식 때도 이렇게 모으긴 힘들겠다 싶었다. 진상을 해명할 기회라……? 내가 시사프로그램의 존폐가 걸린 중대한 취재윤리 위반을 했다는 게 그들의 요지였지만, 얼굴 속속들이 새겨진 헤설픈 웃음과 저급한 호기심을 숨길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이들에게 무엇을 말해 줄 수 있을까. 어쩌면 이들은 내가 테이프를 빼돌린 이유를 끝까지 밝히지 않길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금번 취재를 생각한 건, 제가 웹서핑을 하다가…한 포탈사이트에서 우연히 이 커뮤니티를 발견하면서부터입니다.”
나는 노트북을 들어 엿판처럼 펼쳐보였지만 사람들은 눈만 씀벅거렸다. 반응이 이상하다 싶어 봤더니 시꺼먼 화면에 열대어 서너 마리가 떼 지어 헤엄치고 있었다. 화면보호기였다. 아……. 나는 아무 버턴이나 눌렀다. 물고기들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이겁니다. 체벌 까페."
<체벌까페>라는 굵은 폰트의 제목을 좌측 상단에 새긴 인터넷 까페가 노트북에 등장했다.
"이 안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냐면…중고생들이 자기를 때려줄 성인을 찾고 있더라고요."
일동은 수런대기 시작했다. 나는 컴퓨터 모니터 푸른 불빛 앞에 구부정하게 앉아있는 너를 상상했다. 화면을 응시하는 네 혼란한 눈빛이 안개에 젖듯 여릿여릿 혼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너는 체벌 까페 게시판에 글을 쓰고 있었다.
안녕하세여? 전 열 여덟 살의 멜 섭인데여…….
커서가 껌뻑거린다. ‘멜섭’은 맞고 싶어 하는 여고생을 뜻하는 너희들 세계의 채팅용어다.
좋아하는 취향은 스팽키구요…….
커서가 껌뻑거린다. ‘스팽키’는 엉덩이를 때리는 행위를 가리킨다.
제가 요사이 공부에 소흘한데 정신 차리라고 때려줄 팸돔을 찾아여…….
커서가 껌뻑거린다. ‘팸돔’은 때려주는 성인 남성을 뜻한다. 다시 말해 ‘멜섭’의 파트너다.
“아아 체벌 까페! 나도 어느 기사에선가 봤는데…….”
후배 피디 하나가 불쑥 끼어들었다. 내 기억은 ‘일시 멈춤’이 됐다. 내 이야기에 몰입해있던 일동은 제 삼자의 개입을 반기지 않는 눈치였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물어왔다.
“애들이 학교 성적을 핑계로 SM을 즐긴다는, 그거 맞죠. 선배?”
내 고갯짓을 신호로 일동은 자문자답하기 시작했다.
“SM?”
“새드 매저히즘.”
“때리고 맞으면서 그거 하는 변태성욕?”
“요즘은 변태라고 안 불러요. 뭐라더라… 비 전형적인 성적취향이라던가…….”
“어쨌든, 애들이?”
“요새 애들이 애들이냐?”
그들이 들뜨는 것을 보는 내 눈이 뜨거워졌다. 화제가 자연스레 바뀌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어차피 그들은 쉴 새 없이 주전부리할 거리가 필요할 뿐이었다. 하지만 내 눈을 맞쏘아보고 있던 K의 눈에는 내가 품고 있는 열기를 능히 받아낼 만한 냉기가 여전히 서려있었다.
“애들끼리 하는 게 아니잖아. 때려 줄 어른을 찾는 거라면서?”
“…….”
"그러네. 일종의 원조교제네. 변태 원조교제……."
분위기가 다시 반전됐다. 일동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나를 째려봤다. 이들은 내가 너를 범했다고 확신하고 있나보다. 내가 너를 범했을까. 범한 것일까. 너의 대답이 궁금하다. 침묵이 안개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 어디에선가 가을벌레 우는 소리가 가늘면서도 예리한 음향으로 울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유난히 가슴 깊이 감겨오는 걸 느끼며 나는 승용차에 기대어 서있었다. 양 손으로 가방의 어깨끈 잡고 너는 나에게 다가왔었다. 경계의 눈빛을 풀지 않아 두어 발 치 떨어져 섰다.
"인터넷에 글 남긴……?"
내가 묻자 너는 주억거렸다.
"왜 교복입고 나왔어?"
"학교에서 바로 오느라고요."
너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체벌은 어디서하지? 올라갈까?"
턱짓으로 너의 아파트를 가리켰다. 너는 한참을 도리질 하더니 무엇을 망설이는지 입술을 달싹거렸다.
"저어기요…저어…바다 보면서 회 먹고 싶은데…데려가 주시면 안 될까요?"
"바다?"
난감했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너와 나를 찍고 있는 봉고차를 잠시 훔쳤다. 카메라 액정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무겁게 고개를 가로젓는 J의 이목구비가 선연했다.
"비올 거 같은데. 비올 땐 회 먹는 거 아니라던데."
"조개 구이도 괜찮은데……."
나는 형용하기 어려운 서글픔이 은근하게 가슴을 덮어오는 걸 느꼈다. 자신의 힘으론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다는 듯한, 너의 외로운 체념이 불러오는 서글픔이었다.
"그래. 여기서 대부도 가까우니까. 까짓 거 얼른 다녀오지, 뭐. 일단 타."
아 씨팔. 뜻하지 않은 동선에 J는 당황했다. 녀석은 삼각대를 접으며 입 벌리고 졸고 있던 기사를 깨웠다.
"형님. 이동할 거 같은데요."
내 차가 출발했고 봉고차가 뒤를 바짝 따라 붙었다. 너와 나의 목소리가, 녀석의 무릎에 놓인 6MM카메라에 픽업되기 위해선 이 십 미터 이내의 거리를 유지해야했기 때문이다. 내 가방 속에 숨겨둔 와이어리스 마이크엔 좁쌀만 한 빨간 불이 들어와 있었다. 첩보영화의 주인공이 된 마냥 신이 나서 액셀러레이터를 밟은 기사 덕분에 J는 너와 나의 대화를 실시간으로 엿 들을 수 있었다.
"체벌 까페에서…주로 어떤 사람들 만나니?"
내 목소리의 톤은 낮았지만 발음은 분명했다. 녹취를 신경 쓴 탓이었다. 그러나 너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J는 귀에 꽂힌 이어폰을 세게 눌러봤다. 취이이…잡음만 또렷해졌다. 너는 말없이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연거푸 물었다.
"주로 어른들 만나지?"
“…….”
나와 대화를 섞을 생각이 아예 없는 듯, 네 눈가는 처연했고 입술은 응등물려 있었다. 아무런 성과 없이, J는 삼십 분짜리 테이프를 네 번 갈았다.
대부도의 어느 해수욕장에 나는 차를 세웠다. 가로등 하나 없었고 어느새 떠올랐는지 그뭄 달만이 밤하늘에 비스듬히 걸려있었다. 달빛과 어둠은 서로를 반반씩 섞어 묽은 안개가 자욱이 퍼진 것 같은 미명을 만들어내고 있었지만 그 아래 파도를 비추진 못했다.
"어쩐담. 물때는 맞는데……."
"진짜… 보고 싶었는데…바다……."
나는 그때 너의 눈을 봤다.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너의 눈길이 바로 앞에 열려있었다. 들꽃의 흔들림 같은 눈이었다.
“그럼 딴 데 가보자. 횟집 조명 때문에 파도가 보이는데도 있을 거야.”
J는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고 했다. 내 차가 휘잉 소리를 내며 거침없이 후진하더니, 왔던 길로 방향을 돌리자 녀석은 쉰 소리로 툴툴댔다. 젠장. 누구 똥개 훈련시키나……!
두두두둑. 차창위로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다.
“비가 오네, 결국…….”
닳고 닳은 와이퍼가 삐이끄삐이끄 버석거렸다. 너는 그 소리에 생기가 돋아나는 듯 했다.
“이제 됐어요. 아무데서나 먹어요.”
어느새 너는 입가에 살포시 미소까지 머금고 있었다.
“그냥 흠뻑 젖고 싶었거든요…바다든…비든…….”
그 나이 때 소녀에겐 흔한 감상이었지만 나는 너를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너의 얼굴에는 나를 처음 대했을 때의 경계심 같은 것은 흔적도 없었다. 그러나 꼭 평온함만이 아니었다. 무엇인가 분명히 의미를 담고 있는데도 딱히 알아낼 수 없는 얼굴이었다.
우린 결국 후미진 포구에 차를 대는데 성공했다. 허름한 가등아래 바닷가를 따라 이어지고 있는 긴 방죽위의 길은 희끄므레한 자취를 이끌며 뻗어나고 있었다. J가 기사와 함께 횟집에 들어와서 우리 옆 테이블에 앉았다. 녀석은 이쑤시개 하나 겨우 들어갈 만한 구멍이 뚫려있는 가방을 파란 색 플라스틱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가방의 구멍은 너의 잘록한 종아리를 향하고 있었다. 나는 녀석의 존재를 의식해선 안 된다는 생각을 의식하며 네게 물었다.
"종종 글 남기니? 글 남기면 사람들이 많이 연락해? 주로 남자어른들이지? 혹시…돈을 주겠다는 사람은 없어?"
너는 다른 생각에 잠겨있는 듯 했다. 안쓰러울 정도로 네 모습은 지치고 피곤해보였다.
“나는 아빠 같은 사람을 찾아요.”
“아빠……? 내가 아빠…같아?”
너는 고개를 푹 숙이고 중얼거렸다.
“그냥…목소리랑…남긴 글이랑…….”
“아빠가 어떤데?”
너는 입을 열려다 움찔했다. 흐리멍텅한 눈을 천장에 고정시킨 채 네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는 옆 테이블의 J가 신경 쓰여서렷다. 주인아줌마가 훌라후프만 한 둥근 쟁반을 허리에 끼고 다가왔다. 투박하게 엇 썰린 우럭 회와 총총 썬 풋고추며 상추 따위가 잔뜩 쌓여있었다. 너는 젓가락을 빨며 말했다.
“먹고 얘기하면 안 돼요? 배고파서…….이따가 플 하면서 얘기해 줄게요.”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너는 물고기의 창백한 살점에 초장을 찍어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플?”
일동의 입술이 일제히 귀에가 걸리는 게 영락없이 단체사진을 찍는 형세다.
“체벌을 말하는 겁니다.”
“어디서요?”
“자기 집에선 하기 싫다고. 모… 텔에서 하자고…….”
눈빛들이 고흐 그림 속의 별들처럼 총명해졌다. 이제부터 여인숙에서 날 사단을 듣기위해 이들은 여태껏 지루한 시간을 견뎌냈으리라. 하지만 그때까지도 나는 테이프를 빼돌린 이유에 대해 딱 떨어지는 해명거릴 만들어내지 못했다. 네가 화장실에 간 사이에 나는 J와 실랑이를 벌여야했다.
“왜요? 쟤랑 진짜 모텔에 들어가게요?”
내가 몰래카메라 가방을 집어 들자 녀석은 가방 끈을 잡고 놔주질 않았다.
“아직 아무 씽크도 못 땄잖아. 여기까지 와서 회 한 접시 먹고 떨어지자고?”
씽크(SYNC). 몰래카메라로 녹취하는 내용을 우리 취재피디나 기자들끼리 부르는 말이었다. J는 결국 가방에서 손을 뗐지만 미심쩍은 표정을 거두어들이지는 않았다.
“그렇게 저는 그 여고생 취재원과 인근 여인숙에 들어갔고, 구두주걱으로 엉덩이를 톡톡 때려주는 척 하면서 씽크를 땄습니다. 앞서 물었던 질문의 반복이었고, 여자 애는 비교적 충실하게 대답했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일동이 하나같이 실망의 탄성을 내질렀다. 에이, 설마……! 그게 끝이라고? 너무 숨긴다. 괜찮아요, 다 말해보세요. 녀석은 멱살 쥔 내 손을 완력으로 풀며 물었었다. 근데 왜 테잎을 숨겼어요? 비누 거품을 헹궈내고 물질을 멈췄을 때, 오줌을 누고 있던 K는 코웃음 쳤었다. 그럼 테잎 까보시던가. 부장실을 나서는 내 등에 차 부장은 칼을 꽂듯이 말했었다. 몰카 테잎을 공개 안하면 그만두는 걸로 알겠네.
깔게요. 까면 되잖아요!
결국 나는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수런거림이 멈췄다. 사람을 진짜 뭘로 보고……. 테이프를 넣어 둔 서류가방을 들고 오면서 나는 중얼거렸다. 안 까면 안 까는 이유가 있나보다…그렇게 생각하면 될 걸 가지고…지들 하는 대로 남들도 다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지……. 가방 속을 휘휘 젓던 내 손이 멈춘 건 그 다음이었다. 내 얼굴은 석고처럼 굳었다.
없어졌어요……!
일동은 감탄한 듯 웃었다. K는 박수를 치기까지 했다. 내가 장고 끝에 묘수를 골랐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거짓부렁이가 아니었다. 가방 안의 테이프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분명히 여기 넣어뒀었는데……. 나는 궁지에 몰린 꿩 마냥 승용차에 몸뚱이를 처박았다. 두 발은 주차장 바닥에 디딘 채였다. 그러나 시트에도 바닥에도 테이프는 없었다.
"그만 둬!"
차 부장이었다.
"그 아이템 접어! 담당 피디도 떳떳하지 못한 아이템을 어떻게 내보내겠단 거야?"
"……."
차 부장은 어떻게 더 화를 내야할지 요령부득이라는 표정이었다. 이쯤에서 접는 게 모두에게 좋을 것이라 판단한 듯싶었다.
"느그 기자들이 더 문제야. 기자들이 게을러 터졌으니까 피디들이 현장을 장악하는 거 아니냐? 그딴 정신 자세로 어떻게 <텔미 더 트루쓰>를 잡겠어?"
차는 기부운, 하고 비명 같은 소리를 지르고 나갔다. 아이 씨이. 왜 불똥이 우리한테 튀는데……! 기자들은 신경질적으로 일어났다. 더러는 내 어깨를 부러 부딪쳤다. <텔미 더 트루쓰>는 우리 프로그램과 같은 시간대에 방송되는 타 방송국 시사프로그램이었다. 편성시간 뿐 아니라 아이템에 있어서도 우리와 자주 겹쳤는데, 민영방송국에서 송출되는 덕분에 <텔미…>는 우리 보다 훨씬 더 선정적으로 사안을 다뤘고 그 결과, 시청률은 곱빼기로 나왔다. 이제 다시 기자들 뒤치다꺼리나 하는 신세로 전락하는구나. 라고 후배 피디 하나가 내 등에 대고 볼멘소리를 했다. 한 번씩은 아홉시 뉴스를 거치면서 얼굴이 알려진 기자들보다는 얼굴 없는 피디들이 잠입 취재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된다는 게 평소 내 지론이었다. 거나하게 취해서 J가 물어왔다.
"선배. 무덤까지 가져갈게요. 걔랑 잤죠?"
나는 녀석의 머리통을 포장마차 테이블에 처박았다. 하마터면 잔치 국수가 통째로 그의 머리에 쏟아질 뻔 했다. 씨바. 같지도 않은 게! 녀석은 벌떡 일어섰다.
“이런 원조 교……!”
술 마시던 사람들이 일제히 그를 쳐다봤다. 그 시선들이 부담스러웠는지 녀석은 말을 더듬었다. 원조 교……교조주의 선배 같으니라고. 나는 좌변기를 부여안고 한참을 게워냈다. 침대에 누워 핸드폰에서 너의 이름을 찾았다. 너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 만큼 늦은 시간이었던가. 아내는 집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나는 술기운을 빌어 아내의 남자에게 전화했다. 여우보세……. 자다 깼는지, 워낙에 걸쭉한 남자의 목소리가 가라앉아있기까지 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저어했다. 날숨만 큼큼 내뱉다가 종료 버튼을 눌러버렸다. 테이프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남자 옆에는 아내가 잠들어있을지도 모른다. 다시 전화가 걸려 오진 않았다. 누구야? 아내는 물었을 지도 모른다. 몰라. 이상한 놈이야. 씩씩대다가 그냥 끊어버리네. 아내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남자의 전화를 들여다봤을 수도 있다. 나는 잠들어버렸다. 목구멍이 타들어가는 갈증에 눈을 떴을 때에도 아내는 옆에 없었다. 그리고 또 악몽을 꿨다. 나는 무엇에라도 홀린 사람마냥 기계적으로 매질을 하고 있었다. 더 세게……! 너는 억 비명을 토하며 나가떨어지는 듯 하더니 다시금 자세를 취했다. 귀청이 찢어져나가라 천둥이 쳐댔기에 나는 더욱 야릇한 불안감을 느꼈다. 너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긴 한숨을 어둑한 방안에 토해냈다. 쾌감인지 고통인지 분간해내기 어려운 한숨을. 그 감정은 매를 들고 있는 내게도 그대로 전해져왔다. 어느 순간엔가 너는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두 팔에 파묻은 채로 미동도 없이 엎드려있었다. 홑이불자락을 움켜진 손등에 핏줄이 오롯하게 섰다. 새빨갛게 부었을 텐데…그만 할까? 아니…계속해줘. 아빠. 계속 때려줘.
"편집하지 말고 사실대로 얘기 해!"
K는 답답해서 못 참겠다는 표정이었다. 말이 거창해 징계위원회지 구성원의 면면은 그 전 날 사무실 모임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안 그럼 너마, 짤려! 어제 부장님 표정 못 봤어? 진짜라고.”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구두 주걱을 내려놓았다. 왜 자꾸 나한테 아빠라고 불러? 네 눈물이 파리한 팔을 타고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괜찮아? 나는 너의 어깨를 잡았다. 너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내 팔을 뿌리쳤다. 일순 교복 셔츠가 네 목덜미에서 헐렁해지며 가슴께와 쇄골에 걸쳐 새겨진 나무옹이 같은 거친 자욱이 보였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너는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눈가에 박힌 기미가 더욱 촘촘해져 있었다. 언젠가 나와 심하게 다투고 난 뒤 아내의 얼굴과 닮아있었다. 아내는 외롭다고 했다. 가래처럼 끈적하게 조이고 당겨오는 목소리였다.
네 기억은 나를 이끌고, 군데군데 얼룩이 진 외벽을 끼고 걸어가서 반 층 아래 어둑시근한 단칸방으로 들어갔다. 전등 스위치 주변의 벽지가 손때가 묻어 말할 수 없이 더러웠다. 장마철 수챗구멍에서 올라오는 역한 냄새와 재떨이를 비울 때 나는 텁텁한 냄새가 동시에 코를 스몄다. 나는 그 안에서 꺽달지게 뛰어놀고 있는 아홉 살짜리 너를 보았다. 너는 콧물을 훔치며 간간히 TV를 봤다. 그러한 너를 바라보는 퀭한 눈의 여자는 양말을 기우고 있었다. 현관문이 삐걱 소리를 내면서 열렸을 때 너는 그곳을 바라봤다. 머리털이 텁수룩한 사십대 사내가 불쑥 들어왔고 술 냄새가 잽싸게 따라 들어왔다. 아빠아. 너는 강아지처럼 달려갔다. 사내는 너를 밀쳤다. 너는 고꾸라졌다. 사내는 여자를 향해 발길질하기 시작했다. 여자는 몸이 마구 덜컹거리면서도 두피와 뇌수의 접착이 헐거워진 듯 멍하니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람 맞는 소리가 그렇게 둔탁하고 푸석푸석한 지 너는 두고두고 잊지 못했다고 했다.
아빠는 술만 마셨다하면 엄마를 때렸어.
동그래진 너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여자는 그제야 정처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내는 여자의 곱실거리는 머리칼을 홱 낚아챘다. 너는 소리를 질렀다. 여자는 돌이 담긴 푸대 자루처럼 묵직하게 끌려가면서 너에게 담담히 말했다. 괜…찮…아.
그 우스꽝스럽고도 비애스러운 장면은 오랫동안 내 기억에 남아있었어.
콰앙. 방문이 닫히는 소리였는지 여자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소리였는지 분간하기 어려웠지만, 너는 누군가가 너를 불렀다고 생각했다. 방문은 열린 것도, 닫힌 채도 아니었다. 사내는 닥치는 대로 손에 잡히는 걸 집어던지고 있었다. 전쟁포로처럼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는 여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너는 눈썹 끝을 조금씩 깜짝거리면서도 눈시울은 한사코 닫지 않고 있었다.
엄마가 부동자세로 맞고 있는 걸 지켜보는 데 기분이 묘했어.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서고 신경도 곤두서는 느낌이랄까. 절대…나쁜 기분이 아니었어. 굳이 설명한다면 어떠한 종류의 쾌감……? 한 마디로 짜아릿…했어. 라고 너는 말했다.
어떻게 맞는 걸 좋아할 수 있지? P가 쾌활한 목소리로 물었다. 일어 오르는 불길에 찬 물을 끼얹는 꼴이었다. 불꽃이 탁탁 소리를 내면서 튀었다. 부장이 그에게 경고했다.
"입 안 다물면 니가 맞는다."
"사실 저도…맞는 거 좋아합니다."
P가 또깡또깡 말대답하자 스탭들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크큭댔다. 불길은 검은 연기보다 높게 치솟았다. 천장을 마구 그을었다. 너는 말했다.
내 삶이 시작부터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고 나서부터, 비록 그때도 어렸지만…난 내 삶을 일정한 거리 밖에 두고 바라봤던 거 같아…….
어느 날인가, 역시 엉망으로 취한 사내가 눅눅한 벽에 등을 기댄 채 꿈틀대고 있는 여자에게로 스멀스멀 다가가고 있었다. 여자의 손엔 서슬 퍼런 식칼이 들려있었다. 칼끝은 초점을 잃고 허공에서 절고 있었다.
엄마가 울면서 대들고 있더라고. 더는 애 앞에서 맞지 않겠다고. 엄마로선 목숨을 건 행동이었어.
사내는 부르르 떨었다. 잠시 후 사내의 손에 여자의 머리채가 쥐어져있었고 식칼은 바닥에 떨어져 맥없이 부르르 대고 있었다. 사내는 여자의 광대를 무릎으로 으깨었다. 여자는 혼절했다. 사내는 휘발유통을 들고 서있었다. 취기에 몸도 가누지 못하던 사내가 휘발유통에서 흰 액체를 철철철철 잘도 쏟아내는 게 너는 신기했다. 점액질의 액체는 여자를 적시고 네 발을 적셨다. 흐흐흐흐흐. 남자는 웃으며 라이터를 켰다. 하지마. 아빠. 너는 내게 말했다. 너는 사내의 허리에 매달렸다.
그러지마 아빠. 엄만 맞는 게 싫어해서 그래. 난 맞아도 상관없어. 이제부터 엄마 때리지말고 날 때려…날 때리면 되잖아…아빠…….
사내는 기가 차다는 듯이 웃었다. 니미. 이젠 요 콩만 한 것 까지……! 사내는 너의 머리채를 한 주먹에 움켜쥐었다. 너는 울음을 터트렸다. 네 발꿈치가 질질 끌리는 채로 사내가 너를 방으로 끌고 갔다. 나는 너의 눈물을 찬찬히 닦아줬다. 사내는 허리띠로 너를 채찍질 했다. 작고 어린 너는 꼿꼿이 선 채로 도망치지 않았다. 바클에 살점이 떨어져나갔다. 꽉 깨문 입술이 터져 선홍색 핏방울이 바닥으로 똑 떨어졌다. 너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럴수록 남자는 더욱 통제 불능이 되어 분을 삭일 길이 없는 듯 했다. 저 양 공주 년이 어디서 이런 괴물 같은 걸 낳아가지고 와가지고…….
그 때의 기분이 아직도 생생해. 아파서 죽을 것 같았는데…또 견딜 만 했어. 이러단 죽는구나 생각이 들었는데…그래도 상관없을 것 같다는……. 남자의 채찍질은 멈추지 않았다. 뒈져 그냥! 이 화냥년의 자식아! 뒈져버려. 때리기만 했대? K가 물었다. 때리기만 하다뇨? 범했지? 대답대신 나는 아랫입술을 앙물었다. 누군가 또 묻는다. 진짜? 아빠가 성폭행을? 참을 수 없는 살의가 치밀어 올랐다. 여기까지 할 게요.
왜에?
도저히 못하겠어요. 여러 가지로 걱정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나는 그들과 눈을 섞고 싶지 않아 천장을 쳐다봤다. 취재 윤리를 어겼다는 점도 인정합니다. 부장님 말씀대로 그만두겠습니다. J의 전언에 따르면 내가 뛰쳐나간 뒤에도 수런거림은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와 쎄다.”
“섹시한데……! 이런 게 먹혀, 요새는.”
“미다시 나왔네요. 현대인의 고독이요. 왜 에리히 프롬이 그랬잖아요. 현대인의 고독은 무조건적 복종이나 자기 파괴의 형태로 나타난다고.”
K는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냈다.
“김 피디 꼬드기자. 씽크만 살아있으면 그대로 내보내도 돼.”
"왜들 그렇게 생각이 없어요? 다들 이렇게 옐로우 페이퍼 쓸까봐, 선배가 테잎을 숨긴 거잖아요!"
“왜 그래, 아마추어같이! 모자이크랑 음성 변조할 건데 뭘 신경 써?”
“J. 니가 가서 잘 구슬려봐. 이 정도면 김이 설사 걔랑 잤다고 하더라도 용서될 수준이다.”
“쓰읍……!”
“농담 농담…….”
누가 어떤 말을 했는지 부러 가려 쓰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나는 심사를 가라앉히지 않은 채 너의 아파트로 달려갔다. 나는 초인종을 계속해서 눌러댔다. 너는 그 지하단칸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사내는 대자로 엎드려 자고 있었다. 사내의 입에서 단 냄새가 올라왔다.
아빠는 나를 실컷 때리고 나서 속이 다 시원하다는 듯이 코까지 골고 자고 있었어.
너는 옷이 찢겨져 나가있었다. 사내가 상설매장에서 사다 준 아동복이었다. 네 허벅지엔 철쭉을 으깨서 나온 것 같은 시큼한 하혈이 흐르고 있었다. 너는 휘발유통을 안고 사내 곁으로 다가갔다. 너는 사내의 등 위로 휘발유를 부었다. 한 때 그 넓은 등에서 미끄러지며 너는 깔깔댔었다. 찔끔찔끔 떨어지던 기름이 갑자기 철커덕 쏟아졌다. 사내는 눈을 부릅떴다. 핏줄이 터졌는지 사내의 눈두덩은 불그스름했다. 사내는 의혹과 불안에 눈알을 동글동글 굴리면서도 바닥에 흘러가는 기름을 표표히 가늠하더니 천천히 눈을 다시 감았다.
다행히… 다행히 아빠는 아무 말도 안하고 자는 척 하더라고…….
너는 난생 처음 성냥을 그었다. 피시식. 불꽃이 오롯이, 도도하게 피어올랐다. 아빠 고마워…그냥 이렇게 가줘…이게 모두를 위해 좋은 거야…아빠 사랑해……. 네가 성냥불을 집어던지자 화마가 사내를 휘감았다. 나는 너의 아파트 현관문에 등을 기대고 망연히 앉아있었다. 불길에서 간신히 탈출한 내 의식은 복도 등 불빛아래 그슬려지고 있었다. 병원에서 여자는 사복을 입은 경찰들에게 끌려 나갔다. 도주의 염려에 의한 구속영장 청구라는 말의 뜻을 너는 한참 후에야 알았다고 했다. 너는 엄마의 손을 놓지 않았다. 엄마 잘못 아냐. 아빤 내가 죽였어. 날 때려줘. 때려줘. 세게…더 세게! 너는 울부짖었고 나는 매질을 멈추지 않았다.
저르르 떨던 핸드폰이 드디어 멈췄다. 부재중 전화 14건. 아내의 남자가 다섯 번, 아내가 아홉 번 전화했다. 아내는 기어이 병원엘 갔던 모양이다. J가 전화를 걸어온 건 그 다음이었다. 손안에 진동이 기름진 뱀처럼 끄느름하게 지나가더니 잠시 후 짧고 굵게 꽈리를 틀었다. 녀석이 보낸 문자메시지였다.
<선배! 지난번 선배가 만났던 그 여고생… 지금 티비에 나와요!>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J에게 전화했다.
“우리 경쟁프로그램! 텔미더 트루쓰…아니, 뭐야? 선배도 나와요……!”
검은 가로수들이 지키고 서있는 바람 한 점 없는 밤을 나는 가로질렀다.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자 환히 불이 켜진 쇼윈도들이 눈에 들어왔고 멀리 대형 전광판에 불빛이 일어났다 사라졌다. 나는 TV소리가 들리는 아무 식당으로나 뛰어 들어갔다. 설렁탕 뚝배기를 놓고 일용직 노동자로 보이는 치들이 소주잔을 부딪치고 있었다. 얼큰해져있는 목소리들로 봐서 술잔이 몇 순 배는 돈 듯했다. 나는 계산대위에서 리모콘을 찾아 들고 허겁지겁 TV 채널을 돌렸다. 거기에 너와 내가 있었다. 화면 모자이크로 얼굴이 뭉개진 채, 대부도 횟집에 앉아있는 너와 나의 피사체는 오래된 왕릉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나레이터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저희 제작진이 체벌 까페에 남긴 글을 보고 한 성인남성이 만나자고 제안을 해왔습니다. 제작진은 여고생으로 가장해서 그 남성을 만났습니다. 성인 남성은 목적부터 이야기했습니다. “그래. 플 하면서 이야기하자.”>
급하게 편집했는지 씬과 씬이 거칠게 붙어있었다.
<남성이 의미하는 플은 체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어서 내가 그렇게 공개하길 마다하던 여인숙 몰래카메라 체벌 장면이 흘러나왔다.
<제작진이 그만하자고 울면서 사정했지만 남성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전문가의 인터뷰가 난데없이 인서트 됐다.
<새드매저히즘은 선천적이고 특수한 성정체성으로 대부분 알고 계시는데…자신의 트라우마로 인해 후천적으로 생기는 경우도 많거든요. 사례 남성의 경우 후천적 요인으로 보여지는데요…….>
‘B사감과 러브레터’의 여 사감처럼 투박하게 생긴 뭐 시기 심리학 박사와, 얼굴 없는 너와 내가 또다시 디졸브됐다. 너는 이불 단에 등을 기대고 있었고 나는 네 허벅지를 베고 누워있었다. 나는 아내의 뒤를 좆았던 여러 밤의 흉사며, 아내의 남자와 처음으로 맞닥뜨렸을 때 느꼈던 생경한 기분까지 담담히 네 앞에 흘리고 있었다. 나는 아내를 놓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너는 목을 내려뜨려 내 얼굴을 내려다봤다. 너의 가슴께에 오롯이 새겨진 나무옹이 같은 자욱이 선연하게 보였다. 그것은 화상이었다. 손에 닿을 듯 하면서도 아득하게 멀었다. 그리고 나는 그때 너의 눈을 봤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너의 눈길이 바로 앞에 열려있었다. 들꽃의 흔들림 같은 건 네 눈동자 속의 나였다.
그 때, 내 손의 리모콘이 누군가에 의해 억지로 떨어져나갔다. 설렁탕을 휘젓던 취객이었다. 술기운과 피곤에 찌들어있는 그는 나를 쏘아보더니 나무 등걸 같은 손으로 리모콘 버튼을 부서져라 눌러댔다. 조악한 6mm 화면이 일순 증발해버리고, 총 천연 칼라의 사극 연속극이 TV를 장악했다. 사내는 태연하게 자리에 가 앉았다.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사내 일동을 감쌌다. 다시 돌려, 이 개이시끼들아! 나는 악을 썼다. 화들짝 놀란 종업원의 어깨가 들썩이는 게 보였다. 뭐어? 이 쉬끼가…너 방금 뭐라 그랬어? 사내들이 급하게 일어나느라 테이블이 휘청거렸다. 다시 돌리라고! 나는 불 섶으로 뛰어드는 날벌레처럼 그치들에게 담싹 덤벼들었다. 사람이 사람을 때리는 소리가 그렇게 둔탁하고 푸석푸석한지 나는 그제야 알았다. 테이프를 가져간 게 너라는 사실이 이제는 고맙다. 네가 가져가지 않았다면 너의 화상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 말이 하고 싶었다. 건강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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