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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염

  • 작성일 2010-06-23
  • 조회수 432

 

   

1.

 사과박스 크기의 누런 종이 상자에 붙어 있던 테이프를 벗겨냈다. 오늘 택배로 온 상자다. 승범은 안에 있던 내용물을 쑤욱 꺼내 책상위에 놓았다. 형광등에 반사되어 번쩍이는 빛이 눈부신 멋진 물건이다. 손가락으로 겉면을 튕겨 본다. 뎅, 하는 소리가 난다. 마음에 든다. 자장면이 들어 있지 않아도 음식을 먹은 것처럼 배가 부르고 흐뭇할 정도다. 승범은 손잡이를 들어 배달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작은 수첩을 폈다. 도심 한복판. 높은 곳이어야 함. 되도록 짧은 시간에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장소일 것. 내가 사는 곳과 멀지 않으며 일처리가 끝난 후엔 용이 주도 하게 빠져 나올 수 있는 곳. 하지만 무엇 보다 중요한 것은…이라고 읊조리며 다시 볼펜을 들었다. 분노가 타오르는 곳. 불길처럼 분노가 이는 장소 섭외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적는다. 승범은 몇 일전의 일을 떠올렸다. TV를 통해 보았던 한 장면. 여러 시민들이 정부 정책에 강한 반발의 의사를 표시하며 먹다 만 컵라면을 어느 건물 정문에 던지는 모습을 떠올렸다. 라면 국물과 건더기로 더럽혀진 그곳은 그야 말로 음식쓰레기장을 방불케 하며 형편없이 더럽혀져 있었다. 카메라가 밑에서 잡은 앵글로 약 20여층 되는 그 건물은 왜곡되고 편향된 보도를 일삼는 친일 세력이 세운 한 언론지 본사였다. 승범은 A4용지가 두껍게 묶인 서류철을 서랍에서 꺼냈다. S#17. 장소: '분노가 집결되는 곳'이라고 적혀 있다. 그리고 빨간 볼펜을 들어 그곳에 한 번도 아버지라 부르지 않았던 남자의 이름을 적는다. 한기수 이 개자식. 찢어 죽여도 모자란 새끼. 승범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온갖 욕들을 채 완성하지 않은 열일곱 번째 씬으로 가득 채운다. 분노로 응집된 불완전 하고 유치한 욕들이 흰 종이를 메웠다. 한 장의 A4용지를 채우고도 풀리지 않은 분 때문에 승범은 양손에 볼펜을 쥐고 마구잡이로 형태 없는 것을 그렸다. 양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호흡은 빨라지고 승범의 얼굴은 이미 귀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다. 종이는 찢어져 구멍이 난 상태다. 뚝…, 뚝. 그때 핏물이 종이위로 떨어져 내렸다. 코피다.

 

승범은 늘 코피를 흘렸다. 아마 코피를 코에 달고 살았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아이들과 놀이터에서 놀다 실수로 모래사장에 넘어지기만 해도, 낯선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도,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갈 때도, 유치원이 바뀔 때에도 코피를 흘렸다. 명희는 승범의 코피를 멈추게 하려고 빠듯한 살림에 한약이며 몸에 좋다는 온갖 민간요법을 다 썼다. 하지만 아이의 피는 쉬이 멈추지 않았다. 수도꼭지를 코에 단 코끼리처럼 아이의 코는 늘 누군가에게 물을 공급하는 급수원 같았다. 그래서인지 아이의 몸은 여자의 몸처럼 왜소했고 골격 또한 튼튼하게 자라주지 못했다.

승범은 코피를 흘릴 때마다 피부가 백짓장처럼 하얗게 변해갔다. 그리고 매번 새빨간 코피를 콧물처럼 흘릴 때마다 명희는 놀란 얼굴로 달려 왔다. 그리고 이마를 젖히고 진한 코피를 닦아 주었다. 아이의 피는 잘 그치지 않았기 때문에 명희가 놀라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다른 또래의 건강한 아이들은 1분 정도면 지혈이 가능하다. 하지만 아이의 피는 30분이 넘어도 멈추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차차 시간이 지나자 명희는 아이의 코피로부터 냉정을 찾아 갔다. 서서히 평범한 일상으로 자리 잡아 갔고 묵묵히 승범의 피를 지혈했다.

 


그 무렵, 승범이 오랜 시간 피를 흘릴 때마다 아이의 입가에 전에는 보지 못했던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승범은 자신을 보살피던 여자의 희고 긴 목덜미를 구경하면서 그곳에 핏자국을 남겨 보고 싶다는 충동을 갖게 되었다. 코에서 피가 흥건히 젖은 솜뭉치가 빠져 나갈 때. 그래서 다시 다른 휴지나 솜으로 지혈해야 할 때. 마치 버스를 타기 위해 길게 늘어선 줄처럼 여자의 허벅지나 무릎으로 피가 떨어져 내릴 때. 아이는 여자의 희고 고운 손에 승범의 피가 꽃처럼 피어나는 환상적인 기분을 가졌다. 마치 흰 눈 위에 붉은 꽃이 만개하듯 몸에 핏자국이 그려지는 모습에 그는 흥분했다. 기묘한 쾌감을 느꼈다. 정확히 11년 전, 일곱 살의 승범에게 이런 기이한 감정이 열을 이인 몸뚱이처럼 달아올랐다. 여자의 새하얀 몸을 지켜보며 생애 처음 ‘아름다움’에 대한 자극을 받았다. 승범은 참으로 유쾌하지 못한 유년의 기억 속에 그녀를 심어 놓게 되었다고 스스로를 반성했다. 이런 이상야릇한 감정의 실체를 책상 앞에 앉아 수없이 반성도 해봤다. 알 수 없는 도덕적 죄책감이 교과서와 문제집을 덮게 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누군가에게 절실히 이야기 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자존심이 강하고 자의식이 강했던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누군가 자신을 이상한 아이로 취급하진 않을까 두려웠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단지 시간에 묻혀 사라지기를 바랐다. 하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자 승범의 감정은 제 틀에 옮겨진 빵처럼 실체적인 하나의 모양으로 변해 갔다. 마치 그동안 그를 거부하며 몸 밖으로 빠져나간 피가 실은 여자의 몸뚱이로 옮겨가 그녀를 물들게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것이 여자에게 꽃을 피우고 그 꽃을 정성껏 키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한 성실한 믿음감 같은 것이 승범의 마음속에 시간이 흐르면서 자리 잡아 갔다. 뿌리가 굵은 다년생 식물처럼 단단하고 견고하게 제 살을 불렸다.

 

 

많이 먹어. 어서…. 그리고 알지? 아빠는 널 많이 사랑하고 계셔. 이제 막 권투 시합이 끝난 여자. 얼굴에 부상을 입어 눈 주변이 퉁퉁 붓고 얼굴 군데군데가 상처투성이인 여자 복서. 그런 여자가 인터뷰를 하는 것 같다. 아빠 오시면 늦게라도 나와 인사드리고. 아빠가 우릴 위해서 얼마나 고생하시는데…. 여자 앞에서 자장면을 맛있게 먹어 보여야 하는 아이. 그게 잘 안 되는 승범은 차분하게 여자의 말을 듣고 있다. 승범은 여자의 얼굴이 걱정 되었다. 상처가 꽤 아플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무엇보다 어째서 저 지경이 됐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질문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검은 면을 한가득 입에 넣어 입을 봉해야 했다. 드르륵, 다음 계절에 입을 옷을 깊은 서랍 속에 밀어 넣듯 자신을 밀어 넣고 후르륵, 면을 빨아 들였다. 승범은 종종 입 주변에 하나 가득 검은 자장소스를 묻히고 맛있다는 표정을 가식적으로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다. 거의 집에 없던 남자가 어쩌다 돌아온 날 밤 명희의 얼굴에 상처가 돋는다는 것. 맞잡은 여자의 손바닥에 동그랗고 시커먼 화상자국을 느끼며 그 손에 이끌려 자장면을 먹으러 가게 되는 자신의 운명을.

 


아빠는 곤경에 처한 사람의 죄를 객관적으로 조사하는 일을 하셔. 그리고 그 죄를 판사님께 알려 드려. 멋있지 않니? 너도 꼭 아빠처럼 훌륭한 사람이 돼야 해. 알겠지? 승범의 기억에 남자는 주로 흰색 셔츠에 검은 수트를 입었다. 그리고 검은 서류 가방을 들고 다녔다.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했던 명희의 말을 이해 못했던 승범은 검은 수트에 흰색 셔츠, 그리고 검은 서류가방을 들어야 훌륭한 사람이 되는 줄 알았다. 훌륭한 남자는 종종 집을 비우는 일이 많았다. 하루, 이틀, 길게는 일주일씩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작스럽게 연두색 택시에 몸을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승범과 여자가 살고 있는 낡은 한옥을 개조한 단독주택 앞에 포니 택시가 설 때는 거의 늦은 밤이 다 되어서였다. 그때마다 승범은 차 엔진이 멈추는 소리를 기다렸다가 밖을 내다보지도 않고 자기 방으로 달려갔다. 제 방 문을 걸어 잠그고 자는 척 했다. 남자가 못마땅했기 때문이다. 승범은 방문 밖에서 새벽 늦게까지 울려 퍼지던 여자의 울음소리를 기억한다. 비명에 가깝게 흐느껴 울던 신음소리. 어떡해서든 소리가 문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애틋하면서도 이상야릇한 소리. 승범은 그 숨소리가 소름끼칠 만큼 싫었다. 그때마다 귀를 틀어막고 마루로 달려가 남자의 검은 서류 가방을 발로 짓밟았다. 그래도 분은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 밖으로 뛰쳐나가 대문 밖을 서성였다. 밤꽃 향내가 유난히 동네 어귀부터 지독했던 밤, 하늘엔 얇은 눈썹달이 승범을 노려보고 있었다. 한참 동안을 집 주변에서 맴돌다 다시 집으로 돌아왔어도 그 신음소리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마치 집안을 떠도는 유령처럼.

 

 

 

2.

공룡이네? 그건 왜 그리 덕지덕지 붙이는데?

어? 아, 얘는 브라키오사우르스, 스테고사우루스, 트리세라톱스…. 얘네 들이 우리 집을 지켜 줄 거야. 밤이면 하아아아악! 하고 불도 내뿜으면서.

아빠 있잖아.

아빠?

그래, 아빠. 아빤 집 안 지켜줘?

아빠는 자주 집에 없잖아. 그래서…얘네들이 필요해. 엄마랑 나랑 지켜줘야 하니까.

엄마도 지켜줘?

당연하지! 그러니까 엄마, 절대로 얘네들 건드리면 안돼. 알았지?

스티커 떼지 말라고?

응. 절대 절대 절대 떼면 안돼. 알았지?

 

승범이 아홉 살 되던 해. 조그만 아파트로 이사한 후부터 승범은 문에 스티커를 붙이기 시작했다. 여자의 방문에 구멍을 만들어 두기 위해서였다. 승범은 손재주가 좋아 여자조차 알아보지 못할 작은 틈새를 만든 후 그 뒤에 그 동안 모아둔 공룡 스티커를 사모아 덧붙였다. 심혈을 기울여 모으고 있는 공룡 시리즈 스티커라며 여자의 손이 닿지 못하게 경고도 했다. 그리고 틈틈이 구멍을 감시 했다. 남자의 폭력이 어떠한 것인지 알고 싶어서였다. 더 이상 상처 입은 여자의 손에 이끌려 자장면을 먹고 싶지 않았다. 얇은 눈썹달이 검은 구름사이로 조각조각 흩어져 가고 있던 어느 늦은 여름날 밤. 남자가 돌아왔다. 밤늦도록 남자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던 승범은 늘 그러하듯 제 방으로 달려갔다. 문을 잠그고 이불속에 누웠다. 그리고 신음소리를 기다렸다. 한 시간여가 지났을까. 승범이 깜빡 잠이 들었다고 여겼을 즈음, 꿈인지 생시인지 코끝에서 짙은 사과향이 났다. 승범은 달콤한 사과 향에 눈을 떴고 정신을 차렸다. 그러자 그리 낯설지 않은 신음소리가 수풀 속을 낮게 기어 다니던 뱀으로 변해 승범의 숨을 옭죄었다. 승범은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닫았다. 숨소리를 죽이고 까치발을 들어 신음소리가 나는 방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아이의 얼굴을 흘러내리던 땀이 서늘하게 식어 마룻바닥으로 톡, 하고 떨어져 내렸다. 승범은 공룡스티커를 붙여둔 구멍 쪽으로 쪼그려 앉았다. 트리세라톱스. 몸에 거대한 뿔이 세 개였다던 육식 공룡을, 승범은 노려봤다. 엄마를 만나려면 몸에 뿔이 세 개가 박힌 육식공룡을 죽여야 한다.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아이는 공룡을 검지로 꾸욱 눌렀다. 공룡 스티커가 구멍 속으로 밀려들어갔다. 공룡이 사라졌다. 집을 지켜 주는 한 마리의 공룡이. 이제, 엄마를 만날 시간이다.

 

승범은 마치 그 자리에 밀랍인형처럼 굳어 있었다. 심장이 두 개로 쪼개질 듯 빨리 움직였다. 몸은 이미 불덩이처럼 열이 올랐다. 여자는 침대에 사지가 묶여 있었다. 여자를 타고 있던 남자는 아주 조심스럽게 명희의 흰 살을 이빨로 짓이기다 물고 뜯었다. 청 테잎으로 침대에 묶인 여자는 힘껏 상처를 참으며 괴로운 신음소리를 냈다. 남자가 이 집을 드나들 때마다 승범이 방문 밖에서 듣던 여자의 신음소리가 선명하게 들리고 보이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자 여자의 희고 고운 살갗 위로 피가 고이기 시작했다. 여자가 흘리던 핏물이 승범에게 여자의 눈물처럼 느껴졌다. 삐익 -하고 쇠 된 이명(耳鳴)이 승범의 귀를 찔렀다. 소리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 졌다. 그러자 여자의 몸 이곳저곳에 부풀어 오르던 상처투성이가 붉은 핏물로 만들어진 꽃처럼 느껴졌다. 여자의 몸 이곳저곳에 초록색의 줄기와 잎을 지닌 꽃들이 오래 전, 자신의 몸에서 빠져나간 피를 양분 삼아 개화하기 시작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지금은 승범이 아닌 남자가 대신 그 꽃들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라고. 어릴 적, 승범의 몸에서 흘리던 피로 여자에게 피우던 꽃이 낯선 남자의 거친 손으로 만개하고 있다고 믿는다. 승범의 동공이 확대되었다. 남자의 발기가 시작 됐기 때문이다. 남자는 그의 발기한 페니스를 무기로 여자의 구멍을 찾았다. 여자는 계속해서 신음소리를 내며 괴로워했다. 그러자 승범이 입은 바지 사이로 뜨겁고 축축한 오줌이 새어 나왔다. 승범은 소리를 죽여 급히 화장실로 뛰어가 바지를 내렸다. 변기 뚜껑을 올리고 참았던 오줌을 쌌다. 승범은 한참동안 바지를 올리지 않고 자신의 것을 내려다 봤다. 그러자 자신이 검지로 찢어 죽인 트리세라톱스가 변기 속에서 솟아올라 입을 벌렸다. 거대한 뿔로 자신의 페니스를 향해 돌진해 오는 듯한 불안감을 느꼈다. 그는 재빨리 변기 뚜껑을 내리고 물을 내렸다. 승범은 크게 한숨을 쉬며 안심했다. 그리고 변기에서 몸을 돌려 바람 빠진 풍선 같은 자신의 페니스를 내려다 봤다. 툭툭, 한 두 방울씩 묽은 코피가 그 위로 떨어져 내렸다.

 

3.

흰색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이 갑각류의 외피를 두른 것처럼 딱딱하게 느껴진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정지한 것처럼 환자에게 생명의 빛이 아니라 생명이 정지한 느낌을 준다. 지금, 이 병실 안이 그렇다. 4월 같지 않은 차가운 공기 때문에선지 을씨년스러운 봄날의 날씨와 무겁게 정지한 것 같은 빛이 이끈 그림자가 병실 안에 가득했다. 의지가 사라진 생명에 이는 힘없고 차가운 기운에 명희의 손마디가 저릿저릿 아려 온다. 병충해에 말라비틀어져 괴사한 포도나무의 가지처럼 앙상하고 검은 영숙의 몸을 확인하는 일은.

 

엄마, 오늘은 기분이 좀 어때? 뭐 똑같지. 정서방은? 잘 지내. 잘해줘. 정서방이 우리한테 얼마나 잘해주니…. 지겹지도 않나, 그 말. ‘잘해줘라’라는 말. 영숙은 또 그 말을 뱉었다. 명희는 잘 알고 있다,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13년 전, 세 살짜리 승범과 함께 남자와 재혼했을 때, 명희는 자신을 흔쾌히 받아준 남자를 사랑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1년이 채 지나기 전 남자는 변태적인 성적 취향을 강요했다. 남자의 취향을 사랑이라고 받아들이기에 명희는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명희는 남자와 재혼을 했지만 명희가 아닌 승범만이 호적상 아들로 올라가 있었다. 법적으로 그녀는 동거녀였다. 남자의 첫 번째 부인이 이혼을 원치 않아 실제적으로 남자는 거의 첫 번째 부인과 지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모든 것을 속이고 명희와 살림을 차렸다. 명희가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결혼 후 2년째 되던 해였다. 이혼 수속을 밟기 위해 관련 서류를 알아보다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남자의 안팎이 얼마나 터무니없이 달랐는지를. 사실을 알고 나서 받을 충격이 너무나 클 것이란 생각에 평소 지병이 있던 영숙에겐 아무런 내색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만일 사실을 알게 되어도 이혼을 통해 남자를 벗어나 모든 것을 정리하고 승범만을 바라보며 살고 싶었다. 그런데 정작 명희를 속였던 남자는 이혼을 반대했다. 장난감을 모으는 정도로 자신을 선택했다고 여겼던 명희에게는 충격이었다. 남자는 명희를 집착했다. 자신이 즐기는 유희가 뒤따르는 고통을 참을 수 있는 여자는 흔치 않았으니까. 더군다나 똘똘하고 건강하기까지 한 사내아이까지 있다. 자신이 만들 수 없는 아이를, 이미 소유한 결혼이력이 있는 여자다. 남자는 그 둘을 동시에 잃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실패한 결혼생활에 대한 그 어떤 이력이 자신의 위대한 배경에 붙는 것이 탐탁지 않았다. 하지만 명희는 남자로부터 어떡해서든 벗어나고 싶었다. 살고 싶었으니까. 고통 없이 살고 싶었다. 그런데 정작 명희의 발목을 잡은 것은 영숙이었다. 친자 소송을 준비하고 있을 때 유방암 말기 판정을 받고 수술 준비를 해야 하는 영숙이 있었다. 그녀는 지병이었던 당뇨와 고혈압, 심근경색이 합병증이 되어 수술 자체가 어려웠다. 몸 이곳저곳에 퍼져 있던 암 덩어리를 제거 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과 경제적인 어려움이 뒤따라야 했다. 명희가 24시간 간호를 한다 해도 희망이라는 게 보이질 않을 길고 무거운 여정이었다. 그런데 그 때 남자가 나섰다.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남자는 영숙의 수술비와 수술이 끝나고 난 후 5년간의 화학요법과 지병 치료를 위해 병원 신세를 져야 했던 모든 치료비를 댔다. 뜻밖이었다. 화학요법으로 한줌의 머리카락도 남지 않은 얼굴. 혈색이라곤 찾아 볼 수 없이 검버섯이 끼고 주름이 깊게 패인 영숙의 얼굴. 바싹 마른 두 개의 입술이 들썩이며 남자에게 ‘잘해줘라’ 라는 말을 내뱉으며 공기를 간신히 밀어낼 때 명희는 가슴속에 뜨거운 불씨가 심장을 태우는 아린 느낌을 받았다. 꿀꺽. 또 한 번 명희는 어미가 삼켜내야 할 고통을 삼켰다. 어미의 고통과는 비교하지도 못할 고통이라고. 눈 한번 질끈 감고 누워 있으면 바람처럼 명희의 등을 떠밀어 언제 그랬냐는 듯 잊혀지는게 생이라고. 그런 순간을 이기지 못하면 아들과 어머니, 그리고 자신마저 잃게 될 것이란 생각에 침대 위를 뒹굴던 모든 서류를 찢었다.

 

달칵, 병원 문을 닫았다. 명희는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돌아와서 뒷설거지를 했다. 어제 저녁 설거지를 미룬 탓이었다. 육류 대신 거의 매 끼를 신선한 채소와 생선으로 요리하는 그녀는 기름기가 가득한 후라이팬을 열심히 닦아야 했다. 거의 육식위주의 식사를 하던 남편이 어제 다녀갔기 때문이다. 설거지가 끝나갈 때쯤, 명희는 수세미를 쥐고 부지런히 부엌의 이곳저곳을 닦았다. 음식들을 튀기거나 삶고 볶거나 데칠 때 각종 기름등이 뒤섞인 싱크대 주변을 조금 더 오랫동안 닦았다. 그리고 아침 준비로 어수선해 진 침실로 들어와 침대 정리를 시작하는데 발끝에 무엇인가가 걸렸다. 휴지통이 넘어진 채 명희의 발에 닿았다. 휴지통을 세우려는데 바닥에 남자가 두고 간 파일이 놓여있었다. 명희는 남자에게 전화라도 해야 할까 싶지만 바쁜 시간대라 방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가 잠깐 집에 들를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이 스쳐갔다. 하지만 명희는 스탠드 옆 화장대 위에 파일을 놓고 방을 나갔다. 그리고 거실에 와 소파에 몸을 맡겼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깨어 있었더니 약간 피곤했다. 명희는 머리를 젖히고 누웠다. 길고 흰 명희의 다리가 소파 위에 놓였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쉬고 싶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파트 소음에 눈을 떴을 때 시계는 두시 반을 가리켰다. 명희는 점심때를 놓쳤기에 간단하게 요기나 할 양으로 냉장고에서 사과 한 알을 꺼내 식탁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사과를 깎기 시작했다. 아주 천천히 날카로운 과도가 껍질을 뱉어 냈다. 잔잔한 사과향이 공기 중으로 옅게 퍼져 나갔다. 날카로운 칼이 삼분의 일정도 사과의 껍질을 뱉어 낸 후 움직임을 멈췄다. 명희는 물끄러미 과도를 내려다보았다. 껍질을 빗겨간 칼이 빛을 받아 번득였다. 탁! 사과를 깎던 명희의 손이 순간, 미끄러졌다. 과도와 함께 사과가 식탁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 명희의 두 발이 바닥에서 사라졌다.

 

 

 

마른 모래 먼지 냄새가 났다. 시험이 끝난 오후. 승범은 옆에 있던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창가에 걸터앉아 크게 한숨 들이 밀었다. 그는 시험 감독이 떠난 교실에서 왁자지껄 떠들기 시작한 아이들 무리로부터 빠져 나와 있었다. 시간은 오후 두시가 넘어 있었다. 하늘엔 먹구름이 낮게 떠 있다. 황사 때문에 황색과 회색이 혼합된 빛의 경계에 비마저 뿌릴 기세다. 그 경계에 있는 마른 모래 먼지 냄새를 승범은 좋아했다. 회색과 황색을 오가던 수채화 붓으로 대기에 모래 냄새를 칠한다는 상상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승범은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창밖으로 팔을 내밀었다. 금방이라도 포슬포슬한 모래 냄새가 손바닥 위로 한줌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드르르르르륵! 승범은 두 눈을 떴다. 진동이 느껴졌다. 교복 포켓에서 휴대전화를 꺼내들고 문자를 확인했다. 연수다. 오늘은 연수의 생일이었다. 연수는 같은 학교를 다니는 승범의 여자친구다. 시험도 끝났겠다, 생일 파티겸 연수는 승범과 시내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했다. 하지만 승범은 연수와의 약속을 건성으로 받아들였다. 연수는 시험기간이라 얼굴한번 보여주지 않았으면서 생일조차 그냥 넘어 가려는 남자친구가 야속했다. 연수는 끈질기게 승범에게 문자와 전화를 했다. 오지 않는 연락에 연수가 이토록 매달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전국 상위 1%에 드는 성적, 학교 모델로도 손색없는 외모, 거기다 거의 말이 없고 겸손하며 수줍음을 타는 성격까지 딱 여고생들이 좋아할 만한 스타일의 고등학생. 하지만 무엇보다 아이들이 승범을 좋아했던 이유는 ‘엉뚱함’ 때문이었다. 승범은 취미로 틈틈이 시나리오를 썼다. 혼자 공상하기를 즐겼고 곧잘 말도 안 되는 우주 영웅들을 담은 단편 시나리오를 써서 영화사에 보내보기도 했다. 물론 돌아오는 결과는 없었지만 그 스스로 주인공이 되어 하루를 완벽히 주인공처럼 살아 보기도 했다.

공부도 잘했고 아이돌 걸 그룹 가수처럼 얼굴도 예뻤던 연수. 승범은 연수가 좋지도 싫지도 않았다. 대부분의 영웅 영화에서 영웅들은 미녀 여자 친구에게 마음고생을 시키며 눈물을 흘리게 하는게 정석이다. 시험을 치룬 날은 늘 그랬듯 친구들과 함께 피씨방에 들러 게임을 하거나 노래방에 가 신나게 스트레스를 풀며 놀 수도 있었다. 하지만 승범은 발걸음을 집으로 향했다. 영웅의 뒤에서 혼자 눈물을 훔치게 만드는 미녀로 연수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승범은 연수가 입고 나오라고 했던 노란색 스마일 마크가 새겨진 티셔츠를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생일이니만큼 연수의 말을 들어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승범은 학교를 빠져 나와 바삐 길을 걸어 나갔다.

지난 20일 방영된 PD수첩에서는 검찰에 향응을 제공하던 스폰서 출신 제보자와 그가 기록한 실제 접대 내용 문건을 중심으로 향응과 비리로 얼룩진 검찰의 추악한 이면에 대한 의혹이 적나라하게 공개 되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승범은 삼삼오오 모여 있던 사람들과 몸이 부딪혔다. 대형 가전마트 앞, 쇼윈도우에 진열 돼있는 평면 TV에서 흘러나오던 뉴스 때문이었다. 교복바지에 손을 찔러 넣은 승범은 잠깐 멈춰 서 있었다. 낯익은 사람의 모습이 TV안에 있었다. 피식, 웃음이 흘러 나왔다. 작년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4.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폐부를 통과하기 전부터 더러운 미세 먼지들이 목구멍에 걸려 들어왔다. 승범이 쓴 열일곱 번째 씬의 장소는 이곳이다. 하늘은 희뿌옇고 구름은 낮고 음울하게 가라 앉아 있었다. 눈구름들이 하나가득이다. 최적의 날씨다. 다시 한 번 크게 한숨을 들이쉬었다. 시야에 우뚝하게 솟은 여러 개의 빌딩들이 승범의 눈높이에 맞춰 있다. 발끝을 내려다본다. 아슬아슬하게 발끝이 내려다보고 있는 사물은 빠르게 지나가는 작은 자동차와 점같이 작은 사람들의 까만 머리통이다. 승범은 검은 서류가방 두 개와 메고 있던 배낭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두 개의 서류가방을 차례대로 열었다. 시퍼런 돈다발들이 먹음직스러운 음식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배낭을 열었다. 배낭에도 만 원짜리 현금 다발이 그득하게 뒤섞여 있었다. 승범은 집으로 배달돼 오거나 남자가 비밀리에 받아둔 돈을 숨겨놓는 장소를 알고 있었다. 계절마다 들어오는 과일상자, 케익 상자 속에 묻힌 돈. 남자가 새벽에 술에 취해 차에 실려 올 때 다른 사람들의 손에 전달되는 돈뭉치가 어느 곳으로 옮겨져 보관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남자는 보안상 현재 살고 있는 부인의 집에 돈을 들고 들어오지 않았다. 철저하게 명희를 이용해 그녀의 계좌로 뇌물을 건네려는 건설업자들, 공무원들, 각 시,군 단위의 단체장들에게 돈을 받았다. 그 돈으로 땅을 샀고 명희와 영숙의 차명계좌를 통해 돈을 빼돌려 재산을 불려왔다. 승범은 어렸을 때부터 남자가 불리는 돈이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를 통해 들어오는지 잘 알고 있었다. 승범은 다시 건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서류가방을 들고 난간위에 올라섰다. 그토록 갖고 싶었던 아이폰을 살수도 있었다. 플레이스테이션3를 사고도 수십 개의 게임 CD를 살수도 있었다. 온라인 게임에 접속해 캐릭터에게 온갖 아이템을 사주고 세력을 키워 괴물을 물리치고 영주들에게 급료를 인상시켜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승범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세상을 구하는 영웅에게 세상과 소통할 수 있게 하는 힘은 오직 ‘정의’ 뿐이라 믿는다.

 

하나, 둘, 셋. 서류가방을 뒤집었다. 지폐들이 봇물 터지듯 서류가방에서 쏟아져 나왔다. 빙그르르, 빙그르르 맴을 돌며 돈은 아주 오랫동안 건물 아래로 낙하했다. 그리고 자신이 쓴 다섯 번째 시나리오를 찢어 하늘로 날려 버렸다. 다섯 번째 시나리오는 이런 식으로 세상을 향해 날리고 싶었다. 설명할 수 없는 짜릿하고 묘한 쾌감과 전율이 승범의 호흡 안에 오르내렸다. 승범은 몸을 낮췄다. 그리고 초록색 나무 잎들의 낙하지점을 계속해서 주시 했다. 크리스 마스 이틀 전이기도 해서 분주한 거리에 떨어지는 돈 때문이었는지 사람들은 금새 건물 아래로 몰려들었다. 까만 머리수가 비스켓 부스러기를 향해 돌진하는 개미떼처럼 불어났다. 사람들을 모으는 지구 인력엔 물질의 힘이 크게 작용한다는 사실을, 승범은 그때 알았다. 언론사 주변이어서 그런지 카메라 후레시가 터지기 시작했다. 승범은 재빨리 몸을 일으켜 빈 배낭을 메고 건물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그리고 건물 옥상 바로 아래층 화장실로 달려갔다. 화장실 두 번째 칸 창고 배수구 옆에 올라올 때 숨겨 두었던 철가방을 꺼냈다. 그리고 자신이 입고 있던 남자의 검은색 정장 수트를 벗어 철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모자를 꾹 눌러 쓰고 짜장면 배달원이 된 승범을 건물 꼭대기에서 돈을 뿌린 사람이라고 의심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까지 내려온 승범은 건물 앞에 우글거리던 사람들을 보았다. 돈을 주우려 몰려든 사람들, 사건을 취재하려는 기자들, 카메라맨들을 피해 천천히 거리를 빠져 나갔다. 그리고 종로 변두리 가게 뒷골목에서 철가방 안에 든 검은 정장과 셔츠를 꺼냈다.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한 필수조건. 그 조건을 음식쓰레기 통 속으로 깊숙이 처박았다. 쓰레기통의 뚜껑을 닫는데 역겨운 음식물 냄새가 피어올랐다. 피식. 입가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사건의 전말을 눈치 채고 화가 머리끝까지 난 남자는 밤에 집으로 왔다. 다짜고짜 승범의 방으로 가 방문을 잠궜다. 그리고 공부 하고 있던 승범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야구방망이로 승범의 온몸을 때렸고 성에 차지 않자 책상과 컴퓨터를 부쉈다. 그러다 방망이가 부러지자 방망이를 버리고 승범의 뺨을 미친 듯 때렸다. 승범은 살기 위해 몇 번 남자에게 저항했지만 그 스스로 반격을 포기했다. 그도 명희처럼 고통을 참는 법을 태생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승범은 일부러 온몸의 힘을 뺐다. 방문 밖에서 명희가 승범을 살리려 남자에게 애원하며 문을 열어 달라고 할 법 했지만 명희는 영숙의 치료 때문에 병원에 있었다. 승범은 남자에게 맞으면서 시체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머릿속에 단 한가지의 상상을 하면서 남자의 폭력 속에 있었다. 승범이 낮에 뿌렸던 돈을 주웠던 사람들. 그 돈으로 사람들은 맛있는 케익을 사거나 집에서 피자나 치킨을 시켜 가족들끼리 정겨운 한때를 보낼까. 부모님이나 아내와 남편에게 따뜻한 내복을 사주었을지도 모른다고. 남자 친구나 여자 친구의 손을 따뜻하게 해줄 털장갑이나 털목도리를 사주고 맛있는 밥을 사먹으며 정답게 지낼 수도 있을 사람들을 상상했다. 유일하게 상상만이 고통을 덜어준다 믿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남자의 폭력이 중단되었다. 씩씩거리며 힘을 뺀 남자의 잇몸에서 풍겨나던 단내가 공기 중에 퍼졌다. 나가기 전까지 거친 욕을 배설하고 나서야 남자는 나갔다. 승범은 핏물이 고이고 찢겨진 입술을 가늘게 들썩이며 읊조렸다. 메리크리스마스. 피식, 힘없는 웃음이 핏물과 함께 찢겨진 입술 틈새로 빠져 나왔다.

 

5.

사과가 떨어진 바닥. 그곳에서 명희의 발은 사라졌다. 승범은 명희가 사라진 곳을 알고 있다. 시험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던 날. 연수가 입고 나오라던 티셔츠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집에 돌아오던 날. 승범은 명희가 사라진 곳과 마주하고 있었다.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왔을 때 승범이 현관에서 확인했던 것은 그가 그토록 아끼던 명희의 몸이었다. 그 몸은 이제 막 살기를 거부한 것처럼 명희를 허공으로 올려준 의자를 걷어찼다. 두발이 흔들리며 허공에 박혔다. 그 속에 매달린 명희의 알몸이 어둡고 음산한 빛에 반사되어 검게 그을려 보였다. 엄마! 승범은 명희에게 달려가 그녀의 알몸을 안았다. 여기저기 멍들고 아물지 않은 상처가 검은 손톱처럼 박혀있는 여자의 몸이 승범의 가슴에 안겼다. 종아리와 허벅지께가 승범의 심장언저리에 와 닿았다. 그러자 거실 천정에 매달렸던 올가미가 힘을 잃었다. 승범은 더욱더 명희를 껴안았다. 명희는 목이 헐거워짐을 느꼈다. 콜록콜록! 생과 사에서 돌아온 숨을 몰아쉬느라 명희는 연신 기침을 해야 했다. 승범은 계속 명희를 들어 올리려 힘을 주었다. 꽈악 - 힘을 주면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가슴에서 치고 올라오는 아릿한 피내음이 또 한번 폐부를 가르는 듯 했다. 승범의 입이 덜덜 떨렸다. 어떤 말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어떤 말이라도 해야 했다. 가만가만, 승범은 자신의 감정을 눌렀다. 그리고 차분하게 마치 본드처럼 달라붙은 굳은 혀를 입속에서 떼어 놓았다.

 

내려와, 엄마.

싫어.

내려와, 그래도 내려와!

싫어….

왜!

이렇게 있을래. 이렇게 조금만… 더 있을게. 승범아, 엄마 내버려둬.

엄마….

응?

너무 오래 있지는 마….

 

승범은 올가미를 풀고 천정에서 내려 온 핏기 잃은 두 발을 쓰러졌던 의자를 일궈 세워 그곳에 올렸다. 그리고 침실로 들어가 얇은 담요를 꺼내 명희에게 건넸다. 명희는 천천히 담요를 둘렀다. 검게 그을렸던 명희의 몸이 빨간 담요에 가려졌다. 의자 위에 올라선 명희의 몸이 위태로워 보인다. 명희는 의자위에서 베란다 쪽을 내다보았다.

 

승범아, 미안해. 이런 모습 보여서…. 그런데 이 위에서 보니 하늘도 구름도 새도…. 전부다 다르게 보인다. 조금 더 위에서 내려다 본 것뿐인데 딴 세상 같아서 내려가고 싶지 않아….

 

승범은 베란다 쪽을 내다보고 있는 명희의 뒤에 앉아 있었다. 무릎을 세워 앉아 명희가 서 있는 세상을 조금 더 오래 지켜 볼 수 있도록 그녀를 기다렸다. 명희가 담요를 몸에 두르고 천천히 거실 바닥으로 내려왔을 때 승범은 그녀를 따라 명희의 침실로 향했다. 명희가 침대에 들었을 때 승범은 가슴께까지 이불을 덮어 주었다. 명희는 자신의 가슴께로 올라오던 승범의 손을 덥석 잡았다. 승범은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명희가 베고 있던 흰 베개 위로 또르르, 말간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감은 두 눈이 밀어내는 뜨거운 눈물이 베개 위에서 호수에 이는 작은 파문처럼 번져갔다. 승범은 슬그머니 손을 뺐다. 그러자 손을 놓은 명희가 돌아누웠다. 승범은 명희 곁에 계속 있었다. 그녀가 잠들기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숨소리가 잦아졌을 때 조용히 밖으로 나와 제 방으로 돌아갔다. 방으로 돌아와 책상 의자에 앉자 연락을 기다리는 연수의 부재중 전화가 빼곡한 휴대전화가 신호음을 내고 있었다. 승범은 전화기를 껐다. 그리고 제 방에서 나와 거실을 정리했다. 그러다 가만히 베란다 밖을 응시했다. 명희의 말처럼 조금 더 위에서 내려다 본 하늘의 정경을 상상했다. 작년에 돈을 뿌렸던 고층 빌딩 위에서 그가 그랬듯 세상은 조금 더 위에서 바라보기만 해도 충분히 달라 보였다. 엄마의 말이 옳다고 믿었다. 승범은 베란다 문을 열었다. 누런 모래 먼지가 가득한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몰려 있었다. 고개를 돌렸다. 베란다 복도 깊은 곳, 건조대 위에 티셔츠 하나가 빨래들 속에서 노란 웃음을 짓고 있었다. 스마― 일. 슬리퍼를 신고 건조대 근처로 가니 아직 마르지 않은 티셔츠가 물기에 젖어 있다. 날씨도 좋지 않으니 오늘 안으로 마르기는 힘들 것 같다. 베란다 안쪽을 둘러본다. 안쪽은 명희의 방과 연결되어 있는 통유리 문으로 베란다와 방을 가르는 형태다. 유리문에 기대어 커튼 안쪽을 세심히 살펴본다. 침대에 잠든 명희가 보인다. 편안해 보인다. 승범은 계속 이렇게 명희를 지켜보고 지켜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승범의 생각은 어긋났다. 명희의 방으로 남자가 들어온 것이다. 흰 셔츠에 검은 정장을 입은, 훌륭한 남자가.

 

6.

방에 들어온 남자가 입었던 옷이 바닥에 떨어졌다. 검은 바지와 흰 셔츠를 벗은 남자가 곧바로 명희 위로 포개졌다. 잠에서 깬 명희는 남자를 보고 놀랍고 당황해 한다. 승범은 베란다 벽 뒤로 깊숙이 숨었다. 알 수 없는 두려움과 불안감이 낮게 흐르고 있는 먹구름 사이로 흘러갔다. 어느새 먹구름 사이로 스멀스멀 비집고 들어온 아주 오래된 분노가 물을 머금은 스폰지처럼 부풀어 있었다. 냄새가 났다.

 

통유리 사이로 상이한 피가 남자의 발기를 돕는 냄새.

 

명희는 묶이기 시작했다. 또다시 작은 문구멍으로 그녀를 지켜보았던 때처럼. 명희는 테이프로 침대에 사지가 묶여 있다. 남자가 또다시 명희의 몸에 꽃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을 이빨로 물어뜯어 상처 내고 피를 보였다. 그리고 남자는 있는 힘껏 명희의 얼굴을 난타했다. 찢겨 피가 흐르고 서서히 부풀어 오르는 명희의 부푼 눈에서 저항이란 말은 찾아 볼 수가 없다. 남자는 여자의 찢겨진 눈에 오래토록 키스 한다. 그리고 침을 뱉는다. 남자의 몸 밑바닥부터 끓어 올린 노란 가래가 여자의 눈두덩이에 우박처럼 박혔다. 명희는 저항했다. 입을 묶인 그녀는 애원하듯 살려달라고 울부짖었다. 하지만 남자는 아무런 표정이 없다. 저항할수록 남자의 흥분은 길어질 뿐이었다. 승범은 딱딱하게 부풀어 있는 그리 낯설지 않은 남자의 음경을 바라봤다 그리고 한때 오랜 시간 자신을 품었던 명희의 따뜻한 자궁을 상상하며 눈을 감았다. 편안하고 따스한, 하지만 무엇인가 사무치는 기운이 심장을 꿰뚫었다. 온몸이 긴장에서 이완되며 노곤해 지는 느낌을 받았다. 승범은 눈을 떴다. 남자를 부정하기 위해 눈을 떴다. 승범은 남자의 발기를 돕고 있는 더러운 피를 멈춰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여자의 몸에서 핏물을 먹고 자라는 꽃을 거둘 때라고. 영웅의 등장이 필요할 때라고 여겼다. 승범은 베란다를 빠져 나왔다. 그리고 주방으로 걸어갔다. 식탁 바닥에 떨어진 사과를 접시위에 올려놓고 옆에 있던 과도를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여자의 침실로 향했다. 문손잡이를 돌렸다. 다행히, 방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

 

승범은 들숨과 날숨의 고른 경계면을 빗겨 가고 있다고 믿었다. 그는 호흡의 템포를 일정하게 맞추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그는 그 경계를 상실한지 오래다. 그의 의식은 이미 빛처럼 육신을 빠져 나갔다. 그는 정지했다, 약 30분 즈음 전부터. 승범은 남자의 더부룩한 배에 과도를 들이 밀었다. 그리고 오직 시간만이 남자의 죽음을 재촉해 줄 것이라 믿고 있었다. 하지만 승범의 등 뒤에서 누군가 그를 밀쳐냈다. 명희였다. 침대에 묶여 있던 명희는 칼을 들고 들어온 승범에 의해 풀려났다. 하지만 명희는 남자를 찌르려던 승범을 밀쳤다. 방바닥에 쓰러진 승범을 향해 자신의 뱃속으로 들어온 칼을 뽑아 아무렇지 않게 승범을 찌른 것은 남자였다. 남자는 피를 흘리며 방바닥에 누워 가쁜 숨을 내쉬고 있다. 손으로 움켜쥔 내장 사이에 검붉은 피가 시소를 타듯 오르락내리락 한다. 어렸을 때 흘렸던 모든 피를 바닥에 쏟아 내듯 피를 내뿜으며 멍하니 한곳에 시선을 두고 있는 것은, 승범이었다. 그는 아주 가벼운 몸으로 아무런 고통 없이 더 이상 횡격막이 시소를 타지 않는 자신의 시체를 내려다보고 있다. 조금 더 높은 곳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열일곱, 이제 막 건강한 기운을 내뿜으며 발기할 한 생명은 정지했다. 승범은 이제 발기할 수 없다. 그가 그토록 사랑하던 여자. 승범의 어미는 전라의 몸으로 피투성이가 된 침실바닥에서 엎드려 흐느끼고 있다. 똑…, 똑…. 승범의 코에서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사체가 흘리는 핏물 뒤로 희미한 웃음 같은 울음이 여자의 어깨를 불규칙하게 들썩이게 한다. 화염이 훑고 간 그을음을 닮은 여자의 울음. 그 울음소리가 오후 네 시의 구름을 느리게 밀어내며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