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스
- 작성일 2010-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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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내 나이 이제 스물이다. 지금 나는 난생처음 여자의 벗은 몸을 보고 있다. 물기를 잃은 나무껍질처럼 생기 없는 젖가슴. 갈라지고 터져 흉측하기까지 한 뱃가죽. 저절로 인상이 찡그려지다 문득 숯검정처럼 시커먼 그곳으로 시선이 간다. 내가 살겠다고 저기서 빠져나와 울부짖으며 젖꼭지를 찾아 헤맸었나 싶다. 기억에 없는 일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다. 이 늙고 병든 여자를 나는 엄마라 부를 수 없다. 낯설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모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엄마의 이름은 이제부터 당신이다.
아빠는 내가 말귀를 알아듣기 시작할 때부터 당신에 대한 적개심을 퍼붓곤 했다. “내가 말이다, 동네 아줌마들 쫓아다니며 젖동냥해서 널 키웠다. 아느냐? 아무리 미워도 젖먹일 팽개치고 도망을 쳐. 그게 말이 되냔 말이다. 에이 몹쓸 것. 이놈아, 내 말이 맞아 틀려?” 귀청에 굳은살이 베길 정도로 들었던 아빠의 술주정을 어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당신이 집을 나간 것이 마치 내 탓이라도 되는 양 욕지기를 퍼부으며 소주병을 집어던졌던 아빠. 그런 아빠가 죽고 나니 불쑥 나타난 당신. 나는 왜 이렇게 인복이 지지리도 없는 것일까. 기가 막혀 미친 듯 날뛰어도 모자란 일이다.
타월을 깐 욕조에 당신을 내려놓는다. 튜브를 목뒤에 받혀준다. 비누거품을 낸 목욕타월로 당신을 씻긴다. 갓 연애를 시작해 연인을 만지듯 내 손길은 조심스럽다. 맘껏 힘을 줄 수가 없다. 야윈 살이 두부처럼 약해 부서질 것 같기 때문이다. 히히. 시원해서일까. 뭐가 그리 좋은지 당신은 웃는다. 기꺼이 당신을 간호하고 싶지만 울컥 억울함이 치밀어 오른다. 열 손가락 모두가 떨려온다. 당신 때문에 난 밤마다 소주병을 피해 다니는 서커스를 해야 했어. 웃지 마. 이렇게 치매에 반수불수가 돼서 나타났다고 내가 받아줄 줄 알았어? 그래 당신도 나처럼 소주병을 피해 도망쳤을 테지. 어쩔 수 없었다고? 좋아. 근데 왜 난 버리고 갔어? 나도 데리고 갔어야지……. 절대 난, 당신을 용서할 수 없어.
“어머니가 뺑소니를 당했어요. 모른다고요? 휴대폰 일번에 아들이라고 저장돼 있던데요, 암튼 위독하니까 빨리 병원으로 오세요.” 나는 병원으로 택시를 몰고 가면서 수십 번도 넘게 유턴을 하려고 했다. 중환자실에서 당신은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당신의 소지품에서 내 사진이 나왔다. 아빠의 빈소 앞에 멍하니 앉아있는 나였다. 어떻게 알고 찾아왔을까? 나는 당신의 존재나 사고보다 더 큰 충격을 받았다. 내 연락처를 알고 있으면서도 전화 한번 하지 않은 당신. 그런 당신을 내가 어떻게 엄마로 인정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당신을 집으로 데려온 나. 그때 나는 반쯤 미쳐있었을 것이다.
“가만히 좀 있어. 버둥거리지 말고.” 당신은 수저도 들 힘이 없는 손으로 내 얼굴을 만진다. 나는 제멋대로 움직이는 당신의 손을 붙잡는다. 그리고 당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는다. 당신이 곶감처럼 쪼그라든 젖을 말아 올린다. 당신은 자기 젖을 빨아먹으라는 듯 기를 쓴다. 당신은 부질없는 짓을 하고 있다. 당신은 나한테 단 한 번도 젖을 물린 적이 없다. 역겨울 뿐이다. 징글징글하다. 나는 당신을 언제 버릴지 모른다. 그런데도 당신은 항상 웃는 낯이다. 차라리 겁먹은 눈빛으로 내 눈을 피했다면 화가 나지는 않았을 터다. 더 이상 당신의 웃음소리를 듣고 있을 수가 없다. 나는 타월로 물기를 닦고 당신을 안아든다. 서둘러 당신에게 죽을 먹이고 도로로 나가고 싶다. 당신에게 성인용 기저귀를 채우고 헐렁한 옷을 입힌다. 당신이 또 웃는다. 대체 이 소름 돋는 기분 나쁜 웃음은 무슨 뜻일까. 히히. 어어어. 짜증이 모든 땀구멍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것 같다. 당신이 뱉어낸 공기를 다시 들이마셔야 한다는 것이 참기 힘겹다. 피곤에 찌든 몸뚱어리가 더욱 무거워진다. 죽을 거면 제발 빨리 죽어! 차마 해서는 안 될 말이 앞니에 부딪쳤다 사라진다. 먹이를 달라고 수면에 주둥이를 대고 뻐끔거리는 어항 속 물고기들 같은 당신의 입속으로 수저를 밀어 넣는다. 넘기는 것보다 흘리는 것이 더 많다. 턱밑에 손수건을 댄다. 당신이 또 몸부림친다.
“좀 흘리지 말고 먹어.” 내 입에서 밥알 몇 개가 튀어나간다. 당신은 오그라든 손으로 힘겹게 밥알을 집는다. 그리고 손등으로 내 입가에 묻은 물기를 닦는다. 살갗이 닿자 나도 모르게 인상을 구긴다. 나는 수저를 내려놓고 상을 구석으로 민다. 당신을 눕히고 문 앞에 선다. 뒤집힌 게처럼 몸을 뒤트는 당신을 힐끔 돌아본다. 방문을 걸어 잠근다. 반쯤 보이는 창문에 문득 시선이 걸린다. 외등의 여린 불빛에 언뜻 비치는 둥그런 형체가 있다. 그것을 찬찬히 훑어본다. 호박이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화단에 열매가 맺히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당신이 방문을 긁어댄다. 나는 귀를 막고 밖으로 나간다. 길고양이 한 마리가 쓰레기봉투를 헤집고 있다. 고양이와 눈이 마주친다. 고양이가 나를 노려본다. 전혀 물러설 기세가 아니다. 나는 밤톨만한 돌을 집어 고양이에게 던진다. 고양이는 쏜살같이 도망친다. 죽도록 하기 싫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도리가 있다면 나는 그 도리를 할 만큼 하고 있는 거다. 이제 도로로 나가 브레이크 없는 차를 몰고 싶다. 그렇게 달리다 하늘로 떠올라 어딘가로 사라지고 싶다. 그것으로 내 몫이 모두 끝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새벽 세시. 택시 안에서 로댕의 키스를 본다. 언제나 그렇듯 사진 속 남녀가 나를 흥분시킨다. 욕을 입에 달고 사는 그녀가 다가온다. 나는 화집을 접고 시동을 건다. 그녀는 차문을 거칠게 닫고 욕을 내뱉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좋다. 일을 하지 않고 자유롭게 달릴 수 있는 자유를 선물한 그녀가 고마울 뿐이다.
일주일 전 나는 그녀를 택시에 태웠다. 만취한 듯 비틀거렸지만 묘하게도 은은한 비누냄새를 풍겼다. 다소 꺼림칙했지만 멀지 않은 거리라 걱정은 하지 않았다. 백여 미터쯤 달리다 신호에 걸렸다. 그때 그녀가 내 뒤통수에 방금 먹은 것을 죄다 토해냈다. 시큼한 위액 냄새와 술 냄새가 차안에 가득 찼다. 소화되지 않은 물컹한 과일덩어리들이 목뒤에서 만져졌다. 급히 차를 세웠다. 몹시 짜증이 났다. 하지만 정신없이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그녀를 벤치에 앉히고 수건과 물병을 건넸다. “괜찮아요?” 모자를 깊이 눌러쓴 그녀의 입가에 주름이 잡혔다. 그녀는 입가를 쓱 닦고 물로 입안을 헹궜다. 나는 머리칼에 묻은 토사물을 털어내고 차안을 닦았다. 차안에 퍼진 고약한 쉰내는 그대로였다. 차문을 모두 열어놓고 그녀 옆에 앉았다. 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왠지 애처로워 보였다. 주머니에서 페퍼민트 사탕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입안을 상쾌하게 해준대요.” 나는 사탕케이스에 새겨진 문구를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그녀가 재채기하듯 풋 웃고는 고개를 들었다. 얇은 창호지 같은 낯빛에 검은 눈동자가 선히 빛났다. 붉은 기운이 거의 없는 입술이 열리며 하얀 이가 드러났다. “야! 너도 나 어떻게 해보고 싶어?” 어처구니없는 질문이었다. 아뇨. 난 여자한테 관심 없어요. 그녀가 비스듬히 고개를 들어 내 눈을 바라봤다. 내가 눈길을 피하자 그녀는 일어나서 자꾸 눈을 맞추려고 했다. 왜요, 관심 없다니까요. 그녀가 짐짓 미안한 표정으로 내 어깨를 툭 쳤다. “너, 참 착한 남자구나. 내일도 올래? 요금에 동그라미 하나 더 붙여 줄게, 좋지?” 좋았다. 그녀에게 페퍼민트 사탕과 토한 것을 치워준 대가치고는 꽤 남는 장사였다.
그날 이후 나는 그녀의 기사가 되었다. 그녀는 나보다 서너 살 정도 많은 것 같았다. 늘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다녔지만 얼굴과 눈에선 투명하고 말간 빛이 배어나왔다. 군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몸매에 피부까지 아이처럼 깨끗했다. 있는 듯 없는 듯한 얼굴 솜털에 항상 갓 세수한 듯 물기로 젖어있었다. 그녀는 왜 화장을 모두 지우는 것일까. 이유가 궁금해 물어볼까 며칠 고민하다 그만두었다. 빛바랜 청바지와 몸에 착 달라붙는 티셔츠를 그녀는 자주 입었다. 가까이 다가가 볼 수는 없었지만 푸르스름한 핏줄이 피부 속에서 비치는 듯도 했다. 목소리를 높일 때마다 입술 가까이 잡히는 주름도 매력적이었다. 그녀는 전혀 텐프로에서 일하는 여자 같지 않았다. 그녀는 입이 거친 편이었다. 차문을 닫자마자 욕설을 내뱉었다. “개새끼야! 난 이차 절대 안 나간다구. 알아들어! 알겠어?” 나는 당혹스러워 쩔쩔맸다. 그러면 그녀는 금세 한마디를 덧붙었다. “미안. 너한테 한 말 아냐.” 나한테 한 욕이었어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같은 연립 이층에 사는 아빠 친구의 개인택시를 밤에만 몰며 돈벌이를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번 돈의 절반을 건네고 가스를 채우고 나면 내 손에 남는 것은 거의 없었다. 그런 나에게 그녀는 행운이었다.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고 요금에 공을 하나 더 받으면 그것으로 대만족이다.
그녀가 차문을 연다. 민트향 사탕 두어 개를 그녀의 손바닥에 떨어뜨린다. 그녀가 욕 대신 찡긋 웃어 보인다. 비누냄새가 손끝에 닿는다. 기분이 좋아진다. 엑셀을 밟는 오른발에 힘이 들어간다.
묽은 연갈색 변이 묻은 기저귀를 빼낸다. 물 티슈로 엉덩이 사이를 닦는다. 불쾌한 냄새 때문인가. 한 달 넘도록 해오는 일이 익숙해지지 않는다. 오늘은 소고기죽을 만든다. 믹서로 간 소고기와 빻아놓은 쌀을 넣고 볶는다. 물을 붓고 된장을 약간 넣는다. 보글보글 흰 거품을 내며 끓어오르면 약한 불로 줄인다. 이제 걸쭉해 질 때까지 잘 저으면 완성이다. 당신과 나는 한 번도 대화를 나누며 밥을 먹어 본 적이 없다. 그러니 내가 당신의 입맛을 알 리가 없다. 소금간은 내 입맛에 맞출 것이다. 당신에게 죽을 떠먹인다. 흘리는 게 더 많다. 당신은 혀를 요리조리 굴려 입가에 묻은 죽을 핥는다.
뇌좌상 후유증은 완치가 없어요. 치매는 사고 전부터 꽤 진행된 것 같고, 병원에선 더이상 치료할 방법은 없어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내원해서 물리치료 받으세요. 의사는 지극히 사무적인 말투로 말했다. “맛있어?” 당신이 웃으며 양손을 버둥거린다. 퇴원할 때보다 꽤 힘이 붙어 있다. 대답 없는 당신과 나는 미주알고주알 대화를 시작한다. 당신은 모르겠지. 아빠는 집에 있을 때마다 늘 취해있었어. 당신이 집을 뛰쳐나가고 아빠는, 안주도 없이 소주 서너 병을 마시고서야 잠이 들었어. 하지만 아빤 당신처럼 무책임하진 않았어. 성실한 사람이었어. 그 힘든 야간택시 일을 남들보다 두어 시간 더 했으니까. 아침마다 내 책가방 위에는 이삼 만원이 놓여 있었어. 끼니를 챙겨주는 사람이 없었기에 난 항상 배가 고팠어. 아빠가 준 돈으로 난 눈에 보이는 음식들을 닥치는 대로 사먹었어.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뱃속이 야속했지만 난 아빠 덕에 굶어죽진 않았어. 아빠는 아주 가끔 나를 조수석에 태우고 고속도로를 날아가듯 달리곤 했어. 분명 도로에 떠 있는 느낌이었어. 내가 창을 조금 내리기라도 하면 엄청난 굉음과 바람이 나를 휘청거리게 했어. 기분이 좋았어. 모든 창을 활짝 열어도 아빤 날 말리지 않았어. 가출을 했을 때,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비싼 차를 부순 이유로 세 달가량 구치소에 있을 때에도 아빤 날 혼내지 않았어. 아빠가 도로에서 죽었을 때 난 정말 슬펐어. 당신도 슬펐다고? 그랬겠지. 당신에게 생활비를 대줬으니까. 당신이 요양병원에서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다 아빠가 밤잠을 줄여가며 번 돈을 보냈기 때문이야. 당신의 소지품을 찾으러갔을 때 병원에서 알려줬어. 아빠도 참 대단해. 어떻게 그 사실을 끝까지 나한테 비밀로 할 수 있었을까? 혹시 내가 상처 받을까봐. 아니면 내가 당신을 붙잡고 신세한탕을 할까봐. 글쎄 난 둘 다 아니었을 것 같아. 당신을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을까. 아빤 유산도 남겼어. 반지하 낡은 연립이지만 방 두 칸짜리 집과 몇 년은 배고프지 않을 만큼의 돈까지. 근데 그 돈을 병원에서 전부 가져가더라. 어쩜 액수까지 딱 맞춰서. 한순간에 빈털터리가 됐는데 마냥 웃음만 나왔어. 도대체 뭐야, 당신은? 이렇게 불쑥 나타나서 미안했단 사과 한마디 안 하고, 내 모든 걸 망쳐놓고 있잖아. 알아? 당신은 언제나처럼 멍청하게 웃고만 있다. 이렇다 저렇다 반응이 없는 당신을 괴롭히는 게 지루하고 시시해진다. 당신을 눕히고 불을 끈다. 냉장고에서 소주 한 병을 꺼내 단숨에 들이킨다. 식도부터 위장까지 찌릿하게 저려온다. 괴로움을 잊게 하는 마법 같은 술의 힘. 그래서 아빠는 하루의 끝을 항상 술로 마무리했던 것이겠지. 또다시 의문이 머리를 어지럽게 만든다. 아빠는 왜 당신의 존재를 끝내 말하지 않았을까?
새벽 세시 삼십분. 그녀가 택시로 다가온다. 그녀는 많이 취한 것 같다. 하지만 그녀에게선 술 냄새보다 기분 좋은 비누냄새가 더 많이 난다. 기분이 좋아진다. “짐승 같은 수컷들. 너도 똑같지?” 난데없는 그녀의 질문에 할 말이 없다. 넌지시 뒤를 돌아다본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다. 그녀가 내 불안한 눈길을 피한다. “너한테 한 말 아냐, 가자.” 그녀는 다리를 가슴께로 당겨 끌어안고 고개를 파묻는다. 나는 기어를 넣고 평소보다 천천히 차를 운전한다. “너 술 잘 마시니?” 백미러에 얼핏 비친 그녀는 긴 발가락을 까딱거리며 몸을 옹그리고 있다. 나는 뭐라 대꾸해야 할 지 몰라 한참 망설인다. 너 밥 잘 먹어? 라고 묻는 듯했기 때문이다. “술 잘 마시냐고!”그녀의 목소리가 높고 날카로워진다. “네, 잘 마셔요. 왜요?” 나는 그녀의 눈치를 살핀다. 그녀가 넋두리 하듯 느릿느릿 말을 잇는다.
“오늘 발정난 개새끼처럼 혓바닥을 삐죽 내밀고 한 남자가 말하더라. 자기가 날 구원해 줄 거라면서, 미친 새끼. 소는 태어날 때 풀을 소화시킬 수 있는 효소가 없이 태어난데. 근데 어떻게 소는 풀을 먹고 살까? 그건 어미소가 새끼의 입가를 핥아주면서 풀을 소화시킬 수 있는 효소가 새끼소로 넘어가는 거래. 신비롭지. 아름답기도 하고. 난 술을 소화시킬 수 있는 효소가 없이 태어났나봐. 술 마시는 거 진짜 괴로워 죽겠어. 마시지 말라고? 나도 마시기 싫어! 하기 싫은 거 억지로 하니까 더 괴로운 거야. 술 잘 먹는 니가 나 좀 핥아줄래? 나도 술 좀 편히 마실 수 있게. 그 개 같은 새끼처럼 징그럽게 냄새나는 혓바닥 날름거리지 말고.”
숨이 막힌다. 긴 한숨이 연방 나온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파묻고 말이 없다. 그녀는 잠들었을 거다. 어쩌면 그녀도 나처럼 하기 싫은 일을 어쩔 수 없이 매일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텅 빈 도로를 맘껏 달리지 못하는 것은 잠을 재우지 않는 고문처럼 괴로운 일이다. 그런데도 나는 엑셀을 힘껏 밟지 못하고 있다. “따뜻한 커피 사다줄래?” 그녀가 지폐를 내 어깨에 대고 흔든다. 나는 돈을 받지 않는다. 24시간 운영하는 스타벅스 앞에 차를 세운다. 커피를 주문하고 창밖을 내다본다. 고장 난 신호등을 무시하고 쏜살같이 질주하는 오토바이. 굉음의 여진이 아직 귓속에서 울리고 있다. 그녀는 지금 무슨 생각에 잠겨 있을까? 커피에 설탕시럽을 넣고 스트로를 챙긴다. 그녀에게 커피를 건넨다. “조심해요, 뜨거워요.” 그녀는 커피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차에서 내린다. 인도 끄트머리에 주저앉으며 나에게도 나오라는 손짓을 한다. 무척 슬퍼 보인다. 나는 그녀 옆에 앉아 커피를 빨아마셨다. 너무 뜨거워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녀가 내 어깨에 살포시 기댔다. “사는 거 참 지긋지긋하다. 넌 사는 거 재밌니?” 그녀의 어깨가 경련하듯 흔들렸다. 나는 대답 대신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려고 손을 뻗었다. 내 손끝이 그녀의 등에 닿자 그녀가 말했다. “그냥 있어. 허락하기 전까진 내 몸에 손대지 마.” 불현듯 현기증이 인다. 나는 손길을 거둔다. 손바닥에 끈끈한 것이 느껴진다. 불쾌감이 손목을 타고 목구멍까지 올라온다. 그녀는 커피가 차갑게 식을 때까지 한모금도 입에 대지 않았다.
어어어. 일을 나가야 하는데 당신이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붙잡힌 팔을 떼어내면 다시 붙잡고 늘어진다.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끌려나오다 문턱에 부딪친다. 당신의 턱이 벌겋게 부어오른다. 시간이 계속 지체된다. 다른 건 몰라도 여자를 집에 데려다 주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않을 수는 없다. 어쩔 수 없이 당신을 택시에 태운다. 안전벨트를 채우자 당신은 얌전해진다. 창을 긁어대며 방긋이 웃는다. 늦지 않기 위해 속력을 낸다. 당신의 웃는 소리가 점점 커진다. 갑자기 차창이 부서지도록 세게 두드린다. 창을 열어준다. 시원한 밤바람이 불어온다. 당신의 미간과 콧잔등에 잔주름이 진하게 잡힌다. 창밖으로 손을 내밀어 위아래로 휘젓는다.
그녀가 보인다. 서서히 속도를 줄인다. 그녀가 깡충 뛰어오르며 손을 흔든다. 화장을 한 듯 이목구비가 또렷하다. 취하지 않은 것도 처음인 것 같다. “누구야?” 조수석으로 다가와 그녀가 묻는다. “엄, 엄마예요.” 입술이 열리며 튀어나간 엄마라는 말에 나는 깜짝 놀란다. 그녀는 신기한 듯 당신을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당신은 환하게 웃으며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아아아. 히히. 당황한 듯 그녀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된다. “미, 미안해요. 엄마가 많이 아프셔서. 정신이 좀 없으세요.” 나는 당신의 팔을 잽싸게 붙잡는다. “괜찮아.” 그녀는 짐짓 싫지 않은 표정으로 당신의 손에 뺨을 대고 있다. “너, 엄마한테도 참 잘하는구나.” 돌연 부정맥이 일어난 것처럼 심장이 요동친다. 나는 버럭 소리친다.
“그딴 소리 하지 말고 빨리 타요!”
“어머, 왜 화를 내. 칭찬한 건데.”
“아아아. 바아아.”
“네? 어머니, 뭐라고요?” 그녀가 날 빤히 쳐다본다.
“엄마 고향이 바닷가였데요.”
“아, 그럼 우리 바다 보러가자.”
“싫어요!”
“오늘 내 생일이야.”
“그래서요, 뭐 어쩌라고요?”
“나 바다 보고 싶어. 바다에 데려다 줘.” 그녀가 애교를 섞어가며 바다에 가자고 계속 졸라댄다.
“일단 어머니부터 뒷자리로 옮기자, 빨리!” 어쩔 수 없다. 나는 당신을 안아 뒷자리로 옮긴다. 바다를 향해 달리는 내내 당신은 그녀의 무릎을 베고 잠들어 있다. 바다에 도착한 후에도 당신은 깨어나지 않는다. 그녀가 모래밭을 뛰어다닌다. 무리지어 날아가는 갈매기 떼를 흉내 내며 두 팔을 휘젓는다. 나를 향해 다가오더니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고 묻는다.
“꿈 있어? 꿈. 넌 꿈이 뭐야?”
나는 그녀에게 로댕의 화집을 펼쳐 키스를 보여준다.
“키스? 키스하고 싶다고?”
“아뇨. 파리에 가서 로댕의 키스를 보는 거예요. 처음 키스의 조각을 보고 꼭 직접 보고 싶단 생각을 했거든요.”
“그래, 그럼 우리 같이 파리에 가서 로댕의 키스를 직접 보고, 찐한 키스도 직접 해볼까, 좋지?” 그녀는 참으로 얄궂은 말장난을 하고 있다.
“지금은 돈도 없고 엄마 때문에 안돼요. 엄마 죽으면 그때 갈 거예요.” “엄마가 죽으면? 너 꼭 엄마가 죽길 바라는 사람 같다.”
“맞아요, 빨리 죽었으면 좋겠어요! 왜요?”
“너 나쁘다, 그런 말이 어딨니?”
“왜, 왜요? 그러면 안돼요? 저 여잔 날 낳자마자 버렸다고요!”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차에서 자고 있는 당신을 노려보았다. 그녀는 바다로 시선을 돌리고 말했다.
“이해해. 너도 나처럼 가여운 인생이구나. 난 아빠한테 늘 맞고 자랐는데……. 그래도 엄마는 엄마야. 아, 내가 잘 아는 요양병원이 있어, 니가 날 바다에 데려다줬으니까 내가 널 파리에 데려다줄게. 어머님 걱정은 잠시 접고 파리에 가는 거야. 나 돈 많아. 너보다 동그라미 하나는 더 벌걸.” 묻지도 않았는데 그녀가 자신의 꿈을 덧붙인다.
“내 꿈은 예쁜 사랑이야. 내 꿈, 진짜 별거 아니지. 요즘 같은 세상에 정말 흔하디흔한 게 사랑이니까.”
그녀의 여행제안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구원의 탈출구 같았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그녀는 당신과 얼굴을 맞대고 잠들었다. 예쁜 사랑? 대체 그런 사랑은 뭘까? 생각이 깊어질수록 머리가 지끈 아파온다.
“오늘 고마웠어. 가는 거다, 파리에.” 그녀는 방석을 돌돌 말아 당신의 머리에 받쳐주고 내렸다. 주차를 하고 당신을 안아 집으로 들어가려는데 느닷없이 당신이 손을 쭉 뻗었다. 당신의 손끝은 호박을 가리키고 있었다. 뻗대는 힘이 여간 아니었다. 힘에 겨워 조심조심 계단을 내려갔다. 호박을 향해 고개를 젖히는 것이 간절해 보였다. 당신을 방에 눕히고 나는 호박을 따왔다. 거미줄과 흙먼지를 물로 씻어내고 물기까지 훔쳤다. 윤기가 빛나는 진녹색으로 통통하게 잘 익어있었다. 당신의 머리맡에 호박을 놓아주었다. 당신은 호박을 쓰다듬고 핥다가 이윽고 잠들었다.
며칠 후 당신을 용인에 있는 요양전문병원에 데려갔다. 그녀는 한 달 치 병원비와 재활치료비를 미리 계산했다. 당신은 그녀를 보자마자 두 팔을 휘저으며 알은 체를 했다. 그녀가 당신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아아가야.” 당신이 그녀에게 칭얼거린다. 나는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어머님은 아무 걱정 마시고 예서 푹 쉬고 계세요.” 그녀는 당신에게 마냥 상냥했다. 당신에게 살갑게 구는 그녀가 낯설다. 당신이 그녀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녀는 당신을 가슴에 꼭 안았다. 당신은 옹알이하는 갓난아이처럼 중얼거렸다. 아아아아.
꿈이 있었다. 그 꿈이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나는 대리석에 조각된 육감적인 몸매의 남녀를 보고 있다. 남자 목을 부드럽게 휘감고 돌아가는 여자의 팔과 거친 근육이 단단한 남자의 팔이 여자의 둔부에 내려앉아 있다. 여자의 몸과 조심스럽게 소통하고 있는 남자의 손엔 애정이 그득하다. 봉긋한 여인의 젖가슴과 자연스럽게 휘어진 등엔 생명력이 넘친다. 천재 조각가 로댕의 키스. 그가 창조한 키스는 대화다. 키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숨결에 담아 전달한다. 서로 다른 숨이 키스하는 동안 하나의 숨으로 모아진다. 키스하며 서로를 음미하고 보듬는다. 때로는 체액을 주고받으며 호흡을 공유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키스하며 눈을 감는 것일까. 가장 부드럽고 예민한 입술을 하나로 연결해 어서 마음의 빗장을 활짝 열라고. 키스의 의미를 알 것도 같다. 그것은 어쩌면 완전무결한 사랑의 소통일지도 모른다. 보일 듯 말 듯한 남녀의 표정 뒤엔 아무런 의심도 없이 영혼의 교감이 진행되고 있는 것일까? 맞닿은 서로의 입술에서 가장 순결한 욕망이 뿜어져 나온다. 나는 몹시 흥분해 있다. 나는 로댕의 키스처럼 저 숨 막이는 남녀의 호흡을 다시 맛보고 싶은 것이다. 이 조각을 거리에서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심장이 멎는 듯했다.
“로댕의 키스, 정말 매혹적이야. 아름다워, 감동이야.” 그녀는 내가 자리를 뜰 때까지 내 옆에 서 있었다. 파리의 높고도 푸른 하늘은 가슴을 탁 트이게 만들어주었다. 그녀는 저만치 서너 걸음 앞서 나갔다. 이따금 뒤를 돌아보며 내가 따라오는지 확인했다. 나무로 만들어진 퐁네프의 다리에는 연인들이 많았다. 그들은 세느강을 내려다보며 사랑을 속삭였다. 타인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키스를 하는 커플도 많았다. 특히 백발이 성성한 노부부의 볼키스는 충격적이었다. 책을 읽고 있는 할아버지 어깨에 할머니가 기대어 잠이 들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오른손을 잡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한손으로 어렵게 책장을 넘겼다. 할머니가 깨어나 고개를 돌리면 할아버지는 볼을 갖다 대고 비볐다.
“감동이다 정말. 참 아름답지. 저 할아버지랑 할머니 백 살도 넘은 것 같아. 저런 모습이 바로 내가 말한 예쁜 사랑이야!” 그녀는 노부부를 향한 시샘어린 시선을 쉬이 거두지 못했다. 맥주 한 캔을 마시고 그녀는 취해버렸다. 비둘기들이 주위를 떠나지 않았다. 해가 저물며 찬바람이 불어왔다. 그녀가 두 손을 모으고 입김을 불고는 손바닥을 맞비볐다. 그리고 어깨와 허벅지도 비볐다. 나는 재킷을 벗어 그녀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그녀만의 독특한 냄새가 났다. 은은하지만 자극적이지 않은 비누냄새. 갓 세수를 마친 듯 매우 상쾌한 비누향이 잔질이듯 후각을 자극했다. 그녀가 천천히 내 어깨에 기대왔다.
“넌 참 착한 것 같아. 난 착하기만 한 남잔 별로야. 착한 사람은 세상 살아가기 힘들잖아. 근데 그래도 난 니가 좋아. 착한 남자, 베게 역할 좀 해봐.” 그녀는 내 무릎을 베고 누워 눈을 감는다. 희미하던 초승달의 윤곽이 선명해진다. 숨이 가빠오고 몸이 뜨거워지기 시작한다. 그녀는 새근거리며 잠이 든다. 나도 눈을 감고 한 올 두 올 그녀의 머리칼을 센다. 유람선이 지나가며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린다. 그녀가 깨어난다. 그녀는 반쯤 감긴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내 뺨을 어루만진다. 몸을 일으켜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한다. 그녀와 눈을 맞춘다. 순간 그녀가 스스럼없이 내 목을 감싸 안는다. 나는 그녀의 허리를 받치며 껴안는다. 얼핏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내 눈에 스친다. 그녀만의 냄새를 깊이 들이마신다. 뜨거워진 심장에서 열기가 올라온다.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포갠다. 모든 게 자연스럽다. 서서히 벌어지는 입술 안에서 따스한 입김이 새어나온다. 한여름 뜨거운 태양에 녹아 부드러워진 페퍼민트향 사탕 맛이 나는 것이 내 입속으로 들어온다. 그녀의 혀가 내 잇몸을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나는 맛보고 느낀다. 페퍼민트 향이 배어나오는 혀의 돌기들을. 그녀의 혀가 내 의지대로 움직여준다. 비둘기들이 푸드득 내려앉는다. 그 소리에 놀란 그녀가 입술을 다문다. 그녀의 살구색 같은 입술이 발갛게 물든다. 입술 바로 위에 주름이 잡힌다. 들썩이는 그녀의 등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린다. 그녀는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우리는 서로의 거칠어진 숨소리를 들키지 않으려고 애쓴다.
“나도 이제 너처럼 술 잘 마실 수 있겠지, 좋다.” 비둘기들이 다시 날아가는 소리가 나고서야 그녀의 숨소리가 잦아든다. 그러나 내 몸을 뜨겁게 달궜던 열기는 좀처럼 식지 않는다.
“우리 손잡고 걸을까?” 그녀는 이미 내 손을 잡고 있다. 손바닥은 축축하고 따스하다. 그녀는 나보다 한 발짝 앞서 걸어 나간다. 그녀는 아무 말이 없다. 그저 그녀가 손에 힘을 주면 나도 따라 힘껏 손을 잡아줄 뿐이다. 호텔 근처에서 그녀는 내 손을 놓고 멈춰 섰다. 그녀는 쪼그려 앉아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쳐다보는 골목 안쪽으로 나도 시선을 돌렸다. 길고양이 두 마리가 멀거니 앉아 있었다. 그녀가 한 발짝 앞으로 다가갔다. 고양이가 하품을 하듯 입을 벌리더니 그녀에게 왔다. 고양이가 그녀의 손바닥을 핥기 시작했다.
“먹을 거, 먹을 거 있어?” 그녀가 속삭이듯 말했다. 나는 바지주머니에서 사탕케이스를 꺼냈다. 그녀가 손목을 잡아끌어 무릎을 꿇렸다. 여전히 두 마리 고양이는 그녀의 손을 핥고 있었다. 그녀는 사탕케이스를 열어 내 손바닥에 사탕을 떨어뜨렸다. 그녀가 내 손을 고양이 앞에 들이밀었다. 고양이가 나를 올려다보더니 눈을 한번 끔벅였다. 그리고 내 손바닥에 있는 사탕을 핥았다. 손바닥에 닿는 까끌까끌한 혀의 질감이 신기하고 낯설었다. 그녀와 나는 고양이가 손등에 수염을 고르고 사라질 때까지 손을 내밀고 있었다.
호텔방에 들어온 그녀는 창가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셔츠를 벗는다. 등뼈의 윤곽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돌발적인 행동에 당황한 나는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해 안절부절못한다. 두리번두리번 고개를 돌리다 돌아선다.
“야! 옷은 내가 갈아입는데 왜 니가 부끄러워해. 난 하나도 안 창피한데. 넌 항상 눈동자가 내려가 있더라. 얼마나 자신감 없어 보이는지 넌 모르지. 나처럼 흰자위가 들어나도록 위로 치켜떠. 그럼 강해 보인다. 부끄럼은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어서 생기는 거야. 잘난 거 없어도 자신감 빵빵하게 충전하고 사는 거야, 알았지?” 그녀가 어깨를 으쓱 올렸다 내린다. 그녀는 어떻게 알았을까. 내가 나를 부끄러워한다는 사실을. 싱글침대 두 개가 나란히 있는 방이다. 내 침대 맞은편에 그녀가 눕는다. 담요를 눈만 나오게 뒤집어쓰고 나에게도 누우라고 한다. 그녀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며 침대에 눕는다. 그녀처럼 나도 눈만 나오게 담요를 뒤집어쓴다. 서로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다가 우리는 거의 같은 타이밍에 풋 웃었다.
“첫사랑 해봤지? 맛깔나게 함 읊어봐.” 첫사랑? 고삼 때였다. 무모한 가출이었기에 또렷이 기억나는 일이다. 쓴웃음이 안면 근육을 팽팽히 당겼다.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은 사랑을 줄 수 없다. 어느 누구에게도. 나는 길에서 주워들은 듯한 값싼 사랑얘기처럼 주절거린다.
“평창동에 있는 야외골프연습장에서 먹고 자며 일을 하는 한 남자가 있었어요. 말수 적고 참한 한 여자가 아침마다 그에게 커피를 타주는 거예요. 새벽 다섯 시부터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그는 너무 졸렸거든요. 처음엔 그냥 고맙다는 생각뿐이었는데요. 어느 날 라커에서 그녀가 손님 골프백을 꺼내려고 하는데, 이층에 쌓아놓은 백들이 무너지고 있는 거예요 그때 그가 슈퍼맨처럼 몸을 날려서 그녀를 구해주게 된 거죠. 그 후 한 달에 한번 연습장이 쉬는 날, 그녀가 그에게 밥을 사주고 영화를 보여줬어요. 그의 첫 데이트. 가슴이 설레고 좋았겠죠. 맞아요! 그는 그녀를 좋아하게 된 거죠. 그는 막무가내로 덤벼들었데요. 하루는 공원벤치에 앉아 있다 그들은 키스를 하게 되죠. 여자의 향긋한 냄새를 그는 처음 맡아봤을 거예요. 그녀는 그의 무릎에 걸터앉아 키스를 했죠. 그가 두 손을 버둥거리자 그녀가 자신의 무릎에 올려주었죠. 그들은 오래오래 키스를 했대요. 며칠 후 그는 거리에서 로댕의 키스라는 조각을 보게 됐는데, 딱 자신을 보는 듯했데요. 그는 그 포스터를 뜯어와 방에 붙여놓고 날마다 그녀와 키스하는 상상을 했대요.”
“아, 그래서 로댕의 키스를 그토록 보고 싶어 했구나! 그래서?” 나는 피식 웃고 다시 말을 잇는다.
“언젠가부터 그녀가 그를 멀리하는 거예요. 그가 다가가면 갈수록 그녀는 저만치 멀어지고. 일을 마치면 손을 잡고 산책을 하곤 했는데, 그것마저 피했고요. 특별한 이유도 없이. 그가 고민하며 서울예고 근처를 걷고 있는데, 손님차가 길가에 주차해 있었데요. 그는 손님들의 차번호를 외우고 있었거든요. 근데 그 차안에서 그녀가 나오는 거예요. 순간 그는 너무 놀라서 나무 뒤로 숨어버렸어요. 그는 화가 나는 게 아니라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만 났데요. 다음날 그는 그동안 모은 돈 전부로 목걸이와 반지를 샀데요. 그것을 그녀에게 선물했는데 끝내 받지 않았데요. 그리고 며칠 후 그녀는 연습장을 그만두었어요. 그녀가 행복하게 산다고 직원들이 말하는 걸 그는 자주 들었데요. 그는 가슴이 아팠지만 어쩔 수 없다고 그녀를 포기했데요.”
“그래서 그게 다야. 끝?”
“그 남자가 연습장에 나왔어요. 그 남자의 골프백을 매고 그는 주차장으로 갔어요. 그리고 골프채를 꺼내 차를 부숴버렸어요. 나중에 알았지만 차가 꽤 비싼 거였데요. 덕분에 몇 달 콩밥을 먹었데요. 그 당시 아무도 그를 말릴 수 없었데요. 완전히 미쳐서 날뛰었으니까. 어쨌든 난 사랑도, 여자도, 믿지 않아요.”
“그런 게 어딨니! 사람이 사람을 믿지 않으면 뭘 믿고 살아?”
“그런가요. 그럼 당신은 사랑을, 남자를, 믿어요? 당신도 그 여자랑 똑같지 않나요?” 내 목소리는 어느새 거칠어져 있다. 그녀는 석고상처럼 하얗게 굳어버린다. 탁자 위에서 그녀의 휴대폰이 뱅글뱅글 요동친다. 그녀는 짐짓 내 눈치를 살피다 욕실에 들어가 통화를 했다. 내가 연달아 담배 세 대를 피울 때까지 그녀는 나오지 않았다.
“미안해, 난 내일 서울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아.” 일주일 예정인 여행이었다. 그런데 이틀 만에 돌아가야 한다니. 은근히 걱정이 된다. 나도 함께 가겠다고 했지만 그녀는 한사코 파리여행을 더 하라고 했다. 나는 잠자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밤새 뒤척였다. 이별이 현실로 다가오는 듯했다. 내 첫사랑처럼 그녀도 말없이 날 떠나갈 것만 같았다. 그날 밤 나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창밖이 희뿌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맡에 살며시 앉았다. 모로 누워있는 그녀의 뺨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녀의 뺨으로 내 손을 가져갔다. 손끝이 그녀의 귓불에 살짝 닿았다. 아아, 아아, 싫어요. 내 몸에, 손대지 말아요. 때리지, 말아요. 그녀가 몸을 더 작게 웅크렸다. 나는 얼어붙었다. 분명 잠꼬대였을 것이다. 그런데 가슴이 끝없이 먹먹해졌다. 일방적인 이별을 통보받은 것처럼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여행마저 하자. 좋지?” 그녀는 일어나자마자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좋았다. 너무나 기뻤다. 말없이 잠적한 연인이 돌아온 듯했다. 우리는 이른 아침부터 이제 막 시작하는 연인처럼 깍지 낀 손을 흔들며 파리 시내를 돌아다녔다. 또 다른 꿈이 생겼다. 그녀와 함께 살아가는 미래를 설계하게된 것이다. 그러나 미래를 꿈꾸기 시작하자 나는 불안감에 점령당했다. 문득문득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존재를 수시로 확인했다.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해져도 그녀의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곧 나를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꿈을 이루고 돌아가는데 다른 꿈 없어?”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그녀가 물었다. 사뭇 진지했다. 당신과 미래를 함께하고 싶어요, 라는 새로운 꿈을 나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내가 말을 못하자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그녀는 담요를 덮고 잠을 청했다. 그녀는 내가 다가오는 게 겁이 났을 것이다. 넌 미래가 없잖아. 더 이상 우린 아니야. 아마도 그녀는 이렇게 하소연을 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녀를 붙잡고 싶다. 그러나 용기가 없다. 나는 잘 알고 있다. 순순히 받아들여야만 한다. 서울에 도착하면 그녀는 날 떠날 것이다.
공항에서 우리는 택시를 탔다. 서울로 들어가는 내내 어색함이 이어졌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택시에서 내렸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집 앞에서 걸었다. 언덕길 앞에서 갑자기 그녀가 멈춰 섰다. 곧 그녀는 내 손을 뿌리쳤다. 고급 승용차에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우리를 노려보는 남자가 있었다. 차는 언뜻 보기에 내가 예전에 분풀이로 부쉈던 차와 비슷했다.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그에게 갔다. 그는 그녀에게 몹시 화를 냈다.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이 없는 그녀. 내가 아는 그녀의 당찬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저 남자가 그녀를 구원해주겠다고 했던 그 남자일까. 그녀는 나의 존재를 망각할 만큼 정신이 없었다. 심장에 구멍이 뚫려 피가 역류하는 듯했다. 혀를 잃은 입속처럼 허전해졌다. 나는 쓰러지지 않기 위해 얼른 뒤돌아섰다. 그리고 두 시간 넘게 걸어 집에 왔다. 당신이 없는 집은 스산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문자메시지를 보내도 답은 오지 않았다. 그날 나는 잠들지 못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그녀는 부재중이었다. 가게에도 그녀는 출근하지 않았다. 날마다 다가오는 새벽 세시가 지옥의 문턱 같았다. 일주일쯤 지나자 화나고 서운했던 마음도 가라앉아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녀를 한번 보고 싶었다. 그녀의 집 앞에서 기다렸다. 해가 뜰 때까지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잠자는 시간과 밥 먹는 시간을 빼고 오로지 일만 했다. 새벽 네 시쯤이었다. 그녀의 가게 근처에서 불콰하게 취한 여자 손님을 태웠다. 여자는 휴대폰을 붙잡고 소리치거나 애원하기를 반복했다.
“마음도 주고, 몸도 주고, 돈까지 줬는데. 그 개자식이 딴 년한테 갔다고! 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니? 벌써 몇 번째야, 믿을만한 남자가, 정말 이 세상엔, 단 한 놈도 없는 거야! 야! 그래, 안 그래? ……뭐? 그래 처자라. 나쁜 기지배. 아저씨! 나한테 이렇게 한 남자, 진짜 나쁜 놈 맞죠. 내 말이 맞죠? 아, 씨, 맞아요, 틀려요?” 여자의 질문이 내가 당신에게 퍼붓는 저주처럼 들려왔다. 화가 나고 마음이 너무 아파서, 누군가에게 하소연하고 싶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나는 여자에게 소리쳤다.
“당신이 좋아서 그렇게 한 거잖아! 아니야? 맞잖아! 그럼 된 거 아냐! 그 순간순간마다 행복했으면 된 거잖아! 내 말이 틀려?”
“그만해요, 알았어요.” 여자가 울음을 터트렸다. 차를 세우자 여자는 도망치듯 뛰어내렸다. 미안하단 말을 하려고 차에서 내렸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당신은 왜 이렇게 늦게 나타났을까?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나에게 미안했는지 물어볼 수도 없는 상태로. 진정 당신의 유일한 가족은 나 하나밖에 없었을까? 증오와 연민을 동시에 품고 당신을 집으로 데려온 것이 잘한 일이었을까? 나는 내가 제어할 수 있는 속도와 그럴 수 없는 경계를 넘나들며 달린다. 바람이 칼을 치듯 몰아쳐도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아빠처럼 나도 도로를 날아가고 있는 것이다. 속도를 이기지 못할 만큼 달리다보면 머릿속이 하얘진다. 이윽고 속도감을 잃는다. 핸들을 놓거나 막다른 길이 나타나기를 나는 바란다. 당신의 웃는 얼굴이 신기루같이 도로 끝에서 떠오른다. 끼이익. 어쩔 수 없이 브레이크를 밟는다. 젖은 안개와 함께 뿌연 하늘이 밝기 시작한다. 맑은 날이 될 것 같다. 서울의 하늘은 맑아도 흐려도 비극적이다. 나는 열두 시부터 저녁 여섯 시까지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는다. 그리고 밤 열두 시부터 새벽 여섯 시까지 택시를 몬다. 육체가 고통스러워질수록 정신은 맑아진다. 나는 세끼 밥을 먹을 수 있고 짧지만 달콤한 잠도 잘 수 있다. 내 기준에 맞는 사람 된 도리도 잊지 않는다. 사랑을 놓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사랑은 꿈이다. 꿈은 현실이 아니다. 불투명한 현실 앞에서 사랑은 늘 빛을 잃는다. 빛이 없는 사랑은 예쁜 사랑이 아니다. 다가가면 사라지는 신기루일 뿐이다. 이룰 수 없기에 아름다운 것이 사랑이다.
진한 화장을 한 그녀가 택시를 지나쳐간다. 나는 좋아서 웃기만 한다. 차에서 내려 그녀를 따라간다. 그녀가 멈춘다. 뒤돌아 나를 본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는다. 조그마한 손이 차갑다. 비누냄새가 나지 않는다. 가슴이 시려온다. 한때 좋았던 순간을 생각하며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는다. 그녀의 어깨에 힘이 하나도 없다. 그녀가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는다. 술 냄새가 난다.
“아무 말 하지 말아요.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난 괜찮아요.” 나는 뺨으로 그녀의 입술을 막는다. 그녀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고 이마에 입을 맞춘다. 따뜻하다. 내 마음과 몸이 따로 놀고 있다. 내 몸은 오래도록 그녀를 붙잡고 싶어 하는데 내 마음은 다급히 도망치고 있다. 더 이상 내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없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천천히 뒤돌아선다. 그 순간 나는 혹여 그녀가 달려와 등짝을 부여잡고 안기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미안해, 미안해.” 뒷덜미를 잡아채는 그녀의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가 아득히 멀어진다. 더는 타인에게 내 인생을 끌려 다니게 버려둘 수 없다. 눈물이 날 것만 같다. 그래, 그녀의 말이 맞다. 사람을 믿지도 못하면서 누구를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 내가 흘리는 눈물은 억울한 눈물이 아니다. 나는 가슴을 꼿꼿이 세우고 흰자위가 드러나도록 눈을 치켜뜨고 씩씩하게 걸어간다.
손수레에 폐지를 산더미 같이 싣고 언덕길을 오르는 할아버지가 보인다.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는 것이 힘에 겨운 듯하다. 얼굴에 깊고 어둔 주름살이 빗살처럼 그어져있다. 멈춰선 손수레 뒤에서 할머니가 나타난다. 할머니는 거의 구십 도로 굽은 허리를 한 손으로 받치고 복대에서 손수건을 꺼내 할아버지의 땀을 닦아준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허리를 두드린다. 할머니는 손사래를 친다.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물병을 건네며 껄껄 웃는다. 참 아름답다. 그녀의 말투 같다. 문득 가슴 속에서 솟구치는 뜨겁고 예쁜 사랑. 이 애틋함은 내가 나에게 보내는 부끄럼 많은 사랑이다. 별안간 서울의 하늘이 너무 높게 느껴진다. 나는 한달음에 달려가 당신과 볼키스를 하고 싶다.
당신이 퇴원하는 날이다. 그녀가 당신의 병실 안에 있다. 나는 숨어서 당신과 그녀를 지켜본다. 당신과 그녀는 마치 한 몸처럼 달라붙어 체온을 나누고 있다. 그녀는 좁은 어깨를 들썩이더니 갑자기 오바이트를 한다. 당신은 그녀의 입가를 핥기 시작한다. 그녀의 눈동자가 커진다. 내 몸에 오스스 소름이 돋는다. 당신이 내 입가를 핥는 것처럼 전율이 인다. 당신은 그녀의 입가를 연신 핥는다. 그녀는 당신을 부둥켜안고 오열한다. 그녀가 왜 울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아니 이해하기 싫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가 당신의 병실을 나와 아래층 남자병실로 향한다. 나는 그녀의 뒤를 몰래 쫓는다. 그녀가 복도 끝 병실로 들어간다. 그녀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선다. 더는 그녀의 우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계단을 두어 개씩 훌쩍 뛰어오른다. 아아아. 새된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린다. 그녀가 들어간 병실로 달려간다. 문틈 사이로 고개 숙인 그녀가 보인다. 산소호흡기를 한 노인 앞에 서서 그녀는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다. 노인은 의식이 없는 듯하다. 그녀가 눈가를 훔치고 아랫입술을 깨문다.
“아빠 때문에 난 내가 꿈꾸던 사랑을 버렸어! 제발 빨리 죽어. 나, 힘들어 죽겠어. 십년 가까이 했으면 됐잖아. 툭 털고 일어나든가 아님 죽어 버리든가. 더 이상 나더러 어쩌라고. 죽도록 하기 싫은 일 안 하면서 나도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숨이 컥컥 막힌다. 숨을 쉴 수가 없다. 조심스럽게 문을 닫는다. 서둘러 당신에게 달려가고 싶다. 그러나 다리에 힘이 모두 빠져나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만다.
고양이 울음소리가 얼핏 들린다. 쓰레기봉투 뒤에 숨어있는 고양이가 보인다. 새끼를 낳았는지 젖이 늘어지고 부어있다. 고양이가 겁먹은 듯 몸을 웅크린다. 나는 무릎을 꿇고 조용히 앉는다. 그리고 손바닥에 사탕을 올려놓고 기다란다. 고양이와 눈이 부딪친다. 고양이의 치켜뜬 눈동자가 빛난다. 나는 한 발짝 앞으로 다가간다. 고양이가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서다 멈춘다. 나를 물끄러미 노려보던 고양이가 눈을 끔벅인다. 다리와 팔이 저려올 즈음 고양이가 운다. 야옹. 고양이가 몸을 일으켜 다가온다. 나를 향해 천천히 사뿐사뿐.
나는 당신과 함께 바다를 보러갈 것이다. 당신을 씻긴다. 히히. 당신이 웃는다.
“기분 좋아? 그래 웃어. 웃으면 복이 온다잖아. 건강해지고.” 나도 기분이 좋아 당신을 따라 웃는다.
“당신도 나 보고 싶었어? 그래서 내 주위를 맴돌았었다고? 알아. 실은 나도 많이 보고 싶었어.” 타월로 물기를 닦고 당신을 안아든다. 당신은 자꾸 내 뺨을 핥으려고 한다.
“간지러워.” 침이 입꼬리를 따라 흐른다. 손등으로 당신의 입가와 턱밑을 닦는다. “밥 먹고 바다 보러가자. 전엔 자느라 바다 못 봤잖아. 좋지?” 나는 안방에서 호박을 가져와 반으로 싹둑 자른다. 씨를 하나 집어 입안에 넣는다. 사탕을 녹여먹듯 혀로 살살 굴려 본다. 약간 씁쓸한 맛이 나는가 싶더니 단맛이 느껴진다. 처음 만들어보는 호박죽은 맛이 있을까. 호호. 죽을 식혀 당신의 입속으로 밀어 넣는다. 당신의 입가에서 죽이 흘러내린다. 당신의 입가를 닦는다. 몸도 당신과 닿을 듯 가까워진다. 아, 당신에게서도 비누냄새가 난다. 미처 맡아보지 못했던 당신의 냄새. 나는 어미소가 새끼를 핥아주듯이 당신의 입술 언저리를 핥는다. 기분이 좋아진다. 향긋한 비누냄새가 혀끝에 닿는다. 이제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당신과 볼을 맞댈 수 있다. 비릿한 짠맛이 혀끝에 스민다. 나는 당신을 계속 핥는다. 휴대폰이 진동한다. 손을 뻗는다. 그녀가 보낸 문자메시지를 본다. 눈앞이 흐릿해진다. 글자를 알아볼 수가 없다. 눈동자가 따끔따끔 아프다.
불현듯 극심한 배고픔이 느껴진다. 스르륵 눈이 감긴다. 나는 오래전 기억을 되살려 당신의 젖을 찾아 헤맨다. 당신의 젖은 어떤 맛일까. 비릿한 맛일까 달콤한 맛일까.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얼굴이 달아오른다. 살짝 부끄러워진다. 난생처음 여자의 가슴에 얼굴을 묻는다. 가슴이 따뜻해진다. 나는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당신의 이름을 부른다. 엄,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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