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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배우 하루나짱과 이별하기

  • 작성일 2010-08-26
  • 조회수 886

에로배우 하루나짱과 이별하기

 인수인계를 받으며 적었던 메모에 카레냄새를 너무 풍기지 말 것, 이라고 농담 삼아 썼을 정도로 테이블과 메뉴판 심지어는 종업원들에게까지 카레향이 배어있었다. 카레 가게에 있는 물건과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에게서 카레향이 풍기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정작 내가 놀란 것은 그것이 위장까지 침투해 들어온다는 사실이었다. 식사를 제공받기 위해서는 하루 6시간 이상 일을 해야 하지만, 점장은 정확히 5시간 30분만 일을 시켰다. 식사를 제공하지 않고 부릴 수 있는 만큼 시켜먹겠다는 의도였다. 야속했지만 여러 면접에 미끄러진 후에 겨우 들어간 곳이어서 나는 열심히 일하겠다며 허리 숙여 인사했다. 점장의 의도가 야속한 것뿐만 아니라 서럽게까지 하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그렇게까지 많이 허리를 굽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약 일을 구하고 있는 만성 소화불량 환자가 있다면 카레레스토랑 근무를 추천하고 싶다. 유니폼을 갈아입은지 반시간 정도 지나면 위에서는 자명종처럼 꼬르륵 소리가 난다. 위장이 카레향에 유달리 반응하는지 밥을 한껏 먹고 와도 고픈 배를 움켜쥐게 된다. 아무거나 원하는 식욕이 아니라 꼭 내가 일하는 가게의 카레를 먹어야만 그칠 것 같은 허기다. 그러나 800엔의 시급으로 학비와 생활비를 이어가야 하는 유학생에게 1000엔짜리 카레라이스는 너무 부담스러운 가격일 수밖에 없다. 나에게 걸어 다니는 카레 갔다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 그때 나는 매우 기운이 빠졌는데, 내 몸에서 카레향이 나기 때문에 창피한 것이 아니라 먹지도 못한 냄새를 온 몸에서 풍겨대는 일에 울적해졌던 것이다.

“이상, 손님도 없는데 이렇게 샐러드를 많이 만들어놓으면 누가 먹으라고. 뭐가 먼저인지 생각 좀 해.”

부점장인 아츠시는 매번 잔소리다. 손님은 없고 매장은 너무 깔끔하여 무얼 해야 할지 몰랐을 뿐이라는 반박대신 나는 마른 행주를 들어 물기 없는 수저나 닦았다. 내가 일하는 곳은 혼자서 식사하는 남자손님들이 유독 많이 찾는다. 양복차림으로 테이블에 앉아 바닥만 보며 혹은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는 잡지를 들고서 카레를 먹고 가는 아저씨들을 보면, 어깨를 다독여 주고 싶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러나 그들도 주말에는 패밀리 레스토랑의 좌석에 앉아 바닥이 아닌 가족 얼굴을 보며 웃고 있는 모양인지, 주말 저녁이 되면 가게는 유난히 한산하다. 그래서 오늘처럼 토요일만 되면 나는 내 어깨를 다독이고 싶어진다.

일한지 정확히 5시간 30분. 내일 봐요, 라고 말했지만 아츠시는 고개만 까딱하고 말 뿐이다. 까무잡잡하고 눈이 가늘게 찢어진데다가 볼에 상처자국까지 있는 그는 험악한 인상과 달리 손님만 들어오면 큰 소리로 인사하며 허리를 반쯤 굽혔다 편다. 반면에 내겐 등에 판자대기라도 달고 있는 듯이 군다.

 여름밤 공기는 후덥지근했다. 가게를 나온지 얼마 지나지 않았건만 벌써 온몸이 땀으로 끈적거리는 것 같다. 자전거 페달에 힘이 들어갈 때마다 아츠시를 떠올리며 투덜거렸다. 속이 풀리는 것 같다가 도리어 뜨거운 무언가가 끓어올랐다. 그러나 뜨거운 화살은 이내 자신에게로 쏟아졌다. 왜 한마디 대꾸도 못한 거야, 너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너는 왜 이 곳에 온 거야.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흘렀다. 신호만 건너면 내가 사는 기숙사다. 사위는 조용하고 어둡다. 도쿄 사람들은 창문을 검정색 커튼으로 가리는지 불빛이 새어나오는 주택이 드물다. 경적을 울리는 자동차도 없고, 비틀대는 술꾼조차 없다. 이곳은 너무 조용하고 너무 깔끔하다. 아주 가끔씩 무단으로 버려진 쓰레기나 신호 위반 차량을 보면 길거리에서 돈이라도 주은 듯 기분이 좋아질 정도다. 자전거를 끌며 길을 건너다가 기숙사의 왼편에 위치한 비디오가게를 바라보았다. 이 동네의 밤을 밝히는 것은 가로등과 음료수 자판기 그리고 빛이 바래다 못해 어떤 모양인지 구분도 가지 않는 낡은 포스터가 더덕더덕 붙어있는 24시간 비디오가게뿐이다. 앞을 지나칠 때마다, 공짜로 다운로드를 하거나 비디오보다 화질과 보관도 좋은 DVD를 보는 시대에 이런 소규모 비디오가게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 한 번 더 가게를 바라보게 된다.

일본에 온 후부터 초라하게 느껴지는 모든 것에 연민을 느낀다. 평균 5000엔인 커트비용을 ‘커트 1000엔’이라는 파격적인 가격으로 써 붙여놓았음에도 노인들 외에 잘 찾지 않는 동네미용실. 대형세탁소가 생긴 이후로 옷걸이에 걸려있는 세탁물이 점점 줄어드는 근처 조그마한 세탁소. 24시간 불을 밝히지만 손님이 좀처럼 드나드는 것을 본 적 없는 비디오가게. 그리고 생활비 걱정이 앞서면서 이곳에 온 이유가 가게에 붙어 있는 빛바랜 포스터만큼이나 불확실해져버린 나……. 어느덧 자전거 핸들은 비디오가게를 향하고 있었다. 왜인지 저 비디오 가게를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가게 앞까지 간 나는 카레도 사먹지 못하는 처지에 비디오를 빌린다는 것이 영 이상한 것 같아 돌아서려다가 창문에 매달려있는 한여름을 무색케 하는 트리불빛에 문을 당겼다.

중년의 아저씨가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어서 오십시오, 라고 인사를 건넨다. 손님이 들어오기가 무섭게 매장안의 전직원이 ‘어서 오십시오’를 외치며 허리를 직각이 될 정도로 구부리는 여느 일본가게와는 다른 반응에 웃음과 연민이 일었다. 주인은 한쪽 머리를 죄다 옆으로 빗어 넘긴 바람에 벗겨진 머리뿐만 아니라 그것을 숨기려고 한 마음까지 드러나는 대머리였다. 진열대를 한가롭게 두리번거리는데, 갑자기 주인이 고개를 돌려 나를 빤히 쳐다봤다.

“아저씨가 아니라 아가씨네.”

반가워하는 주인의 말에 이어 텔레비전 소리가 들려왔다.

‘카오리짱은 어떤 체위를 좋아해요?’

주인은 최신작이라는 팻말이 놓인 곳에서 비디오를 골라 나에게 내밀었다.

“이거 요즘 나온 건데 아주 재미있어. 여자들도 좋아하더라고.”

‘카오리짱 가슴은 두 손으로 잡아도 넘치네. 나는 이렇게 큰 가슴이 좋아’

이번에는 주인의 말과 텔레비전의 대화가 겹쳐서 들렸다. 주인이 내민 비디오 커버에는 얼굴크기만한 가슴을 달고 있는 여자가 성기를 손바닥으로 가린 채 쭈그려 앉아 웃고 있었다. 나는 놀라 고개를 들었고, 화면이 가득 찰 만큼 커다란 여배우의 가슴을 남자배우가 주물럭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퍼뜩 놀라 비디오 가게를 둘러보았다. 어처구니없게도 일본에로물만 전문으로 다루는 비디오 가게였던 것이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주인이 쥐어준 테이프만 만지작거렸다.

“재미있다니까. 처음 온 것 같으니 싸게 해줄게. 500엔만 줘요.”

‘카오리짱의 가슴은 내가 먹어본 것 중 제일 맛있어.’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남자배우가 여자배우의 가슴을 입 안 가득 물고 빨아대고 있었다. 카레처럼 먹네, 라는 생각이 스쳐갔을 때 화면을 보고 있는 나를 쳐다보는 아저씨의 시선이 느껴져 얼굴을 붉히며 도망치듯 가게를 나와 버렸다.

“돈을 주고 가야지. 기간은 3일. 어디 살아요?”

급하게 따라 나온 주인이 나에게 말했다. 손에 테이프가 들려 있다는 걸 잊은 채 가게에서 나와 버린 것이다. 얼떨결에 기숙사 쪽을 가리켰다. 주인은 힐끔 보고는 손바닥을 내밀었다. 테이프를 다시 건네주려니까 주인이 인상을 구긴 채로 고개를 저으며 ‘500엔’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런 그가 무서워 주머니를 뒤져 돈을 건네었다. 주인은 손가락을 세 개 펴서 3일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그가 다시 장부라도 들고 나오지 않을까 생각하며 가게 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주인은 나오지 않고, 이렇게 허술한 대여 방식이 대도시에도 존재한다는 것에 피식 웃음만 나왔다. 그러나 웃음은 오래 가지 않았다. 없어진 500엔이 생각난 것이다. 남자배우가 문득 떠올랐다. 너도 카레 레스토랑에서 일했다면 가슴보다 카레가 더 먹고 싶어질 걸. 나는 빈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중얼거렸다.

 가방 깊숙한 곳에 쑤셔 넣었던 테이프를 꺼냈다. 일을 시작하면서 기숙사 친구들과도 소원해진 터라 방문을 두드릴 사람도 없지만, 책상서랍 깊숙이 넣어 두었다. 하지만 곧바로 잠들던 평소와 달리 눈이 더욱 말똥해졌다. 뒤척거리다 바닥에 놓인 리모컨을 들었다. 가슴 큰 여자들을 세워놓고 남자연예인들이 그녀들의 가슴 사이즈가 얼마인지를 알아맞히는 게임이 진행되고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떤 연예인은 여자 가슴을 양 손으로 잡았다가 떼기도 하고, 한 연예인은 여자들에게 땅을 짚고 엎드려보라고 시켰다. 세상에, 이렇게 저속한 프로그램을 방송에서 내보내다니, 하고 놀라는 한편으로 어느덧 그녀들 가슴 사이즈가 궁금하기도 했다. 슬쩍 고개를 돌려 책상을 바라보았다. 서랍 안에는 화면 속 여자들보다 더 큰 가슴을 지닌 여인이 있었다. 나는 일인실임에도 주위를 두리번거려가며 서랍을 열었다.

내가 처음 에로물을 접한 건, 한 대 밖에 없는 집 컴퓨터에 오빠가 ‘성문기초영어’라는 이름으로 저장해놓은 파일을 클릭하다 본 포르노였다. 그 영상은 주먹 쥔 내 팔뚝만한 성기를 가진 백인 남자배우와 오일이라도 바른 듯 매끈한 몸매를 지닌 흑인 여배우가 풀밭에서 정사를 벌이는 내용이었다. 처음에는 징그럽고 더럽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볼수록 흥분되고 따라 해보고 싶어지더니 밑이 축축하게 젖었다. 고등학생이던 나는 그것을 본 후에 친구들이 먹는 막대사탕이나 선생님이 들고 있는 지휘봉마저 남자 성기로 보일 만큼 혼란스러웠다. 친구들과 그런 경험과 느낌을 저마다 겪었다는 이야기를 나눈 후에야 다소 안심이 되었다. 그 후에도 오빠가 전혀 다른 이름으로 위장해놓은 새로운 포르노 파일을 발견하곤 했다. 그러나 시험시간에 커닝을 하려다 걷잡을 수 없이 뛰는 심장소리가 새어 나갈까봐 결국은 마음을 접는 것처럼 그것을 본 적보다 포기한 적이 더 많았다. 그런데 지금은 내 생애 최초로 직접 빌린 에로물이어서 새삼 가슴이 쿵덕거렸다. 다른 경로를 통해서가 아니라 에로물을 직접 빌려본 여자를 확률로 따진다면 얼마나 될까, 문득 궁금해졌다.

크게 심호흡을 하며 화면을 주시했다. 에로배우가 되고 싶으면 이리로 찾아오세요. 부끄러우세요? 그럼 전화하세요! 베개를 가슴에 안고 광고를 보다 자세를 고쳐 앉았다. 광고 속 남자가 낯익었다. 화면을 정지시키고는 남자의 얼굴을 살폈다. 짙은 쌍꺼풀눈을 보자 기억이 점점 선명해졌다. 언제나 소혓바닥 카레만 시키는 단골손님이 틀림없었다. 이런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니, 그가 왜 그 메뉴만 고집하는지 이해가 갈 것도 같았다. 일주일에 서너 번 가게를 찾는 그는 언제나 짧은 스포츠머리에 날씬한 체격을 돋보이게 해주는 폭이 좁은 양복차림이었다. 특이하게도 그는, 카레를 스프처럼 다 떠먹고 난 후, 소혓바닥을 반찬 삼아 밥을 먹었다. 섞지 않고 각각 제대로 음미해보겠다는 심산 같았다. 얼마나 열중해서 먹는지 바닥이나 잡지를 보는 남자들과 달리 그는 오로지 음식과 숟가락만 바라보았는데, 남긴 접시까지도 깨끗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그가 오면 눈인사로 묻고는 그의 식사를 내놓았고, 그도 별다른 말없이 내가 내민 음식을 먹고 갔다. 광고 속에서 만나게 되니 친한 친구를 친하지 않은 친구 틈새에서 만나듯 새삼 반갑고 낯설었다. 그는 영화를 감상한 후 감상평을 보내주면 제작한 영화를 보내주겠다고 말했다. 이런 걸 보고 감상평까지 쓰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웃었으나 그의 표정이 무척 진지하여 더 웃는 것은 왠지 실례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감상평을 보내라는 제작사의 전화번호와 주소가 지워지자마자 바로 시작되었다.

-왜 에로배우가 되었죠?

-저는 패션디자이너가 되고 싶어요. 패션전문학교에 합격했지만 집안사정상 제가 돈을 벌지 않으면 안 되었기에 포기했죠.(울먹거림) 저는 그래서 단기간에 가장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것이 무얼까 많은 고민을 하던 차에 운 좋게 시부야에서 길거리 캐스팅이 되었어요. 제가 원하는 만큼의 액수를 줄 수 있는 큰 회사였고, 저도 제 장점을 살려 일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에로배우가 되기로 결심했어요.

 몇 개의 질문 후에 서로 농담 몇 마디를 주고받더니, 여자가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노랗게 염색한 머리와 홍조 띈 볼이 인상적인 여자는 몸이 풍만해서 뒤에서 보면 서양여자 같았다. 촬영장에서 처음 만난 남자배우와 인사를 나눈 그녀는 그 날의 컨셉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후 촬영을 시작했다. 욕실에서 자위를 하고 있는 여자의 집에 옆집 남자가 빗자루를 빌리러 들어왔다가 자위를 도와주고, 그의 손가락 기술에 여자가 반한다는 내용이었다. 남자배우의 손가락 움직임은 빠르다 못해 고속 기계 같았다. 나는 괜히 오줌이 마려운 것 같아 화장실에 다녀왔다.

-에로배우의 수입은 괜찮은가요?

-제가 1년간 쉬지 않고 일해도 벌 수 없는 돈을 단 한 편의 영화로 벌어요. 영화가 잘 팔리면 인센티브도 받아요. 제 영화가 인기 있는 이유는 제가 일할 때만큼은 최선을 다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감독이 요구하는 것 이상으로 제 모든 걸 보여주려고 노력하거든요. 아시죠?(웃음) 제가 느끼는 건 가짜가 아니에요.

 인터뷰를 마치고 여자는 다시 촬영을 시작했다. 이번 장소는 수영장이었다. 수영을 가르치는 수영강사를 자위해주는 내용인데, 여배우가 물을 무서워하여 계속 NG가 났다. 남자의 수영복을 벗겨내는 신만 수차례 찍었다. 수영장 안에서의 연기가 뜻대로 되지 않는지 그녀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촬영이 끝났고 지친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탈의실로 들어갔다. 힘없는 뒷모습이 안쓰러웠다.

-에로배우가 부끄럽진 않은가요?

-저는 이 일을 하며 성격이 긍정적으로 변했어요. 제 꿈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던 것도 다 에로배우를 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거든요. 그리고 어렸을 적엔 가슴과 엉덩이가 너무 커서 부끄러웠는데, 이 일을 통해 제 몸매가 섹시하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많은 분들이 제 몸매를 칭찬하세요. 에로배우를 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겠죠. 뿐만 아니라 이 일을 통해 패션디자이너가 되고 싶다는 열망이 오히려 더 강해졌죠. 이렇게 딱 다섯 편만 더 찍고 파리로 가서 공부할 거예요.

 인터뷰를 마친 후 남자가 마이크를 내려놓고는 여배우에게 키스했다. 옷을 벗기고 여자를 자리에 눕힌 후 뒤엉킨 자세로 서로의 성기를 핥았다. 나는 마치 누가 함께 보고 있기라도 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아랫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었다. 왠지 그런 표정을 한 번 정도 지어줘야 할 것 같았다. 카메라가 삽입장면을 너무 오래 비춰서 지루해지자 빠르게 감기를 했다. 마치 쉴 새 없이 넣었다 뺐다 하는 남녀배우의 성기에 모터가 달린 것 같았다. 체위가 바뀌었을 때 나는 다시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배우들의 신음소리가 점점 커질수록 내 속옷도 젖었다. 지금 공부도 하지 않고 뭐하고 있는 거야, 라고 생각했을 때 남자배우가 간다, 라고 소리치며 여자배우의 얼굴에 정액을 쏟았다. ‘간다’가 사전적 의미 말고도 저런 의미로도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단어 공부를 한 듯 안도감이 들었다. 카메라는 여배우 얼굴을 클로즈업하고 여배우는 정액 묻은 얼굴로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왜 얼굴에 사정을 하고, 또 좋아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으나, 나는 다시 눈을 크게 뜨고 화면을 바라보았다. 정액으로 더러워진 여자의 얼굴 위로 자막이 올라갔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하루나였다.

 비디오를 끄고 침대에 누웠다. 처음에는 하루나의 성교장면이 아른거려 팬티 안으로 손가락을 넣어 클리토리스를 만지작거렸다. 시간이 흐르자 그녀의 인터뷰 내용이 계속 떠올랐다. 일본에 오기 위하여 아르바이트를 세 개씩 겹쳐 해냈던 지난날 내 모습이 떠올라 코끝이 찡해졌다. 이곳에 온지 십 개월. 얻은 것은 줄어버린 몸무게와 흰머리 여러 가닥이다. 잃은 것투성이라 생각하며 생활하고 있었지만, 막상 처음부터 갖고 있던 것도 별로 없었던 것 같다.

“토익 750점이라, 이건 막 가자는 건데…….”

어학연수를 결심하게 만든 면접관 말이었다. 면접관들은 내 이력서에 적힌 특별할 것 없는 이력을 예의 없는 것으로 취급했다. 기업은 평균 3.0 이상의 학점을 원한다는 걸 알았기에 나는 평균을 넘기기 위해 노력했고, 토익 시험을 볼 때도 그랬다. 그들은 영어와 전혀 상관없는 업무에 지원한 일본어 전공자인 나에게도 토익점수를 요구했다. 그러나 언제나 사회에서 원하는 커트라인을 넘겼을 뿐, 그 이상의 숫자는 얻지 못했다. 한 걸음만 더 뻗으면 될 것 같은데 그 한 걸음은 언제나 정상까지 오르지 못하고 돌아설 수밖에 없는 가파른 벼랑 같았다. 눈에 띄지 않는 외모 또한 특별하지 않은 이력에 한 몫을 했다. 누구나 다 갖고 있는 것보다 무언가 더 특별한 것을 그들은 원했고, 그것이 무언지 정확히 모르는 나는 기업에 대한, 사회에 대한 예의가 없는 사람이었다.

 초반에는 독하게 마음먹었다. 하지만 아르바이트하면서 어긋나기 시작했다. 생활일어는 배울 수 있을지 몰라도 겨울에 치러야 할 자격시험대비는 전혀 준비하지 못하고 있다. 말은 하는데 읽을 수는 없고, 듣기는 하는데 듣는 만큼 말하지 못했다. 언어에 이런 다양한 층위가 있는지 이곳에 와서야 알았다면 그것도 얻은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이런 와중에 포르노를 보고 손을 멈추지 못하는 내 모습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나는 마스터베이션을 끝내고는 잠시 동안 침대에 누워 있었다. 다시 비디오를 켰다. 새삼 하루나짱에게 연민이 더해졌다. 그녀가 아니라면 내가 무엇을 위해 이러고 있는지 금방 잊어버렸을 것이다.

그러다 그만 되돌리기 반복을 누른 채 잠이 든 모양이다. 아침에 테이프를 뽑아보니 잔뜩 열을 받은 상태였다. 주인아저씨의 무서운 얼굴이 생각나 임시방편으로 냉동고 속에 집어넣었다. 햇볕 한 점 통과하지 않는 진청색 커튼을 젖힌 나는 부신 눈을 찡그렸다.

 30분 일찍 도착한 레스토랑에는 아츠시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왜 혼자인지 궁금했지만 그와 말을 섞는 게 싫어 유니폼을 갈아입자마자 테이블을 정리했다.

“토다가 나오지 않았어. 점장이 토다 대신 배달을 다닐 거니까 오늘은 무척 바쁠 거야. 빈자리가 눈에 띄지 않도록 몸을 두 배로 움직여.”

아츠시는 화가 나 있었다. 오늘도 또 여러 트집을 잡히겠구나 싶어 한숨이 나왔지만, 어젯밤의 하루나짱을 생각하니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고등학생을 뽑는 게 아니었어. 토다는 학원에 가야 한다면서 일찍 가버리기 일쑤야. 여기는 출석이야 어떻든 그만두지만 않으면 되는 학원으로 착각하는 모양이야.”

아츠시는 말이 끝나자마자 신경질적으로 그릇을 닦았다. 나는 달리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몇 번 고개를 끄덕인 후 옆에 서서 마른수건을 들고 함께 물기를 닦았다. 유리컵을 선반에 얹어놓다가 그가 닦아 놓은 컵을 바라보았다. 지문하나 없이 투명했다. 마른수건을 들고 움직이는 손모양은 매우 거칠지만 아츠시는 구석구석을 아주 깨끗이 닦고 있었다. 어차피 마시고 나면 그만인 것을 이렇게 열심히 닦을 필요가 있을까 생각하며 물기를 대충 제거하고 유리컵을 선반에 올렸다. 눈이 점점 안 보인다고 말하는 우리 할머니가 봐도 누가 닦은 것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그가 닦은 컵과 내가 닦은 컵의 빛깔은 달랐다.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점장이 없어도, 손님이 없어도 아츠시는 쉴 새 없이 무언가를 한다. 쉬는 시간이 아니면 단 1분도 손을 놀리는 일이 없다.

“이 일이 재미있어요?”

아츠시는 대꾸 없이 자신의 일도 아닌 카레를 젓기 시작했다. 또 내가 괜한 말을 했구나 싶었을 때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리 재미있는 일이라도 매일하면 재미없어져. 해야 할 일이니까 즐겁다고 생각하면서 하는 거지.”

그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카레 젓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 정도면 될 것 같아요. 어차피 주문 받으면 다시 데워야 하는데.”

수고를 덜어주려 한 말이었는데 아츠시는 매서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뭐든지 대충하면 안 되는 거야. 이상이 일이 느려서 그렇지 제대로는 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껏 그런 마음으로 일했던 거야?"

“그런 게 아니라, 아츠시가 힘들까봐.”

“본인 일이나 똑바로 해. 좋든 싫든 모든 일은 결국 자기가 선택한 일이야. 아무것도 제대로 못하는 거야말로 사치라고.”

더 이상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시급보다 비싼 카레를 사먹는 것이 사치가 아니라, 나처럼 생각 없이 살고 있는 것이 진짜 사치일 수도 있었다. 아츠시는 일이 끝날 때까지 나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가게 문을 열고나오자 습기 많은 밤공기에 마음이 더욱 답답하게 느껴졌다. 자전거 페달을 돌렸으나 이상하게 오늘은 아무런 원망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그가 닦은 컵과 내가 닦은 컵의 다른 빛깔이 생각났고, 한숨이 나왔다. 위장은 계속 배고 고프다고 요동을 쳤지만 서럽지도 않았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내내 동행자처럼 따라온 카레향이 성가실 뿐이었다.

 기숙사에 도착하자마자 냉동고 안에 넣어놨던 하루나짱을 꺼내었다. 테이프를 에워싸고 있는 잘은 얼음조각들을 떼어내고 수건으로 한 바퀴 감싸 해동시킨 후 그녀 인터뷰를 한 번 더 보기 위해 비디오를 틀었다. 그런데 화면이 두 갈래로 갈라져 나왔다. 내보내기를 눌렀으나 이번에는 테이프가 나오지 않았다. 손바닥으로 여러 번 친 후에 다시 눌러보았지만 그것은 꿈쩍 하지 않았다. 나는 비디오커버를 열고 테이프를 잡아당겼다. 가까스로 끄집어내기는 했지만, 엉켜버린 필름을 대롱대롱 매달은 채였다.

30분 동안 엉킨 필름을 폈지만 두 개의 투명플라스틱 구멍으로 비치는 필름은 울퉁불퉁하기만 했다. 영화가 제대로 나오는지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필름이 다시 엉킬 것 같아 그만두었다. 같은 테이프를 사다줘야 하나. 솔직히 말하고 변상을 해야 하나. 새삼 주인아저씨의 험악한 인상이 떠올랐다. 테이프 보상을 핑계로 나를 어디론가 끌고 가서 에로물을 찍게 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나에게 터무니없는 금액을 요구하지 않을까. 이런저런 고민으로 오랜 시간을 소모한 후 내린 결론은 똑같은 비디오를 사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비디오를 반납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막상 알아보려니 구입이 쉽지 않았다. 테이프를 반납하지 않았다며 기숙사관리인에게 불만을 늘어놓을 주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기들도 다 봤을 거면서 아닌 척 하며 나를 이상하게 쳐다볼 관리인과 기숙사 친구들 모습도 그려졌다. 처음 본거라고 말해도 소용없겠지. 나는 테이프를 끌어안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 이국에 와서 이런 테이프를 끌어안고 이런 고민에 젖어 있어야 하는 걸까. 새삼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학교를 마치자마자 레스토랑을 향해 자전거를 달렸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테이블과 메뉴판을 닦고, 마른 식기를 정리했다. 손님이 올 때마다 큰 소리로 인사하고, 친절한 말투로 주문을 받았다. 점장과 아츠시는 서로를 바라보며 ‘쟤가 왜 저러지?’ 하는 눈빛을 교환했다. 그러나 저녁 시간이 다가올수록 나는 점점 긴장하기 시작했다. 샐러드를 만들다말고도, 손님이 들어오면 인사를 하면서 빤히 쳐다보았다. 괜히 문 근처를 어슬렁거리기도 하고, 시계를 끊임없이 바라보았다.

“화장실 가고 싶은 거야? 그런 거라면 묻지 않고 다녀와도 돼.” 내 불안정한 행동을 본 아츠시가 말했다.

그때 손님이 들어왔다. “화장실 대신 저 분께 주문받으러 갈게요.”

메뉴판을 들고 손님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손님은 내 얼굴을 쳐다보며 ‘왜, 다 알면서 새삼스럽게.’ 라는 표정을 지었다.

“소혓바닥 카레 맞으시죠?”

오늘도 폭이 좁은 회색 스프라이트 양복을 차려입고 온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전자에 물을 채우면서 그가 카레를 다 먹고, 밥을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여전히 소혓바닥을 조금씩 나누어 먹었는데, 마치 자기가 먹는 소혓바닥이 자기 자신에게 아깝다는 듯이 조금씩 뜯어 먹었다. 그가 입을 벌리고, 혀를 살짝 내밀 때마다 하루나짱을 애무했던 남자배우들이 떠올라 몸이 움찔거렸다. 그도 애무할 때 저 입과 혀를 사용하겠지. 그는 내 혓바닥도 조금씩 깨물지 몰라. 잠시 나와 그가 주인공이 된 성교를 상상하느라 따르던 물이 넘쳤다. 그 바람에 아츠시에게 잔소리를 들을 뻔했으나, 다행히도 내가 기다리던 손님의 접시가 다 비워져 나는 재빨리 카운터로 갔다.

“천삼백 엔입니다. 그리고 저…… 이거 받아주세요.”

앞치마 주머니에 숨겨두었던 봉투를 주섬주섬 꺼내어 그에게 내밀었다. 그가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가자마자 꼭 읽어보세요. 제가 오늘밤까지 밖에 시간이 없거든요.”

도무지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의 그는 다행히도 내가 내민 봉투를 가지고 나갔다. 나는 그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자리에 서 있었고, 결국 아츠시에게 혼이 나고 말았다.

“영업 중에 손님에게 연애를 걸어서는 안 된다는 거 몰라? 이상, 이건 정말 중대한 문제야.”

“차마 말씀은 못 드리겠는데요, 연애편지 아니에요. 저한테 문제가 생겼는데, 저 손님 밖에 해결해줄 사람이 없어서 부탁한 거예요.”

“저 손님을 알아? 밖에서 만나기까지 한 거야?”

“그런 건 아니고 저 혼자 어떻게 하다 알게 되었는데, 더 이상은 묻지 말아주세요.”

“도대체 무슨 소리야, 아무튼 점장과 상의해서 이상의 거취여부를 결정할 거야. 오늘은 돌아가.”

잔뜩 화가 난 아츠시에게 어떤 변명을 늘어놓아도 소용이 없겠다 싶어 탈의실로 들어갔다. 가방을 들고 나오는데, 점장이 나에게 의미를 알듯 모를 듯 눈짓을 보냈다. 나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가게를 나왔다.

 눈물이 흐를 것 같아 입술을 깨물며 참았다. 왜 이틀 사이에 일이 이렇게 꼬여버렸지. 가게에서 해고당하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더는 버틸 수 있는 자금과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 일자리를 구할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을 정도로 지쳤다. 그만두기 전에 꼭 한 번 카레를 먹을 거라고 다짐했는데, 그런 다짐조차 새삼 사치 같았다. 무거운 걸음을 끌며 걷다가 멈추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손님이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금방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자전거를 타고 가게 주변을 돌기 시작했다. 뒤편의 공원을 지나칠 때 회색 스프라이트 양복을 입은 남자가 벤치에 앉아 무언가 읽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 쪽으로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저, 안녕하세요.”

내가 건넨 인사에 한 손에는 종이를 들고, 다른 손에는 담배를 들고 있던 그가 천천히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 카레.”

그가 나를 향해 짧게 미소를 지으며 목례했다. 평소라면 누군가 미소 지을 때 마음이 편해지겠지만, 그의 웃음은 나를 불편하게 했다.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괜히 부끄러워진 것이다.

“뒤쪽은 도무지 이해가 안 가네요. 문법이랑 단어가 좀 많이 틀렸어요. 그래도 외국인이 쓴 것 치고는 문장이 훌륭해요.”

“제가 외국인인 걸 어떻게 아셨어요?”

그는 담배연기를 우아하게 내뿜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본인 발음이 아주 좋다고 생각하나 봐요?”

농담처럼 들렸으나 그의 표정은 아주 진지했다. 얼핏 농담 따위는 즐기지도 않고 할 줄도 모르는 사람 같았다.

“저기, 제가 봤던 그 테이프를 받을 수 있을까요?”

“테이프가 아니라 작품이라고 얘기해주세요. 저는 항상 심혈을 기울여서 만들거든요.”

그는 내 말이 기분 나쁘다는 듯 서둘러 정정했다. 그의 입술이 움직이는 동안 저 입으로 얼마나 많은 여자의 성기를 핥았을까 상상이 되어 그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나는 벤치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작품, 받을 수 있을까요?”

“대답해주려고 기다리고 있던 참이에요. 사람들이 보내는 감상평은 여주인공을 더 벗겨 달라, 모자이크를 없애 달라 등의 요구 등이 전부에요. 이렇게 영화를 속속들이 파헤칠 정도로 분석하고 평을 내놓은 사람은 없었거든요. 이건 영화 한 번 봐서 나올 수 없는 솜씨인데.”

나는 차마 부인하지 못했다. 돌려보다가 그만 잠이 들었을 만큼 눈여겨 본 까닭을 그러나 일일이 설명하지는 않았다.

“이 문장이 제일 마음에 들었어요.”

그는 나지막한 음성으로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에로배우도 우리와 다를 것이 없는 내 주변의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 혹은 나일수도 있다는 것. 바로 우리가 노린 게 이거예요. 그래야 사람들이 일상에서도 항상 즐거운 상상을 하면서 살 수 있지 않겠어요?”

즐거운 상상이라는 말을 뱉었을 때의 그의 표정은 무언가에 도취되어 있는 듯했다. 문득 묻고 싶었다. 정말로 정사를 하는 것인지, 그 정액이 크림이나 뭐 다른 것은 아닌지 새삼 궁금했던 것이다. 물론 나는 그런 내색을 하진 않았다. 다만 내게 필요한 말만 했다.

“그런데 비디오는, 아니 작품은 받을 수 있을까요?”

그는 내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다시 담배를 빼어 물었다. 다리를 꼬고 앉아 천천히 담배 연기를 내뱉는 모습이 품위 있어 보였지만, 나는 대답 없는 그의 행동에 더욱 조바심이 났다.

“나랑 같이 일해 보는 거 어때요?”

나는 그의 제안에 매우 당황했다.

“전 못해요. 창피함도 많이 느끼고 경험도 별로 없고, 아니 그게 아니라 관심도 없어요.”

손사래까지 치며 못하겠다고 말하는 나를 그가 아래위로 훑더니 짧게 코웃음을 흘렸다.

“전 이쪽에서만 십년 경력이에요. 딱 보면 될지 안 될지 알아요. 화장한 얼굴은 괜찮을 것 같은데 섹시한 분위기가 부족해요. 하루나짱처럼 육감적이고 연기를 전공한 전문가라면 모를까.”

나는 다시 얼굴이 빨개졌다.

“내 제안은 우리 회사에서 다음 달부터 발매할 잡지에 신작영화 감상평을 써 달라는 거예요. 쓰고 메일로 보내주기만 하면 돼요.”

그는 벤치에 기대고 있던 등을 곧추세우며 내 답변을 기다리는 듯 나를 쳐다봤다.

“신작영화라면……에로?”

그가 물론, 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방금 전 레스토랑에서 쫓겨난 것이 생각나 조금 망설였다. 하지만 직업 삼아 에로영화를 봐야 한다고 생각하니 카레냄새보다 한심해지는 것 같았다.

“저는 에로영화에는 관심 없어요. 그런데 하루나짱이 연기를 전공했어요? 그녀는 패션전문학교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했잖아요.”

한 번도 크게 웃지 않았던 그가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그가 입을 벌리는 바람에 또 혀가 보여서 나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당신이 감상평에 쓴 것이 바로 그거잖아요. 나는 하루나가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일 뿐이라는 걸 얘기하고 싶었어요. 그녀는 비록 연기도 잘하는 에로배우이지만, 사람들에게는 패션디자이너를 꿈꾸는 평범한 여인일 뿐이지요.”

나는 서 있던 다리에 점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고, 결국엔 자전거를 지팡이처럼 짚고 서야만 했다.

“인터뷰가 픽션이었어요?”

“논픽션 같은 픽션이죠. 하지만 우리가 취득하는 정보란 대개 그렇잖아요. 픽션 같은 논픽션, 논픽션 같은 픽션. 그러니 하루나는 정말로 우리 주위에 있는 여자일 수 있는 거예요.”

그가 말하곤 물었다. “내일 낮에 우리 사무실로 올래요?”

나는 잠시 동안 대답 없이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에게 물었다. “혹시 저에게서 카레 냄새가 나나요?”

그도 잠시 동안 대답 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나는 그의 대답을 듣기 전에 자전거를 돌려 세웠다.

“카레 가게에서 일하면서 카레 냄새가 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요?”

그가 내 등에다 이야기했다. 대답이 고마웠지만 왜인지 울적해져서 고개를 돌려 목례를 한 후 다시 걸었다.

“냄새 좀 나면 어때요? 오히려 나는 내가 하고 있는 일의 냄새가 나서 더 좋은데. 왜인지 내가 제대로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가 더 큰 소리로 이야기했다. 나를 붙잡으려는 마음은 아닌 것 같았다. 아마 그는 에로영화를 제작한다는 것으로 꽤나 많은 편견어린 시선을 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거절쯤은 아무렇지도 않을 것이다. 그가 던진 말은 변명이라기보다 영화 이야기를 하는 내내 진지했던 자신 스스로에게 던진 응원처럼 들렸다.

 나는 테이프를 집어 들고 기숙사에서 나왔다. 비가 올 심산인지 밤하늘에는 별조차 뜨지 않았다. 까마득한 어둠 속에서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비디오가게로 들어갔다. 에로물을 보고 있던 주인은 내가 들어가자 오랜 단골이 들어온 듯 호들갑을 떨며 반가워했다. 나름의 처세겠지만, 그는 자신의 접대 방식이 오히려 손님을 불편하게 하고 있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내가 말없이 서 있자 주인이 다른 거 빌려줄까, 라고 물었다. 잡지 제안은 거절하더라도 테이프는 받고 올걸, 하는 후회가 밀려들었으나 이틀 전과 다른 주인의 한결 부드러운 태도에 용기가 났다.

“저, 사실은 망가졌어요. 죄송합니다.”

주인이 테이프를 건네받고는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뭐가 어떻게 망가졌어요?”

“필름이 꼬였어요. 제가 다 펴서 감아놓기는 했지만…….”

주인이 몇 분간 필름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문득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었으나, 도망을 간다 해도 몇 발자국 못가 잡힐 것 같다.

주인이 고개를 들어 갑자기 흘겨 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당신 이거 많이 돌려봤지? 내가 재미있을 거라고 했잖아. 여자배우 예쁘지 않아? 가슴도 완전 빵빵하고 말이지. 나도 보는 내내 즐거웠다고. 다른 비디오라면 변상을 해야 하는데, 이거 홍보용으로 받은 거니까 봐줄게. 좋았나본데, 가져가. 난 또 있어. 대신 다른 거 빌려가야 해.”

주인은 나에게 테이프를 건네면서 웃어댔다. 선심 쓰듯 직접테이프 하나를 골라 내밀었다.

“아니에요. 저는 인터뷰만 봤어요. 다른 것은 별로 재미없었어요. 안 좋았어요.”

주인은 다시 웃어대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변상하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기에 감사의 인사를 전하려고 했으나 늘어진 뱃살까지 출렁거리며 웃고 있는 모습에 짜증이 일었다.

“인터뷰 말고는 재미없었다고? 설마, 사진만 봐도 몸이 달아오르는데. 그냥 즐겨.”

말하는 그를 뒤로 하고 나가려는데 그가 나를 불러 세웠다.

“새로 하나 빌리라니까. 그게 갚지 않아도 되는 조건이야. 사람들은 나를 에로비디오가게나 하는 시시한 아저씨로 볼지 모르겠지만, 사실 내가 젊었을 때 배우였거든. 내 비디오 시리즈도 있는데, 그거 하나 빌려 갈래? 그건 기간이 일주일이야. 나 그때는 지금처럼 배나오고 머리 안 까졌었어. 꽤 괜찮았다고!”

주인아저씨의 성교장면을 봐야 한다니 끔찍했다. 그러나 아저씨는 계속 권유하다 못해 강요했다. 마치 이 비디오가게를 하는 이유가 자신의 영화를 사람들에게 보게 하기 위한 것 같았다. 결국 다른 걸 빌렸다. 이번에는 전라에 앞치마만 걸친 여자의 사진이 붙어 있는 비디오였다. 주인은 단골이라며 가격을 300엔으로 낮춰줬다. 100엔으로 해줘도 다음번엔 다시는 빌리지 않겠다고 결심하며 나왔다.

기숙사에 돌아와 자리에 누웠다. 머리가 지끈지끈 쑤셨다. 더 이상 생각할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눈을 감자 또 다시 하루나짱이 아른거렸다. 이번에는 그녀의 인터뷰가 아니라 성교장면이었다. 나는 팬티 안으로 손을 넣은 채로 가만히 있었다. 움직일 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책상서랍 속에 들어있는 앞치마 두른 여자가 생각났다. 다소 엉뚱한 생각이다 싶으면서도, 보지도 않고 돌려주기엔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비디오에 문제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테이프를 밀어 넣어 보았다. 오늘 빌린 것까지 또 망가뜨리면 귀국할 때까지는 비디오 가게에 돈을 갖다 바쳐야 할 것 같아서였다. 이왕 빌리는 김에 소혓바닥 카레 손님이 만든 작품을 빌렸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벨소리에 잠에서 깨었다. 커튼을 치지 않고 잠들었기에 햇빛이 방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나는 잠에서 덜 깬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이상. 나 점장이야.”

잠이 확 달아났다. 드디어 결론이 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나와서 일해 줄 수 있어? 손님들이 갑자기 밀어닥쳤어.”

나는 감사하다는 말이 나오는 걸 억지로 밀어 넣은 후 알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재빨리 양치와 세안을 한 후 다리가 저릴 때까지 자전거 페달을 돌렸다. 레스토랑에 도착하니 식당은 썰렁했다. 아츠시는 배달을 나갔고, 가게에는 점장 혼자뿐이었다.

“바쁘다고 하셔서 왔는데, 손님이 없네요.”

내가 유니폼 가방을 들고 쭈뼛거리자 점장이 앞에 와 앉으라고 손짓을 했다. 이곳은 이런 식으로 해고통보를 하는 구나, 생각하며 체념조의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아까는 아츠시가 배달 갈 사이에 오게 하려고 거짓말 한 거였어. 나 다음 달에 새로 생기는 사가미 지점으로 가. 이곳 점장은 아츠시가 될 거야. 점장이 되면 신경 쓸 일이 많아지니까, 이상이 많이 도와줘. 그는 정말로 점장이 되길 원했었거든.”

“저 잘리는 것 아니에요?”

볼록렌즈 안경 때문에 선한 눈이 더욱 강조되어 보이는 점장이 나에게 말했다.

“여기서 일하며 내내 착실했고, 이제는 의사소통에도 무리가 없으니, 우리가 이상을 자를 이유가 없지 않겠어? 다만, 아츠시의 마음을 좀 알아줘. 이상은 착실하긴 한데 눈치는 없는 것 같아. 아니, 언어가 통해도 마음을 못 읽으면 소용없나봐.”

그때 아츠시가 배달에서 돌아왔다. 나는 점장이 무슨 소리를 한 것인지 정확히 몰라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츠시가 나를 보지 않은 채 말했다. “왔으면 유니폼부터 갈아입어야지.”

 저녁시간이 되자 손님들이 몰려들었다. 오늘부터는 아츠시가 요리까지 담당한다고 해서 더욱 바빠졌다. 레스토랑은 처음 들어온 직원이 간단하고 쉬운 일을 하고 직급이 올라갈수록 지저분하고 복잡한 일을 했다. 나는 서빙과 샐러드 만들기와 계산만 담당하지만, 점장은 배달과 쓰레기 치우기, 청소, 설거지 그리고 요리까지 담당한다. 일이 더욱 많고 복잡해질 거라는 걸 알면서도 점장이 되고 싶어 하는 아츠시가 대견해 보였다. 밉기는 했지만 내가 봐도 점장이 될 만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어?”

좀체 잡담을 걸어오지 않던 아츠시가 먼저 말을 건넸다. 자기 때문에 내가 웃음을 지은 줄은 눈치도 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나는 얼결에 생각나는 대로 둘러댔다.

“패션 디자이너가 꿈인 친구가 있는데, 고생 끝에 학비를 마련해서, 드디어 프랑스로 간대요!”

아츠시가 어깨를 들었다 놓으며 중얼거렸다.

“축하할 일이군!”

손님들이 빠져나가자 점장이 식사를 들고 나왔다. 쟁반에는 내 몫까지 세 개의 카레가 놓여있다. 나는 어려운 시험에라도 합격한 것처럼 좋았지만 티를 내지 않도록 주의했다. 다만 숟가락을 든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감출 수는 없었다. 숟가락 가득 카레를 뜨자마자 입에 집어넣었다. 나의 뱃속을 괴롭혀온 카레가 입속으로 들어오자 세포들 하나하나가 반기는 것 같았다.

그러다 그만 나도 모르게 부탁했다.

“열심히 할 테니까 30분 늘려주세요. 그러니까 6시간씩 일하게 해주세요.”

아츠시가 점장을 바라보자, 그는 별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츠시가 말했다. “내일부터는 6시간 씩 해. 30분은 휴식시간이고, 그때 저녁이 제공될 거야.”

일을 끝내고 나오는 길에 슬며시 뒤를 돌아보았다. 아츠시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흠칫 놀라는 표정이었다. 문득 도쿄 주택에 사는 사람들도 검정색 커튼을 드리우고 있는 창문 안에서 아츠시처럼 밖을 내다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가볍게 목례를 한 후 자전거를 달렸다. 나는 본래 카레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이곳 카레 역시 먹어보니 별다르지 않았다. 그만 향에 깜박 속은 듯한 기분마저 든다. 마치 픽션이었다는 설명을 듣고 나서도, 자꾸만 처음 착각한 대로 하루나짱의 꿈은 패션 디자이너이며, 그녀는 지금쯤 이미 프랑스로 떠나고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것처럼.

그런데도 자꾸 카레가 먹고 싶다. 언젠가는 내가 맡은 향보다 더 맛있는 카레를 먹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소화가 되려는지 트림이 나와 입 안 가득 카레향이 맴돌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