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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과 박규

  • 작성일 2010-10-29
  • 조회수 320

오정과 박 규 (꽁트)

 

 초저녁에 일찌감치 저녁 설거지를 마친 오정 여사는 아침에 보다만 스포츠 일간지를 거실바닥에 펼쳤다. 유머 기사를 읽어가던 그녀는 남편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더니 참지 못하고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박 규씨, 여기 당신 이름이 들어간 유머 좀 들어볼라우?”

“어흠, 흠 또, 또 그 90년대 식 유머 말이군.”

“눈치도 빠르셔. 그래도 이왕 말나온 것 함 들어나 보셔. 한국인이 외국에 갔는데 오밤중에 길거리를 헤매다가 흑인 한 사람을 만났다지 뭐예요, 글쎄. 그 흑인이 어깨를 건들거리며 한국인에게 다가와 Hey, yo! What is your name? 하고 이름을 묻자 한국 사람이 딱 한마디 하고나서 그치에게 총 맞아 죽었대요. 그 한마디가 바로 당신 이름 ‘박 규’ 라지 뭐예요, 글쎄. 헤헤헤, 우헤헤헤······,”

발작적으로 터진 오 정 여사의 웃음에 박 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콧방귀를 꼈다.

“그러는 당신, 사오정 시리즈 큰 걸로 하나 이참에 터뜨려줄까?”

오정 여사는 너무 웃어 눈가로 비어져 나온 눈물을 닦으며 남편을 향해 손사래를 쳤다. 그녀는 실눈을 하고서 살짝 남편을 흘겨보았다.

 

 

 오정 여사와 박 규는 결혼한 지 8년이 지나도 아이가 없었다. 둘 다 낙천적이고 내숭이 없는 성격에 애들까지 좋아하는 게 천생연분이었다. 8년의 결혼생활 동안 아이를 가져보겠다며 둘은 갖은 애를 다 썼다. 그러나 오정 여사에겐 양방도 한방도 도무지 먹혀들지 않았다. 그간 먹은 한약으로 오정 여사는 턱과 배의 두께만 두 배로 늘어났다. 그래도 박 규는 부인 오정과 친구처럼, 때론 애인처럼 잘 지내왔다. 언젠가 박 규는 우리의 결혼은 ‘시민의 연대’이며 우리 부부는 평등을 지향해야 한다며 그녀에게 열변을 토했는데 이는 어느 사회운동가의 말을 빌린 것이었다. 아무튼 오정은 어쩌다 흘러나오는 박 규의 달변에 매번 또 다른 매력을 느꼈으며 둘은 남들에게 나무랄 데 없이 금슬 좋은 부부로 비춰졌다.

그런데 둘의 이야기는 이 시점에서 철컥 제동이 걸린다. 그들의 일상에 미모의 술집 마담이 끼어들면서 둘의 연대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세상을 살다보면 가난에 찌들려 살던 일가족이 살만해지면 그 집의 가장이 덜컥 암에 걸린다던가 자식이 몰래 비행청소년의 길을 걷는다던가 하는 식의 반전이 늘 도사리고 있지 않은가.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다. 멀쩡했던 다리가 한 순간에 붕괴되고 엊그제까지 죽고 못 살겠다던 연인들은 며칠 못가 새 애인의 팔짱을 끼고 버젓이 거리를 활보한다.

 

 

 문제의 발단은 박 규네 아파트 단지 앞에 새로 생긴 소주방이 일주일간 턱없이 낮은 술값에 무제한 안주 리필을 서비스로 모시겠다는 작은 현수막을 내걸면서부터다. 박 규와 회사에서 늘 붙어 다니는 후배가 모처럼 형님 대접을 하겠노라며 들른 곳이 바로 자신의 아파트 앞에 새로 개업한 소주방이었던 것이다.

그들을 첫 손님으로 맞이하게 된 술집 마담은 이상하게 박 규를 보자마자 눈물을 글썽였다. 박 규 또한 술집 마담이자 돌싱(돌아온 싱글)인 정 양을 처음 본 순간 코끝이 시큰했다. 별난 인연이 만들어지려는지 둘의 첫 만남은 독특한 구석이 있었다. 박 규는 정 양을 보며 어릴 적 병 치례로 세상을 떠난 하나뿐인 여동생을 떠올렸고, 정 양은 2년 째 사우디에 파견 나가 있는 유일한 혈육인 오빠의 모습을 그에게서 발견했다. 박 규는 괄괄하고 웃음이 헤프며 터무니없이 낙천적인 그의 아내인 오정과는 달리 여성스러움과 우아함, 슬픔과 교태가 한꺼번에 묻어나는 정 양의 매력에 순간 정신이 혼미해졌다. 정 양은 박 규를 낯선 도시에 정착한 자신의 기둥서방으로 받들리라 마음먹고는 그를 오라버니 이상으로 친밀하게 대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박 규는 자신을 친오빠 이상의 감정으로 대하는 정 양과 달콤하고도 내밀한 관계를 가졌다. 원 나잇 스탠드로 끝났으면 좋으련만 정 양은 박 규에게 그간의 자신의 불행과 가족사를 고백하며 성격 좋은 그에게 끈덕지게 들러붙었다. 정 양은 첫날 술집을 찾았던 후배 앞에서 과감한 스킨십을 선보였고 박 규는 체념한 듯 그녀를 받아들였다. 하긴 그즈음 박 규도 정 양에게 완전히 넋이 빠져 있었다. 박 규는 시도 때도 없이 모임을 핑계로 저녁을 밖에서 먹고 2차로 술을 사겠다며 회사 동료들과 고향후배를 정 양의 소주방으로 불러 모았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반드시 밟히는 법! 회사도 불경기인데다 연말도 아닌데 유난히 회식과 술 약속이 늘어난 박 규를 가만두고 보고 있을 오정 여사가 아니었다. 한 달 전부터 이웃 주민들 입에 숱하게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불륜의 남자 주인공이 설마 자신의 남편 일 줄 그녀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결국 오정은 소문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어느 날 정 양의 소주방을 급습하게 되었다.

 

 

 정양과 박 규는 저녁도 거른 채 초저녁부터 가게 문을 닫고 술판을 벌여놓고 있었다. 문 닫힌 가게 안에서 흘러나오는 심수봉의 미세한 노랫가락이 오정여사의 발목을 붙잡았다. 레코드판에서 ‘사랑밖엔 난 몰라’에 이어 신곡 ‘백만 송이 장미’가 흘러나왔을 때 오정은 걸음을 멈추고 술집에 들른 손님인양 문을 둔탁하게 두드렸다. 술기운이 목까지 뻗쳐 내려온 정 양이 비틀거리며 다가와 문을 열었을 때 오정은 문 옆으로 슬쩍 몸을 숨겼다. 다시 문을 닫고 들어가려는 정 양을 밀어제치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눈에 탁자 위에 술병과 함께 엎어진 남편 박 규의 모습이 순간 포착되었다. 소주와 맥주병이 탁자 위에 굴러다니고 베어 먹다만 과일조각과 안주들에서 시큼한 냄새가 퍼져 나왔다. 오정은 성난 코뿔소처럼 씩씩대며 남편에게 다가가 의자를 뒤로 밀치고 탁자위에 있던 술병들을 다섯 손가락으로 간단히 제압해버렸다. 상황 파악이 덜 된 정 양의 입과 눈이 동시에 휘둥그래졌다. 박 규도 낯익은 비명과 소란스러움에 술이 깨어 불쑥 고개를 들었다. 오정 여사의 가운데 손가락이 찢어졌는지 피가 철철 흘렀다. 피가 멈추지 않고 계속 흐르자 오정은 자신도 뜻밖이라는 듯 놀라서 비명을 지르며 박 규에게 달려들었다.

“119, 119!”

박 규의 다급한 채근에 정 양이 그의 핸드폰을 열고 덜덜거리는 손가락으로 119를 눌렀다. 박 규가 오정을 안아 일으켜 세우는 동안 정 양은 바닥에 널브러진 술병이며 깨진 유리조각을 치우기 위해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5분 후 출동한 소방차 응급칸에 실려 떠나는 박 규와 오정을 지켜보며 정 양은 입을 막고 쓰게 울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속이 불편한 듯 가게 문 앞에 서서 과일건더기며 술 찌꺼기를 왈칵 토했다.

 

 

 오정 여사의 무용담은 그날 소주방 맞은편에서 노점상을 하던 순대 아줌마의 입소문을 타고 부풀려질 데로 부풀려졌다. 정 양의 머리가 반쯤 뽑혀나갔을 것이라느니, 박 규가 앞으로 남자 행세를 못하게 되었다느니, 오정이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그들 앞에서 혈서를 썼다느니 하는 터무니없는 소문들이 아파트 단지에 퍼져나갔다.

삼 일이 지난 후 오정 여사는 가운데 손가락에 석고붕대를 감고 순대 아줌마한테 들렀다. 그녀는 우뚝 솟은 중지를 이용해 떡볶이 이천 원 어치와 순대 일인분을 주문해 검은 봉지에 담아달라고 했다. 순대 꼬랑지를 쓱쓱 썰던 아줌마가 “누가 남편 이름이 박 규 아니랄까봐”하며 의미 있는 웃음을 날렸다. 오정은 오른손 중지에 붕대를 감고도 시장과 슈퍼에 들락거리고 은행 일을 봤으며 김밥 집에서 동네 아줌마들과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즈음 박 규는 자신의 등에 업혀 소방차에 올랐을 때 보았던 오정 여사의 간절한 눈빛을 떠올리며 스스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딱딱한 들것에 실려 가면서도 오정은 의식을 놓지 않고 가느다란 실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맺은 채 남편 박 규에게서 한시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박 규는 그날 이후로 다시는 정 양을 찾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러나 전 남편과의 결혼생활에서 아이 없이 혼자 된 정 양은 박 규의 씨앗을 몰래 배 안에 품고 있었다. 정 양은 박 규의 핸드폰 번호가 바뀐 사실도 모른 채 숱하게 그에게 문자를 보냈으나 전화는 걸려오지 않았다. 정 양은 그가 일부러 자신을 피하는 것이라 여겼다. 그녀는 인스턴트 죽으로 끼니를 대신하며 박 규가 한번쯤은 자신을 찾아와 정답게 그녀 이름을 불러줄 것이란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지성이면 감천이란 옛말 그른 것 없다더니 정 양에게도 드디어 기회가 왔다. 술집을 개업한 날 보았던 박 규의 회사 후배가 웬일로 그녀를 찾아온 것이었다. 그녀는 박 규의 후배에게 그간에 자신에게 생긴 일들을 울며불며 털어놓았고 단 한번만이라도 좋으니 그녀가 박 규를 만나고 싶어 한다고 꼭 전해달라고 부탁 했다. 마음약한 후배의 입을 통해 며칠 후 박 규는 자신의 2세가 정 양의 배안에서 태동하기 시작했음을 알게 되었다. 박 규는 속으로는 기분이 날아갈 듯 했으나 겉으론 내색할 수 없는 답답하고 혼란한 지경에 처했다. 결국 박 규는 자신의 유일한 혈육을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다시 마음을 바꿔먹었다. 입덧이 심해 죽밖에 못 넘긴다는 정 양을 위해 박 규는 퇴근 후 죽 전문점에 들러 전복죽을 포장해서 결국 그녀를 찾아갔다.

 

 

 이 날 병원에 들른 오정 여사는 자신의 중지에서 하얗게 풀려나간 붕대의 양에 놀랐다. 붕대를 제거하면서 이젠 그간에 하지 않았던 집안일들이 오롯이 자신의 몫이 되리란 짐작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 일이 있은 후 오정은 남편 앞에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오른 손 중지를 석고붕대로 감싸고 있기 때문에 마트에서 장을 봐도 꼭 배달을 시켰고 주말에 어쩌다 시켜먹었던 배달음식 그릇들이 평일에도 아파트 현관 앞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박 규가 설거지며 빨래, 청소 등 집안일을 다 알아서 해주었으므로 오정은 손가락만 제외하고는 뽀얗게 살이 올랐다. 병원을 나오면서 그녀는 오른손을 쫙 펼쳐 들고는 하얗게 살이 부어오른 중지를 까딱거려 보았다. 그리고는 손가락 전체를 오므렸다 다시 펼쳤다. 다른 손가락들과 함께 중지도 자연스럽게 따라 움직였다. 그녀는 이대로 손가락에 붕대를 한 며칠 더 감고 있으면 좋으련만 하고 생각했다. 이참에 남편을 확실히 집안에 붙들어둘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만 같았다. 오정은 무척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살살 흔들며 마트에 들러 저녁 찬거리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 시각 정 양과 박 규는 죽 사발을 앞에 놓고 눈물의 재회를 하고 있었다. 마치 이산가족이 다시 만나 눈물의 상봉을 연출하듯 안고 또 안아도 애틋한 마음이 솟구칠 뿐이었다. 둘은 오랜만에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팔베개를 하고 누운 정 양이 그에게 안기며 말했다.

“오라버니, 나 절대 배신 안 할 거지?”

“그럼, 내 아이도 여기 있는데, 내가 왜?”

박 규는 정양의 아랫배에 두터운 손을 가만히 얹으며 말했다. 둘은 당분간 비밀스런 만남을 지속하기로 굳게 약속했다.

 

 

 오정 여사는 박 규가 다시 집으로 돌아온 만큼 예전처럼 금슬 좋은 부부로 살아가게 되리란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겉보기에 박 규는 전보다 오정에게 더욱 다정하게 굴었으며 집안일도 척척 잘 도와주었다. 한 순간의 바람을 집안일 따위로 애써 무마하려는 남편의 행동이 귀엽게 느껴져 그즈음 오정은 더욱 살맛이 났다.

그런데 오정 여사의 귀에 반갑지 않은 소문이 들려왔다. 단순히 소문이라고 넘겨버리기엔 남편의 행동이 점점 미심쩍게 느껴졌다. 더구나 정 양이 남편의 애를 가졌다는 소문은 아파트 단지에 나도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설마, 설마 하면서도 오정은 2%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결국 오정은 다시 장사를 시작한 정 양의 소주방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퇴근시간 한 시간 전이라 가게는 썰렁했다. 문소리가 났는데도 안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정 양은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았다. 오정은 가게를 휘휘 둘러보며 남편의 흔적을 찾아보려고 촉각을 곤두세웠다. 가게는 그럭저럭 장사가 잘 되는지 전보다 깔끔하고 인테리어도 고급스러워진 느낌이었다. 정 양이 가게로 걸어 나오다가 문 옆 탁자에 앉은 오정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정 양의 손이 급하게 아랫배를 감싸는 순간 오정 여사의 눈에 불꽃이 일었다.

둘은 동시에 ‘설마’를 외쳤다.

“설마, 뭘 알고 온건?”

“설마 그 뱃속에 내 남편 씨앗이?”

“내 이것들을 그냥······,”

오정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정 양이 잔뜩 겁먹은 얼굴로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는 무슨 생각에선지 정 양에게 다가가는 걸 멈추고 발걸음을 문 쪽으로 향했다. 그러더니 술집 문턱에 대자로 뻗으며 밖에 들리도록 악을 써댔다. 얼핏 들어보니 그것은 음정 박자를 깡그리 무시한 심수봉의 <사랑밖엔 난 몰라>였다. 노래 부르는 중간 중간 오정은 정 양에게 들리도록 큰 소리로 외쳤다.

“술집 장사 계속 하려거든 뱃속 애부터 지운다, 잔말 말고 내일 당장 나랑 병원에 간다.”

오정 여사는 심수봉의 트로트를 부르는 중간 중간 반복적으로 구호를 외치며 정 양을 협박했다. 한 시간가까이 오정 여사의 쇼는 지루하게 계속 되었다. 이윽고 정 양이 부엌에서 나와 그녀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알았어요, 지운다고요, 지워. 낼 당장 병원에 데려가줘요. 됐어요?”

오정 여사는 부스스 일어나 구겨진 잠바를 벗어 옆구리에 끼고는 바지 뒷주머니를 훌훌 털었다. 그리고 다음 날 병원 앞에서 만나기로 정 양과 약속을 잡았다.

 

이 시각 박 규는 유아용품점에 들러 정 양의 탐스런 배를 더욱 돋보이게 할 임부복과 주황색 아기신발 한 켤레를 고르며 계속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늦은 나이에 뜻밖에 자식이 생긴다는 사실에 박 규는 한껏 가슴이 부풀고 설레었다. 아기 신발을 불빛아래 이리저리 비춰보며 그는 곧 태어날 갓난아기의 꼬물꼬물한 발가락을 떠올렸다. 이 때 핸드폰으로 정 양의 문자메시지가 들어왔다. 몸이 좋지 않아 주말에나 보자는 정 양의 문자였다. 박 규는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이참에 부인 오정여사에게 점수나 따둬야지 하며 골랐던 꽃무늬 임부복과 아기신발을 제자리에 두고 나왔다.

 

 

 다음날 오정 여사는 개인 산부인과 의사를 끈덕지게 설득해 정 양의 불법 낙태를 강행하기에 이른다.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영양제까지 맞고 나온 정 양에게 오정은 미역국과 위로금을 안겨주는 센스도 잊지 않았다. 정 양은 몸이 홀가분해지니 기분까지 날아갈 것 같다며 오정에게 살가운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이런 사실도 모른 채 주말 약속을 핑계로 박 규는 집을 나왔다. 뜻밖의 자신의 선물에 놀라 함박웃음을 터뜨릴 정 양의 얼굴을 떠올리자 박 규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새로 산 꽃무늬 원피스 형 임부복을 입고 아기신발을 치켜들며 환하게 웃을 그녀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정 양은 잠옷 차림으로 박 규를 맞았다. 다행히 잠옷에 가려져 홀쭉해진 배가 표시가 나지 않았다. 박 규는 서둘러 그녀를 기쁘게 해 줄 요량으로 그녀 앞에 임부복과 아기 신발을 펼쳐 놓았다. 정 양의 얼굴이 일순간에 굳어졌다. 양 미간을 찡그리며 그녀가 시선을 딴 곳으로 돌렸다. 선물을 내팽개치고 안방으로 들어간 버린 정 양의 뒷모습을 보며 박 규는 잠시 맥이 풀렸다. 그녀가 방에서 나와 꽉 조인 청바지에 분홍색 후드티를 걸치고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앞에 선 정 양이 그 보란 듯이 티셔츠를 배꼽까지 슬쩍 들어 올렸다.

“오라버니, 얼마나 홀가분한지 모르겠어. 아이를 지우고 나니 완죤 내 세상이야.”

박 규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그녀를 그냥 쳐다보았다.

“도대체 언제? 나랑 상의 한마디 없이·····,”

정 양은 흥 콧방귀를 뀌더니 박 규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상의는 무슨, 가서 싸모님한테나 물어보시죠. 오라버니하고도 인연 끊을 테니 다신 여기 오지도 말아요. 알았어요?”

박 규는 어이를 상실한 채 정 양의 아랫배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임부복과 아기신발을 종이가방에 다시 담아 멍하니 서 있는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박 규는 고개를 끄덕끄덕 하면서 정 양의 아파트를 나왔다. 아파트를 나왔지만 고장 난 자동인형처럼 계속 고개가 끄덕여졌다.

 

 

 일찍 집으로 돌아온 박 규를 오정 여사는 환대했다. 어깨가 축 쳐져 힘없이 돌아온 그를 얼마나 환하고 반갑게 맞아주던지 박 규는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오정 여사는 아이마냥 고분고분해진 박 규를 씻기고 심지어 입을 벌리게 해 이까지 닦아 주었다. 방금 전까지 정 양에게 봉변을 당했을 그였기에 더욱 세심하게 박 규를 배려해 주는 건지도 몰랐다. 오정 여사는 목욕탕 욕조에 부표처럼 힘없이 잠겨 있는 남편의 등을 밀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세월이 좀 먹냐? 우리도 2세를 볼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안 되면 입양이라도 하지, 뭐.’

이런 오정 여사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남편 박 규는 자꾸만 정 양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 생각을 떨쳐버리기라도 하듯 그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오정 여사가 뭐라 투덜거리며 화장실 밖으로 나갔다. 박 규는 욕조 맞은편 작은 거울 속에 비친 한 남성을 향해 자신의 오른손 중지를 들여 보였다. 턱수염이 꺼뭇꺼뭇한 중년의 남자가 자신을 향해 희미한 미소를 되돌려 보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