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이름
- 작성일 2010-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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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
‘이름: 장 미, 나이 : 24세, 학력 : L여대 영문학과 졸업, 영어 과외 경력 3년’
정애는 K시 OOO 어학원의 중등 영어전담 강사로 소개된 자신의 얼굴이 무척 낯설어 보였다. 정애는 광고지에 실린 자신의 가명과 가짜 이력을 보며 ‘훅’ 웃음을 터트렸다. 광고지에 코를 박고 있던 박 선생이 다소 놀란 듯 웃고 있는 정애를 바라보았다.
“이러다 걸리는 건 아니겠죠? 이름까지 가명을 쓰니 전혀 딴 사람 같아요.”
“학원가에선 공공연한 비린데 뭘, 그나저나 장 선생, 사진발 잘 받는데......”
“괜히 말 돌리지 말구요. 이대 영문과는 좀 심했다. 안 그래요?”
“어차피 방학 때까지 딱 3개월만이야. 지금 있는 얘들 확실하게 봐 주다가 방학 때 과외로 돌려. 아마 방학엔 원장이 직접 전담할 게 분명하니까.”
정애는 3개월 동안 자신이 아닌 장 미의 인생을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이름 때문에 학원생들 입에 오르내릴 게 뻔한데, 왜 하필 하고 많은 이름 중에 장 미인지 따져 물으려다 그만두었다. 박 선생은 자신이 만든 학원 광고문구와 강사 경력 따위가 빽빽하게 적힌 광고지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요즘 그는 학원 강사일 보다 학원광고지 만드는 일에 더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언제부터 일하면 돼요? 이쪽으로도 차 운행이 가능한가?”
“급하다니까 내일 당장 일할 수 있겠지. 대학교 정문 앞에서 차타는 애들 있으니까 시간 맞춰 나와. 애들하고 섞이기 싫으면 시내버스 타도 되구.”
“학원 차 타죠, 뭐... 애들하고도 적응해야 하구요.”
박 선생은 잘할 수 있지 하는 눈빛으로 정애의 반응을 살폈다. 일주일에 세 번, 학원에 나가 세 시간씩 아이들 가르치고 80만원이면 보수치고는 꽤 괜찮은 조건이었다. 한 3개월 가르쳐보다 공부 잘하는 시내 아이들 몇 데리고 나와 개인과외를 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정애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박 선생이 일격을 가했다.
“학원 애들 과외로 빼돌릴 생각은 첨부터 안하는 게 좋아. 원장한테 미운 털 박히기 십상이야.”
“아이, 그럼요. 그건 예의가 아니죠.”
서른여섯, 노총각 박 선생은 정애와 띠 동갑이다. 지금 정애가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중학생 아이의 외삼촌이다. 그는 일주일에 두 번 자기 조카 수학을 가르치러 왔다. 정애와는 오다가다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와 이야길 나눠보니 같은 띠라 그런지 그녀와 통하는 점이 많았다. 그는 정애를 자신의 막내 여동생처럼 편하게 대해 주었다. 정애도 그런 박 선생에게 허물없이 굴었고 둘은 더욱 가까워졌다. 언제부턴가 박 선생은 학원 일이 정애에게 더 어울리겠다며 K시에 자기 친구가 운영하는 학원을 소개시켜 준다고 했다. 한 달 전 박 선생이 말한 K학원에서 급하게 강사를 구한다며 친구에게 정애를 소개시킨 것도 박 선생이었다.
정애는 2학기 개강에 앞서 가을학기 시간표를 정정하기 위해 학과 사무실로 올라왔다. 학과 사무실은 코스모스 졸업을 하는 학생들과 개강 일에 맞춰 시간표를 정정하려는 학생들로 북적댔다. 졸업반인 정애도 이제 진로를 정해야 할 것 같았다. 학원 강사 일을 직업으로 삼기엔 불안정한 면이 많았다. 과외를 하면서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해볼까란 생각도 잠시 했었다. 요사이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느라 고시원에서 두문불출 하고 있는 P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정애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정애는 학과 사무실에 들러 일을 보고나오다 지도교수실에 불이 켜진 걸 보았다. 교수님께 인사라도 드리고 갈까 문 앞에서 잠시 망설이는데 마침 김 교수가 문을 열고 나왔다.
“장 정애, 오랜만이다. 네가 웬일이냐?”
“저기, 학과 사무실에 들렀다가...... 교수님 지금, 바쁘신가요?”
정애는 김 교수의 서류봉투를 학과 사무실에 전해주고 다시 연구실로 들어왔다. 정애가 들어와 앉자마자 김 교수는 커피포트에 물을 끓여 놓았는지 그녀에게 녹차 잔을 건네주었다. 1학기동안 과대표 일을 도맡아 하면서 지도교수와는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들어버렸다. 정애는 교수님 탁자위에 놓인 말라빠진 방울토마토 꼭지 수를 헤아리며 천천히 차를 마셨다. 어색한 침묵을 깨고 김 교수가 먼저 정애에게 말을 걸어왔다.
“정애 넌, 졸업하고 뭐할지 정했어? 보아하니 공무원 시험쪽은 아닌 것 같고......”
“교수님 저, 실은 요즘 제 진로 때문에 고민이 많아요. 원래 법이랑 저는 잘 안 맞아서......”
"야, 이 녀석아 졸업반이 돼서 한다는 소리가 겨우......원래 법은 약방의 감초 같은 거라서 어딜 갖다놔도 다 쓸모가 있어. 너 좋아하는 글 써, 그럼 되겠네.“
“에이, 교수님도...... 제가 뭐 글 써서 밥벌이 할 정도가 돼야 말이죠.”
“학교 신문에 종종 네 글 실린 것 봤다.”
“아, 그거야 편집장이 우리 과 선배니까 후배랍시고 몇 번 글 실어줘서 그렇죠. 전에 학교 신문에 연극평론 몇 번 실린 것 보고 그러시죠?”
“옆방 독어 교수가 너 샤프하다고 하더라. 샤프하니까 너한테 줄 게 갑자기 생각났다.”
성격 급하고 다소 엉뚱한 게 김 교수의 매력이라면 매력이었다. 교수님은 전공서적이 즐비하게 꽂힌 책꽂이 위를 더듬었다. 먼지를 손으로 닦는가 싶더니 그녀 앞에 검고 길쭉한 상자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열어보니 만년필과 볼펜 세트였다. 정애가 이걸 왜 나한테, 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니 이런 거 선물 많이 들어와 하는 교수님 눈빛이 다시 되돌아왔다.
“감사해요. 아까워서 이걸 쓸 수 있으려나 모르겠어요.”
괜한 너스레를 떨자 정애는 이제 할 일이 없어졌다. 녹차 잔이라도 씻으려고 일어나니 김 교수가 만류했다. 선물만 받아들고 나오려니 괜히 쑥스러워져서 정애는 교수님께 인사만 두 번을 했다.
1학기 때 정애는 여학생들 몇몇과 혼자 사는 김 교수 아파트를 밤중에 쳐들어간 적이 있었다. 김 교수는 여학생들의 예기치 않은 방문에 파자마 차림으로 나오다가 다시 황급히 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맛있는 걸 사주겠다며 비싼 중국요리를 이것저것 시켰다. 김 교수와 웃고 떠들며 배부르게 먹고 나오려는 데 “애들아, 집에 안 가도 되는 애들은 좀 남아서 청소도 좀 하고 그냥 자고가라.”고 붙잡았다. 자취생인 정애와 몇몇 애들은 후식으로 아이스크림까지 사와서 다시 그 아파트로 돌아왔다. 그 밤 정애는 슈퍼에서 내일 아침 교수님 해장국으로 일회용 북엇국을 샀다. 그 국은 정애와 김 교수의 그 밤 술안주가 되고 말았다. 과대표인 정애가 제일 만만했던지 김 교수는 끝까지 그녀를 붙잡고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술이 취하자 김 교수 입에서는 지금 부인과는 사이가 좋지 않아 별거중이라느니, 지병인 간경화가 심해져 교수 짓도 더 이상 못 해먹겠다느니 하는 신세한탄이 오래 흘러나왔다. 졸린 눈을 비벼가며 정애가 김 교수 넋두리를 다 들어주고 났을 때 다른 여자애들은 거실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자고 있었다. 김 교수는 거실이 좁으니 안방에 들어가 자자고 했고 정애는 아버지 같은 그의 손에 이끌려 비몽사몽 졸린 눈을 비비며 따라 들어갔다. 이튿날 여학생들은 교수님과 정애가 한 방을 썼다고 놀려댔다. 정말 사이좋은 부녀처럼 나란히 누워 자더라고 했다. 김 교수는 웬일인지 자신의 가슴위에 정애의 손을 가져다 꼭 얹어놓고 잠을 잤다. 정애가 자다 깨어 슬그머니 그 손을 빼려하자 끈끈하고 억센 김 교수의 손이 다시 그녀의 손을 꽉 그러잡는 거였다. 정애는 그 느낌이 꼭 싫지만은 않았다. 어릴 적 아버지를 일찍 여읜 정애로서는 교수님이 아버지처럼 느껴졌다. 정애가 다시 잠을 깨었을 때 교수님은 보이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은 아파트 앞 교수님 단골식당에서 해장국과 보리밥으로 해결했다. 그 일이 있은 뒤로 김 교수는 정애를 딸처럼 더욱 친근하게 대해주었다. 정애가 예고 없이 연구실을 드나들어도 통 나무라지도 않았다. 더군다나 사전에 의논 한마디 없이 학과 행사로 수업을 못 받겠다고 통보하는 데도 전과 달리 김 교수는 곧잘 아량을 베풀어 주었다.
정애가 교수실을 나오자 수업을 듣고 나온 후배 하나가 알은 척을 해왔다.
“언니, 요새 되게 바쁜가봐. 도서관에도 통 보이지 않고, 요새 언니 잘 나가는 거 맞죠?”
“잘 나가기는 무슨......”
“아이, 좋은 알바자리 있음 나도 소개시켜줘요, 언니”
동그란 안경 속 후배의 눈이 정애를 향해 살짝 윙크를 날렸다.
“아참, 선배가 언니 찾던데, 4층 정독실에 한번 올라가 봐요. 어제 다들 술 마신 것 같던데”
“으, 술 지겹지도 않나! 알려줘서 고마워. 또 봐.”
후배는 정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바쁜 듯 계단을 내려가 버렸다.
대개 P가 정애를 찾을 때는 세 가지 이유에서다. 담배 값이 필요하다던가, 아침을 건너뛰었다던가, 아님 술이 고파서이다. 가끔 그녀 자신을 필요로 한 적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4층 법학과 정독실로 들어서자 퀴퀴한 냄새가 대번에 정애의 코를 찔러왔다. 언제부턴가 학과 정독실은 복학생인 선배들과 동기 남자애들의 지정 공부장소가 되어버렸다. 정애는 인상을 찌푸리며 P의 책상으로 조심스레 다가갔다.
P는 법전과 전공 책을 펼쳐놓고 그 사이에 코를 박고 엎드려 자고 있었다. 지난 밤 다들 얼마나 술을 마셔댔는지 제대로 눈 뜨고 공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애가 다가가 P의 옆구리를 쿡 찌르자 그가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어, 왔어?” 그녀 앞에서 P는 기지개를 쭉 폈다.
“으휴, 술 냄새...... 일단 나가자”
P는 두어 번 늘어지게 하품을 하더니 주섬주섬 담배를 챙겼다. P는 어기적거리며 정애를 뒤따라 나왔다.
"도대체 얼마나 마신거야? 고시생들 단합대회라도 한 거야?“
“어, 어떻게 알았어? 어제 저녁 먹고 선배들이랑 막걸리 내기 발야구 한 판 붙었거든, 저녁도 건너뛰고 잔디밭에서 밤새 술 펐지.”
“으휴, 난 이런 선배 땜에 밤새 슬펐다, 슬퍼.”
“농담은...... 나 해장국 좀 사주라 아직 아침도 못 먹었다.”
P는 넉살좋게 웃으며 정애의 어깨를 감싸 안으려 했다. 정애는 얼른 P의 손을 걷어냈다. 그의 입에 어느새 담배 한 개비가 물려 있었다. P가 어깨를 들썩이며 잔기침을 했다. 그에게선 비 맞은 강아지에게서 나는 이상야릇한 냄새가 풍겨났다.
"선배 제발, 좀 씻고 다녀라.“
“알았어, 알았어.” P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따가운 초가을 햇살을 받으며 둘은 학교 후문에 있는 ‘오복식당’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이라며 주인아줌마가 알은 척을 해왔다. 단골이라고 라면을 시키면 공기 밥까지 서비스로 주는 인심 좋은 아줌마였다. 잠시 후 김치찌개에 딸려 나온 계란찜과 쌀밥을 보더니 P의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그나저나 너 그 소식 들었어? 김 교수 이번 학기에 못 나올지도 모른다더라.”
밥을 먹다 말고 P가 대뜸 지도교수 얘길 꺼냈다. 정애가 그의 말에 호기심을 보이자 P가 말을 이었다.
“원래 간경화가 심했었대. 이번 학기 병가 낸다고 하던데, 넌 몰랐어?”
난 “그으래?” 하며 별 일 아니라는 듯 P앞에서 어깨를 한 번 들썩였다.
“엊그제 교수님이 정독실에 올라와서는 내게 그러더라. 정애 눈에서 눈물 나게 하면 너 이 자식 가만 안 둬, 라고. 그 교수 엉뚱하기는, 과대라구 되게 챙겨요.”
“그래서, 뭐... 선배, 교수님한테 질투하는 거야?”
P는 ‘아아니’ 라고 눈을 크게 뜨더니 부스스한 머리를 두세 번 흔들었다. 그리고는 밥공기에 남은 찌개와 계란찜을 비벼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정애는 P와 3학년 때부터 사귀게 되었다. 정애가 처음으로 과대표를 맡게 되었을 때 P는 복학생으로 학과 체육부장을 맡고 있었다. 학과 내 크고 작은 행사가 있을 때마다 P는 그 자리에 늘 끼어 있었다. 과 행사 관계로 복학생들과 술자리를 할 때에도 P가 끝까지 남아 그녀 곁을 지켜주었다. 술 취한 선배들을 달래어 되돌려 보내고 늦은 밤 정애를 자취방 앞까지 바래다 준적도 많았다. 언젠가 그가 검은 오토바이를 타고 도서관 앞에 나타났다. 도서관에서 그녀의 손목을 끌고 나온 그는 정애를 오토바이에 뒷자리에 태우고 학교를 서너 바퀴 돌았다. 그 날 정애의 눈에 P는 검은 오토바이를 탄 멋진 왕자님으로 보였다. 결국 P와 정애는 사이좋은 선후배에서 과 커플로 발동이 걸렸다. C.C로 학과에 소문이 돌고 그들의 연애는 거침이 없었다. 학교 후문 비디오방 비좁은 소파에서, 학생회관 동아리방 딱딱한 나무탁자에서 그들은 스스럼없이 관계를 가졌다. 연일 축구공과 술잔만 쫓던 P가 무슨 맘에선지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해보겠다며 고시원에 들어갔을 때 정애는 이미 뱃속에 그의 아이를 임신했었다. 6주째 되던 날 정애는 병원에 들러 몰래 아이를 지웠다. 한참 뒤에 그에게 사실대로 고백했을 때 P는 정애를 위로하고 감싸 주었다.
P의 홀어머니는 경상도 어디선가 함바집을 맡아 근근이 돈을 벌어 그의 학비를 조달하고 있었고, 정애의 가정형편도 P보다 나을 게 없었다. 정애는 3학년 때까지 장학금과 학자금 대출을 받아 대학 4년을 징글징글하게 이어가고 있었다. 정애는 고시공부보다 현실적인 공무원 시험을 택한 그를 위해 그녀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기로 결심했다. 여름방학이 끝나 함께 살던 친구 자취방을 나온 정애는 P의 자취방으로 간단하게 짐을 싸서 들어갔다. 긴 공부에 장사 없다고, P의 아침이라도 챙겨주려고 내린 결정이었다. 그녀가 챙겨주는 아침밥 덕분인지 P의 몸은 건강해지고 날로 윤택해졌으나 정작 그녀의 몸은 축나고 망가져만 갔다. 과외와 아르바이트도 모자라 학원 시간강사까지 하게 된 정애는 정신없이 바빠졌다. 그 와중에도 그녀는 P를 살뜰히 챙기고 보살폈다. 그 일이 그녀의 유일한 낙이자 삶의 목표인 것처럼 말이다. 지난 해 7급 공무원 시험에 떨어진 P는 올해 공무원 시험 목표를 한 단계 낮춰 잡았다. 작년에 아깝게 시험에 떨어진 그는 9급 공무원 시험 정도는 누워서 떡먹기라 여기는지 이번엔 남모를 자신감에 차 있었다.
속을 든든히 채우고 기분 좋게 식당을 나온 그가 담배를 새로 꺼내 물며 정애에게 말했다. 철 이른 낙엽들이 식당 앞을 지저분하게 맴돌고 있었다.
“정애야, 나 이번에 붙으면 우리 과에 새바람을 일으킬 것 같아. 와, 술만 먹고 공만 차던 선배가 수석으로 붙었네 하면서 후배 녀석들 너도나도 공무원 시험에 덤벼들겠지...... 와, 생각만 해도 몸이 다 떨린다, 내가”
P가 미리 합격수기를 쓰듯 정애 앞에서 큰 소리로 떠들며 온 몸을 흔들었다. 정애는 왠지 한숨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으며 그에게 힘주어 말했다.
“선배는 이번 시험에 꼭 붙을 거야, 아니 꼭 붙어야 하고말고.”
정애는 불안한 맘을 일부러 내색하지 않으려고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이제 석 달을 장 미로 살아야 한다.’
자취방에 돌아와 정애는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이번에 학원을 소개시켜 준 것으로 박 선생은 그녀에게 꽤 친밀하게 굴었다. 감히 열두 살 연하인 내게 들이대다니, 하다가도 정애는 박 선생의 소년 같고 천진난만한 웃음을 떠올렸다.
가끔 정애는 박 선생의 차를 타고 교외로 드라이브를 가고 차 마시러 두어 번 카페에도 들락거렸다. P와는 고작 시내버스 타고 나가 영화 몇 번 보고 학교 앞 분식점이나 호프집을 간 기억밖에 나지 않았다. 정애가 P를 엄마처럼 챙기고 보살펴 주는 동안 노총각 박 선생은 정애를 막내 여동생처럼 살갑고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가끔 정애의 막말이나 버릇없는 행동도 애교로 받아들여주었다. 언젠가 한번은 박 선생이 사귀어보자며 술 먹고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온 적도 있었다. 그 때 정애는 “지금, 장난해요?” 라고 웃으며 넘겼었다. 그러나 정애는 수화기 너머로 박 선생의 떨리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자신이 조금 흔들렸다는 걸 알았다. 정애는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와 자신을 사랑해주는 남자사이에서 전자를 택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정애는 자신의 희생을 감수할 필요가 없는 후자의 경우도 괜찮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요즘 들어 정애는 P와 박 선생을 내심 저울질 하고 있었다.
K학원은 정애가 생각했던 것보다 작고 아담했다. 소도시에 면한 읍내 학원이었는데 중학교가 근처라서 그런지 학생 수는 꽤 많았다. 원장은 첫날 정애에게 몇 몇 남학생들을 보여주며 입조심을 시켰다. 어차피 가짜 경력사항이나 개인적인 사정얘기는 함구하기로 마음먹은 정애였다. 첫 날 수업은 그럭저럭 별 탈 없이 진행되었다. 미리 원장한테 선생이름 가지고 장난치지 말라는 경고를 들은 아이들은 지들끼리 뭐라 속닥거릴 뿐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정리하는 데 한 남학생이 정애에게 건들거리며 다가왔다. 요주의 인물로 원장이 찍은 아이였다.
“샘, 정말 이대 영문과 나온 거 맞아요?”
“그건 알아서 뭐하게?”
“엄마가 샘한테 물어보라고 했어요. 근데 정말 이대 나오긴 했어요?”
여드름투성이 남자애가 정애를 향해 능글맞게 웃었다.
“그래, 이 녀석아. 됐냐?” 가지고 있던 자로 남자애 이마를 한번 톡 쳤다.
“졸라 아프네.” 붉어진 이마를 한손으로 비비며 여드름이 강의실을 나갔다.
혹시 과외자리라도 알아봐 주려고 그러는 건 아닐까, 정애는 내심 속으로 좋아했다. 이 학원에서 확실하게 입소문만 나면 한, 두 팀 짜서 방학 때 과외로 돌리는 건 시간문제라고 여겼다. 수업이 없다던 박 선생이 정애의 첫 수업을 축하한다며 장미꽃다발을 사들고 학원에 나타났다. 밤 열시가 다 되어 학원 앞 오리탕집에서 원장과 정애, 박 선생이 늦은 저녁을 먹었다. 박 선생은 시종일관 원장과 정애를 향해 하나마나한 농담을 던지며 혼자 히히덕거렸다. 원장은 학원 광고지를 문제 삼아 뭔가 박 선생에게 주의를 줄 참이었는데 정애가 함께 있자 속만 끓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의외로 박 선생 친구인 원장은 말수가 적고 오만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그날 밤 정애는 약간 술에 취해 박 선생의 차를 얻어 타고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정애가 내리려는 데 일어나 차문까지 열어준 박 선생은 별로 취하지 않은 그녀의 몸을 부축하며 귓속말로 말했다. “잘 자요.” 그날 박 선생에게서 받은 장미 꽃다발의 의미가 뭔지 정애는 물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축하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을 박 선생의 느끼한 눈길에서 그녀는 감지할 수 있었다. 차에서 내려 정애는 집 앞 슈퍼에 들러 내일 아침에 P에게 끓여줄 일회용 국거리를 사서 가방에 챙겨 넣었다. 그 밤 P는 고시원에서 밤을 새는지 자취방에 들어오지 않았다.
학원에서 첫 월급을 받은 주말 오후, 정애의 자취방에서 조촐한 삼겹살 파티가 열렸다. 그날은 옆방 복학생 선배와 P가 도배지를 사와 여름장마로 곰팡이가 핀 벽을 새로 도배를 했다. 고시원 선배들도 두엇 소주를 사와서 막판에 끼어드는 바람에 삼겹살이 모자랐다. 소주안주로 정애는 콩나물과 신 김치를 넣어 김칫국을 끓였다. 취기가 알맞게 오른 선배들이 옆방으로 우르르 이차를 하러 몰려갔다. 그들과 눈치 없이 동행하려는 P의 소맷부리를 잡은 건 정애였다. P가 아쉬운 듯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흩어진 나무젓가락과 고기접시 따위를 주섬주섬 모아 한쪽으로 치우기 시작했다. 정애는 술기운으로 붉어진 얼굴을 손등으로 싹싹 비벼대며 이불 속으로 슬그머니 기어들어가 버렸다.
“정애야.” 그가 싱크대에서 설거지를 하다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응?” 졸음에 겨운 듯 정애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 그 학원 관두면 안 돼? 밤마다 너 여기까지 바래다주는 그 자식, 도저히 신경 쓰여서 안 되겠어.”
“두 달만 참아. 그때까지만......”
참았던 한숨을 몰아쉬는 듯 P의 어깨가 풀썩였다.
“...걱정 마, 그 선생님과는 아무 일 없었으니까.”
“......”
“방 새로 도배하니까, 신혼 방 같다 그치?”
“그러네.” 마지못해 P가 수긍했다.
그 밤 정애는 오랜만에 P를 깊이 안아주었다. 가식으로 걸치고 있던 옷을 모두 던져버린 그들은 그 밤 서로에게 정직했다.
이튿날 학원에 출근했을 때 정애는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상담실에서 박 선생과 원장이 다투는 소리가 복도까지 흘러나왔다.
“거봐, 내가 뭐랬어, 임마. 속일 게 따로 있지......”
“내가 뭐 이럴 줄 알았나?”
언뜻 듣기에도 정애의 가짜 학력과 경력을 문제 삼은 대화였다.
“꼴통 학부모에게 전화가 걸려왔으니 소문나는 건 금방이라구.”
“정말 걔네 아버지가 교육청에 근무하는 게 확실해?”
정애는 순간적으로 일이 잘못 됐음을 직감했다. 이쯤해서 스스로 알아서 물러나주는 게 예의였다. 정애는 강의실로 향하려던 발걸음을 돌려 슬그머니 학원을 빠져나왔다. 그날 오후 정애는 자취방에 돌아와 곧장 드러누워 버렸다. 정애의 삐삐엔 K학원 전화번호와 8282가 수없이 찍혔다.
그날 밤 현관문을 세게 두드리는 소리에 정애는 잠에서 깼다. 초췌한 몰골의 박 선생이 비를 맞고 문 앞에 서 있었다. 정애는 순간적으로 P가 돌아올 시간이 됐는지 흐린 눈을 들어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열한 시 반이었다. 오늘은 고시원에서 밤을 새려는지 옆 방 불도 꺼져 있었다. 정애는 박 선생을 안으로 들이려다가 밖에서 기다리게 했다. 파란색 줄무늬후드 티와 청바지를 꺼내 입고 정애는 밖으로 나갔다. 그의 몸에선 비에 젖은 땀 냄새와 함께 희미하게 술 냄새가 배어났다. 정애는 박 선생의 차 안으로 갔다.
“장 선생, 왜 연락이 안됐던 거야? 애들이 학원 차에서 분명 봤다고 하던데?”
“......”
“학원 와서 원장이랑 내가 하는 얘길 들은 게 맞지?”
“네, 그 상황에선 그냥 빠져 나올 수밖에 없었어요.”
“내 잘못이 커, 내가 광고지에 그렇게 부풀려 적어 놓지만 않았어도......”
“선생님 잘못이라뇨? 자책하지 말아요. 어차피 한 달 후면 그만 둘 거였잖아요.”
“장 선생, 그래도 원장 만나서 밥이라도 한 번 먹고 끝내는 게 낫지 않을까?”
“그래야겠죠. 자릴 만들어주시면 제가 저녁 살게요.”
차안에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냥 내릴까 하다가 정애는 조금만 더 앉아 있기로 했다. 박 선생이 불현듯 오디오를 틀었다. 귀에 낯익은 팝송이 흘러나왔다. 비틀즈였다. <Yellow submarine>이 차 안의 정적을 깼다. 가느다란 가을비가 차창 앞 유리로 계속 부딪쳐왔다. 정애는 바닷가 모래사장에 나와 앉아있는 느낌이었다. 어느새 그들의 입가로 나지막하게 팝송이 흘러나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들은 자연스레 입을 맞추었다. 박 선생의 손이 정애의 귀밑머리를 파고들더니 순식간의 그녀의 머리를 흐트러뜨려 놓았다. 정애가 갑자기 입술을 떼려하자 박 선생의 혀가 집요하게 그녀의 입안을 비집고 들어왔다. 오랜 입맞춤 끝에 그들은 잠시 막연하게 앞을 바라보았다. 박 선생이 와이퍼를 작동 시켜 가을비로 지저분해진 차 앞 유리를 닦았다. 그들의 눈 앞에 거대한 그림자가 턱 하니 가로막고 서 있었다. 검은 우산을 받쳐 든 P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정애가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하자 박 선생이 그녀의 손목을 강하게 붙잡았다. 뿌리치려 하자 박 선생이 먼저 차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퍽, 퍽” 둔탁한 음이 골목길에 울러 퍼졌다. 뭔가에 부딪히는 소리, 으윽 하는 신음소리, 땅바닥에 질질 끌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정애는 차 문을 잠그고 비틀즈 음악의 볼륨을 최대한 높였다. 날카로운 음색의 <Let it be>가 터져 나왔다. ‘그냥 날 좀 내버려둬!’그들의 절규가 차 안 가득 울러 퍼졌다. 와이퍼를 작동시킨 채 그녀는 양쪽 귀를 모두 틀어막아 버렸다. 한참 후에 차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P였다. 문을 열자 그는 정애에게 와락 안기며 가쁜 숨을 몰아쉬며 쓰러져 버렸다. 골목길에 둥그런 형체로 웅크리고 있는 검은 그림자에서는 신음소리가 낮게 흘러나왔다. P를 부축하고 방까지 데려오는 데 정애는 식은땀이 났다. 잠시 후, 골목길에서 차에 시동을 거는 소리가 들려왔다. 박 선생은 그 밤 그렇게 떠났다. 이튿날 자취방 앞 골목길에 흙탕물을 흠씬 뒤집어 쓴 채 버려져 있던 검은 우산을 보며 정애는 생각했다. 어쩌면 남자들의 폭력과 희롱은 한통속일지도, 동전의 앞, 뒷면 같을지도 모른다는 명제가 정애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날 이후 박 선생은 연락을 끊었다. P도 전과 달리 정애를 따뜻하게 대해주지 않았다. 그는 점점 그녀 앞에서 말수가 없어져 갔다. K학원에서도 연락이 없는 걸 보면 정애의 학원 강사일은 더 이상 가망이 없어보였다. 정애는 또다시 과외자리를 수소문했다.
가을학기가 거의 끝나가고 졸업논문이 마무리될 즈음 정애는 학과 사무실에 들렀다. 조교로부터 김 교수의 부음을 들었다.
“간경화에 설암이었대.”
“간암이 아니고?”
강의실 복도에서 두 여자 후배가 얘길 나누다 정애가 지나가자 입을 다물어버렸다. 살아있을 때 한번쯤 병문안이라도 가보는 거였는데 정애는 그 일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그런데 왜 하필 설암이었을까? 암이 혀로도 전이가 가능한가? 쓸데없는 궁금증이 일며 정애는 잠시 혼란스러웠다. 정애의 한 손을 자신의 손에 포개어 가슴에 얹고 잠을 자던 김 교수의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다. 김 교수가 선물한 펜은 정애의 가방 어딘가에 처박혀 있을 것이었다.
내년 초에 시험을 앞둔 P는 짐을 싸들고 고시실로 들어갔다. 정애는 다시 중학생 영어 과외를 시작했다. P의 자취방 열쇠는 정애가 지니게 되었다. 어느 주말 오후 꽃무늬 도배지를 사와 P의 자취방을 새로 꾸미던 날이 문득 떠올랐다. 박 선생이 선물한 장미 꽃다발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자신이 직접 꽃집에 들러 사온 소국과 안개 한 다발을 벽에 장식하며 정애는 소녀처럼 즐거워했었다.
정애는 과외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학교 앞 편의점에 들러 생수와 일회용 북엇국을 샀다. 그리고 안쪽 자그마한 화분코너에서 로즈마리 화분도 하나 골랐다. 정애는 스카프를 다시 두르고 편의점을 나와 어두운 골목길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초겨울의 세찬 바람이 정애의 옷 속을 차갑게 파고들었다. 노란 가로등불 아래 하얀 진눈깨비가 꽃잎처럼 흩날리는 낭만적인 밤이 막 펼쳐지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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