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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야

  • 작성일 2010-12-19
  • 조회수 335

열대야

 

'쿵 쿵 쿵 ··· 드륵 드륵 드르륵.'

샤워를 하고 나오니 밤 열시가 조금 넘었다. 미영이 안방으로 건너가려는데 부엌 천장 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믹서기로 양념을 들들 갈아대는 것도 같고 전동드라이버로 콘크리트 벽을 뚫는 소리 같기도 했다. 미영이 안방 문을 소리 나게 닫고 들어갔다. 잠시 소리가 멈췄다. 그러다 오 분 쯤 지나자 부엌 천장이 흔들릴 정도로 소음이 커졌다. 그 소리는 오 분 간격으로 계속 반복되었다. 미영은 거실로 나와 신경질적으로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관리소 전화번호를 누르려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주위가 다시 고요해졌다. 미영은 미심쩍은 눈길로 한참동안 부엌 천장 쪽을 되쏘아보았다.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미영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안방 침실로 들어가 누워 버렸다.

장마가 소강상태를 보이면서 연일 후텁지근한 무더위가 계속 되었다. 엿새째 열대야가 지속되면서 장미 아파트 주민들은 잠을 설치는 일이 많았다. 밤 아홉시가 넘으면 아파트 앞, 소방도로는 인근 주민들로 북적댔다. 가족단위로 나와 배드민턴을 치거나 운동을 하는 이들도 가끔 눈에 띄었다. 아이들은 아이스크림을 물고 늦게까지 놀이터에서 미끄럼틀을 타거나 숨바꼭질을 했다. 아파트 입구에 세워진 복지관 차량 옆으로 할머니들이 밤늦게까지 쭈그리고 앉아 시든 채소와 삶은 옥수수를 팔았다.

그 시각, 상가 1층 세탁소 옆 '하늘 수학학원'의 간판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여름방학에 접어들자 학원생이 늘면서 경선은 조금 바빠졌다. 아이들이 풀고 간 문제집을 채점하며 늦게까지 그녀는 그곳에 남아 있었다. 미니냉장고 위에는 초저녁에 사둔 순대와 떡볶이가 검은 봉지 안에서 미지근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생수 한 병을 꺼내 병 속으로 녹차티백을 집어넣었다. 열린 창으로 습기를 머금은 후텁지근한 바람이 간간이 밀려 들어왔다. 경선은 떡볶이 국물에 섞인 튀김과 순대 몇 조각으로 간단히 저녁을 먹었다. 그녀는 책상을 정리하고 채점이 안 된 문제집 몇 권을 챙겨 종이가방에 넣었다. 휴대전화에는 경선의 이른 귀가를 바라는 이모의 문자가 두 통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학원 문을 닫고 귀가를 서둘렀다. 아파트 입구 화단에 이르자 그녀는 재채기가 나와 얼른 입을 가렸다. 참았던 기침이 발작적으로 터져 나왔다. 팔뚝엔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녀 앞으로 얼룩 고양이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며 지나갔다. 고양이털이 자신의 몸에 달라붙는 느낌이 들어 경선은 몸을 잔뜩 움츠렸다. 2층 창가의 불빛이 환했다.

202호에 사는 미영은 이년 전, 아들의 학교 문제로 K시 변두리에 있는 이 곳, 장미 아파트로 이사 왔다. 그녀의 남편은 중장비 업체에 근무하고 있었다. 공사를 맡은 요즘, 남편은 새벽 여섯시에 출근해 자정이 넘어서야 귀가하곤 했다. 장미 아파트는 말이 아파트지, 규모로 치면 연립주택이었다. 지어진 지 꽤 오래되어 5층이 꼭대기 층인데다 각동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결혼해서 십 년가량 주택에 살아온 미영은 아파트 주거 환경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밤늦게 오고가는 차량의 불빛과 주민들의 소음으로 밤잠을 설치는 날이 많았다. 초여름에 접어들자 음식쓰레기의 악취와 매캐한 소독약 냄새가 2층 베란다로 한꺼번에 밀려 들어왔다. 열대야가 지속되면서 아이들은 놀이터에 몰려나와 밤늦게까지 소란을 피웠다. 며칠 전에는 슈퍼 앞에서 술을 마시던 주민들끼리 시비가 붙어 싸움이 커지면서 밤중에 경찰차가 다녀가기도 했다. 새벽녘엔 아파트 화단에서 고양이들이 시끄럽게 울어댔다. 1층 벽보판에는 주변을 배회하는 길고양이에게 먹이를 주지 말라는 경고장이 일주일 째 붙어 있었다. 고양이에게 몰래 먹이를 주는 주민을 발견하게 되면 관리사무소로 연락을 주라는 말까지 덧붙여 있었다.

경선은 올해 초, 장미아파트에 혼자 사는 이모 집으로 들어왔다. 지방대학을 졸업하고 공무원 시험에 두 차례 떨어진 그녀는 더 이상 시골 부모님께 손 벌릴 처지가 못 되었다. 그녀는 낮엔 인근 시립도서관 열람실에서 공부하고 오후 늦게 학원을 두 군데 돌며 수학 강사 일을 했다. 나이 오십에 남편을 여읜 이모는 집에서 부업으로 옷을 수선하거나 커튼을 만들어 팔았다. 사촌 오빠 둘은 결혼해 대처에 나가 살고 있었다. 혼자 사는 이모는 경선이 들어오는 걸 처음엔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매달 십 만원씩 용돈을 건네며 살갑게 굴자 이모는 차츰 조카에게 마음을 열었다. 경선이 밤늦게 귀가하면 이모는 거실 한 쪽에 커튼과 옷가지를 늘여 놓고 늦게 까지 일을 하고 있었다. 가끔 형광등을 환하게 켜둔 채 거실 소파에 모로 누워 잠들어 있기도 했다. 경선은 한 달에 한번 시골집에 내려갔다. 주말엔 밀린 공부를 보충하느라 거의 도서관에 틀어박혀 지냈다. 이곳 장미 아파트로 이사 오고부터 경선은 고양이 알레르기가 더욱 심해졌다.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지 말라는 방송이 한 차례 있고나서 그녀는 부쩍 신경이 예민해지고 안색이 좋지 않았다. 알레르기 약을 계속 복용하느라 공부에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더구나 새벽녘이면 아파트 화단에서 고양이들이 울어 밤잠을 설치곤 했다. 요즘 들어 경선은 밤늦게 귀가하는 일이 좀 힘겹게 느껴졌다.

미영은 며칠 전, 남편이 회사일이 바빠 못 들어온 날 밤 베란다 창가에서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베란다 밖에 보이는 아파트 화단 옆에는 공중전화 박스 두 대가 나란히 불을 밝히고 서 있었다. 자정이 가까운데, 그 곳 나무벤치에 두 사람이 어깨를 바짝 붙이고 앉아 있었다. 호기심이 발동한 미영은 살그머니 베란다 창문을 열었다. 어둠속에서 남녀의 형체를 분별하기가 어려웠지만 그들은 분명 302호에 사는 젊은 남자와 여자가 틀림없었다. 어둠속에서 그들은 잠시 가만히 있었다. 갑자기 남자가 한쪽 팔로 여자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오랫동안 입을 맞추었다. 남자의 거친 호흡이 미영이 있는 베란다 창가까지 전해졌다. 그들 눈에 띨세라 그녀는 창가에서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남자가 여자를 안은 채 가슴께로 손을 가져가자 여자가 몸을 움츠렸다. 희미한 공중전화 불빛에 그들의 모습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여자는 남자의 몸을 억지로 떼어내며 "하지 마, 그럼 못 써."라고 말했다. 순간 남자가 몸을 움찔했다. 갑자기 남자는 "형수, 내가 이렇게 생긴 걸 어떡하라구?" 라고 하며 여자에게 언성을 높였다. 미영은 그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3층에 같이 사는 여자가 혹시 형의 와이프라도 된다는 말인가, 간혹 남자들이 친한 선배의 아내를 형수라고 부르기도 한다지만, 저들은 한 집에 같이 살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미영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베란다 창문 틈에 몸을 바짝 갖다 댔다. 벤치에 앉은 여자는 말없이 고개를 푹 수그렸다. 남자가 여자의 블라우스 속으로 손을 집어넣는 것 같았다. 그가 입술을 부비며 가슴을 만지는 데도 여자는 가만히 있었다. 그때 마침 잠옷 바람의 늙수그레한 여자가 그들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느그, 지금 뭣 허는 짓이냐?" 그녀는 거칠게 아들의 팔을 옭아맸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추어 "아야, 이웃 부끄럽지도 않냐?" 라고 말했다. 벤치에 앉은 여자의 어깨가 들썩였다. "제가, 제가 잘못했어요. 어머니" 여자는 울먹거리며 말을 더듬었다. "심부름 시킨 지가 언젠데 이러고들 있냐? 한심한 것들···, 쯧쯧쯧." 잠옷 바람의 그녀는 아들을 일으켜 세워 길을 앞장섰다. 여자가 힘없이 일어나 그들의 뒤를 따랐다. 미영은 자신이 목격한 그날 밤의 일은 당분간 비밀에 부치기로 마음먹었다. 수다스런 편인 윗집 여자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장미아파트에 소문이 퍼지는 건 시간문제일 거였다. 남편은 새벽 한시에 들어와 대충 씻고 거실 소파에 널브러져 잠이 들었다. 그 밤 미영은 몹시 잠을 설쳤다.

미영은 작년에 301호 여자가 자신과 고향이 같고, 또래인 사실을 알고부터 조금 친해졌다. 그녀의 남편은 큰 길 건너 아파트 단지 앞에서 중소형 마트를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가끔 여름 휴가철이나 명절에 마트에 들러 남편을 도울 뿐 초등학생인 아이들을 챙기며 거의 집에만 머물러 있었다. 301호 여자는 오전 열시쯤 자신의 집에서 내려와 미영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다가 전화로 점심을 배달시켜 먹고 가곤 했다. 그녀는 이웃집 흉을 보았는데 주로 옆집 302호 사람들에 관한 게 화제에 오를 때가 많았다. 미영은 301호 여자의 느닷없는 아침 방문이 차츰 부담스럽고 귀찮게 여겨졌다.

그날 아침도 열 시 반쯤 초인종이 울렸다. 미영이 문을 열자 301호 여자는 뭔가 잔뜩 든 검은 봉지를 흔들며 웃고 서 있었다. 그녀는 큰 키로 성큼성큼 현관으로 들어섰다. 미영이 밀린 설거지를 핑계로 부엌으로 건너가자 301호 여자는 식탁의자에 척 걸터앉았다. 식탁 위에 신문지를 펼치고 그 위에 검은 봉지에 든 걸 쏟았다. 다듬어지지 않은 마늘과 양파였다. 묻지 않았는데도 그녀는 시골 시댁에서 가져왔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미영은 커피 물을 가스 렌지위에 올리며 미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301호 여자는 과도를 가져다가 마늘을 벗기면서 옆집 흉을 보았다.

"어젯밤, 옆집하고 하마터면 정면으로 마주칠 뻔 했지 뭐야. 아무리 시골에서 목장을 한다지만 소똥이 묻은 옷을 그대로 걸치고 아파트에 들어올게 뭐야. 모르는 척 계단으로 얼른 올라와버렸더니, 부부싸움을 하는지 밤새 시끄럽더라구."

"어어, 그으래애."

미영은 그녀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했다. 깐 마늘을 손에 쥐고 그녀가 말을 이어갔다.

"하필이면 우리 아파트 단지에 복지관이 있을게 뭐야. 옆집에 모자란 청년이 사는 것도 걸리는 판에 단지 내에 장애인 복지관까지······, 애들 교육상 빨리 이사를 나가든가 해야지, 원. 그런데 말이야. 302호 여자는 집에서 뭘 하는지 하루 종일 코빼기도 안비치고, 뭔가 수상쩍단 말이지. 그나저나 재현엄마는 참 속도 좋아. 난 그 사람들 마주치면 욕지기부터 치밀어 오르던데······,"

301호 여자는 말끝을 흐리며 옆 집 사람들에게 진저리를 쳤다.

"하긴 내 속도 그리 좋지는 않아."

미영이 맞장구를 치자 301호 여자의 눈이 반짝 빛났다.

"밤늦게 뭘 하는지 요즘 시끄러워 통 잠을 잘 수가 없어. 관리소에 얘길 해야 될까봐."

"아, 그 소리. 김치 담가서 반찬가게에 파는 것 같더라구."

"아, 아."

301호 여자의 말에 미영이 탄식처럼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요 며칠 그녀의 신경을 바짝 옭아매던 그 소리는 밤중에 믹서기로 김치 양념을 들들 갈아대는 소리였던 것이다.

그날 301호 여자는 굳이 안 먹겠다는 미영에게 점심을 산다며 전화로 볶음밥과 우동을 주문했다. 그녀는 미영이 먹다 남긴 우동까지 말끔하게 해치우고는 오후 두 시가 되자 애들 핑계를 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돌아간 뒤 미영은 식탁을 치우며 부엌 천장을 힐끗 올려다보았다. 들들거리는 소리와 함께 부엌 천장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지는 듯 했다. 그녀는 윗집 사람들에 대해 왠지 모를 불안과 호기심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젯밤 미영은 열한 시쯤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 경비실 불은 환하게 켜져 있었고, 경비 아저씨는 검은 흔들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녀는 쓰레기를 버리고 오면서 아파트 화단을 한번 둘러보았다. 초저녁에 소나기가 한차례 흩뿌리고 지난 뒤 풀냄새와 동물의 배설물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미영이 현관입구로 막 들어서는데 단발머리 아가씨가 잰 걸음으로 자신을 비켜 계단을 올라갔다. 그 바람에 음식물 쓰레기통 뚜껑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녀가 뚜껑을 주우려고 몸을 숙이는데 아파트 화단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바람결에 고양이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화단 구석진 곳에 작은 몸집의 여자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녀는 검은 봉지에 든 뭔가를 꺼내 고양이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한 손으로는 새끼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미영은 살그머니 화단 쪽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미영이 다가가는데도 고양이 먹이 주는 데만 정신이 팔려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둠 속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여자는 302호 여자가 틀림없었다. 말로만 듣던 '캣 맘' 이었다. 미영은 아파트 주변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는 주민을 발견하게 되면 관리사무소로 연락하라는 벽보판의 경고 문구를 떠올렸다. 미영은 그녀가 눈치 챌 세라 조심스레 발걸음을 돌렸다.

경선이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자, 이모는 잠옷 차림으로 나와 그녀를 맞았다. 자정이 막 넘었다. 그녀가 씻고 나오자 식탁 위에 차가운 미숫가루 한 잔이 놓여 있었다. 경선은 컵에 든 그것을 세 번에 걸쳐 나눠 마셨다. 이모는 졸린 듯 연방 하품을 해대며 거실에 널린 옷가지를 치웠다. 그녀가 도우려고 얼른 다가가자 이모는 졸음과 짜증이 반반 섞인 목소리로 "내가 할게." 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혹시 올라올 때 옆집 아줌마 만나지 않았니?" 라고 그녀에게 물었다. "아아, 그 아줌마가··" 하며 말끝을 흐리자 "혹, 지나다가 보면 꼭 인사해라. 이웃인데 인사 정도는 하고 지내야지." 라고 딱 잘라 말했다. "네에." 그녀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기, 혹시 윗집에 고양이 키우지 않나요?" 경선의 느닷없는 질문에 이모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잘 모르겠던데, 왜?" "아니요, 그냥 궁금해서···", 이모는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겨 안방으로 건너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경선은 또 다시 심하게 재채기를 했다. 터져 나오는 기침을 손으로 막으며 그녀는 베란다 창문을 꼭꼭 닫았다. 윗집에서 애완용으로 고양이를 키우는 게 분명할 거라고 그녀는 짐작했다.

미영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 사이 남편이 귀가했는지 욕실에서 물소리가 났다. 욕실 앞에는 남편이 벗어둔 옷가지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중학생 아들은 머리맡에 책을 펼쳐놓고 침대에서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안방으로 건너가 남편의 속옷을 챙겨 나왔다. 샤워를 마친 남편이 자신의 배낭에서 검은 봉지를 꺼내 미영에게 슬쩍 건네주었다. 봉지 안에는 토마토와 가지, 청 고추 몇 개가 들어 있었다.

접시에 토마토를 담아 식탁에 올리며 미영이 물었다.

"웬 거예요?"

"으응, 302호 아줌마가 싸 준 거야."

"네에?"

"우리 공사장 옆에 자기 밭이 있는 모양이야. 점심 먹고 지나쳐 오는데 그 집 아들이 날 알아보대."

"그래도, 무턱대고 이런 걸 얻어오면 어떡해요?"

미영이 다그치자 남편이 손사래를 쳤다.

"아니, 안 가져가겠다고 하는 걸 기어이 싸주던데, 뭘."

미영이 대꾸가 없자, 남편이 토마토를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듣고 보니 그 집 아들들 참 안 됐대."

"뭐가요?"

"형제만 둘이었는데, 어릴 때 심하게 싸운다고 아버지가 창고에 아들들을 가둔 모양이야. 아버지가 볼 일 보러 나간 틈에 창고에 연탄가스가 스며들어왔대. 네 살 위인 형은 창고를 빠져 나왔고, 작은 애는 아버지가 혼낼 게 두려워 그곳에 남았다가 변을 당한 모양이야. 살아나긴 했지만 머리가 좀 이상해졌나봐. 다 키운 큰 아들은 결혼한 지 일 년도 안 돼 교통사고로 죽고 고아인 며느리는 딸처럼 그냥 데리고 산다나봐. 아무튼 당신, 윗집 여자랑 좀 친하게 지내"

"알았어요. 그런데, 아까 쓰레기 버리고 올라오는데 302호 여자를 만났지 뭐예요?"

남편이 의아한 듯 고개를 들어 미영을 바라보았다.

"요새 고양이 먹이주지 말라고 계속 방송 나오잖아요. 그런데, 글쎄 윗집 젊은 여자가 화단고양이에게 몰래 먹이를 주고 있던데, 관리소에 얘길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냥 둬. 이웃 간에 그럼 되나? 아이가 없다보니 고양이 엄마 노릇을 자청한 모양이지."

미영이 아무 말 없이 토마토 접시를 치우자 남편은 하품을 연방 해대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정 많고 살가운 남편은 윗집 사람들한테서 곧잘 뭔가를 얻어다 나를 게 분명해 보였다. 미영은 봉지의 야채를 꺼내 냉장고에 정리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들이 방학에 접어들자 301호 여자는 미영의 집에 건너오지 않았다. 한번은 초등학생인 그녀의 딸과 계단에서 마주쳤는데, 엄마 안부를 물으니 휴가철이라 마트가 바빠 아빠랑 같이 출근했다고 알려주었다. 미영은 며칠 전 남편이 302호 여자를 두고 아이가 없으니 고양이 엄마라도 되기로 자청한 모양이지, 라고 한 말이 자꾸 귓가에 맴돌았다. 그녀는 오전에 간식거리를 사들고 윗집으로 올라갔으나, 초인종을 누를 용기는 생기지 않았다.

미영이 계단을 내려오는데 마침 경비 아저씨가 올라왔다. 302호에 볼일을 보러가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층계참에 잠깐 멈춰 섰다. 경비 아저씨가 초인종을 몇 번 눌러도 302호에선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경비 아저씨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에 우편물을 들고 내려왔다. 그녀는 "저기, 요새 길고양이들이 좀 줄었나요?" 하고 물었다. 계단을 내려가던 경비 아저씨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줄긴요. 새벽에 고양이들이 하도 울어대서 관리사무소에서 약을 놓기로 했다지요, 아마." "예, 약을 놓다니요?" "곧 방송이 있을 겁니다. 아파트 화단, 지하 주차장, 계단 같은데 쥐약을 놓겠지요, 뭐." "아, 네에···" 미영이 그를 향해 고개를 까닥하자 경비는 황급히 계단을 내려갔다. 미영은 왠지 이 사실을 먼저 302호 여자에게 알려야 할 것 같았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오전에 환경 오염원이자 소음공해의 주범인 길고양이들을 없애기 위해 관리소에서 약을 놓기로 했다는 방송이 한 차례 있었다. 방송 직후 아파트 주변의 도둑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는 주민도 눈에 띄게 줄었다고 했다. 새벽녘 밤잠을 설치게 하던 고양이 울음소리도 언제부턴가 들려오지 않게 되었다.

경선이 학원 강사모임을 끝내고 새벽 두시쯤 집에 돌아오던 길이었다. 아파트 현관 입구에 막 들어서는데 누군가 머리를 감싸 쥔 채 계단을 내려와 그녀 곁을 스쳐 지나갔다. 흐릿한 눈으로 바라보니 그 뒷모습이 어딘지 윗집 할머니와 닮아있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늙은 여자는 한쪽 발에만 신은 슬리퍼를 질질 끌며 공중전화박스로 달려가서는 곧장 전화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경선이 계단을 올려다보니 시멘트 바닥에 붉은 핏자국이 점점이 흩어져 있었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돌려 공중전화박스를 쳐다보았다. 수화기를 들고 있는 여자는 302호에 사는 늙은 여자가 틀림없었다. 경선은 정신이 번쩍 들어 화단입구로 재빨리 다가갔다. 늙은 여자는 여전히 머리를 감싸 쥔 채 유리문에 기대 서 있었다. 한 손이 온통 피범벅이었다. 그녀를 보자 여자는 공중전화 박스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경선이 괜찮냐고 물으며 여자의 안색을 조심스레 살폈다. 그녀는 두려운 듯 몸을 떨며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그러더니 방금 경찰에 신고했으니 아무 일 없을 거라고, 자신은 괜찮다고 하며 말을 더듬거렸다. 경선이 그녀를 일으켜 세워 화단 옆 나무벤치에 앉혔다. 벤치에 앉은 여자는 몸을 부르르 떨며, 넋이 나가 "우리 아들이, 우리 아들이······"를 연방 되뇌었다. 경선이 핸드백에서 물티슈를 꺼내 여자의 머리에서 비어져 나오는 피를 닦아주었다. 여자의 낡은 슬리퍼 한 짝이 금방이라도 벗겨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경선은 문득 이모에게 전화를 걸어볼까 망설이다가 불 꺼진 2층 창가를 바라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때 아파트 현관에 검은 그림자 하나가 길게 드리워졌다. 모자를 깊숙이 눌러 쓴 한 청년이 계단을 내려오더니 주위를 한참 두리번거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몸을 돌려 아파트 후문 쪽으로 달려갔다. 모자 쓴 청년은 도로에 서 있던 택시를 집어타고 순식간에 아파트를 빠져나갔다. 잠시 후 아파트 입구에서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아파트 창가에 하나 둘 불이 켜졌다. 경선이 경찰차에 다가가자 늙은 여자도 몸을 추슬러 간신히 일어났다. 경찰은 늙은 여자를 차 뒷좌석에 태우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경선에게 빨리 집에 들어가라고 말했다. 경선이 현관 입구에 이르자 경찰 한 명이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그리고는 대기 중인 경찰에게 "살인 사건이 맞습니다." 라고 보고했다. 그러자 다른 경찰이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곧바로 119구급대가 도착했다. 3층에서 두 사람이 들것에 실려 내려왔다. 302호 늙은이는 이미 죽은 듯 보였고, 젊은 여자는 아직 숨이 붙어있는지 차에 오르자마자 산소 호흡기를 꽂았다. 늙은 여자는 서럽게 울며 다시 구급차에 올랐다. 젊은 아들은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경찰차 주위로 새벽잠을 설친 주민들이 우루루 몰려들었다.

미영은 잠결에 유리창이 와장창 깨지는 소리와 함께 날선 여자 비명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경비실에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미영은 불길한 예감에 허겁지겁 1층 계단으로 내려갔다. 경선이 막 계단을 올라가는 중이었다. 경선이 고개를 약간 숙여 인사하자 미영도 그녀를 보고 말없이 웃어주었다. 301호 여자는 미영을 보자마자 "대체, 뭔일이래?" 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경찰차와 구급대가 사라지고 나서도 주민들은 집에 돌아갈 생각도 하지 않고 모여서 웅성거렸다. 누군가 "그 집 아들이 아버지를 칼로 찔렀다는구먼."이라고 외치자 주위가 일순간 조용해졌다. 비가 오려는지 습기를 머금은 후텁지근한 바람이 세차게 불어 닥쳤다. 굵은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주민들 서넛이 비를 피해 집으로 되돌아갔다. 잠시 후 쏴아- 장대 같은 소낙비가 퍼부어대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소나기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1층엔 미영과 미영의 남편, 301호 여자와 경선만이 남았다. 경선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계단을 올라갔다. 그때, 다급해진 미영이 경선의 손목을 붙잡으며 물었다.

"저기, 아까 오다가 혹시 302호 할머니 보지 않았어?"

"네, 봤죠. 머리를 좀 다쳤는데, 공중전화로 경찰에 신고까지 했어요."

"그래애?"

301호 여자가 경선에게 몸을 바짝 기울였다.

"그런데, 아까 젊은 남자 하나가 도로에서 택시를 집어탔어요."

"아마, 그 집 아들인 게 분명해." 301호 여자가 말했다.

"그럴 사람으로 보이진 않던데······" 미영의 남편이 슬쩍 끼어들었다.

그러자 301호 여자가 말했다.

"아까 얘기 못 들었어요? 그 집, 모자란 아들이 자기 아버지를 칼로 찔렀다잖아요."

미영은 한밤중 벤치에서 그 집 젊은 남자와 여자가 껴안고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장대비는 더욱 세차게 쏟아졌다. 워낙 빗발이 세고 바람까지 일어 아파트 현관 앞까지 굵은 빗발이 들이치고 있었다. 301호 여자가 팔뚝에 번진 빗물을 털며 큰 소리로 말했다.

"그나저나 이 아파트 어디 무서워서 살겠어? 집 값 떨어지기 전에 이사를 나가든가 해야지, 원."

미영의 남편이 주위를 돌아보며 말했다.

"시간도 늦고, 비도 많이 오니까 일단 집에 들어갑시다."

미영의 남편이 안색이 좋지 않은 아내의 손을 잡고 먼저 계단을 올라갔다. 301호 여자는 뭔가 더 물을게 남았는지 경선을 힐끔거렸다. 경선의 힘없는 어깨에서 자주색 핸드백이 자꾸만 미끄러져 내려왔다. 2층 계단을 올라가는 그녀의 발걸음이 몹시 후들거렸다.

이튿날, 오전 열시 경 경찰차 한대가 장미아파트에 도착했다. 302호에는 노란 접근금지 줄이 둘러 쳐지고 계단으로는 경찰들이 바쁘게 오고갔다. 바닥에는 낡은 여자 슬리퍼 한 짝과 핏자국이 검붉게 말라가고 있었다. 302호 젊은 남자는 그날 새벽, 택시기사의 신고로 경찰에 붙잡혔다고 했다. 경선은 몸이 좋지 않아 학원에 병가를 내고 진종일 방에 누워있었다. 고모가 흰 쌀죽을 끓여 그녀의 방에 가져다주었다. 미영도 아침에 남편을 배웅하지 못하고 오전 내내 속앓이를 하며 누워있었다. 301호 여자는 열 시쯤, 부스스한 얼굴에 화장을 하고 남편 차를 타고 마트로 향했다.

2주일 쯤 지나자, 그날 밤 벌어진 살인사건의 내막이 장미아파트에 떠돌았다. 자신의 하나뿐인 형수를 강간하려던 친아버지를 보고 젊은 아들이 부엌칼을 휘둘렀던 건 사실로 밝혀졌다. 싸움을 말리려던 늙은 엄마는 머리에 상처를 입고 간신히 집을 빠져나왔다. 아들의 칼부림에 결국 아버지는 중상을 입고 깨어나지 못했으며, 아들이 도망친 직후 그 집 며느리는 소주에 농약을 타서 마시는 바람에 식도가 다 녹아내려 말을 잃어버렸다고 했다. 며느리는 중환자실에 입원했고 아들은 정신박약으로 판명되어 사형은 면했으나 구치소로 이송되었다. 그 밤 필사적으로 집을 빠져나와 아들을 신고했던 엄마는 병원과 구치소를 부지런히 오가며 지낸다고 했다. 그녀가 시장골목에 좌판을 벌리고 앉아 김치를 팔고 있는 걸 보았다는 주민도 있었다. 미영은 그 일이 있은 뒤로 한밤중에 윗집에서 무슨 소리가 나면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났다. 한번은 잠결에 윗집에서 뭔가 계속 들들 갈리는 소리가 들려와 가위에 눌린 적도 있었다. 미영은 한밤중에 일어나 부엌 천장을 자꾸 올려다보는 습관이 생겼다. 윗집 여자는 주민들의 눈을 피해 밤중에 집에 들러 김치를 담고, 살림을 돌보는 모양이었다. 302호는 길 건너 아파트에 전세를 얻어 얘들 개학에 맞춰 이사를 나갈 거라고 했다.

한번은 미영이 시장을 지나쳐 오다 시장골목에서 301호 여자를 마주치게 되었다. 한 달 새 그녀는 추레한 몰골에 주름이 늘어나고 허리가 많이 굽어있었다. 그녀는 시장 어귀에 좌판을 늘여놓고 김치를 팔고 있었다. 하얀 플라스틱 김치 통에 물김치, 부추김치, 깍두기, 배추겉절이 따위를 비닐봉지에 묶어 팔고 있었다. 작은 김치 통에는 붉은 김치 양념이 절반가량 담겨 있었고 그 옆에는 묶다 만 깻잎이며, 부추가 쌓여 있었다. 미영이 가까이 다가가자 그녀는 얼른 검은 봉지 하나를 집어 들며 미영을 향해 웃어보였다.

"저어, 며느님은 잘 있죠?"

미영의 갑작스런 질문에 그녀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201호 재현엄마예요. 저 아시겠죠?"

그녀는 미영의 시선을 피해 봉지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며느린 잘 있지. 그란디 갸가 통 말이 없어, 말을 하덜 않으니 답답할 노릇이제."

미영은 그 집 며느리가 농약을 마신 뒤 식도가 상해 말을 잃게 됐다는 소문을 언뜻 떠올렸다. 그녀는 바닥에 놓인 야채를 한쪽으로 치우며 더 이상 미영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팔월 하순이 되자 장미아파트에는 더 이상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아침저녁으로 초가을의 바람이 서늘하게 느껴졌다. 경선은 그날도 늦게까지 공부방에 남아 아이들이 풀고 간 문제집을 채점했다. 비가 흩뿌리려는지 도로가에 심어진 벚나무의 무성한 잎들이 바람에 쓸려 떨어졌다. 나뭇잎들 사이로 버찌들이 으깨어져 도로를 검붉게 수놓았다. 경선은 살인이 있던 그 밤, 계단과 바닥에 점점이 떨어져 있던 붉은 핏자국을 떠올렸다. 그 기억은 여름밤 지독한 열대야 속에 가위눌린 누군가의 꿈만 같았다.

밤 열시가 다 되어 경선은 아파트에 도착했다. 밤인데도 매미가 울고 있었다. 화단 벚나무의 무성한 잎들이 바람에 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경비실에 들러 택배 물을 찾아가지고 나왔다. 성분이 순한 수입산 알레르기 약이었다. 경선이 화단 옆을 지나가자 갑자기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말간 콧물이 흐르며 발작적으로 기침이 터져 나왔다.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홱 돌렸다. 검은 도둑고양이 한 마리가 노란 눈동자를 번뜩이며 지나갔다. 갑자기 새끼를 잃은 어미고양이의 울음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고양이 울음소리 너머로 한동안 장미 아파트 주민을 잠 못 들게 했던 하얀 열대의 밤이 서서히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