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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내가 본 것은

  • 작성일 2010-04-10
  • 조회수 318

 그때 나는 아마 오정희의 어느 한 귀퉁이에 밑줄을 긋고 있었을 거다. 그게 언제였더라. 봄이었던 것 같다. 몇 차례의 봄비가 내리고, ‘느닷없는’ 꽃샘추위와 폭설 같은 습관적이지만 예기치 않은 여러 혼란들이 공존하는 계절. 그런 시기들이 지나간 어느 봄날이었다. 햇살은 따사롭고, 구름은 유유히 흐르는 지극히 상투적인 오후가 이어지고 있었다. 이제야 떠올려보면 지겨우리만치 익숙하고, 역할만큼 평화로운 그 날이 왠지 낯설었던 것도 같다. 나는 이유 없는 초조함에 흐르는 구름을 보며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고, 살랑이는 봄바람에도 불안함에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손에 들고 있는 책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아 손가락으로 글자를 한 자 한 자 짚어가며 '읽어내고' 있었다. 한껏 기분이 좋으면서도 뭔가가 찜찜한 오후.

 

 한 순간이었다. 활자가 모두 날아가 버린 건. 밑줄을 긋던 색연필을 바닥에 떨어뜨린 때였을까, 아니면 시끄럽게 떠들어대며 지나가는 한 무리의 학생들 때문에 눈살을 찌푸리며 잠시 고개를 들었던 순간이었을까. 흐트러진 정신을 가다듬으며 다시 책을 들여다봤을 때, 활자들이 사라져있었다. 화들짝 놀란 나는 눈을 비벼댔다. 눈자위가 시뻘게질 만큼. 다시 책을 들여다봤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희끄무레하게 남은 활자들의 흔적을 멍하게 바라봤던 것도 같다. 하늘에 걸쳐진 까만 낱낱의 자모음들이, 연기처럼 흩어져갔다. 오정희는 알았을까. 자신의 문장이 그렇게, 공기 중으로 날아갈 거란 걸. 오정희는 아마 누군가의 호흡을 통해 몸속 어딘가로 흘러 다니겠지. 활자를 잡고 싶어졌다. 이대로 날려 보내면 두 번 다시 못 찾을 거란 불안이 나를 감쌌다. 줄지어 날아가는 활자를 잡아보려 손을 휘저어 봤지만, 얄밉게도 내 손길을 피해가며 활자들은 노련하게 사라졌다. 줄지어 걷던 사람들이 어느 대목에 이르러 차례차례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져 버리듯, 낱낱의 활자들은 어느 시점에선가 흐트러지기 시작해서 돌연 사라졌다.

 후, 잠시 기인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질끈, 이라는 표현에 걸맞지 않는 질끈 눈감기. 지긋이 눈꺼풀을 내리 누르고 속으로 가만가만 열을 세었다. 하나, 두울, 셋, 넷.… 눈 감은 세계는 검었고, 어둠 속에는 간간히 흰 반점이나 붉은 빛, 혹은 노란 빛의 선들이 둥둥 떠다녔다. 열을 센 후 눈을 떴을 때 눈앞의 풍경은 조금 변한 듯도 했고, 살짝 눈이 부셨던 것도 같다.

 변한 것은 없었다. 다만, 활자가 사라진 책이 내 손에 들려있었을 뿐이었다. 활자가 날아가 버린 책,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채 섞여 있는 무질서. 꿈이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읽은 책에 있던 활자들이 사라질 리가 없을 테니.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내가 들고 있던 책이 백지가 되는 일이 일어나는 건 어느 정도의 확률일까. 1등 당첨된 로또 복권을 들고 은행에 가다가 차에 치여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릴 정도? 허튼 상상은 집어치워야겠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고, 내 눈 앞의 활자는 이미 모두 사라졌으니까. 상상해 본 적 없는 경험이다. 아마 내가 아니라 누구라도 상상해 보진 않았을 거다. 그런 상상을 하기에는 삶이 너무 바쁘게 흘러가니까.

 나는 그때까지 잠시 잊은 채로 있었다. 내가 그 문을 넘어섰다는 걸. '그 문'이라니까 판타지 영화 속에서나 볼 법한 거창한 문을 말하는 것 같아 우습지만 다를 건 없다. 나는 문자 그대로 문을 넘어섰을 뿐이니까. 슬픔은 한꺼번에 찾아온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정말 거짓말처럼 많은 것들이 사라졌을 때였다. 한 번도 앓아누운 적 없던 어머니가 차에 치여 돌아가시고, 때맞춰 이 년 정도 '남 부럽지 않게' 만나오던 연인과 헤어졌을 때였고, 더불어 나 자신도 지쳐서 잃게 될 것만 같던 시간이었다. 누구나 살다보면 한 번 쯤은 그런 순간을 마주하기 마련이다. '잃는다'란 말을 사람들이 어떤 의미로 쓰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내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면 나는 '모든 것'을 잃을 뻔 했다. 우울한 마음이나 떨쳐보려 들어간 어느 바에서 매서운 술 한 잔을 마셨고, 누군가가 내게 말을 걸어왔고, 나 자신도 믿을 수 없을 만큼 기분 좋게 웃었고, 나는 잠시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내가 왜 울고 있었는지 잊었던 것 같다. 그녀는 자리를 옮기자며 내게 권했고, 이미 내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술을 마신 나는 테이블에 비스듬히 기대서 그러마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알큰하게 취해서 눈을 뜨지 못해서인지 기분이 좋아서인지 모르게 웃고 있는 눈과 함께.

 그때까지 나는 알지 못했다. 이 여자가 나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게 될지, 이 여자가 나를 어떤 세계로 이끌 것인가 따위에 대해서 말이다. 사실 자신이 만나는 사람, 또는 자신이 하는 대답이 자신의 미래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될지 아는 사람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 하듯 우리는 과거에 대한 망각과 불확실한 미래 덕분에 살아간다. 우리는 앞날을 책임지지 못할 수많은 선택을 하며 살아가고, 늘 옳은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으며, 때론 후회하게 될 거란 게 뻔히 보이는 선택을 하면서 살아간다. 훗날 아무리 후회를 하더라도, 우리는 그때로 돌아간다면 또다시 같은 선택을 하게 될 거란 것도 알고 있다. 사람밖에 없다고 했다. 그 선택 때문에 자기 자신이 무너져 내릴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결정을 하고야 마는 건. 마찬가지로 자위나 자살을 할 수 있는 것도 인간뿐이라던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 내린다는 건 참 매력적이다. 신은 알았을까. 인간에게 허락한 이성 덕분에 수많은 사람들이 제 손으로 제 목숨을 끊기도 하고, 자신의 운명을 망쳐버리기도 할 거란 걸. 신 역시도 자신의 선택이 야기할 결과에 대해 소홀히 생각했던 것 아닐까. 지금의 세상을 보면 틀린 생각은 아닌 것 같다. 당장 내가 살고 있는 이 나라만 해도 자살공화국이란 말을 듣고 있으니 말이다.

 자신의 눈을 찔러버린 화가가 있다. 앞을 보지 못하는 화가. 자신의 귀를 자른 화가는 있었어도 자신의 눈을 찔러버린 화가는 아마 전 세계를 통틀어도 단 한사람, 최 북 뿐일 거다. 그것이 자신을 파멸로 이끌리란 걸 알면서도 이내 찔러버리고야 마는 그 고집. 결국 눈길에 쓰러져 얼어 죽었다던가, 꽤나 비참한 죽음을 맞은 사람이다. 나는 걷지 못하는 등산가이고, 손가락을 잃은 피아니스트다. 내겐 아무 것도 없다. 눈을 뜨고 감으며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책을 읽는 것 뿐 이었는데, 활자가 사라져버렸다. 활자가 사라진 세계. 오정희의 책을 잠시 덮고 주위를 둘러봤을 때 모든 것은 변함없이, 여느 때의 오후처럼 흐르고 있었다. 내가 앉은 공원 벤치에서 멀지 않은 도로를 달리는 차들도, 살찐 비둘기들의 비릿한 걸음도, 날 좋은 주말 오후 산택을 나온 가족, 혹은 연인들의 모습도.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풍경이 되어 있었다. 한가로운 일요일 오후는 나를 비껴선 채 비릿한 냄새를 풍기며 조금씩 발을 내딛고 있었다. 어째서일까. 나에게 이런 좀처럼 믿기 힘든 일이 생긴 건.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내 다리를 베고 속없이 콧노래를 흥얼대고 있는 이 여자 아이 때문이다.

 디귿의 이마에 조심스레 손을 얹었다.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쓸어내린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머리카락이 경쾌하다. 활자의 행방이야 어쨌든 햇살은 포근하고, 바람은 따사롭다. 기분 좋은 주말이다. 디귿을 향해 고개를 숙이자 그녀의 얼굴에 내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치렁치렁한 머릿칼도 함께. 머리가 너무 긴가, 내 그림자지만 이건 좀 아니다 싶다. 잠시 머리 모양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한다. 아무런 변화 없이 지낸 게 1년, 그녀를 만난 것도 벌써 1년째다.

 활자가 사라졌어. 갑자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숱이 적은 머릿칼을 한 쪽으로 모아서 누워있던 디귿은 아무 대꾸 없이 그저 씨익 웃는다.

 활자가 사라졌다니까.

 디귿은 눈이 매력적으로 웃으며 나를 올려다봤다. 이게 이유다. 내가 그녀를 따라 나서고, 그녀와 익숙지 않은 키스를 나눴던 건 순전히 이 눈웃음 때문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엄마가 일찍 죽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덩달아 엄마가 탐탁찮아 하던 그 녀석의 얼굴도 떠오른다. 헤어졌어, 엄마.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직이 읊조려 본다. 엄마가 디귿을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좋아했으면, 하는 부질없는 바람을 후우, 내뱉어본다. 아, 엄마가 보고 싶다.

 공기 중으로 숨이 가볍게 흩어진다. 나는 뱉어낸 숨만큼 가벼워진 마음으로 디귿의 눈을 바라봤다. 어둑한 바의 조명 아래 빛나던 아이. 곁에 있기 거북스러울 정도의 밝음이 아니라, 곁에 머물며 옮겨오고 싶은 밝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다시 돌아간대도 나는 똑같은 선택을 하리라 자신할 만큼 매력적인 웃음이었다. 곁에 다가와서, 같이 한잔 하실래요? 하던 그때의 그 웃음을 나는 아마 평생 기억하겠지. 디귿을 바라볼 동안도, 디귿을 잃은 후의 순간들도. 누군가와 헤어진 후에 그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계기가 항상 있게 마련이다. 그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나는 아마 평생 수많은 사람을 만나겠지만 디귿만큼 사랑스런 눈웃음을 가진 사람은 만나볼 수 없을 거다. 그리고 그 눈이 그리울 때마다, 혹은 매력적인 눈웃음 짓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디귿을 떠올리겠지. 한 가지 확실 한 건, 앞으로 다신 내게 이런 웃음 지어줄 사람은 없을 거란 거다. 잠시 멍하게 내려다보고 있던 내게 디귿이 말했다.

 내가 말했잖아, 점점 사라져 갈 거라고. 시간이 흐른다는 건 그런 의미니까, 무언가를 잃고, 또 무언가는 찾아오고, 그런 반복일거라고. 나와 함께 있는 한 그런 반복이 좀 더 빨라지기도, 느슨해지기도 할 거라고 말이야.

 그녀의 목 언저리에 입을 맞추고 있던 내게 속삭인 말이다. 나와 함께하면 재밌는 일이 벌어질 거야, 하며 그녀는 나의 목을 감싸듯 끌어안았다. 그때 디귿의 웃음에는 피곤함이 묻어났었다. 재밌는 일이라는 건 무얼 말하는 것이었을까, 그저 흘려들은 말이었지만, 설마 이런 걸 의미할 거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 있는 그 무수한 사람들 중에 과연 몇 명이나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그런 순간에.

 너도 이런 적이 있단 말이야?

 응. 난 활자가 아니라, 하얀 색이 다 사라졌었어.

 하얀색?

 응. 종이의 색이 사라지기도 했고, 횡단보도가 사라지기도 했었어. 좀 위험했지. 달려오는 하얀 차를 못 보고 길을 건넜을 땐. 경적 소리가 아니었으면 난 지금 여기 없을 걸? 과학 기술에 처음으로 고맙다고 생각했어. 경적 같은 걸 만들어냈잖아. 말하자면, 난 과학 기술 같은 거 혐오하는 쪽이거든. 뭐 그 얘기야 접어두고, 모르긴 몰라도 아마 그 하얀 차의 경적은 그때가 가장 의미 있게 쓰인 순간이었을 거야.

 그럼 지금은 괜찮아?

 음, 어떤 의미의 괜찮음일지는 모르겠지만, 뭐 이런 것도 ‘괜찮다’의 범주 안에 드는 거라면 난 괜찮아. 나는 이를테면 어떤 가정을 하고 있어. 내 눈앞에 하얀 물체가 있을 거라고. 매사에 조심하는 거지. 장님이 눈앞에 어떤 장애물이 있을까봐 더듬더듬 짚으며 걷는 것처럼, 나도 그래. 그냥, 그래. 이젠 익숙해져서 예전처럼 위험에 빠지지도, 우울해지지도 않거든. 너는 활자라서 좀 불편하긴 하겠지만, 내가 있으니까 괜찮잖아. 내가 읽어주면 되니까. 나는 이런 상실이 말하자면 일종의 장치라고 생각해. 서로 좀 더 끈끈해지길 바라는 사람들이 서로에게서 멀어지지 않기 위해서 벌이는 자기 암시랄까? 아, 해프닝이라고 해도 좋겠다. 네가 나를 버리고 가지 못하도록, 나 자신을 너 없이 살지 못하는 인간으로 만들어버리는 거지. 이해하겠어? 날 버리고 가는 너는 세상에서 가장 나쁜 사람이야 라고 은연중에 인식시키는 거야. 너를 내 인생에 개입시키고는 아무데도 못 가게 잡아두는 거지. 언제부터인진 모르겠지만,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은 무언가를 하나씩 잃었어. 나를 만나게 되는 순간도 항상, 무언가를 잃은 채 상실감에 빠져 있을 때고. 너도 마찬가지였지 않아?

 그럼 이게 다 너 때문이란 거야?

 생각하기 따라 다르겠지. 상실 때문에 날 만난 걸 수도 있고, 나 때문에 다 잃은 걸 수도 있고. 왜? 자기, 싫단 거야?

 디귿이 당돌하게, 하지만 사랑스런 표정으로 나를 빤히 바라본다. 예쁘다, 질투가 날 만큼.

 아니. 네 말대로 어느 게 우선인지는 모르겠지만, 활자가 사라지는 건 좀 심하다 싶어서. 얼떨떨하네.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 할 말을 잃은 나는 말 그대로 떨떠름하게 그녀에게 대답했다. 사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들리지도 않는다. 단지 디귿의 반짝이는 눈빛이, 싱그러운 뺨이 예뻐서 만져주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 있다. 이런 사랑스러움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바람에 흐드러진 디귿의 머리를 가볍게 털어줬다. 디귿을 보는 지금 내 표정은 좀 우스울 것 같다. 날 마주보던 디귿이 다시 한 번 싱긋 웃는다. 눈부시다. 그리고 조금, 부럽다.

 걱정하지 마. 곧 괜찮아 질 거야. 사람은 다 그렇잖아. 자기도 조금만 지나면 익숙해지겠지. 나도 처음엔 당황했었는데, 에프가 말해줬어. 곧 익숙해질 거라고. 난 그때 에프의 표정을 못 잊을 거야. 아마 평생. 난 살면서 그런 웃음 짓는 사람을 본 적 없거든.

 그녀의 말을 듣던 나는 잠시 에프를 머릿속에 그려봤다. 에프. 엘프. 왠지 판타지 영화에서 보던 엘프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하고, 괜히 밉기도 하다. 1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디귿의 입에서 에프란 이름을 들어야 한다니. 왜 에프는 아직까지도 디귿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걸까. 나는 1년 후에 디귿의 기억 속에서 살아있을까. 그보다, 지금 이 순간 나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들의 기억 속에서 나는 어떤 모습,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샐쭉해진 내 표정을 잠시 바라보던 디귿은 옹송그리고 앉아 다시 말을 이었다.

 늘 곁에서 말해줬어. 지금 바로 앞에 하얀 무언가가 있으니 조심하라고, 네 손에서 오른쪽으로 한 뼘 쯤 떨어진 데 하얀 종이가 있으니 그걸 집어라, 이런 식으로 말야. 언제나 조금 더듬어보면 그 자리엔 에프가 말하던 게 있었고, 나는 그냥 그렇게 적응해서 살았어. 언제나 그녀의 말에 따르고, 그녀의 말을 신뢰하면서. 장님 아닌 장님 생활이지만, 그 나름대로는 재밌던걸?

 넌 나한테는 그런 거 부탁한 적 없잖아.

 음, 너도 곧 알게 될 거야. 익숙해진다는 게 어떤 건지. 그건, 뭐랄까, 도움이 필요 없어지는 거야. 불편하던 걸 불편함 없이 혼자서도 할 수 있게 된다는 거. 그리고 이런 말 하면 네가 싫어할지도 모르겠지만, 에프가 해 주던 일은 에프의 것으로 끝내고 싶어. 그걸 자기한테까지 시키고 싶은 마음은 없어.

 그럼 난, 네가 없는 순간에는 아무 것도 읽지 못하는 채로 살란 거야?

 우선 자기가 불편해할 동안 내가 사라지는 일은 없을 거구, 그 전에 자기가 무엇도 읽지 못하게 될 일도 없을 거야. 자기 내가 흰 색을 못 본단 걸 눈치 챈 적 있어? 음, 뭐라 설명하기 힘든데, 자기는 자기가 보는 모든 것을 옳다고 말할 수 있어? 당장 지금만 해도 자기 눈에는 활자들이 보이지 않는다며. 이전에 존재하던 그 활자들을 어떤 식으로 증명할 거야? 자기가 보는 그 방식을 설명할 수는 없잖아. 마찬가지야. 나도 자세히 설명해줄 순 없지만, 곧 알게 될 거야. 시간을 좀 더 먹고, 습관이 자기한테서 자리를 좀 더 차지하게 되면. 영 불편하면 점자도 있으니까 자긴 나보다는 나은 거네. 대신할 게 있는 거니까. 난 그나마도 없었어.

 디귿, 넌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나 있는 거야?

 응, 똑똑히 잘 알고 있어. 그렇다고 자기한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나도 모르겠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거야. 그냥. 시간이 자연스럽게, 지금 이 순간에도 과거가 되어가고 있는 것처럼. 자기가 처음으로 활자를 잃은 순간이 벌써 과거가 된 것처럼. 나랑 이야기하는 동안 자기도 자연스러워 졌을 걸. 아무 것도 담지 못한 그 책처럼. 그냥 그런 거야. 익숙해진다는 건 과거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는 거랄까. 나랑 만난 것만 해도 그렇잖아. 서로 한 순간도 마주친 적 없던 우리가 이렇게 마주친 것도, 자기도 어떤 식으로 내가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해줄 순 없잖아.

 바람이 살랑, 하고 속삭였다. 따뜻했다. 디귿의 말이 바람처럼 나를 휘감고 지나갔다. 내가 투명인간이라도 된 듯, 그냥 그랬다. 당신은 나를 감싸고 지나가는 바람.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었다, 아니, 디귿 뿐 아니라 엄마도, '날 버린 그 나쁜 놈'도, 디귿을 떠나갔을 에프도. 모두들 흐르는 존재이다. 서로를 스치고 지나는 바람처럼, 머물지 않고 계속해서 지나가는 것. 왜 우리는 스칠 거란 걸 알면서도 사랑을 하는 걸까. 변할 것을 알면서도, 떠날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사랑을 한다. 결말이 뻔히 보이지만, 순간에 최선을 다하려 한다. 내가 당신과 함께 할 수 있는 순간은 지금 뿐 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우리는, 언젠가는 찾아오고야 말 이별을 바라보면서도 불안에 떨며 사랑을 하나보다. 그런 걸 보면 사람이 참 어리석다는 생각이 든다. 어리석기 때문에 사람이겠지.

 모든 사랑의 마지막 페이지는 한결같은 결말을 담고 있다. 이별. 그것이 치정에 얽힌 이별이든, 죽음에 의한 것이든, 모든 사랑은 언젠가 끝이 난다. 디귿과 나. 우리의 결말은 어떨지 상상해본다. 상상이 안 되는 건 아니다. 어차피 모든 결말은 뻔하고, 상투적이고, 때론 치졸하니까. 다만, 이천십년 삼월 이십일일, 이 순간은 다신 돌아오지 않을 테니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자고 다짐하며 입을 앙 다물었다.

 나직나직한 디귿의 콧노래가 들린다.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발을 까딱까딱 움직이고 있다. 왜 기분 좋은 걸까 궁금해진다. 활자 따위야 아무래도 좋다. 디귿의 말이 사실이라면, 아니 디귿이 그렇다고 말하니까. 정 안되면 디귿의 말대로 점자를 공부하면 되겠지. 나는 알고 있다. 어디에선가부터 묘하게 뒤틀려 있다. 나를 보는 타인의 시선에서 반걸음 쯤 비켜 서 있는 세계에 살고 있다. 디귿의 흥얼거림을 듣고 있으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궁금하다. 너는 어디에서 온 건지, 내가 왜 이런 경험을 하고 있는 건지, 활자가 날아가는 여기가 어디인건지.

 나는 디귿의 이마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살갗에 가볍게 닿는 입술의 감촉이 좋다. 이윽고 디귿의 입술이 벌어진다. 활자가 사라진 일요일 오후, 나는 그녀와 키스를 했다. 디귿의 가지런한 치아가 내 혀를 간질인다. 혀로 핥아 본다. 악어새를 떠올렸다. 악어새는 악어를 사랑했을까? 디귿의 장난스런 웃음소리가 입안에 가득 찬다. 아득하다. 벤치 아래로 떨어진 책은 불어오는 바람에 쓸려 정신없이 책장을 넘기고 있다. 넘어가는 책장은 온통 새하얗다. 모든 게 평화롭다.

 노트를 펼쳤다. 얼룩 하나 없는 표지만큼 속지도 하얗다. 무언가를 적기가 미안해진다. 노트의 첫 장을 넘기며 손으로 꾹꾹 눌러 접었다. 연필을 꺼내들고 글씨를 써 본다. 이천십년, …, 맑음. 내가 쓰는 글씨들이 종이에 머무르지 못하고 둥실둥실 날아간다. 숨죽인 새벽에만 느낄 수 있는 고요함이다. 모든 것이 가라앉을 것 같은 어둠 속에서 스탠드만이 차분히 빛나고 있다. 떠다니는 활자들이 불빛을 받아 하얗게 빛난다. 반사되는 빛이 눈부시다. 즐겁다. 디귿이 울던 날부터 나는 이 놀이를 즐기게 되었다.

 처음으로 본 그녀의 눈물이었다. 자신의 소용이 다했다는 걸 직감한 사람이 흘리는 눈물은 거추장스럽고, 부담스러웠다.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 한 순간에 돌아설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익숙해진다는 건 무서운 일이다. 경이롭기까지 하던 많은 것들이 진부하게 낡아가고 있었다. 그토록 싱그럽던 디귿의 웃음이 현실을 바라보지 못하는 철없는 아이처럼 느껴졌다. 자꾸만 짜증이 늘었다. 그녀가 나를 위해 글을 받아 적어 주고, 점자책을 가져다 줄 때마다 불안해졌다. 이렇게 기대서 살다가 네가 떠나가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이런 배려는 나를 위하는 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자립할 수 있게 해 주는 게 정말 도와주는 거 아닌가, 나는 지금 사육되고 있는 것이다. 야생의 습성을 잃어버린 애완동물처럼 나도 그렇게 길들여지다가 혼자서 아무 것도 못 할 쯤엔 버려지는 것 아닐까. 자꾸만 의심하고, 닦달했다. 디귿은 그 때마다 조금 서글프게 웃었던 것 같다. 아니다. 그 즈음의 디귿의 얼굴은 기억나지도 않는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본 적이 있었던가. 디귿의 눈이, 코가, 입술이, 활자처럼 날아가 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디귿은 늘 웃는다. 자긴 다 겪어봤으니 이해한단 걸까, 동정이란 생각에 자꾸만 날카로워진다. 모가 난다. 역겨움을 디귿의 탓으로 돌린다. 히스테릭이란 글자를 지우고 디귿이라 적어 넣는다. 모든 것은 날아간다. 다시 원점이다. 노트엔 아무 것도 적혀있지 않다. 그것이 나를 미치게 만든다. 어디에도 내 생각을 담아둘 수 없다. 활자가 날아간 그날부터 나는 아무것도 쓸 수도, 읽을 수도 없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자 차츰 익숙해졌다. 흰색을 보지 못하는 디귿과 활자를 읽을 수 없는 나. 결국 우리는 아무 것도 읽을 수가 없었고, 출판사에서 교정교열을 담당하고 있던 나의 일거리도 자연스레 끊겼다. 여행을 가려 모으던 적금 통장에 찍힌 숫자를 야금야금 갉아먹으며 곧 나아지겠거니 하며 하루하루 보내고 있었다.

 디귿은 항상 내 곁에 있어줬다. 정말, 자신이 했던 말을 배반하지 않겠다는 듯 내 곁에만 붙어 있었다. 과유불급, 네 글자가 머릿속에 떠다녔다.

 넌 정말.

 응?

 어떤 날이면 볼멘 내 목소리가 디귿에게 전달 될 때도 있었다.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 순진한 눈빛이 가증스럽다. 네가 날 이렇게 만든 거지. 내 눈빛에 가득담긴 적대감이 나를 섬뜩하게 휘감았다. 디귿도 느끼고 있겠지. 맑은 그녀의 표정 뒤에 감춰진 슬픔이 그럴 때면 잠시간 흔들리듯 보였던 것도 같다. 나는 외면했다.

어떻게 사람이 이럴 수 있지. 어떻게 늘 웃고, 곁에서 심부름을 해 주고, 따라다니며 챙겨줄 수 있단 말인가. 이런 건 어머니도 할 수 없는 거다. 그런 디귿이 나를 질리게 만들었다. 집착.

 디귿, 이건 나를 보살피는 게 아니라 나를 죽이는 거야.

 화장실에 들어가는 내 등 뒤에서 신문 읽어줄까? 하던 디귿에게 소리쳤다. 나 자신도 놀랄 만큼 괴괴한 쇳소리가 났다. 이게 아닌데, 싶어 황급히 돌아봤을 때 디귿은 울고 있었다. 처음으로 본 그녀의 웃지 않는 얼굴은 나를 당황시키기 보다는 묘한 안정감을 줬다. 아, 쟤도 사람이었구나, 싶은 안도감. 이를 악 물고 돌아서던 그녀의 얼굴을 보고도 붙잡지 않았다. 그녀가 터덜터덜 짐을 챙겨 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다행이라 생각했다. 디귿은 그 후로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불쑥 나타날 것만 같다. 예의 그 웃음으로, 나를 홀리겠지. 그녀가 다시 온다면 나는 또다시 그녀에게 반할 것 같다. 하지만 지금 난, 허전하기보다는 편안하다. 디귿은 내게 외로워하지 않는 법을 알려줬다. 어디선가에서 누군가와 함께 하고 있겠지, 막연하게 드는 생각이지만 어쩐지 나는 그 생각을 붙잡고만 있다. 어쭙잖은 자기만족. 누군가를 상처 입혔다는 죄책감에서 도망치기위해 만들어내는 끝없는 자기만족에 도취되어 있다. 언제나. 이건 디귿을 만나기 전에도, 지금도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는 내 습성이다.

 디귿이 떠나고 나는 다시 활자를 되찾으리라 생각했다. 당연한 순서처럼 생각됐다. 디귿을 얻었으니 뭔가 하나는 잃어야 하지 않겠냐고. 활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불편하지도, 놀랍지도 않다.

 여기까지 썼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엄마다. 이렇게 무뚝뚝한 딸이 어떻게 저 뱃속에서 나왔나 싶을 만큼 살가운 우리 엄마. 집에 가 봐야 입을 꾹 다물고서 있는 나를 보면 차라리 내가 아버지이고, 엄마가 딸인 게 더 어울릴 것 같다. 가끔 엄마에게 질문을 툭 던지기도 한다. 엄마, 내가 엄마 아부지 할까? 엄마는 꺄르르 라는 소리가 튀어나올 것 같은 웃음을 터뜨린다. 얘는, 못하는 소리가 없어. 엄마는 나를 낳고서 행복했을까? 지금도 그 행복이 이어지고 있으려나. 전화를 받자 잔뜩 들뜬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딸, 오늘은 내려온댔지? 운전 조심하고, 맛있는 거 많이 해 놓을 테니까 얼른 와.

 주말에 집에 가겠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던가. 몇 번인가의 약속이 거짓말이 되고, 엄마의 요리들이 딸의 배를 채우지 못하자 엄마는 섭섭했던지 소리를 질렀다. 너 혼자 나서 너 혼자 자란 줄 알아. 소리 지르는 엄마를 처음으로 멋있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소리를 지르다니. 그런 엄마의 목소리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소녀 같기만 한 우리 엄마에게도 이런 면이 있었구나. 엄마의 손가락에 담배 한 개비를 끼워주고 싶었다. 고무장갑을 끼고, 빨래를, 설거지를, 요리를 하던 그 손에. 잠시간의 침묵이 흐르고, 괜히 소리를 지르고 미안해하는 엄마에게 다음 주말엔 꼭 가겠다고 말했었다. 오늘이 벌써 그 날이구나. 벌써 일주일이 흘렀다. 달력에 빨간 동그라미를 쳐 둔 날짜가 벌써 오늘이 되었다. 공모전 출품이 오늘까지다. 얼른 마무리 해야겠다 생각하며 그저 응, 얼른 갈게 엄마. 하고 대답했다. 화장대가 눈에 보인다. 반쯤 줄어든 스킨, 로션과 잘 정리되어 있는 향수들이 놓여 있다. 예쁜 향수병들이 즐비하다. 그나마 요즘 향수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삭막할까, 생각해본다. 나이 찬 여자의 방이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간소한 방이다. 엄마는 내 방에 와 보고는 넌 어쩜, 하다가 입을 다문다. 웃음이 난다. 대학 시절, 학교에 나가는 내 모습을 보고서 내가 아들 둘을 키우지, 하던 엄마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 같다. 향수들을 눈으로 대강 훑으며 뭘 뿌리고 갈지 골라본다. 향수를 싫어하는 엄마다. 넌 그나마 여성스러워졌단 취미가 하필 엄마가 제일 싫어하는 향수니. 다른 애들처럼 화장도 하고 예쁜 옷도 좀 입고 그러면 좋을 텐데. 엄마는 볼멘소리로 말했었다. 이번에 상금을 받으면 엄마가 좋아할 법한 향수를 선물해야지. 글쎄, 네 오빠가 말이야, 하며 말을 잇는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거울을 본다. 자장가 같기도 하고, 보컬이 실리지 않은 선율 같기도 하다. 엄마의 목소리에서 행복이 묻어난다. 이런 게 어머니의 행복이란 건가, 참 소소하다. 오빠가 선물이라도 했나보지, 하며 엄마의 말을 듣고 있다. 건성으로 듣지 마라며 섭섭해 할 엄마를 위해 적당히 추임새도 넣어가며. 화장대 거울 속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의자를 빙빙 돌리고 있는 내가 비친다. 건너편 거울에 방 전체가 다 비칠 만큼 보잘 것 없는 원룸이다. 등 뒤로 모니터가 하얗게 빛나고 있다. 책상, 바닥에 놓아 둔 매트리스, 조립해서 세워 둔 옷장과 책장. 그게 전부다. 오빠가 엄마에게 목걸이를 선물했단다. 내가 방값 좀 빌려달랄 땐 돈 없다고 엄살이더니. 요즘 연애하느라 바쁜 오빠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그래도 여자한테 돈을 다 쏟아 넣진 않나보지.

 네 오빠가 골라온 건데 어쩜 이렇게 마음에 쏙 드는지, 네 오빠 안목도 많이 좋아졌나 봐. 호호호.

 오빠 애인이 골라줬겠지. 오빠의 센스가 얼마나 엉망인지 우리 가족은 모두 잘 알고 있다. 언제부턴가 자연스레, 무언가를 고를 때 오빠의 의견은 반영되지 않는다. 자기 방에 놓을 가구를 고를 때도, 면접에 입고 갈 정장을 살 때도. 그런 오빠의 안목이 엄마 마음에 들 리 없다. 거울을 바라보며 목걸이를 쓰다듬고 있을 엄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만족스런 그 웃음과 엄마의 목에서 빛나고 있을 목걸이. 전화기를 잡고 있을 엄마의 손. 엄마는 전화기를 꼭 왼쪽 귀에 갖다 댄다. 잔잔한 엄마가 부리는 유일한 고집이기도 하다. 엄마는 전화를 받을 동안 많은 일을 한다. 그러기 위해서 오른손은 꼭 남겨놓아야 한단다. 지금쯤 엄마의 오른손은 메모를 하고 있을 거다. 엄마 요리 중에 뭐가 제일 맛있어? 딸,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하며 엄마는 내 말을 받아 적는다. 그리고 장 볼 목록을 적고 요리를 구상한다. 그런 게 여자의 행복일까. 아니, 그런 게 엄마의 행복일까. 엄마의 귓가로 봄바람이 불 것 같다. 왠지 산뜻하다. 얼른 소설을 마무리하고 집에 내려가야겠다.

 엄마, 나 하던 거 얼른 마무리하고 내려갈게. 좀 있다 봐.

 응, 알았어. 조심히 와, 해야 할 엄마의 대답대신 익숙한 말이 들려왔다.

 어머, 어머. 글자들이 사라졌어.

 거울을 바라봤다. 모니터 속 활자들이 날아가고 있었다. 나는 놀라지 않는다. 초인종이 울렸다. 디귿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200 * 70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