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드 미트
- 작성일 2011-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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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자마자 생각했다. 누군가 나를 두들겨 패줬으면 좋겠다. 일단 목을 꺾어 정신이 빠지도록 한 다음에 복부를 강타한다. 배를 부여잡고 뒹굴면 등을 걷어차고 이곳저곳을 사정없이 패는 거다. 턱을 날리면 기침과 함께 피로 범벅이 된 살덩이를 뱉어낼 수도 있겠다. 갈비뼈가 부러지고 여기 저기 피멍도 들고 잘하면 실명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여명에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다음번에 눈을 뜨면 반드시 얻어 터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언제나 일어나지 않는 일만 반복되고 있었다.
여자의 집은 늘 무방비 상태였다. 그녀는 잘 모르는 것 같다. 마찬가지로 주거 침입을 하는 주제에 도둑이 들지 않을까 잠깐 걱정이 된 적도 있다. 여자가 출근하기 30분 전부터 마음의 준비를 했다. 희미하게 들려오던 레코드 소리가 멎으면 본격적으로 리볼버를 뒤춤에 차고 창문을 넘었다. 총은 사촌 형이 미국에 가기 전에 넘긴 것이었다. 처음에는 조립용 에어건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받아들자마자 느껴지는 무게는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실총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나는 왠지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것을 한꺼번에 기억해 내고야 말았다. 가령 일본에서 살았던 어린 시절 지하철에서 어떤 여자아이에게 못된 짓을 하고 있던 아저씨를 보았었고 보습학원에서 구구단을 외우지 못한다는 이유로 학우들 앞에서 바지를 내리고 엉덩이를 맞기도 했었다. 아빠가 도로에 뛰어들어 자살하기 직전의 전화통화도 있었다. 어쩌면 나는 직감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이걸로 내가 또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을 만들게 될 지도 모른다는 것을.
책장에 걸터앉아 그녀는 두 번째 불을 붙였다.
"내 방에서 하지 말랬지."
그녀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창문만 조금 열었다. 나는 싸우고 싶지도 않아 바닥에 주저앉아 스테레오의 볼륨을 높였다. 그녀는 보란 듯이 열어 놓은 창의 반대편으로 연기를 내뱉었다.
"끝내고 싶으면 언제라도 말하라고 했잖아."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어기적거리며 일어나 소형 냉장고에서 이온 음료를 꺼내 마셨다. 그녀는 어느새 책장에서 내 선글라스를 뒤져 걸치고 있었다. 나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지겹고 힘든 건 네 쪽이라고 말하고 싶겠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지는 않았다. 지겹고 힘들다고 늘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었다.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초여름의 햇빛이 연립주택의 빨간 벽돌과 노란 물탱크들 위로 골고루 쏟아지고 있었다. 지저분한 공원에서는 사내아이들이 캐치볼을 하고 있었다. 여자에게도 사내아이가 있다. 액자 속의 아이는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캐치볼 따위는 아마 하지 못할 거다.
"하루가 이따 영화나 보자던데."
그녀가 탑을 주워 입으며 말했다.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먼저 간다. 7시까지 갤러리아 앞."
화분 속에 꽂혀 있는 담배꽁초는 한참 뒤에야 알았다. 선글라스도 그녀가 쓰고 간 후였다.
여자는 마일즈 데이비스를 즐겨 들었다. 책장 가득히 낡은 레코드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냉장고에는 드레싱이 유난히 많았다. 모두 맛을 보았다. 레드 발사믹은 아무래도 취향이 맞지 않았다. 빛바랜 커튼 안쪽으로는 작은 화분이 몇 개 있었다. 시든 이파리를 땄다. 발 사이즈는 225 내지는 230. 침대 맡에는 조지 오웰의 수필과 불투명한 감색 뿔테 안경이 있다. 바디 스크럽은 커피 향. 쿠키상자 안에는 잔돈들이 들어 있고 pc 옆에는 작은 재떨이가 있었다. 원두 찌꺼기는 언제나 잘 말라 있었다.
나는 여자의 집에서 디비디를 돌려 보기도 하고 커피를 내려 마시기도 하고 화분에 물을 주기도 했다. 모든 건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침대에 누워서 가만히 천장을 올려다보기도 했다. 빛바랜 커튼 너머로 햇빛이 부드럽게 내려앉는 침대에서 나는 생각했다. 누군가 나를 두들겨 패줬으면 좋겠다. 그러다 우연히 죽기라도 한다면 더 좋겠다. 시체는 피를 완전히 빼서 햇볕에 잘 밀린 뒤 조각조각 잘라서 냉동실에 넣어줄까. 여자는 그것을 조금씩 꺼내 소금과 레몬을 곁들여 데킬라와 먹어줄까. 아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다. 어쨌든 늘 일어나지 않는 일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7시 십분 쯤 갤러리아 앞 로터리에서 나는 하루와 마주했다. 횡단보도의 저 쪽 끝에서 그는 벤리 50 안장에 앉아 캔 콜라 끝을 입에 물고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미소는?"
"아직."
"하여간 지각이라니까."
미소와 하루는 어렸을 때부터 친했던 동네 친구다. 허구한 날 골목에서 달리기를 했다. 어렸을 땐 왜 그렇게 이유 없이 뛰어다녔는지 모르겠다. 동네 슈퍼에서 함께 백 원짜리 아이스크림을 훔치다 호되게 혼난 적도 있다. 미소와는 단둘이 목욕을 한 적도 있었다. 머리가 조금 자라고 나자 나는 자꾸만 미소의 몸을 생각하게 되었다. 자란 머리만큼 이미 그녀의 몸은 부풀어 있었다. 나는 그녀의 드러난 가슴을 그렸고 부드럽고 따뜻한 아래를 상상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손바닥에 침을 뱉어 페니스를 잡았다. 일이 끝나면 항상 죽고 싶었다.
"뭐 마실래?"
목을 젖혀 콜라를 들이킨 그가 물었다. 빈 깡통을 구겨서 신문 가판대 사이로 넣는다.
"나는 물 좀."
시계를 흘끗 보며 나는 말했다.
"오케이. 벤리, 부탁해."
그는 파란불이 깜박이는 횡단보도를 뛰었다. 십 분이 더 지나있었지만 미소는 오지 않았다. 나는 목을 뚝뚝 꺾으며 벤리 50 안장에 걸터앉았다. 얼마 전까지는 울프 클래식이 놓여있던 자리였다. 아르바이트한 돈을 모두 털어서 하루는 세컨드로 혼다 벤리 50을 마련했다. 50cc밖에 안되지만 연비가 좋고 '무엇보다도 너무 귀엽잖아' 라고 그는 말했다.
그의 형은 오토바이 사고로 죽었다. 친구가 모는 오토바이의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마후라에 화상을 입었고 온 몸이 도로에 쓸려 즉사했다. 가족들 중에서 시체를 본 건 하루뿐이었다. 그의 부모는 살갗이 벗겨진 아들의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었다.
하루가 처음 울프 클래식을 타고 내려와 헬멧을 벗던 날 미소와 나는 서로 눈빛을 교환했을 뿐이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그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을 늘어놓았다. 한 번 타보라는 것을 극구 사양한 것도 우리 쪽이었다.
다음 신호등이 파란불을 깜박이고 있었다. 하루가 양손에 각각 캔 콜라와 생수병을 들고 뛰어왔다. 콜라는 따자마자 거품을 물며 그의 옷을 적셨다.
같은 골목에서 여자는 종종 목격되었다. 퇴근할 무렵이면 간단히 장을 봐오기도 했고 주말이면 좀 더 밝은 색의 옷을 입고 세단을 몰기도 했다. 나는 주로 옥상에 올라가 그녀를 보았다. 맑은 날에도 궂은 날에도 늘 아빠의 것이었던 오래된 선글라스를 착용한 채였다. 여자가 뒤통수에 따라붙는 시선을 눈치 채고 이쪽을 돌아본 적은 아직 한 번도 없었다.
그녀가 처음 이사를 오던 날 나는 요리를 태우고 있었다. 버터 타는 냄새가 온 집안에 진동을 했다. 그대로 불을 내리고 방 안으로 피신을 왔지만 냄새는 끝까지 따라붙었다. 두통을 참지 못하고 나는 담을 넘어 옥상으로 잠시 몸을 피했다. 그리고 지상의 물색 세단과 여자와 휠체어를 보았다. 휠체어에 타고 있는 사내아이는 유난히 머리카락이 새까맣고 숱이 많았다. 여자는 달랐다. 밝은 갈색이 적당한 숱의 웨이브 진 머릿결 위를 골고루 물들이고 있었다. 여자가 아이를 안아서 뒷좌석에 태웠다. 그의 드러난 다리가 내 팔처럼 가늘었다. 순간 나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몸을 급히 숨겼다. 착각이었을지도 몰랐다. 다만 여자는 날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물색 세단이 유유히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그 날 미소는 결국 끝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퇴근러시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도 지겨워 우린 근처 맥도날드에 들어가 끼니나 떼우기로 했다. 나는 배가 고파 새우버거세트에 치킨 텐더를 추가했고 그는 빅맥세트에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벌써 세 번째야."
"음, 두 번째 아닌가?"
"세 번째. 전에 도서관이랑 저번 주 수요일도."
열이 받고 배는 고파서 나는 버거의 반허리를 뭉텅 베어 먹었다.
"우리를 이어주려는 게 아닐까? 너와 나, 잘 해보라구."
하루는 케첩을 잔뜩 뿌린 프렌치프라이를 한 줌 입에 넣으며 농담이나 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상해, 걔. 요즘."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그만두고 싶다면 언제든지 말해달라고 일러뒀었다. 하지만 이제와 그만두고 싶어진 이유가 뭘까. 좋아하는 남자라도 생긴 것이라면 얼마든지 끝내줄 용의가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횟수도 줄었다. 연락이 뜸해질 때면 애인이 생긴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늘 오랜만에 연락을 해 오는 것은 그녀였다.
"미소 요즘 병원 다니는 건 알아?"
하루가 내 치킨 텐더에 손을 대며 물었다.
"응. 들은 것 같아."
피부과인가 어딘가에 다닌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았다. 전에 없던 햇빛 알레르기가 생겼다나 어쨌다나 했었다. 언제나 매끄럽기만 했는데. 하얀 피부는 오랜만에 보니 팔부분이 조금은 탄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오늘날의 태양은 무서운 속도로 고도를 높여간다. 그을린 팔이라도 매끄러웠다.
"으응. 혹시 요즘 너 만나는 여자는 없고?"
나는 마지막 남은 텐더마저 빼앗길까봐 얼른 집어 들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하루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은 채 빨대를 쪽쪽 빨고 있을 뿐이었다.
"하루 너야말로 연애하고 있는 것 아냐?"
"아니, 그런 일은 전혀."
그가 과장되게 어깨를 들썩였다.
"그렇다면 분명 카페인 때문일 거야."
"뭐가?"
"너 정말 카페인 중독 아니야? 질문에 항상 두서가 없고 말이야."
나는 괜히 하루에게까지 짜증이 나 인상을 찌푸렸다. 하루는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영화는 됐고, 우리 수족관이나 갈래?"
나는 잠시 몸이 굳어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두서없는 질문만 계속되고 있었다. 미소가 이어주기로 한 것 아니냐느니 했던 그의 농담이 떠올라 잠시 등골이 오싹했다. 옆자리에 있던 젊은 주부들이 우리 쪽을 흘깃하며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벌써 한여름이라도 된 듯 시원한 옷차림이었다. 어렸을 때는 어땠는지 몰라도 조금씩 두꺼워지는 팔뚝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소리가 나지 않게 이를 꽉 깨물었다.
형이 어떻게 총을 소지하게 되었는가는 알 수도 없었고 생각도 하기 싫었다. 친형처럼 따르던 것도 다 어렸을 때의 이야기다. 중학교에 올라가면서부터는 이미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형이 사고 친 일로 바쁜 큰아버지 대신 아빠가 학교에 불려간 적도 종종 있었다. 그는 나이가 들어서도 아빠를 삼촌이라고 불렀고 아빠도 왠지 말썽만 일으키는 형과 스스럼없이 지냈다. 형을 호되게 혼낸 뒤에는 꼭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한 그릇 사주었다. 나는 한 번도 아빠를 학교로 소환하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사랑을 받는 건 형이었다. 나는 공부만 열심히 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알 수 없는 생각들을 하고 다녔다.
실린더 안에는 탄피가 네 개, 탄환이 두 개 들어있었다. 네 개의 탄환이 어디서 어떻게 쓰여졌는지 나는 알 수도 없었고 생각도 하기 싫었다. 침대에 누워 나는 몇 번이나 방아쇠에 검지를 걸쳤다 풀었다. 머릿속에서는 몇 번이고 굉음이 울렸다. 밤의 통화의 그것과 비슷했다. 아빠는 비틀어진 발음으로 출장을 다녀오겠다고 했다. 불길한 예감에 수화기를 잡은 손에 땀이 찼던 것도 생생하다. 아주 멀리 출장을 간다고 했다. 주위가 시끌벅적했다. 술잔 같은 것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굉음이 들렸다. 반사적으로 수화기에서 귀를 뗐다. 거짓말 같은 정적이 공기를 빽빽하게 메우고 있었다. 밖으로 자동차의 헤드라잇이 거실 바닥을 쓸어내렸다. 총은 낡은 곰인형의 등을 갈라 쑤셔넣었다. 왜 형이 아니라 나였는지 묻고 싶었다. 이때껏 살면서 형을 그렇게 챙겼으면서 왜 마지막은 나였는지, 곰인형을 침대 밑으로 처넣으며 나는 몇 번이고 마음속으로 소리를 질렀다.
"야아. 근 십년만이야."
무빙워크에 서서 하루가 목이 꺾어지는 것도 모르고 가오리의 헤엄을 좇으며 감탄했다. 마지막 입장 시간에 겨우 맞춘 터라 수족관 안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와. 많이 좋아졌는데? 입장료는 비싸졌더라. 야간 할인도 없고 말이야."
아치형의 터널 안으로 수족관의 푸른빛과 소독약 냄새가 부유했다. 무빙워크 손잡이에 기대어 나는 눈을 감았다. 물고기 떼의 그림자가 감은 눈 위로 스쳐 지나갔다.
어느새 '괜찮은 단계'가 되어가고 있었다. 서로 '괜찮다'고 생각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나는 서두르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사인을 보내줄 때까지 기다릴 요량이었다. 우린 그 날 근처 회전초밥집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었다. 그날따라 사람이 너무 많았다. 딱히 생각해 둔 다른 곳도 없어서 우린 조금 기다리다가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여기. 여기 안 갈래?"
그리고 미소는 수족관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수족관 안에도 사람은 많았다. 자꾸만 미소와 몸을 부딪혔다. 봉긋한 가슴이 팔 끝을 스치기도 했다. 푸른빛이 내려앉은 그녀의 몸은 어느 때보다도 유연해 보였다. 물고기들보다 우아하게 반짝반짝 빛났다. 그 날 미소와 나는 우리집으로 향했고 한참 땀을 흘린 후에야 늦은 점심 겸 저녁을 먹었다.
"와아. 이런 건 없었는데."
무빙워크가 끝나고 서늘한 복도가 이어졌다. 원형 계단을 내려가 또 얼마간 걷자 구비진 복도의 끝에 커다란 홀이 나타났다. 고래가 자기 덩치보다 더 큰 물그림자를 만들며 포물선을 그리고 있었다. 하루는 벌써 까치발을 들고는 아크릴 유리에 코를 박고 있었다. 나도 가까이 다가섰다. 잠시 우리는 말없이 고래를 감상했다. 그가 유리에서 조금 떨어져 발뒤꿈치를 털썩 바닥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많이 변했다."
"응. 확실히 세련돼졌지."
"커졌어."
그런 말을 하는 하루의 옆얼굴에 수면의 빛이 어른거렸다. 표정이 약간 불투명해졌다.
"변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유리를 짚고 있던 손가락이 스르륵 내려갔다.
"이런저런 일말이야. 변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한 안색을 하고 있어 그의 쪽을 흘깃 바라보았다. 고래가 이쪽으로 유턴을 하면서 다가와 그의 표정은 그늘 속으로 숨어버렸다.
"왜 그렇게 굳이 생각했는지 모르겠어. 변하는 건 변하는 건데 굳이 부정해서, 뭐가 하고 싶어서."
대답을 하기가 애매해 나는 다시 천천히 고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까, 기억나? 너 있잖아."
주저앉는가 싶었더니 등을 굽혀 웃으며 하루가 별안간 말했다.
"네가 가장 늦게 가렸잖아, 그러니까, 그거. 기저귀 차고 다녔잖아, 몇 년 동안."
"뭐? 갑자기."
하루는 낄낄거리며 숨이 넘어가도록 웃어제꼈다. 막 홀 안으로 들어오던 이삼십 대 주부들이 얘기를 들었는지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그만 말문이 막혔다. 요즘은 어딜 가나 젊은 아줌마들이 있다. 딱히 창피할 건 없었지만 공연히 화는 났다.
"하루 너, 정말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어렸을 땐 시계 읽기 같은 거 잘 했잖아, 응?"
조용히 그에게 쏘아붙였다. 그는 아예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주부들은 벌써 자기들끼리 무어라고 두런거리며 홀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고래를 보고도 아무런 감개도 없는 것인가. 분명 실패한 주변 사람들이라든가 내일의 밥상, 아이들 성적의 좋고 나쁨에 대해 늘 이야기를 하겠지. 귀염성 있는 말투 따위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으면서 주름이나 늘어가는 지방 따위에나 관심을 갖고. 그러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민소매를 입고 꼭 맞는 바지를 입고 다니는 것이 그녀들이다.
"남녀 간의 발전이라는 것도 아마 좋은 걸 거야. 결국은 그렇게 되니까."
하루는 어느새 언제 배를 잡고 웃느라 정신이 없었냐는 듯이 반듯하게 서서는 고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여전히 두서없는 이야기만으로 입을 떼고 있었다.
화장대의 거울, 천장의 조명등, 아날로그 벽시계, 빛바랜 커튼이 드리워진 창. 여자의 침대에 누워 나는 몇 번이고 주위를 둘러봐가며 방아쇠에 검지를 걸었다.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는 일은 없었다. 조금쯤 긴장되어진 오른손은 몇 번이고 다시 침대 매트릭스 위로 툭 하고 힘없이 떨어질 뿐이었다.
언젠가라도 바보 같은 일을 저지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곰인형의 등을 두세 번이나 단단히 꿰맸다. 그것을 커다란 검은 비닐봉지에 담아 여민 후 어깨에 걸쳐 메고 집을 나섰다. 성큼성큼 밤의 골목을 걸어 봉지를 던지듯 내려놓고 돌아서려는 참이었다.
"학생?"
목소리가 뒷덜미를 낚아챘다. 순간 조금 얼어붙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이거, 어떤 거?"
어두워서 잘 알아볼 수 없었지만 희미한 가로등 빛에 드러난 여자는 분명히 그녀였다. 나는 두 뺨이 경직되는 것을 느끼며 겨우, 네, 하고 반문했다.
"쓰레기 말이야, 사람들이 요즘 너무 신경을 쓰지 않으니까."
처음 보는 차림이었다. 짧은 연두색 팬츠에 줄무늬 민소매를 입었다. 머리카락에는 갓 샤워를 마친 듯 아직 물기가 촉촉히 달라붙어 있었다.
"재활용?"
그녀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조금 커진 두 눈이 내게 '재활용인지 일반 쓰레기인지, 그것만 말해'라고 추궁하고 있었다.
"곰인형인데요."
나도 모르게 그렇게 말해버리고 말았다. 빨리 집 안으로 도망쳐버리고 싶었다. 그녀는 드디어 속 시원히 답을 알았다는 듯이 눈을 반짝이며 봉지에 손을 데려고 하고 있었다.
"아, 잘됐네. 우리 아들이 아직 어리거든."
나는 모든 온도가 관자놀이 부근으로 집중되는 것을 느끼며 재빨리 그녀를 막아섰다.
"아, 안돼요."
그녀가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쓰레기잖아요. 제가 버리려고."
그녀의 입가가 다시 부드러워졌다.
"괜찮으니까, 보기만 할게. 아끼던 거였구나?"
전혀 아끼고 있지 않았다. 곰인형이야 언젠가 미소가 가져온 것이었다. 쭉 곰인형을 갖고 싶었는데 막상 아무도 사주지 않아서 그만 사버렸다고 했다. 하지만 스스로 사온 곰인형이라니 어딘지 폼이 나지 않아서 그냥 사온 김에 두고 간다고 말했다. 눈에 띄면 가끔씩 참 그녀답지 않은 취향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총 이야기라면 더더욱 아니었다. 아빠나 사촌형이나 내게 짐만 지우고 떠난 것에 불과했다.
"제가 가져갈게요."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다시 봉지를 손에 들었다.
"그래도 혹시 버리려면 마트에서 있지, 쓰레기봉투 따로 파니까."
그녀의 목소리가 잘게 쪼개져 파편이 되더니 이내 못처럼 가늘어져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뒤통수를 찔러왔다. 곰인형은 다시 처참히 척추를 드러냈다. 다음 날 아침, 레코드 소리가 멎자 나는 리볼버를 뒤춤에 찼다. 양말을 신고 창문을 넘어 담 위를 걸었다. 여자의 집 창문에도 창살은 있었다. 하지만 보통 체격보다 약간 마른 남자 정도라면 아슬아슬하게 몸을 넣을 수 있을 만큼의 틈이 있었다. 나는 이미 망설임 없이 그 틈에 머리를 밀어 넣고 있었다.
"왜?"
시동을 걸자 벤리 50이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하루는 도리어 얼굴 위로 물음표를 띄우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도 안다고 했잖아."
"그렇지만."
까지 말하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하루는 왠지 조금 맥 빠진 표정으로 헬멧을 눌러 썼다.
"모르는 척 하는 거야, 모르는 거야."
나는 조금 놀란 마음 한 편으론 귀찮고 짜증스런 생각이 들고 있었다. 정신과 같은 데는 자의식 과잉인, 말하자면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특별하다는 과대망상증을 가진 여자애들이나 찾는 곳이다. 하지만 그녀들도 곧 수능을 보고 대학엘 간다. 졸업하면 취직하고 취직하면 결혼하게 된다. 그녀들도 남들과 다를 것 없이 좋은 직장, 좋은 집안, 좋은 허우대를 가진 남자들을 선호한다. 이것저것 재가며 남자들을 만난 다음엔 남들과 다를 것 없이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을 올린다. 그리고 곧 젊은 주부가 된다. 나는 미소가 갓난 아이를 두 팔에 안아들고 미래의 남편과 마트의 식품 코너를 기웃거리는 상상을 해 보았다. 잘 그려지지가 않았다.
"뭘 하고 싶은 거야, 넌."
고글을 내린 하루의 눈이 내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적당한 할 말을 찾아내지 못했다. 침대에 앉아 나는 다시 생각해 보았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거실에서는 티비 연속극 소리와 이따금씩 강아지 짖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오렌지색 침대 커버 위에 앉아 나는 책상 위의 곰인형을 죽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언젠가 내게 줬던 곰인형과 같은 것이었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팔짱을 낀 채로 그 인형을 노려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힘을 풀며 스르르 침대에서 내려왔다.
"미소는 아까 나갔는데, 한 일곱 시 쯤에. 들어올 때가 됐는데, 잠깐 방에서 기다려도 괜찮을까?"
미소네 어머니는 잘 늙지 않는 타입이었다. 자세히 보면 눈가의 주름이 늘고 피부의 탄력도 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동글동글한 이목구비가 전체적으로 아이 같은 느낌을 주었다. 시계는 벌써 열한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책상 앞에 다가가 스탠드를 켰다. 깔끔하게 정돈된 방과 지저분한 책상 위가 대조를 이루었다. 노트며 코끼리 모양의 포스트잇, 색색의 색연필이며 스탬프, CD 케이스, 스티커, 동전, 십자수실, 렌즈 통 따위가 책상 위에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나는 줄리앙이 데생된 노트 밑에서 종이봉투를 꺼내들었다. 바스락 소리를 내며 약포지들이 줄줄이 떨어져 나왔다. 아침용과 취침전용이 따로 나누어져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좀 더 가벼운 쪽의 아침용 약포지를 하나 뜯어냈다. 물 없이 알약들을 삼켰다. 생각보다 크게 느껴지는 덩어리들이 혀 안쪽의 신경들을 기분 나쁘게 자극하며 식도를 넘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곰인형은 북스탠드에 꽂혀 있는 책들 위에서 동그랗고 까만 눈을 힘없이 빛내고 있었다. 찢겨진 약포지들을 아무렇게나 구겨 책상 위로 내던지며 나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따뜻한 아이보리색 털과 부드러운 감촉, 목에 매달린 감색 체크무늬 리본까지 똑같았다. 머리가 조금 무거워져왔다.
나는 곰인형을 거의 목을 조르듯 감싸 쥔 채로 침대에 기대어 앉았다. 곰인형의 까만 눈이 고글에 가려진 하루의 눈처럼 느껴졌다. 나를, 아니 그 너머를 보는 것 같았던 하루의 건조한 눈동자는 무언가를 원망하는 듯했다. 지겹고 힘들다는 듯이 한숨을 쉬고 있었다.
"뭘 하고 싶은 거야, 넌."
내가 묻고 싶었다. 더 이상 무엇을 원하느냐고 미소에게 묻고 싶은 건 나였다. 나는 점점 더 머리가 무거워져오는 것을 느끼며 곰인형을 더욱 세게 쥐었다. 손가락이 부드러운 털 사이를 가르며 맞닿았다가는 겹쳐졌다. 그리고 좀 더 깊숙이 들어가는 지점이 있었다. 갈라진 틈 사이로 좀 더 손을 뻗어보았다. 무언가 달그락거리며 손가락을 간질였다. 나는 그대로 등을 열어 곰인형을 뒤집었다. 하얀 알약들이 쏟아지며 메마른 소리를 내는 것이 마치 머릿속의 레버가 오작동을 하면서 파칭코의 숫자가 미친 듯이 돌아가는 것 같았다. 현기증이 나는 것을 느끼며 눈을 들어 보았다. 스탠드의 불빛이 고개의 동선을 따라 부드러운 곡선을 만들었다. 나는 비틀비틀 일어나다가는 주저앉았다. 몸이 이상했다. 다시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한 가지 생각밖에는 없었다. 집으로 가야 했다.
빛보다도 그림자가 훨씬 보기 편했다. 거리의 네온싸인이며 가로등, 얼마 없는 하늘의 희미한 별빛마저 토할 것처럼 눈앞에서 어지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밤의 그림자에 몸을 의지하며 최선을 다해 걸음을 옮겼다.
"봐, 자꾸 하루는 떨어지고 있어."
미소의 웃는 얼굴이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부서지고 있었다. 하루는 그림자 가운데 서서 혀를 내밀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렇게 금을 밟고 걸어야 한다니까."
앞코가 둥근 미소의 구두가 건물과 건물 사이의 그림자를 잇는 가느다란 선을 밟아나갔다. 어린 미소의 노란 원피스가 하늘하늘한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그녀는 전깃줄 그림자를 밟아 건물 그림자를 건넌 후 세단의 보닛 그림자 위에 올라섰다. 하루는 미소의 앞코를 흘끗거리며 그림자와 빛의 경계를 밟고 있었고 미소는 그런 하루를 보며 다시 한 번 뒤를 돌아 나를 향해 활짝 웃어보였다. 눈이 부셔 나는 고개를 떨구며 눈을 깜빡거렸다. 미소는 발목까지 오는 하얀 양말에 녹색 에나멜 구두를 신고 있었다. 앞코가 둥글었고 반짝거리고 있었다. 작은 발이 가볍게 폴짝거렸다. 순간 녹색 앞코가 빛과 그림자의 경계를 조금씩 벗어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달려가 미소를 작은 손으로 붙들었다가는 다시 놓았다. 미소는 알아차리지 못한 채 까르르 웃으며 다시금 저 쪽으로, 전깃줄의 그림자를 밟으며 멀어져갔다. 그림자뿐이라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나는 그녀의 발을 계속해서 주시했다. 조금만 중심을 잘못 잡아도 전깃줄에서 떨어져 건물 사이의 작은 공간으로 곤두박질칠 것만 같았다. 미소의 부러진 팔, 부러진 목, 부러진 두 다리의 그림자가 그 틈새의 빛 아래로 처박히는 모습이 저절로 그려졌다. 그리고 성장한 나의 부러진 사지가 그려졌다.
그제야 항우울제가 호르몬을 조절하는 약이라는 것이 생각났다. 그리고 새삼 미소와 나의 벌어진 간격이 온 몸으로 실감이 났다. 나는 그림자 경계를 밟아나가며 수족관의 고래와 여자의 무방비한 창살과의 간격을 생각했다. 하루의 벤리 50과 울프 클래식, 그리고 사촌형이 떠넘긴 리볼버의 간격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아빠의 마지막 전화통화와 휠체어를 탄 여자의 아들간의 간격, 각각 척추를 열어젖힌 나와 미소의 곰인형 사이의 간격, 빛과 그림자의 간격, 그리고 미소와 나의 호르몬간의 간격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모든 것들의 사이에 언제나 거대한 틈이 숨을 죽이고 숨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조금만 손가락을 집어넣으면 뭐든 끔찍한 것들이 도사리고 있는 것처럼만 느껴졌다. 그리고 한편으론 아무런 차이도 없다고, 전부 쓸데없다고, 게워내고 싶은 속으로 생각했다.
가까스로 그림자에 의지하며 집 앞으로 다다랐다. 나는 어느새 담을 넘고 있었다. 버릇처럼 신을 벗고 양말을 신은 발로 담 위를 걷고 걸어 이층의 내 방 창문으로 다가갔다. 검은 실루엣이 눈앞에서 아른거리고 있었다.
"미소야?"
내 목소리가 한없이 낯설게 느껴졌다.
"문 좀 열어봐. 나야. 이 문 좀."
실루엣이 멈춰 섰다. 가느다란 손목이 리볼버를 쥐고 있었다. 스스로의 집 창문을 열어달라고 계속해서 애원하고 있었는지 혹은 목이 메어서 아무 소리도 못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내가."
다만 그녀가 말했다.
"내가 해주면 안 될까."
다만 그녀는 메인 목으로 애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를 보았고 수화기 너머의 굉음을 들었고 좁은 빛 틈새에 그림자 조각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새의 그림자가 그 사이에서 날아올랐다. 내가 새가 되는 꿈이었는지 단지 새를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오랜 잠을 잤다. 새는 오랜 꿈속에서 내내 지친 날개짓을 멈추지 않으며 어딘가 먼 곳으로, 스콜이 내리는 땅, 해가 지지 않는 밤, 그 하늘 위로 끊임없이 날아오르고 있었다.
"친구분이시구요? 네, 704호로 가보세요."
내 몸이 간호사에게 고개를 끄덕해 보이며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오른팔이 숫자 칠을 누르고는 떨어졌다. 스르르 문이 닫혔다. 아직 그런 활동을 할 수 있는 내 몸을, 나는 낯설어 하고 있었다. 일을 처리하는 동안 나도 항우울제의 호르몬 이상이며 담에서 떨어진 충격 탓에 대부분 누워 있었지만 하루는 아예 연락이 되질 않았다. 그리고 사고가 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내왔던 우리였다. 나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미소도 하루도 내가 알던 그들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나 몰래 둘이서만 어떤 끔찍한 것을 공모하고 있는 것 같았다. 햇빛 알레르기가 생겼다며 매끄러운 팔을 쓸어내리던 미소도, 멋지지 않냐며 울프 클래식 안장 위에 앉아 폭주족 흉내를 내던 하루도.
내 다리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704호의 열린 문 사이로 하루가 보였다. 순간 매우 지쳐하는 내 몸을 느낄 수 있었다.
"아, 왔어?"
하루는 아무렇지도 않게 캔 커피에 빨대를 꽂아 마시며 핸드폰 게임을 하는 중이었다. 나는 맞은편의 빈 침대칸에 털썩 주저앉아 귀밑머리의 땀을 닦았다.
"어떻게 된 거야?"
"그냥. 네 말이 맞았나봐."
그가 핸드폰을 내려놓고 회상하듯 눈동자를 굴리며 말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있었는데, 갑자기 심장이 뛰는 거야. 의사도 카페인을 줄이라더라. 아무튼 이상해서 속도를 줄이고 있었지. 그러다 사고가 난거야."
하루의 턱이 가리키는 곳에 그의 붕대를 감은 하얀 다리가 보였다. 나는 화가 나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커피."
"아."
그는 마지막 남은 음료를 빨대로 쪽쪽 빨아들이며 눈을 찡긋했다.
"디카페인이야."
나는 힘이 빠져 그 자리에 도로 주저앉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미소가 죽었어."
왠지 그의 눈을 볼 자신이 없어서 나는 계속해서 중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말하자면 길어. 총으로... 자기가 뭘 해주겠다면서... 나는 담을 넘고 있었는데."
그리고 순식간에 나는 그에게 턱을 맞고 날아갔다. 그리고 고개를 돌릴 사이도 없이 배를 걷어채이고 멱살을 잡혔다.
"미소는 다 알고 있었어."
그리고 다시 나는 턱을 몇 번이나 얻어맞았다.
"너의 그 말도 안되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미소가 해주겠다고..."
정신없이 몇 번이고 목이 돌아가며 나는 그렇게 얻어터지고 있는 내 몸이 너무 낯설었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하루는 이미 미소와 나의 관계를 알고 있었던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힘없이 얻어터지고 있는 내 몸 위로 하루의 눈물이 뚝뚝 떨어져 번졌다. 고통이 오래 가지는 않았다. 불편한 다리 때문에 하루도 헤매고 있었고 지나가는 사람들 덕분에 나는 그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양쪽 어깨를 붙들리면서도,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주제에도 그는 버둥거리며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눈물로 얼굴이 엉망이었다. 그리고 내 눈에서도 무언가 속눈썹을 근질이며 떨어져 흐르고 있었다. 나는 무언가 할 말을 찾아 입을 떼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그 곳을 빠져나왔다.
눈을 떴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여명에 다시 눈을 감고 그리고 다시 눈을 떴다. 투명한 무엇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나비가 앉아 작은 날개를 펄럭이고 있는 것 같았다. 재차 눈을 깜박였다. 눈물이 비어져 나왔다.
몸을 일으켜 세웠다. 방 안은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새 벽지가 도배되었고 침대 커버가 달라진 것 외에는 모두 비슷했다. 책장 안에는 아빠의 선글라스도 되돌려져 있었다. 척추가 열려 하얀 솜을 토해내는 곰인형도 구석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눈동자는 죽은 듯 검었다. 마일스 데이비즈는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양말을 신고 선글라스를 걸쳐 쓴 채 담을 넘었다.
태양은 고도를 높여 어느새 오전에도 햇살이 꽤나 뜨겁게 느껴졌다. 옥상을 딛는 두 발도 뜨뜻했다. 난간에 걸터앉아 그녀가 피우던 마일드 세븐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지상 위의 여자를 보았다. 물색 세단과 짐을 가득 실은 트럭이 보였다. 여자는 집 주인 아주머니에게 키를 넘기고 있었다. 여자가 한 번 쯤 위를 쳐다봐 주기를 바랐던 건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는 곧 세단에 몸을 집어넣고는 트럭과 함께 골목을 빠져 나갔다. 휠체어의 아이는 함께 하고 있지 않았다.
연기를 내뱉으며 나는 고개를 돌렸다. 일어나지 않는 일만 반복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은 어디에서나 일어나고 있었다. 그늘에서 몸을 숨기고 있다가 언제라도 빛으로 나와 실체를 드러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일어나지 않는 일은 없다고, 나는 몇 번이고 생각했다. 머리 위로는 전깃줄의 그림자가 지나가고 있었다. 난간 위에 걸터앉은 나의 그림자가 오른 손을 뻗어 그 선을 쥐려 하고 있었다. 손가락 끝을 스칠 듯 말 듯 그 그림자는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은 채 그늘과 빛을 향해 언제까지나 뻗어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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