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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물 냉장고

  • 작성일 2012-07-06
  • 조회수 1,367

 
인터넷 중고사이트를 통해 10만원에 산 10년도 더 된 구형냉장고가 도착했다. 요즘 보기 드문 회색 외관에 누런색 손잡이를 가진 냉장고는 볼품이 없었다. 한 번 손질을 한 듯 깨끗했지만 난도질 당한 상처처럼 옆면에 새겨진 흠집을 감출 수는 없었다. "10만원이면 완전 거저나 다름없죠. 요즘 이런 거 구하기 힘들어요. 우리 창고에도 몇 대 안 남았어요." 남자는 자기 몸보다 큰 냉장고를 능숙하게 싱크대 옆에 놓으면서 말했다. 남자의 키는 작은 편이었지만, 짧은 면티셔츠의 소매를 뚫고 나올 것처럼 꿈틀거리는 탄탄하고 굵은 팔뚝은 누구도 무시 못할 강한 존재감을 내뿜었다. 그것은 자기자신과 삶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보여주는 증표 같았다. 뼈 위에 살가죽만 붙은 매끈한 팔을 긴 소매 안에 감춘 명인은 무의식적으로 움츠렸다.

명인은 냉장고를 바라보며 언제든 버려도 아깝지 않을 물건이네,라고 생각했다. 지은 지 얼마 안된 현대적이고 깔끔한 원룸에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명인은 고물이나 다름없는 이 냉장고가 마음에 들었다. 그는 이 '거저나 다름없는' 냉장고를 사기까지 몇 날 며칠 머리에 쥐가 나도록 고민했다. 하늘의 별보다도 더 많은 종류의 상품이 인간의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그 욕망이 필요로 치환되고, 결국 갖고싶은 것을 필요한 것이라 여기게 되는 자기기만이 상품을 소비하게 만든다는 것이 평소 그의 신념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무리 사소한 물건을 살 때도 그것이 꼭 그에게 필요한 건지, 아니면 필요할 거라는 막연한 착각에 불과한 건지를 꼼꼼히 따졌다. 냉장고처럼 커다란 물건이라면 그는 감당 못할 미로 속에 던져진 실험쥐처럼 패닉에 빠질 만도 했다. 70년대 이전에는 냉장고 없이 잘 살았는데 굳이 사야할까? 냉장고를 사게 되면 이사 갈 땐 어떻게 가져가지? 승용차에 실리는 크기의 냉장고를 사는 게 좋지 않을까? 다음에 이사 가는 곳에 전에 살던 곳처럼 냉장고가 붙박이로 달려있으면 어떡하지?... 매일매일 머리 속에서 냉장고와 씨름하는 사이 보름이란 시간이 휙 지나가버렸다. 싱크대 찬장에 넣어둔 김치에 하얀 곰팡이가 들꽃처럼 얼룩덜룩 피어난 것을 보고서야 명인은 인터넷을 뒤져서 냉장고를 구입했다. 이사 갈 때 미련 없이 버려도 좋을 만한 가장 싼 냉장고를.

전기코드를 꼽으니 수명이 거의 다한 모터가 최후의 심장박동처럼 힘겹게 몸을 돌리는 소리가 웅~하고 들렸다. 현기증처럼 돌연한 어지러움이 명인을 강타했다.

 

하얀 붕대 안으로 통증이 거머리처럼 신경을 파먹는다. 팔을 움직여보고 싶지만 의지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위와 창자는 접착제가 통과하듯 쪼그라들면서 붙어버릴 것만 같다. 사방은 조용하다. 희미하게 헐떡대는 소리만이 규칙적인 리듬으로 심장을 두드려댄다. 가능만 하다면 산소호흡기와 주사바늘을 모두 떼어내고 이 고통을 멈추고 싶다. 나는 왜 이렇게 혼자 병실에 누워있는 것일까.

 

명인은 난데없이 머릿속에 떠오른 영상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명인의 뇌는 언제부터인가 서사적 구조 쌓기의 기능을 포기해버렸다. 영화의 한 컷처럼 순간순간 튀어나온 기억들의 의미를 해석하는 걸 뇌세포는 의도적으로 거부했다. 뒤죽박죽 꽂혀진 슬라이드 사진처럼 과거의 기억들은 순서 없이 뒤섞여버렸다. 불에 타다 반쯤 남은 책을 건져내봤자 아무짝에도 쓸모 없듯이, 이제 그의 기억은 결말이 있는 이야기를 만들지 못했다. 어쩌면 그의 곁에 기억을 상기시키는 물건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더 그럴지도 몰랐다.

명인의 원룸엔 전주인이 두고 간 작은 2인용 식탁과 의자, 방금 들여놓은 냉장고, 반년 전에 구입한 노트북, 대형마트에서 산 싸구려 접시와 후라이팬 겸용으로 쓰는 냄비, 구석에 아무렇게나 널브려진 이불이 전부였다. 식탁 위엔 ‘성북구 도서관’이란 파란 글씨가 옆면에 선명하게 찍힌 책 몇 권이 쌓여있었다. 그 어떤 물건도 그가 살아온 삶의 흔적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가 돈을 주고 물건을 사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하기 시작한 건 아마도 그의 뇌기능이 뒤죽박죽 되어버린 날부터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보금자리를 잃어버린 그 날부터 한 곳에 오래 머물러있는 것을 싫어했고, 그런 이유에서인지 필요와 욕망의 개똥철학 때문인지는 몰라도 물건을 거의 사지 않았다. 그는 지금 당장이라도 트렁크 가방 하나에 필요한 물건을 싸들고 떠날 수 있었다. 그는 한곳에 안착하지 못하고 정처 없이 떠도는 유목민적인 삶을 운명이라 여겼다.

남자는 명인의 표정을 살폈다. "이 가격대에 이 정도 소리도 안 나는 냉장고는 없어요. 정말 잘 사신 거라구요. 없어서 못 팝니다." 남자의 말은 다단계 판매회사의 설명원처럼 판단력을 마비시키는 종류의 믿음을 주었다. 아마도 보통 사람 같았으면 10만원이란 가격에 멀쩡히 돌아가는 냉장고를 샀다는 사실만으로도 감격했을 것이다. 남자는 기세를 몰아 문을 열며 말을 이었다. “문 여니까 소리 안 나죠? 보시다시피 작동은 아주 잘 돼요. 소리도 안에 뭐 좀 채워넣으면 좀 덜 할 거에요. 원래 빈 수레가 요란하잖아요. 3개월까지는 A/S해드리니까 걱정 접으십시요.” 명인은 걱정 같은 건 하지 않았다. 단지 자신감에 찬 남자의 어투가 거슬렸을 뿐이었다. 그런 종류의 감정이란 건 단 한 번의 더운 바람으로도 녹아 허물어지는 얼음성 같은 것이니까. 명인에게 냉장고는 잠시 사용했다 버리는 소모품에 불과했다. 오래도록 필요한 물건이라고 생각했다면 저런 고물을 사지도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적당히 사용하다 버리는 순간 안도감을 느낄 터였다.

남자가 떠나자 냉장고는 곧 터져버릴 시한폭탄처럼 소리를 높였다. 보름 전에 이사 온 이 원룸은 도로에서 100미터 이상 올라온 비탈에 위치해 지나치리만큼 조용했지만, 그는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냉장고 소리가 투명한 침묵을 깨뜨리고 나서야 그는 자신이 얼마나 깊은 정적 속에 빠져 살았나를 깨달았다. 혼자 산지 2년이 넘었다. 대화보다 침묵에 더 익숙해질 만도 한 시간이었다. TV라도 있으면 좀 나을까,라고 생각했지만 명인은 곧 고개를 저었다. 그는 노트북을 켰다. 음악 폴더에 있는 몇 개 안되는 mp3파일 가운데 하나를 클릭했다. 시끄러운 전자기타 소리가 터져 나왔다.

명인은 긴 소매 옷을 벗고 짧은 소매의 티셔츠로 갈아입었다. 오른쪽 팔의 피부는 햇볕에 말라비틀어지고 붙어버린 고무장갑처럼 쭈글쭈글했다. 그는 싱크대를 열어 안에 있는 것들을 모두 냉장고에 집어 넣었다. 생수 한 통, 설탕 한 봉지, 3분 카레 두 개, 딸기잼 한 병, 참치 통조림 네 개, 파 몇 뿌리, 양파 두개... 굳이 냉장고에 넣지 않아도 되는 것까지 모조리 넣어도 냉장고 안은 텅텅 비었다. 명인은 냉장고 안을 한참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장이라도 봐야겠다. 저 빈 냉장고를 채우려면. 명인은 다시 긴 소매의 옷을 입고 음악을 끄지 않은 채로 집을 나섰다. 다시 집으로 들어올 때 냉장고 소리만 들린다면 짜증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뭐든 익숙해지면 괜찮아질 것이다. 더 못 살 것 같던 삶도 이젠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듯이. 며칠째 비를 품은 구름이 드리운 하늘은 울음을 참는 사람의 얼굴 같았다. 명인은 언덕길을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여름 치곤 선선한 날씨였지만 긴 소매의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은 그밖에 없었다. 그는 언덕 아래 큰 길가와 마주하고 있는 슈퍼 안으로 들어갔다. 슈퍼는 한산했다. 돼지고기, 감자, 당근, 카레가루, 물, 우유, 맥주를 바구니에 담았다. 계산대의 여자는 물건의 바코드를 하나하나 찍으면서 명인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2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미선의 눈은 피곤 때문인지 원래 그런 건지 초승달처럼 아래로 축 쳐져 있었다.

“저기 삼호빌라에 사시죠? 이사 들어올 때 뵜어요. 제가 옆집 살아요.”

명인은 아무 대답 없이 돈을 건넸다. 미선은 오랜 독신생활로 실어증이라도 걸렸나보다고 생각했다. 30대 후반은 되어보이는데 지금 이 시간에 저렇게 장을 보는 걸 보면 보나마나 직장도 잘리고 이혼당해서 집안에 처박혀 있는 사람일 테지. 생긴 건 멀쩡한 데 왜 저러고 살까. 미선은 저렇게 평범하게 보이는 사람이 갑자기 살인범으로 돌변하기도 하는 거라고 생각하면서 조심하리라 다짐했다. 명인은 장본 것들이 담긴 봉투를 들고 천천히 비탈길을 올랐다. 얼굴을 빳빳이 들고 걸어도 알아보는 사람 하나 없었다. 새로운 장소에 이사를 온다는 건 그래서 좋았다.

흥겨운 기타리프에 맞춰 명인은 칼질을 했다. 감자를 큼직하게 썰어 물에 담가두었고, 전분이 빠지는 사이 당근과 양파를 썰었다. 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돼지고기, 당근, 감자, 양파를 넣어 볶다가 물을 붓고 한참을 끓였다. 여름날 뜨거운 요리를 해서 그런지 이마에서 땀이 처마 밑 빗물처럼 주르륵 흘러내렸다. 땀이 아니라 눈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올라오는 거품을 걷어낸 뒤 카레가루를 뿌리고 숟가락으로 휘휘 저었다. 맛을 본 다음 불을 껐다.

 

“아빠가 만들어준 카레라이스가 제일 맛있어.”

 

명인은 뒤를 돌아봤다. 아무도 없었다. 그는 표정 변화 없이 다시 냄비로 시선을 돌렸다.  냄비에 가득 담긴 카레를 보면서 혼자 먹기엔 너무 많은 거 같네,라고 생각했다.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명인의 휴대폰 주소록에 올라간 전화번호는 채 열 개가 안 되었기 때문에, 아는 번호에서 전화가 걸려오는 것 또한 드물었다. 2년여 전 그 날 휴대폰은 고철이 되었다. 병원에서 퇴원한 뒤 쓰던 번호 그대로 새 휴대폰을 장만했지만 1년이 지난 지금, 주소록은 10분의 1도 복구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먼저 연락하지 않으면 결코 그에게 연락하지 않을 사람이 그렇게 많았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명인은 스피커 볼륨을 줄이고 휴대폰을 받았다.

 

“냉장고 소리가 요란하네.”

“응. 오래된 거라서.”

“내가 저녁 사 주려고 했는데…. 뭐 부탁할 것도 있고해서 말야.”

2인용 식탁에 마주앉은 명인의 대학 동창 인혁은 카레라이스를 한 숟가락 떠먹으면서 말했다. 짧은 스포츠 머리에 뿔테안경을 쓴 인혁은 회색 줄무늬가 옅게 그려진 짧은 소매의 와이셔츠에 검은 양복바지를 입고 있었다. 명인은 퇴근시간대만 되면 마치 유니폼이나 되듯 비슷한 복장을 하고 가죽 서류가방을 오른 손에 든 젊은 직장인들이 언덕을 오르는 모습을 창문으로 바라보곤 했다. 그 때마다 똑같은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줄줄이 기계 속으로 들어가 소시지가 되어 나오는 영화 ‘더 월’이 생각나 오싹해졌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영원히 이 세계에 속하지 못하고 이방인으로 떠돌 것 같은 공포감이 그를 지배했다. 명인은 인혁을 곁눈질로 바라봤다. 하루동안의 피곤이 그의 겨드랑이에 땀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문학 소모임에서 예술에 대해 논했던 감성적인 청년의 모습은 사라지고, 이제 이 세계의 한 부품이 되어 당당하고도 서글프게 살아가는 남자만이 남아있었다. 부럽기도 했고 그렇지 않기도 했다.

“어차피 저녁 다 차려 놨던 거라… 차만 안 갖고 왔으면 같이 한 잔 했을 텐데…”

명인은 혼자서 맥주를 홀짝거리며 말했다. 인혁은 속도를 맞추려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어쩌면 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 할 말이 목에 가시처럼 걸려 그랬을 지도 모른다. 어딘지 모를 서먹함이 눈에 보이지 않는 전류처럼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대학졸업하고 난 뒤 처음인 거 같네.”

인혁의 말에 명인은 그래서 다행이야,라고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작년에 귀국한 담에 가끔 너 생각나서 전화해보면 안 받더라구.”

명인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인혁은 머쓱해져서 10평 남짓한 원룸을 둘러보았다.

“너 그 많던 책들은 다 어쨌어? 씨디랑 판도 꽤 모았었잖아.”

“그냥. 다 귀찮아져서.”

“나도 우리 아버지 부도나서 유학 접고 들어온 담엔 그런 거 못 사게 되더라.”

명인은 무표정하게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인혁은 직감적으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어차피 인혁에게도 큰 의미가 없는 질문이었다. 어정쩡한 침묵만이 벽이 되어 이들을 둘러쌌다. 냉장고 소리와 음악만이 뒤엉켜 이 공간에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창 밖엔 점점 어둠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왜 친구들하고는 연락 안하고 지내? 인준이는 지난해 결혼했다던데… 다들 네가 잠적했다고 그러더라.”

인혁은 친구들의 근황을 줄줄이 말했다. 누구는 애 돌잔치를 했고, 누구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누구는 여자친구와 헤어졌고, 누구는 돈 많은 여자를 물어 새 장가를 들었고, 누구는 연봉 1억을 주는 회사로 스카우트되어 갔고, 누구는 직장이 망해 놀고있다는 등등의 이야기. 명인은 흘려 들으면서 맥주만 마셨다. 언제부터인가 명인에게 친구란 별 의미가 없었다. 그는 쉽게 버릴 수 있는 물건만 사듯, 친구 또한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명인이 오랜만에 걸려온 인혁의 전화를 받고 저녁식사에 초대한 건, 단지 혼자 먹기엔 카레라이스의 양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명인에게 인혁은 저녁 한끼를 위한 액세서리에 불과했다. 이미 잊혀진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마치 연예인의 근황을 듣듯 이미 명인에게는 너무나도 멀고 이질적인 세계였다.

식사가 치워졌고 인혁은 가방을 무릎에 올려놓았다.

“오랜만에 만나서 이런 부탁해서 미안한데… 크게 부담되지 않는 걸로 하나만 부탁할게.”

인혁은 가방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면서 말했다. 경험이 많지 않은지 인혁의 얼굴은 첫 소개팅에 나선 대학생처럼 붉어졌다.

“다음달이면 보험료가 더 올라. 지금 들어두는 게 이익이야. 우리도 지금 나이에 미래를 대비하면서 살아야지.”

 

점점 멀어져가는 아내의 뒷모습이 보인다. 가정법원 앞이다. 내 손엔 방금 아내가 쥐어준 통장이 들려있다. “보험금 당신 몫 1억이야.” 아내의 목소리가 번개처럼 고막을 찢는다. 그 상처는 내내 아물지 않고 급기야는 고름이 되어 귀속을 흐른다. 그 뒤로 아내를 만난 일이 있었던가.

 

띵동띵동. 명인은 바닥에 누워있었다. 벨소리에 눈을 떴다. 친구를 어떻게 보냈는지 희미한 기억만 났다. 인혁이 다시 명인을 찾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마도 다른 친구들을 만나 명인이 상종 못할 인간으로 변했다고 술안주 삼아 뒷담화를 깔 지도 몰랐다. 한국 사회에서 보험이란 그런 것이다. 명인이 전에 보험을 들었던 것도 친구 부인의 부탁에서였다. 하지만 돈은 아무것도 돌려놓지 못했고, 오히려 자신을 증오하게 만들었다. 띵동띵동. 명인은 일어나면서 시간을 봤다. 밤 10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음악은 이미 끝났고 냉장고 소리만이 좁은 방안을 채우고 있었다. 문을 열었다. 옆 집에 산다던 슈퍼마켓 직원이었다.

“여기서 나는 소리 맞네요. 웅하고 계속 울려서… 무슨 소리죠?”

미선의 얼굴은 사막의 모래만큼이나 거칠었지만 목소리는 팔딱거리는 물고기처럼 발랄했다. 명인은 당황해서 머리만 긁적였다.

“제가 시험 준비를 하는 게 있어서요. 한 번 신경 쓰이니까 계속 신경 쓰여서...”

명인은 젊은 여성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이 나서 바로 문을 닫으면서 말했다.

“내일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 뭐 저런 게 다 있어?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면전에서 문을 쾅 닫아? 미선은 투덜대며 집으로 돌아와 냉장고를 열었다. 먹을 만한 게 없었다. 물을 꺼내 한 잔 따라 단숨에 마셨다. 빈 속에 마시는 물 한 잔이 변비에 좋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책상에 앉아 행정학에 집중하려고 했지만 웅~하고 벽을 타고 전해오는 소리가 자꾸 신경을 잡아 끌었다. 마치 고통을 참으며 신음하는 사람 소리 같아서 닭살마저 돋았다. 미선은 2년째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이었다. 오전 10시부터 6시간동안 슈퍼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나면 녹초가 되었지만 미선은 그 꿈을 포기할 수 없었다. 9급이라도 합격하면 큰 봉급은 받지는 못할 지라도 평생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고, 나름 괜찮은 남자와 결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30평대 아파트에서 애 둘 낳고, 가끔 해외여행도 하고, 일년에 한 번 정도는 명품 가방도 사고, 기념일에는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와인 정도는 딸 수 있겠지. 그건 그렇게 실현 불가능한 꿈이 아니었다. 지방대 행정학과를 졸업한 미선의 동기 중에는 이미 그렇게 살아가는 친구들이 몇 있었다. 미선은 귀에 솜을 틀어박고 책 속으로 파고들었다.

 

“소리 나는 것 때문에 A/S를 해드릴 수는 없죠. 말씀 드렸잖아요. 그 가격대에 그런 소리 안 나는 냉장고는 없다구요. 좀 비싼 걸 사시던가.”

수화기 너머의 남자는 전과 달리 퉁명스러웠다.

“그게 아니라 소리가 점점 커진다구요. 이젠 폭발할 것 같아서 불안합니다. 옆집에서 항의도 들어오구요.”

“아이 참내. 무슨 냉장고 소리가 옆집까지 들린다 그래요. 냉장고 안을 채우시라니까요. 작동이 멈추면 그 때 전화하세요.”

남자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명인은 창가로 다가가 문을 열고 담배를 물었다. 새벽 사이 비가 왔는지 아스팔트는 젖어있었다. 몰아치는 바람에 나뭇가지들은 몸을 비틀었고, 블라인드는 살을 부벼댔다. 담배에 불을 붙이니 갑자기 엉뚱하게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담배 한 대를 펴는 사이 다시 먹구름이 몰려왔고 바람이 세차게 불었고 비가 들이닥쳤다. 20대 처녀의 마음처럼 변덕스러운 날씨였다. 명인은 담배를 끄고 서둘러 창문을 닫았다.

 

창 너머에서 한 뭉치의 바람이 세차게 몸을 밀며 들어온다. 가스레인지에서 얌전히 타오르던 파란 불꽃은 거센 바람을 맞아 불길을 키우고, 그 옆에 놓여있던 신문지로 번쩍 뛰어오른다. 신문지를 모두 태운 불길은 양념통과 싱크대 나무를 먹어 삼키면서 몸뚱이를 부풀린다. 불덩이는 집안의 모든 것을 뱀의 혀처럼 낼름낼름 삼켜댄다.

 

그는 갑자기 떠오른 이미지에 깜짝 놀라 가스레인지를 쳐다봤다. 어제 만든 카레가 담긴 냄비가 얌전히 얹어져 있었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눈을 감고 바닥에 누웠다. 집안엔 다시 냉장고 소리만이 진동했다. 우우웅~. 마치 냉장고는 자신이 살아있다고 항변하는 것 같았다. 곧 죽을 운명이지만 지금은 이렇게 살아있다고 소리 치는 것 같았다. 명인은 냉장고가 마음에 들었지만, 그 소리만큼은 적응하기 힘들었다. 음악을 틀고 배가 고픈 것 같아 냄비로 다가갔다. 뚜껑을 여니 역한 냄새가 올라왔다. 그는 싱크대 개수구에 카레를 모두 버리고 물을 틀었다. 노란 얼룩들이 서서히 물에 씻겨 내려가면서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사.라.졌.다. 명인은 오래도록 그 광경을 바라보다 밖으로 뛰어나갔다.

슈퍼는 막 문을 열었는지 직원들은 물건을 진열하느라 바빴다. 명인은 쇼핑카트를 끌면서 닥치는 대로 식료품을 담았다. 박스를 들고 지나가던 20대 남자 직원이 의아한 눈길로 명인을 쳐다봤지만 곧 자기 갈 길을 갔다. 쇼핑카트가 먹을 걸로 넘치게 되자, 그 옛날 좋아하던 CD나 책을 사서 모았을 때처럼 뿌듯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먹어 사라지든 썩어 버리든, 짧은 시간 안에 무조건 없어지는 물건이 있다는 건 새로운 발견이었다.

“안녕하세요.” 미선은 차례차례 바코드를 찍으면서 의례적으로 인사를 했다. 명인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혼자 살면서 뭐이리 많이 살까. 무슨 잔치라도 하나. 명퇴라도 해서 모아둔 돈은 좀 있는 건가. 이상하게 미선은 명인에 대한 경계심이 조금 누그러졌다. 미선은 가끔 이 슈퍼에 있는 물건이 모두 내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냉장고와 창고 한 가득 먹을 것으로 채워넣고 하나씩 골라먹는 상상을 하면서 곧 터질 풍선 같은 행복감에 젖곤 했다.

명인은 사온 식품들이 배달오자 하나 둘 냉장고에 넣었다. 냉동실에는 만두, 떡갈비, 동그랑땡 등의 온갖 냉동식품이 들어갔고, 냉장실에는 우유, 주스, 요구르트, 각종 소스, 계란, 오이, 호박, 가지, 양배추 등의 야채가 칸칸이 메워졌다. 냉장고는 반 이상 찼다. 냉장고 문을 닫았다. 정말로 냉장고가 조용해졌다. 그는 냉장고 문을 다시 열었다 닫아보았다. 귀를 기울였다. 분명 소리의 크기가 반 이상 줄어들었다.

 

명인은 매일매일 장을 봐서 냉장고를 가득 채웠다. 더 이상 들어갈 공간이 없자 냉장고는 낮잠이나 자듯 잠잠해졌다. 명인은 시도 때도 없이 냉장고 문을 열고 하나하나씩 꺼내 요리를 해먹었다. 냉장고가 조금씩 비워질 때마다 희열을 느꼈지만, 그와 비례해서 냉장고 소리가 커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빈 만큼 사서 또다시 채워넣었다. 명인은 이 냉장고가 자신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냉장고가 멈추면 자신의 삶도 끝날 것 같았다. 물건을 비워낸다는 기쁨에 계속 꺼내 먹어댔지만, 냉장고를 살리기 위해 계속 무언가를 넣어줘야 했다.

채워넣고 비우고 채워넣고 비우는 행위를 반복할수록 명인의 몸은 점점 불어났다. 60 킬로그램대이던 몸무게는 이제 80킬로그램에 육박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점점 냉장고처럼 변해간다고 느꼈다.

미선은 아침마다 슈퍼에서 명인과 마주쳤다. 의례적으로 인사를 건넸고 명인은 고개만 까닥였다. 미선은 명인이 부러웠다. 직원 할인가를 적용 받으면서도 뭘 하나 사는데 망설일 수밖에 없는 자신의 삶이 초라해보였다. 옆집 남자는 작가나 프리렌서인가. 무슨 돈이 많아서 저렇게 매일 사대는 것일까. 난 하루하루 돈 버느라 고생하는데 저렇게 사는 것도 복이다 싶었다. 시험이 얼마 안 남았다. 이번엔 꼭 이 구질구질한 삶에서 탈출할 것이다. 시험에 붙으면 슈퍼에 보란듯이 사표를 내고, 옆집 아저씨처럼 냉장고에 와인과 맥주, 치즈, 튀김, 야채 등을 잔뜩 채워넣고 친구들을 불러 파티를 해야지.

 

  “안녕하세요.”

  미선은 뒤를 돌아봤다. 내일이 시험이라 조금 일찍 퇴근하고 들어가는 길이었다. 쓰레기봉투를 쥔 명인이 현관문 옆에 서 있었다. 웬 일이래. 나한테 인사를 다하구. 기분 좋은 일이 있나.

“아까 택배 왔는데 그 집 비어서 우리 집에 맡겨두고 갔어요.”

명인의 목소리는 냉장고처럼 갓 꺼낸 싱싱한 야채들처럼 아삭거렸다. 미선은 왠지 사람이 바뀐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매일매일 봐서 깨닫지 못했는데 날카롭던 첫인상은 온데간데 없고 명인은 어느새 후덕한 인상의 남자가 되어있었다.

“아. 네. 고맙습니다. 요즘은 많이 조용해졌어요.”

미선은 집에 들어가 택배를 뜯어봤다. 엄마가 보낸 생선과 고추장, 된장이었다. 냉장고에 넣으려고 문을 열었다. 칸칸마다 물이 흥건했다. 전기가 나갔었나. 집안 불이 모두 멀쩡히 잘 켜졌기 때문에 냉장고의 전기코드를 살펴봤다. 코드는 제대로 잘 꼽혀 있었다. 이 더운 여름에 이대로 놔뒀다가는 모두 상할 텐데… 내일 시험인데 내가 지금 냉장고 따위를 잡고 씨름하고 있어야하나.

띵동. 옆집 문이 열리자 온갖 음식들의 향기로운 냄새가 훅하고 새어나왔다. 잠시 미선은 달콤한 상상에 빠졌다. 일이 많아서 퇴근시간이 늦었다. 벨을 누르자 앞치마를 두른 남편이 문을 열면서 말한다. 어서 와. 집안에서는 갓 볶은 버섯과 싱그러운 야채에 버무린 레몬 소스 냄새가 진동한다. 42인치 LED TV에서는 저녁뉴스가 나오고 있고, 3인용 가죽 소파 앞에선 귀여운 아이가 장난감 자동차를 굴리고 있다. 활짝 핀 베고니아의 분홍빛이 베란다 너머에서 넘실댄다.

앞치마를 두른 명인의 몸이 반쯤 문틈을 비집고 나왔다. 미선은 비닐 봉투 두 개를 내밀었다.

“밤 늦게 죄송한데요. 저희 집 냉장고가 고장이 나서요. 하나는 냉동이고, 하나는 냉장인데… 냉장고 고칠 때까지만 잠깐 보관해 주실 수 없나요? 내일 바로 A/S 기사 오라고 할 게요.”

미선은 살짝 집안을 들여다보았다. 텅 비고 썰렁한 공간이었다. 남자 혼자 사는 집은 왜 다 저 모양일까. 미선은 저 집에 온기를 심어주고 싶은 욕망에 휩싸였다. 같이 쇼핑을 다니면서 멋진 가구들과 전자제품을 사서 채워 넣어주고 싶었다. 명인은 미선이 건네준 봉투를 받아 들면서 말했다.

“지금 요리중인데 괜찮으면 같이 하실래요?”

말을 꺼낸 명인 스스로도 놀랐다. 미선은 잠시 망설였지만 혼자 사는 남자 집에 들어갈 만큼 자신이 어리석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곧 문이 닫히자 미선은 현실로 돌아왔다. 책상에 앉아 앞 책꽂이에 꼽혀있는 경제학, 행정학, 행정법, 헌법, 국사, 영어 참고서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신데렐라의 요술마차처럼 저 책 한 권 한 권이 언젠가는 멋진 남자가 되고 TV가 되고 소파가 되고 30평대 아파트가 되고 최고급 와인이 될 것이었다.

미선의 봉투를 들고 냉장고로 걸어가는 명인의 발걸음은 쓸쓸했다. 모처럼 사람의 온기를 느끼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런 자신의 변화가 싫었다. 명인은 냉장고를 열었다. 냉장고에 빈 공간이 없었다. 명인은 식료품 몇 개를 꺼냈고 그 자리에 미선이 준 것을 끼워넣었다. 꺼낸 식료품들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물끄러미 쳐다봤다. 명인은 전자레인지에 소시지를 돌렸고, 양배추와 양상치와 오이를 씻어서 샐러드를 만들었고, 냄비에 삼계탕 팩을 담아 끓였다. 완성되는대로 먹고 또 먹었다. 명인은 터질 것처럼 부풀어오른 배를 바닥에 대고 누웠다. 포만감에 기분이 나른해졌다. 이대로 영원히 잠들어서 냉장고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음날이 되도 미선은 맡긴 것들을 찾아가지 않았지만 명인은 잊고 있었다. 여름의 낮은 길었지만, 정해진 시간이 되자 밤은 어김없이 빛을 집어삼켰다. 도둑고양이처럼 찾아온 밤에게선 낯선 소리가 났다. 명인은 갸우뚱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벽이었다. 그 벽 너머에서 누군가가 낮게 신음하고 있었다. 벽에 귀를 갖다댔다. 옆집 여자인 것 같았다. 희열에 떠는 소리인지 고통을 참는 소리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명인은 냉장고를 열었다. 먹을 거리를 꽤 많이 꺼냈다. 우웅~. 냉장고가 떨리면서 진동소리를 내자 신음소리는 모래 속에 파묻히듯 사라졌다. 명인은 또 요리를 해서 먹어대고 깊은 잠에 빠졌다.

 

병실에 누워있다. 아내는 내 손을 잡고 아무 말 없이 울기만 한다. 한시간, 아니 두시간이 지났을까. 흐느낌은 작은 물결처럼 공기를 흐르다가 점점 커다란 파도가 되어 밀려갔다 밀려온다. 어느새 집채 만한 파도가 휘몰아쳐 가슴팍을 찔렀다. 질식할 것 같아. 제발 그쳐줘,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입에선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눈을 뜨자마자 들려오는 냉장고 소리는 오히려 명인에게 안도감을 주었다. 하지만 희미하게 그 너머로 여자의 흐느낌이 들려왔다. 명인은 다시 벽에 귀를 갖다댔다. 옆집 여자가 울고 있었다. 명인은 몸서리치며 냉장고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미선이 맡긴 것까지 포함해 식료품들을 모두 꺼냈다. 냉장고가 터질 듯 포효하자 더 이상 여자의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명인은 요리도 하지 않고 하나 둘 입에 넣기 시작했다. 소스와 각종 장류는 싱크대에 버리고 수돗물을 틀었다. 깨끗이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명인은 오이와 양배추를 우적우적 씹어댔다.

명인은 커다란 입을 벌린 냉장고 앞에 섰다. 서늘한 입김이 눈물처럼 뿜어져나왔다. 들어와 어서. 명인은 냉장고의 칸과 서랍을 모두 빼냈다. 고개를 숙이고 몸을 둥글게 말면서 냉장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몸은 냉장고에 꼭 맞았다. 그는 엄마의 자궁 안에 들어온 것처럼 편안하다고 느꼈다. 손을 뻗어 냉장고의 문을 닫았다. 눈을 감았다. 가쁘고 차가운 숨을 내쉬던 냉장고는 이내 조용해졌다. 차가웠다. 차가워서 좋았다. 이 안에서는 활활 타오르는 불꽃마저 분노마저 슬픔마저 잠재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날의 일이 그의 뇌 속에서 순서대로 짜맞추어졌다. 그는 천천히 식어가면서 냉장고와 한 몸이 되었다.

 

초등학교 4학년인 현민이는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냉장고를 열어봤다. 아내가 매일 쪽지와 함께 간식거리를 냉장고안에 넣어두었기 때문이었다. 혼자 문을 따고 들어와 냉장고부터 열어 간식을 먹고 조금 쉰 뒤 학원에 가는 게 그 아이의 일과였다. 그 날 아침, 전날 회사회식 때문에 늦었던 아내는 늦잠을 잤고 현민이는 아침도 굶은 채 학교에 갔다. 나는 아내에게 심통을 부렸고, 아내는 내게 한 번쯤 아이의 아침을 차려줄 수 있는 거 아니냐고 했다. 맞벌이인데 왜 자기만 집안일을 하느냐고. 나는 미안했지만 괜히 지기 싫어서 나도 할 만큼 한다고 큰소리를 쳤다. 아침에 재활용쓰레기도 버렸고 평소 음식물쓰레기를 버리는 일이나 CD와 책 정리, 오디오나 온갖 전자기기의 점검, 심지어 그 힘든 세차까지 모두 내가 한다고 소리를 높였다. 아내는 자기가 좋아서 산 물건들만 정리하지 말고 진짜 집안일을 하라고 핀잔을 줬다. 그건 당신이 좋아하는 물건에 대한 애착과 면피성 돕기에 불과하다고. 아내는 그 날 간식을 냉장고에 넣지 못했을 것이다.

학교에서 돌아온 현민이는 라면을 끓이겠다고 가스불을 켜고 냄비를 올렸다. 그날 따라 바람이 많이 불었고 그 날 따라 가스레인지 옆 싱크대 위에 신문이 놓여있었다. 현민이는 TV를 틀어놓고 물이 끓기를 기다렸다가 아마도 깜박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나는 집이 타오르고 있다는 관리사무소의 전화를 받고 미친 듯이 차를 몰았다. 한가닥 희망을 품은 채 학원에 전화했지만 현민이는 오지 않았다고 했다. 아파트 앞에는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있었고 소방차는 이미 5층 높이의 베란다를 향해 물을 뿜어대고 있었다. 나는 무작정 아파트 안으로 돌진했다. 사람들의 외침이 아스라히 멀어져갔고, 매캐한 연기로 몽롱해졌지만, 계속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기억이 나지 않았다.

깼을 때는 병원이었다. 오른쪽 팔에 붕대가 감겨있었다. 달구워진 철문을 열겠다고 팔로 밀어서 생긴 상처였다. 부모님이 찾아와서 병간호를 했지만 아내의 모습은 거의 보지 못했다. 나를 바라보는 것 자체가 그녀에겐 고통이었을 것이다.

경찰이 찾아와서 30평대 아파트 안에 담겼던 그 모든 것이 한 줌의 재로 변해버렸다고 했다. 간혹 형태가 남아있는 것이 있었으나 그을려서 건져낼 만한 것은 없었다고. 나는 떠올렸다. 30년 넘게 모아온 책과 CD, 몇 년을 벌려 산 JBL 스피커, 어린시절 친구들에게 받아 작은 박스에 담아두었던 편지, 갓난아기때부터 지금까지 나와 아내의 환한 웃음이 고스란히 담긴 사진 앨범, 가끔씩 끄적인 글들과 영화 수천편이 들어있던 노트북, 일주일에 한 번씩 물을 주고 거름을 주면서 키워왔던 베고니아와 동양란, 만난 지 100일째 되던 날 처음으로 아내에게 선물했던 터키석 목걸이, 처음 입사했을 때 부모님께 선물로 받은 아르마니 넥타이, 현민이의 낙서가 담긴 3인용 가죽 소파, 아내와의 달콤했던 밤을 지켜주던 라텍스 매트리스… 단 한 순간에 불덩이는 나와 우리 가족의 모든 시간을, 추억을, 이야기를 삼켜버렸다. 그리고 그 모든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나의 전부인 현민이가, 그 아이가 그 날 작은 새가 되어 날아가버렸다. 아내와 나는 더 이상 새로운 삶을 만들어나갈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우리는 아파트를 헐 값에 정리하고 보험금을 나눠서 갈라섰다. 나는 직장을 그만뒀고, 아들 죽여 받은 보험금으로 살아간다는 비난이 듣기 싫어 더 이상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다.

 

시험이 끝난 날에는 친구들과 술을 마시느라, 다음날은 아르바이트를 하고 숙취 때문에 끙끙대며 신음하느라, 그 다음 날은 시험을 못 본 것 같아 펑펑 울어대느라, 또 그 다음날은 시험 본 것들을 맞춰보느라 미선은 냉장고를 잊었다. 그 다음날이 되서야 겨우 A/S센터에 전화를 했고, 또 그 다음날이 되서야 기사가 찾아왔다.

“고칠 수는 있는데 웬만하면 새 걸 사시죠. 꽤 오래된 건데… 견적이 10만원 가까이 나올 것 같아요.”

“그냥 고쳐주세요.”

미선은 샐쭉한 말투로 말했다. 누가 새 냉장고 좋은 거 몰라서 그러나. 새 냉장고, 새 가전제품, 새 가구는 시험에 붙고 새로운 가정이 생겨났을 때 장만할 미선의 꿈이었다. 기사가 부품을 가져와서 30분 동안 뚝딱거리자 냉장고가 미세한 소리와 함께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옆 집에 맡겨놓은 식품들이 생각났다.

미선은 옆 집 벨을 눌렀다. 아무 소리도 없었다. 그냥 돌아서려다가 며칠동안 슈퍼에서 명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는 게 생각이 나서 문고리를 돌려봤다. 문고리가 스르르 돌아갔다.

“아무도 안 계세요?”

미선은 문을 살짝 열고 고개를 들이밀었다. 방 안이 한 눈에 들어왔지만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고여있는 공기는 이 방에 한동안 사람이 살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 중앙에 떡 버티고 서 있는 고물 냉장고가 보였다. 냉장고는 소음하나 없이 조용했다. 옆면엔 난도질이나 당한 듯 여러 흠집이 나 있었고, 그 주변엔 케첩 같은 게 묻었는지 붉은 자국이 피처럼 흘러내려 굳어있었다. 손잡이의 노란칠은 닳아서 벗겨져 마치 화상환자의 피부 같았다. 미선은 천천히 다가가 냉장고 손잡이를 잡았다. 사람의 체온처럼 따듯했다. 냉장고가 속삭이는 듯 했다. 나를 열고 먹어…

냉장고 문을 열었다. 와르르. 각종 식료품들이 하늘의 신비로운 양식인 만나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 안엔 최고급 와인도 있었고, 프랑스산 까망베르 치즈도 있었고, 신선한 야채도 있었고, 각종 소스도 있었고, 달콤한 초콜릿도 있었고, 수제 소시지도 있었다.

미선은 싱크대 서랍에서 커다란 봉투들을 찾았다. 하나 둘 봉투 안에 식료품을 담기 시작했다. 봉투 다섯 개가 가득 차자 냉장고 문을 닫았다. 시험 붙으면 이 걸로 파티를 해야지. 학원 친구들도 부르고, 슈퍼 직원들도 부르고, 부모님도 올라오시라 하고… 속이 빈 냉장고에선 사람의 낮은 울음소리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미선은 가만히 냉장고에 귀를 댔다. 으으으… 소리를 듣다보니 알 수 없는 슬픔의 구름이 머릿속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미선은 냉장고의 전원 코드를 찾아 뽑아 버렸다.
  소리는 사라졌고, 환한 햇살이 구름을 몰아냈고,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간 듯 평화로워졌다. 미선은 식료품 봉투를 들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자신의 보금자리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