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이와호야
- 작성일 2005-12-02
- 좋아요 0
- 댓글수 0
- 조회수 315
호야를 처음 본건 집근처 슈퍼앞에 있던 인형뽑기 기계안에서였다.
당시 동전을 넣고 인형을 뽑는게 유행이였는데,
한창 인형뽑기에 물이오른 남편이 단 한번에 건져올린 인형이 호야였다.
호야는,기계주인이 손님을 끌기위한 미끼로 던져놓은,허접한 헝겁조각들로 만들어진
정체불명의 인형들과는 확연히 다른 아기 호랑이였다.
출산을 앞두고 있던 나는 아기에게 주는 첫번째 인형선물로 호야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침대옆 장식장안에서 우리 부부와 같이 아기를 기다릴수 있는 특권을 주었다.
그리고,유정이가 태어났다.
작은 공주님이였는데 어찌나 작던지 호야를 옆에 두면 유정이가 엄지공주처럼 보였다.
오늘은 얼마만큼 컸을까.....
오늘은 호야 배꼽까지 컸네.....
오늘은 드디어 호야 다리까지 컸네.....
그렇게 유정이옆에 호야를 같이 눕혀두고 인형보다 더 작은 아이가 하루빨리 크기만을
손꼽아 바랬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유정이가 호야를 쪼물락 거리기 시작했다.
우유를 먹으면서 한손으론 호야의 털을 쪼물락거리더니 이내 호야를 만져야지만
젖병의 우유를 다 먹어 치우고는 했다.
그렇게 유정이와 호야는 같은 단어가 되어갔다.
처음으로 호야가 수난을 겪게된건 유정이가 이유식을 시작하면서부터다.
앙증맞은 앞니 두개가 나면서 침을 많이도 흘렸는데, 그 침가득한 입으로 호야의
꼬리를 빨아대기 시작한것이다.
침냄새와 우유냄새가 뒤섞여 호야 꼬리에서는 늘 퀘퀘한 냄새가 가시질 않았다.
세탁을 아무리 자주해도 그 이상야릇한 냄새는 없어지질 않았는데,
문제는 언제부터인가 유정이가 누군가를 만나면 으레 인사로 호야꼬리를 내미는데
있었다.
그 퀘퀘한 냄새를 함께 공유해야만,또 반드시 향기로운 냄새인양 웃어주어야만
유정이는 만족했다.
아군과 적군을 가리는 유정이만의 테스트였던것이다.
냄새도 냄새이거니와 위생상 안좋을듯해서 어느날 아이가 낮잠을 자는동안에
가위로 냉정하게 단한번의 망설임도 없이 호야의 꼬리를 잘라버렸다.
당시 첫돌이 되기 전이였으니, 인형꼬리의 실종에 대해선 뭐...야옹이나 멍멍이가
물어갔다고 둘러대면 충분했다.
유정이가 잠에서 깨어 몇분간 울음을 터뜨리긴 했지만 야옹이가 물어간 호야의 꼬리에
대해선 이내 포기한듯했다.
그리고.....
가죽코의 수난시대가 열렸다.
호야는 주홍빛깔을 띤 아기호랑이 인형이였다.
몸통에는 조금 어설픈 검은 줄무늬가 대여섯개 그려져 있었고,
얼굴에는 유정이 주먹만한 검은 가죽으로 덧댄 앙증맞은 코가 있었으며,
얼굴 귀 뒤로는 하얀 갈기털이 소복소복 나있었다.
호야 몸통의 반만한 꼬리는 이미 냉정한 엄마에 의해 사라진지 오래였고,
호야의 앙증맞은 코는 가죽이 벗겨져 하얀 속살을 조금씩 내비추고 있었다.
정말이지.....어느샌가 아주 조금, 조금씩 하얀속살을 내비추더니 호야의 검은 가죽코는
영원히 사라지게 되었다.
호야가 분명 호랑이임을 말해주던, 대여섯개 있던 검은 줄무늬도 희미해져갔고,
소복소복 하얀 갈기털도 털갈이 하는 오리마냥 듬성듬성 우스운 모양이 되어갔다.
호야가 정체불명의 흐느적거리는 빛바랜 주홍 인형으로 변해갈즈음,
유정이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호야와 유정이를 동일시하게 되었다.
기고...서고...걷고...뛰어다니면서 언제나 호야를 손에쥐고 놓지않았던 유정이가
하루는 밖에서 호야를 잃어버렸는데 모르는 아파트 이웃이 주워서 방송을 해줄정도로
유정이와 호야는 말 그대로 누구나 인정하는 콤비였다.
유정이와 호야는 생일파티의 초를 같이 껐고,
유정이와 호야는 병원에서 서로있어 아프지 않은 주사를 맞았고,
유정이와 호야는 같은 이불에서 같은 배게를 베고 잤으며,
유정이와 호야는 어린이집을 함께 입학했다.
어느새 호야보다 엄청 커버린 유정이.
어느새 너덜너덜 걸레 조각이 되어버린 호야.
아이는 자랐고,호야는 늙어갔다.
다른 어떤 화려하고 좋은 인형을 사주어도 잠시 호기심만 보일뿐,
호야에 대한 유정이의 사랑은 변함이 없었다.
그것은 단지 인형에 대한 집착은 절대 아니였다.
호야는 유정이의 친구이며, 동생이자,엄마의 부재시 든든한 보호자였다.
오늘도 어김없이 아침에 일어나 호야와 양치를 하고 세수를 하고 밥을 먹고
어린이집 가방에 조심스레 인형을 넣는 유정이를 보면서 그들의 특별한 우정과 사랑에
대해서 감탄한다.
유정이와 호야.....
그들은 지금 아주 특별한 사랑을 나누고 있다.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