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종닭 자연 부화 도전기
- 작성일 2006-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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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아리를 품으려면 우선 어미닭은 가슴털을 뽑아낸다.
물론 뽑은 털로 알을 감싸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어미 닭의 체온을 알에게 고스란히 전달하기 위함도 있다.
그래서 알 품는 닭의 가슴을 보면 빨간 맨살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또 어미닭은 알을 품기 시작하여 품는 21일 동안 어쩌다 한번씩 둥지에서 내려와 물 한 모금, 먹이 한 톨 먹을 뿐 나머지 시간은 온전히 알을 부화시키기 위한 정성에 다 쓴다.
설사 빗물이 들이친다 하여도 알들의 체온을 유지하게 위해 어미닭은 꼼짝하지 않는다.
차라리 포유동물처럼 태속에 제 새끼를 길러 낸다면 태아와 모체 모두를 위해서, 돌아 다니며 먹고 싶은것 찾아 먹고,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 있다지만 닭(조류)들은 사정이 사뭇 다르다.
이런 면에서 닭(조류)은 포유류 보다 더 애틋한 모성애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21일 동안 어미닭이 알을 품었다 할지라도 알에서 깨어나는 부화는 순전히 병아리 혼자 감당해야 할 몫이다.
부화 과정에 혼자 알을 깨고 나오는 과정은 세상의 빛을 볼 수 있느냐 없느냐의 생사가 달린경계선이다.
껍질 깨는 것이 힘에 겨워 보인다고 해서 어미닭의 부리로 대신 깨어 주는 법은 없다.
설사 어미를 대신해서 사람이 도와 준다해도 그 병아리는 세상에 혼자 살아갈 능력은 없다.
태어나 생존경쟁이 가능할 지 여부의 시험대는 오묘한 계란껍질의 공학적 구조가 대신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부화에 성공하면 어미닭의 모성애는 계속된다.
병아리를 데리고 다니며 두엄속을 발로 헤집어 병아리를 위한 먹잇감을 찾아 주고, 행여 매같은 맹금류나 산짐승이 나타나면 온 몸 던져 제새끼를 보호하고 길러내는 것이 어떤 동물의 모성애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무실에는 실험용으로 쓰는 토종닭 몇마리가 있다.
실험용 닭이라지만 가끔 한번씩 피를 뽑아 적혈구를 분리해 내고, 이 적혈구를 이용하여 혈청중에 항체 검사하는만 주로 사용될 뿐 무슨 병원균 접종 시험이라던가 하는 독성 시험에는 사용되지 않는다.
토종닭이라는 것이 유전적으로 따진다면 한 때 모든것 제쳐두고 개량에만 힘을 쓴 나머지,
유전자원 관리를 소홀히 한 암흑기가 있어 유전자가 섞이고 뒤바뀐 기간이 있었다.
이제와서 그 옛날 고유의 우리 토종닭으로 완벽하게 복원 또는 재현해 내기에는 한계가 있겠지만 어쨓거나 지금 복원된 토종닭에 대한 표현형질(외관 외모)로 굳이 살펴 본다면 갈색 흑색 등의 털색은 가져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보다 구별의 중요한 점은 다리의 색깔이다.
보통의 닭이라면 주로 노란색을 다리를 가지고 있는데 비해 토종닭은 연 초록의 푸르스름한 색깔을 가진다는 것이 일반 닭과 가장 다른 점이다.
봄이 되고 해가 길어지자 닭들에서 알 낳는 횟수가 늘어났다.
알을 낳을 때 마다 꺼 내오니 알이 하나 둘씩 제법 그 숫자가 늘어났다.
자연부화를 해 볼까?
자연부화라는 것은 1970년대 산업화 과정에서 대규모의 공장식 부화기로 바뀌면서 차츰 사라졌다.
그리고 부화업은 이제 우리 산업의 한 영역을 당당하게 차지하면서 일년 사시사철 동안 천문학적인 숫자의 어미 없는 병아리를 생산하고 있다.
그런 생물산업이 기계화된 산업화의 시간이 오래여서 일까?
그 예전에는 닭장의 둥지에 담긴 계란을 보면 성숙한 닭들이 서로 품으려고 텃세 싸움까지 하면서 알에 대한 집착력을 가졌었는데, 요즘 어미닭은 자기가 낳은 알을 모으는 습성도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모여진 그 알을 품으려는 욕심도 없어 진지가 꽤 오래된 듯 싶다.
어쨓든 장난 삼아, 진심 삼아 병아리 자연부화에 도전했다.
임시로 만든 스치로폴 박스를 둥지로 삼아 따뜻한 보온 덮개를 깔고, 또 그위에 깔짚까지 깔았다.
그리고 모아둔 계란 열 두어개를 넣어서 닭장에 넣고 지켜보기로 했다.
첫날,
'왠 이상한 상자가 새로 들어 왔지?' 라는 뜻인지 별반 관심이 없는듯 하다.
'그래...낯선 물건이 들어왔으니 경계할 수도 있겠지...'
다음날,
새로 들어온 흰색 둥지에 호기심이 동한 어미 닭들이 쿡 쪼아 본다.
'어라? 하나도 안아프네?... '
'쪼아서 뜯겨 나오는 스치로폴 조각, 먹을 수는 없지만 재미는 있네?' 라는 듯 장난에 열중이다.
닭장 안은 마치 봄 눈 온것 처럼 허옇게 스치로폴 눈이 날리고 있었다.
'그래~ 알보다는 아직 스치로폴에 대한 호기심이 더 많을 수도 있지.'
'보온 덮개에 깔려 있는 알을 보면 관심을 갖고 품을 수 있을꺼야...'
셋쨋날,
스치로폴 둥지 두쪽 면은 이미 다 쪼아졌고, 이제는 보온덮개 마저 물어 뜯어 닭장이 난리가 아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계란도 두어개 깨져 있었다.
닭들의 습성이기도 하지만 가끔 계란을 보면 쪼아 깨트린 다음 알을 먹는 족속도 있다.
'휴~ '
겉으로 보아서는 멀쩡한 토종닭임이 확실한데 행동 거지로 보면 영 ~아닌것 같다.
닭들에게도 어김없이 기계문명이 작동한 혼란기에 피가 섞여 새로 태어난 탓인지, 아니면 수천대를 부화기에 의존해서 태어 난 탓에 모성 본능을 잊어 버린 것인지 나의 토종닭 자연부화 시도는 보기 좋게 실패하고 말았다.
어릴 적 하늘에서 맴돌던 매를 보곤 어미닭이 '꼬꼬꼬~~'거리면서 병아리를 숨기고 여차하면 매와도 일전불사 겨룰 태세였던 어미 닭이 생각난다.
나를 길러낸, 아니 우리를 길러낸 그시절의 어머니들 모두도 그랬지...
5~6남매 길러내시며, 농삿일에 부엌일에 그리고 시어른 봉양까지 하룻 동안 한치의 쉴 시간도 없었을 것 같음에도 밥을 하다가도, 밭을 매다가도, 이십리밖에 장 보러 가다가도 아이가 울면 젖 물려 키웠고 장성한 아이들이 하나같이 속을 썩여도 모진 희생과 억척스러움으로 올곧게 길러 내셨다.
똑 같은 아이를 기르고 있는 지금의 나는 어머니로써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일까?
바쁘고 직장에 다닌 다는 이유로 아이들은 소 젖을 먹여 키웠고, 성장하는 중에도 아이들과 얘기하며 돌 봐 주는 시간은 점점 줄어 들고, 아이들이 하는 행동에는 점점 이해하지 못할 것들이 늘어나고, 아이는 아이데로 어른은 어른 데로 스트레스가 늘어 나는것 같은데 '과연 나는 내 어머니의 희생정신과 모성애에 관한 유전을 제대로 이어 받았을까? '
'나의 아이들이 장성하면 그 아이들의 가슴은 우리와 또 무엇이 달라질까?' 라는 걱정과 반성을 해본다.
우리가 사는 지금은 어느때 보다 경쟁적인 생활이고, 더 빨리 변화하는 곳에 살고 있다.
바쁜다는 직장, 디지털이라는 문명의 이기품들은 혹시 우리를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게 만드는 부화기의 한 종류는 아닐까?
그리고 나는 그 속에 들어가 21일 동안 기계가 뿜어내는 37도의 온기 속에서 이리 저리 굴려지다 깬 초보 닭이고 , 우리 아이들은 아직 부화기 속에 담겨 부화를 기다리는 계란은 아닐까?
오늘 저 어미닭이 제 둥지를 물어 뜯고 마침내 제 알마져 깨어 버리는 잃어 버린 모성애를 보면서, 마치 부화기에서 태어난 듯한 내 자신과 지금 아무것도 모르고 부화기 속에 있는 아이들 모습을 겹쳐 보면서 온몸에 소름을 돋구어 본다.
오늘 저녁엔 태권도를 들러 두어군대 학원을 다녀오는 작은 아이에겐 사랑한다고 말해야 겠다.
또 오늘도 야간 학원에서 공부하다 밤늦게 지친 몸으로 들어올 딸아이에게는 뭐라고 말할까?
역시 사랑한다고 해야겠다.
그리고 잘 자라주어서 고맙다고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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