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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 노예

  • 작성일 2006-07-23
  • 조회수 320

 

숫자 노예


정태혁

  

  우리는 아라비아 숫자들과 함께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니, 숫자들의 지배아래 살고 있다고 해야 맞을 것 이다.

  대한민국에 태어난 이상, 우선 열 세 자리의 숫자를 부여 받게 되어있다. 바로, 주민등록 번호다. 이 열세자리의 숫자는 그 사람이 죽을 때까지 따라다니게 되는데 그 숫자들은 변화가 없을뿐더러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는 숫자들의 집합체다. 한마디로 이 열 세 자리의 숫자들은 한 인간을 구성하는 숫자라고 볼 수 있다. 즉, 이 숫자들만으로도 나의 생년월일을 알 수 있고 권력집단에서는 손쉽게 주민 번호만 입력하면, 나의 모든 신상정보를 줄줄이 비엔나로 꺼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주민 등록 번호 말고도, 나는 숫자들과 끊임없이 접촉하며 살아 왔다.

  

  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부여 받은 숫자들은 즉, 번호들은 매년 조금씩 바뀌며 대학교 졸업을 앞둔 지금 까지 따라 다닌다. 중, 고등학교에서는 이름 보다 숫자로 불리는 날들이 많았고 이 숫자들은 항상 날 괴롭혔다. 수학에 특히 쥐약이라 수학시간 마다 날짜가 내 번호와 조금만 연관이 있어도 두려움에 떨었다. 수학 선생님이 오늘이 며칠이지? 하고 물으면 오금이 저릿저릿 했다. 중학교 과학시간은 더했다. 과학 선생님은 날짜 부르기가 식상했던지 교과서 페이지로 공격을 했다. 초식의 이름은 확인학습이었다. 이 초식은 하나의 취약점이 있는데 그것은 습관이다. 한 번 손에 익숙해 진 교과서는 항상 높은 확률로 내 번호가 찍힌 페이지가 펼쳐지곤 했다. 물론, 책은 양 면이기 때문에 펼쳐진 페이지들 중에서도 확률은 반 반 이었지만 그 확률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일반 적으로 오른쪽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이 숫자들은 군대에서도 날 괴롭혔다. 유일하게 평생 동안 주민등록번호와 떨어져 살 수 있는 게 군대다. 군인은 임시 적으로 주민등록 말소 상태이기 때문에 군번을 부여 받는다. 군대에서는 군번 외에도 총번을 부여 받는데 이 총번은 총에 찍힌 여섯 자리 일련번호를 말한다. 군인들은 각자 개인 총을 보유하고 있고 그 총에 찍힌 여섯 자리 일련번호를 외우게 된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특히, 간부들이 자신의 총을 건드렸을 때 총번을 관등성명과 함께 외치기 때문이다. 보통, 총 닦을 때 이런 상황이 많이 발생한다. 이등병 때인가 검열 나온 간부가 열심히 총을 닦고 있을 때, 내 총을 잡았는데 총번이 생각나지를 않아 곤혹을 치른 적이 있다.

  이렇게 숫자와의 싸움은 군 제대와 동시에 끝나는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군 제대 후, 학교에 복학을 하고 사회에 나가기가 참 힘이 듦을 알게 된 나는 어느 날, 매력적인 숫자 놀음을 알게 되었다. 로또였다. 로또를 처음 접한 나는 이 훌륭한 시스템에 감동을 먹었다. 주택 복권 같이 처음부터 번호가 찍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직접 숫자를 고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숫자를 자신이 선택해서 인생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한 세트 당 총 여섯 개 조의 숫자를 고를 수 있었는데 처음에는 머리를 이리 굴리고 저리 굴려 번호를 만들어 내었다. 하지만, 그 번호들의 조합이라는 것이 고작 휴대폰 전화 번호, 중학교 때 내 번호, 주민등록 번호, 군번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결국, 그 숫자들에게서 벗어나지 못함이었다.

  화면에는 로또 번호가 적힌 공이 돌아가고, 나는 화면과 손에 꼭 쥔 번호표를 번갈아 보며 침을 삼켰다. 결과는 의외로 좋아서 여섯 조 중에 세 조가 맞았다. 첫 시도에 성공한 이후, 매주 로또를 샀다. 처음에는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보며 숫자를 찍었지만 결과는 늘 제자리걸음이었고 주가 거듭될수록 숫자 만들기 귀찮아 대충 찍게 되었다. 이제는 찍는 것도 귀찮아 로또 매장에 있는 컴퓨터에 맡겨 버린다. 기대에 찬 심리로 시간 맞춰 화면을 보지도 않는다. 결과가 나오면 대충 인터넷으로 확인 할 뿐이다. 혹시나가 역시나로 바뀌어 가고, 나는 또 다시 숫자의 지배 아래 살게 된 것이다. 물론, 안사면 된다. 하지만, 인간 마음이란 것이 그런가. 만약, 한 주 안 샀는데 그 숫자가 맞으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 때문에라도 꼭 사게 된다.

  

  어쩌면, 이 숫자들을 피하기 위해 글을 쓰는지도 모른다. 숫자들은 언제나 내 운명을 결정지어 왔으며 나를 옭매어 왔으니. 하지만, 글은 그렇지 않다. 적어도 글 안에서는 주민등록번호가 없는 인물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앞으로도 난, 숫자들과 더불어 혹은 숫자의 발아래 살게 될 것이다. 매주 토요일이면 어김없이 혹시나 의 마음으로 로또 속의 숫자에 운명을 걸어 볼 것이고 운전 면허증이나 다른 자격증을 따게 된다면 거기에 맞춰 숫자들을 부여 받을 것이고 몇 번의 휴대폰 번호를 바꿀 것 이다. 마지막으로 죽을 때까지 숫자가 적힌 돈이라는 쇳덩어리와 종이 조까리로 먹고 살 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