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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

  • 작성일 2006-08-24
  • 조회수 195


성남 사는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인천에 사는 친구들이 복날이라고 음식을 준비해서 만나기로 했는데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난 멀기도 하고 그렇다고 친구들 신세 지는 것 같아서 가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했다. 그러자 친구가 어차피 자기 차로 혼자 가야하고 성남서 우리 집까지는 그리 멀지 않으니 같이 가자고 했다.

내가 이 말을 새삼스럽게 하는 이유는 이렇게 누구에게나 작은 관심이 그날의 하루 또는 인생에서 또 다른 의미를 만들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이다. 친구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나는 이 더운 날씨에 그냥 집에서 아무 의미 없는 날을 보냈을 것이다. 그냥 가만히 있었도 땀이 줄줄이 흐르는데 무더운 날 음식준비까지 해가며 자리마련해준 인천 사는 친구들의 마음이 참 고맙다.


처음 인천 아암도 해상공원을 찾았을 때, 우리는 잘못 찾아왔나 해서 그 주변을 몇 바퀴나 돌아다녔다. 아암도 라고해서 나는 바다 가운데 있는 줄 알았다. 아무리 봐도 아스팔트 큰길가 철책으로 둘로 쌓인 그 작은 섬이 아암도 라고는 믿기지가 않았다. 내리 쬐이는 태양 아래 시커먼 갯펄만 드러나 있었다. 황당한 마음으로 실망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러나 그 실망스런 곳이 몇 시간 후에는 잊지 못할 추억의 공간이 될 거라곤 그때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이래서 사람 사는 일이라는 게- 또 만남이라는 게 이렇게 신비하다는 걸 또 실감하는 하루였다. 해상공원에는 소나무 그늘 애래 평상이 놓여있다. 우리는 거기다가 자리를 펴고 무더운 여름 복날 하루를 시원하게 보냈다.


오후가 되자 황폐해 보이던 아암도 앞 갯펄로 바닷물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밀물 따라 바람도 적당하게 더위를 식혀 주었고. 나는 아암도 앞으로 바닷물이 밀려드는 걸 바라보며 바위 위에 앉았다 일어섰다 하며 누구 좀 와서 같이 보았으면 했다. 믿기지 않겠지만 그 곳 제일 높은 바위 위에 아름다운 이야기가 고이 간직되어 있었다.

바위 위에 시멘트를 바르고 글자를 새긴 거다. 세월의 흔적으로 년 도수 한 귀퉁이가 떨어져 나가기는 했지만 아주 선명하게.

“대나무와 같이 언제나 굳게- 1974년 7월 -일 현아와 현주---” (안 믿어진다고?) 그러나 사실이다. 둘은 삼십년 전 스무 살 꽃띠 시절에 곧고 푸른 대나무와 같이 언제나 변치 말자는 우정을 약속 했었다. 둘은 그곳서 노래도 부르고 사진도 찍고---

친구는 진흙 팩 하고 싶다고 뻘 속으로 바지 걷고 들어가서 헤매고. 나도 그러고 싶었는데, 그 전날 무릎을 다치는 바람에 못 들어가고. 바닷물이 들어오기 전까지 바위 앞 뻘 위에 놓여 있는 쪽배에서 혼자 놀았다. 바위에 않아 있는데 아이들 둘이 다가 왔다. 아이들에게 말을 붙여 보았다. 두 아이는 서로 눈치를 보면서 어색하게 말을 꺼냈다. 그들은 아암 마을에 살며 초등 4학년으로 학교도 같은 학교를 다니는데 자주는 못 만나고 가끔 둘이 바다에 나와서 논다고 했다. 이름을 물어보니까 승무와 범생 이라고 하는데 진짜 이름은 아니고 저희들끼리 지어서 부르는 이름이라고 하였다.  

언뜻 나의 유년시절이 생각났다. 나도 고만할 때 뒷집 친구하고 이름을 지어서 불렀었다. “현주와 현아”라고. 다 커서는 현주는 고향 쪽 병원에 간호사로 있었고. 나는 서울서 직장 생활을 했다. 우리 둘은 혼인하기 전까지 그 이름으로 서로 편지도 주고받고 했다. 어느 날은 현주가 왠 낮선 총각처럼 글씨체를 달리해서 데이트 신청하는 것처럼 보내기도 하고. 나 역시도 그렇게 하면서. 우리 둘은 결혼도 같은 날 했다. 현주는 지금 대전서 남매를 두고 살고 있는데 자주 만나지는 못하고 있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승무와 범생 이에게 바위에 새겨 놓은 글자를 읽어보라고 하였다. 대나무와 같이 언제나 푸르고 곧게 어른이 되어서도 그 우정 변하지 말고 지금을 잊지 말라고 해석도 붙여주었다.


진짜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어 보았지만 아이들은 끝까지 말해주지 않았다. 승무가 좀 더 호기심이 많고 개구쟁이인데 반해 범생이는 이름처럼 모범생이었다. 바닷물이 차오르자 쪽배가 떠올랐다. 범생이 쪽배를 가르키며 승무는 저 쪽배를 타고 멀리 바다 까지 나갔다가 오기도 하는 괴짜라고 하였다. 아이들이 저희들이 끌어 준다고 쪽배를 타보라는데 난 무서워서 발만 올려놓다가 말았다. 내가 진짜로 쪽배에 오르면 떠내려가지 않게 매어 놓은 밧줄을 끊으려고 했다며 저들끼리 깔깔거리며 재미있어 하였다. 참 명랑한 아이들이였다. 밀려드는 바닷물을 무서워하지도 않고 쪽배를 한참 동안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놀았다. 그렇게 같이 놀던 아이들이 한곳서 오래 노니까 재미가 없다며 다른 쪽으로 가보자며 자리를 옮기려 하였다. 나는 다른 곳으로 가려는 아이들에게 방학 숙제하는 것이며 일기 쓰는 것을 어떻게 하라고 설명해 주었다. 아이들이 심각한 얼굴로 귀를 기울이고 있다.

-아줌마 이야기도 꼭 써!- 알았지?

심각하던 모습은 금방 사라지고 싱글싱글 거리면서 대답을 크게 하였다. 아이들은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저녁때가 되자 낙조로 붉어진 바닷물에 금빛 물비늘이 길을 내고- 멀리 어선이 하늘과 가까이 닿아 그림 같았다. 간혹 갈매기가 바다를 날다 건너편 자유경제구역 쪽으로 날아가고. 하늘에는 수시로 글라이더형 경비행기가 소리도 요란스럽게 비행을 하고 있었다. 지는 해를 어깨 위로 또는 머리 위에 두고 사진도 찍었다.

바다와 나 사이, 아암도와 나 사이, 친구들과 나 사이로 어둠이 스며들고 잊지 못할 아암 해상공원에서의 하루가 그렇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붉은 가로등불이 눈을 떴다 감았다 할 때 우리는 자리를 걷고 일어났다. 

그 날의 친구들 마음은 모두다 그곳에서 아름다웠으리라고 본다. 아름다운 마음으로 잠시라도 같이 자리해준 꼬마 친구들 고맙다.

우리 시대의 신화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삶을 깊이 있게 사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러나 삶을 깊이 있게 살든 안 살던 순간순간이 다 소중한 것이다. 그대들 모두 다 나와 더불어 신화의 주인공이니 모두 축복 받는 날들이 되길 바란다. 

몇 년 후면 아암도가 그날의 풍경하고는 또 다른 환경으로 변하더라도 우리들의 만남이 이루어졌던 그곳을 기억하고 잊지 말자.

-그곳 바위에 새겨놓은 글귀처럼- 푸른 대나무와 같이 언제나 굳게-

 

 


아암(兒岩)도는 섬 이름으로 보아 아주 작은 돌섬이라는 뜻을 가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암도의 의미하고는 좀 다르지만 우리나라 시문학사에서도 조선시대 아암(兒菴) 이라는 승려시인이 있었다. 그를 기억하고 있던 나는 아암도라는 섬 이름에 처음 참 정감이 가기도 했다. 아암도는 처음 송도 앞 바다에 있는 작은 섬이었다. 인천시의 송도 유원지 개발화를 위해 부근을 매립해서 지금은 육지화 된 곳이다. 작은 섬이지만 지리학적으로도 중요해서 연구논문으로도 언급되어 있기도 하다.

인천시 핵심트라이앵글 계획안에 의해 아암도는 멀지 않아 또 다른 풍경으로 바뀔 것이다. [첨단지식기반산업*국제업무] 송도지구- 우리들이 친구들과의 추억을 만들었던 그 자리의 앞으로 영종도와 송도를 잇는 세계 5위 안에 드는 해상 사장교가 건설될 예정이다. 인천시는 일반인들에게 공모해서 인천대교라는 이름까지 지어 놓고 있다. 또한 아암도 길 건너편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던 그곳에 대형 아쿠아리움이 건립될 예정이다.


앞으로 그곳은 제2 경인고속도로와 제3 경인고속도로 그리고 서해안 고속도로를 이어- 영종도 신공항까지 잇는 교통 요지로 또한 최첨단 관련 다국적 기업의 아․태 지역 본부가 될 것이다.

친구와 잠깐 그 입구까지 가본 아암도 건너편 인천경제자유구역 건설현장이 생각난다. 그곳이 바로 최첨단정보화도시 건설 현장이었다. 60층 이상이 되는 초고층 빌딩들과 아파트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그날 아암도에서 바라 본 그곳은 바다 가운데 거대한 도시가 하늘을 오르는 듯했다.


그에 반해 아암도의 갯펄은 지형변화로 인해 시들어 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암도 연구 논문에 의하면 그곳은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하고 갯펄에 먹이가 풍부해서 많은 바다 생물들과 온갖 바다 새들이 먹이를 찾던 곳 이라고 했다. 그러나 내가 본 그 개펄은 이미 숨 쉬기를 포기한 것처럼 보였다. 바다 새들도 그리 많지 않았다. 새들도 개발정책에 밀려 모두 떠난 것일까? 아니면 그들도 새로 들어서는 해상도시 부근으로 몰려 간 것일까?

간혹 서너 마리씩 또 한 두 마리씩 아암 해상공원 주변을 날다가 건너편 높은 빌딩들로 번쩍거리는 자유경제구역 쪽으로 날아갔다.



아암도는 작지만 얽힌 사연이 많은 섬이다.

그 중에는 아주 슬픈 사연이 담겨 있는 곳이기도 하다.

설마 섬이었을까 싶을 정도의 그곳은 매립 이전에는 송도유원지 후문에서 5백 여 미터 떨어진 개펄 위에 두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돌다리가 설치돼 있었다 한다. 바닷물이 빠지면 이 돌다리로 인해 홍해를 연상케 하는 길이 열렸고, 송도유원지를 찾은 시민들은 마치 피난민의 행렬처럼 줄지어 아암도로 향했다한다. 그리곤 이 손바닥만한 섬에 올라앉아 바다의 정취를 만끽했단다.

멀리서 바라보면 바닷물이 빠진 개펄 위에 바위가 소나무를 이고 있는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으며. 면적 1천8백32평에 불과한 작은 바위섬, 크기가 너무 작아서일까? 인천시가 발간하는 안내 책자에서조차 섬 취급을 받지 못하고 외면당했던 섬이다. 내가  본 지금의 아암도의 모습은 그때와 별로 달라지지 않은 모습니다. 우리가 앉아 있던 소나무 아래가 바로 그 소나무 인 듯하다. 그곳은 정말 바위가 소나무를 이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왜 똥섬이라고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곳이 고향인 사람들은 아암도를 '똥섬'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지금은 잊혀 진 작은 섬, 그 섬에서 운명을 달리한 한 젊은 장애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그의 이름은 장애인 노점상 이덕인(남, 당시 29세)이다.

 

--"그날은 몹시도 추운 겨울날이었다. 전국노점상연합(이하 전노련)' 간부였던 우리는 '탑골공원'에서 집회를 마치고 삼삼오오 근처 식당에서 해장국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있었다. 다들 인천의 '아암도'에 망루를 세우고 농성 중인 노점상들이 걱정이 되어서인지 그날따라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박고 조용히 밥을 먹고 있었다.

" 정말 누구 하나 죽어 나가야지 이 싸움이 끝날꺼야"    

" 그런 소리하지 말아 말이 씨가 되지..."

" 삐삐 왔네, 본부인데

" 뭐라고? 누가 죽었다고?"

지난 1995년 11월 28일, 인천 연수구의 아암도 앞 바다에서 한 구의 변사체가 발견되었다. 변사체의 당사자는 이덕인이었다. 골리앗에서 내려간 뒤 행방불명되었던 그는 상반신이 벗겨진 채 온몸에 밧줄이 감겨 아암도 근처 갯벌위로 떠오른 것이다. 우리는 이덕인의 시신을 확인하고 곧바로 '장애인 노점상 고 이덕인 열사 사인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및 빈민생존권 쟁취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를 구성하여 사인에 대한 규명에 나서기로 하였다.”----이하 생략(이글은 전국빈민연합회 최인기씨가 쓴 글을 부분 발췌한 것이다) ]-

인연이란 참 묘해서 정말 알 수가 없다. 작년 여름휴가 때이다. 나와 남편은 다른 사람들이 휴가를 거의 다 끝낼 무렵에 영종도에서 배를 타고 한 40여분 들어 간 장봉도라는 곳에서 늦은 피서를 했다. 그 때 거기서 만난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바로 연수구 장애인 마을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은 참 친절했다. 장봉도가 고향이라서 아는 사람들과 그곳으로 여름피서를 왔다는 할머니는 바다에 나가 굴을 직접 채취해서 우리에게 주기도 했다. 나중에 자기들이 사는 곳엘 꼭 한번 오라고 하였다. 오면 맛있는 생선회를 대접하겠다고. 그러면서 전화번호도 건네주었는데 그동안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이웃한 동네는 아주 잘 사는 곳인데 비해 바로 곁에 장애인들이 이주해서 살고 있는 곳은 그렇지가 않은 모양이었다. 정부의 정책에 의해 그곳에 함께 모여살고 있는 그들에게 그런 아픈 사연들이 있는 줄은 몰랐다. 참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런 그곳 가까이 경제특구인 최첨단 지식기반 사업의 어마어마한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다니. 화려한 개발정책- 뒤 안에는 이렇게 세상에 드러내 놓고 말하지 못하는 아픈 그들의 상처가 있다. 그 상처 위에 송도 첨단지식기반은 세워 지고 있는 것이다.

행여 장애인인 그들이 개발이라는 명목 하에 또 하나의 희생물로 그곳에서 설자리를 잃거나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사태가 벌어지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세상사가 다 이런 것일까- 어느 하나가 좋아지기 위해 또 어느 하나는 희생될 수밖에 없는- 어느 것이 더 소중하고 안하고는 머언 먼 후세대에나 가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우리친구들과 모여 앉아 던 그날의 아암도를 기억하고 있는 나는 그렇게 발전된다는 것이 그리 달갑지가 않다. 또 하나 그날 그곳에서 만났던 승무와 범생이를 생각해서도 그곳이 변화된다는 것이 서글퍼진다. 그 아이들이 자라 어른이 된 후 그날들을 추억할 때 남아 있는 것들이 무엇일는지-

내가 아암도에 대해 작은 글이라도 남기는 뜻은 고운 추억꺼리를 제공해준 그곳에 감사함을 표하기 위해서이다. 아암도가 하나의 특정 공간이지만 사람도 하나의 자연으로 봤을 때 아암도 역시도 나와 다르지 않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내게 하는 약속으로 아픈 기억을 가진 그곳 사람들을 또 다시 만나지는 못하더라도 잊지는 말아야지 하는 생각 때문이기도 하다.  오랜 세월이 지나 나이 많이 들어- 그날의 풍경들을 기억하느라 시린눈을 감았다 떴다 할 때를 그려본다. 그런 날이면 그립지 않는 것들이 어디 있을까-

눈물 나도록 그리운 친구들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