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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 대보름날의 추억

  • 작성일 2008-02-20
  • 조회수 397

 

정월 대보름은 일 년 중에서 첫 번째로 가장 큰 보름달이 뜨는 날로써 우리 민족의 밝음 사상을 담고 있는 세시 풍속중의 하나이다. 내 어릴 적 정월 대보름날의 추억은 정월 열 나흗날, 즉 요즘 말로 하면 정월대보름 이브라고나 할까? 이 날의 추억으로 시작된다.


설 명절이 지나고 나면, 엄마는 지난 가을 햇볕에 말려 잘 보관해 둔 여러 가지 나물들을 손질하고, 광에 있는 잡곡들을 하나 둘씩 햇볕으로 가지고 나와 키로 까불면서 손질하는 일을 했다. 내 고향 여주에서는, 이 정월 열 나흗날이 나무 아홉 짐하고, 아홉 가지 나물에 밥 아홉 번 먹는 날, 그리고 밥 훔쳐 먹는 날로 일컬어 졌다. 왜 굳이 ‘아홉’이란 숫자가 들어 갈까는 여전히 의문이다. 너무 많이 먹어 건강을 걱정하는 요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괴물 같은 얘기로 들리겠지만, 농경사회였던 그 옛날의 생활상을 그려보면 고개가 끄덕여 진다.  


농번기철과는 달리 겨우 내내 몸의 움직임도 적었으니 추위가 풀리기 시작하는 이맘때쯤, 몸을 움직여 나무를 하라는 뜻이려나?  또한 추운 겨울이라 신선한 채소 등의 공급 부족으로 영양적으로 몸 건강이 부실해졌을 때라, 온갖 나물과 잡곡밥으로 영양보충을 해서 한 해 농사일을 거뜬히 해 낼 수 있게 몸보신을 하기 위함이었을까?


이 날의 대표적인 음식으로는 맛있는 잡곡밥과 아홉 가지 나물이다. 아침부터 엄마는 부엌에서 바쁘게 움직인다. 흔히 다섯 가지의 다른 잡곡을 섞는다하여 오곡밥이라지만, 내 기억으로 엄마는 가짓수에 상관없이 찹쌀, 보리, 검은 콩, 붉은 팥, 조, 기장, 수수, 밤, 대추 등등 그때그때 있는 잡곡들을 함께 넣어서 영양밥을 지으셨다. 찰밥을 싫어하시는 아버지의 식성에 맞추느라 가끔은 찹쌀대신에 멥쌀을 섞었다. 나물의 종류를 다 기억 할 수 있으려나? 말린 호박나물, 시래기나물, 취나물, 묵나물, 고사리나물, 콩나물, 무나물, 무생채, 시금치나물 등등. 매년 가을볕에 엄마가 부지런히 말려 둔 이 나물들이 드디어 제 구실을 하는 날이다. 먹기 좋게 삶아지고, 조물조물 무쳐지고, 고소한 들기름에 지글지글 볶아진다.


점심 때 부터 이 맛있는 음식을 먹기 시작하여 하루 종일 먹는다. 기호에 따라 밥과 나물들을 따로 먹기도 하고, 큰 양푼에 온갖 나물을 넣어 비벼먹기도 한다. 아홉 번 중에 처음으로  먹는 그 맛은 그야 말로 꿀맛이다. 거기에 곁들여지는 봄동 겉절이와 아삭아삭 씹히는 새콤한 나박김치의 맛은 겨우 내내 김장김치에 질린 입맛을 확 돋구어주기에 딱 안성맞춤이다.

  

점심을 먹고 난 후에는 친구들과 모인다. 아홉 짐의 나무를 하는 대신에, 우리 꼬마들은 밖에 모여 신나게 노는 것이다. 그래야 먹은 밥이 소화되어 또 먹을 수 있을 것 아닌가. 친구 집을 돌면서 집집마다 한두 가지씩 특이한 음식을 얻어먹기도 한다. 우리 집의 별미인 녹두 빈대떡이라던가, 또 다른 친구 집의 찹쌀떡과 찹쌀 부꾸미, 땅콩엿 등등이 있었다.


해가 질 무렵이면, 드디어 우리 친구들은 한 곳에 모여 밤의 거사를 준비한다. 이름 하여 밥 훔쳐 먹기 대 작전이다. 사실 상, ‘훔친다’ 라기 보다는  집집마다 우리와 같은 아이들을 위하여 인심 좋게 부뚜막에 가져가라고 오곡밥과 나물들을 얹어 놓은 것을 가져오는 것이다. 다른 지역에서도 이러한 풍습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내 고향 여주에서는 내가 중학교 시절까지 이 놀이를 했다. 미국의 아이들도 매년 10월의 마지막 날인 핼로윈데이(Halloween Day)때 캄캄한 밤에 여러 가지 귀신 복장을 하거나 핼로윈의 상징인 호박등을 들고 다니면서 집집마다 돌며 사탕을 얻어먹는다. 우리의 놀이와 유사한 풍습이다.


각자가 양동이와 양푼을 들고 출동한다. 밥과 나물들, 또한 특별 식을 각기 따로 담기 위해 여러 개의 그릇들이 필요하다. 밤길을 밝혀 줄 불 깡통 (망우리)도 필요하다. 깡통에 구멍 뚫어 그 속에 불타는 나무들을 집어넣고 긴 철사를 매어 휭휭 돌리면 그야말로 하늘에 펼쳐지는 불꽃놀이가 장관이다. 오늘 날의 화약을 사용하는 폭죽놀이에 비할까. 이 무렵에는 망우리 놀이 외에도 어른들을 따라다니며 새 봄의 농사를 위해 논두렁 밭두렁의 해충들을 태우는 쥐불놀이도 하곤 했다. 마침내 대보름달로 꽉 차여가는 달빛 아래서 우리의 망우리 불꽃은 세상을 밝게 비춘다.  


요즘처럼 골목마다 가로등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으니, 우리의 밤길을 밝혀줄 이 망우리는 필수품이었다. 밤길을 가르며 수행하는 우리의 임무는 몰래 남의 집 부뚜막에 있는 음식을 담아 오는 것이다. 이 날 만큼은 허가된 도둑질이라고나 할까? 가끔씩은 아줌마 아저씨들이 일부러 우리들에게 “누구야??? 이 놈 들! 누가 밥 훔쳐 가랬어!”하면서 긴장을 고조시켜 준다. 그러면 우리들은 걸음아 나살려라 하고 삼십육계 줄행랑을 쳐야 한다. 물론 양동이와 양푼은 챙긴다.


한 집에서 많은 음식을 가져오지는 않는다. 이것은 밥을 훔치는 이들의 기본 도리이다. 우리와 같은 아이들이 어디 한 둘이겠는가? 다음 방문객들을 위해 음식을 남겨 놓는 것이다. 때로는 골목길에서 마주치는 다른 무리의 아이들과 정보 교환을 하기도 한다. 여러 집을 돌고 돌아 드디어 우리 손에 든 그릇이 무거워 지면, 이제는 친구네 집 사랑방으로 들어간다. 우리의 전리품들을 한 곳에 모아 놓고 드디어 시식할 차례이다. 양동이와 양푼에 온갖 밥과 나물들을 넣고 큰 나무 주걱으로 열심히 비빈다. 누군가는 돼지 밥처럼 보인다고 하겠지만 우리들 손에 쥐어진 숟가락들은 쉴 새 없이 바쁘게 움직인다. 동치미 그릇이 바닥이 난다. 마지막으로 입가심을 위해서 마시는 살얼음 동동 뜬 식혜는 정말 이날 맛의 최고 절정이다. 이렇게 우리의 정월 열 나흗날 밤은 더 크고 더 밝은 대보름달을 향해 깊어만 간다.


대보름날의 아침은 복조리를 나눠주는 ‘복 사세요, 복 사려’등의 소리로 밝아온다. 부지런한 누군가가 대나무로 만든 복조리를 집집마다 돌며 대문 안으로 던져 놓고 간다. 가끔씩 공짜로 나눠주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오후가 되면 어김없이 수금하러 온다. 이미 받은 복조리를 되 물리겠는가. 거의 강매이다시피 한 이 상술은 결코 기분 나쁘지 않은 상거래이다.


아침 식사에서는 가족 모두가 땅콩, 호두 등의 견과류로 부럼을 깬다. 이것 역시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겠으나, 견과류에 함유되어있는 몸에 좋은 지방을 섭취로 겨우내 부족한 영양소를 보충하고자 했던 우리 조상들의 슬기가 깃들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엄마가 내 놓은 땅콩을 열심히 까먹으면서 예쁜 호두를 고르느라 정신이 없다. 호두는 당장 깨 먹기 힘드니까 오빠들에게 뒤질세라 일단은 몇 개씩 주머니에 챙기고, 그 중에 제일 예쁜 두 개를 골라서 들기름을 발라가며 길을 들인다. 호두보다는 저렴한 가래도 있었다. 한 번만 바르라는 엄마 말에도 아랑 곳 하지 않고 엄마 몰래 들기름을 여러 번 발라 반지르르하게 만들어 꽤 오랫동안 주머니에 넣어가지고 다니면서 만지작거린다. 이것 역시 요즘의 시각으로 보자면 손을 지압해주는 효과를 얻기 위한 의도였으리라.


정월 대보름날에는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도 대답을 하지 말아야 한다. 이를 명심하고 있다가도,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면, “응” “예”하고 무의식적으로 대답하게 되고, 곧이어 돌아오는 대답은 “내 더위 사가라”라는 소리이다. 소위 더위팔기란 놀이이다. 한 여름의 더위를 건강하게 이겨내기 위해 이런 놀이를 통해서 미리 더위에 대비해 건강을 챙기라는 덕담쯤으로 해석 할 수 있겠다. 참으로 따스했던 풍습들이다.


어제 오후에 친구와 전화 통화를 했다. 결혼을 늦게 하여 이제 서야 초등학교 저학년 생인 두 아들을 둔 친구이다. 통화음에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와 뭔 일인가 물었더니 자동차를 타고 강원도로 가족여행을 하는 중이란다. 엄마 아빠는 운전을 하면서조차 차내에 있는 TV를 보고, 뒷좌석에 있는 아이들은 닌텐도게임을 즐기느라 그 소음이 그대로 전화선을 타고 들려왔던 것이다.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자연을 즐기는 대신에 전자 기계놀이에 열중인 모습이 피곤하게 다가온다.


문명과 기술의 발달이란 이름하에 점점 잊혀져가는 우리민족의 세시 풍속들, 그 곳곳에 배어있는 우리 조상들의 슬기로움이 새삼스레 귀하게 느껴진다. 문명에 지쳐가는 우리의 몇 십 년 후의 모습이 비친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자연과 옛것의 소중함을 깨닫는 것이 너무 늦지 않기를, 올 정월 대보름  달에게 비는 소원 목록에 하나 더 추가해야겠다.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 보름 밥 먹으러 갈게.”

아무리 요리에 관심이 많은 나지만, 나물만큼은 아직 엄마나 언니의 손맛을 따라갈 수가 없다.  엄마의 손으로 조물조물 무친 아홉 가지 나물이 먹고 싶다. 물오른 버들강아지가 저 만치서 손짓하는 雨水 절기의 오후이다. 봄바람 , 꽃바람이 살랑인다. 정월의 대보름달이 차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