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빵집 여자

  • 작성일 2008-10-15
  • 조회수 228

빵집을 차리고 싶다

딸랑딸랑 종소리에 문이 열리고

그 사람 햇살을 가득 품고 들어오면

빵포장 하던 손을 잠시 멈추고

한아름 환한 미소를 담아서

어서오세요-

말하고 싶다

 

봄빛 나풀거리는 어느 오후

낮은 언덕 진달래가 흥얼거릴 때

봄을 담은 빵이 뭔가요-?

물으면

새초롬한 슈크림을 꼬옥 껴안은

봄봄한 슈크림빵을 수줍게

내이고 싶다

 

아롱아롱 방울방울 땀이 맺히고

작은 선풍기의 미풍이 돌아가면

얼굴 검게 그을린 그 사람에게

솔솔한 팥빙수를

꼭지엔 새빨간 체리를 얹은

그 사람 마음같은 시원함을

보이고 싶다

 

산책하는 발걸음이 느려질 즈음

추락하는 낙엽 단풍 고이 담아와

그립다- 한없이 그립다-

하냥 쓰면서

촉촉한 카스테라와 헤이즐넛 커피향이 묻어나는

갈빛 티타임 안에 그리움을 한껏

놓이고 싶다

 

노을이 지고 하늘이 물들고

첫눈 소복소복 내려앉는 날

보고픔이 반죽된 빠게뜨를 구워

흰 눈이 투영된 생크림을 만들어

그 사람의 빵봉지에 넣어주며

가슴 속 깊게 아린 슬픔에 마지막까지

잠기고 싶다

 

곁에 다가서면

물결처럼 은은한 빵내음이 나는

맑은 아침이슬로 끝없이 눈물 짓는

사랑합니다-

목이 메어 이 마음 전할 수 없는

빵집 여자가 되고 싶다

시린 행복이 되고 싶다

 

 

 

2003.4

 

 

 

 

집을 떠나 낯선 곳에서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향수와 온갖 역경에 스스로 벅차 한동안 시는 생각할 겨를조차 없던 적이 있었다. 그 나이때에 으레 그렇듯 친구들과의 크고 작은 갈등에 온갖 신경을 쓰며 입학 초기 나는 하루하루를 '견뎌내는' 생활을 해 나가는 중이었다. 생각해보면 고된 시간들은 아주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고, 그 까짓 것들 웃어 넘기려면 그럴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복잡한 마음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져 당시의 나에게는 그리 간단한 일들이 아니었다. 그래도 시간이 흐르니 주위의 많은 것들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먼지 같았던 상황들이 깔끔해지기 시작하면서 나도 예전의 밝은 모습으로 많이 되돌아왔고, 마음 속의 미움도 차츰 사라져갔다. 영원한 건 없다. 영원할 것 같던 고난도, 갈등도 시간이 지나면 '아, 그때 그런 적이 있었지.' 하는 정도의 점 같은 기억으로 남을 뿐이다. 물론 이건 기쁠 때, 즐겁고 행복한 순간에도 마찬가지다. 어쨌든 그래서 난 참 괜찮아졌다. 좋아졌다. 재미있기도 했다. 상황이 호전되니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다시 작은 것들에도 감사해지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조금만 걸어 내려가면 '오렌지 베이커리'라는 조그마한 빵집이 하나 있었다. 열 살이 채 안되어 보이는 자식들을 둔 어느 부부의 가게였는데, 그 가게에서 산 길쭉하고 보드라운 크림빵을 맛보고 나는 이내 빵맛에 반해버렸다. 단순히 좋아하는 게 아니었다. 나는 그 맛에 빠졌고, 때론 황홀해했으며, 행복했고, 감사했다. 그건 내가 다시 시를 쓰는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오랜 공백 끝에 쓴 처음 시가 바로 '빵집 여자'였으니 말이다. 물론 빵맛을 접할 때의 느낌을 쓴 게 아니라 나름대로 상황을 설정하여 분위기에 몰입하려 애쓰며 쓴 시였다. 어쩌면 다시 시를 가슴에 품었다는 자체가 즐거움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빵집 여자'를 완성하고 이를 편지지에 옮겨 적었고, 내게 시를 되찾게 해준 것에 감사드린다는 쪽지와 함께 빵집 부부에게 수줍은 편지를 내밀었다. 그 뒤로 그 부부와의 친분이 두터워졌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은 나를 참 좋아했고 나도 그들을 참 좋아했다. 그들은 내가 빵을 사러 가면 대부분 서비스를 듬뿍듬뿍 끼워주셨다(늘 그랬던 건 아니었다). 엄마 생신때 내가 직접 만든 케이크를 선물하고 싶어 아저씨께 부탁해 케이크를 만들어보기도 했고, 시내 놀러갔다 돌아올 때에는 아저씨의 부탁을 받아 유명 제과점의 고구마케이크를 사다 드리기도 했다. 그러면 또 아저씨는 그 고구마케이크의 반을 뚝 잘라, 둘 중 큰 부분을 '친구들과 나눠 먹어라' 하시며 나에게 내미시는 것이었다. 답답한 기숙사 생활 속에서 꿈같은 2주마다의 외박시에 그 조그마한 빵집은 나에게 꼭 들렀다 가야할 장소로 각인되어 있었다. 가끔 가족, 친척들께 크림빵을 사다 드리기도 했는데, '맛이 참 좋다.' 하시는 모습을 보면서는 그리 뿌듯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오렌지 베이커리는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과 함께 내 고등학교 시절에 빼 놓을 수 없는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시간은 또 흘러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재수를 하고 곡절을 좀 겪느라 여유가 없었다는 핑계도 있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그보다 모교에 대한 애착이 없었기에 졸업 이후 나는 한번도 학교에 찾아가지를 않았다. 보고 싶은 풍경도, 선생님도 그닥 없었다. 자연히 오렌지 베이커리에도 다시 갈 수 없었다. 시외버스를 타고, 학교는 안 가더라도 그 빵집은 갔다올 수 있지 않을까, 아줌마 아저씨께 내 근황을 들려주면 놀라시겠지, 하는 생각을 해 보기도 했는데 현실성 없는 생각이라며 이내 단념했다. 지금도 베이커리에 꼭 찾아가야겠다거나 부부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다만 그냥 가끔씩 그때의 일들이 아련히 떠오르고, 그 길쭉 달콤 부드러운 크림빵은 다만 그냥 가끔씩, 아주 미치도록 먹고 싶을 뿐이다. 우연찮게 빵을 떠올린 오늘같은 밤은, 더욱 그 빵과 오렌지 베이커리, 그 부부가 생각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