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 소리
- 작성일 2009-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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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 소리
‘나만 만나면 모두 다 죽어 버리는구나.....’
아침에 출근하여 보니 전임자(前任者)가 남기고 간 풍란(風蘭) 한 포기가 또 시드는 것을 보고 나도 모르게 신음처럼 나온 말이었다. 허허로운 나의 탄식을 옆에서 듣고 있던 직원은 말없이 빙긋 웃기만 한다.
지난 연초에 지금의 부서로 부임하면서 지인으로부터 우아한 동양란 몇 분(盆)을 선물로 받았다. 蘭에 대해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수려한 기품과 생기가 넘쳐나는 난들이었다. 더군다나 난초 잎 사이로 뽑아 올린 꽃대에 향기 가득 머금은 꽃까지 달고 있었으니 키우느라 큰 힘들이지 않고도 수월하게 난향(蘭香)을 선사받는구나 싶어 횡재한 기분이었다. 거기에다 엄연한 삼동임에 난초 향기가 은은하게 퍼져 사무실에 온통 봄기운이 감돌아 좋았고, 그 향기 덕택으로 낯선 사무실의 어색함을 다소나마 위안 받을 수 있었다.
그러길 며칠 있다가 마음에 드는 화분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는 직원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달포쯤 길러 난초의 꽃잎이 떨어질 즈음에 모습이 이상하여 자세히 살펴보니 잎이 시들시들하며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너무 짧은 시간만 동거하다 시들어 가는 화분을 보니 보내주신 분에게 미안하기도 하거니와, 蘭도 하나의 소중한 생명체임에 어떻게든 살리고 싶었다. 일단은 한나절 정도 화분 채 물속에 푹 담그어 보라는 응급 처방대로 처치하여 보았지만 지금껏 회생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사무실에서 蘭이 시드는 모습을 본 탓에 집에서 기르는 풍란 한 포기도 생각났다. 작년 봄에 교외에 있는 화분가게에서 2천원 주고 샀던 녀석인데 그동안 수석에 올려 두고 스프레이로 물을 품으며 키우던 풍란이었다. 요즘 연일 늦은 퇴근으로 잘 보살피지 못해 걱정스런 맘으로 귀가하여 자세히 보니, 이 녀석도 탈수되어 윤기가 없고 잎을 맥없이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랬는데 오늘 출근하여 책상위의 놓인 풍란을 보니 주변에 있는 蘭들이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시름시름 앓고 있어 탄식이 절로 나왔다.
난 왜 이렇게 식물들하고 인연이 없을까? 라는 자문(自問)에 내겐 식물들에게 해가 되는 못된 독기가 뿜어 나오는 건지, 蘭과 나 사이에 교감의 주파수가 영 틀리는 건지. 나와 인연을 맺은 蘭들은 한결같이 나를 거부한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사실 난 원체 식물을 기르는 재주가 부족하고 또 게으르기까지 하여 잘 길러내지 못한다. 그러나 한 때 난초를 기르는 취미를 붙여 보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그 땐 蘭에 물을 자주 주는 것도, 방향을 자주 바꾸는 것도 싫어한다는 섣부른 이야기를 들었던 때였다. 그래서 蘭은 게으른 사람이 기르기에 딱 맞다고 하기에, 내가 제격이라며 가까이 두고 길러 보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어찌된 건지 기르던 蘭들은 두어 계절도 넘기지 못하고 죽어 나갔고, 어쩌다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꽃대 한 번 제대로 올리지 못한 채 내 곁을 떠나갔다. 내 게으른 습관의 도가 지나침의 탓이었겠으나 그래도 그때는 길러보겠다는 나름대로의 관심을 가졌음에도 결과는 매번 같아서 더 이상 기르겠다는 생각을 포기하고 말았다.
식물에 대해 독기니 주파수니 하는 엉뚱한 생각에까지 미칠 즈음 문득 돌아가신 아버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아버님께서는 들일이 없거나 비 오는 날에도 빠짐없이 조석으로 논밭을 한바퀴 휘 둘러 오시곤 하던 분이셨다. 그리곤 ‘농작물은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면서 자란다.’ 라고 자주 말씀하셨는데, 아무래도 지금의 내게 가장 부족한 것은 이 같은 농부의 마음이 부족한 것 같다. 무엇보다 蘭은 게으른 사람이 키운다는 생각과 정성어린 마음을 쏟지 않은 애정 결핍도 큰 문제였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미 몇 포기는 죽어 버린 동양란의 잎사귀 속에 아직 생명의 기운이 남은 한 포기를 살리기 위해 물을 주고 영양제를 주어본다. 그리고 시드는 풍란에도 방금 받아낸 신선한 물을 품어 촉촉이 습기를 머금도록 해주었다. 이젠 더 이상 게으름의 방법으로가 아니라 애정이 담긴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자주 들려주며 길러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더불어 식물도 사랑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자란다면 사람에게는 더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런 발자국 소리는 사람만이 들려 줄 수 있을진대 그동안의 일상 속에 식물이든, 동물이든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런 넉넉한 생각이 참 부족했던 것 같다.
내 아이들도 그간 나의 어떤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자랐는지 생각해 보면 참 부끄럽고 미안하게 되었다. 아이들이 잠든 아침에 출근했다가, 밤에는 술 취한 발자국 소리가 아니면 오히려 내가 먼저 들어와 잠드는 일이 다반사였지 않던가. 그러고 보니 아버님이 전해 주신 발자국 소리의 교훈을 제대로 실천하기는커녕 까맣게 잊어버린 삶이나 다름없었다.
졸지에 병원에 입원해 계시는 장모님께서 며칠 후에 중요한 검사결과를 기다리고 계신다. 무심코 지나간 세월에 암이라는 무서운 질병으로 진단될까, 혹시나 잘못되면 노년에 또 힘든 길을 걷게 될까 걱정스럽다. 그간 자식으로서 정성이 담긴 발자국 소리를 제대로 들려 드리지 못했는데, 이렇게 되고 보니 죄스럽기만 하다.
오늘은 창밖에 날씨가 유난히 고요하고 햇살이 따사롭다. 올해 봄도 분명 화려할 텐데 아직 생기를 덜 찾은 蘭들을 보니, 올 봄 내 마음에는 늦도록 꽃샘추위가 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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