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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의 집

  • 작성일 2009-04-19
  • 조회수 395

 

그 집으로 이사를 한 건 내가 국민학교 이학년이 되던 해 이른 봄이었다. 야트막한 산을 등지고 멀리 들판을 내려다보는 배산임야背山臨野로 마을 끝 집이었다. 안채와 아랫채가 있고, 장독대와 과일나무들과 높다란 굴뚝이 있는 뒷 뜰과, 오징어 놀이나 팔방치기에 좋을 넓은 앞마당이 있었다. 반질한 대청마루를 지나 앞마당 끝에는 허리를 배배 튼 배롱나무며 장미, 국화, 작약들의 소박한 꽃밭이 있었다. 꽃밭 옆으론 대문이 있고, 대문에는 둥근 수은등이 매달려 있었다. 꽃 밭 아래는 내 키만큼 경사가 졌고 경사 밑으론 밭이었다. 밭 양쪽엔, 대문으로부터 마을로 이어진 길과, 우물로 이어진 각각의 길이 있었다. 대문 길로부터 집 뒤를 돌아 반대편 우물에 이르는 대나무 밭이, 사철 푸르른 파도소리를 내던 높이 선 집이었다.

 

봄이면, 우물로 내려가는 길에 개나리가 뒤덮여 노란 병아리떼가 오글거리는 듯 했다. 뒷 뜰과 옆 뜰엔 수줍은 진달래가 초경初經인 듯 터지고, 앵두꽃과 복사꽃과 배꽃이 달뜨게 피어났다. 아랫채 뒤로는 아욱 꽃이 흐드러져 흐드러진 꽃만큼이나 나비떼가 날았다. 혼자 된 큰언니의 재혼으로 어느 날 어린 조카를 친가로 보내야만 했는데, 나는 아욱 꽃 속으로 달려 가 뚝뚝 눈물을 떨어뜨렸다. 무심한 나비떼가 눈처럼 날고 눈치 없는 쌀강아지 자꾸 눈물을 핥는데, 내 키를 넘은 아욱대를 기웃거리며 아버지가 몇 번이고 내 이름을 불렀다. 아욱 꽃이 다 지도록 툭하면 아욱 밭에 숨어드는 나를 못 이겨, 결국 조카는 우리 집에서 키우게 되었다. 삼촌과 이모들 사이에서 애교덩어리더니,  아픈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하는 어른으로 자랐다. 지금도 어디서 아욱 꽃을 만나면 나는 쉬 지나치지 못한다. 온통 대나무로 둘러 쌓여 있으니 봄이면 집안 곳곳이 우후죽순이었다. 옆 마당 앞마당은 물론, 심지어 방바닥에서도 죽순이 솟았다. 매운 연기와 구들을 뚫고 삐죽이 올라 오던 놈의 신기함이라니. 나는 키우자 우겼고, 나만큼이나 철없는 죽순은 아버지로부터 퇴출을 당했다. 이제는 대나무를 집 가까이 심는 게 아니며, 기막힌 생명력의 죽순이 스테미너 식품이라는 데 동의하고 있다. 어린 죽순을 데쳐 쭉쭉 찢어 참기름에 무치면 담백했다. 아궁이 짚불에 통째로 구워 소금참기름을 찍어도 맛나다. 그 땐 소쿠리로 퍼 담아 이웃에 나누었는데 이제는 맛보기도 귀한 죽순이 되었다. 밭 둔덕엔 우산떼처럼 머위가 돋아 어린 순은 나물을 하고, 대를 굵도록 키워 머위탕을 해 먹었다. 통통한 새우를 넣고 들들 볶다가 들깻가루를 부어 만든 머위탕을 나는 아주 좋아했다. 요즘도 좋아하는 걸 보면 어릴 적 길들여진 혀는, 몸에 새겨진 고향 같은 문신인 듯하다. 밭 가장자리엔 키 큰 참죽나무가 늘어섰는데 그 새 순의 맛이 또 독특했다. 된장에 무치면 달큰하고도 고소하며 사각이는 게, 죽순, 머위를 긴장시킬 만 했다. 간혹 이놈과 구별이 어려운 옻 순을 따다 옻이 올라 멍게가 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나는 아버지가 조심을 시킨 덕에 지금도 옻과 참죽은 구별할 줄 안다. 헤실헤실 꽃향기가 들러 붙는 봄밤에 언니는 4H 청년회에 자주 나갔다. 스무살 작은 언니의 가슴에도 터질 듯 꽃이 부푼 까닭이다. 언니와 나는 둘이 방을 같이 썼다. 안 방의 아버지가 무서워 까치발로 뒷문을 나서며, 문고리를 걸지 말라고 언니가 신신당부를 했다. 대답은 막둥이같이 하였으나 지키긴 어려웠다. 문 열면 바로 대밭인데, 내 간肝이 밖으로 나와 있지 않고서야 어찌 문고리를 풀어 놓을 수 있을까. '조금만 자고 일어나야지' 했지만 한번 잠들면 업어 가도 모르는 내가 깰 리 없었다. 오밤중 열리지 않는 문고리를 잡고 언니의 간이 녹았음은 당연했다. 졸린 눈을 끄덕이며 매번 다음을 도모했지만 여전히 나는 문을 걸었다. 언니의 귀가가 빨라졌으니, 음전한 규수로 시집을 가는데 내가 일조를 한 셈이다. 그럼에도 언니는 '잠귀신'이라며 아직도 나의 공로를 인정 안한다. 언니가 밤에 건너다닌 길옆엔 커다란 방죽이 있고, 그 방죽가에는 쑥이 많았다. 쑥을 캐고 있으면 엄마가 저녁밥을 먹으라고 소리쳐 불렀다. 키 작은 엄마가 노란 개나리 속에 묻혀 있었다. 커서도 가끔 환청이 들린다. 돌아보면 그 집, 그 개나리 속에 아직도 어머니가 있다.

 

초여름 학교에서 돌아오면 꿀단지에 개미 붙듯, 조카랑 앵두나무에 붙어 앵두를 따 먹었다. 앵두나무엔 유난히 송충이가 많았다. 통통한 고놈이 구둣솔 같은 털을 세워 시커멓게 줄지어 있으면 냅다 소리를 지르며 도망쳤단 다시 주춤주춤 들러붙었다. 앵두를 다 따 먹고 나면 장마가 왔고, 한바탕 비가 퍼붓고 나면 멀리 하늘에 무지개가 걸렸다. 조카와 마루에 다리를 늘어뜨리고 앉아 빨주노초를 세고 있자면, 비 그친 마당으로 알록달록 무지개 색 뱀들이 줄지어 기어 나왔다. 축축하고 어둑시근한 대밭은 뱀들의 소굴이다. 우리는 메리를 불렀고, 메리가 천둥에 개 뛰듯 달려 와 그 중 하나를 물고 흔들면 무지개 색 뱀이 툭 툭 끊겨 나동그라 졌다. 나머지는 혼비백산하여 다시 대밭으로 기어갔다. 장마가 지나면 물 오른 작약과 장미가 통통하게 피어났다. 한주먹 꺾어 학교에 가면 선생님이 좋아 하셨고,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려고 나는 자주 꽃을 꺾었다. 매끄러운 배롱나무 허리를 손톱으로 살살 긁어, 간지럼을 타나 안타나 들여다보기도 했다. 정말 꽃잎을 파르르 떨어, 배롱나무의 다른 이름이 간지럼나무임을 확인하곤 했다. 동향집이어서 여름 아침이면 높이 뜬 해가 방 끝까지 밀고 들어 왔다. 식구들은 뒷 뜰 툇마루로 밀려나고, 오후에 다시 해가 쫓아오면 앞마당 평상으로 도망갔다. 여름방학이면 툇마루는 주로 내 차지였다. 숙제를 하거나, 낮잠을 자거나, 조카와 공기놀이를 하거나, 발가락으로 마루 밑 강아지를 간질였다. 저녁연기가 모락모락 일어서면 장독대 옆 분꽃들이 톡톡 피어났다. 분꽃이 피면 저녁밥 지을 때가 된 것이다. 여름 저녁은 매운 고추를 뚝뚝 잘라 넣은 강된장에 호박잎을 싸 먹거나, 찬 우물물에 밥을 말아 곰삭은 황석어 젓갈을 올려 먹거나, 걸러낸 팥물에 밀국수를 넣은 팥 칼국수를 주로 먹었다. 저녁을 먹고 평상에 둘러앉으면 그때는 식구끼리 참 할 얘기도 많았다. 아랫집 개 순산한 얘기, 채씨 아저씨 중풍으로 쓰러진 얘기, 경득이네 아버지 폐병엔 개구리가 좋단 얘기 등등. 말린 쑥을 쌓아 모깃불을 놓으면 이야기를 타고 흰 연기가 구름처럼 피었다. 조카와 내가 누워 장난을 치거나 하늘의 별을 세면 어른들이 부채를 휘휘 저어 모기를 쫓아 주었다. 배가 허전해지면 찐 옥수수를 하나씩 물거나, 포도를 따다 먹거나, 미리 베어다 논 단수수를 벗겨 먹었다. 그 맛있던 단수수가 지금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모가지가 까맣게 익은 놈을 골라 길고 거친 잎을 떼어내고, 대나무 같은 마디에 살살 칼자국을 내어 툭 분질렀다. 앞니로 길게 껍질을 벗겨 푸른 속청을 베어 물면 꿀처럼 달았다. 단물 빠진 껌처럼 찌꺼기를 뱉어 내고, 단단하고 미끌한 껍질은 격자로 엮어 냄비받침이나 엉덩이가 시원한 방석을 만들었다. 다음 날 찌꺼기 밑에는, 남은 단물을 물어가느라 개미들이 다글다글 했다. 고학년이 되고 방 청소는 내 차지가 되었다. 저녁 먹기 전 방들과 마루를 쓸고 닦으면 땀이 후줄근 했다. 갈색 유리병에 달린 대롱으로 방마다 '후마끼' 라는 모기약까지 불고 나면 얼굴이 벌개지고 속이 메슥거렸다. 뒷 뜰엔 목욕하기 좋은 넓은 바위가 있었고, 한바탕 우물물을 뒤집어쓰고서야 개운했다. 여름내 거의 같은 시간에 반복되었으므로 그 녀석은 날마다 구경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큰오빠가 집에 내려 와 뒷산으로 산책을 나섰다가, 대나무밭에 숨어 있던 녀석을 발견했다. 뒷동네 나보다 한 학년 아래인 녀석은 망원경까지 들고 있었고, 나는 물을 뒤집어쓰다 말고 방으로 뛰어 들었다. 이빨을 딱딱 부딪으며 산에서 간간 이어지는 큰오빠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 사건 이후, 어둠 속 우물에 앉아 언니와 더듬더듬 찬 물을 끼얹었다. 땀은 이미 식었고, 얼음같이 찬 물은 절로 신음이 새 나왔다. 그 녀석 누나와 내 작은언니가 나중 친하게 되었는데 언니는 한 번도 그 말을 꺼내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그 녀석을 생각하면 아직도 까닭모를 적개심이 있다. 그렇게 여름이 오고 갔다.

 

뒷 뜰 언덕엔 늙은 배나무가 있었다. 늙었지만 해마다 배를 주렁주렁 달았다. 배나무에 올라 갈 사람은 작은 오빠 뿐이었다. 마당 한번 쓰는 일 없던 오빠가 과일 하나는 잘 땄다. 오빠는 원숭이처럼 나무에 올라 잘 익은 걸 골라 물곤, 풍뎅이 먹은 건 모두 내 머리위에 툭툭 던졌다. 나는 아버지에게 일렀고, 아버지는 건성으로 오빠 이름을 길게 한번 부르면 끝이었다. 배는 풍뎅이가 천적이었다. 움푹 파먹은 건 그만 두고 노린내가 나서 먹을 수가 없는 것이다. 풍뎅이와 나누어도 족히 한가마니는 되었다. 오빠가 따서 던지면 아버지와 엄마, 언니와 내가 이불보 한 귀퉁이씩 잡고 그물처럼 배를 받았다. 똥거름을 주어 통밤만씩 하던 대추가 아랫채 지붕을 뒤덮었는데 역시 오빠가 지붕위로 올라 작대기로 때렸다. 우리는 우박처럼 떨어지는 대추에 등짝과 뒤통수를 내주며 연신 깔깔대느라 시끄러웠다. 그렇게 가을 과실을 추석 무렵 따 젯상에 올렸다. 살이 많은 대추가 꿀처럼 달아 꿀대추로 불렸는데, 그건 똥거름 덕이라고 했다. 나는 잘 먹다가도 그 생각만 나면 구역질이 났고, 엄마는 '제 똥 삼년 안 먹으면 부황이 난다' 며 내 구역질을 부채질 했다. 하긴 바람난 여자 엉덩이만한 누런 호박도, 모두 똥구더기에서 부푼 것이었다. 그 시절엔 아궁이 재를 모아 똥과 버무려 채소나 과일나무의 거름으로 썼다. 비위생적인 인분 탓에 야채를 생식하곤 구충으로 채독증에 걸리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그 시절의 문제는 위생이었지만 지금처럼 화학적 공해는 없었다. 당연히 암癌 같은 무서운 질병이 흔치 않았다. 가을엔 뜨거운 아랫목에서 쫄아 드는 대추냄새로 온 방안이 달달했다. 마른 쑥과 고아 식혜를 만들어 여자들 아랫배 따뜻해지라고 겨우내 먹어야 할 약재료였다. 그 쓰디 쓴 식혜를 나는 엄마 몰래 대밭에 버리곤 했다. 대추를 두드린 오빠는 타잔처럼 지붕에서 뛰어 내리다, 뾰족한 대나무 밑둥에 발바닥이 꽂혀 한동안 붕대를 감았다. 사고뭉치 오빠였다. 이후, 아버지는 대나무를 사선으로 자르지 않았다. 대추를 따곤 봄에 묻어 둔 진달래꽃을 가을 툇마루에서 개봉했다. 밀봉한 한지를 뜯어내면 달큰한 술내가 툭 터졌다. 빛바랜 진달래를 걷어 내고 꽃분홍 말간 효소를 엄마와 언니들이 한 종지씩 시음했다. 나랑 조카는 걸러낸 꽃잎을 한 잎 두 잎 주워 먹다 불콰해지고, 엄마랑 언니들은 동백아가씨나 섬마을선생님 노래를 시켰다. 설탕만으로 쟁여 두었는데 진달래주가 된 것이다. 추석이 오기 전 방문을 모두 떼어 새로운 창호지를 발라야 했다. 열두짝이나 되는 문을 털고, 씻고, 바르고, 말리는 일이 어른들에겐 꽤나 번거로운 일이었다. 국화나 코스모스 꽃잎으로 무늬를 놓을 생각에 조카와 나는 엉덩이가 들썩였다. 달빛 넘쳐 새하얀 방문에 국화가 피어나고, 창호지 정갈한 향기 방 안에 그득하면 잠이 다 도망가고 가슴이 설렜다. 가을이 천고계비의 계절인지, 말馬이 없는 우리 집엔 닭이 살쪘다. 북쪽 아랫채는 볏짚이나 맵겨를 쌓아 둔 나뭇간이었는데 암탉이 드나들며 알을 낳았다. 나는 알 꺼내는 일을 몹시 싫어했다. 이놈이 꼭 높은 데다 알을 낳아 짚더미를 기어올라야 하니, 민둥민둥한 달걀귀신이 쑤욱 올라 올 것만 같아서 였다. 알을 낳곤 꼭 꼬꼬댁 알렸기 때문에 닭이 하산 하자마자 달려가면, 더러 따끈한 알이 귀여워 잠시 공포를 잊기도 했다. 부화된 병아리 중, 내 병아리가 있었다. 잡색이 섞이지 않은 순노랑 이었다. 품속에 넣으면 몽글몽글 따뜻했다. 참새 같은 발가락이 등허리로 가슴께로 꼬물꼬물 돌아 댕기면 간지러워 눈물이 났다. 가끔은 내 깨알만한 젖꼭지를 주둥이에 들이 밀며 젖을 먹으라고 명령했다. 순노랑은 눈을 딱 감고 주둥이를 앙동 문 채 고개를 이리 피하고 저리 피했다. 새엄마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부바로 달래야 했다. 엄마는 순노랑 두 다리를 착 포개선 내 등에 옆으로 눕혀 포대기를 감아 주었다. 나는 자장자장 엉덩이를 토닥이며 마루를 서성였다. 순노랑은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디서든 강아지처럼 달려 왔다. 내 냄새와 목소릴 아는 것이다. 누가 멍청한 사람을 일러 '닭대가리'라 하였든가. 아버지 밀짚모자를 덮어 두어도 내 목소릴 향해 밀짚모자가 돌진해 왔다.

 

초겨울이 오면 아래 밭에서 배추와 무를 뽑아 절였다. 아버지가 연신 우물물을 퍼 올리고 엄마와 언니들이 한나절을 씻어 김장을 했다. 볕 좋은 남쪽 아랫채에 모여 항아리 몇 개를 채우고 나면 다 함께 둘러 앉았다. 겉절이 두어 포기 죽죽 찢고 통깨를 들이 부어 뜨거운 밥에 길게 얹어 먹었다. 팔뚝만한 무를 통째로 넣고 대나무 잔가지로 눌러 놓은 동치미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겨울 밤 절대의 밤참이었다. 무를 와삭 깨물면 칠성사이다가 그렇게 톡 쏘았을까. 언니들도 도시에 살고 어머니도 안 계신 지금은, 어디서도 그 맛을 볼 수가 없다. 그 시절 우리 집은 서울에 있던 큰오빠 덕에, 마을 최초로 텔레비전을 보유한 집이 되었다. 무엇이나 시골에 없는 건 사들고 오던 오빠여서, 바나나도, 파인애플도, 버터빵도 처음 먹어 보았다.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몰라 도깨비방망이 같은 파인애플을 이리저리 굴려 보았다. 밤이면 동네 어른들이 연속극을 보러 오셨고, 낮에는 언니 친구들이 재방송을 보러 왔다. 아버지는 귀한 과일들을 내 놓으라 하셨고, 나는 그런 아버지가 미웠다. 그래도 아버지를 미워하면 아니 되었다. 한 밤중 나는 자주 밤똥을 쌌다. 아버지를 뒷간 저 앞에 보초 세우고도 모자라, 뒷간 옆 돼지들을 발을 굴러 깨웠다. 돼지들이 놀라 일어 나 꿀꿀거리면 훨씬 안심이 되었다. 앞과 옆은 안심이 되었으나, 뒤는 대밭이므로 뒤를 보고 앉았다. 그러고도 끙끙대며 십초에 한번 씩은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는 나를 안심 시키느라 연신 헛기침을 했다. 일이 끝나면 아버지는 나뭇간 앞에서 항상 절을 시켰다. 닭에게 절을 해야 밤똥을 누지 않는다는 것이다. 절을 백번도 더 했지만 절만 받아먹은 닭들은, 이후 몇 년 동안 내 부탁을 들어 주지 않았다. 밤에만 무서운 게 아니라 시퍼렇게 꿈틀거리는 대나무는 낮에도 무서웠다. 일년내내 우우 울부짖거나 ,쏴쏴 쓰러지거나, 부시럭부시럭 뒤척이거나, 소곤소곤 속살댔다. 학교가 끝나면 대나무 밭이 시작되는 곳에서부터 아버지를 불렀다. 그 버릇은 중학교 때 까지도 계속 되었다. 아버지는 내 소리를 기다리다 성큼성큼 내려오셨다. 언니 오빠들한텐 엄하고 무뚝뚝한 아버지가, 당신 오십줄에 얻은 막내에겐 꽤나 살가우셨다. 언니들은 원하는 것이 있으면 나를 통해 아버지에게 전달했다. 나는 제법 최선을 다했고, 그 일은 대부분 성사되었다. 막내가 마냥 좋기만 한 건 아니었다. 한동안 아랫채에 큰언니가 들어 와 살고, 절간 같던 우리 집은 갑자기 보육원이 되었다. 그 집에서만 조카 둘이 더 생기고, 나는 조카가 다섯이나 되었다. 내 등엔 조카 놈들이 번갈아 매미처럼 붙었다. 내가 결혼을 안 하고 자식 욕심이 없는 건, 아마 그 시절 와글거리던 놈들한테 진이 다 빠진 때문일지 모른다. 엄마는 늘 막내가 안쓰러운 거라 하셨다. 엄마랑 아버지랑 보내는 시간이 형제 중 제일 짧다는 것이다. 부모님과의 제일 짧은 인연은 맞는 말이며, 내게 가장 슬픈 말이기도 하다. 눈이 오면 대나무가 휘어 대문길이 하얗게 터널을 이뤘다. 눈이 내린 날 아침엔 마루로 달려 나가 그 광경에 소리를 지르곤 했다. 대나무밭의 대나무들도 얼기설기 얽혀 눈을 뒤집어쓰고 있으니 그 안에 갇힌 꿩들이 날지 못했다. 오빠는 꿩을 잡겠다고 대밭을 휘저었으나 한 번도 잡는 건 보지 못했다. 나는 깜깜한 밤, 꽃잎 같은 함박눈이 수은등 동그라미 안으로 모여드는 걸 바라보기 좋아했다. 눈이 내리면 우리 집이 꼭 크리스마스 카드 같았다. 한없이 평화로웠다.

 

섬에서 들어 와, 장터에 미역과 멸치를 판다는 아주머니가 우리 집에 자주 드나들었다. 엄마와 친하게 되어, 올 때 마다 미역이나 건새우등을 가져 왔다. 우리들은 멸치이모라 불렀다. 그 시절 시골은 계契를 부어 집을 사고 논을 사는 집이 많았다. 제법 큰 계를 두개나 조직했고, 아는 사람들이나 친척들 몫까지 엄마가 보증을 서고 멸치이모를 몽땅 빌려 주었다. 멸치이모는 살림을 그대로 둔 채 몸만 없어졌고, 엄마는 순진했다. 공짜 새우의 댓가였다. 빚쟁이들이 몰려 와 땅이나 집문서를 요구했다. 빚 한번 져보지 않은 심약한 엄마는, 대문 소리만 나면 대밭으로 숨었다. 불행은 겹으로 온다더니 설상가상으로 큰오빠가 병으로 누웠다. 허약하던 엄마가 많이 아팠다. 면소재지 게딱지만한 집으로 이사 하던 날, 선생님 말씀은 귀에 들리지 않고 종일 일없이 눈물이 떨어졌다. 야간자율을 하지 않고 무작정 옛 집을 따라 걸었다. 대나무 뒤에 숨어 쭈뼛쭈뼛 내다보니, 배롱나무도, 대추나무도 그대론데 식구들이 없었다. 고등학교 삼학년 때 였다.

 

그 날 이후, 난 한 번도 옛 집에 가지 않았다. 수 십 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이 떨려 갈 수가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