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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핀

  • 작성일 2009-05-04
  • 조회수 626

 

  볼수록 예쁘다. 그런데 보고 있노라니 은근히 고민이 된다. 이걸 꽂아야하나 말아야 하나. ‘그래, 그냥 인사치례 할 때나 꽂고 그렇지 않을 때는 고이 모셔두는 게 낫겠다.’ 결국 나는 작은 상자에 갓난아기 볼때기처럼 앙증맞은 머리핀을 넣어 서랍 속에 고이 모셔둔다. 혹시 색이 바라거나 먼지를 탈까 싶어서다.

  지난주, 아들과 함께 집에 온 여자친구(예비 며느리)가 내게 손바닥만한 상자하나를 내밀었다. “어머니, 머리핀이에요. 시내 갔다가 샀어요. 어머니 머리에 매일 핀 꽂고 있는 것 같아서요.” 상자를 열어보니 검지크기의 핀 두개가 나란히 들어 있었다. 몸체가 도톰하고 둥그런 게 꼭 갓난애 볼때기처럼 잘 익은 연분홍이다. 그런데 머리숱이 들어갈 부분의 공간이 넓어 보였다. 순간적으로 난 핀이 내게 맞지 않겠구나 하는 걸 직감했다. 예전에 비하면 머리숱이 풍성하지 않아서다.

  그렇다고 그런 내색을 할 수도 없어 “예쁘기도 하다.” 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들이 옆에서 이상하게 생긴 까만 핀일랑 빼버리고 당장 한번 꽂아보라고 부추기는 걸 “무슨 소리! 머리도 안 감았는데 나중에 할게.” 하며 때 탄다고 새 핀을 얼른 상자 속에 넣어버렸다. 두 사람이 가고난 뒤 다시 상자를 열고 핀을 바라보니 대책이 안 선다. 사다준 성의가 고맙긴 하지만 내 취향과는 영 거리가 멀어서다. 아니, 머리숱만 풍성하다면 얼굴에 분 좀 바르고서 꽂을 만도 하겠는데 꽂고 나면 줄줄 흘러내릴 게 뻔했다.

  아마도 여자친구는 내가 핀을 좋아하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거기다 내가 꽂고 있는 핀이 낡았다고 어림짐작도 했으리라. 까만색 똑딱 핀의 칠이 벗겨져서 희끗해져있다는 걸 나 또한 매일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핀을 사용하는 건 멋이나 치장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흘러내리는 앞머리를 잡아두기 위한 용도내지는 머리숱이 적은 부분을 커버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니 머리핀을 꽂는 이유는 순전히 기능 때문인 것이다. 당연히 별 표시도 나지 않는 까만 똑딱 핀이 내게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니 이일을 어쩐다? 여자친구를 만났을 때 핀을 꽂고 있지 않으면 섭섭하게 생각할 텐데 그렇다고 사소한 이유들을 장황하게 늘어놓기에는 내 행색이 구차하다. 또한 선물을 군말 없이 받는 버릇을 가져야 나중에도 받을 수 있다는 어르신들의 말씀을 무시할 수도 없는 입장이다. 어떻게든 두어 번은 꽂고 있어 선물에 대한 성의는 보여야 될 것 같아 고민 중이다. 아무래도 머리숱이 들어갈 공간을 좁게 하기위해 투명테이프라도 감아둬야 할 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머리핀에 관심이 없었던 건 아니다. 어렸을 때는 꽤나 머리핀을 좋아했다. 어쨌거나 머리핀하면 제일 많이 생각나고 애착이 가는 건 가느다랗게 생긴 까만 실 핀이다. 흘러내리는 머리를 고정시키거나 올림머리를 할 때 실 핀을 많이 사용하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실 핀이 다른 용도로도 쓰였다.

  머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아이들 놀이용으로 사용된 게 실 핀이었다. 어렸을 때 시골아이였던 나는 친구들과 실 핀 따먹기 놀이를 했다. 일명 ‘핀치기(삔치기)’는 딱지 따먹기 놀이 같은 것이었다. 아이들 서너 명이 모여 벽에다 실 핀을 쳐서 상대방 핀을 따먹는 놀이인데 그때는 핀치기 잘하는 아이들이 동네에서 선망의 대상이었다. 누구누구 옷에 핀이 더 많이 달려있느냐에 따라 친구가 많아지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했다.

  커다란 옷핀에 실 핀을 가지런히 꽂아 윗옷에 자랑스레 대롱대롱 달고 다녔던 시절에 우리는 매일같이 담벼락에 껌딱지처럼 붙어서 핀치기 놀이를 했다. 핀을 벽에 쳐서 상대방 핀과의 거리가 한 뼘 사이에 들어오면 따 먹을 수 있었다. 한 뼘이 될똥말똥하면 억지로 손가락을 늘리느라 핏대를 세워 얼굴이 벌겋게 되기도 했다. 핀치기 놀이는 해가 지는 줄도 모를 만큼 재미있었다. 고수가 되려면 요령이 필요해서 소홀히 할 수 없는, 실 핀 하나 따먹는 게 우리에게는 밥 먹는 거 다음으로 중대한 일이었다.

  “어디서 퍼 자빠져 놀다가 인자 기어들어 오냐.” 는 엄마들의 지청구를 수없이 들으면서도 다음날이면 아이들은 담벼락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다가 핀을 많이 잃어버리는 날은 콧김을 씩씩대기 일쑤였고 어쩌다가 핀을 많이 따게 되면 사기가 충천해서 친구들에게 제법 거들먹거렸다. 그렇게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핀치기 놀이를 했으니 그때가 가장 핀과 친하게 지내던 시기였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한창 멋을 부릴 때도 나는 머리에 핀을 잘 꽂지 않았다. 곱슬머리였던 관계로 머리를 길게 기를 수 없어 짧은 단발로 지내던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머리를 길러 예쁜 핀을 꽂고 다니는 친구들이 부러웠지만 부러움으로 그치고 말았지 핀을 사서 꽂을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머리를 길러 파마를 하게 되었는데 그건 순전히 외화 때문이었다. 1983년인가 한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V’라는 외화가 있었다. 그때 우리는 그 드라마에 푹 빠져 지냈다. 특이 외계인으로 나왔던 다이아나(제인 배들러)의 인기는 대단했었는데 살아있는 쥐를 통째로 삼키고는 게걸스럽게 먹어대던 그녀의 머리가 고불거리는 긴 파마였다. 그래서 나도 머리를 길러 파마를 했다. 그러나 관리를 하지 않아 머리를 풀고 다니면 정말이지 머리가 한 다발은 되었다. 머리가 나풀대며 걸어 다니는 꼴이었다.

  그 모습이 가관이었던지 같이 살던 친구가 생일 때 핀을 선물했다. 처음으로 머리에 알록달록한 핀을 꽂았다. 파마머리와 알록달록한 핀은 참 잘 어울렸다. 머리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데이트신청이 간혹 들어오기도 했으니 나름대로 머리가 한몫을 한 시기였던 것 같다. 그 뒤로 줄곧 긴 머리에 여러 가지 종류의 핀을 꽂고 다녔다. 머리 덕분이었을까. 꽤 낭만적인 시절을 보낸 시기였다.

  이십 여 년이 흘러버린 지금은 또 다시 단발로 돌아왔다. 아니, 단발이되 예전하고는 많이 다른 단발이다. 그냥 지금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 속수무책으로 내버려두고 있다는 게 맞겠다. 머리를 길러서 묶고 다니는 게 하도 지겨워 무작정 잘라버리고 나니 대책이 없다. 그래서 똑딱 핀으로 겨우 형태만 유지한 채 내버려두고 있는 참이다. 그러니 예쁜 머리핀이 가당키나 하겠는가.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 꼴 나게 생겼으니 예쁜 핀을 가지고도 쳐다보기만 해야 할 비극에 빠져있다. 이럴 때는 딸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싶다. 딸애 머리를 가지런히 빗겨 내리고 핀을 곱게 꽂아주면 얼마나 좋을까. 그 모습을 보면서 대리만족이라도 할 수 있으련만 이도 저도 아니니 예쁜 핀 때문에 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