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가 필요해
- 작성일 2009-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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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가 필요해.
커피와 담배.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이상형으로 "커피와 담배를 좋아하는 사람"을 꼽았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하자 그 사람은 커피와 담배에는 대화가 깃들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대화란 정신적인 섹스다."
그 말이 어쩐지 멋있고 그럴듯하게 들렸다. 때문에 그 후에도 나는 그 말을 곱씹어 보았고 내가 어떠한 말로 정의하지 않았을 뿐, 사실 나도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 실은 그럴듯한 그 말을 갖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220V 혹은 C#maj7.
하지만 나도 그런 생각을 해오고 있었다는 증거가 있다. 종종 나는 이성에 대해 "코드가 안 맞는다."라고 평가를 내릴 때가 있는데 그 평가는 커피나 담배와 마찬가지로 "대화"라는 것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어떤 한 사람에 대해 무척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하자 그를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개를 가로 저었는데 그 때문에 나는 나와 그의 코드가 맞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가 내게만 유독 재미있었던 까닭은 공통된 경험과 화제가 유머코드와 직결되기 때문이었고 그것은 결국 함께해 온 시간에 비례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코드가 맞았기 때문에 함께 한 시간이 길어진 것인지, 함께한 시간이 길어진 까닭에 코드가 맞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코드가 맞는 사람에게 매력을 느낀다는 것 하나는 확실했다. 그러니까 나는 트랜지스터가 필요 없는 220V사람을, 내가 C#maj7이라면 같은 C#maj7정도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마이너 코드는 아닌 사람, 기왕이면 C#정도는 되는 사람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코드가 맞는다는 것은, 말이 통한다는 것에 가깝고 그러니까 나는 말이 통하는 사람, 즉 대화가 가능한 사람을 찾는 것이므로 나도 정신적인 섹스를 원하는 사람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차이가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대화가 이루어 질 수 있는 상황을 위해 커피와 담배가 필요했고 내게는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는 공통의 무언가 즉, C#maj7이 필요했다는 것 정도.
다시 커피와 담배.
그 이야기를 들을 당시만 해도 나는 커피란 그저 입이 궁금할 때 마시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진 않았다. 담배는 더했다. 담배연기를 싫어하는 나에게는 내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저승사자 친구쯤으로 보였다. 그러니 대화를 이유로 커피와 담배를 꼽는 그 사람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사실 무언가에 중독되었다는 것을 쉽게 믿지 않는다.
'커피 없이는, 담배 없이는, 술 없이는…….'
하는 그들의 말도 믿을 수 없었고 그런 까닭으로 그것들을 좋아하는 어떤 참된 이유 혹은 그것이 아니면 안 되는 절박함도 딱히 존재치 아니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대화와 커피, 담배의 이야기를 듣고, 내 안에서 220V와 C#maj7을 찾아낸 이후, 나는 조금 다르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중독된 것은 커피나 담배, 술이 아니라 커피를 마시며 숨을 돌리는 시간, 담배를 태우며 생각에 잠기는 시간,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그 시간에 중독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싶어졌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게 되기까지는 몇몇의 계기가 있었다.
담배라면 학을 띄던 내가 흡연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보게 된 것은 스스로가 '이것이 바로 스트레스다.' 라고 느낄 만큼 압박을 받고 있을 때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담배라도 한 번 피워보는 게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화장실을 가는 타이밍도 못 찾는 어리바리 수습사원이었다. 내가 아직 오줌보를 쥐어 잡고 이리저리 선배와 상사의 눈치를 보고 있을 때, 동기는 선배들과 함께 유유히 사무실을 나섰다. 담배를 피우기 위해서였다. 한참 후 담배를 피우고 돌아온 동기는 내게 다른 부서 사람의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그가 누군지도 몰랐으나 동기는 그를 꽤 친근하게 느끼는 눈치였다. 동기는 담배를 피우며 그와 인사를 나누었고, 그것을 계기로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담배는 모르는 사람과 단 둘이 흡연의 장소에 남게 되었을 때도
그 상황을 어색하지 않게 만드는 힘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또 담배에겐 이런 힘도 있는 것 같았다. 가령, 내가 자리에서 없어지면
'일 안하고 어디 갔어?'
라고 생각할 것만 같았지만(그 시간에 나는 홀로 화장실 변기에 쪼그리고 앉아 알람을 맞춰놓고 졸았다.) 흡연자가 자리에서 없어지면 으레
'담배피면서 잠깐 숨을 돌리러 갔군.'
하고 생각해 줄 것만 같았던 것이다. 그리고 팀장님 혹은 선배들과 담배를 함께 태우다가 팀장님이 동기를 향해
"힘들지?"
하고 물으면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라는 대답이 오고가면서
'허허, 이 사람 참 괜찮구만."
하는 평가가 내려질 것만 같았다. 그런 까닭에 담배가 주는 친밀감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어느덧 내 눈에 담배와 대화의 관계가 들어왔다.
시간이 지나 화장실 갈 타이밍 정도는 찾았을 때, 나는 하루에 석 잔 이상의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상사나 선배들은 내게
"커피 한 잔 할까?"
라고 물었다. 그리고 그 때마다 나는 커피를 마셨다. "커피 한 잔 할까?"이라는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할 이야기가 있다거나 잠시 쉬자는 뜻이기도 했고, 때론 친해지고 싶다는 뜻을 담고 있기도 했다. 나는 커피를 마시면서 숨을 돌렸고, 그렇게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었으며, 그들과 점점 더 친밀해졌다. 아무래도 어렵기 마련인 상사와의 대화에도 커피가 함께 있었다. 딱히 할 말이 없을 때나 시선처리가 어려울 때에는 커피를 마셨다. 그렇게 대화의 공백을 커피가 메워주었고, 커피와 함께 시간은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그리고 어느새 나는 먼저 "커피 한 잔"을 권하고 있었다. 커피를 마시고 있는 내 모습이 익숙해지는 것처럼 내가 회사에 잘 적응하고 있는 것 같았다. 동기에게 담배가 있든 내겐 커피가 생겼으니 나도 이제 "괜찮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커피는 꽤나 든든한 무기인듯 싶었다. 그런데 정말 커피만 있으면 되는 걸까?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거야?
배우 에단 호크가 각본과 감독을 맡았던 "이토록 뜨거운 순간"이라는 영화에는 대화가 필요해 보이는 한 어린 연인이 등장한다. 그 영화에 뜨거운 순간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그들에게 커피나 담배를 쥐어 주고 싶었다. 사랑에 상처가 있어 뭐든지 피해보려는 차가운 여자와 사랑에 대해 고민하기 보다는 지금의 정열을 혹은 열정을 불태워 버려야 할 것 같은 치기어린 남자. 그 남자가 여자에게 말한다.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거야?"
순간, 대답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그 질문에 나도 모르게 대답해 버렸다.
"그래서 뭘 어쩌자는 게 아니야."
여자는 그냥 그렇다는 거고, 그게 정말 전부다. 그 얘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야기 자체가 목적이었으므로 말 하는 것으로 여자는 되었다. '나는 이러이러 하다. 이러이러했었고 이러이러할 것 같다.' 그러면 남자는 그냥 '아. 정말 이러이러하느냐. 몰랐다. (아마도 계속 모르겠지만) 이제 알 것 같다.' 하면 되는 게 아닐까. 여자는 사랑 때문에 아팠다는 것이고 너를 사랑하게 될까봐 무섭다는 것이며 그걸 몰라주는 네가 짜증난다는 것이다. 그냥 그렇다는 거지 뭘 어쩌자는 게 아니다. 그런 비슷한 이유로 다투는 커플을 많이 보았다. '나는 이렇다. 너는 이렇고, 우리는 이렇다.' 라고 여자가 얘기하면 듣고 있던 남자는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거야?"
하고 말한다. 그러면 여자는 잠시 우두망찰한다. 이제까지 주절주절 자기의 감정과 상황을 이야기 해온 여자에게는
"아니 뭐 뭘 어쩌자는 게 아니라 그냥 그렇다고."
하고 말할 배짱은 없다. 여자의 생각이 자신이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남자가 자신을 몰라준다는 데까지 이르면 여자는 오기로 말한다.
"우리 헤어져."
그 헤어지자는 과연 진짜 헤어지자 일까? 그건 말하는 당사자도 모른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한 때,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책이 붐을 일으켰던 이유는 앞서 말한 대화를 하고 있어도 대화가 되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 많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또한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명확하게 해설해 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책을 읽기 시작했지만 결과는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다. 저자는 맞는 말을 하고 있었으나 특별히 새로울 것은 없었다. 사실 남자가 정말 화성에서 온 것도 아니고, 여자가 금성에서 온 것도 아니지 않는가. 나는 그 책이 그저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는 것을 그럴듯하게 비유하는 데 성공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책은 베스트셀러로 사랑을 받았고, 나 역시도 한 권 사 가졌다. 커피와 담배, C#maj7 이전에도 나는 대화에 목말랐으며 소통의 무기를 원했다는 증거였다. 마찬가지로 이 책을 선물하거나, 이 책을 읽고자 사람들에게는 대화, 즉 소통에 관한 갈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더 사랑하기 위해서 혹은 제대로 사랑하기 위해서 진정한 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책을 선물도 하고, 구입도 하고, 읽기도 했으며, 이제 커피나 담배의 중요성까지 깨달은 나의 대화는 어떤 상태일까?
대화가 필요해.
사람들은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나도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그냥 이야기 하고 싶고, 조금 더 그럴듯한 이야기도 하고 싶고 그 이야기를 남기고 싶고, 더 많은 사람에게 들려주고 싶다. 그리고 내 이야기를 나만큼 좋아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그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만큼이나 좋아지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결국 내가 이 글을 통해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단 한 가지였는지도 모른다. 나에겐 지금 논쟁과 토론과 토의 잡담과 수다와 기타 많은 대화가 필요하다. 나는 아마도 꽤나 외로운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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