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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프로메테우스의 상념

  • 작성일 2009-08-16
  • 조회수 285

 

 난 언젠가부터 담배를 피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우연하게도 그 시기는 내 내면에 자리 잡은 담배연기와 같은 생각들이 가득했었던 때와 일치한다. 내면에 가득 찬 담배연기를 걷어내기 위해 담배를 피는 건 어쩌면 모순적인 말 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이이제이(以夷制夷)라고 말하고 싶다. 건강을 해하게 되는 것을 기꺼이 감수해서라도 내면의 담배연기만은 거둬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실패로 끝났고 결국 난 건강과 내면 모두 담배연기와 싸우게 되었다.

 내 내면에 자리 잡은 담배연기이라는 녀석은 매우 지독한 녀석이었다. 내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그 녀석은 날 피폐하게 만들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가진 트라우마를 증폭시켜주는 암 덩어리와도 같은 존재였다. 지독한 악순환의 연속. 그 정도로 시달렸으면 그 녀석을 표출해내야 하는 게 정상이겠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녀석은 나에게 트라우마를 가져다주는 녀석이었지만 동시에 착각과 도취를 가져다주는 야누스의 얼굴을 지닌 녀석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녀석은 나에게 너무나 큰 적이었지만 시간이 흐르고 흘러 난 그 녀석에 대해 면역력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트라우마와 착각, 그리고 도취.

 그 녀석이 가져다주었던 그 모든 것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더 흘러 그 녀석이 만들어 낸 모든 것들은 흔적만 남긴 채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그 녀석이 여전히 나의 내면의 밑바닥에 모습을 숨긴 채 기회만을 노리고 있으리란 것을 알고있다. 나의 면역력이 약해졌을 시기를 놓치지 않고 다시금 나타나 날 썩게 만들 것이다.

 이렇게 그 녀석이 약해졌을 때 나의 내면에서 표출 시켜 버려야 한다. 허나 난 지금 한 가지 두려운 점 때문에 섯불리 표출하지 못했다. 내면에 간직되고 있던 담배연기를 표출함으로 인해 내 주변은 독한 냄새로 가득차고 세상 사람들은 날 피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표출하지 않는다면 다시금 재발하겠지. 그 녀석은 나의 내면을 병폐에 찌들게 만드는 독과도 같은 존재였다. 독과도 같은 그 존재를 세상의 포용성을 믿고 세상을 향해 표출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나 자신에게 있었다. 나의 내면에 심어진 세상을 향한 불신감 때문이었다.

 

 이 세상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인간의 이기심을 근원으로 작동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세상. 이기심을 근원으로 세상이 작동한 다는 것은 성악설을 인정하는 것과도 같다. 그렇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투쟁이라는 하나의 점이 모이고 모여서 인생이라는 하나의 선이 되는 인간의 삶이다. 나도 그 범주를 벗아 날 수 없는 “인간“이었기에, 난 그 녀석을 표출 할 수 없었다. 포커 판에서 자신의 패를 드러내고 게임을 한다는 건 미친 짓인 것과 마찬가지로 나의 치명적인 독이자 나의 아킬레스건인 그 녀석을 드러낸다는 건 자살행위였다.

 아아, 그렇다. 난 그 녀석을 끝내 표출하지 못했다. 그로인해 여전히 난 이따금씩 그 녀석이 안겨다 주는 트라우마, 착각, 도취에 일희일비하며 나의 내면은 하나의 투쟁의 공간으로 휩싸이곤했다. 이것은 거부할 수 없는 숙명이자, 자본주의를 근원으로 하는 무한경쟁시대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천형이었다.


 그와 같은 투쟁을 통해 나의 본질은 성숙해지는 것인가, 타락하는 것인가. 나의 본질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 녀석을 세상을 향해 표출을 하지 않는 이상, 이 세상의 그 누구도 나의 본질을 알 수 없다. 나조차 나의 본질을 알 수 없다. 나 자신이 세상이 원하는 기준에 맞춰, 무의식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표출한 것을 보고 세상은 나에 대한 평가를 내린다. 그것은 내가 만든 하나의 비본질적 이미지이지만 세상은 그것이 나의 본질이라 여긴다. 그리고 나 자신이 표출해 내지 않은 본질적 모습은 일순위가 아니며, 후순위로 치부된다. 세상은 그 비본질적 이미지를 강요하고 나 자신은 세상이 원하는 이미지에 충실히 맞춰 연기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끝내 이 세상의 인간들은 세상이 원하는 역할에 몰입하여 자기 자신의 본질조차 잊은 채 그렇게 역할에 충실하며 살아간다.


 신은 현대인에게 그 어떤 생명체보다 많은 것을 누릴 수 있게하는 문명을 주었지만, 세상에 대한 불신과 자기 자신에 대한 본질의 망각이라는 천형을 주었구나! 흙에서 태어나서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현대인은 프로메테우스적인 천형을 벗어나지 못하는구나.

 이 세상에 신이 존재하신다면 들어 주소서. 성악설을 근본으로 시작하여 오늘날 열매를 맺고 있는 현대의 시장경제체제 아래, 각자에게 부여된 역할에 충실히 몰입하여 살아가는 오늘날, 과연 우리에게 이 천형의 굴레를 벗는 그 날이 오는겁니까?

 성선설을 근본으로 하는, 아가페적 사랑을 근원으로 세상이 움직일 날을 고대하며 저는 오늘도 내 내면 안에 숨어있는 그 녀석과, 그리고 세상의 만인과 투쟁하겠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