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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조 내 걸작

  • 작성일 2009-09-01
  • 조회수 904

 

 

욕조 내 걸작

 

 


간만에 욕조에 물을 받았다. 간만이라고 해봐야 일주일만이다. 아직 생리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지만 눈에 띄게 양이 줄었기에 입욕을 결심했다. 굳이 오늘이 아니더라도, 내일이라도 상관은 없었지만 내일은 어쩐지 외출을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되면 모레나 글피로 차일피일 자꾸 미루어지게 될 것은 뻔했고, 입욕을 결심했다 미루게 되면 매일같이 씻어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찜찜한 기분이 계속 들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오늘, 그래, 지금 욕조에 물을 받기 시작했다.

대강 물이 다 받아졌기에 입욕제를 한 포 들고 욕실에 들어갔다. 남은 입욕제는 한 포. 한 번에 절반씩 사용하기 때문에 오늘을 포함하면 네 번 할 수 있다. 오늘이 5월 1일이니 월말에는 또 주문하지 않으면 이런 사치를 즐길 수 없게 된다. 아, 그래. 이건 다분히 사치이다.

비교적 정당하게 실력을 인정받아 취직한 직장에서 어떻게 된 영문인지 나는 급료에 대해 심한 거부감을 느꼈다. 대학원까지 나와서 그런 대우에 그 정도 월급이면 그렇게 나쁘지도 그렇게 좋지도 않은 선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통장에 들어오는 액수가 믿겨지지 않았다. 내 능력과 업무량에 대한 금전적 가치의 환산식이 어딘가 잘못된 것만 같아 앉아있기 불편했다. 오히려 일본에서 식당알바를 했을 때 받았던 시급 쪽이 따져보면 훨씬 액수가 많았지만 그 때는 그 돈이 정당하다고 느꼈다. 몸이 녹초가 되어 귀가하기 위해 기름에 절은 공기로 가득한 식당 문을 나설 때 느꼈던 그 충만함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기분 좋았다. 그러나 그 직장은 불편했다. 나는 헛돌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원하는 것을 절대 얻을 수 없는 곳이라는 생각이 나날이 팽배해져만 갔다. 그래서 그만뒀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어머니 앞에서 십 원 한 장을 벌어도 내가 쓴 글로 돈을 벌어야 나는 납득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기가 생겨 생활비는 절대 지원받지 않겠다고 큰소리까지 쳤다. 그러나 어떻게 번 돈이든 벌기 시작하면 커지는 씀씀이를 미처 줄일 새도 없이 6개월 정도 시간이 흐르자 나는 위기감이 숨통을 조여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통장 잔고는 계속해서 줄어들기만 하고 큰 맘 먹고 판 열여섯 권의 책으로는 5만원도 안 되는 돈밖에 쥐어지지 않았다. 소속이 없어지는 것에 대해 불안해하는 부모님을 안심시키기 위해 눈가림으로 들어간 대학원의 등록금이 우선 가장 큰 지출의 범인이었다. 두 번째는 그 대학원 수업에서 필요로 하는 책값, 세 번째는 그 대학원에 다니기 위한 차비와 기타 교제비랄까. 거기에 개인적인 필요에 의해 사대는 책값까지 더하니 겨우 반 년 남짓 다니면서 벌어둔 돈은 바람 앞에 등불과도 같은 신세이다. 옷도 악세사리도 사본지 꽤 오래되었고 심심하면 편의점에서 사다 마시던 외국맥주도 끊었으며, 각종 브랜드 커피는 내 돈 주고 사서 마신 지 상당히 오래되었다. 그런 요즘, 사치라고 해봐야 입욕제를 비롯한 바디용품 정도였거늘. 이제는 그것도 그만 두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래서 오늘의 사치는, 그렇게 좋아하는 술도 커피도 사먹을 수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사치중의 사치인 것이다.

그런 서글픈 심정으로 입욕제를 뜯었다. 애초에 반 년 남짓 번 돈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 지 의문스럽긴 했다. 게다가 대학원 등록금은 대주겠다는 어머니의 약속은 급히 돈이 필요하게 된 어머니의 사정으로 물거품이 되어버리면서 나의 궁상맞은 생활은 훨씬 앞당겨지게 된 것이다. 어차피 이렇게 될 것이었다. 이럴 때는 그나마 부모님 집에 얹혀사는 처지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러나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 나는 대체 뭘 써왔던 것인가 생각해보면 더더욱 우울해지는 것이었다. 약간 뜨거울 정도의 온수가 절반 이상 담긴 하얀 욕조에 연둣빛 입욕제가 화악 퍼지며 녹아들어간다. 분말과 때때로 입자가 큰 결정으로 이루어진 입욕제가 물속에서 녹으며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유즈ゆず와도 같은 향이 욕실 안에 퍼진다. 이 새콤한 향 때문에 이 입욕제를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손을 담가 입욕제를 잘 섞는다. 뜨겁다. 확 올라오는 향기가 기분 좋다. 물 색깔이 엷게 우러난 녹차 색으로 안정되어 갔다.

옷을 훌훌 벗어 수건걸이에 걸었다. 욕실 안의 공기는 이미 덥혀져 있어서 소름 하나 돋지 않았다. 생리중이면 으레 설사가 동반되곤 하는 데다 이번에는 진통제를 약간 과용했기 때문에 속이 더욱 망가지는 통에 적어도 4일은 먹는 족족 내보냈더니 그새 배가 홀쭉해졌다. 어젯밤에  새벽 네 시까지 위스키를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문득 위스키 뚜껑을 따다가 베인 손바닥의 상처가 눈에 들어오니 아프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주제에. 바가지로 물을 퍼서 다리에 끼얹었다. 뜨겁다. 몸에도 끼얹었다. 아, 녹을 것처럼 뜨겁다. 유즈향이 더욱 더 진하게 욕실 한가득 퍼졌다. 머릿속이 젖어드는 것 같은 기분에 빠져 나는 황홀할 정도로 우아하게 다리를 욕조 안에 집어넣는다. 천천히. 서두르면 몸이 데일 것 같다. 천천히. 욕조에 앉는다. 짜릿하게 신경을 달리는 열기. 몸속의 심이 흐늘흐늘 녹아버린다. 나는 척추가 없는 생물처럼 늘어진다. 물이 된다. 유즈향이 된다. 눈을 감는다. 잠시 잠을 잔다.


몸이 충분히 덥혀지고 나면 이번에는 열기가 잠을 방해한다. 열을 식히기 위해 두 다리를 꺼내 욕조 가장자리나 욕조 옆 세면대에 걸친다. 그렇게 하면 상체가 조금 더 물에 잠긴다. 다리를 비스듬히 물에서 꺼낸 채 높이 하고 몸은 물에 푹 담근 이 자세는 올바른 자세라고는 부를 수 없는 비뚤어진 모습이지만 나는 꽤 좋아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보통 나의 사고는 시작된다. 욕조 내 사고가. 오늘 나의 사고는 들어 올린 다리, 가장 눈에 띠는 허벅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하체비만이다. 아무리 잘 봐주려 해도 비만이다.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 더 찐 것 같다. 회사 내에서도 사실 그다지 움직이는 일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일산까지 출퇴근하는 일은 나름 칼로리를 소모하는 데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출퇴근은 생략한 채 집에서만 작업한지 반년이다. 대학원 수업은 일주일에 두 번. 도서관이나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나가봤자 일주일에 네 번 나간다. 살이 찌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요 며칠 배는 들어갔지만 허벅지는 빠지는 꼴을 본 적이 없다. 아, 재작년에 석사논문 쓸 때는 빠졌던 것 같기도 하다. 튼실한 허벅지를 따라 의외로 겉보기보다 부실한 무릎을 따라 발목까지 시선을 주어본다. 한 편으로는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다른 한 편으로는 만나자마자 스커트 밑의 내 무릎을 보며 '맞으면 한 방에 죽겠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직 만나는 걸 보면 진심으로 언젠가 내 무릎에 맞아죽을 날을 기대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언젠가는 늘씬한 다리로 나타나서 놀래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늘상 하지만 실천으로 옮기는 것은 쉽지 않다.

나는 남들보다는 육체에 집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막상 운동으로 몸매를 다듬을 생각을 하면 그것이 엄청난 시간낭비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운동 자체는 나쁘지 않다. 그러나 운동하는 도중에 머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나는 못내 아까운 것이다. 운동을 하지 않아도 그렇다고 뭔가 특별한 사고를 진행하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예를 들어 훌라후프 하나를 하기 위해서도 나는 마음에 드는 영화나 드라마를 엄선해야만 하는 수고를 거쳐야 하는 것이다. 자기 전에 간단한 요가를 하면서도 귀에는 이어폰을 끼고 있다. 그런 나에게도 좋아하는 운동 하나쯤은 있다. 수영이다. 땀이 나서 찐득하고 불쾌한 기분이 되는 것이 싫은 나에게 참으로 적당한데다 칼로리 소모도 확실히 할 수 있는 운동이다. 그러나 일단 돈이 드는데다가 전후에 씻고 옷을 갈아입는 것이 귀찮은 문제가 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혼자 물살을 헤치고 나아가며 느끼는 고독감을 견디기 힘든 것인지도 모르겠다. 언제나 혼자 있는 나는 어디에 있어도 고독하지만 유독 운동을 할 때는 그 고독감을 견디기 힘들어지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운동을 게을리 하는 나는 언제나 하체비만에 근육량 미달이다. 그리고 언제나 다리를 보면 우울하다. 그것은 습관과도 같은 우울이다.

그러나 우울한 하체를 떠나면 나머지는 좀 괜찮다고 자부한다. 게다가 오늘은 배가 좀 들어가 있어서 조금은 우쭐한 기분이다. 홀쭉해진 배 위에 물에 다 잠기지 않는 가슴이 오늘따라 더 커 보인다. 생리 중에는 평소보다 약간 커져있긴 하다. '생리중이라서 그런가, 더 큰 것 같아'라며 속삭이던 그 물기어린 목소리가 떠오른다. 내 다리를 좋아하는 남자는 없었지만, 내 가슴을 싫어한 남자도 없었다. 내 가슴은 65F라는 경이로운 치수를 자랑한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좋을 것은 하나도 없다. 속옷을 사기가 무척 힘든 것이다. 어깨가 결리겠다며 진심으로 걱정한 남자도 있었다. 어깨 결림은 인식도 못한다. 속옷을 구하기 위해 쏟아 붓는 노력에 비하면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니까. 남자들은 그런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신없이 만지고 핥고 빨기만 할 뿐이다. 섬처럼 솟아있는 봉긋한 가슴을 눌러본다. 푹신하다. 손으로 쥐어본다. 유두 주변의 짙은 부분이 도드라져 솟아오른다. 유두를 꼬집듯이 집어본다. 살짝 아픔이 느껴진다. 기억에 있는 아픔이다. 다시 한 번 꼬집어본다. 유두가 단단해졌다. 따뜻한 물속에 누워있는 나는 내 몸을 덮는 듯한 자세로 머리를 가슴에 묻은 어떤 남자의 모습을 떠올린다. 숱이 많은 검은 머리가 눈앞에 있다. 그리고 그 남자는 이를 세워 젖꼭지를 깨문다. 왜 계속 유두라고 써왔으면서 느닷없이 젖꼭지라고 쓰는지에 대해서는 새삼스럽게 묻지 말기를. '젖꼭지를 깨무는 남자'와 '유두를 깨무는 남자' 어느 쪽이 더 사랑스러운가.

젖꼭지를 깨무는 남자는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해야 할 사람이 아닐까. 그 때만큼 가슴이 뿌듯하고 몸 속 깊은 곳에서 조용히 흔들리던 그 무언가가 모두 밖으로 넘쳐흐르는 듯한 느낌이 드는 순간이 있을까. 그럴 때면 나는 으레 땀으로 젖은 그 이마에 그 뺨에 키스를 해주고 싶어지는 것이다. 기억 속의 그 남자는 게걸스럽게 젖꼭지를 깨물고 핥았다. 젖가슴을 주물렀다. 모유가 나오지 않는 것이 유감스러울 정도였다. 이빨을 세울 때마다 아팠지만 이미 고통과 쾌감의 차이를 알 수 없게 된 상태의 나는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짙은 농도의 숨을 내뱉을 뿐이었다. 눈앞의 유두를 세운 젖가슴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하던 나는 문득 나의 가슴을 빨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처음에는 어떤 느낌일까 하는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그러나 찬찬히 생각해보면 이는 참으로 불공평한 것이다. 갓난아기일 때는 남자아이고 여자아이고 어머니 품에 안겨 어머니의 젖꼭지를 빨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그런 행운을-물론 어머니의 젖꼭지는 더 이상 빨 수는 없겠지만- 누리는 것은 남자들 밖에 없지 않은가. 갑자기 밀려드는 너무나 억울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앞에도 말했듯이 내 가슴은 큰 편이다. 컵도 크고 앞으로 상당히 튀어나와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내가 나의 젖꼭지를 빨 수는 없었다. 이렇게 유감스러울 수가 없었다. 혀끝은 간신히 유두 끝에 닿았지만 입술까지 가져갈 수는 없었다. 언젠가 봤던 야한 애니메이션에서 어떤 여자는 자신의 젖가슴을 물고 빨고 했는데 가슴이 보통 늘어지지 않고서야 실제로는 무리일 것 같았다. 나의 경우 혀끝, 정확히는 혀끝의 아랫부분이 젖꼭지에 간신히 닿는 것이 최선이었다. 단단해졌던 끝은 긴장감 없는 이 우스꽝스러운 분위기에 흐늘흐늘하게 되어 있었다. 혀끝에 말랑말랑한 감촉이 느껴졌다. 차라리 닿지 않았으면 애초에 포기했을 터이지만 애태울 정도로 닿는 이런 상황은 견디기 힘들었다. 말랑말랑한 젖꼭지를 입안에 넣고 싶다는 생각이 집요하게 내 의식을 지배했다. 이제 와서 서른이 넘은 딸에게 자신의 젖꼭지를 물게 할 어머니도 아니고, 그렇다고 딱히 동성애자도 아닌 내가 여자의 젖꼭지를 빨 기회가 있을까. 바짝바짝 애가 탔다. 친구에게 부탁하면 뺨을 맞겠지. 아, 갑자기 지독히도 남자가 부러워졌다. 배알이 꼴리는 것은 이런 느낌일까.

정 그렇다면 남자의 젖꼭지라도 빨아보지 않겠느냐고 혹자는 조언을 해줄 지도 모른다. 당신은 빨아본 적 있는가? 남자의 유두는 여자에 비해 발달되지 않았다. 그리고 남자의 가슴은 딱딱하다. 이를 세워 깨물면 '아얏!'하는 멋없는 반응이 돌아온다. 한 마디로 재미가 없다. 혀끝에 닿는 감촉의 차이를 느껴보았는가? 아는 사람이라면 절대 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양쪽 가슴의 유두를 동시에 꼬집어본다. 그리고 약간 당겨보기도 한다. 따뜻한 물속에 말랑말랑한 해파리 같은 젖가슴이 두 개 떠있다. 지금 당장 이 가슴을 애무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직도 젖꼭지에 집착하고 있는 나는 다시 혀를 내밀어 젖꼭지를 핥아본다. 따뜻하고 말랑말랑하여, 그것을 깨물던 남자만큼이나 사랑스러운 기분이 든다. <젖꼭지를 깨무는 남자>로 수필을 한 편 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스친다. 젖꼭지를 깨무는 행위에 대한 고찰. 그런 남자의 사랑스러움, 그리고 나도 젖꼭지를 깨물고 싶다는 욕망을 표출하는 것이다. 그래, 그거라면 딱히 별 어려움 없이 한 편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왕 육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김에 한 세 편 정도 써서 어딘가에 응모하는 것은 어떨까.

'신체론身體論'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표출하던 건축과의 어떤 일본인 교수와 국문과의 모 교수를 떠올렸다. 두 사람을 서로 연결시켜주면 상당히 재미있는 이야기를 펼쳐낼 것 같아 전부터 기대하고 있었는데 서로를 소개시켜줄 기회가 여간해서 생기지 않는 것이다. 그 일본인 교수는 카나가와대학神奈川大学의 자리를 털고 한국의 대학에 정착하면서 그동안 모아두었던 장서 중 3분의 1을 가져왔다. 꼭 보여주고 싶으니 보러오라는 말에 연구실을 방문한 적이 있다.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건축에 대한 책은 거의 전무했으며 대부분이 신체에 대한 책들뿐이었다. 그로테스크한 제목의 책들로 가득한 그 연구실은 장관이었다. 몇 권쯤 빌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다시 찾을 수 없는 것은 옆방에 계신 과거의 지도교수님이 마음에 걸려서이다. '신체론'을 떠올린 이유는 '신체론'에 대한 지식 없이 내가 과연 육체에 대한 수필을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다 들통 날 것이다.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며칠 전에 모 문예지에 시를 응모할 때 괜히 모 대학원에 재학 중이라고 썼구나 하는 후회가 갑자기 밀려온다. 형편없는 시를 내면서 대학 이름까지 쓰면 괜히 나 때문에 엄한 교수들만 욕먹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몸이 움츠러든다. 자기소개서를 쓰라는 건 좀 너무하지 않은가. 얼결에 본명까지 밝히고 말았다. '자네 학교 학생이 정말 형편없는 시를 냈다네. 대체 이 아무개라는 학생이 누군가?'라는 말이 뒤에서 돌고 돌지도 모른다. 또 우울해진다. 역시 <젖꼭지를 깨무는 남자>로 수필을 쓰는 것은 관두는 것이 좋을까. 하지만 수필은 손 가는 대로 쓰는 장르가 아닌가! 이렇게 마음속으로 크게 외치며 욕조 밖에서 덜렁거리던 두 다리를 물 안으로 집어넣었다. 알싸하게 열기가 다리를 타고 퍼진다. 양 손으로 얼굴을 씻는 시늉을 했다. 어깨에 물도 좀 끼얹어보았다. 젖꼭지를 빨고 싶어 안달하던 마음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하지만 그래도 나는 글을 써야 한다. 어떻게든 인정을 받아서 십 원 한 장이라도 벌어야 한다. 한동안 시무룩하게 앉아있던 나는 마침내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내 입으로 그렇게 말했다. 내가 쓴 글로 십 원 한 장이라도 벌어야겠다고. 그리고 그렇게 받은 돈이 아니면 인정하지 않겠다고.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 머릿속으로는 몇 수십 편의 장․단편 소설을 쓰고 시를 쓰고 수필을 썼다. 아이디어를 적어둔 메모만 해도 셀 수가 없다. 그러나 실제로 쓰거나 쓰고 있는 것은 몇 개 되지 않는다. 쓰고 싶은 것이 있고 쓸 시간조차 충분하지만 막상 손을 댈 수 없는 것은 단지 내가 게으르기 때문인 것일까. 혹은 아직은 때가 아닌 것일까. 아직도 더 무엇이 필요한 것일까.

망연히 손을 내려다보았다. 위스키 뚜껑을 열다 베인 작은 상처가 보였다. 발렌타인 17년산이었다. 2년여 전에 어머니가 지도교수님께 드리라고 주었던 술이다. 나는 물론 교수에게 전하지 않았다. 평소 교수 앞으로 오가는 선물들을 봐온 나에게 발렌타인 17년산은 어쩐지 초라해보였기 때문이다. 망설이면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건넬 타이밍을 놓치고, 그러다가 그 술은 은근슬쩍 부엌 찬장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어젯밤은 유독 술이 마시고 싶은 밤이었다. 지갑사정을 뻔히 알면서 무책임하게 편의점으로 달려가 하이네켄을 집어올 수 없는 나는 부엌에 서서 한참을 망설였다. 그리고 결국 몇 병의 와인과 몇 병의 위스키들 중 선택한 것이 바로 그 술, 발렌타인 17년산이었다. 양심의 가책이라도 느꼈는지 은박의 껍질이 상흔을 남겼다. 그러나 결국에는 상처 따위는 깨끗이 잊을 정도로 취해 쓰러져 잠이 들었다. 오늘 일어나자마자 나는 눈을 뜨고 제일 먼저 왼팔을 들어 무언가를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무엇을 잡으려고 했던 것일까. 곁에 있는 카메라로 오늘 가장 먼저 바라본 풍경을 찍어 남겼다. 숙취는 없었다. 역시 좋은 술은 다르다.

물속에 잠겨있던 왼팔을 들고 나는 침대에 누워 취했던 동작을 또다시 흉내내보았다. 물에 젖은 벗은 팔이 길게 허공을 찔렀다. 그리고 그 옆으로 공중에 몇 개의 단어가 나열되었다. <젖꼭지를 깨무는 남자>, <야동 속 그녀의 항문>, 그리고 <발>. 실타래처럼 얽혀있던 하등생물의 군체群體가 일순 확 풀어지듯 퍼져나가는 것처럼 언어가, 문장이 쏟아진다. 욕실 안의 습기를 머금고 뇌가 풀어져버리기라도 한 것일까.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뇌세포가 활성화된다. 손가락 끝에 맺힌 물방울이 점점 커져 욕조 안으로 떨어지는 그 짧은 사이에 나는 세 편의 글을 완성하였다.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뿌듯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그것을 잊어버리지 않게 잘 기억하고 욕실에서 나가자마자 바로 기록하는 일이었다. 몸을 일으켰다. 욕조 바닥의 마개를 빼서 물을 빼면서 샤워기를 틀었다. 그 일련의 동작을 하는 와중에도 나는 잊지 않도록 끝없이 되뇌고 있었다.

그러나 집중력은 어이없이 흐트러지고 말았다. 어제 들었던 실없는 농담이 불쑥불쑥 재생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이 문제인 것일까. 아무리 떨쳐내려 해도 그 농담은 사라지지 않고 '봉골레' 따위의 입안을 맴돌기에 딱 좋은 단어 몇 개가 뇌에 끈덕지게 달라붙는다. 그러다가 문득 평소에 신경 쓰이던 일본어 단어 몇 개가 떠올라 나를 심난하게 한다. '와카게노이타리若気の至り'를 어떻게 쓰더라. '니마이메二枚目'는 왜 '니마이메'라고 부르는 것일까. 그런 아무래도 좋은 것들이 심하게 궁금해진다. 나의 걸작을 질투하고 방해하는 뇌내공작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음모설을 들이대고 몸서리치는 도중에 몸을 덮은 바디샴푸의 거품모양이 우스꽝스럽다는 생각으로 또다시 모든 것은 흐트러지고 만다. 그리고 사고는 의외의 방향으로 전이되어, '아, 생각해보면 한 달 전에도 이런 식으로 욕조 안에서 수필 세 편은 완성했던 것 같다'고 자술하게 만들었다. 그렇다. 나는 무려 4월 초에도 이런 식으로 욕조 안에서 무척 흡족스러운 걸작을 세 편이나 썼던 것이다. 제목은 적어두었으니 기억하고 있다. <목련에 관한 기억>, <트리케라톱스의 꿈>, 그리고 <공영주택조사표>.

웃음이 났다.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빗줄기 같은 물을 맞으며 키득키득 웃었다. 내려다보니 가슴계곡 너머 납작한 배가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키고 있다. 아아, 내 욕조 안의 걸작들이여! 봉긋한 가슴계곡을 흘러 넘쳐 홀쭉해진 배를, 하체비만인 다리를 따라 곧바로 내려가렴. 발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하수구로 흘러내려가렴. 킬킬대는 내 어이없는 웃음소리도 실어가렴. 나는 유쾌해서 견딜 수가 없다. 대단히 유쾌하다. 이것이 유즈향이 나는 입욕제가 주는 환각이라면 그 입욕제야말로 '엑스터시' 그 자체이다. 나는 조금 탈진한 듯 지친 몸을 구석구석 닦고 욕실을 나섰다. 불을 끄기 직전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발그레하게 상기된 그 얼굴은 어느 모텔에선가 본 기억이 있는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