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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일 2009-09-26
  • 조회수 303

 

 잘못 본 것일까. 그럴 수도 있다. 상대방은 정면이 아닌 고개를 약간 왼쪽으로 돌리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녀를 주시하기 시작한지 채 삼십초도 되지 않아 우렁찬 소리를 내지르며 전철이 다가왔고 전철은 우리 사이에 견고한 벽을 만들어버렸다. 전철이 가버리고 난 뒤 내가 보고 있던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전철과 함께 사라져버린 그녀의 빈 그림자만 전철역 벽에 모자이크처럼 남아 있었다. 그래, 잘못 본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무표정하던 특유의 모습마저 그녀가 아니라고 말하기에는 그 표정이 너무나 선명했다. 그녀를 싣고 가버린 전철의 뒤꽁무니를 재빨리 좇아갔지만 전철은 이내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녀의 모습도 차츰 흐릿한 영상이 되어 내가 본 그녀는 환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가 난건 아니고요. 원래 표정이 좀 무뚝뚝해요. 그러니까 오해는 하지 마세요.” 그녀의 표정 때문에 쉽게 거리를 좁히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즈음, 시동생이 내게 해준 말이었다. “아!” 내 마음속에서 생기기 시작한 벽이 하나 스르르 무너졌다. 그날, 나는 그녀를 따라 장을 보러 가게 되었다. 함께 살게 된지 삼일 째였다. 그녀의 얼굴표정은 무뚝뚝했지만 결코 미운 얼굴은 아니었다. 오히려 보면 볼수록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예쁜 얼굴이었다. 커다란 눈과 오뚝하고 적당한 크기의 코, 그리고 도톰하면서 끝이 약간 올라간 입술,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녀는 몹시 화난 표정이었지만 그녀가 웃을 때는 입 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가 딴사람처럼 달라보였다.  

 날 처음 보던 날,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무표정한 얼굴로 의례적인 인사 두어 마디를 던지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녀는 갓난아기를 키우며 시숙과 두 조카들의 뒷바라지까지 하느라 고단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녀에게 나란 존재는 반갑기도 하고 경계의 대상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녀의 표정이 그걸 말해주고 있었다. 홀아비가 되어버린 시숙과 엄마를 잃어버린 두 조카들은 그녀에게 적잖은 짐이 되었을 테지만 그녀로서는 내칠 수도 없는 살림이었다. 자신의 남편에게는 수입이 없었고 시숙이 모든 생활을 책임지고 있었으니 생존을 위해서라도 살림을 도맡아하는데 불만을 표시할 수 없었으리라는 게 내 짐작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내 존재가 어떤 것이었느냐고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녀는 차츰 날 받아들였고 우리는 한동안 어색하면서도 불편한 생활을 이어갔다. 한집에서 사는 두 가족, 나는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질적으로 그녀의 위치가 훨씬 견고했고 그녀에 대한 가족들의 신뢰도 두터웠다. 나는 그런 그녀의 영역을 침범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나는 불편한 새엄마에 불과했지만 그녀는 친숙하고 편한 작은엄마였다. 나는 그 집에서 이방인 같은 존재였고 그녀의 눈치를 봐야만 하는 처지였다. 그러나 나로선 그게 더 편했다.  

 남편의 일방적이고 끈질긴 매달림을 뿌리치지 못해 그 집에 들어가긴 했지만 아이들에게 엄마노릇을 한다는 건 너무나 벅찬 일이었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기에 그 기간동안이라도 그녀의 역할이 내게는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모든 것을 순리대로 받아들이고 나보다 어린 그녀의 의견을 존중해주려고 애썼다. 그녀의 행동이 모두 맘에 드는 건 아니었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 몰래 벽을 쌓았다. 그녀와 함께 나눌 수 있는 일과, 함께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해서 낮고 그보다 조금 더 높은 벽을 쌓는 게 그녀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라 여겼다. 그녀는 화가 나면 얼굴표정이 먼저 말을 했다.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그녀와의 사이에 미묘한 벽이 생기곤 했다. 다행히 벽이 단단하게 굳지 않았을 때 시동생은 분가를 했다.

 우리는 같은 해에 아이를 낳았다. 그녀는 딸을 낳았고 나는 아들을 낳아 내게는 아들이 셋이나 되었다. 내 생활도 여유가 없었지만 그녀 또한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시동생은 직업을 가지려고 애쓰지 않았고 그녀의 얼굴표정은 점점 더 화색을 잃어갔다. 내 생활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저울에 달면 추가 평평할 만큼 그녀와 내 삶은 가파른 오르막길에 매달려 있었다. 수없이 미끄러지고 성한 곳 없이 생채기가 났다. 서로 비슷한 처지여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어느새 나는 그녀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도 내게 속내를 털어놓고 하소연을 하기도 했다. 자신의 단단한 껍질 속에 숨어 있을 때보다 허물어진 그녀의 모습이 더 인간적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그녀는 나처럼 절실함이 덜했다.  

 나는 이미 한 번 실패한 인생이라는 절박함에 이를 악물고 오르막길을 기어올랐지만 그녀는 좀더 쉬운 길을 찾아 방황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손을 내밀었다. 그때는 그녀를 향한 내 마음속의 벽이 거의 허물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내 손을 잡지 않았다. 내가 손을 가까이 내밀수록 그녀는 더 멀리 도망가 버렸다. 그녀가 너무 멀어졌다고 생각했을 때 시동생과 그녀사이에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이 세워져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시동생의 목소리는 차가웠고 그녀의 눈빛에도 냉기가 돌았다. 냉기가 돌처럼 굳어지자 그녀는 떠나갔다. 무책임한 남자에게 아이 둘을 맡겨놓고 차갑게 돌아서 버렸다. 그러나 난 알 수 있었다. 날개를 떼어놓고 간 그녀의 등이 한없이 흔들리고 있다는 걸….  

 한동안 주위에서 그녀를 봤다는 사람들에 의해 그녀의 소문이 바람처럼 떠돌아 다녔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시동생과 그녀사이의 벽이 얼마나 견고한지 알지 못했다. 누군가가 부수기 시작하면 쉽게 허물어질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벽은 허물어지지 않은 채 점점 더 굳어졌다. 한없이 무책임했던 시동생은 궁핍하나마 두 아이들을 돌보며 지내는데 익숙해져 갔다. 어쩌다 지나치듯 그녀 이야기가 오가면 시동생은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버렸다. 더 이상 주위사람들도 그녀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었다. 아이들은 스스로 자라났다. 오년동안 나는 아니, 우리는 그녀를 보지 못했다. 그녀를 어디선가 마주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 지나치듯 해본적은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간간히 전해지던 풍문도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언니 집에 다녀오던 날 전철역에서 그녀를 보았던 일은 아직도 환상처럼 내 머릿속에 남아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그녀를 본건 현실이 아닌 꿈만 같다. 어쩌면 난 그녀와 비슷한 사람을 본 것일 수도 있다. 그녀와 나 사이에는 다시 생길벽도 없고, 허물어야 할 벽도 없지만 나는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보이지도 이름을 부르지도 못했다. 한없이 낯선 그녀가 그곳에 벽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