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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덧

  • 작성일 2010-02-05
  • 조회수 526

  입덧

 

  휴일 아침 늦잠은 일주일 내내 애쓴 나에게 주는 선물이다. 해가 중천에 뜨도록 늘어지게 자거나, 어떨 땐 이불에서 나오기 싫어 목만 내놓고 책을 읽는다. 한 시간 넘게 책을 읽다 보면 목 부분이 아프고 허리께가 뻐근하다. 밤새 늘어졌던 몸을 일으켜 세운다. 가장 먼저 주전자에 물을 붓고 가스레인지 위에 올린다. 팍, 불꽃이 튀는 순간, 푸른 보랏빛이 이내를 닮았다. 찻잔 가득 커피를 타서 마시며 신문을 뒤적인다. 시계의 분침과 초침은 오전 10시를 향해 끊임없이 달린다. 엄마가 마음껏 게으름을 즐기는 사이 방학한 두 딸도 덩달아 신이 나서 이불에서 나올 줄 모른다. 그래서인지 주말 저녁이면 으레 밤늦도록 불을 켜놓는 일이 잦다. 컴퓨터를 하거나 머리도 식힐 겸해서 창문을 열어놓고 밤하늘을 바라보노라면 이 세계가 마치 나 혼자만 살아있는 듯 착각마저 들고 황홀하기 그지없다. 특히 검은색 홑겹 이불을 덮은 밤하늘에 총총 뜬 별 몇 개가 아스라이 안녕을 고하는 시간, 새벽을 맞이하는 도시는 온통 보랏빛이다. 그 아득한 시간과 조우하느라 불면의 커튼이 쳐져 있음을 안 남편은 “옛날 같으면 소박맞기 십상인데…….” 라며 혀를 찬다.

 

  커피도 마셨고 어제 읽다 만 신문도 마저 다 읽었다. 아침을 건너뛰어서인지 정오가 되자 이내 허기가 느껴진다. 무얼 해먹을까, 날마다 해먹는 음식인데도 휴일만큼은 다르게 해먹고 싶은 생각이 고개를 든다. 냉장고 야채 칸을 뒤지는 사이 전화벨이 울린다. 아이들은 아직도 누워 있는지 꿈쩍을 안 한다. 이럴 땐 아이들 부르는 것보다 내가 전화를 받는 것이 훨씬 더 빠르다. 전화를 건 것은 둘째 여동생이다. 대뜸 막내 여동생의 임신 소식을 전한다. 아, 이렇게 고마운 일이 있다니, 생전 찾지도 않던 하나님, 부처님에게 감사하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막내 여동생 나이 서른아홉이니 적지 않은 나이, 게다가 일 년 전, 유산이란 아픈 경험을 한 터라 양가 모두 아이를 기다리면서도 여간 조심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수화기를 내려놓기 무섭게 동생에게 축하의 메시지를 보내고 아이들에게도 보내라고 재축하니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한다. "이모가 아길 가졌대, 그러니까 축하한다고 문자를 보내란 말이야." 달뜬 표정의 나완 달리 '그런데 왜요?' 시큰둥한 아이들, '어휴 이것들을 낳고 내가 미역국을 왜 먹었는지 몰라'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온다. 지난 크리스마스 때 막내 여동생 집에 가서 자매 셋이 어울려 모처럼 밥을 해먹으며 깔깔 수다를 떨었더랬다. 그때만 해도 그런 기미가 전혀 없었는데 여하튼 임신이라니 춤이라도 덩실 덩실 추고 싶다.

 

  아이들과 종일 있다 보니 삼시 세끼 무얼 먹나가 적잖은 고민이다. 알타리와 깍두기는 일찌감치 떨어지고 배추김치도 두 통밖에 남지 않았다. 입이 짧은 큰 애가 만날 밥상이 풀밭이라며 고기 타령을 늘어놓는다. 뜨끈한 밥 한 공기의 고마움도 모른다며 타박을 주자 입이 댓발이나 나와서 들어갈 줄 모른다.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막내 이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길 가졌는데 입덧을 해서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있다고 하자 금세 눈이 커져서는 입덧이 뭐냐고 묻는다. 입덧? 임신 초기에 나타나는 증상인데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이모처럼 냉장고 문을 열기도 겁나고, 물만 마셔도 토하고, 이웃집에서 조리하는 음식 냄새만 맡아도 헛구역질이 나온다 하니 무슨 병이냐고 묻는다. 아무튼 막내는 지금 입덧과 목하 전쟁 중이다. 병원을 다녀온 날부터 시작된 입덧이 어찌나 심한지 일주일 넘게 아무것도 먹지 못해 결국 영양주사까지 맞았다고 한다. 새 생명을 잉태한 기쁨도 잠시 심한 입덧 때문에 휴직 계를 내고 지금까지 두 차례나 영양주사를 맞았다는 막내의 이야기를 들으니 착잡하기 이를 데 없다. 나 또한 임신 초기, 심한 입덧 때문에 음식은커녕 마신 물조차 토할 정도로 고생해서 둘째는 절대 갖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터였다.

 

  입덧은 임신 초기에 흔히 나타나는 증세이다. 체질에 따라 입덧을 전혀 모르고 출산을 하는 산모가 있고, 미미하게나마, 그 증세를 느끼는 산모, 정반대로 막내처럼 유난히 심한 산모가 있다. 심지어 임신 내내 입덧 때문에 아이를 포기하는 산모도 보았는데 그 고통이 얼마나 클 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모른다. 입덧의 여부가 체질 탓인지, 아니면 유전적 측면에서 야기되는 것인지는 정확지 않다. 다만, 이상한 것은 한 뱃속에서 나온 자매인데도 나와 막내는 입덧이 심하고 둘째는 입덧 자체를 모르고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다. 입덧은커녕, 입맛이 더욱 좋아져서 평소 먹지 않던 음식까지 당기더란 점이다. 이렇게 서로 다른 것을 보면 분명히 체질적인 작용이 큰 셈인데 막상 임신을 하고서도 입덧을 가라앉힐 마땅한 방법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치료법과 해결 방법이 없다고 해서 입덧의 고통을 무조건 참는 것이 능사가 아니란 거다. 나는 먹은걸 다시 토해낼지라도 무조건 먹었다. 사실상 먹은 게 아니라 밀어 넣었다는 말이 정확한 표현이지만 그땐 그랬다. 아기를 위해서라면 이깟 것쯤이야 했다. 눈물콧물범벅이 되어서 토악질을 하면서도 다시 음식을 먹었더랬다.

 

  두서너 달 만에 끝나는 입덧은 그나마 양반 축에 속한다. 출산하는 달까지 입덧으로 고생하는 산모도 더러 있다는데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아무튼 막내가 걱정돼 인터넷에 '입덧 줄이는 방법'이란 단어를 입력하자 입덧에 관한 질문, 답변, 기사 등이 수십 페이지다. 부지런히 마우스를 움직여 입덧 완화제라는 단어부터 클릭한다. 입덧 완화제라는 약이 나왔지만 의학계에서도 반신반의하고 있고 부작용이 생긴 사례가 있다는 기사다. 로봇이 집안일을 하고 우주여행을 하는 21세기 첨단 시대, 아무리 의학이 발달 했어도 입덧 치료제만큼은 난제인가 보다. 음식도 가려 먹어야 하고 그 음식조차 제대로 먹을 수 없는 산모의 입덧을 가라앉힐 아무런 방법이 없다니 이런 속수무책이 어디 있나 싶다. 무조건 시간이 지나 자연스레 가라앉기를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그래도 증세를 완화 시켜주는 방법이 아주 없진 않겠지 싶어 정보 검색을 하는데 눈에 번쩍 띄는 댓글이 달려 있다. 이미 출산한 여러 산모들에 의하면 그나마 입덧을 가라앉게 해주는 과일이 있는데 그게 바로 어디에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바나나라는 것이다. 특히 바나나엔 비타민 B6과 칼륨이 풍부해서 산모와 태아 모두에게 영양 면에서도 큰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게 아닌가. 나는 기껏해야 입덧 완화에 좋다고 해서 아이스크림을 먹거나, 신 과일을 갈아 먹을게 전부였는데 바나나라니 정말 놀라웠다. 컴퓨터를 켜고 검색만 하면 어떠한 질문이라도 금세 댓글을 달아주는 사람들이 새삼 고맙단 생각이 든다.

 

  제부에게 퇴근 즉시 바나나를 사가라고 일렀다. 갈아 먹이든, 그냥 먹이든 무조건 먹이라는 말도 덧붙여서 말이다. 바나나라도 먹고 막내가 힘을 냈으면 좋겠다. 어떤 녀석이 나오려고 이래 무던히도 지 엄마를 고생 시키나 싶은 생각에 슬몃 얄밉기도 하지만 어떻게 온 생명인데 싶어 이내 고개를 젓는다. '오래 가지 않을 거야. 그러니 조금만 더 참아, 내가 그랬으니 말이다' 지금 동생은 모를 것이다. 지금은 정말 죽을 것처럼 힘들지만 어느 한 순간 거짓말처럼 입덧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예전보다 입맛이 더 좋아져서 그간 먹지 못했던 것을 더 찾게 되리라. 동생의 입덧 걱정이 줄어들자 갑자기 허기가 진다. 냉장고 근처에만 가도 헛구역질 나던 시절이 문득 아득하게 느껴진다. 식성이 좋아 가리는 음식이 없던 나를 유난히 예뻐 해주시던 시어머니 생각도 난다. 첫 아일 가졌다는 기쁨도 잠시 입덧 때문에 아무것도 먹지 못한다는 소식을 듣고 겨우내 말린 무청 시래기를 된장에 무치고 북어찜, 땅콩이 들어간 멸치조림 등  바리바리 싸서 보내주셨던 어머니 생각에 콧날이 시큰하다. 창문을 열고 먼산바라기를 한다. 여전히 바람은 차지만 봄이 저만치서 오는 모습이 보인다. 갑자기 노란 바나나가 먹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