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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계

  • 작성일 2010-06-03
  • 조회수 760

색계

영화가 개봉할 당시에는 그저 야한 영화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던 영화를 최근에 보게 되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히치콕의 플롯이 머리에 맴돌았다. 특히나 극장 장면에 나온 흑백 영화는 그런 의심을 더욱 부채질 했다. 나중에 검색을 해보니 그 흑백 영화 장면은 히치콕의 ‘의심’과 ‘오명’이었다. 그 밖에 다른 영화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내가 봤던 영화는 ‘오명’ 한편이었다. ‘오명’ 역시 여 주인공이 비밀요원으로 등장해 미인계를 쓴다. 그리고 그녀를 뒤에서 후원하는 남성과 여 주인공이 유혹을 해야 하는 남성이 등장한다. 구도만 놓고 보면 ‘오명’과 유사하지만 이 영화는 다른 요인들도 혼합해 놓았다.

우연히 연극 모임에 참여한 여주인공(탕웨이)이 열혈 반일청년인 남학생(왕리홈)의 주도하에 중국 고위층(양조위)을 유혹하는 임무를 띠게 되면서 사건이 시작된다. 영화의 초반부에는 왕리홈과 양조위 두 사람이 하나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즉, 두 사람 모두 각자 타자의 욕망을 추구하며 산다는 점이다. 왕리홈의 경우에는 조국에 대한 충성심, 즉 다시 말해 일본을 몰아내려는 국가의 욕망을 추구한다. 양조위 역시 개인의 욕망보다는 사회가 자신에게 부과한 의무, 사회가 추구하는 욕망에 따라 사는 사람이다.(물론 이 국가와 사회의 욕망은 주체가 상상한 욕망이다.) 반면에 탕웨이는 본래 자신의 열정을 표명할 뿐 다른 의무감에 대한 의식이 없던 여대생이다. 그리고 영화가 전개되면서 처음에는 왕리홈의 욕망을, 이후에는 저항군의 욕망을, 그리고 마지막에는 양조위의 욕망을 추구하면서 점차 자신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 영화의 제목인 색계에서 색을 욕망으로 바꿔 말해보자. 결국 욕망의 경계이다.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과 타자가 바라는 것, 이 사이의 경계는 사실 무척 모호하다. 욕망의 추구가 정당성을 확보하는 경우는 소위 말하는 ‘대승적 차원’에서이다. 내가 개인의 욕심을 부리는 것은 치졸해 보일지라도 타자의 욕망을 추구하는 것은 언제나 갈채를 받는다. 영화의 후반부에 탕웨이가 저항군의 간부에게 절규하는 말의 내용은 무엇이었나? 애초에 자신이 양조위를 유혹하려 했으나 점차 자신의 그의 유혹에 넘어갈지 모른다는 말이다. 대승적 차원에서 저항군의 일원으로서 자기 행동의 정당성을 유지하던 주체가 결국 한낱 개인의 욕정의 차원으로 변하는 상황을 어떻게 책임질 것이냐는 항변이었다. 뒤늦게 왕리홈이 탕웨이에게 입을 맞추며 사랑을 고백하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탕웨이는 그런 순수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경계를 이미 넘어선 것이다.

양조위는 주로 반일 단체 조직원을 붙잡아서 고문하는 일을 한다. 양조위는 왜소한 체격에 표정은 우울한 낯빛을 띠고 있고 탕웨이는 양조위를 처음 보고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는 말을 한다. 양조위 역시 탕웨이의 소개로 옷을 맞추러 양복점에 들른 날 양복점 주인에게 탕웨이가 주요 고객인지를 넌지시 묻는다. 정항군 간부의 말에 따르면 양조위에게 접근했던 다른 여성 요원들은 대부분 발각되어 살해당했다. 양조위와 탕웨이 모두 서로에게 이미 의심을 하고 있는 것이다. 탕웨이는 계획에 따라 양조위에게 접근해 유혹을 한다. 양조위는 그런 시선을 느끼면서 주저한다. 그러다 양조위는 어느 순간 그녀와 가학적인 성행위를 통해 그녀를 차지한다. 양조위는 시선적 갈등을 자신의 권력의 힘으로 억눌러 버린다. 그러는 동안 밖에서는 셰퍼드를 앞세운 경비원들이 삼엄한 경계를 하고 있다. 여기서 양조위는 권력의 남근을 상징한다. 일본의 중국에 대한 권력일 수도 있고, 관료의 민간에 대한 권력, 그 당시 남성의 여성에 대한 권력일 수도 있다. 감독은 권력이란 이처럼 삼엄한 경계, 즉 권력의 경계를 쳐놓고 그 안에서 가학적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점을 드러내고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영화는 ‘오명’과 닮은 점이 많다. 모든 부분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왕리홈이 저항군 간부에게 양조위를 서둘러 제거함으로써 탕웨이를 그만 놓아주자는 주장을 하는데 그와 유사한 장면이 영화 ‘오명’에도 등장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오명’의 가장 유명한 장면은 마지막 장면이었다. 자신이 흠모하면서도 표현을 못했던 여성 요원을 저택에서 빠져나가게 하는 장면, 주인공 남성은 여성 요원을 제거하려는 자들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연기를 하여 서서히 빠져나간다.(이에 대한 복잡하면서도 자세한 내용은 지젝의 저서에서 살펴볼 수 있다.) 반면에 색계에서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환되어 있다. 양조위가 탕웨이에게 다이아 반지를 선물하는 장면에서 탕웨이는 서둘러 나가라는 말을 한다. 뭔가 눈치를 챈 양조위는 ‘오명’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소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급하게 계단을 빠져나가 차 안으로 온 몸을 던진다. 뒤이어 밖으로 나온 탕웨이는 주변을 둘러본다. 자신을 감시할 것으로 예상했던 시선들, 과거 함께 연극을 하던 친구들의 시선이 보이지 않는다. 분명히 다이아반지를 찾으러 들어갈 때에는 곳곳에 배치되어 있던 시선들이 모두 사라져버렸다. 영화에는 직접 나오지 않지만 이미 양조위측에서 그들을 체포했던 것이다. 반면 양조위 역시 탕웨이측에게 넘어간 것은 아닌지 의심을 받고 있던 지라 그런 사실을 전혀 몰랐다. 즉, 탕웨이와 양조위 모두 자신들이 누군가로부터 감시를 당한다는 점을 직감하지만, 탕웨이의 경우에는 그 감시의 시선이 사라진 사실을 모르고 양조위에게 경고를 했던 것이고, 양조위는 자신이 예측했던 시선(저항군)이 아닌 자기 정부 측 감시를 받고 있었다. 이처럼 타자의 시선에 대한 예측은 모두 빗나간다. 애초에 그런 시선, 다시 말해 시선의 계란 주체가 상상을 통해 만든 것이다. 주체는 실재가 아닌 허상이란 시선의 경계 속에서 눈치를 보며 조심하거나 무모한 탈출을 감행한다. 그 시선이 사라지거나 왜곡된 뒤에도 말이다.

탕웨이는 양조위와 격정적인 정사를 벌인 후 나지막이 ‘이러다 들킬지도 모르겠어요.’라는 말을 하고 양조위는 야릇한 미소를 띤다. 물론 표면적으로 탕웨이가 양조위에게 의도한 말은 양조위의 아내나 주변사람들에게 들킬지 모르겠다고 한 말이다. 하지만 탕웨이는 양조위를 암살하려는 임무를 띠고 있으며 결국 관객에게만 그 이중적 의미가 전달된다. 자신의 사적인 욕정이 대승적 욕망을 넘어서는 상황, 넘지 말아야할 경계를 넘어선 점을 들킬지 모르겠다는 말이다. 양조위는 이에 대해 자신과 탕웨이 사이에 비밀이 생겼다는 점 때문에 기뻐한다. 그리고 그녀에게 다이아를 고르러 가게 할 때에도 일부러 비밀 지령을 내리는 것처럼 ‘우리 둘 사이의 비밀’이라면서 자기 명함이 든 봉투를 건넨다. 왕리홈은 그 봉투를 보고 자신들을 잡을 덫일지 모른다고 하면서 막연한 불안을 느끼지만, 사실 그 봉투에든 명함은 양조위가 탕웨이에게 순수한 감정을 느낀다는 표시였던 것이다. 양조위 역시 자신의 사회적 의무나 직책이라는 상징계 내에서 흔들리게 되고 결국 탕웨이가 사형을 받는 상황에서야, 자기가 주었던 다이아반지가 자기 것이 아니라는 부정을 하게 된다. 욕망과 시선, 권력의 경계에서 자기 자리를 지키려다 지쳐버린 양조위, 무슨 일이냐고 묻는 아내에게 그는 마작 놀이나 하라고 한다. 색계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사는 법은 이처럼 놀이에 몰두하며 사는 것일까. 양조위의 슬픈 눈이 오래 기억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