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어머니
- 작성일 2010-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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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어머니
지 석 동
나는 15살이 되서야 근 십 년 간을 듣기 싫게 들어온 슬픈 멍에에서 해방이 됐다.
새 큰어머니가 들어오시던 다음 해봄, 큰아버지를 쏙 빼닮은 4촌 동생을 쑥 낳아
큰아버지의 평생 한을 푼 그 날로 나는 양자갈 고삐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큰아버지는 이십대 초반 어린 조강지처를 몹쓸 병에 보내시고 이리저리 떠돌다
구주탄광에까지 끓여가 생고생을 하기고 둘아 온 몇 안 되는 분 중 하나로
할머니가 부른 환청에 살아남은 기적의 장본인이다.
먹지 못한 중노동을 매맞으며 작업을 하던 어느 날
별안간 어머니가 애타게 부르는 소리가 자꾸 들려, 설사한다 핑계로 뛰쳐나가 두리 번 데는 순간
광구가 폭발해 몰살당하는 바람에 귀국을 시켜 줘, 돌아와서도 상당기간 그 후유증에 휘달리다
몸을 추스르고 출입을 시작하자 할머니는 여인들을 불러 대기 시작했지만 광산폭발 사고 후유증
때문인지 몇 달을 못 넘기고 모두 가버려 종손을 보아야 눈을 감겠다는 팔십이 다된 할머니는
속이 달아 아이 달린 여인네까지 들였지만 그 여인도 얼마 안 되돌아가.
새로 들인 분이 어찌나 표독한지 소문이나 문전에 사람이 끈 끼는 삶을 사시다,
그리도 보고파하시던 종손의 한을 못 푸시고 돌아가실 때
내 작은할머니한테 당신 큰아들이
"이담에 늦게 늦게 손자같이, 아들 둘을 볼 것이니 자네는 볼 수 있을 거야" 하시고 눈을 감으셨다.
독하다는 그 큰어머니와 전쟁 3년을 나고 또 이태가 지나도 아이가 안 들어서자
그전부터 떠돌던 소문이 더 여물어져 큰아버지가 사내구실을 못하는 내시라느니 두 개 있어야 할 것이
하나 박에 없어 그렇다고 자식생산을 포기하고 나를 양자로 들여한다는 말이 돌아 아버지 어머니 귀에
본격적으로 들어온 후로는 아버지도 그리 마음을 정하고 가라했지만
왜 그리도 그 말이 듣기 실을뿐더러 어찌나 슬프던지!
아버지도 아들은 둘이고 딸을 내리 여덟을 두셔 마음 한구석이 늘 섭섭하셨던 거로 기억되는 데
큰아들을 양자 보낸다 결심하시고 가슴이 허전해 얼마나 힘드셨을까.
옛법이 형님한테는 큰아들을 보내고 동생한테는 둘째나 셋째를 주는 법이니 하는 수없이 따라야 했던
아버지 심중을 아이를 키워보고야 어렴풋이 그 아픔을 짐작했다.
내가 잘못을 저지르거나 해 화가 나실 때는 저놈 빨리 큰집에 보내라고 불호령을 내리셔
그때마다 마음 아픔이 심해 나는 왜 양자를 가여 하나, 내 운명을 원망하며 가슴을 주어 뜯었다.
집안 내서도 큰아버지보고 아무개 아비 큰어머니보고 도 아무개 어미라 불러
동네 여인네들이 빨래하는 곳이나 우물가를 지나가려면 "아무개가 아부지 엄마 한다네" "그럼 그래야지"
그 소릴 들을 때마다 어린 마음에 못이 되 마냥 슬프고 서러워 남몰래 많이도 울었다.
후에 족보를 보고 알았지만 가깝게 조선조 개국 때부터 기록된걸 보면 자그마치 6백년동안
후사가 없어 양자를 왔다 다시 본가로 보냈다 다시 양자를 보내는 일이 이어져 온 자손이 귀한
내력을 알고서, 벌써 수 백년 전부터 나 같은 슬픔을 격은 할아버지들이 많았음에 그분들이
당신들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부모와 형제들 곁을 떠나갔을 슬프고 가여운 마음을 짐작 할 것 같다.
그것도 나같이 3촌간이 아닌 먼 촌수에도 갔으니 그 심정이 어떠했을까.
나중에는 재산보고 간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알고 일종의 거래감도 느껴져 배 곱음을 피하려
눈물 흘리고 갔을 심사도 얄궂었으리라 싶다.
큰아버지도 큰어머니도 내게는 정말 아낌없으셨다.
여북하면 주검이 굴러다니던 무서운 6.25를 큰집에 가서 났을까.
큰아버지가 전쟁이 나고 얼마 안되어 나를 데리러 오셔, 입이나 덜어준다는 말로,
당신 목 자식을 데리러 포천에서 백이 십리 인민군 틈을 숨어 숨어와 나를 데리고 가셨으니
그분이 자식에 대한 사랑이 어떠했나를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큰어머니도 남들에게는 독한지 몰라도 내게는 살뜰해 그 굶주린 적 치하에서도 쌀을 구해다
보리밥에 옹심이 박 듯해 나만 떠주셨는가 하면 남들은 생각도 못하는 과일을 줄창 댔으니 그 사랑이
얼마나 깊었나 이제야 느낀 그분,
전쟁 후 시름시름 앓으시다 그리도 가슴에 두고 굴리던 나를 못 보시고 세상을 떠 어느 풀섶에 묻혔다,
묻었던 어른들 다 가고 잊혀졌다.
큰아버지와 걸어간 그 백이 십리 고향길이 계기가 되어
그 후 아버지를 따라 축석고개를 넘다 인민군검문에 걸려,
지금 가족 만나러 철원에 가는 길이라고 임시변통을 해 간신히 아버지가 살아났고
철드는 이십 고개 어느 가을, 심중에 여인이 보고 십은 마음에 서대문에서 돈암동까지 전차로가,
내 마음이 얼마나 기울었나 본다고 오기로, 미아리 고개부터 워카(국화) 발로 종일 걸어간 해설핏 때,
마을이 보이는 무밭에서 대가리 퍼런 무 뽑아 먹으며 해지기 기다렸다 들어간 게 세 번째고 마지막이다.
큰아버지 50살 때 오신 큰어머니는 내 운명을 풀어주었을 뿐 아니라, 거푸 아들을 낳아
할머니 예언도 적중시켜 입지를 공고히 함은 물론 매사에 바지런하고 싹싹해서 동기간에
이웃에 인심을 사 믿음이 고이고 웃음이 모여, 오신 몇 년에 삶에 빛이 돌고 윤택해져
마루에 쌓이는 가마니가 늘고 부엌에 들어가는 것이 많아 부뚜막도 굴뚝도 바빴다.
허름하던 울타리도 퍼렇게 살이나, 철 때라 꽃피고 열매 달려 지나는 눈들의 부러움을 샀다.
큰어머니는 장수하셔 구십이 거반 된 5년 전 여름, 저녁 잡숫고 거실에서 TV보시다
거짓말 같이"나 간다" 하고 고냥 앉아서 눈감으신 게 이세상의 연과 끝이었다.
나를 기쁘게 해준 사촌들이 벌써50이 넘어서 든든한 울타리를 이루고 살아 가끔 만가면
하마터면 아버지 어머니 두 분씩을 모시고 살 뻔한 이야기를 꺼내 웃는다.
지금은 딸 낳으면 비행기 탄다는 말같이 딸이 더 좋다는 세상이 됐지만
한40년 전 만해도 남의 집 자식이면 으레 대를 이어야 했고 그 대를 못 있게 생기면 남의 자식이라도
본관만 같으면 재산을 다물려주고 들여다 족보상 후사를 이어야 죽어서 조상 앞에 가서 면목이 서던
가부장적 도리와 윤리가 퍼렇던 세상이,
생판 모르는 고아들은 물론 지체장애아들까지 입양해서
눈물 뜨거운 사랑으로 기르는 세상이니 불과 몇 십 년 사이에 우리의 의식이 참 많이도 변했다.
다만 지금도 우리아이들 상당수가 외국으로 입양된다하니 다같이 생각해볼 심각한 문제다.
2010. 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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