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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사슴비>가 찾아오는 시간

  • 작성일 2011-09-30
  • 조회수 540

그날,
<윤>과의 대화가 끝나갈 때쯤,
나는 영화 <붉은 사슴비>를 생각하고 있었다. 인디언 관련 영화였고, 실제 사건을 다루었다는 것, 그리고 <발 킬머>가 주인공인 작품이었다. 물론, 그 외엔 더 기억나는 게 없었고, 왜 그 영화를 떠올렸는지 나로서도 알 수 없다. 어쩌면, 며칠 전 보았던 인디언 다큐멘터리 탓이었을 수도 있다.
왼 어깨를 드러낸 복장의 아홉 살 <포카혼타스>는 백인들의 욕망이 투사된 것이라든가, 어린 시절 익히 들었던 <꼬마인디언>이 실은 학살의 노래였다든가, 라코다 부족은 미 정부군을 물리친 최초의 인디언들인데, 어디서 굴러왔는지 모를 일개 소위가 싸우는 법을 가르쳐 준다는 <늑대와 춤을>의 황당한 상황 등을 통해 백인들에 의해 왜곡된 인디언의 이미지를 바로잡으려 애쓰던 50분짜리 EBS 프로그램이었다. <붉은 사슴비>는 참고자료처럼 스쳐가던 몇몇 영화들 중 하나였고, 그 중 내가 본 유일한 영화이기도 했다.
 
 
그래도,
유쾌한 날이긴 했다. 
오랜만의 회합(會合)이었고, 벗들은 열심히 맥주를 마셔댔다. 광고회사니, 건축설계사니, 방송작가니, 같은 현재를 자랑하지도 않았고, 길게는 14년, 짧게는 1년만이라는 각자의 시간적 조우에도 그다지 회상을 공유하지 않았다. 두어 달 뒤면 자유라는, 고 3 딸을 둔 전업주부가 있었고, 물 건너 출장 다녀온 기념이라며 폴란드산 위스키를 들고 온 가구회사 영업사원이 있었고, 내일 아침 우이도로 촬영 떠나야 한다는 영화사 스태프 등이 있었을 뿐이었다. 심각했던 순간이라면, 이러다가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 같아, 아무것도 되지 않을 것 같아, 결혼 후 처음으로 모임에 나올 결심을 했다는 여자 동기의 한마디에 마치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이라도 하듯 좌중이 몇 초간 숙연해졌던 것이랄까? 그나마도 다음엔 경기도로 1박을 떠나보자는 어떤 선배의 대책 없는 제안에 저마다 춘천이니 가평이니 살을 붙이는 바람에 묻혀버린. 
옛날처럼, 새벽이 되어서야 자리가 파한 것도 분위기를 좀 더 돋군 요인이었다. 자정을 넘어서자 그때부턴 모두들 시계를 거들떠보지 않았고, 아침 몇 시까지 출근이네 투덜거리면서도 받은 잔을 거부하지들 않았으며, 카페엔 <처진 달팽이>의 <압구정 날라리>가 흘렀고, 누군가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태우러 오라 ‘명령’했고, 새벽 4시경 나는 남몰래 구토를 하고 돌아왔다.
 
 
그게,
못마땅해서였는지 아쉬워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함께 택시를 타고 귀로에 오르며 시작된 <윤>의 넋두리는 첫마디부터 냉했다.
- 경기도에서 1박 이라? 좋지.......안 그래?
- 나쁠 건 없지.
- 모여서 뭘 할 건지도 모르면서 말이야. 백일장이라도 치를 량인가?
- 괜찮은 아이디어네.
- 너도 괜찮은 아이디어 좀 내보지 그래?
- 기왕이면 상금도 걸었으면 좋겠네.
- 하여간........
<윤>이 혀를 끌끌거렸다. 하기야, 모여서 뭘 할 건가? 추억이라도 리메이크 할 것인가? 나로서도 그 점은 수긍한다. 그러나 그의 태도는 영 거슬린다.
-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 이 밤이 2011년이라는 게 불만이지.
<윤>이 말했다.
- 그래서 서로들 공모했던 건지도 모르고. 넌 아직도 소설이란 거 쓴다는 거지, 넌 아직도 운동이란 거 한다는 거지, 하는 말들을 찾지 못하게끔.........
공모라니?
하지만, 어쩐지 반박하고 싶지 않은 성질의 단어였다.
- 그걸 확인하는 자리는 아니었잖아.
- 아무렴. 다들 잘 살고 있는가, 확인하는 자리였지. 그렇지. 잘 살고들 있는 거야. 
너야 말로.
말보다도 그 억양이 듣기 불편해 그렇듯 받아치고 싶었지만, 난 그냥 삼켜버렸다. 설령, <윤>의 말대로 저마다 소설이니 운동이니 꺼내들고 격한 논쟁이라도 벌였다면, 그래서 “네가 그런 말할 자격이 돼?”라는 말이라도 오갔다면, 그건 진지하다기 보단 차라리 우스꽝스러웠을 것이다.
- 새벽 네 시까지 취할 만큼 말이지.
내 실없는 농담에도 <윤>은 차창 밖으로 시선을 고정시킨 채였다. 택시는 어느덧 종로를 지나 서대문으로 진입했고, 라디오에선 <로라 브래니건>의 Self Control이 흘렀고, 거리는 끝나지 않은 어제와 시작된 오늘이 곳곳에서 충돌했다.
<윤>이 무슨 생각, 어떤 기억들을 떠올리고 있는지는 나로서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윤>의 말은 틀리지 않다.
싫다는데 왜 자꾸 전화하느냐며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어버렸다는 이의 소식에도, 그 친구는 도무지 이 모임에 합당한 회원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 아예 전화를 하지 않았다는 누군가의 말에도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회계사가 되겠다며 학생운동이고 동아리고 다 팽개친 채 홀연히 노량진으로 사라졌던 그들 중 누군가에 대해서도, 그래서 회원 전체가 그를 신랄하게 비판했던 사실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름 모를 후배가 장(長)으로 있다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10년 째 아무런 성과도 없는 시민단체에 대해 그 자식들은 하는 게 뭐냐는 애정 어린 비난조차 오가지 않았다. 나 또한 옆에서 술잔을 매만지던 <윤>의 검지를 새삼 흘낏거리며 신입생 시절 교내 5.18 집회에서 혈서를 썼던 그를 말없이 추억할 뿐인, 그깟 흉터가 이제와 무슨 대수냐는, 그래, 그런 자리였다.
- 그래도 예전만큼 쓸쓸하진 않아.
내 말에 대한 대답이었던가? 한참 뒤, <윤>이 중얼거렸다.
- 스물에 심각했든, 서른엔 지루했든, 이젠 서로들 닮아버렸으니까. 다만.......
- ...........
- 생각지 않은 곳에 그림자를 떨어뜨려 놓고 온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어. 그 그림자는 내 궤적을 쫒지만, 내가 자신인지 확신하지 못해 항상 그만큼의 거리를 유지하지. 이해해?
난 잠자코 어두운 거리를 응시했다. 글이라도 쓰는 것처럼 다음 말이 잘 생각나지 않았고, 택시 기사가 백미러로 우리를 훔쳐봤다.
- 문제는 왜 그렇게 되었느냐는 거겠지.
내가 말했다.
- 어쩌다 보니 그렇게 돼서 말이지.
- 무슨 <네루다>의 시 같네. 
- 나는 시를 썼으니까.
- 이젠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되었고.
- 하하.
우린 쓰게 웃었다. 이상하게 쓴 웃음이었다.
 
 
<붉은 사슴비>를 본 것은,
20년 가까이 지난 일이다. 스스로 인디언임을 모른 체 살아가던 <발 킬머>가 어느 날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계기로 자신의 정체성을 자각한다는 줄거리였던 걸로 기억한다. 인상적인 장면이나 대사, 조연배우, <발 킬머>의 직업 같은 것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나는 그 풍경을 되새김 했을 뿐이다. 국가고시 아르바이트를 할 때였다. 출제위원들과 호텔에 며칠 감금된 적이 있었는데, 덕분에 일과가 끝난 저녁이면 교수들이 심심풀이로 들고 온 영화들을 함께 볼 기회가 있었다. <붉은 사슴비>는 두 명의 교수와 보았었다. 남자 교수는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턱을 괸 채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 자세로 시청했고, 여자 교수는 <발 킬머>가 위험에 처할 때마다 Oh, Shit!를 나지막이 연발하곤 했었다. 같은 방에 있던, 나보다 두 살 위였던 신학대 휴학생은 영화 중반부 쯤 차나 마셔야겠다며 나간 후 돌아오지 않았다.
 
어쩌면,
그건 기억이 아니라 나란 인간이 사물을 관조하는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기억의 형태란 결국 그런 것이다. 뛰놀던 사막여우는 죽고, 종래엔 뼈와 사막만이 남는 것이다. 누군가는 뼈를 취하고, 누군가는 사막을 취하고, 누군가는 쓸쓸한 모래바람을 취하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리고 그 불가항력의 풍화 속에서 서로들 망각에 흔들리는 것이다.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 같아, 혹은 아무것도 되지 않을 것 같아. 나 역시도.
 
 
거울을 본다.
지금의 내가 과연 <나>일까?
타인들의 시선에 재단된 외피를 두르고, 그 익숙함과 자잘한 다행스러움에 깊이 빠져 세월 저편의 그림자들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도 <너>와는 애써 다르다는 듯 이따금 쓸쓸한 모래바람이나마 회상하며. 하지만,
<살아감이란 네게 네 존재를 묻는 것>이라고 앙드레 지드는 말했었다. 정체성이란, 어쩌면 그것의 이음동의어(異音同義語) 일 것이다. 그리고 그건 묻는 게 아니라 답해야 하는 것이며, 그것의 획득은 나의 흔적들을 끌어안는 것에서 비롯된 발효물인지도 모른다. 볼품없지만, 가장 가깝고 명확한 진실을, 잊지 않고 있음을.
오늘, 이 <붉은 사슴비>가 찾아오는 시간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