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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하부인

  • 작성일 2012-01-05
  • 조회수 653

임하부인(林下夫人)
   
으름은 산비탈이나 능선에는 없지만 골짜기에 들어서면 쉽게 볼 수 있는 덩굴식물이다. 다래넝쿨처럼 다른 나무를 타고 올라가 서로 얽히고설키며 살아간다. 으름덩굴의 얼굴은 다름아닌 열매가 아닐까 싶다.
초봄에 한 개 또는 서너 개씩 열매를 맺어 초록색으로 영글다 추석 무렵이면 연한 갈색으로 익어간다. 그리고 완숙단계에 이르면 겉껍질이 세로로 금이 가며 마침내 쩍 벌어진다. 벌어진 속살은 순백의 하얀색이며, 부드럽고 촉촉한 내피에는 까만색의 씨앗들을 무수히 감싸고 있는 과육을 품고 있다.
 
새해 첫 날, 흐린 날임에도 불구하고 첫 산행을 위해 홀로 집을 나섰다. 싸늘한 겨울, 새벽공기를 가르며 차를 몰았다. 혼자라는 것에 대한 외로움과 고독함이 산 입구에 도착할 때까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두타산 기슭에 위치한 마을에 도착하여 올라가는 길은 골짜기를 택했다. 마을에는 벌써 희붐하게 밝았지만 골짜기 산길은 아직도 캄캄하다. 어둑어둑한 오솔길로 접어드니 길 옆에는 소나무 외에 모두 흑백인데, 가끔씩 나타나는 진한 색깔의 잎사귀가 자꾸만 신경을 건드렸다. 어둠속에 분간이 되지 않았지만 이 녀석들은 분명 인동초(忍冬草)일 거라고 넘겨짚었다.
마침내 산 정상 가까이 올라가니 새해 아침은 훨씬 밝아지고, 멀리 바라보는 시내의 불빛이 모두 사라질 즈음, 등산길 초입에서 만났던 초록색 잎사귀의 넝쿨들이 여기저기에 무더기로 흩어져 있었다.
인동초라고 생각했던 그 넝쿨을 자세히 보니 으름덩굴이었다. 올 겨울 들어 벌써 몇 차례나 추위가 몰아쳤음에도 잎사귀는 생기를 잃지 않고 온전하게 제 빛깔을 넝쿨에 달고 있었다. 어떤 잎사귀는 원래모습 그대로, 또 어떤 잎은 비록 얼긴 하였으나 죽지 않고 추위를 견디고 있었다. 으름 덩굴에서 겨울을 견디는 힘은 인동초보다 한 수 위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내 어릴 적 먹을 것이 귀하던 때, 봄이면 깊은 산에서 고사리며 참나물이며 취나물을 뜯는 것은 아낙네들의 몫이었고, 가을이면 머루, 다래, 돌배같은 산 열매를 따는 것은 남정네들의 몫이었다.
머루나 다래는 꽤 높은 산골짜기에 들어가야 만날 수 있지만, 으름은 동네 가까운 뒷산 골짜기에서도 흔히 볼 수 있었다. 한여름을 지나 벌초할 때쯤이면 아직 덜 익었고, 추석을 지나 성묘할 때가되면 먹음직스럽게 익어간다. 어릴 때는 귀한 먹을 거리였기에 좀 덜 익은 것도 채취하여 보리쌀 단지에 묻어 두었다가 숙성되면 먹기도 했다. 그래서 으름덩굴은 나의 유년을 함께했던 친한 나무 중의 하나다.
지난봄에 으름덩굴에서 복주머니 모양의 자주색 꽃을 만난 적이 있다. 처음 본 순간 ‘아~ 으름꽃이 이렇게 생겼구나!’ 라고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자주색 비로드로 만든 작은 복주머니라고나 할까? 귀엽고 앙증스런 모습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지난 추석 무렵에는 뒷산 골짜기에서 으름열매를 다시 만났다. 유년의 시절과는 달리 지금은 열매에 욕심을 내는 사람도 없어 여기저기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먹음직스럽게 잘 벌어진 열매를 한 개 따서 먹어보았다. 어릴 때는 그렇게 맛있게 먹었는데 지금은 씨를 골라내는 것 자체가 여간 힘이 들지 않는다.
 
‘으름’이란 이름을 얻게 된 연유도 처음 알았다. 열매를 먹다가 씨앗을 씹으면 그 느낌이 얼음 같기도 하고 과육이 투명한 얼음 빛깔을 띤다고 하여 ‘으름’이라는 이름을 얻었단다.
으름의 또 다른 이름을 또 알았다. 혹한의 추위에도 견디는 힘이 놀라워 자세히 알아보니 임하부인(林下夫人)이라고도 한단다. 식물에는 원래 이름 외에도 수많은 별명이 있는 것을 보았지만, 으름덩굴에 대한 생각을 종합할 때 ‘임하부인’이라는 것이 이렇게 절묘하게 맞아 떨어질까 하고 속으로 놀랐다.
숲속의 여인이라고 해석하면 될까? 잘 익은 열매에 어떤 사람이 이렇게 부인(夫人)이라는 귀한 이름을 붙여 주었을까? 멋진 이름을 생각하니 으름덩굴의 신분은 정경부인 못지않게 한 층 더 격이 높아진다.
 
그러나 임하부인의 원래 뜻은 열매 모양이 여인의 음부를 닮아서 얻어진 별명이라고 한다. 잘 익어 벌어진 열매의 모습이 여인의 깊은 속살, 그 은밀한 곳을 상상하며 지어 낸 짓궂은 이름이라는데 엉큼하거나 외설스럽지 않은 익살로 오히려 미소가 지어진다.
그런가하면 지난 봄에 만났던 으름꽃을 연상도 부인 격에 잘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 꽃의 색깔과 모양에서 고귀한 부인이 지니던 자주색 비로드의 복주머니가 연상되기 때문이다. 자주색 비로드는 내 어머니의 모습이기도 하다. 어릴 적 희미한 기억으로 비로드 옷감이 한 때 유행하던 때가 있었다. 그 비로드로 한복을 만들어 입으시고 좋아하시던 어머니가 연상되기에 어머니의 꽃이라고도 부르고 싶다.
 
이제부터 산행에서 으름을 만날 때는 임하부인으로 만나야겠다. 청명한 날 그 여인의 느낌 그대로 아름다운 임하부인과 잠시 연분홍 사랑을 나눌 수도 있고, 아니면 곱게 단장하신 어머니와 동행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오늘도 비록 홀로 간 산행이었으나 임하부인을 만났으니 어찌 외롭다고만 할 수 있었을까? 산행할 때의 정취와 감미로움이 한 가지 더 생겼으니 이후 산행의 즐거움이 벌써 전해오는 것 같다. 특히나 임하부인은 겨울에도 생기가 넘치니 사계절 홀로 가는 산행도 이젠 외롭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