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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돌아온다

  • 작성일 2012-02-10
  • 조회수 382

별이 돌아온다
 
 
 
 
 
 큰엄마의 집에서 살게 된 것은 내가 열두 살 때였다. 그때 부모님은 수원에 땅을 사서 모텔을 지었다. 공설운동장이 있는 허허벌판 한 귀퉁이에 세운 4층 건물이었다. 건물은 오렌지색이라고 우기기에는 좀 어중간한, 내가 보기엔 분명 똥색 페인트가 칠해져 있었다. 황막한 벌판에는 잡초만 무성했다. 이런 황무지에 건물을 지은 부모님의 마음이 헤아려지지 않았다. 밤이 되면 공설운동장건물은 거대한 공룡처럼 잠이 들었다. 숨을 쉴 때마다 지붕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듯 했다. 아니 어쩌면 우리 모텔은 정말 저 공룡이 싸질러놓은 똥덩어리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색깔이 너무 잘 어울리지 않은가. 이런 나의 비아냥거림에 상관없이 모텔에는 ‘혜성장’이라는 우주적인 이름이 붙었다. 그리고 이름처럼 거창하게 우리 가족의 재산을 몽땅 쓸어 가버렸다. 그 놈의 혜성을 피해 야반도주를 하던 아버지는, 너무 급하게 도망가야 해서 나를 데려갈 수 없다고 했다. 덕분에 나는 큰엄마의 집에 얹혀 살게 되었다.
 
  집안이 쫄딱 망하는 바람에 큰엄마의 집에 살게 됐다고 해서, 내가 눈치를 보거나 의기소침한 어린이가 된 것은 아니다. 그러기엔 난 좀 어리버리한데다 세상사를 이해하기엔 다소 애매한 나이였다. 큰엄마의 집은 낡은 양옥이었다. 마당에는 대추나무와 잡목들이 어지럽게 심겨져 있었고 마루에서는 낡고 해묵은 냄새가 났다. 가구들은 모두 짝이 맞지 않았다. 자개가 떨어져 나간 옷장 옆에 붉은 나무화장대가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식이었다. 부엌은 신발을 신고 나가 싱크대도 없이 엎드려서 음식을 해야 했다. 화장실은 마당을 지나 대추나무 아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유난히 크고 달게 열리던 대추열매는 그 화장실 덕이었나 싶다. 방은 두 개였는데 하나는 오빠들 셋이 나눠 쓰고 나는 큰엄마와 함께 잠을 잤다.
 
  큰엄마는 얼굴이 넙대대하고 양 볼이 붉었다. 못난 얼굴에 손가락도 짧고 뭉툭했다. 하지만 음식솜씨만은 환상적이었다. 큰엄마는 고기를 섞어 맛난 동그랑땡을 빚기도 하고, 구수한 된장찌개를 끓여내고, 상큼하고 윤기 도는 김치를 만들어냈다. 식혜나 수정과를 담그고 고구마빵 찌고 쌀과자를 튀기기도 했다. 예쁘기는 했으나 음식솜씨는 제로에 가까운 엄마와 살았던 나로서는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내 얼굴은 금새 동그래지고 살이 올라 볼이 빵빵해졌다. 게다가 어린 남동생에게 시달리던 것에 비하면 오빠들이 확실히 나았다. 그때 이미 중고등학생이었던 오빠들은 통기타로 노래를 불러주거나 그림을 그려주었다. 처음으로 ‘너무 진하지 않는 향기를 품고~’라든가 ‘가나다라마바사’로 시작하는 노래를 불러보았다. 겨울에는 오빠들이 만들어준 썰매를 타고 개천을 헤매고 대보름이면 쥐불놀이를 배웠다. 그 시절, 나는 혜성에 쫓겨 달아난 엄마 아빠 생각을 별로 하지 않았다.
 
  큰엄마는 말이 별로 없었다. 대체로 뚱하니 잘 웃지도 않았다. 큰엄마의 집에는 이웃이 마실 오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큰엄마도 옆집에 놀러가거나 멀리 외출도 하지 않았다. 큰엄마는 짝이 안 맞는 가구처럼 집에 붙어 있다가 아이들이 돌아오면 부엌에 내려가 밥을 차렸다. 큰엄마는 내게도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오늘 학교가 어땠는지도 묻지 않았고, 아빠 엄마에게서 연락을 받았는지도 묻지 않았다. 내가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엄마 아빠가 어쩌고 사는지도 전혀 묻지 않았다. 그저 밥을 해주고, 수저에 반찬을 얹어 주고, 걷어찬 이불깃을 다시 여며주었다.
 
  가끔씩 큰엄마는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곤 했다. 숙제를 한다고 마루에서 뒹굴고 있거나, 만두를 빚는다고 장난을 치거나, 오빠들에게 매달려 어리광을 부리는 내 모습을. 그저 지그시 바라보곤 했다. 나는 무심한데다 어린 계집아이였으므로 그 시선을 무엇을 담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게다가 그 시선은 곧 나를 떠나 다른 곳을 바라보곤 했다. 큰엄마는 가끔 공룡이 싸고 가버린 똥덩어리처럼 한 자리에 못 박혀 있을 때가 있었다. 하염없이 대문을 바라보며 열리기만 기다리는 사람처럼. 이미 집으로 돌아올 사람은 다 왔는데도. 미련스럽게.
 
  세월이 한참 흘러 열두 살의 그해에 내가 큰엄마 집에 살았다는 게 가물가물 해질 즈음, 엄마가 전화를 걸어왔다. 큰엄마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응급실에 있다고 했다. 전화 속 엄마의 목소리가 치직치직거린다. 몇 십 년 만에 지구에 온다는 혜성이 전파방해라도 하는 것인가? 그 덕분에 나는 잠시 큰엄마의 뭉툭한 손가락과 불그스레한 볼을 생각했다. 툇마루에 기대 앉아 가만히 문밖을 내다보고 있던 뒷모습도 떠올랐다.
“그래서, 괜찮으셔?”
“아냐. 의식도 아직 안 돌아오고.......얼굴이 아주 하얘졌더라. 바짝 마르고......”
얼굴이 하얗고 여윈 큰엄마라니! 내 생각을 엿들은 듯 엄마가 중얼거렸다.
“그르게......그러니까 좀 예뻐 보이더라고.”
나는 문득, 음식을 잘하는 손재주보다 어리고 아름다운 얼굴을 가지고 태어났더라면 당신은 좀 더 만족스러운 일생을 살 수 있었을까, 생각해 봤다. 그랬다면 사랑받고 사랑하는 ‘참으로 이상적인’ 여자의 삶을 살 수 있었을까?
 
  이제는 그 휑한 들판은 사라졌다. 공설운동장도 무너지고 똥색 모텔도 없다. 유치했던 ‘혜성장’이란 이름만 남아 가끔 우리 기억을 깨울 뿐이다. 나는 일 년쯤 큰엄마의 집에 살았던 것 같다. 그 후에는 다시 부모님을 만나 서울로 이사를 갔으니까. 그 후로는 큰엄마를 만난 게 언제였던가. 큰오빠 결혼식 때가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신경질적이고 시니컬한 이십대를 살고 있었다. 어린 시절과 달리 나는 싸늘한 표정을 지었고 오빠들에게 말을 걸지도 않았다. 우리는 그럴 수 있는 사이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유는 똥 싸고 도망 가버린 공룡 때문이다, 라고 믿었다. 아마 큰엄마가 이대로 죽는다 해도 나는 그녀를 만나지 않을 것이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괜히 심란해진다.
 
  별이 돌아 온다. 몇 십 년이 걸리더라도 별이 돌아온다는 건 멋진 생각이다. 길게 꼬리를 끌며 나를 향해 달려오는 별이 있다면, 기다림에 대한 보상이 되지 않을까? 혜성이 재앙을 끌고 온다는 옛사람의 생각은 버리고 싶다. 차라리 혜성은 지구의 궤도를 벗어나 저 우주로 새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으면 좋겠다. 이제야 낡은 집을 벗어나 기다림을 멈추고, 가슴에 담은 슬픔도 잊어버리고 여행을 떠나야 할 시간이 오고 있다고, 나는 당신에게 속삭여 주고 싶다. 나이가 들수록, 덕분에 삶이라는 쓰고도 달콤한 시간을 먹어갈수록, 나는 당신에게 미안하다.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닌데도, 내가 어찌 할 수도 없이, 나라는 존재가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고 죄가 되고 말았다. 변명할 수 없고 어찌 할 수도 없었기에 차갑게 외면한 나를 용서해주길. 그래서 이제 만나도 헤어져도 아픔을 주는 일 따위 없기를. 부디 당신의 다음 여행은 평안하고 아름답기를, 나는 별에게 기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