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이야기
- 작성일 2006-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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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서자(庶子)다.
남궁세가의 서자다.
하늘을 닮은 연무장에 수많은 무인들이 정렬해있다.
푸른색 무복위로 수놓아져 있는 회색 나선무늬.
안휘(安徽)의 패자. 남궁세가다.
고풍스런 단상위로 청룡포의 중년인이 올라선다.
강렬한 발걸음, 무겁게 가라앉은 눈동자.
보보(步步)마다 형용키 어려운 위엄이 흘러나온다.
검의 성지, 남궁의 가주, 제왕검(帝王劍) 남궁백(南宮白)이다.
그에게서 흐르는 위엄이 모두를 굴복시킨다.
대지마저 침묵 한 채 고요를 이룬다.
거칠지만 강렬한 음성이 터져 나온다.
그건 하나의 명령이었다. 절대적인 언령.
거부할 수 없는 손길 이었다.
그 이후로 나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난 남궁세가의 서자다.
지독한 현실에서 도망친 지 5년이 흘렀다.
성과 이름을 버린 지 5년이 흘렀다.
아무도 찾지 않는다. 그렇게 5년이 흘렀다.
******
-또르르륵
여름의 뜨거운 열기를 담은 땀이 거친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사내의 손에서 거침없이 도끼가 움직인다.
-쿠웅. 쿠웅.
몇 번의 도끼질에 나무는 비명을 지르면 쓰러진다. 단단한 암석과 같은 굳은살과 역동적인 팔 근육이 힘차게 꿈틀댄다. 봉두난발의 사내였다. 수년간 자르지 않은 듯, 멋대로 자란 난 털이 얼굴을 뒤덮고 있어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다.
사내가 어둑해 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태양은 서쪽 하늘로 사라지고 어슴푸레한 붉은 빛이 땅을 뒤덮고 있었다. 사내는 반듯하게 잘려진 나무를 짊어진 채 걸음을 옮긴다.
-쿠웅
묵직한 소리를 내며 내려진다. 결 좋게 잘려진 나무 조각들 이었다. 무게도 만만찮게 보이는 것이 한 사람이 가져왔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이화장의 총관 구호는 신기한 듯이 사내를 바라보았다. 흐트러진 머리칼과 수염은 그의 얼굴을 뒤덮고 있었다. 사내는 말이 없었다. 수차례, 거래를 해왔지만 사내는 과묵하기만 했다. 다소 건방져 보이기도 했지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사내가 가져온 나무덕분 이다. 나무의 품질은 대단했다. 재질은 흔희 볼 수 있는 나무인데, 잘려진 면이 깔끔하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얼마의 돈을 치러주자 사내는 말없이 돌아선다.
구호는 돌아서는 사내를 부르려고 했다. 무슨 얘기라도 하고 싶었다.
‘이 나무의 비밀이 무엇인지. 자네의 이름은 무엇인지.’ 하고 싶은 말이 머리에 맴돌았다.
그러나 끝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돌아선 그의 등과 어깨는 유난히도 넓고 컸지만, 뒷모습은 너무도 쓸쓸하고 고독해 보였다.
말이 없는 사내.
마을 사람들은 그를 아(啞)라고 불렀다.
******
영춘객잔(永春客棧). 이화촌의 유일한 객잔이다.
너저분하게 쌓여 있는 먼지와 이리저리 뒹굴고 있는 의자는 촌스런 이름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노인과 사내가 있다. 객잔 주인인 듯 보이는 노인은 손님은 상관없다는 듯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사내 또한 무관심하게 술을 마시고 있었다.
5년 동안 변함없는 모습이었다.
‘아’는 술을 마신다. 한잔, 두잔...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은 더욱 심해져 간다. 무언가를 지우려는 듯이 술로써 위안을 삼은 채 마시고 마신다. 그럴수록 선명해지는 기억 속에서 더욱 괴롭기만 할뿐이었다. 그때, 5년 동안 반복되던 일상 속에서 자그마한 변화가 일어났다.
“더럽게도 쳐 먹는군.”
어느새 눈을 뜬 노인이었다.
“그냥 똥물이나 쳐 먹지 그러냐. 클클클!”
“...”
“무엇이 무서운 것이냐. 그렇게 도망치기만 해선 더욱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질 뿐이야. 한심한 꼬락서니 하고는. 클클클!”
‘아’는 지금까지 굳게 닫혀 있던 입을 열어 ‘아니라고. 난 도망치는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입은 떨어지지 않았다.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노인의 말은 사실이니까.
“우습구나, 우스워.”
노인의 말이 가슴을 찌른다. 온몸이 잘게 떨린다.
화가 난다. 노인을 향해서가 아니다. 노인 말대로 이런 비참한 모습의 자신에게 화가 난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나는 도망자일 뿐이니까.
‘아’는 쓸쓸히 일어났다. 그리곤 노인의 시선을 피하듯이 밖으로 나간다.
“또 도망치는 것이냐.”
문고리를 잡은 손이 멈칫거린다.
“네 녀석이 또 도망치는 건 상관없다만, 재밌는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지.”
이런 상황에서 무슨 재밌는 얘기란 말인가. 가슴속의 불길이 이렇게도 치밀어 오르는데.
“들어보면, 네 녀석도 좋아 할 거야.”
노인의 말에 무언가에 이끌리 듯 자리에 앉았다. 나무의 마찰음이 비명소리처럼 들린다.
노인은 계속 말했다.
“남쪽의 벌판에는 사자무리들의 성이 있지. 그곳에서 사자들은 무소불위(憮所不僞)의 권력을 가지고 있어. 그런데 어느 날...”
***
드넓은 초원에 자리 잡은 사자의 성에 늑대가 찾아와 사자들에게 말했다.
‘이곳에서 사라져라. 그러면 목숨만은 살려주지.’
사자들은 늑대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저 약 하디 약한 늑대 놈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다. 사자들은 날카로운 이빨을 내밀어 말했다.
‘잡아먹기 전에 꺼지라고.’
그런데 늑대는 오히려 큰 소리를 치며 사라졌다.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며칠 후에 늑대가 다시 나타났다. 늑대에게는 일행이 있었다. 날카로운 독니를 번뜩이는 소름끼치는 뱀이었다. 그러나 사자들은 그들을 비웃었다. 누구도 우리를 위협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사자들은 자신들이 최강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사자들은 화가 났다. 이 겁도 없는 약한 놈들의 만용에 사자의 위엄에 손상이 갔다고 생각했다. 사자들을 포효를 내질렀다. 만물의 굴복을 알리는 절대자의 외침이었다.
그런데 의외의 상황이 벌어졌다. 그 절대적인 외침 앞에서도 뱀은 너무도 태연히 서있는 것이 아닌가.
-캬아아악
이번엔 뱀의 울음소리가 울려 펴졌다.
수만 마리의 벌레가 온몸을 기어 다니는 듯한, 소름끼치는 소리였다. 그리고 놀랄 말한 일이 벌어졌다. 절대적 위용을 자랑 하던 사자들이 하나둘씩 쓰러지기 시작 한 것 이다. 그 제서야, 사자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절대자의 권위가 흔들리기 시작 한 것 이다. 사자들은 뒤늦게 깨달았다. 늑대의 말이 사실이었다는 것을...
독(毒)!
뱀의 독이 사자까지 물어 죽여 버린 것이다. 그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기 전에 쓰러지니 사자들도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사자는 사자였다. 여태까지 방관하지만 하던 사자왕이 움직인 것이다. 하얀 갈기털이 사방으로 꿈틀 거렸다. 그 때 만큼은 오연히 서있던 뱀도 움츠리고 말았다. 사자왕의 기운은 대단한 것이었다. 사자왕의 태산 같은 발걸음이 뱀에게로 향하기 시작했다. 성(城)의 주인을 가리는 싸움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예상외의 일이 벌어졌다. 사자왕이 돌연 발걸음을 돌려 뱀에게서 멀어져 간 것이다.
그렇게 둘의 싸움은 열흘 뒤로 미뤄졌다. 그리고 열흘이 지났다.
***
“분명 그때 사자왕은 뱀을 죽일 수 있었을 거야. 아마 그때가 뱀을 죽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을 지도 모르지. 하지만 사자왕은 뱀을 죽이기 않았어.”
‘아’는 자신도 모르게 노인의 말에 빠져들고 있었다.
“왜 죽이지 않았을까?”
“...”
‘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노인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갑자기 기이한 불길함이 생겨난다. 불안하다.
“아마 그는 왕 이였기 때문 이었을 거야. 왕은 백성이 있어야 존재가치가 있으니까.”
노인은 잠시 창가에 비춰드는 붉은 노을을 바라본 뒤 말을 이었다.
“이번 싸움에서는 사자왕이 지게 될 거야. 이빨 빠진 사자는 더 이상 사냥을 못하는 법이지.”
‘아’의 머릿속을 갑자기 스치는 몇 개의 단어가 있었다.
‘남쪽 벌판’ ‘남쪽의 성’ ‘사자왕’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 같던 입이 열렸다.
“혹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노인이 말했다.
“남궁(南宮)!”
머리가 복잡해서 온다. ‘아’는 혼란으로 점철된 머리를 부여잡았다.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사라져 버린 5년 동안 무엇이 일어난 것인가.
“판단은 네 몫이겠지만, 네 몸속에도 한줄기 핏줄은 흐르고 있지 않느냐.”
‘아’는 잠시 동안 머리를 부여잡은 채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좋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는 가서 물어 볼 것이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나를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했는지, 반드시 물어 볼 것이다.
이제는 도망치지 않는다. 가야할 길은 정해졌다. 다시는 헤매지 않을 것이다.
문을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5년 만에 느껴보는 상쾌함이다. 뒤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노인의 모습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그가 누구인지는 상관없었다. 그는 그냥 객잔의 주인일 뿐이다. ‘아’는 남궁연(南宮然)의 이름으로 세상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이화촌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산 정상.
노인이 있다. 객잔의 노인이었다. 노인의 시선 너머로 하나의 오두막이 보인다. 주위로 조각조각 잘려진 나무 들이 보인다. 그것이 노인의 시선을 잡아끈다. 너무도 자연스럽다. 마치, 처음부터 잘려진 채 자란 듯이.
노인은 저 멀리 남쪽 하늘을 바라본다.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장강과 회화가 금빛 물결을 일렁이며 굽이쳐 흐르고 있었다. 그 곳에 남궁세가가 있다. 보이진 않지만 노인에겐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 가지고 있었어.
남궁백. 네 녀석의 못난 아들은 5년 동안 남궁의 검을 놓지 않았던 모양이야.
아직, 남궁의 검은 죽지 않았던 거야.”
불어오는 바람에 노인의 왼쪽 소매의 삼색 수실이 휘날린다.
******
광서성(廣西城)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곳에서 세가의 대결이 펼쳐지고 있었다.
-울컥
뜨거운 피가 심장을 타고 올라온다. 남궁백은 억지로 피를 삼켰다. 그러자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온다. 이대로 그냥 쓰러지고만 싶었다. 떨리는 온몸을 송백(松栢)으로 받친 채 일어섰다. 온몸으로 퍼지는 고통을 참으며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머리를 들었다. 어차피 질 싸움이었다. 한 줌의 내공조차 없는 이 몸으로는 불가능한 싸움이었다. 헛된 희망은 이것으로 끝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그냥 주저앉을 수는 없지 않는가. 그는 남궁의 가주다. 남궁의 검이다. 죽더라도 당당히 죽을 것이다. 그가 등지고 있는 남궁의 문 뒤로 남궁의 이름을 지닌 이들이 보고 있을 것이다. 비록 지금은 지더라도, 남궁의 검은 꺽 이지 않을 것이다.
남궁백은 송백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곤 갈혼을 응시한다.
갈혼(渴魂)은 남궁백의 모습에서 태산(太山)을 느꼈다.
‘저것이 죽어가는 자의 모습이란 말인가.’
제왕의 칭호를 받은 자의 모습인가. 거대한 짐을 짊어진 자의 모습인가.
갈혼은 서늘한 느낌이 온몸으로 퍼지는 것을 느꼈다. 대단하다. 비록 적이지만 남궁백의 기백은 실로 대단했다. 하지만, 결과는 5년 전부터 정해져 있었다.
‘좋다. 이제 끝내자.’
“오라”
남궁백이 말했다. 송백이 갈혼을 가리킨다. 아무런 기운도 실리지 않았다. 무인으로써, 물러 설 리가 없지 않은가. 결과가 죽음이라도 말이다. 거의 검 끝으로 거대한 혈광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혈광이 전방을 덮쳐온다.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다. 갑자기 하나의 얼굴이 떠오른다.
‘연아...’
-콰콰쾅!!!
거대한 폭발이 일었고 자욱한 혈무가 사위를 덮었다. 세상이 온통 붉었다.
-후웅
바람이 불어온다. 북(北)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다.
바람에 도망치 듯 혈무가 사라지고 드러난 광경은 실로 놀라웠다. 거대 바위가 지나간 듯이 패 여진 대지는 갈혼 으로부터 시작해 남궁백으로 이어져 있었다. 인간의 솜씨가 아니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남궁백의 바로 앞에서 그러한 흔적이 멈춘 채 라는 것이다.
흔적이 멈춘 곳.
하나의 묵 빛 도끼가 박혀 있었다.
남궁백은 어느새 밖으로 나온 남궁세가 무인의 부축을 받고 있었다. 심한 상처를 입은 듯 얼굴이 창백하다. 하지만, 방금 전 공격의 여파 때문은 아닌 듯 했다. 군중의 시선이 묵부(墨斧)로 향했다. 누가 끼어든 것인가. 신성한 무인의 결투에.
“휘유! 늦을 뻔 했네.”
한 사내가 걸어온다. 남궁백을 향해서다.
창백한 얼굴이 보인다. 너무도 다른 모습이었다.
“가주, 꼴이 말이 아니네.”
현 상황과 너무도 맞는 말이었지만 해서는 안 될 말이기도 했다.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검을 뽑을 듯이 사내를 노려보았다.
“어디서, 감히…”
남궁태호는 하던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남궁백이 손을 들어 제지한 것이다. 그것마저 힘겨워 하는 가주의 손이 보인다. 남궁태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오랜만이구나...”
남궁백의 목소리가 떨어온다. 그것은 비단 상처 때문은 아니니라.
남궁백과 사내의 눈이 마주쳤다. 사내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예전과는 다르게 말이다.
‘훌륭히, 자라주었구나.’
남궁백이 먼저 시선을 거두었다.
“돌아가거라. 네 녀석이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 텐데...”
다시는 꺼내기 싫은 말이었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온다.
사내의 시선이 돌려졌다.
“많이 컸구나. 태호”
익숙한 목소리였다. 마치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 온 느낌이다.
혹시...?
사내의 시선이 다시 남궁백에게로 향했다.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아요.”
사내의 손이 남궁백의 손을 감쌌다. 일어선 사내의 손에는 어느새 송백이 잡혀 있었다. 사내의 등이 돌려졌다. 갈혼을 향해서다.
“아버지.”
남궁백의 눈이 부릅떠졌다.
아아! 얼마나 그리워했던 말이던가.
“연아...”
희미하게 들려온 말이었다. 이로써, 길을 정해졌다.
사내, 남궁연은 갈혼을 바라보았다.
“갈혼, 넌 선택을 잘못했어.”
“...”
“남궁의 검을 꺽을 려면 나를 찾아 왔어야지.”
갈혼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어디서 저런 애송이가 나와서 방해한단 말인가.
“비켜라. 애...”
갈혼은 말을 멈추었다. 아니, 멈출 수밖에 없었다.
창궁무애검(蒼穹無涯儉) 비조초연(飛鳥招宴)!
남궁연의 신형이 대지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드넓은 하늘 아래 거리낌 없는 비행이었다. 쾌속한 바람이 그를 가리고 지나갔다.
갈혼은 눈을 부릅떴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의 미간 사이로 송백의 푸른 검극이 다다라 있었다. 좌중이 침묵으로 휩싸였다.
남궁연은 갈혼을 바라보았다.
“내가 바로 남궁의 검이야.”
한 사내의 등장으로 결투는 새로운 국면을 맞아가고 있었다. 군중들은 열광했다. 신성의 등장이었다. 남궁연은 송백을 납검한 뒤 물러섰다. 갈혼의 두 눈이 살기로 이글거렸다.
“이제, 싸울 맘이 생겼나?”
“후회하게 될 것이다. 남궁가의 애송이.”
갈혼의 두 손이 짙은 혈광에 휩싸였고 남궁연의 송백에는 푸른 기운이 맺혀간다. 갈혼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사이한 기운이 신경을 자극한다. 하지만, 송백의 청초한 기운이 정신을 맑게 한다. 대연신공(大衍神功)의 효능이었다. 어느새 갈혼의 두 손은 혈수로 화해 있었다. 금세라도 피가 뚝뚝 떨어질 것처럼 섬뜩해 보인다.
순간, 갈혼의 신형이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다. 절정의 신법이었다. 육안으로는 확인조차 불가능했다. 시야에서 적을 놓쳐버렸다. 언제 적의 공격이 들어올지는 모른다.
놓쳤으니 막는 수밖에!
송백이 원을 그려간다. 수십 개의 푸른 원이 남궁연의 주위에 생성된다. 흡사 ‘원(圓)’의 감옥에 갇히는 형상이다. 어느새 갈혼의 신형이 나타가 남궁연의 왼 어깨를 타격하고 지나간다.
-콰쾅
남궁연의 방어막이 흔들린다. 순간, 갈혼의 우수를 향해서 송백이 푸른 궤적을 그렸다.
-쭈우웅
공기가 찢어진다. 대기를 베었을 따름이었다.
-콰쾅
이번에는 등 쪽 이었다. 방어의 틈을 교묘히 노린 공격이었다. 등이 화끈거린다. 아픔을 느낄 세도 없이 다음 공격이 이어진다.
예측불허(豫測不許)! 신출귀몰(神出鬼沒)!
번번이 갈혼의 신형을 놓쳐버린다. 기를 포착했다 싶으면, 어느새 종적을 감춰버린다. 손발이 어지러워지고 이마에 땀이 맺혀간다. 밀원(密圓)의 영향으로 큰 피해는 없었지만, 미세한 타격이 누적되어 간다.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필패다.
처음의 일격은 우연이었던가. 지금의 갈혼은 다르다. 빠르고 강하다. 처음의 일격의 영향으로 가슴속에 잠재되어 있던 세포하나 하나가 올올이 일어선 갈혼이었다. 그때의 일격으로 잠시나마 죽음을 느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오히려 복이 화가 돼버린 격이었다.
필생의 대적! 남궁연을 바라보는 갈혼의 시선이었다.
폭풍우처럼 공격이 쏟아진다. 남궁연의 방어에 급급할 따름이었다. 손발의 어지러움이 머리까지 전염되는 듯하다. 혼란함이 가중된다.
-스아아
갈혼의 손이 어깨를 스쳐간다. 피가 솟구친다. 마음의 틈이 생기자마자 나온 결과였다. 갈혼은 절정무인이다. 그는 한 치의 빈틈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남궁연은 밀원을 계속해서 펼쳐가며 대연신공을 일으켰다. 청초한 기운이 풍겨지면 정신이 맑아진다.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그것은 일종의 번개였다.
***
우중충한 날이었다.
하늘은 먹구름으로 뒤덮여 있어 달빛하나 들어오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번개까지 내리친다. 어린 남궁연의 앞으로 거대한 번개가 떨어져 내렸다. 그때 처음으로 죽음을 실감했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남궁연 앞에는 송백이 음각 된 하나의 검이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아버지 몰래 가지고 나온 검이었다.
검이 번개를 흡수한 것인가? 그때는 몰랐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몇 년전 부터 생각해 오던 것이 있었다.
타인의 기와 자신의 기. 번개와 검.
둘 사이의 연관 관계.
이것으로부터 발생된 하나의 무공이었다.
***
계속해서 원을 그려내던 송백이 제자리로 돌아간다. 남궁연의 마음속으로 하나의 검이 그려진다. 갈혼의 공격은 신경 쓰지 않았다. 마음속에 생성된 하나의 검에만 집중할 뿐이었다.
탄탄해 보이던 방어가 사라지고 검을 든 남궁연의 모습이 보인다. 너무도 허술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함정인가? 망설임은 잠시 뿐이었다.
함정이라면 깨어 부수면 될 뿐!
갈혼의 두 혈수가 쾌속하게 남궁연의 전면으로 짓쳐들었다. 붉은 궤적이 남궁연의 지척에 다다랐을 때,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남궁연의 검이 미미하게 떨리는가 싶더니 정확히 갈혼의 방향을 집어낸다. 갈혼의 혈수가 송백에 막혀 미미한 피륙의 상처만 낸 채, 돌아간다.
갈혼에게 의아함이 어렸다. 우연인가?
생각은 뒤로 한 채, 갈혼의 신형은 더욱 쾌속무비하게 움직여 갔다.
-파앗, 파앗, 파앗
결과는 똑같았다. 갈혼의 두 손이 다가가자 여지없이 막아서는 남궁연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검이었다. 남궁연은 갈혼을 바라보지 않았다. 무심히 검만 볼 뿐 이었다. 마치, 송백 스스로가 반응하는 듯 보인다.
남궁연은 검에서 시선을 거두며 갈혼을 쳐다보았다. 갈혼은 어느새 공격을 멈춘 채였다. 다시 송백으로 시선을 옮긴다. 처음 펼쳐보는 무공이었다. 5년 동안 가슴속에만 담겨져 있던 무공이었다.
기와 기는 반응한다.
그것의 크기가 크든 적든, 성질이 같든 다르든.
반응의 차이만 있을 뿐, 모든 기는 반응한다.
이 무공은 반응의 크기를 감응의 단계로 끌어 올린 것이다.
번개와 검이 반응 하듯 말이다.
남궁연은 송백을 들어 갈혼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직까지 진신내력을 보여주진 않았을 터.
싸움은 이제부터다!
송백이 미미하게 떨린다. 감응이 시작된다.
기와 기, 자신의 기와 갈혼의 기.
둘을 하나로 있는 것은 청초한 송백의 푸름 검신이 될 것이다.
떨림이 커져간다.
시작이다!
검이 번개의 형상을 띤 채 울부짖는다.
‘천뢰검(天雷劍)’
후에 ‘제왕검형(帝王劍形)이라 불리 우는 절대무공의 탄생이었다.
-후웅 후웅
갈혼에게서 심상치 않는 기운이 흘러나온다.
남궁연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의 파동은 갈혼의 예상을 뛰어 넘고 있었다. 미묘한 기의 파동은 갈혼의 호흡마저 흩트리고 있었다.
섬뜻!
냉랭한 무언가가 그를 훑고 지나간다.
두려움. 상대에 대한 두려움이 갈혼의 뇌리 한구석에 똬리를 튼다. 패배에 대한 두려움이다. 갈혼은 그 섬뜩한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5년전부터...
아니 그 전부터 만들어진 계획이었다. 패배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변수는 변수로만 존재해야 한다.
-후웅 후웅
갈혼의 모공에서 시뻘건 혈무가 뿜어져 나온다.
아난구혈공의 극성. 피를 부르짖는 악마의 무공이었다.
‘네 녀석의 모든 피를 빨아 먹으리라!’
무쌍의 절대무공이냐.
수천의 피로 얼룩진 악마의 무공이냐.
전설로 남을 싸움의 시작이었다.
하얀 섬광의 번개가 휘몰아치고 핏빛 바람이 대지를 들썩인다.
대지가 숨을 죽이고 대기가 몸을 움츠린다. 지고(至高)의 대결이었다. 범인으로서는 알 수 없는 천외천(天外天)의 영역이었다.
모든 일의 향방은 사소한 것으로부터 시작되기 마련이다. 이 대결로 마찬가지였다. 용호쌍박(龍虎雙拍)의 대결을 펼치던 둘의 싸움에 변화가 일어났다. 갈혼의 혈무가 점점 옅은 색을 띄어가지 시작한 것이다. 반면, 남궁연의 송백은 더욱더 하얀 우윳빛을 띄어간다. 송백의 푸르름 아래, 파사의 기운이 생성된다. 송백의 효능이 드디어 그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갈혼의 표정이 굳어진다. ‘진혈(盡血)’이라 불리 우는 혈무는 아난구혈공의 진수다. 혈무의 옅어짐은 내력의 고갈을 의미했다. 끝임 없이 용솟음치던 내력의 샘물이 말라버린다. 우윳빛을 내뿜는 송백이다. 또 다른 변수였다.
갈혼은 분노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단 말인가.
무공, 계획, 모든 것이 완벽했다. 저 녀석을 만나기 전까지는...
갈혼의 눈동자가 흰자위를 드러낸다. 그 사이로 혈광이 번뜩인다.
이성을 잃었음인가?
아니다. 또 다른 무공을 펼침이다.
아난혼! 악마를 부르는 무공이었다.
갈혼의 몸이 쉴새 없이 흔들린다. 그의 정수리에서 한 줄기 혈선이 피어오른다. 뇌력(腦力)의 개방 이었다. 하단에서 생겨난 열기가 중단을 뚫고 상단으로 치솟아 오른다.
상단의 사용. 오르지 선택된 자에게만 주어지는 선천의 능력이다.
떨림이 더욱 심해진다.
갈혼에게는 선척적인 능력이 주어지지 않았다. 무리한 상단의 사용이었다.
호수에 바다가 들어온다. 당연히 그릇은 깨어지기 마련이다.
목숨을 담보로 펼치는 무공이었다.
갈혼의 주위로 회색의 구름이 생성 되어간다.
우레와 폭풍우가 내부에서 소용돌이친다. 혼돈의 소용돌이다.
회색구름이 무저갱의 검은색 눈을 뜬다.
-화아아
분노, 공포, 절망.
혼돈의 중심에서 퍼져 나가는 모든 악(惡)이다.
혼돈의 도래다.
갈혼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변했다.
모두... 모두... 죽일 것이다. 피 ,피, 피를 갈구하는 목마름이다.
아난의 혼은 수천의 피를 마신 다음에야, 혼돈으로 돌아갈 것이다.
누구도 멈출 수 없고, 누구도 막을 수 없다.
갈혼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공포가 세상을 지배한다. 백성들이나 무인 할 거 없이 공포에 몸서리친다. 남궁연은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감을 알았다. 저 회색 구름이 무엇인지는 모르나, 이대로 놔두면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송백이 일직선으로 푸른 궤적을 그리면 회색 구름을 갈랐다. 갈랐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형태만 살짝 일그러졌을 뿐, 그대로였다.
그때였다. 회색 구름이 거대한 입을 벌려 울부짖기 시작했다.
진정한 악마의 모습이었다.
악마가 날개를 폈다. 붉고 진한 피의 날개를...
몽환적인 색채 속에 날개 짓을 시작한다.
남궁연은 깨달았다. 저 무저갱의 눈이 향하는 곳은 나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날개 짓은 이곳의 모든 생명체를 향하고 있었다. 남궁연의 눈이 부릅떠졌다. 저것의 위험성은 격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곳, 광서성은 피의 바다가 될 것이다.
‘나의 모든 것이 있는 이곳에서...’
검병을 으스러지도록 움켜쥐었다. 베어 문 입술에서 피가 터져 나온다. 갈혼은 이미 이성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갈혼의 앞에 있는 ‘저것’이 갈혼을 지배하는 듯 보인다. 5년 만에 돌아온 곳이다.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내가 지킬 것이다!
남궁연의 몸에서 하얀 아지랑이가 뿜어져 나온다.
어느새 넘어서 버린 경지다. 송백에서서 하얀 광채가 뿜어져 나온다.
그때다. 회색 구름이 거대한 입을 벌리며 사방으로 뻗어 나간다. 거부할 수 없는 악마의 손길이었다. 거대한 죽음이 다가오고 있었다. 사람들은 죽음을 느꼈다. 그 소름끼치고 잔인한 느낌이 온몸을 누빈다.
-화악
그 순간, 하얀 광채가 장내를 뒤덮는다.
지킨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낼 것이다!
한명의 죽음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부탁한다. 송백!
송백에게서 하얀 광채가 뿜어져 나온다.
남궁세가에는 한 가지 무공이 전해져 내려온다. 어디서 시작되었고, 어디로 이어지는지 아무도 모른다.
때론 아이이게, 때론 가주로, 때론 여인에게...
그것은 남궁의 핏줄 안에서 돌고 돈다.
남궁보검(南宮保劍)! 지키는 검이다.
그 뜻이 수백 년의 세월을 거슬러 송백에게로 이어진다.
많은 얼굴이 보인다.
태호, 수연, 궁완 아저씨 그리고 아버지...
그것이 모여 하나의 염원이 되고 검이 된다.
지킬 것 이다!
남궁보검(南宮保劍)!
찬란한 별빛의 하얀 섬광이 광서성을 뒤덮는다.
아름다운 유성우가 세상의 빛을 밝힌다.
평안의 영롱함!
싸움의 종연(終演)이었다.
******
광서성으로 향하는 커다란 관도 위.
거지 노인과 거지 청년이 걸어간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남궁(南宮)!”
“5년 만에 나타나서 뜬금없이 남궁 이라뇨!”
-쾅
어느새 노인의 손에 들려진 타구봉이 가차 없이 청년 머리에 꽂힌다. 청년은 머리를 감싸 쥔 채, 노인을 노려보았다. 대들려던 청년의 눈에 노인의 얼굴이 비친다.
웃고 있었다. 환하고 편안한 미소였다. 5년 만에 처음 보는 웃음이었다.
“친구 녀석을 만나, 술 한 잔 해야지.”
청년에게도 미소가 번져간다.
“음식은 물론, 공짜겠죠?”
바람이 불어온다. 불어오는 바람에 삼색 수실이 휘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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