솜사탕 증후군
- 작성일 2006-10-07
- 좋아요 0
- 댓글수 0
- 조회수 657
솜사탕 증후군(Cotton-Candy Syndrome)
1
"엄마, 저거 사줘."
귀여운 작은 소녀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공원의 한 모퉁이. 그 연장선에는 굵게 패인 주름살의 노인과 색색의 솜사탕이 꽂혀진 솜사탕을 만드는 기계가 있다. 이런 풍경은 초등학교 운동회나 유원지에 가서나 볼 수 있는 드문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평일의 공원 모퉁이에서 장사를 해도 먹고 사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돈벌이가 되려면 초등학교 앞이나 아파트 놀이터 옆이 적당하련만. 생각해보면 저 노인은 언제나 저 자리에 솜사탕과 함께 있었다.
"안 돼. 우리 소연이 단 것만 먹어서 얼마 전에도 병원 갔다 왔잖니. 집에 가서 엄마가 맛있는 밥해줄 테니까 어서 집에 가서 밥 먹자, 응?"
"싫어, 싫~어. 솜사타아앙~! 소옴사아타아아앙~!"
소녀의 징징대는 울음소리가 저녁 무렵의 한적한 공원을 가득 채운다. 얼마 되지 않는 공원을 지나가는 행인들은 어린애 특유의 짜증나는 울음소리를 조금이라도 더 빨리 귀에서 떼어놓기 위해 걸음을 재촉한다. 나는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소녀의 익숙한 울음소리를 귓바퀴 뒤로 살짝 받아 넘긴다. 그러던 차에 소녀의 울음소리가 뚝 멈췄다. 고개를 들자 엄마에게 양손을 모아서 내밀고는 천원으로 보이는 종이 한 장을 들고 쪼르르 솜사탕 앞으로 달려가는 소연이가 보인다. 안타깝게도 소연이와 소연이 엄마와의 싸움에서 오늘도 소연이가 이겼나보다. 그런데 소연이는 솜사탕 기계 앞에서 맛난 솜사탕을 받아들 생각은 하지 않고 산만하게 고개만 갸웃갸웃한다. 귀를 기울인다.
"할아버지. 오늘은 어느 게 맛있어요?"
"우리 소연이 오늘도 왔네. 노란 거도..빨간 거도...파란 거도...다 맛있지..꼬마 아가씨 뭘 줄까?"
"뭘 먹지? 아, 노란 색..아니 빨간 거..녹색도 먹고 싶은데...아우아우.."
행복한 고민이다. 시간이 좀 지나자 겨우 빨간 것과 노란 것으로 선택의 여지를 압축한 모양이다. 골인지점이 눈앞이건만 아직도 고민한다. 그러던 차에 솜사탕을 파는 노인이 소연이의 고민을 단번에 해결해 준다. 저 솜사탕을 파는 노인은 어지간히 마음씨가 푸근한가 보다.
"자, 꼬마 아가씨 이러면 됐지?"
노인의 손에서 빨간 솜사탕이 소연이의 작은 손으로 건네진다. 빨간 솜사탕 위에는 노란 솜사탕이 한 움큼 올려져있다. 소연이는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는 시선을 차츰 올려 빨간 솜사탕 위의 그득한 노란 솜사탕 뭉치를 본다.
"솜사탕 할아버지, 고맙습니다!"
예의바르게 허리를 90도로 구부려 인사를 하고는 다시 엄마에게 쪼르르 달려간다. 소연이는 저렇게 기분이 좋은데 엄마는 그렇지 않은가 보다. 솜사탕 노인의 푸근한 마음씨 덕에 소연이의 이가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그래도 소연이가 입가에 솜사탕을 묻혀가며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자 엄마의 얼굴에도 이내 미소가 깃든다. 엄마는 곧 더럽혀질 것을 알면서도 소연이의 입가를 닦아주며 말한다.
"소연이 엄마랑 아까 약속했지? 솜사탕 사주면 오늘 밥도 안 남기고 다 먹고 양치질도 잘 하고 방청소도 혼자 한다고 약속했지?"
"응!"
이미 소연이는 솜사탕이 주는 미각의 유희에 빠져 건성으로 대답한다. 김소연 양. 당신은 방금 또 거짓말을 했습니다. 보나마나 저녁밥도 반은 남길 테고 밤늦게 놀다가 방은 한가득 어질러 놓은 채 소파 위에서 자버리겠죠? 후후.
2
언젠가 병원의 의사가 조심스레 날 불렀던 적이 있었다. 유치원의 건강검진 후 형식적인 부모 면담이라 생각했었지만, 하얀 가운의 중년 대머리 의사의 말은 예상과는 달랐다.
"좋지 않은 이야기를 하게 되어 부모님께는 유감스럽지만."
중년 의사는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으로 안경 코받이를 살짝 들어 올리며 뜸을 들이고 말했다.
"이번 정기 건강검진 결과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김소연양은 솜사탕 증후군 제 2기인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아마 이 병에 대해서는 들어본 일이 없으실 것으로 생각되니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이 병은 4-7세 여아들에게서 드물게 발병하는 부계 유전병으로, 발견 자체도 최근에 되었기에 치료법도 현재 연구 중에 있습니다. 다행인 것은 대부분 별 조치를 취하지 않아도 대개 8세 정도가 되면 자연히 낫는다는 것입니다. 증상을 보면 단 것을 매우 좋아하는데, 특히 솜사탕을 좋아합니다. 이 병이 단순한 단 음식 중독과 다른 점은 정신적인 증상도 동반하여 모든 것을 단 음식이나 솜사탕과 결부 지으려는 사고방식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구름을 가벼운 솜사탕 덩어리라고 여긴다든지, 매연은 만들다가 실패한 맛없는 솜사탕으로 인식하는가 하면, 노인의 흰 머리카락은 솜사탕을 나중에 먹으려고 머리 위에 올려둔 것으로 생각한다든지...여튼 많은 사물이나 현상을 솜사탕하고 연관 지어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뭐, 이 병이 실제 생활에 큰 피해를 주는 일은 없습니다만, 드물게 이런 잘못된 현실 인식이 지능저하를 일으킨다는 보고사례는 있습니다."
"일단은 시간이 가면 자연히 낫는 병이란 말입니까? 뭐 다른 특별한 문제는 없겠지요? 아, 그렇다고요. 휴... 다행입니다. 그런데 아까 부계 유전병이라고 하셨는데, 그럼 저도 그 병에 걸렸단 말입니까?"
"아닙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이 병은 여아에게서만 나타납니다. 대머리가 모계 유전의 영향을 받는 것과 반대로 생각하시면 쉽게 이해되실 겁니다. 대머리가 여자에게서 나타나지는 않지요. 마찬가지로 이 병도 남자아이에게서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요즘 남자아이들이 좀 영악해야지요. 반면에 여자아이들은 순진한 면이 그나마 남아 있는 편이죠. 순진한 여자아이들 중에서 유전과 환경의 영향을 받아 드물게 이 병에 걸리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중년 의사가 말을 잇는다.
"특별히 해드릴 말이 없어서 죄송합니다. 아직 치료법이 없는 병이나, 단 것의 섭취량을 줄이면 정상으로 돌아오는 시기를 앞당길 수는 있다고 합니다. 가급적이면 단 것의 섭취를 줄일 수 있도록 유도해 주십시오. 아, 전혀 주지 않는 것도 곤란합니다. 그러면 금단증상으로 스트레스를 받아 다른 합병증을 유발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일상생활은 평소와 같이 하게 해주십시오."
"그럼 간단히 말해서 단 음식을 조금 덜 먹이면 된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잘 이해하고 계시는군요. 아, 한 가지 안 일러두었는데 단 음식을 먹은 뒤의 양치질을 잘 챙겨주십시오. 치과에 가야할지도 모르니까요. 하하.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가만히 놔두면 낫는 병이니까요."
"그런데 아까 솜사탕 증후군 2기라고 하셨는데, 1기 2기 이런 게 뭐 차이가 있습니까?"
"깜빡했군요. 죄송합니다. 솜사탕 증후군은 총 3기의 단계로, 1기는 단순히 단 음식 중독과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단계입니다. 소연양은 2기로 1기에서 더 나아가 솜사탕과 관련해서 주위 사물을 서서히 인식하기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마지막 3기는 어떤 계기나 자극을 통해, 순간적으로 자신의 인식체계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 단계입니다. 아직 어떠한 계기나 자극이 깨닫게 해주는지 보고되어 있지 않았기에, 치료법이 없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3기는 솜사탕 증후군이 치유되는 단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습니까...."
그 뒤 간단하게 다른 곳은 별 이상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 문을 닫고 나선다. 복도를 걸으며 의사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본다. 김소연양. 당신은 하루가 멀다 하고 사고를 치시는군요. 후후.
3
내가 어릴 때에만 해도 솜사탕 장수는 초등학교 운동회에서나 볼 수 있었다. 솜사탕 장수는 대체 어디에 숨어있다 운동회만 되면 몰래 나와 교문 앞을 지나는 뭇 아이들의 눈을 유혹했던 걸까? 요즘의 경사스러운 일에는 술과 고기가 있듯이 그때의 운동회에는 김밥과 솜사탕이 있었다. 허나 나에게는 김밥마저도 겨우 구할 수 있는 사치였기에 솜사탕은 언제나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남들은 다 먹는 솜사탕을 홀로 비굴하게 얻어먹기도 싫었다. 결국 학창시절 내내 나는 솜사탕의 맛을 눈으로 보며 코 속에서 녹여 머리 속으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내가 먹는 솜사탕은 다른 친구 녀석들의 것과는 달라 먹을 때마다 그 맛이 달랐다. 단 맛에도 수천가지가 있다. 친구들이 하나의 단 맛을 느낄 때, 나는 수십 수백의 단 맛을 되새김질했다. 내가 처음으로 진짜 솜사탕을 맛본 것은 그로부터 십년도 넘게 지난 후, 지금의 소연 엄마와 유원지에서 데이트를 할 때였다. 다 큰 남자가 혼자 솜사탕을 사서 먹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기도 했었고, 특별히 먹고 싶었던 마음도 없었기에 차일피일 미루다 그리 된 것이었다. 처음으로 혀로 느낀 솜사탕의 맛은 오랜 기간 동안 상상한 것과 같았으면서 달랐다. 이상한 것은 그 이후로는 더 이상 수십 수백의 솜사탕의 맛을 느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여튼 나에게는 사치였던 솜사탕이었다. 그런데 그 치의 딸래미는 솜사탕이 없으면 안 되는 솜사탕 증후군이라는 만화영화에나 나올 법한 병이라니?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있나? 이럴 줄 알았으면 비굴하나마 몇 조각 얻어먹을 걸 그랬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면 낫는 병이라고는 하지만 말이다. 방금도 소연이는 솜사탕을 맛나게 하나 먹었다. 입가가 붉은 설탕 실들로 지저분하다. 그럼에도 아직 성에는 차지 않았나보다. 눈이 계속 공원 모퉁이로 돌아간다.
"소연이, 솜사탕 하나 더 사줄까?"
"아빠, 나 이제 배불러서 솜사탕 싫어요. 안 먹을래요."
소연이가 입가를 옷소매로 닦으며 말한다. 눈은 앞을 보는 것 같지만 내가 짐짓 딴청을 피우며 고개를 돌려보면 시선은 여전히 공원 모퉁이를 벗어날 줄 모른다. 소연이 엄마는 항상 소연이가 조를 때면 솜사탕 1개도 겨우 사줬고 2개부터는 떼를 써도 혼을 내고 사주질 않았다. 그래서일까. 김소연양. 당신은 또 위증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본 재판장은 김소연양에게 이틀 동안 방청소는 홀로 할 것, 밥을 남김없이 먹을 것, 김치 2조각을 매끼 먹을 것, 용돈을 50% 삭감된 500원만을 받을 것을 명하는 바입니다. 추가로 여기서 이 노란 솜사탕도 남김없이 맛있게 먹기를 명합니다. 땅땅땅. 후후.
4
오늘도 퇴근길에 공원 모퉁이에 들러 노인장에게서 솜사탕을 받아든다. 2개 값을 주고서 빨간 것 위에 노란 색을 얹어 달라한다. 현관문을 열자 "아빠다!" 하고 쪼르르 소연이가 달려 나온다. 소연이의 눈이 아빠얼굴을 보더니 이내 솜사탕으로 넘어간다. 소연이의 눈동자에는 솜사탕만 보인다. 저 눈은 "어서 솜사탕 주세요."하는 눈이다. 바로 주지 않고 조금 뜸을 들이자 소연이는 뺨을 부비며 애교를 부린다. 이렇게 하면 조금 더 빨리 솜사탕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소연이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이럴 때면 행복한 따스함 속에서도 소연이의 병이 나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실감하게 된다. 나의 귀가에 저녁 준비를 하던 소연이 엄마도 부엌에서 나오더니 이미 소연이 입 속으로 세 입은 들어간 솜사탕을 보고서는 아빠 때문에 소연이 버릇이 나빠졌다느니, 솜사탕 값만 해도 뭘 어쩌느니 잔소리를 해댄다. 하지만 소연이는 엄마 아빠의 다툼에는 신경 하나 쓰지 않고 받아든 솜사탕을 맛있게 먹고 있다. 내년이면 소연이도 8살. 그럼 초등학교에도 가고 솜사탕 증후군도 자연히 낫겠지. 하지만 나는 소연이가 좀 더 솜사탕 증후군에 걸려 있기를 바란다. 소연이가 솜사탕 증후군에 걸려 있는 한 소연이는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라는 질문에 "아빠!" 라고 대답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소연이 엄마가 토라진 채로 "왜 엄마가 아니고 아빠야?" 라고 물어보면 "아빠가 솜사탕이랑 많이 닮았어." 이러겠지. 어디 봅시다. 어이쿠, 이것 좀 보게. 김소연양. 당신의 병은 낫기가 굉장히 힘든 병이에요. 나으려면 "아빠도 솜사탕 먹으세요." 라면서 소연 양의 솜사탕을 아빠에게 나눠줘야 하는데,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소연양이 더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제가 못 먹은 솜사탕만큼 당신이 먹고 나서야 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소연양은 아직 좀 더 솜사탕을 섭취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때까지 당신은 제 딸입니다. 사랑합니다. 김소연양. 후후.
<끝>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