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의 추억
- 작성일 2007-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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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智異山)의 추억
민수는 두발정도 앞서 걸어가고 있는 진영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벌써 세 시간이 넘게 진영은 아무 말도 없었다. 한참을 걸어가고 주위를 잠시 살핀 후 다시 걸어가기를 벌써 수십 번이다. 뒤따라오는 지연과 미진 역시 아무 말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여자가 걷기에는 꽤 힘든 시간의 거리였다. 입을 여는 것조차 힘들 것이다. 남자인 민수의 이마에도 땀이 고이고 있었다. 늦가을의 만만치 않게 찬 바람속인데도 말이다.
민수는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다. 붉은 단풍들의 표독한 시위는 고개를 돌릴수록 아득한 현기증을 불러올 정도로 악랄했다. 가을의 지리산은 1년 중 가장 사치스럽게 치장을 한다. 푸르던 잎들이 점점 붉게 물들어 가는 것은 저녁노을의 화려함에 비해서도 전혀 꿀릴 것이 없었다. 사방 어느 곳에 고개를 돌려도 핏빛 붉음은 눈을 부시게 한다. 이곳을 들른 사람들은 그 화사한 아름다움만을 가슴에 담고 떠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겨우내 그 아름다움에 대해 얘기하고 숭배한다. 가을의 지리산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그렇게 영원할 것만 같아 보인다. 하지만 그 화려함 속에는 겨울의 혹독함을 인내해야 하는 지리산의 처절한 몸부림이 담겨있다. 섬뜩한 겨울바람의 칼날이 두려워 안간힘을 쓰고 있는 모습이 오히려 안쓰러워 보이기까지 한다. 서산을 넘어가는 태양의 마지막 화려함이 가슴을 저리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지리산 어때?”
진영이 지리산 등반을 제안한 것은 2주전 일이었다. 진영은 민수의 대학 동창이고 두 사람의 여자 친구인 지연과 미진 역시친구사이였다. 네 사람은 곧잘 그렇게 모임을 갖곤 했었다.
“지리산? 야, 거긴 너무 뻔하다. 그리고 요즘 같은 날 지리산 갔다가는 단풍구경은 커녕 아줌마들 뒤통수 구경만 하구 오겠다, 임마.”
민수의 대답에 지연과 미진은 쌩긋 웃어보였다. 거리낌 없이 내뱉는 두 남자들의 말투는 두 여자들에게는 여전히 흥미 거리인 듯 했다.
“야, 임마, 나도 1학년 때부터 지리산은 벌써 여섯 번이다. 누가 아줌마 뒤통수 보러 가재? 이번에는 좀 색다르게 가보자는 말씀이지. 새로운 등산로를 개척해 보자는 말이야. 우리들의 대학생활 마지막 가을인데 이 정도 모험이면 기억에 팍 남을 것 같지 않냐?”
“새로운 등산로?”
“그래, 내가 지난봄에 동아리 선배랑 지리산에 간적이 있었거든. 그 선배가 등산에는 일가견이 있었는데 말이야. 처음에는 어디로 간다는 말도 하질 않고 산을 오르기에 그냥 따라 나섰지. 그런데 말이야, 그 길은 내가 지리산을 수차례 가도록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이더라고. 그리고 그때 그 등산로가 장난이 아니었어. 길이 좁아 눈이 잘 띄지 않아서인지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길이었는데 말이야. 길이 그렇게 험하지도 않고 가끔씩 개울도 보이기도 하더란 말이지. 길 주변에는 나무사이로 가끔씩 보이는 경치가 너무 아름답더라고. 내가 지금까지 가본 지리산 등산로 중에서 최고였어. 어때, 이만하면 땡기지 않냐?”
진영은 100점 맞은 시험지를 들고 엄마에게 달려오는 초등학생처럼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민수 역시 1994년 가을의 추억을 남기기에 나쁘지 않은 계획이라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낯선 등산로는 위험하지 않을까?”
지연이 약간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진영을 쳐다보았다. 사실 네 사람 중에서 지연만은 등산에 썩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3년째 사귀고 있는 진영의 끈질긴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녀에게는 땀 흘리는 일 보다는 영화관에서 팝콘을 먹는 것을 즐겼다.
“어허, 이 아가씨 보소. 벌써부터 그놈의 게으름이 눈빛에 보이는구먼, 그려. 젊었을 때 부지런히 다리를 놀려야 늙어서 무릎이 안 쑤시는 법이여.”
지연은 불만 섞인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미진과 민수는 웃음을 참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진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잔을 들었다.
“자, 그럼 결정된 거다. 2주후 토요일에 지리산으로 가는 것으로. 우리들의 마지막 대학시절 가을은 지리산과 함께 영원히 남으리라. 야야, 잔들 들라고. 콜라도 가끔 취하니까. 우리들의 대학시절을 위하여!”
미진과 민수는 진영의 외침에 산산한 미소를 지으며 잔을 들었다.
“분명히 이 길이 맞을 텐데.”
진영이 걸음을 멈추고 나지막이 혼잣말을 했다. 목소리에는 당황하는 빛이 역력했다. 민수는 말없이 진영을 뒤따라가고는 있었지만 어쩐지 불안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진영아, 조금만 쉬자. 여자애들이......”
진영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등산과 테니스로 단련된 그가 이 정도 거리에 힘이 들었을 리는 없었다. 그 역시 긴장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어, 어 그래. 잠시만 쉬자.”
진영과 민수 사이에서 걷고 있던 미진과 지연은 민수의 말에 걸음을 멈추고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미진아, 괜찮아?”
민수가 미진의 어깨를 부축하며 말했다.
“어, 오빠. 괜찮아.”
미진이 간신히 애써 미소를 지으며 옆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지연이 곧 그 옆에 따라 앉았다. 민수는 먼저 지연에게 수건을 건네었다. 지연은 비오듯 흐르는 땀을 닦으며 홀로 앞서 길을 살피고 있는 진영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였다. 미진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오, 오빠. 바위 말이야. 저기 저 바위, 벌써 몇 번째 본거 같지 않아?”
민수는 미진이 가리키는 바위를 쳐다보았다. 등을 돌리고 있던 진영과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내던 지연까지 모두 그 바위를 주시했다.
“두 번째 보았을 때는 내가 잘못본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까 확실히 그 바위가 맞는 것 같아. 오른편에 패인 홈까지 틀림없어!”
진영은 무척 심하게 인상을 찌푸리며 낮은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그럼 벌써 세 번째 같은 길을 돌고 있는 거야?”
민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럼 아까 그 갈림길에서 오른편으로 갔어야 했나.’
진영은 나지막이 혼잣말을 했다. 그는 세 사람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답답함을 느꼈다. 애당초 이 등산을 제안한 사람은 자신이었고 처음부터 지금까지 선두에 서서 길을 인도한 사람도 자신이었다. 처음 길을 어긋났음을 알았을 때 되돌아갔어야만 했었다. 하지만 큰소리를 친 자존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었다. 막연히 아래로만 내려가면 곧 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었다. 진영의 답답함은 곧 자신에 대한 자책이었고 세 사람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이대로 있다간 큰일 나겠다. 곧 해가 떨어진다고. 그전에 길을 찾아야 해. 이 바위를 기점으로 해서 중간에 다른 길이 있었는지 다들 살펴보면서 가자.”
민수가 힘을 주어 말했다.
“그래, 아마 우리가 중간에 길을 놓친 게 틀림없어. 그치?”
미진은 민수의 손을 잡으며 말을 했다. 민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고 지연은 진영을 힐끔 쳐다보며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사람은 그렇게 다시 길을 나섰다. 하지만 시간은 그들에게 그다지 많은 여유를 주지 않았다. 나무들 사이로 멀리 석양의 빛이 그들의 얼굴에 빛을 비춘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내 주위는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바로 앞 사람의 뒷모습조차 어둠속에 묻히기 시작했고 그럴수록 그들의 걸음은 더욱 느려지고 있었다.
“진영아, 잠시만!”
한참을 걸은 후 맨 뒤에서 오던 민수가 소리쳤다. 그는 진영의 걸음이 멈추어졌는지 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진영아!”
“왜!”
선두에 있던 진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금 천천히 가. 간격을 좁혀야 한단 말이야.”
“천천히 가서 어쩌려고. 지금 이렇게 있다가 얼어 죽잔 말이야? 텐트고 담요고 하나도 없는 거 알잖아!!”
진영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섞여 있었다. 진영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간단히 당일 코스로 즐기기로 한 계획이었으므로 처음부터 담요나 텐트는 생각지 않았었다. 그리고 갓 해가 진 지금도 기온은 점점 내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진영의 뒤를 쫒을 수가 없었다. 민수는 바로 앞 미진의 손을 잡고 미진 역시 지연의 허리춤 옷자락을 잡고 간신히 진영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진영과의 간격이 더 넓어진다면 이 어둠에서 그를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임에 틀림없었다.
“그건 맞는데, 그래도 같이 가야 하잖아. 내 랜턴 시야에서 니가 자꾸 사라진단 말이야.”
그들에게 랜턴은 두 개가 있었다. 하나는 맨 앞 진영이, 또 다른 하나는 맨 뒤의 민수가 길을 비추고 있었다.
“따라오려면 빨리 따라와. 쉬엄쉬엄 할 처지가 아니잖아.”
“오빠!”
진영의 말에 지연이 소리쳤다.
“오빠가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 처음부터 이곳에 오자고 한 사람도 오빠고 이곳에 대해 제일 잘 알고 있는 사람도 오빤데 어떻게 그렇게 얘기할 수 있냐고!”
길이 어긋나고 난 후부터 줄곧 입을 닫고 있던 지연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어둠을 울렸다.
“그래, 다 내 탓이다. 길 잃은 것도 내 탓이고 아니, 여기 온 것도 다 내 탓이다. 됐냐?”
“오빠!!”
그들의 격앙된 목소리를 들으며 민수는 잡고 있던 미진의 손에서 가느다란 떨림이 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곧 그 떨림이 추위 때문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만들 해!”
민수의 목소리에 일순간 주위가 조용해졌다. 산기슭에서 불어오는 날카로운 바람이 그들의 머리칼을 쓸어 날리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먼저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잠시의 시간이 바람과 함께 그들을 스쳐 지나간 후 다소 차분해진 지연의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저, 저건 머지?”
세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불빛에 비친 지연의 손가락이 향하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불빛이다!”
진영이 소리쳤다.
“불빛, 불빛이라고?”
멀리 희미하게 아른거리긴 했지만 확실하게 그것은 불빛임에 틀림없었다.
“혹시 벌레 같은 것 아닐까?”
미진의 말에 진영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틀림없이 불빛이야. 그렇게 먼 것처럼 보이지도 않아.”
“그럼 인가란 말이야? 우리가 벌써 다 내려온 거야?”
희망에 찬 지연의 목소리에 힘이 잔뜩 들어가고 있었다.
“아직 그렇게 생각하기엔 이르지만 산 속 마을일 수도 있으니 일단 가보자. 발밑 조심하고.”
민수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네 사람 모두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걸음은 이전과는 확실히 틀렸다. 지연과 미진 역시 발밑에서 전해오는 통증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의 모든 생각은 오직 한가지에만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불빛이 있는 곳에 거의 도착할 무렵 비로소 그곳이 마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을이라고는 하지만 랜턴 불빛에 비쳐진 것은 민속촌에나 있을 법한 초가 몇 채가 전부였다.
“마을인가? 이 산중에 말이야.”
민수가 조용히 말을 했다.
“사람이 사는 것 같지 않은데. 모두들 불이 꺼져 있고 인기척도 없잖아.”
“일단 불빛이 있는 곳으로 가보자.”
마을로 들어선 세 사람의 발걸음은 무척 조심스러워졌다. 마치 잠자는 아기를 깨우지 않으려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불빛이 있는 곳으로 도착했을 때 그들은 비로소 그 불빛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머야, 저 벌레들은?”
미진이 민수의 등 뒤로 몸을 숨기며 말했다.
“반딧불이잖아. 그런데 이 가을에도 반딧불이 있을 수 있나? 그리고 저 통은 머야.”
그 집의 기둥위에는 마치 연등같이 생긴 둥근 통이 걸려있었고 수많은 반딧불들이 그 통의 속과 주위를 날아다니고 있었다.
“하긴 지금은 반딧불이 있을만한 계절은 아닌데. 저 통 때문에 반딧불들이 아직까지 살 수 있었나보지, 머. 덕분에 저 등은 사람 없이도 불을 밝힐 수 있었고.”
지연은 별 것 아니라는 투로 간단하게 추론해낸 생각을 입으로 뱉어내었다.
“그나저나 여긴 정말 아무도 살지 않는 곳인가? 인기척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네.”
민수의 말에 진영이 장난스럽게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한번 알아볼까?”
진영은 두 손을 입으로 모으고 있는 힘껏 소리쳤다.
“여기 아무도 없나요!!”
진영의 목소리가 어둠의 산들을 부딪치며 메아리쳐갔다. 그의 목소리가 조금씩 잦아들 때 놀란 표정으로 귀를 기울이던 지연이 입을 열었다.
“머야, 깜짝 놀랐잖아.”
“봐, 아무도 없지? 오늘은 여기서 하루 묵고 가자.”
진영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반딧불이 걸린 집의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문은 문풍지조차 바를 돈이 없었는지 커다란 판자 같은 것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 무게로 인해 방문이 열릴 때 들리는 소리가 그리 편케 들리지 않았다. 세 사람은 모두 그의 뒤를 따랐다. 방안에서는 곰팡이와 먼지가 섞인 것 같은 메케한 냄새가 코를 찔러댔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입으로 가져갔다.
“야, 무슨 냄새가 이래?”
“사람이 산지 무척 오래되어서 그런 것 같은데. 머, 어때. 냄새가 좀 나긴 하지만 밖에서 동태 꼴 나는 것 보단 낫지 않냐?”
진영은 랜턴으로 방안을 자세히 살피고 있는 동안 나머지 세 사람은 배낭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그들은 넘칠 것만 같았던 긴장감이 한꺼번에 풀리면서 밀물처럼 밀려오는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 때 진영이 무엇인가를 찾은 듯 세 사람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들은 갑작스런 진영의 랜턴 불빛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머야, 눈부시잖아.”
“아, 미안.”
진영은 불빛을 아래로 향하게 하고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기다란 줄 같은 것이 들려있었다.
“이게 머지? 무슨 천 같은데.”
그들은 진영이 다가와 앉았을 때 비로소 그의 손에 들려진 물건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붕대 아냐? 좀 넓긴 하지만 붕대 같은데.”
지연이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조심스럽게 천을 들어보며 말했다.
“야, 요즘 붕대는 삼베로 만드냐?”
민수 역시 그 천을 만져 보았다. 확실히 삼베가 맞는 것 같았다. 하지만 모양은 지연의 말대로 풀려진 붕대가 헝클어져 있는 모양이었다.
“어디다 쓰는 걸까?”
미진은 어느새 민수의 어께 맡에 다가와 앉았다.
“머, 농사할 때 쓰는 거겠지. 아, 몰라. 이게 머 대수냐. 피곤한데.”
진영은 그 천을 방 옆으로 휙 던져버리고 배낭을 베게 삼아 누워버리고 말았다. 진영의 말이 맞긴 했다. 사람은 낯선 곳에서 항상 필요 이상으로 날카로워진다. 더구나 오늘 같이 아찔한 경험을 한 이후에는 더욱 그렇다.
관심거리가 사라지고 나자 캄캄한 방안은 더욱 조용해 졌다. 민수는 배낭을 등받이 삼아 벽에 기대어 있었고 미진은 민수의 품에 안겨 있었다. 민수는 미진의 고르지 않은 숨결을 느끼며 오히려 지금의 상황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까지 생기고 있었다. 사실 네 사람이 자주 모이곤 했지만 활발한 성격 탓에 자연스럽게 애정표현을 하는 진영과 지연 커플과는 달리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의 민수와 미진은 기껏해야 영화관에서 손잡는 것이 다였다. 민수는 항상 그런 진영 커플을 보며 부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몇 분이 지났을까 지연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어둠속의 정적을 깼다.
“오빠.”
“왜.”
“나, 저기 화장실.......”
“갔다 와, 그럼. 밖에 널린게 화장실인데.”
진영의 귀찮아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머야, 진짜. 좀 같이 가주면 어디 덧나니?”
지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됐어. 오늘 계속 그러는데, 내일 서울로 가기만 해봐라, 진짜.”
지연은 민수의 손에 들린 랜턴을 낚아채고는 밖으로 나갔다.
“야, 좀 같이 가주지 그러냐.”
민수가 그녀가 나간 방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진영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산 중에서의 일로 둘 다 삐쳐 있는 것 같았다. 민수는 그 상황에 대해 알 수 없는 책임감이 느껴졌다.
“야, 하진영. 너 정말.......”
그 때였다. 민수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밖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지연이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울리자마자 용수철처럼 진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수와 미진 역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진영이 재빨리 방문을 열려고 할 때 오히려 밖에서 문이 열렸다. 지연이었다. 그녀는 무엇인가에 쫓기듯 방안으로 뛰어 들어와 진영의 품에 안겼다.
“머야! 무슨 일이야!”
진영이 다그치듯 지연을 향해 말을 했다. 그녀의 어께에서 전해오는 떨림을 그는 느낄 수 있었다.
“밖에, 밖에 머가 있어.”
“머가 있다니, 무슨 말이야.”
“파란 빛들이, 파란 불빛들이 있어.”
“파란 불빛?”
진영은 지연을 안정시키기 위해 그녀의 등을 토닥거려주었다.
“알았어, 알았어. 여기서 미진이랑 잠시만 있어. 민수하고 같이 살펴보고 올테니까. 됐지?”
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민수야, 잠시 나가보자.”
진영의 말에 민수는 지연의 손에 들린 랜턴을 받아들고 진영을 따라 방문을 열었다. 찬바람이 볼에 와 닿았다. 그들은 옷깃을 세우고 랜턴 불빛을 여기저기 비추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그들은 불빛 없이도 주위가 어슴푸레 눈에 들어오는 것을 깨달았다.
“왜 이렇게 밝아졌지?”
“달.”
민수가 하늘을 가리켰다. 해가 지고 난 후부터 구름에 가려져 있던 달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오늘이 보름이었나?”
진영이 마치 커다란 가로수 불빛이 하늘에 걸려있는 듯 환하게 빛을 내뿜고 있는 보름달을 보며 말을 했다. 도시에서는 이렇게 선명한 보름달을 볼 수가 없었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랜턴의 불빛을 끄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런가보네.”
민수가 대답했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고 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파란 불빛이 어디에.......”
“됐어. 다 아는 얘긴데 멀.”
진영의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민수는 진영의 어께에 손을 얹었다.
“오늘 힘들었던 건 아는데, 지연이한테 좀 잘해라, 응?”
진영은 민수의 말에 씩 웃음을 지어보였다. 아무리 가까운 애인사이지만 자신이 생각해도 오늘 지연에게 매몰차게 대했던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놈의 자존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진영의 자존심은 방금 전 품에 안긴 지연의 체취에 눈 녹듯 사라져버렸다. 지연이 저렇게까지 하는 모습에 오히려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들어가자, 내가 알아서 하께.”
진영은 방안으로 들어갔다. 지연은 아직 진정되지 않은 듯 톤이 높은 목소리로 말을 했다.
“머였어? 그 불빛, 머였지?”
“아, 그냥 산짐승이었나 봐. 민수랑 나랑 나가니까 산위로 도망가 버리더라고.”
진영은 지연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정겨운 말투로 대답을 했다.
“참, 너 화장실 가고 싶다고 그랬지? 가자, 오빠가 같이 가주께.”
“정말 산짐승이었어? 정말 없어졌어?”
진영은 지연의 말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없어졌어. 자, 나가자. 이 집 옆에 보니까 볼일 볼만한 곳이 있더라고. 앞에서 볼일 보면 민수 녀석이 훔쳐 볼 테니까.”
민수는 진영의 말에 큰소리로 웃음을 내뱉었다. 진영의 말에 지연은 한층 안정되어 보였고 그의 품에 안긴 채 둘은 밖으로 나갔다. 민수와 미진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한층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미진은 다시 그의 어께를 베게 삼아 등을 기대었다.
“진작 저랬으면 좋았을 텐데. 보기 좋다, 그치?”
그녀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민수는 그녀의 숨결이 자신의 턱에 와 닿는 것을 느꼈다. 그는 대답 대신 자신의 어께에 안긴 그녀의 얼굴에 조심스럽게 한쪽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뺨을 매만졌다. 땀이 식어 끈적이는 그녀의 피부였지만 민수에게는 그런 그녀조차 한없이 사랑스러워보였다. 그는 살며시 자신의 입술을 그녀의 입술에 가져갔다. 미진은 눈을 감고 그의 입술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 으아아아악!!
아까와는 다른 섬뜩한 비명소리가 들린 것은 두 사람의 입술이 닿기 직전이었다. 진영의 목소리였다. 민수는 그 소리가 들리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야! 진영이 목소리잖아!”
하지만 곧 그들은 밖에서 들리는 소리가 비단 진영의 목소리뿐만이 아닌 것을 깨달았다. 진영의 목소리에 섞인 희미한 지연의 목소리, 그리고 웅성거리는 알 수 없는 소리들. 마치 그것은 돼지들이 한데 모여 내는 소리인 것 같았다. 민수는 곧 문을 열고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달빛에 비친 한 그림자가 이곳을 향해 비틀거리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민수와 미진은 순간 뒤로 물러섰지만 곧 그들은 그 그림자의 주인공이 진영임을 깨달았다.
“진영아! 무슨 일이야!”
민수가 진영에게 소리를 쳤지만 진영은 그들을 지나쳐 방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민수와 미진은 곧 그를 따라 방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불빛에 비쳐진 진영은 방의 한쪽 구석에 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양손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야! 무슨 일이냐니까. 지연, 지연이는?”
민수가 다그치듯 진영의 어께를 잡고 흔들었다. 그제야 진영은 고개를 들어 민수를 바라보았다. 민수는 그의 얼굴이 희미한 불빛에 비쳐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눈에 파랗게 질려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파, 파란 눈....... 파, 파란 눈들이.......”
진영을 말을 잇지 못했다.
“파란 눈들이 어쨌다고. 말을 제대로 해보란 말이야!”
민수가 진영을 계속 재촉할 때 밖에서 아까 들렸던 웅성거림이 들렸다. 아까보다는 훨씬 가까운 곳에서 울리는 소리였다. 민수는 재빨리 방문을 열었다. 그 순간 민수는 온 몸에 소름이 쫙 끼치는 것을 느꼈다. 마당 너머 풀숲에 알 수 없는 파란 불빛들이 수없이 널려 있었던 것이다. 그 불빛들은 조금씩 앞으로 다가오는 것처럼 보였고 마침내 그 중 한 불빛이 달빛에 희미한 형체를 드러내었다. 사람이었다. 아니, 그것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거의 누더기에 가까운 옷가지를 걸치고 있어 간신히 사람처럼 보일 뿐이었다. 얼굴은 형체를 알 수 없이 허물어져 있었고 움직임은 마치 좀비처럼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녀석을 뒤이어 하나 둘씩 불빛들이 달빛아래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다. 어떤 녀석은 거의 풀려버린 천을 얼굴에 감고 있기도 했다. 천, 붕대! 민수는 자신도 모르게 방문을 닫고 뒷걸음을 쳤다. 그의 몸이 벽에 부딪혔다.
“문둥이들이야.”
구석에서 쪼그리고 앉아있던 진영이 멍한 목소리로 말했다.
“문, 문둥이들? 나환자들 말이야?”
진영은 아무 말이 없었다. 미진은 민수의 팔을 잡고 울기 시작했다. 그녀는 잔뜩 공포에 질려 있었다. 민수는 미진의 어께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그럼 방안에서 본 저 천이....... ”
“어.”
그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느낌도 감정도 묻어나고 있지 않았다.
“마, 말도 안 돼. 나환자들이 요즘 같은 시대에 어떻게 이런 산속에 살고 있단 말이야! 그리고 아무리 문둥이들이라도 밖에 저게 사람처럼 보이냐고!”
진영은 아무 말도 없었다. 자신 역시 지금 상황에 대해 전혀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아니, 그럴 여유조차 그에게는 없었다.
“미진, 미진이는 어디에 있어? 왜 너 혼자 온 거야!”
민수는 진영을 거칠게 흔들어 댔다. 하지만 진영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빈 공간에 시선을 던지고 있을 뿐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다. 그 때 그들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웅성거림과는 틀린 낮은 신음소리. 민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어보았다. 파란 눈빛을 내뿜는 녀석들은 어느새 십여 명 정도는 되어 보였다. 그들이 한꺼번에 흐느적거리는 모습은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허수아비들을 늘어놓은 것 같았다. 그 무리 사이에 무엇인가가 있었다. 하얀 점퍼와 갈색 바지. 미진이었다. 그녀의 점퍼 가슴부분은 심하게 찢겨져 있었고 그 곳을 통해 붉은 피가 분수처럼 샘솟고 있었다. 그 같은 상처에도 불구하고 미진은 사그러져 가는 희미한 숨을 고통스럽게 내쉬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 있는 몇몇 녀석의 얼굴에는 하얀 달빛에 비친 붉은 핏방울이 선명하게 맺혀져 있었다. 미진의 피였다.
방문을 잡고 있던 민수의 손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진영 역시 어느새 민수의 뒤편에 다가와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심한 충격에 다리에 힘을 풀렸고 간신히 민수의 어께에 의지해 몸을 가눌 수 있었다. 민수는 미진이 문 앞으로 다가오려 하자 급하게 방문을 닫았다. 그리고 미진을 꼭 껴안았다. 그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고 미진 역시 그를 따라 울음을 터뜨렸다. 진영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울음 섞인 민수의 말이 들렸다.
“나가자! 이대로 있다간 다 죽고 말거야.”
하지만 그의 말에도 진영은 꼼짝을 하지 않았다.
“이 새끼야! 정신 안 차리면 죽는다고!”
민수는 진영의 머리를 흔들어대며 말했다. 진영이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그는 미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미진아, 오빠 말 잘 들어. 지금부터 방문을 열면 무조건 뛰어야 한다. 알겠지? 우리가 왔던 산길로 돌아가는 거야. 뒤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더라도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절대 돌아보면 안 돼. 무조건 앞만 보고 뛰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미진은 울음에 숨을 들이키며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 할 수 있을 거야. 오빠는 진영이를 데리고 가야 하니까 너 혼자 뛰어야 한다.”
민수는 마지막으로 확인을 하고 싶은 듯 재차 미진에게 말을 했다. 그리고 조용히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왠지 그 말은 마지막 인사가 될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들어 그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민수는 재빨리 진영을 등에 업었다. 마치 시체인 것처럼 온 몸이 축 늘어진 그의 몸은 상당히 무거웠다. 하지만 그런 것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민수와 미진은 조심스럽게 방문 앞으로 다가갔다. 민수가 먼저 문을 조금 열어 밖을 살폈다. 녀석들이 이 방 앞을 쭉 둘러싸고 있는 것이 보였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조금 후면 꼼짝없이 방 안에서 당할 것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민수는 방문을 열어 제치고 미진에게 소리쳤다.
“뛰어!”
미진이 달려 나가자 곧 이어 민수 역시 방문턱을 넘어서 뛰었다. 흔들거리는 진영의 무게 탓에 앞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것 정도를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무조건 앞만 보고 달릴 뿐이었다. 파란 눈의 녀석들은 집 앞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어느새 이 마을 전체가 녀석들로 가득 차 있었다. 민수는 달려드는 녀석들을 몸으로 부딪쳐 튕겨내며 앞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 아악!
뒤에서 들려오는 짧은 비명소리에 민수는 순간적으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미진아!!”
그가 뒤를 돌아보려 할 때 왼쪽 다리에서 심한 고통이 느껴졌다. 한 녀석이 그의 다리를 물어뜯고 있었다. 민수는 엎고 있던 진영을 놓아버리며 넘어져 버렸고 순식간에 서너 녀석들이 그의 가슴팍으로 올라탔다. 그는 더 이상 저항할 방법이 없었다. 멀리 미진의 몸 위로 파란 눈빛의 녀석들이 올라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순간 그의 가슴부분에서도 심한 고통이 느껴졌다. 몇 녀석은 입으로, 또 다른 녀석들은 손으로 그의 가슴살을 뜯어내고 있었다. 심장을 원하는 것이다, 이놈들은.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고통은 줄어들었다. 다만 숨이 쉬어지지 않아 머릿속이 희미해져 가는 것을 느낄 뿐이었다. 가쁘게 나머지 숨을 들어 내쉬며 민수는 문득 한 녀석의 허리춤에 달린 무엇인가를 보았다. 그것은 녀석의 허리에서 훈장처럼 대롱거리며 가끔씩 달빛 속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호...패...’
수업시간에 본 조선시대 호패가 그의 기억에 떠올랐다. 조선시대의 호패가. 그러고 보니 그 놈의 머리 부분은 다 허물어지긴 했지만 간신히 상투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제 자신에게 주어진 숨이 몇 번 남지 않았음을 그는 알 수 있었다. 녀석들은 그의 심장을 다투듯 빼앗아 입으로 삼켜 넣고 있었다. 그는 간신히 한 녀석의 입에서 떨어지는 자신의 피를 바라볼 수 있었다. 민수의 눈은 그 녀석의 파란 눈과 마주쳤다. 그는 녀석의 눈을 바라보며 순간적으로 녀석이 여자임을, 아니 여자였음을 알 수 있었다. 아마 댕기머리를 곱게 땋은 한 처녀였을 것이라고 민수는 생각했다. 녀석 역시 민수의 심장 살점을 입으로 삼키며 민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 그녀의 파란 눈빛에서 물방울이 맺히고 있었다. 코도, 입도, 귀도 형체를 알 수 없이 허물어져 있는 얼굴 위로 파란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파란 눈은 한참동안을 그렇게 민수의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민수의 마지막 숨이 넘어갈 때 그녀는 마치 늑대처럼 긴 목을 빼고 알 수 없는 울음소리를 내뱉었다. 그 소리는 지리산의 이름모를 산 벽을 타고 늦가을 보름달 빛 속을 조용히 메아리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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