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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소 주인

  • 작성일 2007-12-20
  • 조회수 359

 

나는 세탁소 주인이다.

내가 애초에 세탁 일을 배우게 된 것은 순전히 내 신체적인 결함 때문이다. 나는 선천적인 소아마비다.

그래서 절름거리며 밖으로 돌아다니지 않아도 되는 일을 찾다가 세탁 일을 배우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2년 동안 남의 집에서 일을 배운 후, 그러니까 5년 전 내가 서른 살 때 처음으로 세탁소를 개설하게 된 이곳은 다세대 주택이 밀집해 있는 골목길이다. 잘 알다시피 요즘 다세대로 입주해 사는 사람들은 지극히 평범한 소시민들이다. 특출 나게 잘 난 사람도 없고 그렇다고 거지발싸개처럼 아주 형편없이 살지도 않는다.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아주 평범한 동네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이곳에 정착하기를 아주 잘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곳에는 독신으로 혼자 사는 젊은 여자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지금 나는 총각이다. 그렇다고 내가 결혼을 하겠다거나 이곳에서 한 여자를 꼬셔야겠다 거나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내 일을 사랑하고 또 내 고객들을 존중한다. 다만, 독신으로 사는 여자들이 많다는 것은 그냥 기분이 좋은 것뿐이다.

출입문이 방울소리를 내기에 바라보니 한 낯선 여자가 종이 백을 들고 들어선다.

" 어서 오세요."

여자가 내부를 두리번거리며 잠시 망설이는 눈치를 보이다가 내 곁으로 다가섰다. 어젯밤 과음을 했는지 약간의 술 냄새가 풍겼다.

" 이거 드라이 할 건데요, 비싼 옷이니까 신경 좀 써 주세요."

나는 종이 백에서 옷을 꺼내 투피스 목 부분을 살펴보았다. 영어로 '샤넬' 이라고 붙어 있긴 한데 아무래도 짜가처럼 보였다. 아무리 평범한 수준의 동네라 해도 가끔은 진짜 명품도 들어오는데 세탁일 7년째다 보니 천의 촉감만 보고도 진품 가품정도는 구분할 수 있는 안목이 내게도 생겼다.

" 예, 걱정 마십시오. 신경 써 잘 해 드리겠습니다."

여자가 대뜸 냉수 한 컵 먹을 수 있겠냐고 물어왔다. 순간 나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이 여자는 오늘 처음으로 내게 온 손님이다. 그냥 옷만 맡기고 바로 나갔으면 내가 절름발이라는 사실을 오늘은 굳이 밝히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앞으로야 어차피 알게 되겠지만 첫 날 부터 병신에게 옷을 맡기고는 혹시 나갈 때 찜찜해 하지는 않을까 내 딴에는 기분이 껄떡지근 할 수 밖에 없었다.

" 예, 잠깐만요."

나는 그 여자에게 등을 보이며 절뚝절뚝 방 쪽으로 걸어갔다. 냉장고가 방 안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 이 동네로 새로 이사 오셨나 봐요? "

나는 문지방에 걸터앉으며 조금 큰 소리로 물었다.

" 예, 일주일 전에요."

걸어놓은 옷에 가려 여자의 하반신만 보이는 가운데 대답이 들려왔다. 나는 냉수 한 컵을 따라 그 여자에게 가져다주었다. 여자는 단숨에 컵의 물을 비웠다.

" 언제 올까요? "

" 모레 오전에 오시면 됩니다."

그 여자는 입을 잔뜩 비틀며 짧은 하품을 하고는 출입문 밖으로 사라졌다.


내가 시간이 많은 탓도 있겠지만 이 동네 단골들의 사생활에 대해 나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물론 그들과 대화를 통해 아는 건 아니다. 그래서 온전히 다 맞다고 장담은 할 수 없다. 하지만 세탁물을 맡기기 위해 오는 사람들의 면면에서 느낌으로 알 수도 있고 주위 깊게 옷을 살펴보면 그 옷이 내게 들려주는 이야기도 제법 풍성한 편이었다.

이를테면 동성빌라 304호 여자는 우선 게으른 여자다. 그리고 눈가의 멍이 가실 날이 없는걸 보면 남편에게 자주 얻어터지면서 사는 여자임에 분명하다. 다림 주택의 중년 여인은 일단 멋쟁이다. 그리고 옷이 자주 바뀌는걸 보면 사치를 즐기는 여자가 틀림없다. 또 쉐라톤에 사는 중년 남자는 분명 와이프가 있음에도 본인이 직접 양복과 와이셔츠를 가져와 세탁을 맡겼다. 그것은 그의 와이프도 마찬가지였다. 이따금씩 두 내외의 주머니에서는 서로 색이 다른 톤의 핑크빛 러브레타가 나오곤 했다.

나는 손님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부산물을 절대 돌려주지 않는다. 그냥 한 번 훓어보고 바로 쓰레기통으로 버리거나 동전 같은 것은 돼지저금통에 집어넣고는 금새 잊어버리고 만다. 아마도 쉐라톤의 부부는 한 지붕을 이루고 살면서도 각자의 사생활을 지극히 존중하거나 적당히 타협적으로 살지 않을까 싶었다.

독신으로 사는 여자들도 각양각색이기는 마찬가지다. 동성빌라 502호 젊은 여자는 원피스를 즐겨 입는데 스캇트 부분에는 허연 풀칠이 묻어 있을 때가 많았다. 그것은 굳이 성분분석을 해보지 않아도 사내의 그것임을 나는 댐방 안다. 또 다림주택의 젊은 여자 하나는 지금 다이어트 중이다. 사흘에 한가지씩의 옷을 가져 나와 내게 허리를 맡겼다. 나는 줄자로 그녀의 허리를 재면서도 항상 눈금을 맞대는 쪽은 그녀의 배꼽 아래로 잡았다. 때로는 나의 손등이 도툼한 그녀의 두덕을 스치는 기분이 묘하고 좋아서다. 내 눈으로 보기에도 갈수록 날씬해지고 있다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얼굴이 까칠해져 가는 것을 보면 예전의 통통한 모습이 훨씬 더 이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그런 말을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좀 전에 다녀간 여자는 이제 쉐라톤 202호의 새로운 주인이 되어 내게 또 다른 비밀을 하나씩 노출 시키게 될 것이다.

아마도 내가 단골손님들에 대해 이토록 많은 부분을 꼬뚫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꿈에도 생각치 못할 것이다. 만약 그것을 알게 된다면 다시는 내게로 오지 않을 거라는 상상을 하다보면 정말 끔찍하다. 그래서 나는 가급적 손님에게 사생활에 대해 일체 묻지를 않는다. 하긴 그렇다고 상대 쪽에서 병신인 나에게 별다른 관심을 가지고 말을 걸어올 일도 만무하다.


나는 어김없이 밤 9시에 세탁소 문을 닫는다.

" 아저씨! "

막 샷다를 내리려고 하는데 부르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그저께 '샤넬'을 맡기고 간 여자였다. 여자는 오늘도 술이 만취가 된 듯 조금씩 비틀거리고 있었다.

" 지금 옷 찾아 가시게요? "

그러자 여자는 야릇한 웃음을 흘리며

" 아저씨, 혼자 사세요? "

하며 물었다. 그리고는 손에 든 검정 비닐봉지를 들어 흔들어 보였다.

" 오늘, 저랑 한 잔 하실래요? "

갑작스런 제안에 잠시 벙벙한 얼굴로 서 있는데

" 저, 좀 안으로 들어가도 되지요? "

그녀는 안내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 문을 열고 가게 안으로 쑥 들어갔다. 나는 샷다를 반쯤 내리고 홀의 불을 끄고는 그녀가 먼저 선점한 방문 앞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 어서 안 들어오고 뭐하세요? “

그녀가 맥주 다섯 병과 구운 오징어 한 마리를 봉지에서 꺼내며 손짓을 하였다.

" 컵 좀 내오세요."

하더니 맥주병과 맥주병의 주둥이를 서로 맞대 숙달된 모습으로 뚜껑을 땄다.

그녀는 내가 무슨 말을 할 틈을 주지 않았다. 혼자 묻고 혼자 답하고 혼자 웃다가 혼자 꺽꺽거렸다.

" 아저씨, 제가 맡긴 그 옷 짜가죠? "

하필이면 제대로 된 질문이 난감한 질문이다. 그러나 대답할 걱정은 곧 가시었다.

" 그거 짜간 줄 다 알아요. 미친 개새끼! 어디서 나한테 개수작을... 그거 그냥 쓰레기통에 버리세요. 세탁비는 이 술로 대신 하면 되지요? "

하더니 다시 키득키득 웃었다.

맥주가 거진 다 비워질 동안 그녀는 혼자 횡설수설 떠들다가 비스듬히 쓰러지더니 결국 코를 골고 말았다. 누운 그녀의 아랫도리로 선풍기 머리가 지나칠 때마다 깊은 속살이 훤히 드러났다 덮히곤 하였다.

대충의 이야기를 정리 해보면 이 여자는 분명 어느 사기꾼에게 걸려 몸과 마음을 크게 다쳤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아픈 마음을 하소연 할 곳을 찾다가 결국 혼자 사는 내게로 왔을 것이다. 물론 미리부터 이곳으로 올 생각이야 없었을 게 분명하다. 그냥 떡본 김에 제사나 지내고 다시 갈 요량일 것이다. 나는 그녀의 머리에 비개를 고여 주고는 작업실로 나와 일자형 비닐소파에 몸을 눕혔다.


부시럭거리는 소리에 잠이 깨고 보니 그녀가 출입문을 열기위해 문 쪽을 더듬거리며 서 있었다. 밖은 먼동이 막 터오는 중이었다. 나는 얼른 일어나 문을 따고 샷다문을 조용히 올려 주었다.

" 들어가서 편히 주무세요. 죄송했어요."

여전히 비틀거리며 그녀가 인사를 하고는 엷은 어둠속으로 사라져 갔다. 문만 걸어 잠그고 방으로 들어와 그녀가 누었던 자리에 몸을 눕혔다. 비개에서 술 냄새와 함께 그녀가 흘려놓은 타액에서 야릇한 냄새가 뿜어져 나왔다.

나는 눈을 멀뚱거리며 누워서 천정을 바라보았다.

언젠가는 나도 이 세탁소의 문을 닫을 것이다. 이를테면 동성빌라 304호 여자의 얼굴에 멍자욱이 사라지고 다림주택의 멋장이 아줌마가 어느 요양원으로 봉사를 다닌다는 소식을 접하고 쉐라톤 부부의 주머니에서 색이 다른 연서가 완전히 사라지고 함께 세탁물을 맡기러 오는 날이 바로 그 날이 될지도 모른다.

또, 동성빌라 502호 젊은 여자의 스카트에 더 이상 풀칠이 묻지 않고 두덕을 스치는 기분을 느끼지 못하더라도 까칠한 그 얼굴에 생기가 도는 날이거나 새로 이사 온 쉐라톤의 여자가 맑은 정신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그 날이 오면 어쩌면 나는 이 세탁소의 문을 닫게 될지도 모른다.

내 생업을 떠나 내가 옷가지에 대한 호기심이 사라지는 그 날은 이미 내가 드라이 크리닝을 하지 않아도 좋을 그런 세상일 테니 말이다. 終

 

 

2007年 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