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목표는 형부다

  • 작성일 2009-01-22
  • 조회수 1,519

 

1. 사라진 신부


 내 이름은 김상혁. 등단한지 팔구년이 지나도록 후속작하나 못 터트린 말 그대로 무명작가다. 전직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던 중 엄청난 대박 이야기 거리 하나를 잡았다. 하지만 이 이야길 소설로 출판하기엔 양심에 걸리는 게 있었다. 후배 기자 녀석에게 조언을 듣기로 하고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상혁이 형, 여기에요!”


 담배 연기로 자욱한 홍대의 한 바에서 녀석은 먼저 와 자리 잡고 있었다. 더벅머리에 꺼벙하기까지 해 보이는 순박한 눈웃음. 그 누가 녀석을  옥스퍼드 대학에서 프로파일링을 2년이나 공부하고 온 재원이라고 생각하겠는가.


 “형. 그 살인 사건 얘기 좀 해주세요. 궁금해서 단박에 달려왔어요.”

“인마. 넌 형님 안부도 안 묻냐?”

“에이~ 무명작가 안부야 안 묻는 게 도리어 예의죠. 여기 맥주 두 병이요! 형수는 잘 있죠?”

“무명 작가 와이프에 대해 묻지 않는 게 더 예의다.”

“하하. 형 친구랑 관련  있는 사건이라면서요?”

“김영찬! 너 남자 대 남자로 약속해라. 이 이야기의 결말이 나기 전까진 보안을 유지하겠다고.”

“두 말 하면 잔소리죠. 형 친구랑 얽힌 건데. 근데, 형! 왜 소설로 발표안하시고 저한테 얘길 들려주겠다는 거죠?”

“이대로 소설로 내기엔 뭔가가 찝찝해. 진상이 제대로 밝혀진 것인가 싶기도 하고”

“더 흥미진진해지는데요. 어서 이야기보따리 풀어주세요.”


 녀석의 눈동자가 샹글리에처럼 빛났다. 순간 내 친구의 인생이 걸려있는 진중한 문제를 흥밋거리로 전락시켜버린 게 아닌 가 후회되기도 했다. 하지만 녀석의 명석한 두뇌는 너무 탐이 났다. 내 친구를 위해서라도 얘기하는 게 좋다고 믿어보기로 했다. 난 담배 하나를 물고 이야길 시작했다.


                                     ***


 그레이스 웨딩홀은 이름과 달리 저르르한 소음으로 가득했다. 예식장들이 의례히 그러듯이

내 친구 박형진이 홀 입구에서 그의 하객들을 맞이하는 동안 홀 안에선 다른  결혼식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부에서 들리는 불쏘시개 같은 축하의 함성들이 대기 중인 또 한 명의 새 신랑에겐 왜 버거운 소음으로만 들려야할까? 형진은 늘 불만이었다.


 하지만 형진이 주인공으로 홀 입구에 서던 날 내부의 소란쯤은 들리지 않을 일이 터져버렸다. 형진이 뭔가 심상치 않음은 하객으로 온 나도 어렵지 않게 눈치 챘다. 새신랑 특유의 부드러우면서도 서먹한 표정을 견지하려 애쓰고 있었지만 어쩐지 형진의 입이 바짝 말라있었기 때문이다.


 “왔냐?”

“그래, 왔다.  짜식, 왜케 굳었냐. 좀 웃어라. ”


“허니문 카 멋진 거 빌려놨더라."

"인마, 형님이 그 정도 능력 안 되겠냐. 그럼 밥 먹으러 간다!  별 문제 없지?”

“응. 사소한 거 하나 빼곤.”

“뭐?”

“…….”

“뭔데? 말해봐!”

“아직 안 왔어..”

“누가?”

“……신부가.” 


 잠시 어리둥절하던 내게서 실소가 터진다.


“ 쉐에끼~ 썰렁한 농도 여전하고, 좆까라 마이싱이다. 수연씨 먼저 보고왔그등! 식당 어디냐?”


 형진은 진실을 몰라주는 내가 서운했다고 했다. 하지만 형진이 진실을 말할수록 그 말은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될 뿐이었다. ‘사라진 신부’는 헐리우드 영화에서나 나오는 법이니까.

                                                                                                                        ***      


 괘종시계의 종소리처럼 수연의 눈이 갑자기 떠졌다. 모텔방의 싸구려 민무늬 벽지가 빙글빙글 돌았다. 머리가 깨질 것 같고 속이 울렁거렸다. 시챗 구멍에서 올라오는 듯한 역한 술 냄새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옆에 남자가 트렁크 팬티차림으로 코를 골고 누워있다. 판규다.

 

 그래. 판규! 간밤에 이 자식 전화를 받고 나왔지. 그렇게 나오기 싫다고 빡빡 우겼는데……. 왜? 


 수연은 소스라치게 놀라 시계를 본다. 열두 시. 묵직한 검은 커텐을 후두두 걷어 본다. 제발 밤이어라! 순간 쏟아드는 햇볕에 부셔서 휘청거린다. 헉! 건잰 로지즈의 슬래쉬도 아니고

수연은 자신의 결혼식에 지각을 한 것이다. 화장대 거울 안에선 속옷만 입은 수척한 여인이 자신을 멀끔 쳐다보고 있다. 옷을 입는 건지 걸치는 건지 정신 차릴 틈도 없이, 길섶에서 무언가를 주워 올린 계집애마냥 수연은 부리나케 방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모텔이 있는 골목은 경춘가도로 통하는 샛길이었다. 하지만 수연의 SUV차량은 골목에서 벗어나자마자 한 발짝도 더 나아갈 수가 없다. 토요일 경춘가도 체증에 꼼짝없이 발이 묶여버린 것이다.


“젠장할!”


 수연은 그제야 모텔 방에 핸드폰을 두고 나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수없이 많은 전화가 왔을 텐데 왜 못 들었을까? 순간! 수연의 핸드폰 밧데리를 빼서 양수리 강물 속으로 던지던 간밤의 판규 모습이 흑백사진처럼 떠올랐다.  머릿속이 복잡하다. 판규와 함께 양수리로 나온 적은 전에도 몇 번 있었지만 모텔방을 잡아 밤을 보낸 건 처음이었다. 하필, 결혼식 전날 밤에.


 딸깍, 하고 방문을 잠그자마자 판규는 팔을 나꿔채더니 수연을 그대로 품에 안았었다. 그의 입 속으로 뜨겁게 빨려 들어간 것이 혀 뿐 아니라 몸 전체인 것 같았다.  혀끝에서 원치 않는 단침이 계속 솟아났다. 안 돼. 내일 결혼식이야. 수연이 중얼거릴수록 판규는 더욱 흥분했다.


 ‘만남의 광장’근처에 와서야 겨우 차가 달리기 시작한다. 주유소 간판을 보았지만 수연은 그대로 지나친다. 모처럼 체증이 풀린 길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비록 결혼식은 취소됐을 테지만 한 시라도 빨리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술 냄새 풀풀 풍기는 모습일지언정 말이다. 괜히 결혼을 인륜지대사라 부르겠는가?


                                       ***


 “양가 부모님의 화촉 점화가 있겠습니다.”


수연의 걱정과 달리 결혼식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색동저고리 곱게 차려 입은 양가 어머니들이 유치원생을 인솔하는 듯한 도우미들의 안내에 따라 창 같은 기다란 초에 불을 붙이고 있다. 곧 이어.


 “신랑 입장!”


 하객들이 박수를 치고 숲속 깊은 곳에서 녹색 정령이 연기처럼 뿜어 나오듯이 형진은 스멀스멀 힘없이 걸어 나왔다.


                                       ***

 

 바람이 한 줄기 휘잉, 하고 들이치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도로 옆 산에 쌓였던 눈이 급하게 쏠려왔다. 이런 날 음주단속이나 나온 팔자라니. 최이철 순경은 경춘가도의 굽은 도로 한 복판에서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교외에 대낮 음주차량이 많다고는 하지만 이런 을씨년스러운 날씨엔 어울리지 않는 단속이었다. 딱 다섯 대만 더 불게하고 접어야겠다. 두 어 바퀴 순찰 돌고 들어가면 시간도 대충 맞을 것 같고.


 그 때였다. 최순경이 눈을 의심한 순간이.

최순경이 서있는 게 보일 텐데도 조금도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냅다 갓길을 질러오는 차량이 보였기 때문이다. 무전이 켜져 있는 상태라는 걸 확인한 최순경은 방향등을 흔들어댔다. 

다행히 차는 끼이익~스키드 마크 소리와 함께 멈췄다. 최순경은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창가로 다가갔다. 창문이 열림과 동시에 젊은 여성의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씨이바~ 좃돼따.”


 수연이었다.  

     

                                      ***


 “다음은 오늘의 주인공을 맞이하도록 하겠습니다. 장미보다도 예쁘고 백합보다도 순결한 신부, 이수연양이 입장할 때 하객 여러분께선 박수 아끼지 마시고, 마음껏 축하해주시기 바랍니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신부 소개 멘트에 하객들은 만면에 감동을 받을 준비를 한 태세로 고개를 뒤로 젖힌다. 단 한 사람, 신랑석의 형진만 얼음장처럼 굳는다. 난 형진의 표정을 간파하고 중얼거렸다. 설마…….


 “신부입장!”


 아버지의 손을 잡고 신부가 입장하고 있다. 난 너덜하게 웃었다. 셰에끼, 하여간. 형진은 장인어른께 절도 있게 절하고 신부를 건네받는다.


                                     ***


 술을 마실 때는 시간이 평소와 좀 다르게 흘러간다. 처음에는 시계를 자주 쳐다보는데도

바늘이 한 눈금이나 두 눈금 정도 느리게 움직인다. 그러다가 조금 지나면 시간이 흐름을 타기 시작한다. 한 번 시계를 볼 때마다 삼십 분씩이 지나 있다. 하지만 술에서 깼을 때,

특히 음주 운전하다 걸려서 경찰서에서 조서를 꾸미고 있노라면 술 마시며 뭉텅뭉텅 뽑아버린 시간을 보상이라도 하는 듯 느려터지기 일쑤다.

       

 “아저씨 죄송한데요.  저 오늘 진짜 결혼식이거든요! 게다가 늦었어요.”


 수연은 눈을 내리깔고 심각한 동작으로 하소연했지만 책상 맞은편의 장서욱 경장은 아무 말 없이 노트북만 노려본다. 수연은 그의 제복 소매 끝에서 기어 나온 실밥을 뜯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 아가씨, 아직까지 술이 덜 깨셨네...”


 그러더니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이마를 꾹꾹 눌러 닦더니 입도 닦는다. 수연은 살의를 느꼈다.


 “아저씨~ 저 화장실 좀…….”


 장경장은 못 미더운 눈으로 배를 움켜잡은 수연을 흘깃 본다. 수연은 한 술 더 떠 엉덩이 한쪽을 살짝 들고 당장이라도 일 저지를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


 “ 빨리 다녀와요. 멀쩡하게 생긴 아가씨가 지저분하긴……. ”

                           

 복도로 나온 수연은 화장실에 들어가는 척 하다가 눈을 질금 감고 경찰서 정문을 향해 내달렸다. 급한 마음에 절로 딸꾹질이 나온다. 당장이라도 그 느끼한 경찰이 몽둥이를 휘두르며 게 섰거라~ 쫓아 나올 것 같다. 하지만 정문의 위병은 무슨 일인가 수연의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볼 따름이다.

 

 반쯤은 미친 여자처럼(실제로도 그렇지만), 수연은 몸을 내던져서 택시를 잡아 세운다. 끼이익~ 덜컹거리며 멈춰 섰다. 야 이 미친년아.  기사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욕하는 틈을 타 수연은 조수석에 올라탄다. 아저씨 핸드폰 좀 빌려주세요. 빨리요! 그러나 어떤 택시 기사가 이 상황에서 곱게 핸드폰을 빌려주겠는가.


“이 여자가 정신이 나갔나, 진짜.  빨리 내려! 재수없어!”

“됐구요. 잠실이요. 얼른 잠실로 가주세요. 아저씨 빨리요!”


 택시는 정확히 한 시간 후 풍선을 매단 웨딩 카들이 사열하듯 서있는 그레이스 웨딩홀 앞에 급하게 멈춰 섰다. 기사가 미터기를 조작하는 사이에 수연은 다짜고짜 뛰어내렸다. 내 저럴 줄 알았다. 거기 안 서~!

 

 예식장 안으로 달려 들어와 엘리베이터 앞에 미끄러지는 수연. 흐리멍텅한 엘리베이터 표시등이 7층에서 내려올 기색을 하지 않는다. 수연을 쫓아 들어오는 기사 아저씨의 상기된 표정에 반에 반도 밝지 않은 저 표시등! 젠장……. 수연은 급박하게 비상구를 향해 뛰어올라간다. 비상구 계단은 난폭할 정도로 길고 끝이 없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고통을 뒤로하고 7층에 올라오자마자 수연은 자신의 예식 홀 팻말을 찾았다.


 하지만 없다.

신랑 신부들의 낯선 이름들이 동남아 어처럼 생경하다. 탐욕스러운 살이 덕지덕지 붙은 배불뚝이 아저씨들이 수연을 흘끔 쳐다본다. 천박하다 싶을 정도로 짧은 유니폼을 입은 예식장 도우미가 수연에게 다가온다.


 “도와드릴까요? 몇 시 예식 오셨습니까?”

“열두시요!  박형진 이수연 결혼식…다들 어딨나요?”

“……열두시 예식이요?”


도우미는 잠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손목시계를 들여다본다.


“지금 세시 반인데…식 끝나고 다들 가셨죠. 하객 분들도 혼주도.”

“아뇨! 취소된 결혼식 말이에요!”

“손님. 오늘 취소된 결혼식은 없었는데요.”

“왜 없어? 내가 지금 왔는데!”


 홀 안이 일순 조용해졌다. 도우미는 수연에게서 등을 돌렸다. 정상이 아닐 것 이라고 예측했지만 이 정도일지는 몰랐다는 표정이다. 수연은 도우미의 머리채라도 잡고 한바탕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되려 누군가의 우악스러운 손에 어깨를 잡혀야했다. 그것마저 수연은 반가워 뒤를 돌아봤지만 손의 주인은 뜨거운 땀을 뻘뻘 흘리며 씩씩 대고 있는 택시 기사였다.




2. 살인사건


 살다 보면 이상한 날이 있다. 그런 날은 어쩐지 모든 일이 뒤틀려간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하루 종일 평생 한 번 일어날까말까 한 일들이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하나씩 하나씩 찾아온다. 나는 형진의 허니문 카를 운전해주면서 백미러로 넌지시 형진과 신부를 보고 있었다. 기이했다. 갓 결혼한 신랑 신부가 아무 말 없이 각자 다른 창을 보고 있다니. 


 “왜? 첫날 밤 생각하니 떨려? 에이 왜 그래. 첫 날밤이 첫날밤이 아니잖아. 십년 사귀었으면서.”


 형진은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 그러게. 10년 동안 별 짓 다 해봤지만 허니문카 타보긴 또 첨이라 어색하네. 그지? ”

   

 형진은 조심스레 신부 손을 잡았다. 신부는 살짝 당황하지만 이내 붉어진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바람 때문에 이빨 몇 개가 빠진 오색 풍선 허니문 카가 인천국제공항 출국 게이트 앞에 멈춰 섰다. 난 차 트렁크에서 트렁크 가방을 꺼내줬다.


 “고맙다. 돌아와서 북창동 한번 쏘마.”

“새끼가. 신부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네. 술은 됐고 그 숨겨놓은 처제나  소개시켜줘.”


형진의 눈이 동그래졌다.


“처제?”

“허참. 네 놈이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 제수씨! 쌍둥이 동생 있다면서요? 오늘 눈 씻고 찾아봐도 안보이던데. 어디다 숨겨 놓은 거예요?  담에 같이 밥이나 먹어요.”


 신부의 얼굴에 또 홍조가! 그래요. 뒷 차가 빵빵거려서 난 운전석으로 뛰어갔다. 가지 말라도 간다! 설마 내가 신혼여행 따라갈까? 잘 다녀와라. 나 간다. 그래 고맙다.


                                    ***

 

 "나는 그 비좁은 공항 길을 곡예 하듯 빠져나와서 손을 흔들어대는 형진과 신부를 뒤로한 채 달렸어. 그러면서 계속 중얼거렸지. 아무리 봐도 뭔가 이상하단 말야. 둘이 서로를 어려워하고 있어. 싸웠나? 그건 아니지. 둘은 묘하게 설레어하고 있었어. 내가 그마를 안지가 몇 년 인데, 표정만 봐도 뻔하거든"


 이쯤 말하다 난 오줌이 마려워서 일어서려 했다. 하지만 내 얘기를 숨죽여 듣던 영찬이 툭 던진 말에 멈칫했다.


 "일란성 쌍둥이군요. "

"영찬이 너! 어떻게 알았어? 그것도 프로파일링이야?"

"아우 형. 이 정도가 무슨 프로파일링이에요? 상식적으로 신부가 없이 결혼식이 진행 된다는게 말이 되요? 일란성 쌍둥이가 없인 말이 안 되잖아요!"

"그런가?"

"근데, 형 마지막 말이 재밌네요."

"뭐?"

"형 친구가 쌍둥이 동생이랑 허니문카에 타오면서 설레어있다는 점이요! 어쩌면 이 사건의 단서일 수도 있겠는데요. 아직 무슨 사건인지도 모르지만."


 영찬은 빙그레 웃었다. 난 소변을 보는데 등골이 서늘했다. 어쩌면 저 엘리트 기자 후배 녀석은 사건의 본질에 나보다 더 빨리 다가가고 있는 듯 했다. 돌아와 자리에 앉으니 새 맥주 두 병이 놓여있었다. 계속해주세요, 형. 맥주 거품으로 입을 축인 뒤 난 말을 이었다.


                                       ***


 남겨진 형진과 신부는 오돌톨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전화 오는 거 같은데요. 형부”


 형진의 신부가 입을 열었다.


 “전화?”


 진동소리는 요란했다. 왜 느끼지 못했을까. 형진은 바지 주머니 깊숙이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낯선 번호였다.


 “여보세요?”


 비현실적으로 흐리멍덩하던 형진의 얼굴에 갑자기 혈류가 흐른다.


 “뭐어? 어디라구? 경찰서?”


 수연의 쌍둥이 동생 지연의 시선이 부들부들 떨리는 형진의 손에서 얼음가루처럼 파슬파슬 부서졌다.


                                       ***


 살았다. 수연은 자신이 살아 있다고 확신했다. 살을 꼬집어보거나 거울에 몸을 비춰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것은 콧속으로 파고드는 형진의 냄새 때문이었다. 냄새에 질량이 있다면 꽤나 두툼하고 묵직한, 수연이 십년 전부터 좋아했던 바로 그 냄새였다. 유치장의 퀴퀴한 냄새들 속에서도 확연히 분간이 되는 내 남자의 그것. 이힛, 어디선가 억지로 참다 터져 나온 듯 한 웃음소리에 놀라 수연은 형진을 꽉 껴안은 팔을 풀었다. 유치장 문을 열어준 형사였다.


 "와, 진짜 결혼식 날이었어요? "


 수연은 그를 흘겼다.


 “자기야~ 있잖아! 저 아저씨들이 내가 오늘 결혼한다는 거 안 믿고! 그깟 음주 운전에, 택시비 좀 안냈다고…….”


 과장된 콧소리가 섞였지만 걸걸한 목소리였다. 형진은 갑자기 그녀의 목소리와 그녀가 버겁게 느껴졌다. 10년 연인이 아니라 처음 만난 사이처럼 낯설었다. 노골적으로 웃어대는 형사들 사이에서 수연을 안아주며 형진은 오늘 하루 종일 옆에 있었던 그녀의 동생 지연을 생각했다.


 “그래서, 좋았어? 좋았냐고?”


 차안에서 수연은 도리어 성을 내었다.


 “뭐가?”

 “당신이 침 튀기면서 칭찬하던, 참한 내 동생이랑 웨딩 마치 올리니까 좋았냐고? 아주 입이 귀에 걸렸겠네! 안 봐도 비디오야! "


 수연답다. 수연은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당당했다. 그게 매력이었다. 하지만 그 당당함 때문에 수연을 좋아한 건 아니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

“왜에? 그냥 아싸구나, 둘이 발리로 신혼여행 떠나버리지 그랬어. 기회잖아!”

“…….” 


형진이 침묵하는 것은 화가 났단 소리다.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와인이 상했단 소리에서 끝내시지.”

“진짜야. 와인이 상한 거 같아. 그러지 않고서야 내가 정신을 잃었을 리가 없지”


 수연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간다. 쀼루퉁하게 나온 입술이 앙증맞다. 위기에 대처하는 수연의 특기다.


 “못 믿겠으면 유정언니한테 전화해봐!”


 라고 말하면서 핸드폰을 형진의 얼굴에 들이대자 형진은 그것을 빼앗아 던져버렸다. 수연이 움찔하는 동안 형진은 선택해야 했다. 차를 난폭하게 갓길에 세우고 있는 성질, 없는 성깔 다 부리며 첫 날부터 따따부따 이혼을 거론할 것인가.

아니면. 


“말을 말자~ 암튼 독특한 경험하게 해줘서 고맙다. 세상 천지에 누가 이런 경험을 해보겠냐?”

“고맙지? 고맙지? 마누라 잘 얻은 거야!”


 수연은 운전하는 형진의 팔에 맹수의 새끼마냥 살갑게 파고들었다.



                                    ***


 새로운 일상은 기억의 일부를 지우고 다른 것들로 채워 넣었다. 이를테면 문래동 시댁 문턱에서…


 “너 대체 정신이 있는 애니, 없는 애니? 결혼식 전날 술 퍼마시고 뻗어서 식에 안 나타나고! 쌍둥이 동생 없었으면 그 많은 하객들 앞에서 무슨 개망신 당할 뻔 했어?”


 방방 뛰는 시부모에게 빌고, 빌고 또 빌던 수연의 손바닥은 첫날 밤 신랑과 마실 와인을 고르느라 바빴다. 경춘가도에서 경찰서에서 울려 퍼지던 그녀의 울음소리는 벽시계니 달력이니 쿵쾅거리는 형진의 망치소리에 잠잠해졌다. 그러면서 형진은 결혼식 홀 앞에서 소용돌이치던 마음의 급류와 끝내 사라지지 않았던 의심을 잊었다.

 이 모든 게 하루에 일어났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뿐.


 어느 순간이었다.

거실 쇼파에 모로 누워 tv를 보던 형진에게 부글부글 끓는 냄비의 간을 보는 수연의 뒷모습이 사랑스러워 보였다. 다가가서 안으니까.


 “어허! 조금만 참아! 오늘의 스페셜 요리 다 됐어.”


 수연은 형진을 식탁에 앉힌다. 커다란 냄비를 들어다 식탁에 놓고 거창하게 뚜껑을 연다.


 “라면?”


눈웃음이 깊게 파이며 수연이 고개를 젓는다.


 "아앙~ 라면 아니야, 스페셜 라면이야! "


그러더니 와인 잔과 와인 병을 꺼낸다. 


 “자기가 좋아하는 몬테스 알파! 라면에 와인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며? 세상에서 제일 좋은 마누라랑 얼마나 행복해?”

“기막힐 따름이다. 상한 와인 마시고 기절해있던 분이 또 와인이 생각나셔?”

“그런가? 큭큭. 내 몸이 좀 튼튼해야지, 원상 복구가 빠르잖아! 얼FMS 받으셔!”


방금 헹궈서 물방울이 산딸기처럼 맺혀있는 와인 잔에 와인을 따르며 수연의 걸죽한 애교는 농도가 짙어진다.


 “나으리~ 이 술 받으시고 오늘 제 머리 좀 올려주시겠습니까?”


 형진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사단이 벌어졌어도 신혼 첫날은 첫날인 것이다. 형진은 와인 잔의 가는 목을 잡고 보드랍게 흔들며 말했다.


 “내일, 제주도에나 가자.”


 수연은 팔짝 뛰듯 좋아했다. 정말? 정말?


 “그래도 명색이 신혼여행은 다녀와야 할 거 아냐”

“우리 여보님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요!”


 어느새 수연은 형진의 무릎 위에 앉아있다. 발리행 비행기 티켓과 리조트 예약 분을 모두 날린 자신에게 책임을 묻긴 커녕, 새 신혼 여행지를 물색한 자상한 남편. 박형진.


 “쫌 해봐! 남자답게!”

“뭘?” 

“와인 잔 내려놓고 나 버쩍 안고 침실로 데려가고, 이런 걸 말로 해줘야 아니, 이 화상아~”

“배고파서 힘이나 쓸지 모르겠다.”


수연을 번쩍 안던 형진은 무거워서 주저앉았다. 그대로 둘은 깔깔댄다.


 “그냥 라면 먹어! 그 상태로 뭘 하겠니, 인간아.  고기 사다 구워줄까? 아니면 장어?”


 형진은 밝디 밝은 수연의 볼을 잡아 댕기면서 잠시나마 그녀의 여동생을 생각했던 자신을 뉘우쳤다. 둘은 아무렇게나 옷을 벗어제끼고 첫날밤을 치렀다. 수연은 옷을 정리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칫솔을 앙물고 욕실로 들어갔다.

 "옷 안 치워?"

"냅둬. 내일 일어나서 치울게"

"설거지는 내가 할까?"

"아씨! 거참. 결혼 첫날부터 잔소리야? 우리 편하게 좀 살자. "


 이건 아니다 싶었다. 형진은 수연이 털털한 성격인 줄은 이미 알고 각오하고 있었지만 막상 닥치니 또 달랐다. 하지만 결혼식을 펑크 내는 캐릭터인데 뭘 더 바랄까. 상대가 변하길 바라는 열정으로 자신을 변화시켜야 된다는 어느 책 구절로 속을 달랬다.


 어느 순간엔가 수연이 샤워를 하는 동안 형진은 귀를 세우고 있었다. 한참을 쏟아지던 물질 소리가 멈추고, 욕실과 거실을 가로지르는 조붓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가만 가만 걷는 수연의 걸음 소리. 바구니를 챙기고 수건을 탈탈 털고. 형진은 수연과 관련된 작은 소리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귀를 세웠다.


 어느 순간엔간 수연이 형진의 품안에 들어와 팔베개를 하고 있었다. 다른 한 손으로는 형진의 배를 만지고 있었고. 그리고 어느 순간엔가 수연은 곤하게 코를 골고 있었다. 오늘 얼마나 놀라고 피곤했을까.


 또 어느 순간엔가 전화벨이 몹시 요란하게 울렸던 것 같다. 하지만 곯아떨어진 형진에게 눈 커플은 천하보다 무거웠다. 그리고 잠시 후 벨이 멈췄기 때문에 신경 쓰지 않고, 벨이 울렸었던 기억조차 내려놓은 채, 형진은 수면의 검고 깊은 나락으로 곤두박질쳤다.


 전화벨이 멈춘 건 수연이 울리는 핸드폰의 밧데리를 뺏기 때문이었다. 수연이 울리는 핸드폰의 밧데리를 뺀 건 발신자의 이름을 보고 놀랐기 때문이다.


<판규>


 어젯 밤, 그러니까 결혼 하루전날. 이 시간쯤에 벌어졌던 똑같은 사단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수연의 심장이 쇠징이 되어 울리는 듯 했다.

 이어 미명에 들리는 휘파람 소리. 휘익, 휙.


 수연은 방 한가운데 앉아 끊어질 듯 이어지는 휘파람 소리에 귀를 틀어막았다. 

악마 같은 새끼!

 휘파람은 수연과 형진의 신혼 집 아파트 주차장에 삐딱하게 이중 주차된 흰색 소나타의 열려진 창안에서 들리고 있었다.


 어느 순간, 휘파람 소리가 더욱 크게 들린 것은 차 문이 열리고 판규가 걸어 나왔기 때문이다. 서랍을 열어 누런 서류 봉튜를 꺼내들더니 끓어오르는 가래를 퉤, 뱉고 판규는 족히 취해 비틀거리며 수연의 아파트 현관문을 향해 다가갔다.


                                    ***


 수연은 손에 땀이 나도록 밧데리가 빠진 핸드폰을 쥐고 있었다. 하지만 불안은 한번 형성되면 걷잡을 수 없는 모양이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밧데리를 다시 달고 전원을 켜본다. 아니나 다를까, 불길한 진동이 손바닥 가득 울려왔다. 문자 메시지.


 <129동 앞이야. 잠깐 얼굴 좀 보자. 나오기 싫으면 내가 들어갈게>


 수연은 핸드폰을 떨어트렸다. 그보다 먼저, 그녀는 벌떡 일어났다. 그보다 먼저, 딸국질이 나왔다. 자신의 딸국질 소리가 대포 소리보다 더 크게 들린다. 다행히 형진은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주여, 제발…….


 엘리베이터의 위치 표시등이 올라가고 있다. 3. 4. 5……. 그 속에 판규는 만취한 상태로 거울속의 흐트러진 자기 모습을 보며 낄낄대고 있었다. 헐레벌떡, 그러나 조용하게, 형진이 깨지 않게 수연을 옷을 입었다. 원피스 잠옷 위로 청바지 입으려는데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다. 잠옷 밑으로 청바지를 넣고 잠옷을 벗어 제꼈다. 옷장 안에 마땅히 잡히는 옷이 없어서 두꺼운 패딩을 입었다. 파카 주머니에서 장갑이 떨어지고, 주머니에 구겨 넣으려는데 자꾸 떨어져서 손에 장갑을 낀다.


 띵. 8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토사물 냄새가 왈칵 쏟아져 나왔다. 그 다음 짧은 머리에 어깨가 굽고 희죽한 얼굴을 한 판규가 내렸다. 그와 동시에 숨 가쁘게 쿵쾅쾅, 집에서 뛰어나온수연이 판규를 나꿔채서 엘리베이터에 탔다. 안에서 실갱이가 있는지 한참 후에야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판규는 혼자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한 밤중에 불러내서 미안하다는 의례적 인사 따위는 서로 잊은 지 오래다.


 요즈음 판규가 평소보다 사납게 군다는 생각은 했지만 사태가 이렇게까지 진행될 줄은 수연도 몰랐다. 참다못한 수연이 깐족깐족 구는 판규의 뺨을 그의 차안에서 냅다 후려갈겼다.


“야 이 셰끼야! 너 왜 그래? 미쳤어? 여자 일생에 딱 한 번 있는 결혼식을 땡땡이치게 했음 됐지, 또 무슨 깽판을 놓으려고 그래? 이 또라이 셰끼야!”


 “일생에 한 번 있는 결혼식 참석 못했으면 결혼 새로 하면 되지”


판규는 수연을 안으려고 들었다. 악취가 팽팽한 범선의 돛처럼 부풀었다.


 “아우 이 또라이 자식. 어디서 술은 떡 되가지고 와가지고! 너 한번만 더 이러면 죽는다,

진짜!” 

 

 크크큭. 판규가 진짜 또라이처럼 웃었다. 취객의 객기가 아닌 분명한 이유가 있는 웃음처럼 보였다. 그제야 수연은 판규 손에 들린 노란봉투를 발견했다. 뭐야, 이건 또? 봉투를 뺏지 않으면 심각한 일이 벌어질 것을 직감한 수연. 하지만 완강한 판규의 악력이 그녀의 손을 제지한다. 수연의 분노 속에 타그러들었던 공포가 슬금슬금 다시 치밀어 올랐다.


 뺏지 못할 바엔 찢어야겠다. 찢지 못할 바엔 뺏어야겠다. 이 악물고 수연이 덤벼들자 판규가 봉투를 쥔 손에서 힘을 뺀다. 봉투를 여니 사진이 두 세장 들어있다. 수연의 불길한 예감을 판규가 자동차 실내등으로 밝혀준다. 수연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야!”


 사진은 판규의 팔베개를 하고 잠들어있는 벌거벗은 수연의 모습이었다. 오른쪽 하단엔 친절하게 금색 글씨로 날짜와 시간이 적혀있었다. 2008. 12. 21. 바로 어젯밤이다.


 “결혼 전 날, 딴 남자 품에 안겨있는 마누라! 과연 서방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가서

물어볼까?”

 

 싸구려 협박에 걸맞게 판규의 웃음소린 참으로 가볍고 비열했다. 


 “너 뭐야? 유치하게! 너 고작 이 정도야?”

 

 수연은 사진을 박박 찢어 판규 얼굴에 던지고 다시 후려쳤다. 사태 해결 방법에서 더 멀어져가고 있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어짜피 저누마는 해결 방법 같은 걸 가지고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판규는 바로 수연의 뺨을 받아쳤다. 두개골이 얼얼했다. 남자의 아귀 힘이 이렇게 센 지 처음 알았다. 나 유치하다. 어쩔래? 당당했던 수연의 기세가 이내 소금에 절인 배춧잎처럼 풀이 죽었다.


 “……분명히 어제 그랬잖아. 마지막이라고.”

“마지막이었지. 하지만 항상 마지막 뒤엔 앵콜이 있는거라고.”


 판규는 대형 극장의 무대감독처럼 조수석 아래 버튼을 제꼈다. 조수석과 함께 수연이 뒤로 넘어갔다. 썩은 고기를 물은 하이에나처럼 판규는 수연의 몸 위에 거칠게 포개져 그녀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나뭇등걸처럼 옹이지고 거친 손이었다. 수연은 소리를 지르며 저항했지 판규는 에프엠의 볼륨을 높여 모차르트로 그녀의 입을 막았다.

 딸국질이 나왔다. 수연은 꿈속을 헤매고 있다고 생각했다. 꿈이 아니라면 이승과 저승 사이 어느 지점에 누워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꿈과 생시, 이승과 저승, 삶과 죽음, 그 좁은 듯 하면서 광활한 사이 혹은 틈새.


                                      ***


 방문이 조심스레 열리고, 어두운 방안을 그보다 더 어두운 표정의 그녀가 천천히 들어오고 있었다. 한 겨울 내무반처럼 형진은 한적하게 코를 골며 까무룩 잠들어 있었다. 남자의 코고는 소리가 저토록 아프고 황홀할 수가 있다니. 그녀는 옷을 벗어서 얌전하게 옷장 안에 차곡차곡 걸어놓고 형진 옆에 누웠다. 한도 끝도 없이 어둠속으로 가라앉았으면 좋겠다.


 “어디 갔다 와?”


 형진이 잠에 취해서 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몸이 붕 뜨더니 물을 박차고 올라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 같았다. 형진은 안자고 있었을까? 혹시 창문으로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을까?


 “응? 아니, 그냥 잠이 안와서...거실에서 티비 좀”

“잠이 안와? 에이궁. 우리 애기. 맨날 혼자 자다가 같이 자려니 적응이 안되는구나. 이리와, 우리 애기, 내가 재워주께”


 형진의 두꺼운 팔이 뱀처럼 낮게 그녀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다시 코를 골기 시작했다. 형진은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어디까지 봤을까.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를 악물수록 틈은 더욱 커져 눈물이 흘러들어오는 듯 쓴 내는 더욱 심해졌다.


 그녀는 화장대를 뒤지기 시작했다. 수면제가 어디 없을까? 방 안 모든 게 낯설었다. 화장실 가는 것처럼 일어나 건너 방으로 갔다. 수면제는 커녕 약상자 비슷한 것도 없었다. 방 한 켠에 곱게 놓인 트렁크 가방 두 개가 보였다. 신혼여행 용 가방이다. 저 안엔 있을지도 몰라. 그녀는 트렁크 가방을 쓰러트려놓고 짐승처럼 엎드려 수면제를 찾기 시작했다. 


                                        ***


 “형, 잠깐만요!”


 영찬은 내 얘기를 강압적으로 끊었다.


 “중요한 부분을 얘기안하고 그냥 넘어가시려고 그러네. 그녀가 수면제를 먹었나요? ”


 영찬의 눈은 이글거렸다. 마치 범인을 취조하는 형사처럼. 먹잇감을 노리는 고양이처럼.


 “먹었냐고? 글쎄 내가 듣기론 수면제를 한참 찾았다고 했는데 먹었는지는......근데 그게 중 요해? 그렇게 디테일한 것 까지는…….”


그러자 영찬이 손가락으로 탁 소리를 냈다.


“중요하죠! 정말 중요하죠! 형은 정말 중요한 디테일을 놓치셨어요. 어떻게. 지금이라도 그 사실을 알 방법이 없을까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좀 그런데. 그리고 넌 아직 무슨 사건이 발생한건지도 모르잖아”

“아우 아쉽다. 수면제를 먹었느냐 안 먹었느냐, 그것만 알면, 범인이 누군지도 보일 텐데!”

“뭐? 야! 난 아직 사건 얘긴 하지도 않았거든”

“선수끼리 왜 이러실까. 저 범죄의 도시 런던 밥을 이년이나 먹었다구요. 감 잡았어요”


 찡긋 윙크하는 녀석의 표정이 섬뜩하다. 녀석의 긴 담배연기에 얼굴이 가려졌다. 대체 수면제랑 이 사건이랑 무슨 관련이 있다고. 그리고 저 녀석은 사건도 모르잖아. 담배연기 같은 녀석. 똑똑해도 재수 없는 건 사실이다. 담배 연기가 매캐해 재채기를 하려는 찰나 녀석이 말했다.


 “다음날 아침 그 남자의 시체가 발견되잖아요? 안 그래요?”


 순간, 난 맥주잔을 떨어트릴 뻔 했다.


                                   ***

 빛이 보였다. 투명하고 푸른빛이었다. 푸른빛 사이로 보이는 것은 희미하게 뭉개진 잔상 같은 것이었다. 나무 한 그루가 어른거렸다. 색색의 헝겊을 치렁치렁 늘어뜨린 거대한 당산나무. 당산나무는 수연 몸에 드리우며 다가왔다. 누군가 이마에 손을 얹는 느낌이 들었을 때 그녀는 잠에서 깼다. 겨울 햇살의 보드라운 온기였다.


 허나 옆 자리에 형진이 없다.

신랑의 빈자리가 이렇게 크게 느껴질 줄은 미처 몰랐다. 차갑고 섬뜩한 기분이었다. 자기야~ 그녀는 크게 부르며 신랑을 찾았다. 욕실에도 주방에도 건너 방에도 옷 방에도 형진은 없다. 전화도 받질 않는다.


 분명히 남향 집에 햇살을 받고 있는데 집안 가구들은 죽은 벌레처럼 어두웠고 글쎄 형진과의 기다란 평행선은 끝이 없을 것 같은 충동에 휩싸였다. 결혼 후 첫날 아침이라는 현실에 찾아온 비현실적인 감각을 깨트리기 위해 그녀는 티비를 켰다. 아침 뉴스 속 출근 길 사람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추위 속에서 종종 걸음으로 출근하고 있었다.


 그녀는 간밤에 개수대에 떨거둔 접시들을 설거지하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설거지라니. 하지만 그녀는 설거지를 안 하면 배길 수 없는 마음이었다. 와락 쏟아지는 수돗물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무 일 없을 거야. 담배 사러 나갔겠지. 


 라면을 담았던 스텐레스 냄비에 거품을 칠하고 와인 잔을 들었을 때 그녀는 주방 옆 베란다로 주차장에 시선을 던졌다. 와인 잔이 떨어져 둔탁한 소리를 내며 깨졌다. 흰색 소나타가 어제 밤 모습 그대로 주차되어있었기 때문이다. 깨진 와인 잔을 주울 생각도 못하고 흰 소나타만 노려보는데 차 문이 열린다. 손톱과 손가락 사이에 가시가 박힌 마냥 저려오기 시작했다. 현관 문이 잠겨있나 확인해야돼. 하면서도 몸은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잠시 후 인자하게 생긴 노부부가 흰 소나타에서 내렸다. 다시 보니 간밤 판규의 흰 색 소나타와 주차위치가 틀리다. 그리고 더 깨끗하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지저분해진 주방을 수습하면 된다. 먼저 수돗물을 잠갔다.


 그때였다. 

사방이 적막해지고 오로지 tv아나운서의 목소리만 또박또박 들렸을 때가!


“오늘 아침 한강 고수부지에서 29살 김 모씨가 배기통을 틀어막은 자신의 차 안에서 가스에 질식해 숨진 채로 발견됐습니다.”


 tv 앞으로 달려갔다. 현장 그림 속 사람들은 무척이나 분주해보였다. 한번쯤 가 본 것도 같은 한강 고수부지 공원이었다. 주차장과 맞닥뜨려있는 잔디위에 흰색 소나타가 바퀴가 틀어진 채 놓여져 있었고 그 주변으로 폴리스 라인이 쳐져 있었다. 주위를 맴도는 경찰관들과 사진을 찍는 기자들의 모습위로 현장 기자는 리포팅을 덧붙였다.


 “경찰은 김씨가 최근 옛 애인이 결혼한다는 소식에 침울해했다는 주변인들의 말에  따라

일단 자살로 보고 있습니다. 자동차 배기통을 이물질로 막고 시동을 틀어놓고 잔 흔적이 있어 전형적인 일산화가스 질식에 의한 자살로 보이는데요. 하지만 신체 곳곳에 둔기에 의한 타박상이 있는 것으로 봐서 타살 가능성도 배재하지 않은 채 국립과학수사 연구소에 부검을 의뢰했습니다.”


 킁, 수리를 내며 그녀는 뒷걸음질 쳤다. 애벌레가 귓속에 들어가 간질간질 귀를 간질이는 것 같다. 이대로 뒷걸음쳐 벽속으로 들어갔으면 좋겠다.


쿵!


 뭔가에 부딪혔다. 뒤통수를 둔기로 맞은 듯하다. 얼얼하며 고개를 돌렸다. 형진이었다. 형진의 키가 그렇게 큰지 몰랐다. 그리고 굳은 표정. 형진은 놀란 그녀와 뉴스를 저승사자처럼 감정 없이 번갈아 보고 있었다. 왜 그래? 아냐, 아무것도.


"뭘 보고 있었기에 시람 들어오는 것도 몰라? "


 형진의 눈이 TV에 꽂힌다. 다행인건지 얄궂은 건지 TV에서는 다음 뉴스를 전하고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묻는다.


 “그런데 자기 어디 다녀와? 담배 사왔어?”


 형진은 어색하게 웃으며 손에 든 검은 비닐 봉지를 흔든다.


“무슨 소리야? 내가 담배 끊은 지가 언젠데. 한 십년은 됐겠다. 찬거리 좀 사왔지. 내가 얘기했지. 난 빵조각 따윈 안 먹는다고!”


 검은색 비닐봉지가 식탁위에 널 부러지듯 올려지자 그녀도 굳은 표정을 어색하게 푼다.


“알았어. 내가 아침해주께.”


  그러더니 형진의 옷 냄새를 맡는 그녀.


“왜 그래?”

“가스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가스? 킁킁.”


 형진의 시선은 짐짓 그녀를 외면한 채. 무슨 가스 냄새? 안 나는데! 그녀는 형진의

당황하는 표정을 보려했었다. 그런데 저 낯간지러운 진지함이 당황한 것인지 어떤 건지

당최 모르겠다. 수연과 형진이 십년 연인이라 하는데 오늘 아침 따라 이리 낯설까. 그러네. 안 나는 거 같네. 그녀는 개수대 앞으로 다가가서 남은 설거지를 계속한다. 그러다가 또 갑자기 돌아본다.


“근데 우리 제주도 언제가?”

“밥 먹고 바로 가자”

“밥? 그래, 밥. 우리 밥 먹어야지.”


 그녀는 주저주저했다. 눈의 총기가 희미해졌다.  


“오늘 아침 자기 이상하다! 수연아 잠 못 잤어?”


 그녀는 손으로 헹궈야할 와인 잔의 넓은 보울을 건성으로 훓었다. 그때였다. 드르르륵. 아파트 입구에 차 한 대가 바퀴가 끌리듯 들어왔다. 경찰차였다. 그녀는 천적을 만난 설치류처럼 웅크리더니 허겁지겁 고무장갑을 벗었다. 뒤집힌 고무장갑을 개수대에 집어던지더니 다짜고짜 형진을 건너 방으로 잡아 이끌었다. 왜 그래?


 “빨리 옷 갈아입어! 자기 하는 꼬락서닐 보니까 이러다간 해지고나 제주도 떨어지겠다.”

“밥 먹고 가자니까”


 형진은 벙쪄서 걸어 나왔다. 하지만 그녀가 발치의 돌을 힘껏 차듯 그를 다시 방안으로 밀어 넣었다.


“제주도가서 돼지국밥먹자, 소원이야!”


 그녀가 다시 내다보자 경찰차에서 연배차이가 좀 나는 경찰 두 명이 농담을 주고받는 듯 깔깔대며 천천히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건너 방으로 들어가서 트렁크 가방 두 개를 휘익 끌고 나왔다.


“하여간 이수연. 성격 하나 급한 건 알아줘야 해.”


 잠바 하나를 걸치면서 형진이 나왔다. 오케이. 얼른 가자! 그녀는 어이 벙벙한 형진의

팔짱을 끼고 현관을 나섰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출발하는 신혼여행. 형진은 가끔씩

그녀에게서 야누스적 풍모를 느낀다. 어제도 이렇게 서둘렀다면 좀 좋아. 형진은 입을 비죽거렸다.


“아! 왁스 안 챙겼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거울을 보던 형진이 소리쳤다. 다시 8층 버튼을 누르려고 하는데 그녀가 제지한다. 유부남이 왁스는 왜? 딴 여자 꼬시려고? 형진은 피식 웃는다. 이제야 결혼했다는 게 실감이 난다. 그녀도 따라 웃지만 초조한 표정은 감추지 못한다.


 1층 로비에는 조명상 형사와 김봉섭 형사가 비를 긋는 처녀처럼 날카로운 자세로 서 있었다. 조형사는 부스스하며 동시에 기름진 사십대 얼굴이고 김형사는 의외로 선선한 이십대다. 하지만 둘 다 매일 매일의 흉사에서 벗어나고 싶은 표정이다. 3층에 엘리베이터 표시등이 멈춘다. 누군가 타는 모양이다. 하지만 형사들이 만나려고 하는 수연과 그의 남편은  8층에 살고 있다.


 마침내 표시등 불빛이 1층에 멈추고 문이 열린다. 엘리베이터엔 아무도 없다. 김형사는 뭔가 아귀가 들어맞지 않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침부터 마음이 어수선하면 하루를 그냥 공치는 게 형사의 운세인데.

 

  조와 김을 태운 엘리베이터가 올라가기 무섭게 그녀가 형진을 이끌고 계단에서 내려왔다. 3층에서 내려 걸어왔던 것이다. 성격 참 특이해. 영문을 모르는 형진은 입이 댓발 나와 투덜댈 뿐이었다.                      



3. 제주도의 푸른 밤                                                            



  수연의 잠실 신혼집을 허탕 친 조형사와 김형사는 짜증이 가득했다. 그들은 시간이

부족했다. 살인 사건이 발생하면 현장에서만 과학수사를 하는 줄 아는데 천만의 말씀!

보고서만 수십 장을 날려야한다. 우선 시체를 검안하고 간단한 증거를 수집한 후에 재빨리 서로 돌아와 청 상황실로 속보를 보내야 한다. 검찰에도 보내야 하고 국과수로 협조 의뢰도 해야 한다.  간단한 보도 자료 만들어 출입 기자들에게도 뿌려야 하고 검찰이 팩스는 확인했는지 전화 통화도 해야 한다. 이 바쁜 와중에 사전 확인도 없이 빈 집에 들르다니.


 원망 가득한 표정은 수연의 문래동 친정집에서 또 한 번 나올 뻔 했다. 초인종을 눌러도 아무 반응이 없는 것이다. 또 한 번 길게 누르고 돌아서서 가려고 하는데. 누구세요? 문이 열린다. 긴 생머리에 하얀 얼굴을 한 청초하며 살짝 침울한 분위기의 아가씨. 사진으로 본  생기발랄한 수연과 정반대의 이미지다. 


 김형사는 단박에 수연의 쌍둥이 동생이라는 걸 직감했다. 그녀가 빤히 쳐다보자 김형사의 얼굴이 붉어진다.


“이지연씨죠?” 

“네. 그런데 누구세요?”


 누구래니. 집안에서 수연의 어머니, 김선숙도 나온다. 선숙은 조형사가 내민 신분증을 꼼꼼히 살펴본 뒤에야 둘을 거실에 앉혔다.


 “오늘 아침 자살로 추정되는 사건이 있었는데요. 숨진 김판규씨의 간밤 통화 기록을 보니까, 마지막으로 이수연씨에게 전화했더라구요”

“전화를 받았던가요? 수연이가?”


김형사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수연모가 웃는다.


“당연하죠. 지금 신혼여행중이거든요.”


 김형사는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어깨가 들썩였다. 웃음 이후 자신감 없이 찻잔과 바닥을 번갈아 응시했기 때문이다. 선배 조형사가 티내지 말라고 김의 옆구리를 찌른다.


 “그렇군요.”

“근데 김판규가 누구지? ”


수연 모가 물었다.


“왜 있잖아. 옛날부터 언니 쫓아다니던 그 오토바이.”

“그 양아치 새끼?”


 수연모의 말이 상당히 걸다. 반면 여동생 지연은 차가울 정도로 조용하다. 이 무슨 부조화일까. 김형사는 어색함을 느끼고 조형사를 바라봤다. 허나 조형사는 느글느글하게  수연모의 거친 말에 맞장구를 쳐주고 있었다.


  경찰서에 돌아온 조와 김을 과장이 쪼아댄다. 참고인 조서들 빨리 받아두고. 지문 감식 결과, 사망 추정 시간 나오면 피신(피의자 신문 조서) 받을 준비도 하고. 오케이? 오케이는 무슨 오케이야. 피의자가 나와야 피신도 받는 거지. 김형사는 중얼거리며 노트북을 부팅시켰다. 윙윙. 하드 디스크 돌아가는 소리. 치정 살인과 윤간과 훔치고 사기 치는 이야기들로 가득한 하드 디스크.  조형사가 자기 책상앞에 앉기도 귀찮은 지 김의 책상에 앉으며 늘어진다.


 “선배님 어떻게 생각하세요? 옛 사랑이 결혼한다고 해서 충격을 먹고 자살한 걸까요?"

"킁. 가장 그럴듯하면서 가장 말이 안 되는 이야기지. 3년전 애인이라는데…….근데 김형사. 김판규 핸드폰 마지막 위치가 킁. 이수연 집 앞이 맞지?”

“네. 신혼 집은 왜 갔을까요? 결혼을 했으면 신혼 여행가는 게 당연한데! ”

“요샌 결혼하고 며칠 후에 신혼여행 가기도 하고 그러더라고. 현지 리조트 스케쥴 좋은 걸로 받으려고. 킁”


 둘은 멍하니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어디로 갔댔지, 신혼여행?”

“ ……? ” 

“내 느낌이 맞다면 분명히 국내에 있을거야! 확인해보고 비행기 탔는지도 체크해봐.”

“네. ”


 쓰잘데기 없는 업무를 중단하고 실질적인 업무를 한다는 데 기뻐 김형사는 스프링처럼 튕겨 일어나 움직였다. 조형사는 이십년 경력으로 감을 잡았다. 이 사건은 자살이 아닌 살인 사건이다. 그것도 치정이다.


                                          ***   


 제주도에 도착한 형진 부부는 신이 나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결혼 철이 아니라 유채꽃 가득한 풍경을 뒤로 하고 사진을 찍는 부부는 없었지만 겨울 바다를 구경하러 온 연인들은 많았다. 그들 중 가장 밝게 사진을 찍는 이들이 바로 형진과 그의 아내였다. 그녀는 가끔씩 해수욕장 주차장에 서있는 흰 색 소나타의 모습에 그녀는 흠짓 놀라긴 했지만 그 이외의 시간엔 행복했다.


                                          ***


 안내 데스크의 민원인과 경찰들은 생머리를 청초롬하게 늘어뜨리고 다소곳한 자태로 출입증을 쓰고 있는 지연을 모두 쳐다보고 있었다. 저렇게 새하얗고 지적이며 청순한 아가씨가 경찰서를 방문한 이유는 무엇일까. 혹 죄가 있다면 그 죄는 무엇일까.


 그 궁금증은 사무실에 앉아서 설렁탕을 먹고 있던 형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나나 나나~ 파란색 이온 음료의 cf 주인공 같은 지연이 천천히 들어오자 고깃 국물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시선은 모두 지연에게로 쏠렸다.


 “아. 오셨어요? 잠깐 거기 앉아계시겠어요?”


 김형사가 어정쩡하게 일어나 지연을 손짓으로 안내하자 나머지 형사들이 부러운 눈으로 본다.


"누구야?"


 동료 형사가 묻는다.


"참고인이요. 물어볼 게 있어서 불렀어요. 그 죽은 남자 옛 애인 동생이요."

“죽은 남자 옛 애인 어쩌구? 동생? 뭐가 그렇게 복잡해? 참 그 한강 둔치 자살사건, 그거 말이야"


 동료 형사는 깍두기를 오물거리며 말을 이었다.


 "사인이 뭐래? 국과수 나왔어?"

"일산화탄소 중독이요. 그래서 혈색도 살아있는 사람처럼 생생했고. 손끝은 꺼멓게 말라비틀어져있던거죠. 배기가스 때문에 죽은 건 맞아요."

"아니. 거야 기절시킨 다음에 누가 배기관을 틀어막을 수도 있는 거잖아. 차안에도, 죽은 사람 옷에도 지문이 없었다면서? 누구한테 그렇게 얻어터진 거래?”


 쉬잇. 조형사가 제지한다. 딴 청 피우는 척 하면서 가만히 듣고 있는 게 틀림없는 지연을 의식해서다. 동료 형사는 알겠다는 눈짓을 하고 다시금 지연을 훔쳐봤다.


                                        ***

                                                            

 형진의 호텔방엔 창문이 열려있다. 제주도의 푸른 밤이 출렁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그들은 창가 테이블에 맥주 캔을 늘어놓고 마시고 있었다. 무언가 한참을 고민하던 수연은, 이내 밝은 표정으로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우리 진실 게임하자”

“진실 게임?”

“ 왜  있잖아. 신혼여행 가면 첫날밤에 꼭 하는 거.”

“ 아~ 그러다가 싸우고 이혼도장 찍고 돌아오는 그거? ”

“ 그래, 그래. 그거 나 하고 싶어. ”

“ 알았어. 내가 안하겠다고 버텨봐야. 당신 성격에 내가 진다는거 뻔히 아니까~ 알지. 그래    하자. 뭐가 궁금한데?”

“ 진짜, 우리 진실만 얘기해야해. ”

“ 알았다니까. 이혼 도장 찍겠단 소리만 하지마. 키킥. ”

“ 자기. ”


 표정은 밝았지만 그녀의 말은 상당히 느렸다. 대체 어떤 말이 길래. 형진은 빤히 봤다.

“ 사람 죽인 적 있어?”


 마치 장난이라는 듯 질문을 던진 그녀는 치기 어리게 웃어댔다. 하지만 형진의 표정은 점점 굳어졌다.               


                                        ***


 지연은 지루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식사를 끝마친 김 형사가 다가가려는데 이쑤시개를 쑤시던 조 형사가 새치기 한다. 여기 커피 두 잔만 부탁 혀.


“아이고 죄송합니다. 식사하셨죠?”


 지연이 고개를 주억거린다.


“오시라고 한 건 몇 가지 궁금한 게 더 있어서요. 아 김형사! 난 프림은 빼고잉!”

“뭔데요?” 

“그게 그러니까, 뭣이냐, 여기 어디 있었는데… 그래 여기있네. 여기 서류를 보니께요. 이수연씨. 그러니까 지연씨 언니 분이 결혼식 30분 전에 음주 단속에 걸린 기록이 있네요?”


 허술하게만 보이던 조형사의 눈빛에 갑자기 총기가 가득했다. 지연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


 “왜 그렇게 놀라? 사람 죽여본적 있냐고?”


수연은 끈질기게 형진을 채근하고 있었다.


 “무슨 질문이 그래?”

“빨리 대답해에~ 죽인 적 있냐궁? 아앙 궁금해서 그래, 빨리, 빨리!”


그녀의 콧소리를 듣고서야 형진의 긴장된 얼굴이 풀린다. 하지만.


“노 코멘트 ”

그녀는 더 답답했다. 아아~ 노코.....그런거 없다니까! 형진에게 다가가서 헤드락을 건다. 

빨리 말해, 빨리! 형진은 웃으면서 수연의 손을 뗐다. 첫 질문이 너무 세다. 약한 거부터

해야 되는 거 아냐? 약한 거? 그녀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는다. 약한 질문 따위엔 관심도

없어서 아무 질문이나 에둘렀다.


 “그럼 나 말고 딴 여자 좋아해본 적 있어?”

“당연한 거 아냐? 그걸 말이라고 해?”

“아니, 나 만나고 나서 말이야!”

“없어.”

“정말로?”

“…….” 

 

 그녀는 사실 듣고 싶지도 않았다. 그럼 다음 질문은. 이라고 말을 잇는데.


“물론, 살짝 흔들린 적은 몇 번 있었지”


 의외의 수확일세. 수연의 눈빛이 반짝인다. 언제?


                                        ***

 놀랐던 지연은 많이 침착해져있다.


“결혼식 대신 선 것도 죄가 되나요?”


 조 형사는 피식 웃는다. 옆에서 지켜보던 김 형사는 종이컵 매듭을 잘근잘근 씹는다.


“ 아니, 그런 법 조항은 없어서 뭐라고 말씀드리지 못하겠는데요. 암튼 상황은 정리됐네요.

진짜 저희가 궁금한 건……!”


 조 형사는 지연을 째려봤다.



                                        ***


 형진은 입을 열면서도 왜 이런 이야기를 꺼내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냥 내 옆에 너만 없었으면 한번 어떻게 해볼 텐데… 왜 이런 경험 있잖아!”


 수연의 관심은 이미 딴 데로 넘어갔다.


“이 인간이 예상에도 없는 대답으로 사람 속 뒤집어놓네! 언제? 언제에?”

“가령. 어제 결혼식 때”

“결혼식? 에라 인간아! 결혼식 때 누구 누구?”


 그녀는 형진의 무릎위에 앉아 가운을 바싹 죄었다. 빨리 이야기하라고 협박하는 순사 같았다. 그 때까지만 해도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형진의 입에서 이 말이 나오기 전까진.


 “당신… 동생”


 그녀의 온 몸에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누군가 그녀의 잔을 창밖의 제주 밤바다에 따라버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또르르르르.


 “내 이럴 줄 알았어! 지연이가 어떻게 느껴졌는데? 구체적으로 얘기해봐! ”


 수연은 바로 질러 들어갔다. 오히려 형진이 여유가 있어보였다.


 “구체적으로?”


 어제. 수연이 오지 않은 예식장 단상 앞에 서있을 때 신랑 형진은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장인의 손잡고 입장하고 있는 지연의 다소곳한 모습에 점점 빠져들었다. 수연도 처음엔 저렇게 여성스러웠는데. 형진이 지연의 손을 건네받자 지연은 살며시 미소를 짓는다. 어두웠던 형진의 표정이 조금은 누그러졌었다.



                                        ***


 “그거였군요!”


 내 이야기를 듣던 영찬이 담배를 비벼 끄며 물었다. 재떨이엔 어느새 꽁초와 재가 수북했다. 훅 불면 녀석의 얼굴에 검은 재를 드리울 것 같았다.


 “뭐가?”

“형이 그랬잖아요. 허니문 카에서 형 친구 박형진이 신부를 낯설어하면서도 설레어했다면서요?”

“맞아. 지금 생각해보니 그 때문이었군. 특히 형진이가 지연의 손을 잡았을 때 얼굴에 홍조가 띤 건.”


                                        ***


 수연은 다시 형진에게 헤드락을 걸고 있었다. 나랑 뭐가 다른데? 눈 코 입 똑같이 생겼는데, 나랑 뭐가 다르냐고? 얼른 말해봐! 숨이 막혔지만 형진은 또박또박 궁시렁 거렸다.  몰라서 물어? 자기랑 정반대잖아. 차분하고 여성스럽고 마치 나를 처음 만났을 때 자기가 내숭떨었던 것처럼. 후드득후드득 비가 제주도 겨울 바다를 건드려대기 시작했다. 동시에 형진의 눈망울이 그리움으로 출렁거렸다. 십년 전이었다. 지연은 머리칼을 한쪽으로 곱게 내리고, 당시에 유행하던 무테안경을 쓴 지적이고 청순한 여고생이었다. 지연이 버스 손잡이 잡고 서있는 동안 형진은 그 옆에서 땀 뻘뻘 흘리면서 손잡이 잡고 서있었다. 왕왕 버스가 흔들려서 형진의 경직된 몸이 지연에게 부딪쳤다. 도리어 형진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런 형진이 귀여운지 지연은 청초롬하게 웃었다.


 벽력 소리가 형진의 귀청을 때렸다. 애교와 광분이 뒤섞여서, 수연은 베개로 형진을 마구 때려대고 있었다. 인간아! 그냥 내 동생이랑 발리 가라니까! 왜 여기 나랑 이렇게 있냐고? 어떻게 처제를 넘봐, 그러고도 니가 인간이야? 형진은 그녀의 배개를 뺏어서 역시 장난스럽게 때렸다. 진실게임, 하잘 땐 언제고!


                                       ***


 강력계 내부는 건조했다. 김 형사는 하품을 하려다 선배 조형사의 눈치를 보고 얼른 입을

다물었다. 눈물이 맺힌다.


“우리가 궁금한 건 숨진 김판규씨랑 언니와의 관계거든요. 아침처럼 뭉뚱그리지 마시고

자세하게…….”


 조 형사의 채근에 지연은 나름대로 진지하게 생각한다.


 “저도 잘은 모르는데요…”


  하지만 한번 시작된 지연의 이야기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


 1999년. 수연과 지연이 다니는 안양 고등학교의 정문 앞엔 봉고차들이 잔뜩 서있었다. 안양은 당시 비평준화 지역이었고 도시 이름이 붙은 학교는 으레 명문고이던 시절. 그네들이 다니는 안양고 또한 학부모들이 더 극성인 명문고였다. 학부모들은 밤 열시에 야간 자율학습을 끝마치고 나오는 자식들의 편의와 안전을 위해 지역별로 길드같은 것을 만들어 봉고차로 통학시켰다. 밤 11시에 시작되는 사설학원에 늦지않게 배달시키려는 의도와 술 담배로 얼룩진 타교의 불량학생들과 원천적으로 차단시키려는 속셈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연의 부모님은 그러한 혜택을 누리지 못했다. 비록 지연이 뛰어난 성적에 미모까지 빼어나다 할 지라도, 그녀의 쌍둥이 언니 수연이 바로 그 술 담배로 얼룩진 타교의 불량학생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동년배 폭주족 남자까지 끼고 있는.


 그 날밤. 지연은  봉고차로 불야성을 이룬 학교 정문을 걸어나오고 있었다. 남학생 서너명이 우르르 달려와 지연에게 꽃과 쵸콜렛 등을 안겨주고 낄낄 대며 떠났다. 이딴 식의 애정공세에 감동받을 여자가 있을까. 머리로 책만 외우느라 가슴이 텅텅 빈 인간들. 지연은 그치들이 치가 떨릴 정도로 싫었다.


  바로 그때 쇼바를 바짝 세운 오토바이가 누군가를 뒤에 태워 지연의 앞으로 데려왔다. 언니 수연이었다. 감색 카디건과 그 나이에 입기에는 많이 짧은 스커트. 오토바이 위에서 몸을 숙일 때마다 그녀의 작지 않은 가슴이 출렁거렸다. 오토바이를 몰고있는 그녀의 남자친구, 판규의 앳된 얼굴이 아니었다면 아무도 수연을 여고생으로 보지 않았을 것이다. 수연은 지연의 초코렛을 뺏어 주루륵 뜯어 입에 구겨 넣는다.


“이지연! 니 인기는 시들지 않는구나.  엄마한테  은정이네 집에서 잔다고 했으니까. 너 입

잘 맞춰. 은정이 아파보였다고.”


 지연은 새초롬하게 고개를 저었다.


 “ 싫어. 나한테 거짓말 시키지마.”

“ 아유, 이걸 그냥 확! ”

 

 수연이 손을 쳐들었지만 지연 또한 약이 잔뜩 오른 강아지처럼 수연을 째려봤다.


“알았어. 그냥 입이나 다물고 있어. 하나있는 동생 년이, 일생에 도움이 안되요”


 오토바이가 출발했다. 수연은 판규의 입에 초코렛 넣어주며 낄낄거렸다.


                                ***       

                         

“고등학교 때부터…한 삼년 전까지…둘은 계속 만났나봐요.”


잠깐만요. 조형사는 의아하다는 듯 지연의 말을 끊었다.


“삼년 전? 언니 수연씨가 지금 결혼한분이랑 만난 게 십년 됐다면서요?”

“양다리 걸쳤던거죠. 어쨌든 삼년 전엔 분명히 정리했어요. 확실해요.”

“삼년 전에 헤어진 여자가 결혼을 했다고… 자살을 한다? 이게 말이 됩니까?”


이로 이쑤시개를 거의 뭉그러트린 조형사는 마치 피의자를 다루듯 지연을 몰아세웠다. 지연은 잠시 안절부절 못했다. 그녀의 자태가 휑뎅그렁해보였다.





                                        ***


 지연이 무한도전을 보는 동안 수연은 팩을 한 채 쇼파에 드러누워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다. 수연이 전화를 끊으며 너덜하게 이야기했다. 아씨. 귀찮게...잠깐 나갔다 오께.


 “언니 어디가?”

“판규가 잠깐 보자고 해서”

“판규 오빠? 미쳤어? 언니 내일 결혼식이야!”

“잠깐만 보면 돼”

               

 판규는 잔뜩 화난 표정으로 수연의 차를 몰고 있고 조수석에 앉은 수연은 겁먹은 표정이었다. 수연을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조수석에 앉으라고 명했을 때부터 그녀는 지레 겁을 먹었다.


 “너무 멀리 가는 거 아냐?”


 수연은 움츠려드는 어깨를 억지로 펴며 사뭇 밝게 물었다.


 “걱정 붙들어매. 내일 아침까진 안전하게 도로 모셔다 드릴게.”

“내일 아침?”


 푸훗, 수연은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영화 찍어? 하지만 판규는 심각했다. 영화가 아니야. 내가 사라지고 있어. 네가 결혼하면 나는 아예 사라질 운명이랬어. 누가? 어떤 점쟁이가. 그 말을 믿어? 안 믿을 수가 없어. 정말 나는 점점 희미해지고 있어.


 희미해지고 있다는 판규는 양수리의 후미진 모텔에 차를 세웠다. 너 지금 결혼식 하루전날 신부 납치 한 거야, 알아? 하지만 판규는 미리 준비해놓았는지 펜션 냉장고를 자기 집 것처럼 열었다. 와인 한 잔 하까~ 아님 데낄라?


 마치 칼에 찔릴래, 총에 맞을래. 묻는 것 같았다. 침착해야 한다. 그리고 평소처럼 대꾸해야 한다. 그래야 빠져나갈 구멍이 있을 것이다.


 “에라이~ 내가 니 속 모를까봐? 또 데낄라에 소주 섞여 마셔서 나 맛탱이 가게 하려고

그러는 거지? 와인 한 잔 따라봐”

 

 판규가 호텔 웨이터처럼 와인 잔에 와인을 붓다가 소심하게 말했다. 나, 사실 여자 생겼어.

일순 수연의 얼굴이 밝아졌다. 정말?! 잘됐네! 이거 완전히 느낌표 다섯 개다. 축하해 축하. 데려와~ 당장!


 “다음에.”


 “하긴, 이렇게 펜션에 단 둘이 있는 우리들을 보면 그 아가씨 문화적 충격이 크겠다. 나

 신혼 여행 다녀오면 둘이 꼭 집들이 와야 돼!”


 수연이 약지손가락을 내밀자 판규는 고개를 끄덕인다. 약속이다. 수연은 채근한다.


 “얼릉! 응! 빨리 약속해! 나한테 제일 먼저 보여준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판규의 얼굴에 얇은 미소. 이수연. 넌 참으로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자다. 어떻게 이렇게 쉽게 속을 수 있니? 시간이 한참 흐르고 수연은 거나하게 취해있다. 침대 모서리에 등을 기대고 술을 마시고 있다. 판규는 펜션 주방에서 마티니에 수면제를 섞고 새끼 손가락으로 흔들며 나온다. 너의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내가 특별히 만든 술이야.


 우와. 감동이다. 수연은 받아서 단숨에 잔을 비운다. 캬~~~ 죽인다. 그리고 수연은 판규 품에 안긴다. 역시 오빠 밖에 없어. 그녀는 곯아떨어진다.


“거봐. 넌 나밖에 없다니까. 난 네가 다른 남자 품에 안겨있는 거 못봐. 그럼 난 죽을거야.”

“그러지마, 새끼야. 여자 생겼다매…음냐…….”


 판규는 돌부처처럼 꼿꼿이 상체를 펴고 쓰러지는 수연을 보며 중얼거린다.


“그렇게 말해놔야 이수연 네가 방심하고 술을 마시니까…….”

“뭐래냐. 음냐. ”

 

 수연은 잠꼬대였다. 판규 혼자 정신이 멀쩡했다.


“여자와 헤어지면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게 뭔지 알아? 촉감이야. 엉덩이, 가슴, 배에서 출렁이던 지방질. 골반에 부딪혀오던 뼛조각들의 날카로움. 입 속에서 충돌하던 앞 이빨. 발가락과 발가락 사이의 촉촉함. 배란일이면 더 미끌해지는 너의 점액. 어떻게 너를 잊니? 어떻게 너를 그냥 보내니?”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는 판규의 눈에 눈물이 떨어진다. 정신을 차리려고, 내일 결혼식이라고, 화장실에 가겠다고 일어서는 수연. 하지만 딸깍, 하고 방문을 잠그자마자 판규는 팔을 나꿔채더니 수연을 그대로 품에 안았다. 그의 입 속으로 뜨겁게 빨려 들어간 것이 혀 뿐 아니라 몸 전체인 것 같았다.  혀끝에서 원치 않는 단침이 계속 솟아났다. 안 돼. 내일 결혼식이야. 수연이 중얼거릴수록 판규는 더욱 흥분했다.


                                        ***





 “근데…아깐 집에 어머니가 계셔서 못 물어 봤던 건데 그 숨진 김판규씨…통화내역을

보니까 간밤에 김지연씨랑도 통화한 걸로 돼 있더라구요?”


 김형사의 질문을 듣고 지연은 깨달았다. 필시 이 질문 때문에 내가 호출됐으리라. 


“둘도 아는 사이였어요?”


 지연의 의식이 자신에게서 벗어나서 멍하니 두 형사 사이에 앉아있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봤다. 그리고 결혼식 후에 노적가리 쓰러지듯 소파에 뻗어있었던 과거의 자신의 모습도 봤다. 아무리 대타라지만 거추장스러운 드레스를 입고 신부 역할을 한다는 것은 긴장과 스트레스를 요하는 일이었다. 기묘한 건 몇 시간 전 형부와 인천 국제공항까지 다녀 온 일은 오래전 기억처럼 까마득했다. 마치 어린 시절부터 주욱 소망해온 일은 어느 순간에 이루어졌는지 분간이 어려운 것처럼. 지연의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네? 누구요?”

“식은 잘 끝났어?”


 뇌까리는 듯 한 거친 목소리. 누구였더라.


 “아. 판규 오빠. 그럼요! 잘 끝났죠. 오빠 근데 왜 결혼식에 안 왔어요?”

“일이 있었어”

“네. 언니도 이해하겠죠, 뭐. 네? 언니 신혼집이요? 그건 왜요?”

                              

 지연은 형사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고 있나 잠시 의아했다. 초점을 잃은 듯한 눈.

맥이 풀린 손짓. 사실 김 형사는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조잘조잘 거리는 지연. 그 작은 볼로 숨이 드나들고 그 숨이 말이 돼서 김 형사의 귓가에 살랑거리는 게…….

 “판규 오빠는 결혼식에 참석 못해서 미안하다고, 신혼여행 돌아오는 대로 친구들이랑 깜짝

방문해서 파티를 해 주겠다나…….”

“그 얘길…”


 조형사가 침묵을 깨고 날카롭게 끼어들었다.


“삼십분이나 해요?”


 조형사의 무기력함은 일종의 낚시였던 것이다. 하지만 바늘에 아가미를 여러 번 꿰였던 물고기마냥 지연은 차분하게 대꾸했다.


 “전, 언니한테 직접 물어보라고 그러고 그 오빠는 명색이 서프라이즈 파티인데 어떻게 본인한테 물어보냐고…실갱이 하느라…….”


 “그래서 결국 알려줬고요?”


 지연은 주억거렸다. 조형사와 김형사가 쌍둥이처럼 생각에 잠겼다.


 “네. 암튼 궁금한 거 있으면 또 연락드릴게요. 늦었는데 어서 들어가세요!”


 힘들게 온 사람을 매몰차게 돌려세우는 느낌이었다. 뭔가 말할게 있는지 망설이던 지연이 그냥 일어난다. 흘낏흘낏 지연을 훔쳐보던 경찰들은 이내 딴 짓 하는 척 부산했다. 씁쓸한 표정으로 서를 나오는 지연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화가 났다. 핸드폰 숫자 키를 마구 누른다. <언니>. 지금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있어서……. 지연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내일 아침 일찍, 통신사에 연락해서 저 여자, 이지연 통화내역 하루단위로 알려달라고 그래!”


 볼이 상기된 조형사가 김형사에게 이야기했다.


 “영장 나와야 가능하다고 할텐데요”

“나온다고 해”

“영장을 들고 와야 그때부터........”

“쓰읍!”

“……네.”


 김형사는 지연을 피의자처럼 몰아가는 조형사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어 입을 비쭉거렸다.

조 형사는 지연을 취조하는 내내 그녀를 말에 비유하고 있었다. 털이 매끈했고 자태가 늘씬한 것이 그녀가 말로 태어났다면 좋은 품종이었을 것이라고.


                                            ***


 “자기가 원래 그렇게 배 멀리 잘했었나?”


 높게 이는 파도위에 아슬아슬하게 가는 유람선 한척. 맵싸한 실내 공기에 패키지 관광객으로 보이는 아줌마 아저씨 관광객들 가득하고 구석에 형진과 수연이 앉아있었다. 배 멀미에 수연은 고통스러웠다. 확연하게 드러나는 눈주름. 힘없이 처진 볼. 퀭하고 어두운 눈. 윤기없이 부스스한 머리카락. 눈을 질끈 감은 수연을 비웃듯 관광객들은 소줏잔을 벌써 몇순배째 돌리고 있었다. 수연은 결혼식 펑크 낸 것에 대한 죄책감의 발로였는지 평소의 수다 많은 성격 중에서도 요 며칠이 발군이었다. 때로 어색할 정도로. 그러지 않아도 수연의 인생의 궤적을 통해 자연스럽게 알 수 있는 성격인데. 왜 그럴까? 게다가 배멀미라니. 부 조합이었다.


 “멀미약이라도 먹고 타는 건데”


 형진은 주머니를 뒤적여 껌을 꺼냈다. 일단 이 껌이라도 씹어. 수연은 성격과 달리 껌을 소극적으로 씹는다. 더 세게 씹으라고! 형진이 그녀의 턱과 정수리를 누른다. 이렇게 좍. 좍. 그래야 멀미가 덜 한다고! 수연은 예의상 세게 씹는다. 어때? 좀 괜찮지? 그녀는 억지로 고개를 끄덕이고 불안한 듯 형진의 손을 꽉 잡는다. 형진의 얼굴에 애잔함이 몰려든다. 그 애잔함은 잠수함 안에서 창밖을 보며 신기해하는 수연의 표정에서 사랑스러움으로 변했다. 어느새 그녀는 멀미를 잊은 듯 했다. 왜 여자는 아프고 나서 더 사랑스러워 보이는지 그는 의아했다. 사랑해. 형진은 그녀의귀에 대고 속삭였다. 희미하게 꿈틀대던 그녀의 몸이 모래톱에 다다른 파도처럼 슬며시 잦아들었다.



                                     4. 청초한 여신          



 카센터의 담장 아래 철쭉들이 때늦은 추위에 짓눌려 잔뜩 웅크리고 있다. 담벼락에 줄줄이 꽂혀 있는 깨진 병조각들의 위세도 오늘따라 초라해 보인다. 벽과 담 사이엔 폐타이어와 빈 화분, 스티로폼 상자들이 눈을 인 채 처박혀있다. 언제 한번 다 들어내고 청소를 하긴 해야 할 테지만 그건 봄이나 되어야 가능한 일일 것이다. 직원들은 기름 때 묻히고 정비에만 몰두하는 것도 충분히 바쁘다. 카센터에서 일하는, 판규의 친구 규원은 어슬렁거리는 조형사와 김형사를 발견했다.


 잠시 후. 때에 안 맞는 가스난로를 사이에 두고 조형사, 김형사와 규원이 앉았다. 카센타 사장이 자꾸 어깨너머로 훔쳐본다. 김 형사에게 규원이 입을 열었다.


 “판규 여자친구가 동생을 골탕 먹이려고 만나기 시작한 거래요.”

“네? 김판규 여자친구요? 이수연 말씀인가요?”

“네. 이수연이요”

“이수연이 동생 이지연을 골탕 먹이려고 박형진을 만나기 시작한 거라구요?”


 훈련받은 앵무새마냥 김형사는 규원의 말을 그대로 되풀이하며 물었다. 규원은 뭐라도 된 것 마냥, 미국인처럼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


 그 밤. 봉고차로 불야성을 이룬 학교 정문을 지연이 걸어 나오던 밤. 남학생 서너 명이 우르르 달려와 지연에게 장미송이와 쪼꼬렛 등을 안겨주고 낄낄 대며 떠난 것에 대해선 전에 이야기했었다. 이딴 식의 애정공세에 감동받을 여자가 있을까. 머리로 책만 외우느라 가슴이 텅텅 빈 인간들…이라고 지연이 비난한 것에 대해서도. 그래도 그치들은 행운이었다. 적어도 지연의 시선을 받아봤으니.


 여기 1년이 가깝도록 지연을 바라만 봤으나, 그녀에게서 눈길한번 받지 못한 멀대 같이 키가 큰 남자 고등학생이 있다. 박형진. 이 날도 지연은 가만히 멈춰 서서 넋 놓고 자신을 보고있는 형진 곁을 지나갔건만 한참이 지나도록 그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하였다. 형진도 더는 서운해 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수연과 판규의 오토바이가 그녀 앞에 멈춰서더니 한참을 이야기하다 출발했다. 오토바이 위에서 수연은 판규의 입에 초코렛 넣어주며 낄낄거렸다.


 수연은 손찌검을 하지 않았지만 지연은 맞은 것처럼 휘청 이며 서있었다. 형진의 눈엔 그랬다. 하여 일 년간 도서관에서, 때론 운동장 스탠드에서, 혹은 학교 앞 문구점에서 지연을 훔쳐만 보며 다가갈 생각조차 못했던 그의 마음이 크게 요동쳤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네 봉고차 떠난거 같은데…우리 봉고차… 같이 탈래?”


 지연은 돌아봤다. 거기엔 새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고 믿어지지 않는 호리호리한 외모의 형진이 있었다. 창백한 얼굴. 그는 긴장될수록 얼굴이 더 하얘지는 듯 했다. 그래. 저렇게 긴장하는 모습이 짝사랑이지. 하지만 지연은 새침하게 고개 돌려 걷는다. 형진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때가 아니면 언제 또 말을 섞게 될지 몰라.


 “그럼 버스라도 같이 탈까? 너랑 나랑 같은 방향이던데.”

“누구니, 너?”


 장미의 가시처럼 앙칼지다. 집에서 대우받고 동네에서 수재소리를 듣던 박형진이 왜 이런 수모를 당해야하는가. 형진은 사랑이 호르몬의 이상분비 때문에 빚어지는 일종의 병리현상 이라는 걸 도서관에서 읽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읽는 순간에도 맞은편에 앉은 지연을 훔쳐봤었다.


 “나? 아. 난…3반 박형진 이라고 하는데…너에 대해 많이 들었어. 그냥 지나가면서 보기도 하고…….”


 조숙한 지연은 사랑이, 멜로영화에서 그렇듯이, 애들 코 묻은 돈 우려낼 때나 써먹는, 일종의 청소년 용품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여 형진을 무시하고 지나쳤다. 그녀의 마음은 흔들림이 없었다. 몇 분 뒤. 버스 정거장에서 샴푸 광고처럼 바람에 머릿결이 휘날릴 때도, 그래서 다들 비슷비슷하게 생긴 사내아이들이 죽인다며 휘파람을 불어댈 때에도, 그 무리 뒤편에 형진이 숨을 죽인 채 분을 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도.


 버스 안에서 지연은 달콤한 휴가 같았다. 파절임이 된 야간 승객들 사이에서 홀로 발광하는 청초한 여신이었다. 똑같이 숨을 쉬되 천상의 맑은 공기를 홀로 마시는 듯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토록 단아한 날숨을 내쉴 수 있단 말인가. 형진은 알고 있다. 모처럼 발동된 용기의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승객들을 밀치며 지연에게 다가갔다. 지연이 천천히 돌아본다. 무슨 샴푸일까. 하루가 지났음에도 이렇게 사람을 아찔하게 하는 제품이. 수면제를 먹으면 이렇게 몽롱해질까. 형진은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 건넨다. 지연의 부담스럽도록 어여쁜 눈빛이 다행히 노트에 떨어진다.


 “이거.”

“뭔데?” 

“너 지난번에 아파서 사흘간 결석 했다고 들었어. 그때 사탐 수업 정리한 건데…내가 필기해 둔 거거든. 듣자하니 별로 친한 사람도 없는 거 같고…….”


 노트속의 필기처럼 정돈된 형진의 멘트. 누가 들어도 삼박 사일 간 연습한 연극대사 같았다. 지연이 피식 웃는다. 그리고 한동안 침묵이 둘을 에워싼다. 용광로처럼 뜨거웠던 형진의 용기가 냉동고에 파식 던져진 느낌이다. 머리칼이 그대로 굳어져 부러질 것 같았다. 묵음 처리된 승객들의 비웃음 소리가 꽁꽁 얼어붙은 종유석처럼 찔러왔다. 발은 천근보다 무거웠다. 뗄레야 뗄 수 없다. 뒤에서 껄껄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야. 나도 정학먹어서 며칠 쉬었는데 좀 보자. 수시합격 보장해주냐?”


 아까 그 껄렁껄렁한 녀석들이다. 녀석 중 하나가 노트를 뺏더니 예수를 조롱하는 로마 군사들처럼 노트 끝으로 형진의 옆구리를 쿡 찌른다. 부아가 치밀어 오르지만 형진은 망설였다. 얼핏 봐도 서넛. 시비가 붙으면 백전백패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서면 지연을 다시는 못 볼테지. 형진은 노트를 뺏은 녀석의 오른팔을 잡아 비틀었다. 예상보다도 훨씬 완강했다. 오히려 놈은 힘껏 바깥쪽으로 형진의 손을 비틀어 젖혔다. 으드득. 팔목이 돌아가는 느낌이다. 다리에 힘이 풀려온다. 그 때였다.


 “이리 줘! 내가 빌린 거야.”


 지연이었다. 앙다문 입술. 의연하나 날카로운 눈빛. 사나운 고양이를 만난 덩치 큰 개들처럼 녀석들은 벙찐 표정이었다. 덜커덩. 버스가 멈춰서고. 끼이잉. 열린 문틈으로 지연은 내렸다. 그녀의 손엔 어느새 형진의 노트가 들려있었다. 쉬잉. 무정하게 자동문이 닫히는 동안 지연은 얼핏 돌아도 본 것 같다. 어쩌면 미소를 흘렸는지도 모른다. 아니 흘렸던 것 같다. 아니 흘렸다. 종교적 체험 혹은 착각 혹은 플라시보 효과, 그 모든 것을 합친 것 그 이상. 혹세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쉽게 단정해버리는 바로 그것.


 형진이 지연을 일대일로 만나게 될 날이 그리 빨리 오리라곤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지연이 도산 공원에서 기다리던 날. 형진은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처럼 거침없이 달려왔었다.


 “헉헉. 먼저 와있었네. 미안!”

“여기.” 


지연은 노트를 반납했다.


“벌써 다 봤어?”


 버스 안에서 보다 여유가 있었지만 형진은 여전히 떨고 있었다. 그 모습이 지연은 귀여웠다. 하여 그녀가 새침하게 돌아서고 나서 형진이 노트의 겉장을 넘기다가 초코렛이 붙어있는 것을 보고 팔짝 팔짝 뛰었을 때 씨익 웃지 않을 수 없다.


 사랑의 시작. 다들 아무것도 아니라 했다. 이사는 저희에게 맡기고 여행이나 다녀오세요. 하는 포장 이사업체의 광고 전단처럼 사랑도 그런 것이라 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사업체 직원들이 가구에 흠집을 내진 않는지, 귀금속을 슬쩍 하진 않을지, 가스 배관과 비데를 제대로 설치해놓았는지 살펴보아야하며 시시때때로 빵에 우유에 자장면에 소주 한잔까지 성가시게 갖다 바쳐야 한다. 형진과 지연에게 사랑이 그러했다. 신경 쓸 게 많았고 아파할 게 많았고 손 가는 게 많았다. 둘 다 처음이라, 또 고 삼이라 더욱 그러했다.


 사귄 지 한 달 쯤 됐을 때 형진은 키스를 마음먹었다. 야간 자율 학습이 끝나고 둘은 종종 손을 잡고 집까지 걸어오곤 했다. 집 앞에서 지연은 형진의 욕망을 눈치 챘다. 식은 땀. 빠른 맥박. 거친 호흡.


“다 왔어.”

“응? 응.”

“……그럼 들어가.”


지연은 뒤돌면서 중얼거렸다. 바보. 형진이 지연의 손을 잡았다.

 왜? 

형진의 입술이 다가온다. 닭똥집처럼 모아져있다. 웃음을 참고 지연은 눈을 감았다. 입술이 닿았다. 아니 닿으려는 찰나. 지연이 형진을 밀친다. 얼른 가! 어이 벙벙한 형진. 왜? 그제서야 그의 귀에 오토바이 소리가 들린다. 빨리! 빨리! 형진은 영문도 모르고 뛴다. 형진이 골목에서 채 사라지기도 전에 오토바이가 선다. 판규와 수연이다. 수연은 형진의 뒷꽁무니를 멀뚱히 봤다.


“어쭈, 째끄만 것들이. 여기서 뭐했어?”

“신경 꺼.”


 쾅. 지연이 신경질적으로 대문을 닫고 들어가자 수연은 깔깔대고 웃었다. 쟤 연애하나봐. 마론 인형 같은 동생이 연애를 한다는 게 웃겼다. 수연에게 연애란 오토바이 후드에 종아리를 데는 것과 같았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프고 자국도 주홍글씨처럼 남지만 그만큼 짜릿한 것. 연약한 지연이나 더 연약해 보이는 그녀의 남자친구가 해서는 안 될 것이었다. 언젠가 장난질 한번 쳐야겠다. 그걸로 깨지면 둘은 팔자가 아니라지. 기회만 한 번 와라! 하지만 그 기회가 그렇게 빨리 올지는 몰랐다.





  5. 엇갈린 운명 (사랑은 애써 제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사흘 밤낮에 걸친 판규와의 음주 폭주 행각에 지쳐 수연이 거실바닥에 널브러져있던 토요일 오후. 얼굴에 오이를 잔뜩 붙이고 바닥에 드러누워 만화책을 보고 있었다. 아삭 아삭 씹어 먹기도 하면서. 주인공 여자가 뇌종양 판정을 받는 순간. 졸라 유치하네. 하면서도 다음 장을 넘기려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야! 전화 받아! 이지연! 엄마! 아우씨, 다들 어디 간 거야?”


 혼자 집에 있을 때 울리는 전화벨 소리는 왜 저리도 클까. 받지 않았다. 하지만 잠깐의 정적 후 다시 울리는 전화벨 소리는 더 요란했다.


“진짜, 전화선을 뽑아버리던가 해야지”


 수연은 기어가서 신경질적으로 전화 받았다. 여보세요. 거친 목소리에 놀랐는지 상대방은

호흡을 뒀다.


“나야”

“누구?”

“누구긴 누구야. 형진이라고. 지연아”

“나 지연이 아니거든. 걔 언니거등”

“너 그런 장난치니까 귀엽다 지연아.”

“뭐? 장난?”

 수연은 혼란스러웠다. 아니라는데도 왜 자꾸 나를 지연이라고 부를까. 하지만 눈치가 삼단! 이건 필시. 지연 때문이다. 사고뭉치 언니가 챙피해서 외동딸이라고 말하고 다닌 것이 틀림없다. 괘씸한 년. 수연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너 오늘 잘 걸렸다.


 “응. 맞아. 나 지연이야. 말해. 형진아”


세 사람의 운명이 엇갈리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수연은 되도록 얌전하게 말했다. 딴엔 연기였는데. 상대편 형진은 무슨 내기에서라도 이긴 듯 신이 나있었다.


“너 외동딸이라고 몇 번을 말했는데...내가 그걸 기억 못 할까?”


 수연은 짜증이 확 올라오는걸 간신히 참았다. 맞아 맞아 그랬지. 호호호.


“내일 오후 네 시에 공원에서 잠깐만 보자. 줄 게 있거든. 잠깐만이면 돼! 꼭 나와야 돼!” 


 전화가 끊겼다. 공원에서 오후 네 시라. 참 위험한 시간에도 만난다. 수연에겐 매우 위험한 시간이다. 오후 네시에 공원에서 술을 마시거나 오토바이를 탔다간 짭새에게 불심받기 딱 좋았다. 차라리 새벽 네 시가 편했다. 귀여운 녀석들. 건전하게도 논다. 아장아장 소꿉장난같은 연애질을 하면서도 지연은 왜 허구언날 엄마한테 깨질까.


 때 마침 지연과 엄마가 요란하게 들어온다. 엄마의 손엔 뜯겨진 봉투와 그 안에서 나온 성적표가 들려있었다.


“이지연 이리와봐! 너 모의 고사 성적이 이게 뭐야? ”


 또 시작이구나. 수연은 만화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지연! 너까지 이러면 어떡해? 너 요새 하고다니는 꼴을 보니, 남자라도 생긴거 같은데

맞아? 그래서 성적 떨어지는 거야? 미쳤니? 수능이 며칠이나 남았다고! ”

“안 그래도 수능 끝날 때까지 안 만나기로 했어!”


아. 그래서 잠깐이면 된다고, 꼭 나와 달라고, 그 쫌생이 같은 놈이 사정한 거였구나.


“당연하지! 정신차려 이것아!” 엄마는 지연의 머리를 갈겼다. 수연은 피식 웃었다. 엄마

실수했어요! 저년도 의외로 앙칼진 데가 있다고요. 나나 저년이나 엄마 딸인데.


“ 왜 나한테만 그래? 하루 종일 만화책만 보고 술 퍼 마시는 언니는 가만 냅두고!”


 지연이 쾅 소리 내며 방에 들어갔다. 어쭈, 저게. 왜 가만히 자고 있는 사자의 콧수염을 건드려. 화가 치밀어 오른 수연은 지연 방에 따라 들어갔다. 지연은 침대에 누워 베개로 제  얼굴을 짓누르고 있었다.


“야. 이지연. 너 니 남자친구한테 외동딸이라 그랬대매?”


지연은 배게를 가슴께로 내리며 동그란 눈으로 쳐다봤다.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야야 니 친구가 다 내 친구고 똘마니고 그래. 이 안양 시내 바닥이 다 내 나와바리라는거 몰라? 그나저나 왜 그랬어? 내가 챙피해?”

“알면서 뭐하러 물어? 오토바이 뒷꽁무니에 올라타서 병나발 불고 다니는 언닌 없는게 나아!”


 수연은 의자를 집어 번쩍 들었다. 아유. 이걸 그냥. 거실에서 엄마의 잔소리만 들리지 않았다면 지연에게 집어던질 기세였다. 의자를 내팽개치고 자기 방으로 돌아온 수연은 화장대 거울 앞에 앉았다. 지연처럼 머리를 다소곳하게 풀어헤쳤다.


 눈빛은 살기가 가득했다. 그래, 이지연. 넌 얼마나 잘났나보자. 지가 청순해봐야 얼마나 청순하다고. 수연은 지연의 무테 안경을 썼다. 거울 속엔 어느새 수연이 아닌 지연이 있었다.



 지연이 잠들어있는 틈을 타서 수연은 그녀의 일기를 훔쳤다. 저 지중해 어딘가에 있다는 누드비치에 처음 당도한 관광객처럼 수연은 일기장을 넘기자마자 여기저기를 기웃거린다. 온통 형진 얘기다. 형진의 성격과 지연의 모든 것이 눈에 아른거릴 때쯤 되자 수연은 일기장을 덮었다.


 다음 날 오후 네 시 오 분. 도산 공원엔 지연으로 변신한 수연이 다소곳이 다리를 모으고 벤치에 앉아있었다.

“진짜 나와줬네. 고마워.”


 달려 나온 형진이 상기된 채로 이야기했다. 수연은 그제야 형진을 처음으로 제대로 보았다. 일단 키가 컸고 말랐다. 얼굴은 야리 했으며 창백했다. 바람이라도 불면 휘청 꺾일 것 같았다. 저런 멀대가 뭐가 좋다고.


“우리…수능 끝날 때까지 안 보기로 했잖아.”


 수연은 콧소리를 살짝 섞어 대답했다. 딴엔 애교였지만 형진은 지연이 무척 화가 나있다고 느꼈다. 낯설었으므로. 미안. 잠깐이면 돼. 주머니에서 포장된 상자를 건네 왔다. 선물. 이게 뭔데? 핸드폰.


 “핸드폰?”


 수연의 우악스러운 목소리가 터졌다. 수연이 우악스러워서만은 아니다. 당시 어느 고교생들이었더라도 핸드폰을 선물 받았다면 똑같이 반응했을 것이다. 수연의 목소리는 따로 연기할 것도 없이 저절로 지연처럼 부드러워졌다.


“학생이 돈이 어디 있다고 이런 걸 사오니?”

“그 동안 고삼인 게 죄라고 눈치 보여서 너희 집에 전화 잘 못했잖아. 수능도 얼마 안 남았는데 앞으론 오죽하겠어? 다 이때를 생각해서 돈을 모아뒀지. 커플요금이니까 요금도 얼마

안 나올거야. 어때?”

“어떠긴…당연히……좋…너 많이 부담 되겠다.”

“매일 전화하자는 게 아니라 가끔씩 너무 목소리 듣고 싶어서 공부하기 힘들때…그 때만

통화하자고.”


 수연은 형진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상자를 박살내어 말끔한 핸드폰을 쓰다듬고 있었다.


“괜찮지?”

“그럼. 괜찮네.”


 수연은 갑자기 수연은 형진의 볼따구니를 꼬집어 흔들었다. 형진이 놀란 토끼처럼 눈이 동그래진다. 지연아 왜 그래? 한 번 이런 것도 해보고 싶었어. 형진은 웃었다. 그리고 수연의 손을 잡았다. 형진의 악력이 느껴졌다. 멀대같은 아이가 박력 있어 보이고 싶나보다. 귀엽다. 수연은 참지 못하고 입술을 내밀었다. 형진이 천천히 눈을 감고 다가왔다. 수연이 형진의 목덜미를 낚아채더니 그대로 품에 안았다. 형진은 물컹물컹 생맥주의 거품속에 온 몸이 빠진 듯 몽롱했다. 혀 끝에선 단침이 계속 솟아났고 온 몸의 세포가 분리되는 기분이었다. 그러면서 허리아래는 일사분란하게 요동쳤다. 이런 기분이 있었다니.


"나, 처음이야. 넌?"

“나도 처음이지, 이번 주엔.”

“……?”

“아니~ 이번 주엔 꼭 내 생애 첫 키스를 하고 싶었다고.”


 생애 첫 키스라. 열 여덟. 그리 늦지도 빠르지도 않은 나이라 만족스러웠다. 게다가 상대가 지연이라 더더욱. 형진은 그녀를 꼭 껴안았다.


                                     ***


 판규의 나이도 올 겨울만 지나면 열아홉이 된다. 오토바이 타고 장난칠 때도 지났고 삐끼질 할 짬밥도 아니다. 조직에 들어가서 허리 굽히고 살기도 싫다. 집구석으로 들어가는 건 더 좆같다. 집에 가봐야 눈칫밥밖에 더 먹나. 괜찮은 년 하나 있으면 살림 차리고 씨팔, 이삿짐이라도 날라볼까. 하루 일당 십만 원이면 뺑이야 치지만 삐끼보다는 낫다. 종식이 새끼는 아직도 뻑이나 치자고 하고, 정신 못 차렸다. 익스프레스도 호흡이 잘 맞아야 껀수라는데, 명수새끼랑 하면 괜찮을 거 같은데, 언제 술 한번 옴팡 처멕이고 얘기 좀 해봐야겠다. 해서 명수새끼와 맥주를 옴팡 처마시고 있었다.


 따악.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진다. 통증은 뒷통수에! 손에 들려있던 담배꽁초가 손등에 떨어졌다. 앗 뜨거.


“담배 끊어, 새끼야! 폐 삭어!”


 수연이었다. 씨발년. 졸라 싸가지없어. 면상도 괜찮은데 이 년이랑 그냥 살림 차릴까. 하지만 보수적인 어머니와 살고 있는 게 걸렸고. 또 하나, 다른 양아치 년들과 다르게 이 년은 판규가 진짜로 좋아하고 있다는 게 걸렸다. 지켜줘야 할 것 같은 책임감이 따라다녔기 때문이다.


 “이게 자꾸 오빠한테?”

“오빠? 이 정도는 해줘야 오빠 소리 들을 자격 있는거쥐~”


 수연이 판규의 코끝에 핸드폰을 덜렁덜렁 흔들어댔다. 어디서 났어? 훔쳤어? 훔치긴. 내가 중딩이냐. 남자가 줬다. 남자? 어떤 새끼야? 확 죠져버릴라니까!


 걱정 붙들어 매셔. 걘 애완견이니까. 수연은 판규의 허벅지위에 올라앉아 거칠게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쪼가리 남겨 주께. 판규는 명수가 신경 쓰여 뿌리쳤지만 수연은 기어코 판규의 목덜미에 깊숙한 키스마크를 남겼다.


                                  ***

                                              

 지연은 연락 한 번 없이 공부에만 몰두하고 있을 형진이가 대견하기도 했고 원망스럽기도 했다. 어떻게 전화 한 통을 안 할까. 독한 녀석. 지연은 여러 번 형진의 집 번호를 누른 적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번호를 누를 때쯤 고개를 힘없이 가로저으며 전화를 끊었다. 형진이가 바로 받으면 반갑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테지만 만약 없거나 그의 부모님이 불친절하게 받거나 하면 본전도 못 치루는 것이다. 소심한 그녀는 며칠을 끙끙대며 후회할 것이다.


 아마 형진도 같은 이유겠지. 바보. 난 항상 집에 있는데. 지금도 거실에서 전화벨이 울리면 제일먼저 달려 나가는데. 엄마가 욕하며 들어가라고 해도 기어이 내가 받는데. 지연은 마음을 추스르며 책상에 앉았다. 그래. 수능 끝나면 매일같이 함께 있는 거다. 갱지에 깨알같이 글씨를 쓰며 사탐을 암기한다. 인간은 두더지의 앞발보다 땅을 파는 데 더 많은 결함을 지닌 자신의 손이 삽으로 진화되기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삽을 만들어 사용했다.

 이렇게 지혜로운 인간이 왜 감정은 다스리지 못하는 걸까.


우주는 자연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하나의 거대한 기계이며 모든 일은 필연적 인과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만일 인간이 이러한 질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면 그는 우주와 참된 조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나와 형진은 대체 어떤 필연적 인간관계일까. 보고 싶어도 꾸욱 참고 또 참는 게 우주의 참된 조화일까.


 신은 왜 이렇게 잔인한가. 목성과 토성과 지구와 달이 각자의 궤도에 맞게 돌게 하면서, 시냇물과 강과 온천수가 가고자 하는 곳에 가게 하면서, 개미와 달팽이와 개똥지바귀의 성근 발걸음을 인도하면서, 왜 나와 형진만 가로막는 것일까. 그녀의 갱지가 온통 ‘보고싶다’ 라는 글자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


   형진은 만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지연에게는 참으로 여러 얼굴이 있었다. 매번 낯설고 서먹하게 느껴지는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여러 사람이 한 가면을 쓰고 나오는 것 같았다. 얼굴은 늘 똑같은데 성격은 조변석개했다.


 가령 엊그제 서울 시립 미술관에 갔을 때에만 해도 그렇다. 그림이라곤 화투장의 꽃들 이외엔 관심도 없던 수연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아무렴 어때. 이렇게 한 번 가보는거지 뭐.


학생 두 명이요. 매표소에서 형진이 의젓하게 말했다. 

“학생증 보여주시겠어요?”

수연은 아차 싶었다. 지연과 학교가 달랐다. 그녀는 지연처럼 명문고를 다니고 있지 않았다.

"놓고 왔는데요. 집에다."

"그럼 주민등록증 주세요"

수연은 안심하며 주민증을 내밀었다. 사진속의 그녀는 지연과 별반 다름이 없었다. 하긴 다르면 이상하지. 일란성 쌍둥이인걸.

사건은 매표소 점원이 실수로 수연의 신분증을 형진에게 준 후였다. 형진은 물끄러미 수연을 돌아봤다. 경계심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이 수연?”


“아…내가 이름이 두 개거든. 호적상 이름은 이 수연이야. 점쟁이가…그렇게 지으랬대.”

“그렇구나. 이름인 들, 아무렴 어때.”


형진은 수연의 어깨를 두르고 미술관으로 들어갔지만 내내 불편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언젠가 어디선가 더 숨겨놓은 그녀의 무언가가 계속해서 튀어나올 것 같았다. 다음 날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도 여전히.

                                                         

“잘 지냈어, 하룻 동안?”


 먼저 도착해 멍하니 서있는 형진에게 그녀가 다가와 물었다.


“응. 그냥저냥. 근데 머리가 바뀐거야?”

“아니, 왜? 이상해?”


 그녀가 오른손을 자기 머리를 살짝 매만졌다.


“아니, 난 또 헤어스타일을 바꿨나 해서.”


 형진과 지연은. 엄밀히 말해 형진과 수연은 요거트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어가 아몬드와 딸기 토핑을 얹은 저지방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아이스크림은 들척지근하고 맛이 없었다. 인상이 쓰여진 김에 형진이 미뤄두었던 고민이 떠올랐다. 내가 과연 지연을 사랑하고 있는 걸까?


 수연은 형진의 시선을 간파했다. 떠나려고 하는 새의 예비 날개 짓 이었다. 벌써 수연의 자존심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내가, 지금 저치 앞에 앉아있는 내가, 만약 지연이라면. 이렇게 쉽게 떠나려고 했을까? 마침내 형진이 입을 열었다.


“지연아 기억나? 우리 수능 때까지…안 보기로 했던거?”


 고요가 이렇게 무럽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질량을 가진 고요가 두 사람을 짓누르고 있었다. 딸국. 여드름이 터지듯 딸국질이 나왔다. 형진은 당황했다.


“괜찮아? 물 마셔.”

“나가자. 내가 낼게.”


 가난한 사람은 이렇게 해서 좀 더 가난해진다. 가난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에 결국 더 가난해진다. 


“우리 집에 가까?”


기다렸던 대답대신 난데없는 제안이 날라 오자 형진은 또 다시 어안이 벙벙했다.


“집에? 지연이 너희 집?”

“아무도 없어. 일어나. 얼른.”


 수연은 형진의 손목을 이끌고 가까운 할인마트로 향했다. 대형마트에 들어서자 형진은 낯선 느낌이 들었다. 그곳에는 안정된 삶을 희구하는 중산층들이 있었다. 그들은 거기에서 프링글스 감자칩과 바지락과 토마토를 샀다.


 “스파게티를 해줄게”


 형진은 수연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수연은 형진이 자신을 쳐다보는 것도 모른 채 카트에 담긴 물건들을 다시 꼼꼼히 살피고 있었다. 왜 아름다운 것들은 자신의 아름다움에 무심할 때 더 아름다워 보이는 걸까? 형진은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쓰다듬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이곳은 사람들로 붐비는 대형 마트였다. 형진은 그런 충동을 누르고 카트를 밀었다. 그리고 자신의 사랑을 의심한 순간을 후회했다. 그리고 수연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왜? 그래 형진이 니 말대로 수능때까지 안 보는건 좋은 의견이야. 그래도 공부 열심히 하란 뜻에서 밥 한끼 해주고 싶어서.."

"아니야. 그런 의미"

"그럼?"


 형진은 대답대신 아주 뜨거운 그릇을 전자레인지에서 꺼낼 때처럼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그녀의 볼을 감쌌다. 수연은 눈을 감았다. 최소한 가난한 집에 붙은 불은 껐다. 하지만 다른 불이 붙은 걸 깨닫진 못했다. 어느 새 그녀도 형진을 좋아하고 있는 것이다.


 노란색 비닐 봉지를 댕강댕강 흔들며 형진의 손을 잡고 오던 수연은  집 앞에서 흠짓 놀랐다. 엄마의 그랜져가 차고에 주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지연이 담탱이랑 밥인가 술인가 하러 간다고 했는데. 요사이 마음이 흐트러진 지연에 대한 상담을 하러! 함께 치맛바람을 휘날리던 다른 학부모와 뭔가가 틀어진 모양이다. 젠장. 수연은 다급해졌다.


“형진아. 미안해. 나 갑자기 아파. 우리 다음에 봐야겠다.”

“어디가 아픈데? 지연아 괜찮아?”


 변명거리를 에두르려던 수연의 입이 갑자기 딱 벌어졌다. 형진의 등 너머로 자신과 똑같이 생긴 여자가 걸어오고 있는게 보였기 때문이다. 꼭 집어 말하기 힘들지만 지연에겐 수연과 다른 매력이 있었다. 멀리서 보기에도 작고 도톰한 입술을 가졌다. 얼굴선도 갸름했다.


  수연은 형진이 뒤돌아보려는 걸 막았다. 돌아 보지마. 엄마야. 뒤 돌아보지 말고 가. 돌아보면 의심할거야.  이쪽으로 가. 형진은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사라져갔다. 수연은 안경을 벗고 머리를 산발로 흔들었다.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야 할 때다. 머리를 터는데 물방울도 함께 떨어진다. 눈물이다. 언젠가 나를. 다른 사람 행세를 하지 않는 나를, 있는 그대로의 나를  네가 좋아할 날이 있을 거야. 그때까지만 기다려줘. 두드득. 목을 흔들어 요란하게 소리를 내고 수연은 불량스럽게 대문을 열었다.


                                        ***


 그 해 처서가 지나갔다. 그리고 수능이 끝났다. 지연은 수능 점수가 기대치에 못 미쳐 재수를 결정했다. 반면 형진은 서울대에 수시 입학했다. 그동안 학교에서 형진을 보고도 다가가지 못했던 지연은 이제 아주 그 기회를 놓쳐버렸다. 형진이 서울대와 가까운 신림동 근처로 이사를 가버린 것이다. 지연에겐 아무런 연락도 없이.


 “다녀왔습니다.”


 수연이 우렁찬 목소리로 들어 왔을 때 지연은 전화기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그녀는 옹송그린 어깨를 펴지도 않고 그대로 방으로 들어갔다.


“저년은 수능 성적도 잘나왔으면서 왜 저래?”


 그러자 수연 모가 웃었다. 


“그게 다 상대적인 거여. 수능 반 띵 하고도 행복한 너 같은 년도 있는거고, 두 세개 틀리고도 우울한 애도 있는거다.”

“엄만 말을 해도 꼭 재수 없게…….그럼 재수 준비를 하던가! 푹 죽어있긴.”

“너 모르는 구나”


 뭔가 재밌는 말을 하려는 듯 엄마의 눈빛이 반짝였다. 딸년 흉 보는게 그렇게 좋을까.


“차.였.대.”

“……?” 

“왜 만나던 애 있잖아! 이번에 서울대 갔다는 애. 걔가 연락도 안하고…이 엄마의 인생경험으로 봤을 때 분명히 딴 여자 만나고 다니는 거다.”


 그제서야 수연은 엄마의 미소의 의미를 알았다. 딸이 재수하는데 방해가 될 남자가 떠나버렸다는 것이다. 좋기도 하겠수. 피식 웃었지만 수연은 웃는 게 아니었다. 그 때 수연의 기분을 뭐라고 해야 할 까. 반가우면서도 어딘가 불편한, 양다리를 걸치고 있던 두 개의 땅 중 하나가 꺼져버린 느낌. 너덜대던 지연과 완전히 찢어져버린 느낌. 뿐만 아니라 삶의 기저가 아주 천천히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

                                                                                

 엄마가 반색한대로 지연이 재수에만 충실한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인가는 형진을 찾아 무작정 서울대학교에 가기도 했다. 당신도 알고 있다.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쉽게 보낼 수가 없다는 걸. 좀더 더듬거리며, 가지 말라고, 네가 필요하다고, 네가 가버리면 죽어버리겠노라고 말해야 한다는 걸. 하지만 지연에겐 그럴 기회조차 없었다.


 아이비리그의 명문대생 복장을 한 형진이 서울대 인문 관에서 나오고 있었다. 연기를 꼬리표처럼 단 담배를 길고 하얀 손가락으로 들고 있었다. 남자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저리 아름다울 수가. 하지만 지연이 그에게 다가가려는 찰나에 단발머리 여자가 나타나 형진을 나꿔챘다. 그때 지연은 그 순간 무슨 생각을 했을까. 최소한 얼마전 자신의 언니가 단발머리로 잘랐다는 사실이 떠오르진 않았다.


 지연이 형진의 노트를 가지고 간 다음날의 일기를 들춰보니 이렇게 쓰고 있었다. “사랑은 애써 제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내가 이런 글을 썼다니. 유치한 사춘기 소녀처럼 감상이 덕지덕지 묻어나고 있었다.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일기를 썼다는 것부터가 그 증거다. 슈퍼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생리대를 골라 카트에 던져 넣기 시작한 이래로 지연은 한번도 일기 따위는 써본 일이 없었다.


 서랍을 열고 공작용 칼을 꺼내 드르륵 칼날을 위로 밀어올린다. 그러곤 플라스틱 자를 일기장에 대고 스윽 칼을 그어내린다. “사랑은 애써 제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와 “아, 그를 사랑하게 될 것만 같은 예감이다”가 적힌 종이를 오려낸다. 일기는 다시 새것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을 도려내진 못했다. 지연은 오려낸 종이를 양손으로 북북 찢어 쓰레기통에 던져넣는다. 그러곤 불을 끄고 침대 속으로 들어간다. 탁상시계의 야광 시침이 한 시를 가리키고 있다. 그녀는 배개에 얼굴을 파묻고 운다. 엉엉. 그러곤 큰마음 먹고 세 음절을 발음한다. 개. 새.끼!


                                      ***

 조형사와 김형사는 규원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듣고 있었다. 특히 김은 완전히 빠져든 듯 했다. 해선 안 될 말까지. 우와! 되게 재밌네. 조형사는 바로 김형사를 째렸지만 이야기를 훔쳐 듣고 있던 카센터 사장도 거들었다. 그러게~ 쌍둥이니까 특이하게 노네. 흠흠. 조형사는 헛기침으로 흐름을 끊고 딱딱하게 질러 들어갔다.


“근데 이 이야길 수연씨가 직접, 숨진 김판규씨한테 다 했다는거죠?”

“네”

“판규씨 친구분이 이렇게 생생하게 얘기할 정도면… 숨진 판규씨는…….”

“아우. 말도 마세요. 장난 아니였어요!”


 김이 다시 긴장모드로 돌입한다. 녀석 아직 멀었군. 형사란 놈이 저렇게 포커페이스가 안되서야. 조는 속으로 웃었다.


“처음엔 이수연도 박형진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은 거죠. 그냥 동생을 골탕먹이는 재미로

만난거였고~ 판규 녀석도 재밌게 지켜봤는데... 근데 상황이 달라진 거에요. 이수연이

박형진한테 완전히 빠져든 거구요. 그걸 안 판규는 눈이 뒤집혔어요. 말보다 주먹이 먼저인 놈이거든요. 행동이 시작됐죠!”

“행동?”


 조의 입도 벌어졌다. 베테랑 형사라더니 아직 멀었네. 김 또한 속으로 조를 비웃으며 규원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


 판규는 여관에서 비디오 몇 편을 때리고 있었다. 본 게 반이고 안 본 게 반이지만 다 비슷하다. 이불 뒤집어쓰고 껄떡대는 한국판 에로물이다. 웃기는 새끼들. 하려면 하고 말려면 말지. 저게 뭐야? 그래도 계속 본다. 그것 말곤 할 일이 없으니까.


 수연은 열두시가 다 되어도 오지 않는다. 박형진, 그 개새끼가 서울대에 붙었다는데 겸사겸사 외박 뛰나? 씨발년. 저도 모르게 욕이 나온다. 돈을 빨리 많이 벌어야겠다. 수연은 죽어도 대학가지 않겠다고 판규와 손가락까지 걸어놓은 걸 비웃듯 대학에 딱하니 붙었다. 왜 약속을 어겼어? 대학가서 뭐하려고? 물었더니 수연은 대답했다. 치기공과야. 졸업하면 백퍼센트 취직되는 과래서 쓴 거야. 내가 언제까지 이렇게 오토바이만 타고 놀 수만은 없잖냐? 수연은 판규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놀았다고 표현했다. 그게 판규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그냥 확 보쌈해서 도망쳐버릴까. 시골 변두리에 아담한 까페나 노래방 하나 차려서 수연인 카운터 보라고 하고 아르바이트생 하나 쓰면 이 꼴 저 꼴 안 보고 살 수 있는데. 아 무리 치기공이 전문직이라고 하나 늙은이들 틀니 따위를 만드는 일 보단 나을 텐데. 아 그러려면 최소 오천은 있어야 어디 비벼볼 텐데. 그 돈이 씨발 어디서 나오나.


 수연이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 오늘은 그 애를 태우고 미사리 쪽으로 뛰어봐야겠다. 3년을 만났지만 수연은 마르지 않는 샘 같았다. 화끈한 데도 있고 다소곳한 데도 있다. 그리고 누나같은 면도 있다. 수연이 아니었으면 동네 양아치로 전락했을지 오래다. 세상에서 제일 대책없는 게 양아치야. 놀땐 놀더라도 양아치는 되지마. 하며 수연은 판규의 머리통을 툭툭 치곤했다. 판규가 선빵맞고도 가만있었던 건 수연이 유일했다. 그녀는 그의 오야봉이었다. 하여 오야봉의 적은 판규의 적이기도 했다.


 가장 큰 적은 재수없는 똑똑이 동생, 지연이었다. 헛똑똑이야. 수연은 말했고 판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박형진과의 거짓부렁이 만남도 그래서 허락했었다. 지연의 쪼인트를 까는 심정으로. 하지만 요새같아선 하루에도 열 댓 번씩 후회한다. 이젠 박형진이 아니라 자신과의 만남이 거짓부렁이 같다. 그도 그럴것이 다른 대학도 아닌 서울대라니. 가방끈 짧은 판규도 서울대의 의미 정도는 안다. 늙은 기생의 딸인 춘향이 이 악물고 뻐팅긴 이유와 똑같은 것이다. 


 비디오가 계속 돌아간다. 당시 에로물의 특징은 외국 애들이 많이 나온다는 거다. 가슴 좆나리 크고 금발에 파란 눈. 부산 가면 있다던데. 열나 비쌀 거 같다. 수연이년은 현실적인 년이다. 백수건달인 나와 서울대생 박형진. 만약 택한다면 누구를 택할까? 비디오가 끝났다. 암스테르담인지 어디서에서 찍었다는 거다. 개세끼들. 어차피 이불 뒤집어쓰고 방안에서 하는 거, 부산에서 하면 어떻고 암스테르담에서 하면 어떤가. 동네 모텔에서 하면 어떻고 서울대 주변 모텔에서 하면 어떤가. 하여간에 좆같다.


 잠이 설핏 들 무렵. 벌컥, 문이 열린다. 판규는 벌떡 일어나 불을 켠다. 수연이 들어오는 꼴이 심상치 않다. 비틀거리다가 고꾸라진다. 술 마셨냐? 수연이 게워댄다. 수건에 물을 묻혀 닦어 주려고 했는데 토사물 가득한 수연의 입에서 우려했던 말이 튀어나왔다.


 우리 헤어져.


 그리고 또 토를 한다. 번쩍 들어서 변기 앞에 앉혀놓고 밝은 불에 다시 보니 수연의 얼굴은 아까보다 더 엉망이다. 그 새끼랑 술 마셨냐. 마시려면 곱게 마실 것이지. 내가 그 새끼 면상에 면도칼이라도 꽃아주랴? 그러지마.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정신 똑바로 차리고 다시말해봐. 뭐?

 나 사랑에 빠졌어


 씨발. 괜히 같지도 않은 비디오 보면서 같지 도않은 생각을 해서 말이 씨가 되어버렸다. 왜 그냥 씹질을 씹질자체로 만족하는 인간들이 줄어드냐 이 말이다. 이제 갓 스무살 단 년이 서울대와 큰 차와 보장된 미래에 흔들려야 하느냐 이 말이다. 싸대기를 날릴까. 씨바, 하지만 술 취한 년 때리는 건 아무래도 간지가 안 난다. 나도 좃달린 사내인데.


“우리 헤어지자고. 나 사랑에 빠졌다고.”

“야이 쌍년아. 그게 무슨 사랑이야? 서울대 소리에 벌렁벌렁 대는 거 아냐? 씨바. 야 이 수연!!!! 너 아니라고 몇 번 엄창깠어? 그래놓고 이제와선…너 뒷통수 제대로 깐다!”

“약속했잖아! 우리 둘 중 누군가 진짜 사랑에 빠지면 놓아주기로.”


 판규는 후후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 알았다고. 모텔 방 스탠드를 집어 들어 바닥에 내팽겨쳤다. 알았다고! 씨발. 그리고 깨진 유리조각으로 그대로 손목을 그었다.


 119 구급대에 실려 가면서 수연은 울부짖었고 판규는 웃었다.


“야 이 미친 새끼야!”

“아씨. 숨이 끊어졌어야, 그래야 간지 나는데~”


                                 ***


 조 형사고 김 형사고 할 것 없이 인상이 써졌다. 자살 사건은 수없이 접해봤지만 자살 시도 직후 구급차에서 웃었단 소린 처음이었다. 소름이 끼쳤다.


“그러니까, 김판규는 전에도 자살 시도가 있었던 거였네요?”

“두어 번 더 있었어요. 이수연이 헤어지자고 할 때마다 맥주병으로 팔목을 그어댔죠.”

“상습 자살 시도라”

“그래서 이수연은 판규 새끼랑 헤어지지 못했어요. 십년간. ”


 김형사는 이어지는 규원의 이야기를 들으며 살짝 눈을 감았다. 몇 번째 자살 시도 때인지는 몰라도 병원 응급실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입술이 부르터서 누워있는 판규 옆에 수연이 지친 듯 앉아있었다. 건조한 판규의 입술이 천천히 또박또박 벌려졌다.


“우리 둘 다 철 없을 때 만났잖아. 그래서 그런지 너 없인 어떻게 살아야 될지 모르겠어”

“븅신아. 니가 이런다고 내가 돌아오는게 아니잖아.”

“알아. 아는데, 씨바. 사람맘이 맘같지 않다. 씨바.넌 내 첫 여자였잖아. 난 니 첫 남자고.”

“약속하께. 내가 누구랑 결혼하든...결혼식 전날 밤엔 너랑 있으께...평생 내가 니 여자란

증거로...“


 이렇게 졸라 유치한 맹세에 왜 눈물이 날까. 김판규. 너도 끝났구나. 하면서 판규는 수연의 손을 꽉 잡았다. 결혼식 전날 함께 있겠다는 건 수연의 맹세였구나. 응급실 문이 닫히면서 수연도 일어나고 김형사와 조형사도 일어났다. 판규는 이번엔 정말로 자살한 것일까? 그렇다면 그 온몸의 타박상은 뭘까? 타살이라면 누가 죽였을까? 안개가 가득한 밤길을 조형사와 김형사는 말없이 걸었다.



 6. 고백


 은정은 한때 작은 건설 회사의 경리였다고 했다. 여상을 나와 처음으로 취직한 직장이었으나 별로 흥미는 없었다고 했다. 그럭저럭 일 년쯤, 그 직장에서 뒹굴다 다른 직장으로 옮겨봤지만 별반 다르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다 직장을 그만두었고 연애도 했다. 그렇지만 남자가 이 년 만에 자기를 차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해버렸다. 그 때 여고 친구 수연을 만났다. 지금이라도 대학에 가렴.  지방 전문대 치기공과는 수능 반띵만 해도 들어가. 나도 그랬거든.  졸업만 하면 내가 널 부사수로 써줄께.  수연은 치기공계에서 제법 잔뼈가 굵어있었다.


 수연은 직장 사수로서 더할나위없이 완벽한 기술과 리더십을 갖췄지만 사생활은 그러지 못 했다. 퇴근 후 소주한잔을 하자고 하면 은정은 각오했다. 형진과 판규 사이에서의 갈등에 대해, 가끔씩은 여동생 지연에 대한 케케묵은 죄책감에 대해 카운슬링을 해줘야했다. 역시 세상에 공짜는 없어.


 귀에 신물이 날 지경에 수연은 청첩장을 건네왔다.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결혼식까지 내처 달려갔다. 하지만 이상했다. 신부대기실에 새초롬하게 앉아있는 신부.

수연이 아니었다.


 비록 들러리들에 하객들에 사진촬영에 치여 제대로 대화 한 마디 나눌 수 없는 상황이었다지만 은정은 알 수 있다. “너 이수연 아니지?” 라는 질문이 목에까지 올라왔다. 그것은 거울로 봤을 때와 실제로 밨을 때의 차이처럼 미세한 차이. 그러나 분명한 차이였다. 그런 걸 나비 효과라고 한다지. 북경의 나비가 펄럭이면 캘리포니아에선 폭풍이 칠 수도 있다는 이야기.

 저 미묘한 차이가 두 사람 인생의 파열을 가져올지도 몰라. 아무 근거도 없었지만 그 생각은 은정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조형사와 김형사가 기공소에 찾아왔을 때 은정은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뭔가 사건이 일어날 것 같아 근질근질하고 좀이 쑤시던 상황이 종료됐기 때문이다. 수연과 지연에 대해 아는 모든 것을 말해달라고 한다. 은정은 다방에 궁둥이를 붙이기가 무섭게 이 이야길 쏟아냈다. 수연이 지연을 찾아가 모든 비밀을 이야기한 시점. 바로 그 부분부터.


                                        ***

                                                                                

 “언니 왠 일로 우리 회사 앞을 다 왔어?”

 몸에 딱 달라붙는 유니폼에 생머리를 흩날리며 지연이 다가왔다. 서울대 비서학과를 졸업하고 에너지관리공단의 회장직 비서로 일한지 십년이다. 이제 찾아온 사람의 눈치만 봐도 그가 뭘 원하는지 단박에 눈치 채는 짬밥이다. 언니 수연은 수척했다. 니스 자국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작업복 차림이다. 얼굴은 두려움으로 가득 차있다. 뭔가 나한테 잘못을 해도 크게 했구나. 아니면 사고치고 돈 꿔달라는 건가. 두 해 전에도 지연의 돈을 빌려 기공소를 차렸다가 크게 말아먹은 적이 있었다. 언니와 내가 일란성 쌍둥이가 맞을까. 지연은 여전히 언니가 챙피하다. 다방 안에 남자 손님들이 흘깃흘깃 자신의 가슴과 엉덩이를 훔치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얘기할 게 있어서”

“뭔데?”

“나 조만간 상견례하려고.”


지연은 웃었다.


“이 바보야! 어제 얘기했잖아? 너 치매니?”

“근데 그 전에 너한테 털어놓을게 있어서”

“뭔데?”

“…….” 


 수연은 오랫동안 고민했다. 만약 결혼에 앞서 상견례라는 제도가 없다면. 그래서 신부가 외동딸인지 쌍둥이 자매가 있는지 확인하는 제도가 없다면. 그래도 지연에게 비밀을 털어놓았을까. 대답은 예 이면서 동시에 아니오다. 형진과 얽힌 수연과 지연은 풀로 붙여진 종이와 같다. 한 장을 찢으면 나머지 한 장도 동시에 찢어진다. 그러기에 10년을 망설여왔다. 이제는 어쩔 수 없다. 러시아에서 공수된 불꽃들이 여의도의 하늘을 색색으로 수놓던 날. 형진이 느닷없이 수연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웠다. 나랑. 결혼해줄래?


 “진작에 얘기했어야 했던건데…나도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거든.”


바로 옆 테이블에서 김형사와 조형사가 숨을 죽이고 있다. 은정에게 속삭이듯 묻는다.


“다 털어놨놔요?”

“그럼요. 그 수밖에 없잖아요! 사실 수연이가 얘기 안한 건 제 탓도 크거든요. 전 항상 그랬어요. 야. 남녀 사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괜한 거 얘기했다가 자매끼리 의 상하지 말고 그냥 무덤까지 가져가. 설마 형진이랑 결혼하겠냐?”

“설마가 사람 잡는 때가 왔군요!”

“그러니까요!”

“이지연은 그 사실을 전혀 몰랐대요?”

“네”

“듣고 울었나요?”


 순간 옆 테이블에서 자지러지게 웃는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연이었다.

맞은 편 수연은 눈이 똥그래져서 맥없이 지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딸국. 너무 놀란 나머지 딸국질이 또 그녀 입에서 터졌다.


큭큭. 지연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피아노의 높은 ‘솔’음의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 진짜 웃긴다. 왠일이래~ 정말 언니답다, 언니다워! ”

“기분. 딸국. 안 나빠?”

“기분이 왜 나빠? 언니가 걜 카바해줘서 내가 그나마 정신차리고 재수할 수 있었던 거

아냐? 사실 귀찮았어, 걔!”

“그래도 그땐 좋아했잖아. 딸국”

“아유, 다 호랑이 파이프 물던 시절, 소꿉 장난 할 때 일인데, 뭘~ 그 뒤로 남자가 백 만명은 바뀌었는데. 전혀 신경 안써도 돼, 전혀!”


 딸국질은 멈추지 않았지만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아주 오래 전에 알았던 사람을 다시 만나서 안부를 확인하고 정을 나누는 기분이었다. 서먹함은 금세 사라지고 오래전에, 형진을 알기 전에 쌓아두었던 자매의 친밀감이 회복되는 순간처럼 느껴졌다. 수연은 만족스럽게 읽은 계약서에 인감도장을 찍는 기분으로 마지막 확인을 한다.


“니 형부가 될 텐데 괜찮아?”

“형진인…아니 형부는, 모르지? 내가 중간에 언니로 바뀐 거?”

“응. 모르지 ”

“ 그럼 됐어. 나도 다 까먹었어~”


 지연이 티 없이 웃었다. 수연도 따라 웃었다.


“딸국. 근데 너…….”


 수연의 진지한 목소리에 지연도 웃음이 멈춘다. 하지만 한참을 뜸들이던 수연은 아니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악수했다.


  상견례가 진행되는 레스토랑 내부는 정원의 과장된 화사함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무겁고 진득한 공기가 실내에 착 가라앉아 있었다.  혼자서 힘드셨을 텐데 따님들을 곱게 키우셨어요. 어디 가서 아버지 없는 애들이란 소린 안 듣게 하고 싶었거든요. 양가 어머니들은 형식적인 이야기를 예의 있게 나눴다. 형진의 아버지는 말을 섞을 사람이 없어 헛기침만 계속 했다.


 분위기를 주도해야 된다는 책임감에(수연은 언제나 그 책임감에 눌려있다) 수연은 계속해서 밝은 화두를 찾아가며 대화를 진두지휘했다. 그 옆에 다소곳이 앉아 차만 마시는 지연은  유행과는 전혀 상관없는 블라우스에 요즘 유행하는 치마 길이보다 한 뼘은 더 긴 스커트를 입고 있었고, 메이크업도 눈에만 조금 신경을 썼을 뿐, 나머지는 거의 손대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첫눈에는 별로 인상적이지 않지만 자꾸 눈길이 가는 그런 스타일이었다. 형진이 때때로 흘깃 흘깃 지연을 보는 걸 수연은 놓치지 않았다.  며칠 전에 수연은 자기에게 쌍둥이 여동생이 있다고 형진에게 털어놓았다. 폭주족 뒷꽁무니나 쫓아다니며 외박을 즐기는 동생이 챙피해서 그동안 존재를 숨겨두었다고 했다.


 말도 안돼! 진짜 자기한테 동생이 있다고? 정말? 


 그러니 처음 보는 쌍둥이 동생이 형진은 신기할 수밖에. 하지만 과연 그 때문일까. 혹시 처음 보는 게 아니라는 걸 눈치 챈 것은 아닐까. 수연의 입은 쉴 새 없이 우스개 소리를 만들어내느라 시선은 형진과 지연을 번갈아 살피느라 정신이 없다.


 지연이 화장실에 간다고 일어서고 잠시 뒤 형진도 일어섰을 때엔 좌불안석이었다. 수연도 일어나서 둘의 뒤를 쫓고 싶었다. 하지만 둘은 금방 들어왔다. 따로 따로. 수연은 긴 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상견례가 끝난건지, 아니 시작이나 했었는지 제대로 기억하지 못할 정도다.


                                        ***


 잔뜩 긴장했던 상견례가 끝나서 수연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점심도 거르고  곱창 밴드로 머리를 짬맨 채 인조 치아를 윤내는 데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은정이가 어깨를 툭 친다. 야. 누가 왔는지 한 번 봐라.


 판규였다. 삼 년 만에 가죽잠바를 입고 수연의 기공소에 나타난 판규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전의 방자한 냉소는 화로 위에 내리는 한 점의 눈처럼 흔적도 없이 냉큼 사라져버린 얼굴이었다.


 은정과 함께 고등학교 동창 삼인방은 신림동 곱창골목으로 건너가 소주를 마셨다.

은정은 난데없는 판규의 출연에 잔뜩 긴장해있는 눈치였고 그래서 소주잔을 평소보다 자주 부딪쳤다. 잔이 한 다섯 순배쯤 돌았을 때 은정은 상위로 고꾸라졌다. 판규는 어디서 들었는지 수연이 결혼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곱게 보내줄 수 없다며 눈을 부라렸다. 수연은 기가 막혀 허 웃을 뿐이었다.


“야. 이 쓰글놈아! 진짜 너 쿨하지 못하다. 뭘 또 협박하려고 그래?”

“그냥 못 넘어가겠어! 니가 다시 내 여자 못 되는 건 상관없는데...니가 나 없이 행복해지는

꼴은 못 보겠다.”

“너  자살 시도 세 번 했던 애 맞냐? 보통 죽을 고비 넘기면 철이 든다던데”

“다 이야기한다! 그 샌님한테! 댁이 사랑했던 건 니가 아니라 니 동생이었다고”


수연은 깔깔댔다.

“너 왜 그렇게, 귀엽니, 인간아~ 그 남자 내 동생이랑 있던 시간보다 백배는 넘은 시간동안

나랑 있었거든“

“그래도 남자는 그게 아니야, 첫 사랑이 얼마나 각별한데”

“너랑 무지하게 안 어울리는 멘트거든. 술 마셔, 인간아!”


 수연은 속으로 생각했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다. 형진을 찾아가서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도 남을 만한 인간. 위속으로 소주가 떨어지는지 핏물이 떨어지는지 구분이 안갔다. 어지러움을 핑계로 수연은 눈을 감았다. 지금 결심하지 않으면 더 힘들어진다.


형진에게 직접 이야기해야겠다. 고백해야겠다.


                                        ***                       


 거실에서 혼자 와인을 홀짝이던 형진은 초인종 소리에 깜짝 놀랐다. 이 밤중에 누굴까. 인터폰 모니터에 풍선처럼 부푼 입술이 떴다. 수연이 카메라에 뽀뽀하듯이 입술을 내민것이다. 술 좀 마셨구나. 고교 동창들 우연히 만났다고 하더니. 형진이 현관문을 열어주자 그녀가 비틀대며 걸어 들어왔다.


“왠 일 이야?”

“왠 일은~ 우리 자기 보러오는데 이유가 있나?”


 특유의 애교를 부리던 수연은 갑자기 형진의 얼굴앞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털어놓을 말도 있고.”


수연은 형진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하지만 불콰한 술냄새에 절로 형진의 얼굴이 찌푸려졌을 뿐이다.


“술 적당히 마시라니까. 왜 항상 떡이 되도록 마셔? 자긴 여동생이랑 자기랑 왜 그렇게

틀려?“


수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뭐?” 

“자기 동생을 봐! 조신하고 여성스럽고 당신도 옛날엔 그랬다고! 당신 동생은 좋게 변했는데 당신은 왜 시간이 지날수록 비틀려가?”

“뭐, 비틀렸다고?”

“또 삐졌어? 미안, 내 말은…….”

“아냐. 됐어.”


수연은 숨을 깊게 내쉬었다. 침착해야한다.

일단 결단을 해야 했다. 고백은 무리다. 형진은 지연을. 내 동생을. 아직도. 좋아하고 있다. 이 와중에 나와 바뀌었다는 사실을, 실은 그녀가 원래의 나이며, 나는 그동안 그녀인 척 연기를 해왔다는 사실을 말한다는 건. 아니다 싶었다.


 “자기 할 말 있다면서? 뭐 털어놓는다며?”

“아냐. 내가 무슨 말을 하겠어. 그냥 보고 싶었다고. 잘자.”


형진이 따라 나가려는데 나오지마. 문을 쾅 닫고 수연이 나갔다.



                                      ***





 은정에게서 이야기를 듣고 온 조 형사는 마음이 불편했다. 할 수만 있다면 얽혀버린 실타래를 날 선 가위로 싹둑 잘라버리고 싶었다. 녹음해 온 은정의 진술을 이어폰으로 귀에 꽂은 채 조 형사는 바퀴 의자를 뒤로 제꼈다. 경찰서에서 밤을 지새우고 나면 다음날이 무척이나 버거운 요즘이었다. 안대로 눈을 가려도 사무실의 건조한 형광등이 불빛이 노화된 피부 속으로 기분 나쁘게 파고드는 건 막지 못했다. 겨우 잠이 들었을까. 때르르르르르르릉, 요란한 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김형사였다.


 “선배님. 선배님!!!”


목소리가 하도 화급해서 조형사는 의자채로 뒤로 넘어갈 뻔했다.


“왜?” 

“DNA 결과 나왔는데요. 김판규의 몸에 묻은 피요! 그거 김판규 꺼만 있는게 아니랍니다. 박형진의 피도 있데요!“

“박형진?” 

“네에. 그리고 그 두 사람 발리 행 비행기는 커녕 그 어떤 국제선도 안 탔어요! 지금 국내에 있다구요!”


조 형사는 똑바로 앉았다. 안대를 벗어 집어던지며 소리쳤다.


“빨리 그 쌍둥이 동생 불러들여!”


                                 ***




 제주 중문 단지의 호텔 바에서 형진과 수연은 마티니 한잔씩 놓고 음악을 듣고 있었다.

수연은 그렇게 어지럽게 계통 없이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약물이나 알코올의 도움 없이도 일종의 몽롱한 환각 상태에 도달할 수 있는 듯 싶었다. 모든 자극에 둔감해지고 추억은 강 건너의 불빛처럼 희미해지고 ‘자아’라는 골치 아픈 존재를 나만의 탑에 가둘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수연이 속삭였다. 자기. 형진은 편안하게 풀린 눈으로 봤다.


“아직도 지금 이 자리에 나말고 지연이가 있었으면 해?”

“또 그 소리. 솔직히 이야기할게!”

“자기야 말로, 그 소리, 맨날 솔직하대, 대체 솔직하지 않은 얘긴 뭐야?”

“진짜, 진짜 솔직히! 결혼식땐 약간 흔들렸어! 그래, 얘랑 그냥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 정도?”

“그게 약간이야?”

“하지만 신혼 여행하면서 그런 미친 생각한 거 완전히 후회하고 있다니까!정말 자기밖에

없어! 몸에 딱 맞는 옷을 입은 느낌이랄까? 정말 나랑 자기는 짝으로 태어났어. 신혼여행에서 그걸 느꼈어”


그녀는 느꼈다. 형진은 진심으로 말하고 있다. 


“대체 어떤 부분이 그렇게 좋았는데?”

“모두가. 우린 두 개의 톱니바퀴처럼 딱 들어맞어.”


무서울 정도다. 왜 저렇게 우리 둘이 잘 맞는다는 걸 강조할까. 형진의 눈빛이 심상치 않게 바뀌었다. 그가 제안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바다 보러 나가까?”


                                       ***


강력계에 지연이 뛰어 들어오면서 소리쳤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조형사가 받아친다. 두 사람 어딨어요? 

몰라요.

빨리 말해요! 당신 언니가 위험하다구! 

지연의 표정이 휑 비어버린 빈집처럼 창백해졌다.


                                        ***





"바다? 지금 이 시간에? "

“응.”

“하루 종일 봤으면서 또 봐?”

“제주도는 밤이야, 제주도의 푸른 밤도 몰라? ”


                                        ***



지연이 귀에 핸드폰을 대고 있는 걸 조와 김이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이 급한 상황에서도 핸드폰 너머 아가씬 침착했다.


 “지금 고객이 수화기의 전원을 꺼놓은 상태이오니”


탁. 폴더 전화기를 끊으며 지연은 언니와의 대화를 생각했다. 수연이 모든 걸 털어놓던 날. 악수를 하고 나서 수연은 물었다.


“ 형진이 완전히 잊었지? 진짜 형부 되도 신경 안 쓰이지?”

"응"

"완전히?”

“완전히?……!"

“왜 아무 말 안 해?”

“언니 혹시 이디스 워튼이라는 미국 작가 혹시 알아?”

“그딴 걸 내가 어떻게 아니?”

“그 사람 소설에 이런 말이 나와. 여재라는 존재는 방으로 가득한 저택같은거에요. 거기에는 사람들이 오가는 복도가 있고 손님을 접대하는 응접실도 있고 가족들이 함께하는 거실도 있지요. 그러나 그것들 너머에는 전혀 다른 방들이 있답니다. 누구도 문고리조차 잡아보지 않은, 아예 그런 방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안다 해도 어떻게 가야 하는지를 모르는 방...”

“그 방에…형진씨가 있다는 소리야?”


지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


 한 밤중의 주상절리 절벽은 끝없이 추락할 것처럼 깊고 어두웠다. 저 아래 철썩이는 파도 소리는 지옥의 입구에서 나는 듯 했다. 이런 소스라치는 밤바다로 왜 나오자고 한걸까. 수연은 난간에 기대 절벽 아래 바다를 내려다보는 것만으로 어떤 짐승을 절벽 아래로 밀어 뜨리는 기분이었다. 누군가 그런 자태의 수연을 봤다면 난간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꼴이다. 살짝 밀기만 해도 떨어질.


 형진은 인스탄트 커피를 양손에 든 채 호텔에서 나왔다. 수연이 있는 주상절리 쪽으로 향하다 호텔 주차장에 세워진 차 한 대를 보고 발걸음을 멈췄다. 아니 저절로 멈춰줬다. 흰색 소나타였다. 며칠 전 그 밤에도 그를 괴롭힌 건 흰색 소나타였다.


                                        ***


 흰색 소나타 밖에서 형진은 멀뚱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다가가고 있었다. 차 안은 어렴풋이 형태로만 보였다. 판규와 수연의 카섹스. 수연의 두 손이 유리창안에 딱 달라붙어있었고 판규는 수연의 엉덩이뼈를 두 손으로 잡은 채, 그녀의 몸속으로 파고 들고 있었다. 수연은 울면서 저항하고 있었다. 하지만 형진이 밖에서 보기에 수연은 즐기고 있는 듯 했다. 


                                        ***


 형진의 눈동자가 부르르 떨린다. 절벽에 매달려있는 수연 쪽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천천히.


                                        ***


 흰색 소나타에서 뒷걸음질 쳐서 형진은 방에 들어왔다. 수연이 있어야할 신혼 방으로. 수연이 놀란 눈으로 자길 쳐다봐주고 있길 바랬다. 자기야. 지금 어디 다녀와? 하면서. 하지만 침대는 텅하니 비어있다. 분명해졌다. 흰색 소나타 안에서 환희에 몸부림치는 그 여자는 수연일 확률이 더 높아졌다. 아마 결혼식도 같은 이유로 늦었을 것이다.


 형진은 장롱을 발로 차며 광분했다. 짐승 같은 소리가 절로 나왔다. 눈동자에 핏줄이 터졌다. 침착하자. 마지막으로 확인하자. 잘못 본 거 일 수도 있잖아. 거실 창으로 밖을 다시 내다봤다. 흰색 소나타에서 여자가 내던져지듯 떠다밀려 나오고 있다. 수연이었다. 형진은 길게 심호흡하고 침대위에 가만히 누웠다.


                                        ***


 수연은 어두운 절벽에 완전히 친숙해졌다. 외줄 통나무 난간에 배를 포개고 상체를 절벽 아래로 숙인 채 흥얼거리고 있었다. 떠나요. 제주도. 혼자라고 느껴질 때엔. 그런 수연의 두어 발치 뒤로 형진이 다가오고 있었다.


                                        ***       

“어디 갔다 와?”


판규의 차 안에서 내던져져 자신의 옆에 누운 수연에게 형진이 물었다. 수연은 잠이 안와서 티비를 보고 왔다고 했고 형진은 그녀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다시 코를 골기 시작했다. 그녀는 슬픔도 기쁨도 느낄 수 없는, 일종의 감각정지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화장대를 뒤지기 시작했다. 수면제가 어디 없을까? 방 안 모든 게 낯설었다. 화장실 가는 것처럼 일어나 건너 방으로 갔다. 수면제는 커녕 약상자 비슷한 것도 없었다.


 방 한 켠에 곱게 놓인 트렁크 가방 두 개가 보였다. 신혼여행 용 가방이다. 저 안엔 있을지도 몰라. 그녀는 트렁크 가방을 쓰러트려놓고 짐승처럼 엎드려 수면제를 찾기 시작했다. 언젠가 약국에서 조제한 듯한 감기약이 나왔다. 제일 작고 동그란 주황색 알약. 수면제지. 물도 없이 그녀는 꿀꺽 삼켰다.


 수연이 새근거리며 잠이 들자 형진은 벌떡 일어났다. 


                                       ***


 수연은 아예 난간을 넘어갔다. 난간에 등을 기댄 채 절벽 아래 밤바다와 바닷바람에 몸을 내맡긴 듯 했다. 뒤에 형진이 서있는지도 모르고 나긋하게 서 있었다. 그런 수연의 등을 향해 천천히 형진의 손이 다가갔다.


                                        ***


 흰색 소나타는 여전히 서있었다.

야구방망이가 땅에 질질 끌리며 천천히 다가갔다. 수연과 관계한 판규는 얼마나 열정적이었는지 바로 곯아떨어져있는 듯했다. 코까지 요란하게 골고 있던 그는 어느순간 눈을 떴다. 둔기가 아스팔트 바닥을 가르는 소리. 본능적으로 살기가 느껴진다. 소리는 점점 커졌다.

판규는 바지를 추려 입고 시동을 걸었다. 동시에 판규의 차 뒷 꽁무니에 도달한 형진은 야구방망이를 치켜들었다.


                                        ***


 주상절리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는 수연의 등에 형진의 손이 거의 다 닿았다. 순간 수연이 돌아봤다. 눈이 동그라진 채로. 갑자기 수연이 휘이익 돌아봤다.


                                        ***


 판규가 차에 라이트를 켰다. 그리고 바로 출발했다. 형진은 서둘러 자기의 차를 향해 뛰어갔다.


                                         ***


  수연은 난데없이 등을 만진 형진을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봤다.


 “깜짝이야! 인기척 좀 하고 오지!”

“이 정도에 놀라, 천하에 이수연이? 딸꾹질이라도 하고 있었음 좋았을텐데”

“딸국질?”

“내 소원이 자기 딸국질 할 때 놀래켜서 멈추게 하는 거잖아. 그러고보니 신혼여행와선 자기 딸국질 한 번도 안 했네.”

“그랬나?”

“행복하단 소린가봐. 근데 왜 위험하게 난간은 넘어가있어?”

“자기도 넘어와봐! 스릴 넘치고 제대로야!”


 형진은 지었다. 그럴까? 난간을 짚고 넘어가려고 했다.


                                      ***

 

 취한 판규의 차가 비틀거리며 먼저 아파트 입구를 빠져 나갔다. 형진의 차는 바트게 쫓았다. 올림픽대로에서 판규는 뒤쫓는 형진의 차를 발견했다. 사이드 미러에 꽉 차 있었다.

그 때 형진의 차가 상향등을 켰다. 판규는 눈이 부셔 핸들을 놓칠 뻔 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사이드 미러에서 형진의 차가 사라져있다. 바로 앞에 있다! 끼익. 브레이크를 밟았다.


 파악, 판규의 상반신이 숙여지면서 차의 속도도 줄어들었다. 형진의 차는 속도를 높이더니 유유히 앞으로 갔다. 그러면서 오른쪽 깜빡이를 켰다. 깜빡 깜빡.


 뭐야! 저 새끼!


 판규는 욕지거리를 해댔다. 하지만 판규의 소나타가 차선 변경이라도 할 라 치면 바로 앞에서 형진의 비엠더블류가 가로막았다. 약이라도 올리듯.


 저런 개이새끼가!


 판규는 오른쪽으로 핸들을 맹렬히 꺾었다. 우측 차선의 택시 한 대가 놀라서 급브레이크를 밟는다. 쌍 시옷이 난무하는 택시 기사를 뒤로하고 소나타가 한강 고수부지로 내려가는 사잇길로 빠져 나갔다.


 끼이익-

 앞서 달리던 비엠더블류도 멈췄다. 비상등도 켜지 않은 채 고속으로 후진하더니 소나타를 따라 고수부지로 내려갔다.


                                        ***


 “얼른 넘어와”


 수연은 재촉한다. 형진은 난간에 한쪽 손을 디디고 몸을 훌쩍 넘긴다. 그런데 깜깜해서 착지할 지점을 미리 봐두지 못한다. 대충 뛰어넘어도 발이 땅에 닿을 줄 알았다. 오른쪽 발은 땅에 가 닿았다. 그런데 왼쪽 발이 허공에 휘청 인다. 말 그대로 절벽이었다. 형진은 절벽 끝에서 균형을 못 잡고 한 발로 흔들흔들 하고 있다. 놀란 수연이 형진의 허리를 안는다.


 형진은 본능적으로 난간에 바짝 기댄다. 순간 수연의 몸이 절벽 쪽으로 홱 돌아간다. 


                                       ***


 한강 고수부지 주차장에 판규의 소나타가 서기 무섭게 그 뒤에 형진의 비엠더블류가 붙어 섰다. 뭐야. 이 쉐에끼야. 여전히 취해 있는 판규가 몸을 가누지 못하며 내렸다. 형진은 늦게 내렸지만 행동은 배로 빨랐다. 그는 야구방망이로 단번에 판규의 머리를 내리쳤다.


 운동 신경이 뛰어난 판규는 반사 신경적으로 피하면서 형진의 손을 잡았다. 야구방망이는

차 지붕을 내리쳤고 그 여파로 형진 손에 상처가 났다. 목장갑의 틈새로 피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형진은 운동신경의 문제가 아니었다. 뼛속 깊이 흐르는 살의가 문제였다. 그는 인정사정 볼 것 없는 박치기로 판규를 쓰러트렸다. 콧대가 부러졌는지 고통스러워하는 판규를 발길질해댔다. 판규가 다시 일어나려고 치면 야구방망이를 휘둘렀다. 그리고 또 다시 발길질. 씨팍새끼. 판규가 저항할 기세도 없이 눈동자가 돌아갔다. 형진은 끝장을 볼 요량으로 야구방망이를 높이 쳐들었다. 


                                      ***       


  수연은 죽었구나 생각한다. 몸이 절벽 아래로 부웅 떠있다. 순간 뿌옇고 희미하던 밤안개가 걷히고 서슬 퍼런 절벽아래 뾰족한 바위들과 파도가 생생하게 보인다. 그 찰나의 시간이 왜 그렇게 길게 느껴지는지는 설명할 수 없지만 비슷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은 어떤 건지 알수 있으리라. 수연은 눈을 감는다. 그 때 불가항력적인 힘에 이끌리듯 수연은 이동한다. 강력한 팔이 수연의 허리를 둘러 바짝 잡아당긴다. 형진이다.


                                        ***


 형진은 야구방망이를 치켜들었다. 한 차례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판규의 머리를 박살낼 기세였다. 판규는 쪼그라들면서 머리를 양팔로 감쌌다. 새된 소리로 중얼거렸다. 잘못했어. 살려줘. 형진이 거친 날숨을 한참 내쉬었다. 마침내 야구방망이를 집어 던졌다. 그리고 말했다.


“야 이 개이 쉐끼야! 니가 뭐하는 셰낀지 뭔지, 내 여자랑 무슨 사이였는지 모르겠는데…

여기까지야, 쒸이바새끼야. 너! 한번만 더 어슬렁거리면 둘 다 깜방에 처넣어버린다, 이 개쉐이끼야. 이런…조까턴 쉐에끼가…….”


 형진은 야구방망이를 집어던지고 자신의 차를 탔다.


                                        ***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하는 수연을 형진이 꼭 껴안는다.


“거봐. 내가 절벽은 위험하다고 했잖아. ”


수연은 형진을 꽉 안는다.

                                        ***


 비엠더블류가 요란하게 출발했다. 판규는 고통에 바동거리다 힘들게 몸을 추스렸다. 차문에 등을 기대고 일어나려 했다. 그때 차 뒷문이 열렸다. 판규는 눈치 채지 못했지만.


 차안에서 누군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판규는 눈치 채지 못했지만. 바닥에 떨어져있는 야구방망이를 들었다. 판규는 눈치 채지 못했지만. 야구방망이로, 뒤에서 판규를 내리쳤다. 팍.판규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7. 목표는 형부다  



 수연은 형진의 팔짱을 끼고 김포공항에 나타났다. 그들 몰래, 조형사와 김형사가 형진의 뒤로 다가갔다. 조형사가 형진을 부른다. 박형진씨!


 형진보다 수연이 먼저 돌아본다. 환하게 머금고 있던 미소가 갑자기 사라졌다. 순간 김형사가 형진의 허리띠를 낚아챘다. 김의 손목 힘에 형진의 상체는 반동으로 절로 숙여졌다.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조형사가 형진의 두 팔을 뒤로 꺾어 수갑을 채웠다. 수연이 팔팔 뛰었다. 어머, 뭐에요? 왜 그래요?


 “박형진씨. 당신을 김판규 살인혐의로 긴급 체포합니다.”


 조가 말을 멈추자 바톤 터치라도 하듯 김이 끼어든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당신이 말하는 모든 사항은 법정에서 불리한 증거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고 경제력이 안 될 경우 국선 변호사를 선임할 수도 있습니다.”


 형진은 차분했다. 마치 이 상황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그러나 그러한 태도가 되려 수연을 자극시켰다.


 “아니, 무슨 소리에요? 누가 누구를 죽였다고! 놔요!!! 놔!!! 놓으라고!!!!”


  격류에 휘말린 보트가 빠르고 어지럽게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

것을 알면서도 누구도 보트를 멈출 수는 없는 상황 같았다. 결국 보트는 자기가 가야 할 곳으로 가서야 안정을 찾을 것이다. 조와 김의 팔뚝과 등판을 때리며 수연은 형진이 고함을 쳐주길 바랐다. 쌍욕이라도 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형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술집의 종업원이 힐끔 힐끔 우릴 봤다. 새벽 세시. 슬슬 정리하고 일어나야할 시간인데

나와 영찬이 목석처럼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종업원의 눈치를 보는 나를 영찬이 나무랬다.


“형! 아무리 늦었어도 얘기는 끝까지 해주셔야죠?

“다 했어. 그게 다야. 그래서 내 친구 형준은 지금 구치소에 있어. 변호사는 학교 선배로 선임했고 재판을 준비 중이지. 변호사는 혐의 사실을 인정하되 정당방위로 가자고……."

“ 에이~ 형. 왜 그러세요. 형도 형준이 범인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계시잖아요!”

“……?”

“.......? 진짜 모르셨어요?”

“아니, 심증으로는 내 친구가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지. 살인을 할 만한 위인이 아니라고. 하지만 물증이…사체에서 발견된 DNA도 형준이고……."

“거야, 자기 와이프를 겁탈한 인간을 야구방망이로 때렸으니까! 그러다 피가 묻은 거구요. 그 정도도 안하면 남자도 아니죠!”


영찬은 슬쩍 내 표정을 살피고 희미하게 웃으며 담배를 물었다. 무례하고 기분 나쁜 태도였지만 영찬에게는 흔한 모습이었다. 딱히 적의가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형은 거기까지예요’라고 선언하는 듯한, 방어적이면서도 공격적인 태도였다.


 “그만 비꼬고. 니 의견을 얘기해봐.”

“범죄학적 통계를 봤을 때요, 야구방망이 같은 둔기로 폭행을 하고 나서 다시 배기가스를 틀고 죽이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야구 방망이를 든 이상 끝을 볼 때까지 휘두르죠. 그리고 다 죽으면 사체를 불태우면 불태웠지 그 위에 배기가스를 틀어놓진 않는다고요."

“짜식. 내 얘기 헛 들었네. 거야 자살처럼 위장하려고…….”

“아니에요 형. 그 남자, 김판규의 사인이 뭐라고 하셨죠? 둔기에 의한 타박사인가요?”


 난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 일산화탄소에 의한 질식사. 분명히 내 입으로 그렇게 얘기했지.


 “그렇담. 범인이 또 있단 소리야? 야구방망이로 때린 뒤에 다시 누군가가……?”

“네. 판규의 차 트렁크 또는 뒷좌석에 타 있었을 거예요. 형진이 경고만 하고 떠났을 때 그 사람은 내려서 범행을 저지른 거죠. 또 둔기를 사용한 범인들은 대부분 둔기를 현장에 놓고 가기가 일쑤죠. 하지만 현장에서 야구방망이가 발견되진 않았잖아요? 진범이 치웠단 소리거든요.”

“아 거참 답답해서…범인은 그럼 누구야? 그 차 뒤에 타있던 사람이 누구냐고? 지연이야? 아님 수연이야?”


 내 조급한 다그침을 놀리기라도 하듯 영찬은 건성으로 대꾸했다.


 “둘 다 에요.”

“뭐?”

“둘 다 아니기도 하구요.”

“지금 장난해?”

 내가 입을 비죽거리자 영찬의 웃음이 폭발했다. 승리감을 한껏 만끽한 다음에야 녀석은 다시 겸손한 후배의 자세로 돌아왔다.


 “기분 나빠하지 마세요. 형. 혹시 ‘페로몬 효과’라고 아세요?”

“페로몬?”

“동물들이 서로 짝 짓기 할 때 동물들끼리만 알아 맡는 냄새를 흘려보낸다는 거는 아시죠?”

“그 정도야 알지”

“사람도, 자기도 모르게. 이성을 향해 호르몬을 분비한다는 이론이에요. 무의식적인 화학신호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죠. 그 호르몬이 딱 들어맞는 사람들끼리 연애 감정을 느끼는 거구요. 물론 페로몬이 맞은 사람끼리만 연애를 한다는 건 아니에요. 허나 페로몬을 제대로 주고받은 남녀가 들러붙으면 좀처럼 떨어지기 힘들다는 거예요. 외부의 힘에 의해선 더더욱 안 떨어지죠!"


“무슨 사람을 동물 암수 컷처럼 이야기하네. 정설이야?”

“이직은요. 그러나 뉴로사이언스, 라이브사이언스 등의 과학 잡지에서 매달리고 있으니까 언젠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이론이 발표 될거에요.”

“넌 그게 사실이라고 믿어?”

“네. 오늘 밤 형 이야기를 들으면서 확신했어요”

“……자꾸 알쏭달쏭한 소리만 할래?”

“자자자. 천천히 정리해봅시다. 페로몬. 그리고 박형진. 이수연. 이지연. ”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녀석은 진지해졌다.


“페로몬은 호르몬이니까요. 맨 처음 자기에게 페로몬을 날려 보내 온 이성은 본능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 거예요. 그 이성을 A라고 한다면 요. A와 똑같이 생긴 백여 명의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단순에 A를 구분할 수 있어요. 페로몬을 분비한 사람은 A! 딱 하나니까."

“김영찬!”


 나는 소름이 끼쳤다. 영찬이 정확히 얘기를 하려는 건지는 몰라도 난 나름대로 어떤 결론에 도달했다. 영찬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내 표정을 읽은 것이리라. 하지만 영찬은 기다리라는 듯 말했다.


“이제 퍼즐의 남은 조각들을 맞춰봅시다. 형은 친구 박형진에게 들은 것만 얘기해줬잖아요! 이제 박형진이 얘기하지 않은 진실의 조각들을 맞출 시간이에요.”

“진실의 조각? 그걸 니가 다 알고 있단 말이야? 내 얘기만 듣고?”

“그래서 형이 절 부른 거 아니에요? 형 우리 프로파일러들은 사건 현장 사진 한 장만 보고도 범인을 본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에요. 물론 오늘도 형이 그 사진을 가져왔다면 형의 그 길고 지루한 얘길 다 듣기도 전에 난 범인을 말했겠지만. 아! 형이 얘길 못 한다는 게 아니라.”

“말 좀 길게 하지마. 대체 그 조각들이 뭔데?”

“너무 많아서 뭐부터 이야기해야할지! 결혼식. 웨딩카. 수면제. 딸국질. 담배. 그리고 상견례 등등등!”


 영찬의 머릿속에 너무 많은 전류가 흘렀는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녀석은 예의 그 기분 나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야길 시작했다.


 “전 먼저 형의 논조를 지적하고 싶어요. 형은 계속해서 지연이 사랑의 피해자인 것 처럼 말했어요.”

“당연하지. 수연이 가로챘고 10년간 비밀로…….”

“일란성 쌍둥이의 유전자 구조는 100% 똑같아요. 동일한 환경에서 동일한 애정을 받고 자란다면 얼굴 몸매 성격 심지어 성적까지 똑같은 게 일란성 쌍둥이라고요. 그런데 수연이랑 지연이는 고등학교때 성격이 달랐어요. 아마 아버지 없이 혼자 쌍둥이 두 딸을 키우기가 너무 힘들어서 어머니가 수연일 외할머니에게 보냈겠죠. 그래서 성격이 잠시 달라진 거예요”

“그럴 수도 있겠군.”

“하지만 근본적으로 둘의 성격은 같아요. 수연이에게 독한 구석이 있다면 지연도 마찬가지라구요. 멀쩡히 살아 숨 쉬는 언니가 없다고 말하고 다니는 게 쉬운 일인가요? 그걸 먼저 지연이 시작했다는 걸 형은 간과했어요.”


 영찬은 잠시 목을 축였다. 머릿속에 복잡하지만 분명한 생각을 그의 말하는 속도가 따라잡지 못하는 듯 했다.


 “천천히 다시 얘기해보자구요. 아. 이번엔 형 말고 제가 얘기할게요. 소설을 쓰겠다는 게 아니랍니다. 형의 이야기를 재구성 하는 건데요. 앞 뒤 문맥상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이야기고…또 그게 논리적으로 맞는 부분이죠. 형이 들으시면서 그건 아니다 싶은 부분에선 언제든 끊어주셔도 되요.”

“거 말 많다. 빨리 좀 시작해봐.”

“먼저. 문제의 그 날. 바로 결혼식 날이에요”


                                        ***


 “신랑 신부가 행복의 내일을 향해 힘차게 행진하려고합니다. 하객 여러분들의 아낌없는

축하 부탁드립니다. 신랑, 신부…행진!”


 수연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지연이, 형진의 팔짱을 굳게 끼고 행진하기 시작했다. 뒤에서 도우미들이 나팔로 폭죽을 발사했다. 기다란 오색 테이프와 금빛 은빛 색종이들이 형진의 턱시도에, 지연의 얼굴에 묻었다. 하객들이 신랑신부를 툭툭 건드리며 축하한다고 말했다. 그 중엔 내 모습도 있었다. 지연이 입에 붙은 색종이를 떼면서 나직이 속삭였다. 시선은 하객들을 훑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분명히 형진을 향한 것이었다.


 “꿈만 같아. 너랑 이렇게 다시 걸을 수 있다니…그것도 예식장에서.”


 순간 가뜩이나 굳어있던 형진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이 날 지연은 일생이 하루로 집약되는 것 같은, 무척 나른하고 몽롱하고 긴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객들 앞에서 망신을 당하고, 부주를 되돌려 줘야하는 수고를 격지 않겠다는 양가 부모님의 강력한 의지 때문에 쌍둥이 언니 대신 서긴 했지만 이게 맞나 싶었다. 이게 맞나 싶었지만 기분이 묘하게 좋은 건 또 어쩔 수 없었다.


 인천 공항으로 향하는 웨딩카 안에서 지연은 급작스러웠던 일련의 흐름에 대해 생각했다.

두 달 전이었던가. 낮술에 취한 판규가 그녀 혼자 일하는 비서실로 처 들어온 것은. 도도도도도도독. 지연은 그렇게 다급한 노크 소리는 처음 들어봤다.


"네. 들어오세요~ "


 문이 확 열리자. 술에 취한 판규가 악취와 함께, 그리고 불길한 예감과 함께 들어왔다.


"오오빠! 왠일이세요? "


 지연은 어색했다. 근 십 년 만에 본 언니의 친구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오빠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게. 그리고 십년 전엔 한 번도 오빠라고 불러본 적도 없다는 사실이.


“너, 알고 있었어?”


 판규는 시뻘건 눈으로 지연을 똑바로 노려봤다. 도박으로 전 재산을 탕진한 사람이 상대방의 속임수를 발견했을 때 눈빛이 저런 걸까. 그제야 쫓아 들어온 경비원들이 판규를 끌고 나가려 했다. 판규는 서슬 퍼런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니 언니가 지금… 십 년째… 누굴 만나고 있는지 알아? 대답해! 대답하라고!”


                                        ***


“판규가 형진을 찾아간 게 아니라 지연일 찾아간 거구나!”


내가 물었다.


“그래요. 형. 그래야 결혼식 당일에 지연이랑 판규가 삼십분이나 통화한 게 말이 되죠. 안 그럼 둘이 무슨 이야길 할 게 있겠어요?”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



 형진과 지연은 십년 만에 다시 만났다. 지연이 형진에게 먼저 전화했다. 박형진 회계사 사무소. 판규가 알려준 상호는 인터넷 포탈 사이트에서 정말로 검색되었다.


 도산 공원을 걸어가며 형준은 십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 원시의 숲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경계를 허물어 하나의 덩어리로 합쳐지는 안개 속 풍경과 같았다. 형진은 몽유와 같은 풍경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이따금씩 고개를 돌려 강남 거리를 떼 지어 다니는 차들을 바라봤다.


 십년을 지연과 함께 있었지만 언제나 지연을 그리워했다. 십 년 전 형진을 숨 먹게 했던 그 지연은 오랜 만남에 닳고 닳아 사라져버린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사라진 지연이 전화해온 것이다. 


 회사에서 바로 달려 나왔는지 비서 유니폼을 입은 지연이 바람에 머리를 흩날리며 서있었다. 사람 몸매가 저렇게 다부질 수 있구나. 형진은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 눈물이 가득하다는걸 발견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가 수연이 아니라는 사실을. 형진의 가슴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뛰고 있다는 사실을.  형진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지연도 다가왔다. 한동안 둘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왜 연락이 없었니? 10년 동안?”


 지연이 먼저 물었다. 형진은 바람에 날려 자신의 뺨을 때리는 지연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래, 기억난다. 이 감촉. 뭔가 틀리다 했어.


 “왜 연락이 없었냐고?”


 지연의 눈에 고였던 눈물이 한 방울 흐른다. 형진이 손바닥으로 닦아주며 침착하게 말했다.


 “너무 오래전이잖아. 우린 잠깐 만났고…너도 나를 만난 시간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딴 남자들이랑 보냈을 거 아니니?”

“소주와 첫사랑의 공통점, 알아?”


 지연은 동문서답을 했다. 그러자 마치 짜기라도 한 듯이 형진도 그녀의 말에 다시 동문서답했다. 둘은 서로의 이야길 듣지 않고 각자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땐 널 분명히 좋아했었지만.”

“나중에 아무리 취해도 첫잔의 느낌은 절대 잊을 수 없다는 거야”

“지금은 니 언니를 사랑하고 있어.”

“언니를 통해서 날 사랑하고 있는 거야.”

“그랬다 하더라도…돌이킬 순 없지.”

“말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지난 십년 동안 내가,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그건, 그건 알고 있었으면 해. 그리고…….”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울먹이는 것 같았다. 그녀가 그렇게 나오자 형진의 마음은 이상하게 더 차가워졌다. 그 역시, 사귀던 여자가 갑자기 변한 것 같아 홀로 온갖 억측을 해가며 마음의 지옥을 겪은 바 있었다. 그러니 그녀가 지난 수 년 동안, 얼마나 심사가 어지러웠을지 가늠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고통을 가늠할 수 있다고 해서 당장 모든 자초지종이 설명되는 건 아니었다. 어디서부터 꼬였고 어디서부터 잘라내야 할까.


 며칠 후 수연이 지연을 찾아와서 사실대로 고백했다. 그리고 또 며칠 후 상견례가 있었다.  지연은 지나칠 정도로 수수하게 입고 나왔다. 그리고 지나칠 정도로 형진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리하여 형진은 지연을 흘끔흘끔 볼 수밖에 없었고 수연은 그런 형진이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여자 화장실에 들어가는 지연의 어깨 죽지를 형진이 과감하게 잡았다. 지연은 화장실 개인 칸으로 떠밀려 들어갔다. 형진의 혀가 지연의 입술 사이로 밀고 들어가 그녀의 혀를 찾았다. 십년간의 공백이 두 사람의 혀끝으로 연결됐다. 지금 이 순간을 아주 오래 기억하고 자주 반추하게 될 거라는 것, 상대 역시 그러리라는 것을 둘은 아무 의심 없이 긍정했다.


아.


 탄식이 그녀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그 탄식의 발원지는 어디였을까. 폐에서 성대를 통해 치밀고 올라온 것일까. 아니면 그녀의 뇌에서, 마치 눈물이 코와 입으로 흘러들듯이, 그렇게 새어나온 것일까. 형진의 혀가 더 격렬하게 그녀의 입술 사이를 헤집고 그녀의 잇몸을 훓었다. 둘의 혀는 서로 얽혔다.


“사랑해.”


 형진이 말했다. 지연의 숨소리는 거칠다. 형진은 말을 이었다.


“한 순간도 널 잊은 적 없어.”


 지연의 숨소리는 더욱 거칠어졌다. 형진은 괴로운 듯 말했다.


“우리 이제 어떻게 해?”

“어떡하긴, 사랑한다며?”

“니 언니랑 헤어지란 소리야? 이제 와서?”

“먼저 잘못했잖아, 언니가!”


 지연이 형진을 꽉 껴안았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침이 얽힌 혀 사이로 빠져나와 형진의 입가로 흘렀다. 형진은 왼손 엄지손가락으로 그 침을 닦았다. 얽혀 있던 혀들이 풀려 제자리로 돌아갔다. 형진이 말했다.


 “이제 가야돼. 수연이가 이상하게 생각할거야”


 여자 화장실에서 손을 씻던 수연은 거울로 개인칸막이 안의 두 사람의 발을 보고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성큼 떨어졌다. 하지만 얼른 닦고 밖으로 나왔다.


 예식장에서 형진은 신부 대기실에서 초조하게 발을 굴렀다. 시댁 식구들에겐 수연이 거의 다 왔다고 적당히 둘러댔지만 수연의 어머니를 진정시키는 게 힘들었다.


“누구랑? 이 미친년이 누구랑 술 먹었기에…어디서 뻗어있다는 거야? 지 결혼식에…이게 말이 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게 무슨 지랄 같은 상황이냐고!”





 수연모의 메이크업을 해주던 아가씨가 거울로 흘금 봤다. 지연의 이모가 그 시선을 의식하고 귓속말을 했다. 언니. 일단 침착해. 남들 다 듣겠어.


“지금 이 상황에서 침착이란 말이 나와?  하객들 떼로 몰려올 텐데, 이게  무슨 개망신이니? 어이구 박 서방…내가 쥑일 년일세. 딸 년 하나 간수 못한 내가 쥑일년이야.”

“아닙니다. 장모님. 이모님 말씀대로 일단 숨 좀 돌리세요,”


 그 때였다. 형진의 귀를 의심하게 한 소리가 지연의 입에서 새어나온 것이.


“내가 식에 들어갈게.”


 형진은 황급히 지연을 봤다. 하지만 지연은 일부로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뭐어? 너 그게 무슨 소리니?”


 이모와 지연 모가 놀라서 물었다. 하지만 눈빛은 반짝이고 있었다.


“망신만 안 당하면 되는 거 아냐? 식만 올리면 되는 거 아니냐고? 면사포로 얼굴 가리면 누가 나랑 언니를 구분하겠어?”

“그럴까?”

“뭐가 그럴까야? 아무리 그래도 인륜지대사인데……!”

“인륜지대사니까 그렇게 해야지”


 이모와 수연모의 토론은 거기까지였다. 그들은 더 이상 지연을 말리지 않았다. 되려 지연을 말리는 형진을 말렸다. 신부대기실을 걸어 잠그고. 지연은 드레스를 입었다.


 “신부입장!”


 지연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입장했다. 멀찌감치 형진이 서 있는 모습을 보자 지연은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십년 전 꿈꿨던. 그리고 그 이후 수도 없이 되새김질 했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차피 추억은 연속이 아니라 순간으로 새겨져 남는다면. 지금이 그 절정이었다.

                                              ***


 “죄송하지만 저희 영업 끝났거든요”


 점원이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짜증내며 다가왔다. 그러나 영찬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참. 형 구치소에 들러서 박형진은 만나보셨어요?”

“좀 전에. 실은 구치소에 들렀다가 여기 오는 길이야”

“어떤 얘길 하던가요?”

“오늘은 왠일로 면회를 두 명이나 오네. 하던데”

“두 명이요? 형 말고 또 누가 왔었는데요?”


                                        ***

 구치소 면회창이 열렸다.

 옥색 수의를 입은 형진은 수염이 더부룩했다. 맞은편 여자는 오래 기다렸는지 여전히 멀뚱한 채로 서있었다. 말없이 여자를 보던 형진은. 한참 후에야 더부룩한 수염사이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입을 벌렸 물었다.


 “누구니?”

“지연이”


 형진은 머쓱해서 웃었다. 이젠 누가 누군지도 헛갈려.


 “괜찮아?”

“괜찮아. 내가 살인을 한건 아니니까. 재판을 믿으니까.”


 지연은 형진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다친 새를 바라보는 아이의 시선이었다. 그 시선이 편치 않아 형진은 말을 급하게 덧붙였다.


 “그리고. 나 마음 정리했어”

“......?”

“사실 요 몇 주, 고민 많았다. 내가 누구를 사랑하고 있는 건지. 상견례는 물론, 결혼식장에서도. 근데 이번 신혼여행에서 확실히 깨달았어."

“신혼여행?” 

“요사이 몇주동안 내 목표는 하나였어. 널 어떤 핑계로, 어떤 형태로 다시 만나느냐.

하지만 제주도에서 생각이 바뀌었어. 이제 내 목표는, 완벽하게……."


지연은 빙긋이 웃었다.


“니 형부가 되는 거야.”


 웃는 얼굴위로 눈물이 똑 떨어졌다.

 지연은 구치소 앞 돌담길을 지나쳤다. 몇 개의 횡단보도를 건너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육교를 올랐다. 그리고 육교 아래로 지나가는 자동차들의 불빛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구치소에서 형진이 마지막으로 한 말을 계속 되뇌었다.


“제주도에서 확실히 깨달았어. 지금 내가 사랑하는 건 내 옆에 있는 사람. 바로 이 사람이란 걸. 변명하지 않을게. 어차피 말로 표현되는 느낌이 아니야. 사실 니 언니를 십년간 사귀면서도 헤맸어. 그래서 널 다시 봤을 때 혼란스러웠지. 그런데 이번 3박 4일 동안…그 헤매임이 끝난 느낌…이제야 비로소 내가 있어야할 곳을 찾은 느낌이랄까. "

 같은 시간은 아니지만 같은 밤하늘 아래 어딘가 나와 영찬도 있었다. 술집에서 쫓겨난 지는 오래였고 우리는 형편없이 취해서 비틀거렸다. 신기한 건 몸을 가누기 어렵게 취했어도 영찬의 사고만큼은 놀랄 만큼 날카로웠다. 그리하여 그 날의 대화를 술이 깬 다음날에도 난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결국 형진이가 수연을 택한 건가? 정이 무서워서?”

“형! 많이 취했구나. 형진은 수연이 아니라 지연을 택한 거죠.”

“이 개새끼가 아까부터 사람을 들었다 놨다 장난하나? 야! 김영찬! 쉽쉐리야.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이냐?”

“형. 형이 때리신다면 전 맞아야죠. 그 전에 제 얘기 좀 마저 들어보세요.”

“그래 얼른 말해. 만약…음…암튼 말해봐. 새끼야”

“제주도에 같이 신혼여행 갔던 여자는 수연이 아니라 지연이에요!”

“뭐?!” 

 

순간 정신이 확 들었다. 시야에 흐릿했던 영찬의 얼굴도 선명해있다. 녀석은 먼저 술이

깨어있었다.


"형! 결혼식 날. 판규와 그 사단이 벌어지고 나서 수연이 돌아온 밤.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그러고 보니 녀석이 그 부분을 들을 때 계속 수면제에 대해 캐물었던 기억이 났다.


“수연이 수면제를 찾다 찾다 못 찾아서 감기약에서 수면제를 골라낸다? 두 가지 의문점이 생기죠. 첫째. 신혼 첫날이고 짐도 그날 정리했는데 약상자를 찾는데 그렇게 오래 걸릴까요?  둘째. 결과적으로 약은 없었죠. 없는 게 자연스럽고요. 수연처럼 활달하고 긍정적인 사람은 수면제 따위를 필요로 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감기약에서 수면제를 골라낼 정도면 여러 차례 수면제를 복용한 사람이에요. 수면제를 그 정도로 필요로 하는 사람 집에 수면제가 없다! 뭔가 부자연스럽지 않아요? 게다가 수연은 첫날밤 옷을 아무데나 던지고 개지도 않았잖아요! 그만큼 털털한 거죠. 그런데 밖에 나갔다 들어와선 그 어둠속에서 옷을 찬찬히 갰다고 하잖아요! 다른 사람인거에요! 게다가 형진이 10년 전에 끊었던 담배를 새삼스럽게 묻고. 평생 하지 않던 멀미를 하고, 달고 살던 딸국 질을 제주도에선 하지 않았던 그녀. 누구겠습니까?"


 지연은 육교를 내려왔다. 보송보송하고 발그레한 얼굴로 취객들이 활보하는 밤거리를 터덜터덜 걸었다. 긴박했던 순간들이 머릿속을 필름처럼 지나간다.


 결혼식 날. 지연은 판규의 전화를 받았다. 판규는 다짜고짜 수연의 집주소를 물었다. 지연은 알려 주기는 커녕 오빠 때문에 내가 오늘 무슨 고생을 했는지 알기나 하느냐고 따져 물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판규의 끈질긴 설득을 귀찮아하다가도. 집주소를 알려주면 언니네 부부는 정말 끝이겠구나 싶다가도. 그러다 어느 순간. 결국 집주소를 알려줘 버렸다.


 “반포에 삼성래미안 129동 204호요...”


 전화를 끊고 다시 누운 지연은 마음이 불편했다. 잠은 들었지만 악몽을 꿨다. 어떤 악몽인지는 나중에도 얘기해주지 않았다. 지연의 눈이 번쩍 뜨였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그녀는 판규에게 다시 전화했다. 하지만 신호만 길게 갈 뿐 받지 않았다. 언니에게 전화해봤다. 찰칵, 받는 소리가 났고. 언니의 짜증 섞인 비명소리가 들리는 듯 했고. 바로 끊겼다. 다시 전화했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지연은 옷을 부랴부랴 챙겨 입고 달려 나가 택시를 잡았다.


지연이 택시에서 내려 달려가고 있을 때 마침 판규의 흰 소나타에서 옷이 거의 벗겨진 채 언니 수연이 내동댕이쳐지고 있었다. 지연은 쓰러진 수연을 감싸 안았다.


 “언니! 어떻게 된거야? 언니. 이 나쁜 새끼야!”


 지연은 달려가 판규의 차 문을 열려고 했다. 그때 수연이 지연을 뜯어말리며 끌어안았다. 


“놔! 놔! 놓으라고!”

“가만있으라고 이년아!”


수연이 버럭 소리 질렀다. 지연은 놀라서 숨을 죽였다. 언니는 이를 악물고 있었다.


 “이 새끼는 내가 끝장을 볼 테니까…너 얼른 우리 집으로 올라가!”

“뭐?”


 지연은 수연이 그 상황에서도 농담을 하나 했다. 하지만 수연의 눈엔 분연한 살기가 있었다. 수연은 지연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더니 자신의 핸드폰을 지연의 손에 쥐어줬다.


 “내 역할 좀 며칠만 더 해줘야겠다.”

“무슨 소리야? 언니 대체 무슨 소리 하고 있는 거야?”

“무슨 소리긴? 다 알잖아! 결혼식 때 내가 됐듯이…제주도에서 나흘만 더 내가 되어줘! 내일 아침에 가기로 했어!”

“싫어!”


 수연은 지연의 턱을 쥐었다.


 “지금 니가 싫다면…나를 언니로 생각 안하고…형진 씨를 형부로 생각 안 한다는 걸로 알겠어."


 지연은 소름이 끼쳤다. 문득 언니가 모든 걸. 자신이 형진을 단 한 순간도 잊지 못했다는

걸 알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올라가. 어서! 제주도 같이 가서, 식장에서 감칠 맛났던 그 아쉬움 달래고 와! 그리고 그 다음에…….”


 수연의 거친 날숨이 멈췄다. 지연은 더욱 집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남자 나에게 넘겨줘. ”


 지연은 결국 뒷걸음질 쳤다. 아파트로 올라갔다. 자는 척 하고 있는 형진의 옆에 누웠다.

우리 애기 어디 갔다 왔어? 잠이 안와서. 그리고 혼자 견디기엔 너무나 버거운 심사를 참지

못해 수면제를 찾아먹고 바로 잠이 들어버렸다. 지연이 잠이 들고 나서 형진은 야구방망이

를 찾아 들고 밖으로 나왔다.      


 방망이를 질질 끌며 판규의 차로 다가가던 형진은 뒷 칸에 수연이 쭈그리고 숨어있는걸 발견하지 못했다. 판규를 뒤쫓아 한강 고수부지에서 놈을 반쯤 죽여 놓고 자리를 뜨고 나서야, 숨어있던 수연은 뒷 문을 열고 내렸다. 수연은 야구방망이를 주워 일어나려는 형진의 머리를 후려쳤다. 혼절했다. 수연은 더욱 무거워진 판규의 어깨에 팔을 끼워 일으켜 그를 운전석에 처넣고는 시동을 걸었다.


 “그래, 판규야! 같이 죽자. 같이 죽으면 되는 거잖아. 형진이한텐 내 동생이 있고…나 같은 날라리 년이 범생이 넘본 게 죄라면 죈 거지. 안 그래? 네 원대로 같이 죽자고.”


 그녀는 차에서 내렸다. 차 뒤로 돌아가서 배기통에 풀과 돌을 잔뜩 구겨 넣었다. 바닥에 버려진 아이스크림 용지와 과자봉지를 접어서 빈틈없이 쑤셔 넣었다. 그리고 다시 조수석에 앉았다. 매캐한 배기가스가 벌써 차안엔 가욱하다. 그녀의 얼굴에서 기침과 딸국질과 눈물과 콧물이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졌다. 한참 후 문이 열렸다. 그녀가 뛰쳐나와 차 옆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차 문을 닫았다. 그녀는 망연자실해서 그 상태로 한참을 차에 기대어 앉아있었다.


 아침이 밝았다. 수연은 화장대 앞에 앉아 있었다.

 드라이기로 머리를 팽팽하게 늘여 트린 수연은 보습효과가 탁월한 기초화장품을 발라서 피부도 윤기가 있었다. 긴 생머리. 하얗고 탱탱한 피부. 수연은 지연처럼 되고 있었다. 


 기시감.

 십년 전에도 똑같은 일이 있었다. ‘지연이 되는 법’이 매뉴얼처럼 생생하게 수연의 머리에 떠올랐다. 띠잉동 이히히히히~초인종소리가 들렸다. 수연은 신경 쓰지 않고 다소곳하게 머리를 빗었다. 다시 들리는 초인종 소리. 띠잉동 이히히히히히~ 화장실에서 수연 모가 소리친다.


 “지연아 뭐해? 좀 나가봐.”


 수연은 일어섰다. 그리고 거실을 가로질러 현관문을 열었다. 조 형사와 김 형사였다. 잠실 수연 집을 허탕치고 난 그들의 얼굴엔 힘든 기색이 가득했다.


 “이지연씨죠?”


 김 형사가 물었다.


“네. 근데 누구세요?”


  라고 수연은 대답했다.


                                         ***


 영찬은 담벼락에 기대고 밤새 마신 술을 게우고 있었다. 나는 성의 없이 몇 번, 녀석의 등을 두들겨주다가 이내 돌아섰다. 그리고 정처 없이 걸었다. 뒤에서 그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녀석이 내게 학습해준 페로몬 효과에 대해 생각했다.

 똑같이 생긴 백 명 가운데서도 페로몬을 분비하는 단 한 명의 사람을 구분해낼 수 있다는 그 대책 없는 이론. 그리고 내 아내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성한 날보다 취해 들어간 날이 많았던 어느 날. 아내에게 물었었다. 허구 많은 사람들 중에 왜 나를 택했어? 불규칙한 수입에 비전도 미래도 보이지 않는 나를? 아내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내 눈은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아내를 찾고 있었다. 내가 그녀라면 하룻밤쯤은 흐드러지게 취하고 싶을 것 같다. 그 때, 뾰족 구두 소리를 내던 여자가 내 옆구리를 부딪치고 사과한마디 없이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욱하는 기분이 상한 우유처럼 냄새를 풍기며 내 몸 어딘가에 들러붙었다. 쫓아가서 그녀의 뒷덜미를 낚아챌까. 하지만 피식 웃음이 터졌다. 상처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고 혐오 없는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거리 한 복판에서 나는 태어나 처음 웃음이라는 걸 발견한 사람처럼 하염없이, 웃고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