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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커스

  • 작성일 2009-02-25
  • 조회수 420

어김없이 서커스단은 떠났다. 아무는 발치에 굴러다니는 굴렁쇠를 집어 들었다. 녹이 슬어 있었다. 서커스단이 버리고 간 거겠지, 라고 아무는 생각했다.

도시 말파르에서는 5월이면 반드시 서커스단을 초청해 축제를 연다. 언제부터 생긴 관습인지는 누구도 몰랐다. 머리가 새하얗게 샌 노인들은 직각으로 꺾인 허리를 두드리며, 내가 어릴 적에도 서커스단은 왔었지, 라며 지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래서 5월이면 서커스단이 온다. 지붕이 빨간 마차를 타고 오거나 등에 한가득 짐을 짊어지고 서커스단이 온다. 으레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단장은 우선 시장과 악수를 나누고 웃으며 혹은 진지한 표정으로 무어라 이야기를 했다. 낮게 속삭이는 그 말드은 어린아이들의 귀에는 잘 들리지 않았다. 들리더라도 물론 의미는 알 수 없었다. 아무나 다른 아이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단 한 마디,

"알겠습니다. 이번 월요일부터 공연을 시작하기로 하겠습니다."

라는 단장의 한마디뿐이었다.

그리고 서커스단은 커다란 천막을 세웠다. 보통은 주황색이었다. 천막의 주위엔 색색의 만국기가 걸리거나 원색의 조합만으로도 깜짝 놀랄 만큼 섬세한 곳까지 표현한 포스터가 붙여졌다. 요란한 치장을 한 피에로가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다 친근하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말파르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큰 키의 미인이 가볍게 백덤블링을 하며 몸을 풀거나 타이트한 연습복을 입은 모습은 그 자체로 볼거리였다. 운이 좋으면 빨간색이나 노란색, 초록색이나 파란색, 분홍색이나 하늘색 풍선을 받을 수도 있었다. 햇살이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얇은 색지에 싼 사탕을 받는 아이도 있었다. 서커스가 막을 올리기도 전에 말파르 전체가 기대로 들썩였다. 아무는 어머니가 이모와 함께 흥분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들은 일도 있었다.

"그 연보라색 의상 봤니! 빛을 받으니까 은색가루를 뿌린 것처럼 반짝이던 걸!"

그리고 월요일이나 수요일, 혹은 다른 어느 날이라도 단장이 시장에게 약속한 날이면 어김없이 공연의 막이 올랐다. 사람들은 가장 좋은 옷을 깨끗이 다려 입고 숨겨두었던 지폐를 꺼내들었다. 아무는 블라우스에 리본을 매고 플레어스커트와 재킷을 입었다. 멋없이 높게 묶고 다니던 머리카락도 풀어서 다섯 번이나 빗질을 하고 반질반질하게 윤을 낸 구두를 신었다. 처음은 어머니와 함께, 두 번째를 저금을 깨서, 세 번째를 몰래 숨어들어 서커스를 구경했다.

맙소사, 그 올리브그린! 아무는 신음하듯 생각했다. 오페라핑크! 황홀한 버밀리온! 몇 번을 봐도 서커스단원들의 곡예는 아찔했고 무대를 훑는 조명은 눈부셨다. 아무는 어머니의 허리에 매달렸다.

"또 보러 가요!"

아무의 어머니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고, 이윽고 딸의 조그만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 5월에."

아무는 다시 숨어 들려했지만 사자의 으르렁거림 때문에, 경비원의 감시 때문에, 친구와의 약속 때문에, 당번이 돌아온 식사준비와 설거지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아무는 어머니가 했던 말을 따라 중얼거렸다.

"다음 5월에."

그래, 서커스단은 그런 식으로 떠난다. 많은 사람들이 채 마음껏 즐기기도 전에 장대는 치워지고 천막은 걷히고 사자는 우리로 돌아간다. 조명기구는 철거되고 온갖 색깔의 의상들은 상자에 넣어지고 단원들은 지붕이 빨간 마차에 올라탄다.

그러나 그들은 걸어서 떠나야 했다. 마차의 바퀴 하나가 통째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빨간 지붕과 흰 나무 벽을 가진 마차는 남겨졌고 서커스단원들은 말 등에 짐을 싣고 다음 공연지를 향해 걸어갔다 아무는 녹슨 굴렁쇠를 주웠다.

낮이었다. 아무는 표백한 것처럼 새하얀 햇살에 눈을 찌푸렸다. 서커스단의 요란한 색깔이 사라진 말파르는 심심했다. 아무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어떤 입체감도 느껴지지 않는 무채색의 스펙트럼.

다음 5월에.

아무는 한숨처럼 중얼거리고 굴렁쇠를 굴리기 시작했다. 있는 힘껏 경사로를 올랐다. 장을 보고 돌아오는 어머니를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