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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구에 끼인 것

  • 작성일 2009-02-27
  • 조회수 990

1.

잠을 자는데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서 놀랐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몸을 웅크리고 눈앞에 드러난 거대한 어둠을 응시했다. 며칠 전에 집에서 쥐를 보았다. 성급하게 자취하겠다고 싼 집을 고른 내가 원망스러웠다. 구석에 쌓아 둔 비닐봉지가 바스락 거려서 어디서 바람이 들어오나 하고 생각했었는데 그곳에서 개구리 배처럼 통통하고 하수구 물로 반짝거리는 내 발만 한 쥐가 튀어나와 장 뒤로 사라졌다.그 후로 집안 여기저기에 끈끈이를 잔뜩 뿌려두었는데, 어쩌면 쥐가 그곳 중 하나에 걸린 것일지도 몰랐다. 나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느닷없이 하수구 물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 소리가 평소와는 달랐다. 하수구 물이 제대로 빠진다면 들려오는 소리에서 ‘하수구가 지금 비고 있다’라는 느낌이 우러나온다. 하지만 지금 들리는 소리는 무언가 해소되고 있다, 라기 보다는 떡 같은 말캉한 것으로 목이 막힌 사람이 캑캑거리는 느낌과 비슷했다. 속이 뒤집히는 듯 한 소리가 짧은 간격을 두고 반복해서 들려왔다. 내 눈앞의 어둠 속에서 하수구에 머리가 낀 거대한 쥐의 형상이 떠올랐다. 몸이 반사적으로 움츠러들었다. 쥐가 끈끈이에 잡힌 것이라면 밖에다 풀어줄 생각이었지만, 만약 정말로 쥐가 하수구에 낀 것이라면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나는 즉시 침대에 누워 계속해서 들리는 기분 나쁜 소리를 애써 무시하려 했지만, 죄책감이 마음을 쳤다. 쥐가 하수구에 끼어 있는 것이 확실하다면, 식용유 같을 것을 부었을 때 미끄러워져서 내려갈 수 있지 않을까?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나는 내 마음이 바뀌기 전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불이란 불은 전부 켰다. 그런 다음 양말을 신고, 잠옷 위에 되는 대로 옷을 껴입고, 마지막으로 장갑을 낀 다음 테니스채를 두 손에 꼭 쥐고 소리가 들려온다고 생각되는 화장실로 향했다. 슬프게도 화장실의 불을 켜는 스위치는 화장실 안에 있었다. 문을 열면 바로 오른쪽에, 내 어깨만한 높이로 붙어 있다. 나는 문이 열리는 틈을 배드민턴 채로 막아 두고는 재빨리 문을 열었다. 쥐가 불빛을 느꼈는지 더욱 세차게 버둥거리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어쩐지 부엌 쪽에서 들려왔다는 느낌이었지만 나는 그것을 나도 모르는 새에 무시했다. 나는 뱀처럼 매끄럽게 손을 집어넣고는 스위치를 올렸다. 그런 다음 공포감 때문에 새어나오는 신음소리를 내며 재빨리 화장실 문을 다시 닫았다. 쥐의 작은 발이 타일에 부딪쳐 나는 타닥타닥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나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살며시 문을 열어 한 쪽 눈으로 하수구를 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다시 나와 무거운 상자를 끌어다 열려진 문틈을 막았다. 그런 다음에야 화장실로 들어갔다. 하수구를 수직으로 관찰하기 위해서는 가까이 다가가야 했지만 번번이 타닥거리는 소리 때문에 실패했다. 하지만 다가갔다 도망 오는 패턴이 반복되자 오기가 쌓이기 시작했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하수구에 다가가 하수관을 관찰했다. 하지만 짧은 시간 동안이었다. 하수관의 검은 내부에서는 언뜻 보기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감춰진 어둠 속에서 검고 빛나는 눈을 한 통통한 쥐가 튀어나올 것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 때문에 나는 기껏 용기를 내서 그곳까지 가 놓고는 다시 기겁을 하며 벽에 달라붙었다. 쥐가 가지고 있는 나쁜 점 중에 특히 나쁜 것은 그놈들이 머리를 들이밀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뚫고 나갈 수 있다는 점이었다. 언뜻 작은 구멍에서 머리를 내민 쥐는 조그맣고 동그란 눈과 얼핏 귀여운 생김새 때문에 무해하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 쥐가 구멍을 통과한 다음 내 눈앞에서 작은 머리와는 끔찍스러울 정도로 어울리지 않는 발바닥만한 거대한 몸을 아코디언처럼 드러낸다면 더 이상 웃을 일이 아니게 된다.

나는 양치질에 사용하는 작은 컵에서 칫솔을 빼낸 다음 변기물을 떠서 하수구로 흘려보내 보았다. 아무런 반응이 없자 이번에는 조금 더 많은 양을 흘려보냈다.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잠시 동안 기묘한 정적이 흘렀다. 하도 조용해서 지루할 정도였다. 나는 다시 슬그머니 하수구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수도를 틀어 하수구로 물을 흘려보내 보았다. 물은 막히는 곳 없이 매끄럽게 하수구를 빠져 나갔다. 나는 세숫대야에 물을 가득 받은 다음 하수구 위에 올려놓았다.

그때, 다시 타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화장실에 아니라 부엌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2.

젖은 물체가 부엌에서 몸을 뒤집고 있었다. 끈적끈적한 물체가 스테인리스스틸과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무젓가락으로 탄성 있는 쇠를 두드리는 소리에 이어 무거운 물체를 속이 빈 쇳덩어리 위에 굴리는 듯 한 소리가 반복해서 들려왔다. 부엌은 어두웠다. 어둠 속에서 싱크대에 연결된 하수도가 희미하게 푸른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런 괴기스러운 광경에 놀라 나는 한 동안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곧 이성이 작동했다. 어쩌면 내가 알지 못하는 곤충의 생리반응일지도 몰랐다. 싱크대에 나에게 알려지지 않은 곤충이 앉아 있고 그것이 나비의 분가루나 반딧불의 꽁무니처럼 화학적인 방식으로 발광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다시 한 번 무거운 생물체가 몸을 싱크대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온 기척을 느꼈는지 특히 요란하게 느껴졌다. 자칫하다간 하수구에 끼어있던 것이 빠져나와 나를 공격하려 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끼어있는 것이 불빛에 반응해 어떠한 불길한 변이를 일으킬까봐 두려웠지만 천천히 스위치에 손을 얹고 이를 세게 깨문 채로 불을 켰다.

싱크대에 놓여있는 것을 보고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마치 종이를 둘둘 말아 불에 태운 것을 원형 그대로 보존해 둔 것 같은 게 싱크대에 있었다. 게다가 살아있었다. 전체적으로는 동물처럼 보였지만 몸의 일부에 식물처럼 보이는 부분이 있었다. 참나리처럼 병든 것 같은 검은 점무늬가 들어간 꽃과 유사한 외부기관이 옆구리 위치에 붙어 있었는데, 실제 참나리의 꽃처럼 얇은 조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다육식물의 몸체같이 육중하고 두껍고 질긴 성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나로서는 처음 보는 생물이었다. 한눈에 보더라도 어딘가 다른 세상에서 왔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인간과 동떨어져 제멋대로 생긴 생물이라도 일단 지구에 근원을 두고 있는 생물이라면 가지고 있는 설명할 수 없는 인상이 송두리째 사라진 것 같았다.

괴물이 나를 보더니 작은 입을 벌리고 빳빳한 고무끼리 마찰시킬 때 나는 소리와 비슷한 소리를 다 죽어가는 듯 한 음량으로 외쳤다. 눈이 있어야 할 곳에는 눈알대신 검고 커다란 공동이 세 개 나있었는데, 공동의 깊숙한 곳에서 반짝이는 구형의 기관이 내 몸을 훑으며 움직이고 있었다. 괴물이 다시 한 번 소리를 지르며 상체를 빙빙 돌렸다. 하수관으로부터 빠져 나오려고 하는 것 같았는데, 별 소득은 없었다. 머리는 민둥산이었다. 썩은 나무와 같은, 밤색이 섞인 검은색이었다. 코는 없었고, 머리에는 코로나 같은 섬모가 잔뜩 돋아나 있었다. 섬모의 끝부분이 파란색으로 발광하고 있었다.

괴물이 다시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괴물은 비명을 지를 때 마다 입을 벌렸다. 입은 인간처럼 단일한 개구부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작은 개구부가 양 볼에 해당하는 부분에 다닥다닥 나 있었다. 소리를 지를 때 마다 개구부들이 열렸고, 사람이라면 입술이 있어야 할 부분의 얇은 표피가 날숨에 따라 펄럭였다. 입의 모양으로만 봐서는 무엇을 먹고 사는 생물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손은 발육이 덜 된 것처럼 생긴 작은 것들이 여덟 개 정도 꽃 형태의 외부기관 위쪽의 몸통에 네 쌍으로 달려 있었다. 괴물이 그 손들을 일시에 미모사의 잎처럼 움직이며 버둥거렸다. 괴물은 쉴 새 없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빼려는 몸짓을 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한참 동안 괴물을 바라보았지만 그 오랜 시간 중에도 괴물은 끼인 몸을 조금도 빼지 못하고 있었다. 괴물이 갑자기 해류에 흔들리는 바다나리처럼 하늘하늘 움직이더니 막대기가 넘어지는 것처럼 쓰러졌다. 표피 내부의 단단한 것이 싱크대와 부딪치는 소리가 인적 없는 밤에 요란하게 들려왔다. 나는 호기심에 싱크대로 천천히 다가갔다. 괴물의 하반신이 하수구에 박혀 있었다. 아래에 있는 부분의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다.괴물은 쓰러진 채로 간신히 숨만 쉬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는데, 눈에 해당하는 듯 한 공동 안의 광채가 사라지고 우주 같은 어둠만이 떠돌았다. 옆구리에 붙어 있는 꽃 같은 기관이 오방사상으로 펼쳐져 있는 두꺼운 꽃잎을 주기적으로 수축시키고 있었다. 잎이 수축되어 완전히 오므라들면 꽃과 몸통 사이에 위치한 엷은 우윳빛 막상 기관을 관찰할 수 있었다. 그것이 주기적으로 팽창, 수축을 반복하며 몸 안팎으로 이동하는 기류를 만들어 내었다. 겉보기에 이 기관은 호흡운동과 관련이 되어 있는 것 같았다.

갑자기 괴물의 양 볼에 뚫린 무수한 구멍이 열리더니 일시에 축소된 녹색 가래떡 같은 촉수들이 체내로부터 밀려 나오듯이 나타났다. 나는 혐오스러워서 잽싸게 얼굴을 뗐다. 괴물의 눈이 유동하는 것이 빛으로 느껴졌다. 괴물이 죽어가는 듯 한 슬픈 소리를 내며 다시 한 번 힘을 내 몸을 빼려 했지만 탱탱하게 부풀어 오른 괴물의 몸통은 도무지 빠져나올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괴물이 나를 보았다. 그리고는 볼에 난 구멍 중 극히 소수만을 사용하여 기괴하게 음률이 있는 듯 한 길게 잡아끄는 소리를 내었다. 소리는 끝부분으로 갈수록 진폭이 커져서 마치 조르는 듯 한 효과를 내었다. 괴물의 모습에서 언뜻 상처 입은 강아지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확실히 징그럽고 끔찍하게 생긴 생명체였지만, 다른 방식이라면 모를까 굶겨 죽이는 것은 지나치게 잔혹한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만약 내가 이 생물을 되살려놓았을 때 이 괴물이 사실은 뱀처럼 교묘한 동물이라 나에게 의도적으로 해를 가한다면? 가증스러운 것! 이 괴물은 내 동정을 사기 위해 치가 떨릴 정도로 계획적인 행동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괴물과 겹쳐 보이던 강아지의 환상이 사라지고 대신 쥐덫에 걸려 있는 내 고등학교 시절의 체육선생이 겹쳐 보였다. 언제나 거뭇한 피부에 신 김치 같은 땀내를 풍기면서 온갖 재수 없는 짓을 전부 해내던 끔찍한 인간. 그 이미지 위에 사악한 눈을 한 게걸스럽고 통통한 쥐 한 마리가 스쳐 지나갔다. 은색 양동이가 나타나더니 체육선생의 머리에 물을 들이부었고, 체육선생은 잠시 격렬하게 발버둥 치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나는 앞뒤 가리지 않고 수도를 틀었다. 하지만 용기가 없어 많은 양의 물을 일시에 끼얹는 것은 할 수 없었다. 괴물은 꼴꼴대며 떨어지는 가느다란 물줄기가 몸에 닿자 개화하는 꽃처럼 생기를 되찾았다. 괴물이 수족을 자유롭게 놀리지 못하는 아기처럼 낑낑대며 배가 위쪽으로 가게 돌아누웠다.온천에 들어앉은 원숭이를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거만한 표정이 아니라 꽃처럼 진심으로 물을 반기는 듯 한 표정이었다.

“맛있니?”

나는 무심코 괴물에게 말을 건넸다. 괴물이 내가 낸 소리를 들었는지 나에게 눈을 돌렸다. 눈 또한 생기를 되찾아 이슬처럼 영롱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괴물의 볼에 난 구멍이 살짝 열리면서 듣기만 해도 기묘한 행복감에 소름이 돋는 간드러지는 소리를 냈다. 나는 어느 새 내가 옅은 미소를 지은 채로 괴물을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신 침이 나오고 격렬한 혐오감이 밀려왔다. 나는 구토가 나오려는 것을 억누르며 고개를 돌리고 내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내 뒤쪽 싱크대에서 괴물이 교미하는 고양이의 울음소리와 유사한 알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나는 견디지 못하고 ‘그만해!’라고 크게 소리를 쳐 줬다. 괴물이 잠잠해졌다. 나에게 악의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실망한 것인지, 알 수도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차례차례 신경질적으로 전깃불을 끄며 방까지 와서는 문을 꼭 닫고 이불속으로 파고들었다. 주위는 고요했다. 마치 방금 전까지 일어난 일이 꿈인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다시 일어나 부엌으로 가서 사실 싱크대에는 아무 것도 없고 기껏해야 바퀴벌레 정도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각인시켜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눈꺼풀이 너무나 따끔거렸다. 하품을 하니 눈물이 나와 건조해진 눈알을 모래처럼 긁어 댔다. 문득 남자친구가 보고 싶어졌다. 지금쯤 출장지에서 고된 일과를 끝내 놓고 곤히 자고 있을 것이다. 손을 뻗어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맘만 먹으면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나는 핸드폰을 인형처럼 안고는 빠르게 단잠 속으로 빠져 들었다.

 

3.

괴물은 밤새 바짝 말라있었다. 전날의 개구리처럼 통통했던 몸이 이제는 구긴 종이처럼 완전히 주름투성이가 되었다. 괴물의 피부는 이구아나의 주름 잡힌 건조한 배와 유사한 형태로 변해 있었다. 특히 꽃 부분이 심했다. 꽃은 썩은 땅콩처럼 군데군데가 검게 파 먹힌 것처럼 변질되어 있었다. 볼의 구멍을 통해 빠져 나온 촉수들이 기둥처럼 빳빳하게 변해 있었다. 의식이 없는 듯 한 모습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괴물의 반질반질한 머리를 툭툭 건드려 보았다. 다른 곳은 한발이 든 것처럼 건조해진 반면에 머리 부분은 조직 안의 습기로 아직까지 번들거렸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특히 중요한 부분인 것 같았다. 내가 건드리자 괴물이 잠에서 깨는 것 같이 의식을 찾았다. 하지만 눈을 제외한 다른 부분은 전혀 움직이지 못했다. 온몸에서 기력이 없다는 신호가 정신적인 감각을 통하여 전해져 왔다. 괴물은 배고파하고 있었다.

괴물은 육식일까? 먹이를 준다고 매달리면 어떻게 하지? 그냥 하수구에서 뽑아서 밖으로 쫒아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나는 괴물의 몸체로 손을 뻗었다. 내가 몸에 손을 대자 조금 움찔거리기는 했지만 기력이 없는 괴물은 거의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다. 괴물의 몸체는 건조했지만 미끈거렸다. 어떤 부분은 파충류의 비늘처럼 꺼끌꺼끌했지만 대부분이 고무처럼 미끄러웠다. 괴물의 몸체를 살짝 쥐었다. 굵기가 내 두 손보다 조금 작았다. 하수구 위로 돋아있는 몸체의 일이는 내 발끝에서 무릎까지 정도의 길이인 것 같았다. 괴물의 쥐니 안쪽에 있는 여러 가지 것들이 만져졌다. 인간의 골격과는 판이하게 다른 부위에서 굉장히 딱딱한 것이 만져졌다. 딱딱한 것 아래에는 부드러운 것이 있는 듯 내 악력에 따라 딱딱한 것이 살짝 몸 안쪽으로 밀려들어갔다. 꽃 아래에 있는 우윳빛 막이 한숨 쉬듯이 파들거렸다. 나는 다른 손으로 마저 괴물을 쥐고는 서서히 힘을 가해 괴물을 뽑아내려고 했다. 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마치 물에 젖은 고무가 마찰하듯 하반신은 하수구에 꽉 낀 채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괴물이 고통스러운지 다 죽어가는 와중에서도 낑낑거리는 소리를 냈다.

괴물이 여기서 죽으면 어떡하지? 썩으면 누가 치워?

괴물이 썩기 시작하면 지금보다 더 끔찍하게 변하는 게 아닐까? 괴물은 지금 상태로써는 완벽한 무취였지만 부패하기 시작하면 어떤 냄새를 풍기게 될지 모른다. 다른 사람에게 연락해 볼까? 119에 전화를 하는 것도 좋은 일일지도 모른다. 119죠? 저희 집 하수구에 이상한 게 껴서 불편해요. 확실히 119는 조금 지나치게 나간 감이 있다.

괴물이 다시 몸을 뒤틀면서 볼의 구멍에서 쩍쩍거리는 소리를 냈다. 나는 다시 수돗물을 틀어 괴물의 몸에 떨어뜨렸다. 하지만 어제처럼 극적인 변화는 없었다. 한 번 시든 식물에 다시 물을 주는 기분이었다. 나는 몸을 돌려 냉장고를 열었다. 딱히 먹을 만한 게 없었다. 손을 넣어 뒤적거리니 유통기한이 아슬아슬하게 남은 소시지가 걸려 나왔다.포장을 뜯고 소시지를 손에 들었다. 볼의 구멍과 소시지의 크기를 비교해 보니 그냥 주는 것은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닐 것 같았다. 손톱으로 갉작거려 작은 조각으로 만들었다. 그런 다음 시험적으로 볼의 구멍에 가져다 붙여 보았다. 구멍에서 나온 촉수에 소시지조각이 닿자 촉수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촉수는 소시지 조각을 더듬으며 치덕치덕 체액을 묻히더니 곧 소시지 조각을 말아서 구멍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리고 끝이었다. 겉보기에는 아무 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먹고 있다, 라기 보다는 저장하기만 한 것 같았다. 고기는 입에 안 맞나? 나는 다시 냉장고를 열고 야채 칸을 뒤적였다. 얼어있는 파가 하나 있었다. 수돗물을 틀고 파를 뒤덮고 있던 얼음가루를 씻어 냈다. 그런 다음 파를 한번 구부려 보았는데, 도대체 조금도 휘어지지 않았다. 파를 한 쪽에 던져두고 다시 소시지에 달라붙었다. 소시지를 잘게 잘라 아까처럼 볼의 구멍에 두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쪽 구멍에서 나와 있던 촉수가 슬금슬금 올라와 소시지를 쥐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 구멍과는 소시지를 중심으로 반대쪽에 있던 촉수도 서서히 기어오기 시작했다. 보기에는 각각의 촉수가 다른 지성의 명령을 받고 움직이는 것 같았다. 두 촉수는 똑같이 소시지를 휘감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소시지는 내 눈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깔끔하고 쉽게 두 조각으로 절단되어 각각의 촉수에 휘감긴 채로 양 구멍으로 하나씩 들어갔다. 꽤 흥미로운 광경이었다. 나는 이번엔 소시지를 자르지 않고 덩어리째로 가져다 두었다. 모든 구멍에서 나온 촉수들이 경쟁하는 정충처럼 드글드글 몰려들어 소시지를 절단하는 광경은 꽤 볼만 했다. 물고기에게 먹이 주는 것 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혼자 사는 것이 무료하던 차에, 괴물을 먹이로 잘만 길들인다면 같이 놀아주고 재미있을 것 같았다. 난생 처음 보는 생물인데 벌써 먹이 주는 방법까지 알아냈다. 나는 어처구니없게도 나 자신이 자랑스러워졌다. 주는 족족 먹이를 받아먹는 모습이 어찌나 기특한지.

 

4.

한 달가량 먹이를 줘 본 바에 따르면 괴물은 잡식성인 것 같았다. 식단을 바꿔가며 온갖 가지 음식을 투입해 보았지만 아직까지 한계가 나오지 않고 있었다. 걱정인 것은 날이 바뀌어가면서 점차 괴물의 몸집이 커져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에 따라 하반신이 하수구에서 빠져나올 가망은 점차 희미해지고 있었다. 어쩌면 몸이 점차 부풀어 오르다가 터져버릴 지도 몰랐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반겨주는 생물이 있다는 것은 많은 힘이 된다. 나는 최근 들어 괴물을 끌어안을 수 있게까지 되었다. 그러면 괴물도 티렉스의 앞발 같은 조막만한 팔들을 뻗어 내 몸을 감싸려 했다. 그러면 괴물의 볼 구멍에서 가르릉거리는 소리가 나왔다. 이 아이가 나를 엄마라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는 인상이 어렴풋이 들었다.

여느 때처럼 일을 끝내고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은 집이 이상하게 소란스러웠다. 가스통을 단단한 바닥에 떨어뜨렸을 때 나는 종소리와 비슷한 소리가 주기적으로 집 안에서 들려왔다. 나는 괴물이 어떤 위험에 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서둘러 문을 따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제일 먼저 괴상한 냄새가 내 코끝을 간질였다. 하수구에서 나는 듯 한 지독한 짠 냄새였다. 나는 서둘러 부엌으로 가서 전깃불을 켰다. 괴물이 그곳에 있었다. 괴물은 하반신을 화분처럼 감싸고 있는 하수구파이프를 매단채로 부엌바닥에 엎어져서 파닥거리고 있었다. 괴물의 볼 구멍에서 폐병에 걸린 사람이 내는 피리소리와 비슷한 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괴물은 계속해서 몸 끝의 파이프 끝을 바닥에 탕탕 두드렸다.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던 걸까?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찾아오지 않은 게 기적이었다. 괴물이 돌아누웠다. 조금 가만히 있나 싶더니 내시 피리소리를 내며 하반신을 신경질적으로 퍼덕거렸다. 마치 공기 중에서 숨을 쉬지 못하는 물고기를 보는 것 같았다. 계속해서 소란을 피우면 이웃이 찾아올지도 몰랐다. 이 광경을 들킨다면 매우 귀찮아 질 것 같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괴물에게 다가가서 괴물의 눈과 마주치려 했다. 하지만 괴물은 내가 자기 몸에 손을 대는 것이 끔찍스럽다는 듯이 내 손길을 피해 필사적으로 몸을 꿈틀거리며 식탁 아래로 이동했다. 괴물이 지나간 자리에 암녹색의 걸쭉한 액체가 기름처럼 흘려져 있었다. 나는 괴물이 하반신을 휘두르는 와중에 파이프의 단면 안에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아무래도 우려했던 일이 일어난 것 같았다. 괴물의 하반신에는 바다나리와 닮은, 얇은 막상 조직으로 된 섬모가 수평으로 잔뜩 돋아난 하늘하늘한 촉수들이 돋아나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은 얼핏 보더라도 불완전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몇몇 촉수들이 잡아 뜯겨진 것처럼 뽑혀 있고, 그 단면에서 괴물의 체액인 암녹색 액체가 엉킨 채로 새어나왔다.대략 사태가 이해되었다. 괴물은 부풀어 오른 몸 때문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고, 그 때문에 파이프에서 빠져 나오려고 하는 것이다. 나는 사람말로 괴물을 달래려고 시도하며 천천히 괴물에게 다가가 파이프를 두 손으로 쥐었다. 괴물의 볼 구멍에서 개가 높은 주파수로 낑낑거리는 듯 한 소리가 들려왔다. 괴물은 볼 구멍으로 엄청나게 다채로운 소리를 낼 수 있었다. 괴물이 조그만 앞발은 앞으로 뻗고 고통스럽다는 듯 한 표현을 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파이프를 뽑아내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괴물이 몸을 마구 뒤틀며 나에게서 벗어나려고 했다. 이 사태를 타개할 방법은 하나였다. 날이 있는 도구로 파이프를 쪼개야 했다. 하지만 나는 공구를 다루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자칫하다가 괴물의 몸까지 함께 쪼개 버린다면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해야 하나. 순간 내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공구를 다루는 데 익숙하고 내 비밀에 대해 민감하게 생각해 줄 것으로 기대되는 사람.

내 남자친구였다.

 

5.

전화를 건지 시간이 꽤 지났다. 사태가 사태인지라 잘못된 일인 줄 알면서도 쓸데없이 늦는 남자친구에게 조금씩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급하다고 알렸는데. 놀러 오라고 하면 나는 것처럼 오면서.

괴물은 지쳤는지 부풀어 오른 곰치를 연상시키는 몸을 바닥에 뉘이고 간신히 호흡만 하고 있는 상태였다. 나에게 등을 돌리고 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작은 손들이 가여워 보였다. 저렇게 지내다 썩어 죽으면 어떻게 하지? 동물병원에 데려갈 수도 없고, 상처 난 부위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난감했다. 항생제를 먹이면 부작용이 있지 않을까? 아직까지 먹는 것에는 가리는 것이 없었지만 약에는 어떤 반응을 나타내는 지는 하나도 알 수 없었다.

갑자기 초인종소리가 들렸다. 나는 멍하게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무거운 몸을 일으켜 현관으로 나갔다. 문을 여니 한기가 몰려 들어왔다. 남자친구가 밤색의 부푼 점퍼를 입고 입김을 내뿜으며 서 있었다. 남자친구가 들어오자 한기가 따라 들어왔다. 나는 오한이 들어 몸을 떨었다.

“무슨 일이야? 갑자기 부르고?”

“키우던 개가 아픈데, 니가 좀 도와줘야 겠어.”

“개 키웠어? 저번에 왔을 때는 못 봤는데.”

“최근에 들였어. 정확히 말하지만 개라기보다는...”

남자친구는 추운 지 터벅터벅 부엌으로 들어갔다. 나는 남자친구가 어떻게 반응할 지 두려워 움직이지 않은 채로 뒤에 남아 있었다. 남자친구의 거대한 실루엣이 불빛이 비추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으아아아아악!”

남자친구의 비명을 들으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부엌에서 괴물이 없는 힘을 내며 퍼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친구가 괴물을 보고 당황해서 공격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서둘러 부엌으로 뛰어 들어갔다. 나는 남자친구의 모습이 보이자마자 외쳤다.

“걔 내가 키우는 거야! 걔 내가 키우는 거야! 건들지 마! 건들지 마!”

나는 남자친구의 어깨를 두 손으로 꽉 쥐었다. 남자친구가 살인범이라도 보는 듯 한 복잡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괴물은 있어야 할 곳에 그대로 있었다. 다만 몸이 돌려져, 깊은 공동으로 나와 남자친구를 번갈아 훑어보고 있었다.

“저게 뭐야?”

남자친구가 나에게 물었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무심하고도 얼빠진, 조소가 깃들여 있는 목소리였다. 바보 같은 놈! 저런 자연의 경이를 눈앞에 두고도 경의를 표하지도, 놀라지도 않다니! 저 신비로운 몸체를 봐라. 느껴지는 것이 아무것도 없단 말인가? 할 줄 아는 것이 비웃는 것 밖에 없는 놈. 너 같은 것은 물고기 밥으로나 쓰는 게 마땅해. 바보 주제에 인간이라는 우월감에 괴물을 하대하다니!

“저게 뭐냐고?”

남자친구가 다시 나에게 물었다. 내가 이상한 반응을 보이자 불안한 것 같았다. 목소리에 짜증과 텅 빈 권위가 섞여 있었다. 나는 불쾌해졌다. 소중한 것을 이런 바보 따위에게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좋은 사람이기는 하지만, 아무리 힘들더라도 내 손으로 처리할걸.

괴물이 입을 벌리고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우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저게 뭐야?’ 괴물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다름 아닌 바로 나에게!

“쟤가 파이프에 끼었거든? 잡아당겨도 빠지지 않아서 절단해야 할 것 같은데 내가 하면 몸체까지 잘라버릴 지도 몰라서.네가 해줬으면 좋겠어.”

“너, 저런 걸 키우는 거야?”

그게 뭐 어때서? 미친 새끼. 닥치고 일이나 해!

심장이 이상하게 벌렁거렸다. 내가 어째서 이렇게 공격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직 내 행동에 대해 도덕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이성은 살아남아 있는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남자친구가 괴물에게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괴물이 위협을 당한다고 생각했는지 퍼덕거렸다. 남자친구의 몸에서 심장을 두드리는 사내냄새가 풍겨왔다. 내가 상대방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좋게도 나쁘게도 느껴지는 바로 그 냄새였다. 한때는 맡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채워지는 것 같았지만 지금은 단지 비리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남자친구는 괴물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남자친구는 지나치게 성급하다고 느껴지는 태도로 괴물에게 손을 뻗었다. 괴물이 마구 버둥거리기 시작했지만 남자친구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잔인하게 느껴지는 장면이었다. 땀으로 따가워진 남자친구의 손이 파이프에 닿았다. 내가 분명히 시도했다 실패했다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자친구는 무식하게도 파이프를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괴물이 통증 때문에 마구 버둥거렸지만 남자친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런 것 보다 톱같은 것으로 절단하는 게 낫지 않을까?”

남자친구는 내 말을 무시했다. 대신 더욱 힘세게 잡아당겼다. 파이프에 끼어있는 괴물의 단면이 움찔거리면서 파이프 상단에서 암녹색 체액이 흘러내렸다. 나는 남자친구의 어깨를 쥐고 흔들며 말리려 했다. 그때 갑자기 괴물이 공격하는 뱀과 같은 쉰 소리를 내며 고개를 퍼덕였다. 남자친구는 재빨리 손을 뺐지만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괴물의 입에서 나온 촉수들이 남자친구의 손을 핥았다. 남자친구의 표피가 벗겨지며 투명한 노란색 체액과 혈액이 흘러나왔다. 남자친구는 신경질적인 소음을 내며 까진 부위를 입으로 가져가 핥았다.

“괜찮아?”

내가 물었다. 남자친구는 화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남자친구가 괴물을 노려보았다. 나는 괴물의 공동 속에서도 적의에 가득 찬 빛이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 남자친구가 손을 뻗어 괴물의 머리를 잡고 흔들었다. 즉시 촉수가 치덕치덕 올라왔지만 남자친구는 얄밉게도 빠르게 손을 뺐다. 파이프를 잘라달라고 불렀더니만 내 애완동물에게 무슨 짓이야?

남자친구가 다시 괴물에게 손을 뻗어 성질을 돋우듯이 기분 나쁘게 괴물의 몸을 쳤다. 촉수가 뻗어오면 다시 손을 빼고. 그런 다음 다른 부위를 때리고. 아무리 봐도 복수라는 의도를 띄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키우는 애한테 그러지 마.”

내가 단호한 소리로 말했다. 남자친구는 내 말에 아랑곳 않고 괴물의 몸을 계속 두들기며 말했다.

“나, 다쳤다고. 내가 다친 것 보다 얘가 아픈 게 더 걱정된다는 거야?”

사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확실히 내가 섭섭하게 한 것은 맞았다. 그러니까 내가 연고 발라줄 테니까 내 애완동물에게서 손 떼지 그래?

“알았어. 미안해. 근데 얘 지금 심각한 상태란 말이야. 톱으로 파이프 잘라주면 안 돼?”

남자친구가 한숨을 쉬었다. 그런 다음 손을 뻗어 파이프를 더듬었다. 그리고 다시 살짝 힘을 주어 빼려고 하는데,

괴물의 머리가 부푸는 풍선처럼 초현실적으로 거대해 지더니 볼에 난 구멍들이 하나로 합쳐졌다. 촉수들은 서로 엉켜 구근처럼 굵고 큼직하게 변했다. 촉수가 오 미터짜리 다이아몬드방울뱀처럼 슬금슬금 기어올라, 정신을 차려 보니 남자친구의허리 아래가 괴물의 입 밖으로 빠져 나와 있고,

나는 비명을 지르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괴물의 머리가 까딱거리며 남자친구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마치 남자친구가 스스로 괴물의 입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남자친구의 다리가 버둥거렸다. 위 아래로 다리를 움직이더니 마지막으로는 쭉 뻗고는 완전히 괴물의 입 안으로 사라졌다. 괴물의 목 부분이 사람 모양으로 부풀어 있었다. 갑자기 괴물이 단속적으로 수축하기 시작했다. 한번 수축하면 피부에 주름이 잡히면서 부피가 작아졌는데, 괴물 몸 안의 남자친구의 몸이 빠개지는 소리가 들렸다. 한 번 수축했을 때는 커다란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고, 점차 그 소리가 작은 뼈들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로 변해갔다. 나는 섣불리 움직이거나 덤벼들었다가는 나까지 잡혀 먹을 것만 같아서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괴물이 수축운동을 끝마치고는 역겹게 들리는 높은 주파수의 소리를 냈다. 수축운동이 끝난 괴물은 이전보다 조금 더 부풀어 있었다. 부서진 남자친구가 들어있는 부분만이 아니라 그 조각들이 몸 전체에 골고루 분배된 것처럼 통통해져 있었던 것이다. 긴장해 있던 나는 갑자기 부엌에 꽉 찬 것처럼 느껴지는 묘사할 수 없는 속이 뒤집히는 냄새 때문에 구토가 나오려는 것을 손으로 막으며 몸을 움츠렸다. 내 귀에 무언가 딱딱한 것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6.

괴물이 변이를 일으키고 있었다. 형태가 유동적으로 변화했다. 마치 물에 불은 문어가 굴에서 기어 나오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눈앞에서 기묘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내 방으로 달려갔다. 달려가면서도 현관으로 가야할 것을 잘못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금방이라도 내 어깨에 괴물의 축축한 촉수가 오를 것만 같다는 느낌에 재빨리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순간 긴장이 풀려 문에 기댔다. 그 상태로 어느 정도 있었을까, 문 밖에서 멀찍이 싱크대에 쌓아 둔 쇠그릇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정신이 번쩍 들어 황급히 문에서 떨어졌다.

난 이제 무엇을 해야 하나?

순간 언어로 구상화할 수 없는 순간적인 심상이 머리를 스쳤다. 나는 미친 듯이 방안을 헤집으며 휴대폰을 찾았다. 조금만 차분히 정신을 집중하면 쉽게 휴대폰이 있는 곳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긴장한 탓에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 않았다. 나는 요란하게 방 안의 물건을 집어던지면서 휴대폰을 찾다가 부엌에서 들려오는 괴상한 소리에 얼어붙은 듯이 멈췄다. 마치 점성이 큰 액체를 보글거리며 끓이는 듯 한 소리였다. 나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이전에는 듣지 못한 새로운 소리가, 보글거리는 소리에 가려 희미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딱딱한 돌기가 잔뜩 돋아난 물체로 장판을 긁는 소리. 무언가 무거운 것이 지익 지익 소리를 내며 다가오고 있었다.

괴물이 내 방으로 오고 있다!

괴물이 내 방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기분 나쁜 소리가 점차 커졌다. 괴물의 몸 안에 갖가지 사위스러운 것들이 잡아먹힌 채로 있는 것처럼 소리가 확대됨에 따라 그 소리에 가려진 다른 소리가 차례로 들려오기 시작했다. 보글거리는 소리, 지익거리는 소리. 이제는 성대가 엄청나게 두꺼운 고양이가 갸르릉거리는 소리. 소형 가압식 스프레이를 뿌리는 소리. 크고 메스꺼운 젖은 것이 사방에 달라붙는 소리.

그때 무겁고 두꺼운, 유리가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괴물의 소리와는 확연히 유리된 채로 들려왔다. 책장 위에 놓아둔 자기 인형이 쓰러지는 소리가 틀림없었다. 나도 의자를 두지 않으면 손이 닿기도 힘든 높이인데, 팔뚝 만했던 것이 도대체 얼마나 커졌는지 상상할 수도 없었다. 별 사이에서 날아온 고대의 악마.

복도는 어두울 것이다. 절멸한 태고의 거인처럼 늘어선 책장이 어둠 속에서 실루엣으로만 떠오르고, 그 긴 통로를 거대하게 부푼 암녹색 괴물이 부엌에서 나오는 괴기스러운 불빛을 배경으로 사악하게 번득이며 팔다리가 없는 퉁퉁한 기형의 몸뚱이를 끌고 오고 있었다. 별 사이의 검은 공간에서 흉측하게 유동하는 녹색의 기형 아메바, 낡고 쇠락한 지하철 안에서 살을 발라내는 듯 한 밝은 불빛을 온몸으로 반사하며 무서운 기세로 쇄도하는 녹색의.

무언가 묵직하고 거대한 것이 내 방문을 쳤다. 포를 발사하는 것과 비슷한 소리가 났다. 압도하는 듯 한 소음에 나는 맹수와 마주친 사람처럼 한 자리에 얼어붙은 채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문손잡이가 거칠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잠가 놓은 문은 열리지 않았다.

똑똑 노크소리가 들렸다. 문 밖에 있는 것이 예의바르게도 노크를 하고 있었다. 긴장이 순식간에 해소되는 들뜬 기분에 문을 열고 머릿속에만 존재하던 공포와 마주하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가까스로 마음을 가다듬었다.

“저에요.”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문 밖에서 들려왔다. 처음엔 잘못 들었나 싶었지만 곧 두 번째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에요. 문 열어 주세요.”

확실한 사람의 목소리였다. 주어지는 정보가 너무 잡다한 탓에 어떤 행동을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문 밖에는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이 있으니 문을 열어서는 안 되겠지만, 지나치게 예의바른 목소리에 마음이 동요했다.

순간적으로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방금 전 까지 일어난 소음을 듣고 누군가가 왔을지도 모른다. 옆집에 사는 사람일까? 그렇다면 문 밖에 세워두는 것은 위험했다. 괴물이 어딘가에서 문을 숨기고 공복에 시달리는 미친 듯 한 눈을 번득이고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괴물이 노리는 것이 내가 문을 여는 타이밍이라면? 내가 문을 열고 남자를 들여보내려는 즉시 괴물이 뛰쳐나와 나와 남자를 잡아먹을 수도 있었다. 나는 깃털처럼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문에서 조심스럽게 적당한 거리를 두고 말했다.

“밖에 누구세요?”

“저에요. 하수구에 끼어 있던.”

남자가 자기 입으로 자기가 괴물이라고 실토하고 있었다. 순간 나는 괴물이 나를 놀리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조금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니까 내 애인을 잡아먹은 사람 맞죠?”

“사람은 아니지만 맞아요. 그리고 그 일은 죄송해요.”

“죄송하다니요?”

“남자 친구 분을 잡아먹은 거요. 순간 화가 나서 그랬어요.”

“다시 살려낼 수는 없나요?”

“죄송해요.”

한참동안 쉰내 나는 침묵이 흘렀다. 쉰내가 어디서 나는지 궁금했지만 알고 보니 남자친구가 잡혀 먹기 전에 풍기던 냄새를 내가 떠올리고 있던 것이었다. 남자친구가 죽은 것은 매우 슬픈 일이었지만 아직 화가 나 있던 건지 이상하게 냉정한 기분이 들었다. 이것저것 다 필요 없고, 빨리 상황을 종결시킨 다음 침대에 엎드려 쉬고 싶었다. 짧은 시간 동안에 너무나 많은 것들이 일어났다. 곧 밀려들어올 정서적인 영향이 두려웠다.

“하수구에서 빠져 나왔으면, 이제 돌아가 주세요.”

“얼굴만 보면 안 될까요? 여태까지 잘 해주신 게 고마워서.”

“고맙다면 그냥 돌아가 주세요. 조금 쉬고 싶어요.”

“그럼 다음에 인사드리러 찾아 와도 될까요?”

“아뇨. 찾아오실 필요 없어요. 이제 가주세요.”

문 밖에서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곧 시무룩하게 느껴지는 지익지익하는 소리가 우주 저편에서 들려오는 것 같이 점차 줄어들었다. 나는 침대 위로 무너졌다. 처음에는 마음이 폭풍우라도 몰아치는 것처럼 복잡하더니 곧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가슴이 비둘기처럼 부풀었지만 기쁨이 아니라 절망 때문에 부푼 것이었다. 나는 타는 듯이 아픈 흉부를 한 손으로 쥐어뜯으며 소리 죽여 울었다. 한참을 그렇게 울고는 완전히 탈진하여 골아 떨어졌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더니 곧 의식이 사라졌다.

 

7.

문득 일어났다. 눈이 매우 따가웠다. 이불이 축축했다. 자면서 흘린 눈물이 이불을 흠뻑 적시고 있었다. 눈을 뜨자 가슴이 다시 아프기 시작했다. 이대로 죽어버렸으면 하고 생각하며 한참을 밍기적거렸다. 배를 타고 알 수 없는 곳으로 멀리멀리 떠나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나는 눈을 감고 행복한 상상에 심취했다. 끝없이 펼쳐져 있는 오렌지 빛 바다가 맛있어 보였다. 입에 군침이 돌았다. 배에서 꼬르륵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다시 눈을 떴다. 어제 난리를 치고는 몸도 마음도 힘든 상태였다. 배가 고픈 것은 당연했다. 무언가 달고 신 것이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가 무겁고 복잡했으므로 청량감이 드는 것을 먹고 머리를 맑게 하고 싶었다. 나는 낑낑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은 울어서 아프게 부어 있었다. 하품을 하니 폐에서 찬 공기가 돌았다. 지금은 어느새 아침이 되어 있었다. 직장에 결석을 한 셈이었다.

목이 컬컬한 것이 싫었다. 몸을 움직이니 사지가 쑤시고 마음도 쑤셨다. 현실의 광경이 빠르게 머리로 들어오면서 마음으로 소화되기 시작했다. 집 안에는 나 혼자였고, 동네는 조용했다. 깊은 적막감에 얼마간의 공포를 느끼면서, 질린 마음에 잠시 고개를 숙이고 방바닥에 만들어진 원형의 빛을 구경했다.

부엌에서 무언가 소리가 들렸다. 쥐인 것 같았다. 이상하게 무섭지 않았다. 이전이라면 소리만 듣고도 내 몸 위로 쥐가 기어가는 이미지를 감각까지 곁들여 생생하게 구성해 낼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럴 기력도 없었다. 차라리 쥐가 있었으면 좋겠다. 적어도 적적하지는 않을 테니까. 어두운 것이 싫어서 창문으로 빛이 들어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깃불을 켰다. 하지만 불빛이 밝아지자 놀라듯이 불을 다시 껐다. 허탈한 마음 때문에 전깃불을 끄기 위해 일어선 그 상태로 한참 동안 굳어 있었다. 부엌에서 무언가 소리가 다시 들려왔지만 아무런 기력도 없었다. 창문 밖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귀를 기울이니 희미하게 자동차가 다니는 소리도 들렸다. 시계를 보니 세시였다. 아마 오후일 것이다. 아이들의 웃는 소리가 듣기 싫어 방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소리가 들리는 부엌으로 터덜터덜 아메바가 기어가는 속도로 걸어갔다. 부엌에 다가가는데 한 순간 부엌 안에서 묵직한 무게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희미하게 거대한 그림자가 부엌 벽에 비춰 일렁이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뒤돌아 도망쳤겠지만 될 되로 되라는 심정이 요로결석처럼 마음속을 꽉꽉 채우고 있었다. 나는 나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씩씩하게 성큼성큼 걸어 부엌에 있는 것과 마주했다.

처음에는 거대한 배추 같은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움직였다. 어느새 나는 괴물의 얼굴에 해당하는 부분과 마주했다. 왈칵 눈물이 나왔다. 내가 죽은 남자친구에 대해서 그리워하는 부분만을 응축해 둔 이미지가 그곳에 있었다. 단지 그 얼굴이 초록색이고 이런저런 이상한 부분이 많았지만 체한 것 같았던 마음이 일시에 청량해진 느낌에 앞 뒤 가리지 않고 뛰어가 그 물체를 껴안았다. 하지만 콤콤한 곰팡이 냄새가 물씬 풍겼다. 마치 혹처럼, 내가 안은 부분이 안으로 폭 들어갔다. 나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로 뒤범벅된 혼란스러운 감각을 느끼며 포옹을 풀고 조금씩 뒤로 물러갔다. 눈을 계속해서 물체의 얼굴에 고정하고 있었다. 그리운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가을바람처럼 서늘하고 봄 햇살처럼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이 복잡하게 느껴지는 움직임으로 몸체 옆에 붙어 있는 촉수를 들었다. 나는 물체의 옆구리에 붙어 있는 거대한 크기의 다육성 꽃을 보았다. 순간 사실의 일부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나는 당혹한 눈초리로 물체를 쳐다보았다. 물체의 얼굴이 입을 열었다.

“저에요.”

남자친구의 목소리였다. 목소리에 대해서는 그다지 흥미가 없었기 때문에 내 감정은 빠르게 식고 이성이 고개를 들었다.

“저라니?”

“저에요. 하수구에 끼어 있던. 죄송해요. 돌아가려고 했는데, 길이 막혀서. 돌아갈 수가 없어요. 이 모습으로 밖에 나갔다가는 잡혀서 죽을 지도 몰라요.”

내 눈이 빠르게 괴물의 몸을 훑었다. 전체적으로 암녹색인 것은 똑같았지만 둘레는 사람만 하게, 키는 나보다 머리 두 개 정도 높게 커져 있었다. 꽃도 확대되었다. 얼굴은 완벽한 사람의 얼굴로 변해 있었다. 다소 녹색이 섞여 있었지만 얼굴은 황인종의 피부색과 거의 동일했다. 남자친구의 얼굴과 한 부분도 다르지 않아 아무리 뜯어 봐도 다른 인상으로 느껴지지가 않았다. 세부적인면도, 전체적인 인상도 완벽하게 동일했다. 머리 부분에는 배춧잎 같은 고불고불한 다육성 이파리 같은 것이 나 있었다. 몸통은 사람 모양을 한 양서류의 것과 같았으며 옆구리에 나 있는 수많은 팔들은 내 어깨에서 팔꿈치만한 길이로 자라 있었다. 꽃의 아래에 있는 막상기관도 그대로 있었지만, 인간의 견갑에 해당하는 부위에 기다란 촉수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촉수는 유연한 봉상으로, 한쪽 어깨에 다섯 가닥씩이 돋아나 우아하게 늘어져 바닥까지 닿아 있었다.

나는 한숨을 쉬고 말했다.

“갈 곳이 없다고?”

괴물이 고개를 숙였다.

“네..”

나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고개를 들고 거침없이 물었다. 다소 흥분한 탓에 말이 빠르게 나왔다.

“그런데 내 남자친구는 왜 잡아먹은 거야?”

“통증 때문에요. 그 사람이 저를 죽이려고 했잖아요.”

“죽이려고 했던 게 아니야. 도와주려고 했던 것뿐이야.”

“아니에요. 이 꽃처럼 생긴 것이 보이시죠? 이 꽃으로 양분을 섭취하기 때문에 이 기관이 괴사하면 꼼짝없이 저는 죽어요. 그때도 과다출혈로 사경을 헤매는 상황이었고, 남자친구분이 계속 파이프를 잡아 당겼다면 허혈성 쇼크로 이어졌을지도 몰라요. 저희 몸은 이상해서 순환계, 호흡계, 신경계, 음.. 그리고.. 인간의 언어로는 대치시킬 수 없는 다른 기제들을 보호하기 위해 쇼크가 일어나면 제일 먼저 꽃을 떨어뜨려요. 그때도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죽을 생각을 하니까 반사적으로 일어난 일이에요. 절대로 고의가 아니었어요. 하지만 정말로 죄송해요.”

고의가 아니었다는 말을 듣자 화가 치밀었다.

“좋아해요.”

“응?”

잘못 들었나?

“뭐라고?”

괴물은 촉수를 가지런히 모으고는 고개를 숙인 채로 말이 없었다. 나는 다소 화난 어조로 다시 물었다.

“뭐라고?”

괴물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괴물은 다시 고개를 떨어뜨리고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제가 남자 친구 분을 잡아먹었을 때 제게 남자친구분의 기억이 이식되었어요. 뇌를 먹어버렸거든요. 뇌가 제 신경절과 동화되어서... 제 머릿속에 기억이 전부 남아 있어요. 저도 어떻게 할 수 없어요.”

괴물이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게 변해 있었다. 촉수가 무릎 높이에서 물뱀처럼 파닥거렸다.

“당신을 사랑해요. 저도 어쩔 수가 없어요. 저에게 먹이를 주던 당신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어요. 제 모습이 이렇더라도 제 마음을 받아 주세요.”

괴물이 다시 촉수와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리더니 전구가 나간 것처럼 굳어버렸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눈도 돌리지 못하고 괴물을 쳐다보기만 했다. 입 안에 껌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턱을 계속해서 움직였다.심하게 긴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괴물이 고백할 때 나는 강렬한 양가감정을 느꼈다. 남자친구를 잡아먹은 괴물이 남자 친구의 모습을 하고는 나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있었다. 진심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하는 요령 없는 것 까지 남자친구와 판박이였다.

“나는 그렇게 못해 줘. 네가 정말로 나를 사랑한다면 이제 사라져줘.”

괴물이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사람처럼 울고 있었다.

“전 이제 갈 데도 없어요. 제발.. 제발..”

괴물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매 맞은 강아지처럼 잔뜩 위축된 모습이었다.

글쎄. 나는 괴물에게 다가가 괴물을 꼭 안아주었다. 남자친구의 얼굴로, 남자친구의 목소리로, 남자친구의 태도로, 그것도 전 버전 중에서 내가 가장 사랑했던 부분만을 최고급 향수처럼 농축시켜 놓은 부분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암덩어리처럼 마음속에서 자라기 시작했다. 나도 울고 싶었고, 의지할 사람이 필요했고, 방금 전 까지 죽음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조금 뒤틀리기는 했지만 일종의 구원이라고 생각했다. 자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직후에는 아주 일시적이지만 세상이 행복하게 보인다. 살아서 다행이야. 그런 생각이 마음속을 가득 채우는 것이다. 양가감정이 폭발할 것 같이 되어 머리를 벌겋게 채웠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남자친구에게 사과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가 죽기 전에 내가 그를 어떻게 생각했지? 미안해. 미안해.

 

8.

고개를 드니 검은 우주가 있었다. 곧 모든 것이 검어졌다. 내가 죽으면서 느낀 마지막 감정은 하수구의 검은 물처럼 강하게 응축된 강력한 증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