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달토끼 로망스

  • 작성일 2009-10-04
  • 조회수 410

어렸을 적 나는 달엔 아무것도 없고 곰보자국처럼 둥그런 구멍들만 나 있는 땅덩어리뿐이라고 생각했다. 우주에 관한 서적에 그렇게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나이 또래 애들은 달에 토끼가 산다느니, 거기에서 떡방아를 찧는다느니 하는 소리를 떠들어댔을때 나는 정말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남들보다 나는 성숙한 편이었다. 친구들이 장난감 로봇을 가지고 놀거나 팽이를 돌리고 놀때 나는 카프카의 변신이라던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같은 책들을 집 안에서 읽고 자랐다. 그러다보니 친구들은 점점 없어지고 혼자만의 공간에서 책을 읽고 상념에 빠지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러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주위를 둘러보니 나는 교복을 입고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주위의 친구들은 하나도 없었다. 전교 1등을 중학교 시절부터 놓치지 않았기에 부모님과 주위 어른들은 이런 나를 좋아했다. 하지만 나는 그들도 싫었다. 아이들이 유치하다면 어른들은 추악했다. 가식의 가면과 무지의 편향성을 가진 채 현실 속 시궁창을 기어다니는 그런 어른들이 끔찍했다. 결국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고 나를 감췄다. 조금 외로울때도 있지만 그정돈 참을 수 있었다. 오직 나 혼자만이라도 괜찮았던 것이다.

하지만 18살의 어느 날 밤을 계기로 나는 참을 수 없는 그리움과 아픔을 가슴에 묻고살아가게 된다. 그때의 만남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할만큼 충격적이고 환상적이었다.큰 보름달이 뜬 그 날, 나는 테라스에 나와있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마 공부가 잘 안되서 달을 쳐다보다가 그만 달빛에 홀려버려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아름다운 보름달이었다. 한참을 쳐다보다 문뜩 이상하다싶어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더니 놀랍게도 달빛을 타고 무언가가 내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 앞에 둥둥 떠서 귀를 쫑긋 세우고 신기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토끼귀를 가진 인간이 달빛 속에서 나타나 2층 테라스에 있는 내 앞에 둥둥 떠 있는 모습은 그때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상식과 관념을 부숴버렸다. 그녀의 이름은 래묘(來卯)라고 했다. 월궁(月宮)에 사는 토끼란다.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하지만 믿을 수 밖에 없지 않은가. 그녀는 분명 달빛 속에서 나타났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고, 떠 있는 그녀의 허리 뒤로 손을 뻗어 열심히 훑어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다 무슨 짓이냐며 따귀를 맞은 사연은 길게 말하진 않겠다. 확실한 것은, 래묘의 가슴은 푹신푹신했다는 것이다. 여튼 그렇게 만난 래묘는 20년마다 한번씩 보름달이 뜰때마다 지구로 내려올 수 있고, 하룻밤동안 이곳저곳을 둘러보다가 다시 올라간다고 했다. 그리고 실수로 인간이 사는 곳으로 월광(月光)의 사다리를 내려버렸고, 내려왔더니 나를 만났다는 것이다. 이런 모습을 보면 알겠지만 그녀는 뭔가 어설프고 실수가 많았다. 그런 실수가 나와의 인연을 맺어준 것이리라. 어쨌든 어찌어찌 그녀와 친해지게 되고 나는 그녀와 함께 한밤 중의 인간세상을 안내해주는 가이드가 되어준다. 밤거리는 조용하면서도 시끄럽다. 어두운 골목길은 더할나위없이 조용했고, 번화가는 더할나위없이 시끄러웠다. 그 모든 것들을 래묘에게 보여주었다. 그녀는 인간세계의 모든 것을 신기해했다. 단지 하룻밤밖에 되지 않는 이 시간이 그녀에겐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도 난생처음으로 누군가와 함께 한 그 시간들이 행복하다고 느꼈다. 18년동안 경험해보지 못했던 것, 나는 그것을 그녀와 함께함으로써 얻을 수 있었다.

우리 둘의 즐거운 시간은 금새 흘러갔다. 새벽이 지나고 곧 해가 뜰 시간이 온 것이다. 그녀는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20년이 지나야 다시 만날 수 있다고 했다. 다시 와도 같이 놀아줄 수 있냐고 묻는 그녀의 질문에 꼭 그러겠다고 답했다. 20년 후면 내 나이는 서른 여덟이 되었겠지만 상관없었다. 지금 보낸 이 순간은 내 인생동안 절대 잊어버릴 수 없는 기억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녀는 다시 달빛과 함께 사라졌다. 이것이 나와 래묘의 첫번째 만남이었다.

시간은 다시 세찬 물결처럼 빠르게 흘러간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명문대학에 진학했다. 본래 법대에 지원하려 했지만 특별한 어떤 만남을 계기로 나는 천문학과에 지원하게 되었다. 좀 더 그녀가 있는 곳을 알고 싶었기에, 아름다운 달빛을 지켜보는 일을 내 일생으로 하고 싶었기에 주위 어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천문학과에 들어갔다. 물론 천문학에서의 달은 내가 어렸을 적 알던 상식 그대로의 달이었다. 무엇을 꿈꾸었던 것일까? 나는 환상에 빠져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미 환상 속에 있는동안 현실의 시계추는 저 멀리 꺽여있었다. 천문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리고 석사를 거쳐 박사 학위를 땄다. 교수에 임명되었다. 주위 어른들은 결혼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러명의 여자들을 소개시켜주었다. 하지만 그 누구를 보아도 아름답지 않았다. 아마도 콩깍지가 씌워서 그랬을 것이다. 달빛 속에서 귀여운 토끼귀를 쫑긋 세운 그녀를 마음 속에 담았기에 그 어떤 여자도 눈에 차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어른들은 포기하고 말았다. 나의 독신 선언을 인정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나이를 먹어가는 것을 슬퍼하지만 나는 점점 마음이 설레여왔다. 그녀와의 만남이 멀지 않았으니까. 환상을 그리며 살아가는동안 보게 되는 현실은 점점 나를 피폐하게 만들어간다. 교수가 된 이후 겪게 되는 대학교수간의 파벌다툼, 치정 관계, 돈 관계, 그 외 수많은 욕망들...나는 지금 어릴때 그토록 경멸했던 추악한 군상들 속에 있다. 어차피 나는 출세라던가 돈, 권력, 명예 따위를 원하지 않아서 직접 그 패거리에 몸을 담그진 않았지만 사회 속에 속한 이상 어떤 식으로든 그것들과 관련되기 마련이다. 그런 관련성이 계속 내게 밀접하게 다가올수록 숨이 막혀온다. 혼자여도 살 수 있었던 시기는 10대 때뿐이다. 이젠 혼자여도 혼자일 수 없다. 그래도 내가 모든걸 버리지 않고 버티고 있는 것은 오직 단 한가지 이유에서였다. 다시 만날 나의 환상에게 짧은 시간동안 많은걸 해주려면 많은 도구들과 준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현실에 있어야만 가능하다. 그렇게 나는 환상을 위해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이 되었다.

서른 여덟, 래묘가 왔었던 날이 다가왔다. 평상시의 후줄근한 모습을 벗어던지고 깔끔하게 차려입고 달을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조바심이 났지만 인내를 가지고 기다렸다. 시계바늘이 몇번이나 돌았는지 모른다. 그래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은 한순간의 꿈이었나? 나는 그때 잠시 정신이 나갔던 것이 아닐까? 그럼 지금까지 내 삶은 한순간 겪은 환각때문에 살아온 것인가! 그렇게 부정적인 생각이 머릿속을 몰아치고 있을때, 그녀가 나타났다. 래묘는 20년 전 그 날처럼 달빛을 타고 내려왔다. 모습도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나만 키가 자라고 주름이 생기고 늙어있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본 래묘의 첫마디는 "누구세요? 아저씨는?" 였다. 그건 20년만에 터뜨려 본 대폭소였다. 배를 부여잡고 끅끅거리며 쓰러져버렸다. 그리 신나게 웃은 것은 20년만이었다. 래묘는 이상한듯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내 감을 잡고 나를 알아보았다. 월묘인들은 1천년을 산다고 한다. 그래서 몇십년만에 폭삭 늙지 않는다고 그녀는 말했다. 어찌됐든 래묘는 정말로 20년의 약속을 지켜주었다. 이제는 내가 약속을 지킬 차례였다. 그녀에게 인간세상을 안내해준다는 약속을 말이다.

먼저 지구에서만 먹을 수 있는 맛있는 음식들을 잔뜩 차렸다. 내가 손수 요리한 것들이다. 그녀는 게걸스럽게 전부 먹어치웠다. 정말 왕성한 식욕이었다. 식후에 월궁에선 이런 음식들을 전혀 맛보지 못한다고 했을때 어느정도 이해가 되었다. 그 후 차를 타고 그동안 내가 꼽아놓은 명소들을 들르며 드라이브를 시작했다. 서늘한 밤바람을 맞는 것을 래묘는 좋아했다. 달에선 바람을 느낄 수 없다고 한다. 물론 그럴 것이다. 달엔 공기가 없으니까. 화려한 번화가에 들러서 20년전엔 사주지 못했던 쇼윈도의 물건들을 잔뜩 사주었다. 그녀는 자신에겐 안 어울린다며 거부했지만 내가 보기엔 너무나도 어울렸다.

마지막으로 들린 곳은 어느 큰 언덕이었다. 시원하게 펼쳐진 풀밭은 밤이라서 초록의 푸르름을 래묘에게 보여주진 못했지만, 바람에 풀들이 스치는 소리를 통해 나와 래묘의 방문을 환영하였다. 언던 위에 앉아 나와 그녀는 별을 바라보았다. 래묘도 월궁에서 별빛을 많이보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 어떤 별빛보다 지구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머리 위의 토끼귀를 흔들거리자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만져버리고 말았다. 래묘는 깜짝 놀라며 휙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리고 나에게 "뭐야...! 나는 귀가 예민하단 말야." 하고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푹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귀여워서 머리를 계속 쓰다듬게 되었다. 결국 귀가 자꾸 자극되다보니 래묘는 귀까지 빨개져서 그만하라며 나에게 앙증맞은 주먹을 휘둘렀다. 정말 천국 속에 있는듯한 시간이었다. 별로 오랜 시간이 아니었는데 벌써 해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나는 20년전부터 태양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햇빛은 밤의 장막 안에서 행복한 꿈을 꾸는 나를 현실로 불러들이는 잔인한 존재였다. 그녀가 떠나기 전, 나는 이 날을 위해 구해놨던 목걸이를 그녀에게 걸어주었다. 초승달 모양을 한 목걸이였다. 래묘는 소중히 간직하겠다며 그 목걸이를 두 손 모아 꼭 쥐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20년 후의 만남을 약속하며 그녀를 떠나보냈다. 그때는 이미 완전 늙어버려 노인이 된 이후겠지만 상관없다. 이제부터 살아갈 20년도 오늘과 같은 단 하룻밤의 환상을 위한 날들일테니.

20년이란 세월은 나에겐 그렇게 긴 시간이 아니다. 그냥 사건의 나열이며, 별 가치 없는 일들의 연속일뿐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때도, 날이 갈수록 미쳐가는 세상에 대해 뉴스가 떠들어댈때도, 그리고 거대 파벌의 수장으로 있는 교수의 뜻에 따르지 않았다고 교수직에서 해임되었을때도 나는 어떤 감정도 들지 않았다. 이미 다음 환상을 위한 준비는 끝마쳐놨기 때문이다. 더 이상 이런 쓰레기같은 세상에서 내가 버티고 있어야 할 의미가 없다. 주름의 골은 깊어지고 검은 머리카락은 절반이 흰 머리카락으로 변해버렸다. 오십이 넘자 각종 병마가 나를 닥쳐왔다. 관절염, 위궤양, 고혈압...늙어간다는 것을 채감하게 해준 그 병들과 싸우는 일이 내가 지금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 와중에도 래묘를 위한 하룻밤의 데이트는 열심히 준비하였다. 늙고 병든 나일지라도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을테니 말이다. 순간순간 어지러움과 함께 쓰러질때가 가끔 생긴다. 그런 증상은 이젠 현실을 직시할 수 없을 정도로 나를 몰아간다. 책을 읽던 도중, 정신을 차려보니 바깥이 낮에서 밤으로 바뀌어 있었다. 또 다시 눈을 떠보니 낙엽이 떨어지던 나무에 눈이 가득 쌓여있었다. 시간의 흐름조차 혼란스러워 질 즈음, 만남의 시간이 다가왔다.

서 있기에는 힘이 들었기에 의자를 가져다놓고 앉았다. 2층 테라스는 낡아서 금방이라도 폭삭 주저앉을것만 같았다. 달빛은 그대로인데 주위는 모든 것이 변해있었다. 모든 것은 변해가는데 저 위의 별들과 달만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고대의 인간들은 하늘을 숭배하고 신들이 하늘에 살았다고 믿었을 것이다. 지상의 것들은 끊임없이 변하는데 하늘만은 10년이 지나도, 100년이 지나도 그 자리에 있다. 인간은 태어나고 자라고 죽어가지만 하늘은 태양과 달이 뜨길 영원히 반복한다. 신이 있다면, 신이 인간과 다르다면 그런 존재이지 않을까. 고대인들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시계바늘은 아까 봤던 숫자에서 이미 다른 숫자로 4번이나 지나가 있었다. 조금만 더 지나면 태양이 뜰 시간이다. 뭔가 이상하다는걸 느꼈다.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건가? 그렇지 않다면...왜 달빛은 나를 비추지 않는거지. 왜, 그녀는 오지 않는거지...?

짧은 상념이 끝나고 다시 조금의 시간이 흐른 뒤에도 래묘는 오지 않았다. 달은 아무 일 없다는듯이 떠있기만 하다. 혹시 날짜를 착각한 건 아닐까 싶어 달력을 보았지만 오늘 맞았다. 새빨간 동그라미로 칠해진 그 날짜임이 분명했다. 어느덧 달은 그 휘광이 약해져가고 태양이 자기 머리의 끄트머리를 조금 내밀고 있었다. 나는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 무엇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 어떤 의미도 지금의 나에겐 와닿지 않는다.
래묘는 오지 않았다. 20년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 이후의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진 기억이 나질 않는다. 흐릿하게 남은 잔상을 떠올리자면, 아무래도 난 미쳐있었던거 같다. 나의 집이 불타고 있었다. 50년동안 나와 함께 했던 보금자리를 전부 불태워버린 것이다. 그리고 광인처럼 온갖 행패를 부리고 다녔다. 사람들은 광인이 된 늙은이를 피했다. 무서워서 피하는게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는거다. 인간 이하의 존재를 보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렇게 내가 싫어하던 추악한 어른들과 나는 다를 바 없는 괴물이 되버렸다. 그동안 쌓아왔던 모든 재력, 명예, 평판들도 다 사라져버렸다.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내가 원하는 한가지를 위해서라면 그런것 즈음은 다 내동댕이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한가지를 얻을 수 없었다. 환상은 사라졌다. 달빛과 함께 시작된 나의 환상은 부서진 약속과 함께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 지하철 계단에 넝마를 입고 쓰러져 자고 있었다. 세상은 그새 엄청나게 바뀌었다. 내가 젊었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세계의 변화속도는 가파른 곡선을 그리며 증가해갔다. 이젠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세상이 바뀌어있는 것이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났는지도 모를 시간을 미쳐있었으니 모든 것이 새로울 수 밖에. 그런데 세상이 변하든 말든 지금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정신을 되찾았을뿐 나에겐 아무것도 없다. 생의 의미를 잃었다. 그래서 그냥 지하철 한구석에 쓰러지기로 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으니까. 사람들이 지나간다. 수많은 인간들이 스쳐간다. 그것을 멍하니 쳐다본다. 그렇게 또 다시 몇년을 있었다. 이틀에 한끼 먹을까말까한 식사 덕분인지 몸 구석구석 고장나지 않은 곳이 없다. 사실 왜 내가 뭔가를 먹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본능인거 같다. 나의 마음은 죽었지만, 몸은 살아가려고 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기침 몇번을 하더니만 침에서 피가 섞여나온다. 그것을 보고 슬슬 죽을 때가 된 것을 직감했다. 별 생각은 안 들었다. 삶의 의미가 없는 자에게 죽음도 의미는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근데 뭔가 마음 속 한구석에 걸리는게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봤다. 아아, 그렇구나. 내가 죽을 곳은 여기가 아닌 것을 깨달았다. 아직 나에게 남겨진 의미를 찾아내었기에 몸을 일으켜세웠다. 어느 한구석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지만 절뚝절뚝 발걸음을 옮겨서 내가 목표로 하는 곳으로 향했다.

지상의 모든 것은 변한다고 했던가? 물론 그렇다. 하지만 그렇다면 이곳은 지상에 속한 곳이 아닐 것이다. 하늘을 닮은 그 곳, 래묘와의 두번째 만남에서 이별장소였던 광활한 풀밭에 나는 도착했다. 밤하늘은 오래전 그 날처럼 아름다웠다. 달빛과 별빛의 홍수. 나는 털썩 주저앉아 예전의 만남을 떠올리며 미소지었다. 여기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이라도 행복한 기억 속에 사라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만족이다.
기침은 심해져서 이젠 핏덩이가 통째로 뱉어진다. 속은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못할만큼 망가져있었다. 앉아있을 기력도 없어서 풀밭에 풀썩 드러누워버렸다. 하늘의 빛이 너무 시리다. 주변 사물들이 가물가물해지고 몸뚱이는 지쳐간다. 슬슬 삶의 끈을 놓을때인가?
마지막으로 너무나도 밝게 빛나는 달빛을 바라본다. 나의 인생은 저 달빛으로 인해 시작되었다. 달에 미쳐서 하룻밤의 환상을 위해 모든 인생을 희생했다. 이제 끝도 저 달로부터 맺을 것이다. 달빛을 맞으며.

그런데 달빛이 너무 밝았다. 지나치게 밝았다. 이런 환한 달빛을 보았던 것은...평생에 단 두번뿐이었다. 죽기 직전의 환상인가? 그것만이라도 좋다고 생각했다.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환상이 아니었다. 현실이었다. 정말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이것도 환상은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떨어지는 눈물이 내 볼에 닿는 순간 나는 마침내 잃어버렸던 것들을 되찾았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40년전, 아니 60년전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내가 준 초승달 모양의 목걸이도 그대로 걸고 있었다.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내 곁에 와주었다. 계속 해서 "미안해, 정말 미안해!"하고 펑펑 눈물을 쏟았다. 그녀의 품이 정말 따뜻했다. 나의 인생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이미 기력따윈 하나도 없었지만 모든 힘을 다해 손을 들었다. 그리고 슬피 우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어떤 말을 하고 싶었지만 소리가 나질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최대한으로 할 수 있는 것을 그녀에게 주었다. 내 인생, 가장 행복한 미소를 그녀에게 지어보였다. 래묘도 눈물로 엉망진창이 된 얼굴이지만, 내가원하는 것을 주었다. 그래, 나는 그녀의 웃는 모습이 좋다. 이것으로 만족한다.
나는 이제 혼자가 아니다. 달에서 내려온 어떤 소녀가 내 곁에 있어주기 때문이다. 달엔 토끼가 산다. 그것도 아주 귀여운 토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