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동생 죽이기(Killing My Sister)
- 작성일 2010-01-09
- 좋아요 0
- 댓글수 0
- 조회수 1,158
<여동생 죽이기 (Killing My Sister)>
*
나의 이름은 강세환이다.
올해 열다섯 중학교 2학년이다. 키 161cm 몸무게 46kg으로 또래 중에서는 약간 성장이 빠른 편이다. 성적은 상위 10%안에 드는 상위권, 학급에서는 부반장을 받고 있는 소위, 우등생이라는 생물이 바로 나다.
그런 나지만 당연하게도 고민이 있다. 고민만 있을까 호기심도 많다.
중학교로 올라오면서 그런 고민이나 호기심은 점점 커져만 가고 있다. 이를테면 그동안 전혀 관심이 없던 여자애들에게도 이상하게 자꾸 시선이 가는 것이다. 그런 것만 아니라 가끔은 사타구니 근처가 답답해질 때도 있다. 이것은 내가 2차 성징을 겪고 있기 때문이라는 걸 지식을 통해 알고 있다.
그 결과로 중학교 2학년인 남자는 남자의 인생에서 제일 야한 시기이다. 아침부터 밤까지 언제나 야한 생각으로 가득하다. 나 역시 마찬가지라서 때로는 지칠 때도 있다. 겉으로는 우등생이고 모범생인척 하고 있지만 머릿속은 차마 말 못할 광경으로 가득 차 있을 때도 있다. 엄마아빠 몰래 성인잡지의 제일 야한 페이지라던가 야동도 몰래 방구석에 숨겨두고 있다.
뭐, 이런 성적인 호기심이나 고민이냐 다른 녀석들도 하는 고민일 것이다.
문제는 내게 있어 이것보다 더 큰 고민이 있다는 점이다.
오후 4시. 학교에서 돌아온 나는 제일 먼저 컴퓨터를 켠다. 그리고 게임을 하며 학원 시간이 될 때까지 시간을 보낸다. 그러던 중에 아래층이 시끌벅적해짐을 알아차렸다. 나는 조용히 문을 열고 거실을 살펴보았다.
같은 학교 1학년인 내 여동생 세린이가 이리저리 무언가를 하는 것이 보였다.
‘또 아빠 엄마 몰래 이상한 짓을 할려는건가?’
나는 살짝 긴장하며 문을 닫았다. 괜히 여동생의 일에 관련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원래 그런 시기가 있다. 아무리 친했던 남매라도 서로를 의식하고 거리를 두고 마주치지 않으려는 기간이 있다. 지금이 우리 남매에게 있어 그런 시기인 것이다.
정지했던 게임 화면이 돌아가기 시작하자 나는 다시 게임에 집중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게임을 다시 멈춘 후 바탕화면으로 나와 EBS 폴도를 클릭했다. 폴더 안에는 수십 개의 동영상 파일과 이미지 파일이 들어있다. 나는 다시 문을 돌아본 후 모니터를 바라본다.
동영상을 실행할까 말까 고민하다 결국 폴더 창을 닫았다. 시계를 살펴보니 학원시작까지 1시간 정도 남았다.
나는 다시 게임에 집중한다.
하지만 머릿속은 이미 게임과는 전혀 다른 불안과 의문으로 가득찼다.
‘저 녀석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그러고 보니 세원이가 안보이네. 설마 또 세원이를 괴롭혔나.’
강세린. 내 여동생이자 쌍둥이 남동생 세원이의 1분 빠른 누나이기도 한 올해 중학교 1학년의 무서운 계집이다. 뭐가 무서운가 하면 일단 녀석은 머리가 무섭게 좋다. 중학생인 주제에 고등학생 형들이 배운다는 두꺼운 수학책을 보고 다니고 영어도 캐나다에서 왔다는 원어민 교사(참고로 백인 남자)와 아무런 막힘없이 줄줄 대화를 한다. 영어만이 아니라 한자도 이미 2급을 따놓은 상태로 올 겨울에 1급을 딸 생각이란다. 이것도 무섭지만 더 무서운 건 녀석의 얼굴이다. 솔직히 말해 우리학교의 모든 여자애들보다 내 여동생이지만 세린이가 훨씬 예쁘게 생겼다. 내 여동생이라서 하는 빈말이 아니다. 오히려 내 여동생이라는 게 겁이 날 정도다. 그에 비해 오빠인 나는 제법 열심히 한다고 하지만 성적은 반에서 상위권인 수준이다. 남들이 보면 그렇게 못하는 편이 아니지만 세린이와 같은 유전자를 물려받았다는 입장에서 보면 그야말로 비교가 불가능한 불량품이다. 녀석을 볼 때마다 부모님이 원망스러워진다. 세린이를 낳을 생각이었다면 나를 낳지 말던가 나를 낳을 생각이었다면 세린이를 낳지 않았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역시 남매인 탓인지 내 얼굴이 그런대로 봐줄만 하다는 정도. 하지만 그것도 어린 나이라는 단서가 붙은 한에서다. 나이가 들면 어떻게 변할지 알수 없는 그런 위태로운 상태라고 할까. 아무튼 이런저런 비교대상이 되는 탓에 나는 언제나 조연이다. 언제나 주인공은 세린이고 나와 세원이는 녀석의 옆에서 주인공을 더 빛나게 해주는 그림자 역할인 것이다. 어떻게 보면 나보다 불쌍한 건 쌍둥이 동생인 세원이다. 녀석도 제법 반반한 얼굴이긴 하지만 무엇이 문제인건지 녀석의 행동과 말투는 어눌하기 짝이 없다. 좋은 건 죄다 자기 누나에게 빼앗기고 남은 유전자를 물려받은 그런 형편인 거다. 무섭게 예쁘고 무섭게 머리가 좋다. 하지만 녀석의 무서움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결정적으로 여동생인 세린이를 무서워하는 이유이다. 모두에게 이쁨을 받고 착한 소녀 역할을 세린이의 진짜 모습을 아무도 모른다. 오직 나와 세원이만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 즉 엄마아빠와 어른들의 눈을 속이고 나와 세원이를 괴롭히는 이중적인 얼굴을 가능하게 하는 [연기]가 녀석의 진짜 무서운 점이다. 처음엔 나도 믿을 수 없었다. 무척이나 나를 잘 따르고 귀여운 짓을 하던 사랑하는 여동생이었다. 그러던 녀석이 갑자기 돌변한 것은 작년 여름부터였다.
아무것도 모르던 그때의 나는 뭐든지 자신이 있었다. 중학생이 되었다는 셀레임과 마치 게임에서 레벨업한 것 같은 성취감에 스스로도 믿기지 않을 만큼 나는 최고였다. 수학도, 영어도, 운동도 내가 하고자 하는 마음만 먹으면 그 만큼 해낼 수 있었다. 그 무렵엔 나 역시 착하고 우수한 모범 어린이였기 때문에 누구를 질투한다는가 미워한다는 감정은 있을 수 없었다. 여기엔 아직 초등학생이라 그 재능과 두뇌를 제대로 점검받지 못했던 여동생도 포함되어 있었다. 누구든 마다하지 않는 넓은 포용력으로 친구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았다. 나는 언제나 앞장섰다. 누구든 이해해주고 무슨 잘못을 하든 용서해주었다. 방학을 맞이해서 잠시 외할머니 댁에 갔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어른들은 모두 술과 화투에 빠져 아이들에게 신경쓰지 않고 있던 한낮이었다. 나는 동생들과 사촌들을 이끌고 어릴 때부터 아지트나 다름없었던 산기슭의 들판으로 달려갔다. 아이들과 편을 나눠 술래잡기도 하고 개구리를 잡기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무런 죄책감도 없었다. 아무런 죄악감도 없었다. 우리는 아직 어렸다. 고작 열네살, 열세살일 뿐이었다. 나와 동갑인 이종사촌 주원이가 세린이의 상의를 벗긴 것은 어떤 의도가 있었던 게 아니었다. 그것은 실수였고 오히려 주원이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다행히 아주 잠깐이었고 세린이 역시 당황하긴 했지만 이내 수줍게 웃으며 풀숲으로 숨어들어갔다. 아주 잠깐 녀석의 조금 도드라진 우윳빛 살갗이 시선을 따갑게 만들었지만 정말로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그냥 그 뿐이었다. 사춘기에 다다른 사촌들 간에 있을 수 있는 작은 해프닝일 뿐이었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서도 살을 맞대며 장난치고 놀았다.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날 밤. 주원이가 손톱 하나를 잃기 전까진. 나는 머리를 절래 흔들었다. 하지만 이내 또 다른 기억, 몸 여기저기가 간지러운 그런 기분이 드는 과거가 본능적으로 떠올랐다. 시골에서 돌아와서도 나는 한동안 세린이의 변화를 눈치챌 수 없었다. 눈치채더라도 믿을 수 없었다. 그만큼 어릴 때 부터 세린이는 누구에게도 미움을 받을 수 없는 아이였다. 그때의 나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녀석을 좋아했고 아꼈었다. 세린이는 귀여운 동물이나 작은 물건을 보면 언제나 조심스럽게 대하고 함부로 하지 않았다. 길가에 핀 작은 꽃 하나를 누군가 꺾으려 하면 바로 눈물을 글썽이며 꺾지 못하게 만드는 아이였다. 그러다 내 눈앞에서 그 일이 벌어졌다. 아마도 세린이가 나와 세원이의 눈치를 볼 필요없이 마음껏 본성을 드러내도 상관없다고 마음먹은 게 그날부터였을 것이다. 그날따라 집안엔 어른이 없었다. 아이들만 이었다. 다시 말해 나와 세린이, 세원이 이 셋뿐이었다. 세원이는 잠이 많은 아기같은 녀석이라 집에서 쉬는 날이면 대부분 방에서 꿈나라에 가있곤 했다. 그런데 그날따라 녀석은 마당에서 흙장난을 하고 있었다. 나는 넓은 창을 통해 거실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멀뚱멀뚱 거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던 것은 나와 세린이이는 둘다 아무 말없이 시선을 밖을 향하고 있었다. 솔직히 그날 세린이의 달라진 몸을 본 탓에 (세린이는 초등학교 입학 이후 1층의 독방을 썼다. 그 방은 엄마아빠가 쓰는 안방의 바로 옆이다. 나와 세원이의 방은 2층에 있다.) 조금 거리감이 생기긴 했지만 딱히 싫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때 갑자기 세린이가 일어서더니 현관쪽으로 걸어갔다. 은근히 세린이를 신경쓰고 있었던 나는 그 기세에 깜짝 놀라 딸꾹질을 하고 말았다. 세린이는 그런 나를 잠시 의아하게 바라보다 이내 마당으로 나가버렸다. 나는 딸꾹질을 하면서 그 광경을 바라보아야 했다. 세원이는 어떻게 잡았는지 손에 방아깨비 한 마리를 잡고 있었다. 곁에 다가온 세린이가 빙그레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순진하고 누나를 잘따르는 세원이는 의심없이 자신의 보물을 넘겨주었다. 그리고... 세린이는 그것을... 방아깨비를...먹었다. 꿀꺽 하고 살아있는 통째로 삼켰다. 창을 통해 걸려진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내 뱃속에서 방아깨비가 방아를 찧고있나봐. 꺄르르르.” 손으로 자신의 배를 쓰다듬던 세린이는 무슨 생각인건지 세원이의 오른손을 붙잡아 자신의 배를 쓰다듬게 했다. 깜짝 놀란 세원이가 바로 손을 빼려했지만 세린이의 날카로운 눈빛에 울먹이며 파르르 떠는 손으로 누나의 배를 만졌다. “세원아, 어때? 누나 꼭 임신한 것 같지? 누나 지금 방아깨비를 임신한거야. 너도 느껴지니? 누나 너무 행복해. 넌 모르겠구나. 왜냐하면 넌 남자애니까. 이런 기분은 여자만 알 수 있거든.” 나는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목소리조차, 숨조차 뱉을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분노, 알수 없는 두려움. 그것이 전신을 지배하고 있을 뿐이었다. 기억은 다시 이어진다. 그 일이 있은 후 한달 뒤였다. 나는 그 이후 세린이를 마주볼 수 없게 되었다. 내가 잘못한 것도,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그 아이를, 그 아이의 눈을, 그 아이의 배를 보는 것이 두려웠다. 세린이가 엄마아빠 앞에서와 우리만 있을 때 행동이 다르다는 것은 이미 알아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저 세린이의 곁에 가는 것이 내게 있어 저항감이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고만 생각했었다. 엄마아빠가 외출을 하고 우리들만 남게 될 경우에 나는 참을 수 없는 불편함에 친구집으로 도망치듯 가버리곤 했다. 하지만 그날은 그럴 수 없었다. 비가 내렸던 것이다. 무시무시할 정도로 축축하고 음산한 늦여름비가. 비를 맞으며 내가 굳이 세린이를 피해야 하는 것이 처음으로 자신의 손해라고 생각했다. 이유없이 자신만 피해를 입고 있다고 느꼈다. 세린이에 비해 어른들의 주목과 귀여움을 받지 못했던 나지만 이 정도 까지 화가 나지는 않았었다. 나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거실에 앉아 텔레비전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케이블 채널에서는 코미디 프로그램의 재방송을 하고 있었고 나의 정신은 어느새 거기에 팔려있었다. “형, 저기 벌레있어.” 세원이가 나를 부르며 손으로 가리킨 방향엔 정말로 녹색의 곤충 한 마리가 있었다. 나는 풀벌레거니 싶어 티슈를 한 장 뽑아 가까이 다가갔다. 하지만 나는 벌레를 잡을 수 없었다. 메뚜기라거나 풀무치 따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사마귀였다. 그것도 배가 잔득 부른 암컷 사마귀였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갑자기 느껴진 소름끼침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내 옆엔 세린이가 다가와 있었다. 녀석은 사마귀를 마치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세,세린아. 너는 저 뒤로 물러나 있어. 이 놈은 내가 처리할게.” 혹여나 세린이가 또다시 그 ‘짓’을 할까 두려워 나는 포석을 깔았다. 그런데 세린이는 내 말이 전혀 들리지 않은 것인지 이번엔 밝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 순간 나는 어떤 이유에선지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마치 가위에 눌린 듯 꼼작못한 채 세린이의 다음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아야만 했다. “오빠, 이 아이는 지금 사랑을 하고 싶어하는 거야. 그러니 죽이면 안돼.” 그 말에 나는 다소 안심했다. 적어도 입안에 넣는 일은 없을 것이니까. 하지만 녀석의 다음 행동에 나는 내가 지금까지 받았던 충격보다 더욱 더 큰 충격으로 몸을 떨어야 했다. 세린이는 마당으로 나가선 무언가를 찾아 헤매더니 이내 손안에 무언가를 가지고 돌아왔다. “기뻐해, 내가 네 애인을 데려왔어.” 밝고 가벼운 목소리로 여동생은 손을 폈다. 그 안엔 갈색의 작은 벌레 한 마리가 있었다. 생긴 것은 바닥의 커다란 암컷 사마귀와 똑같았다. 그것은 수컷 사마귀였다. “자, 예쁜 사랑 나누렴.” 그때 말렸어야 했다. 그랬어야 했다. “어머나, 그렇게 기쁘니.” 커다란 암컷 사마귀가 바닥에 닿은 수컷 사마귀를 보자 곧장 달려들었다. 재회를 기뻐하는 연인처럼 달려와 암컷은 수컷을... 잡아 먹었다. 물어 뜯었다. 소리가 닿을 정도로 야금야금 씹어 먹었다. 머리부터 천천히. 파르르 떠는 수컷이 움직임을 멈출 때까지 즐겁게... 확실히 짝짓기는 이뤄졌을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나는 텅비어 버린 머리를 들어 여동생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세린이는 나를 보며 빙그레 웃더니 말했다. “오빠, 난 이 사마귀들이 부러워. 한 쪽은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고 한쪽은 그 모든 것을 받아들여. 나는 그런 사랑을 하고 싶어.” 절대로.. 절대로 초등학교 6학년 여자아이의 입에서 나올 대사가 아니었다. 언제나 얼빵한 표정을 짓는 세원이조차 그때엔 울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마치 잡아먹힌 수컷이 자기라도 된다는 듯이. 그 외에도 여동생의 기이한 행적은 이어졌다.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끔찍한 일도 어른들의 눈이 없다면 태연히 하고 마는 녀석의 모습에 나는 울고 싶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내가 세린이에 대해, 또 녀석의 기이한 행동과 이중성에 대해 느끼는 말할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함은 곧 공포심으로 변했고 어렵지 않게 이것은 증오로 변해갔다. 거기에 더해 중학생이 되자 녀석이 가지고 있는 재능과 외모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걷잡을 수없이 커지는 녀석에 대한 주변으로부터의 관심과 애정에 반비례해 나에 대한 그 모든 것들은 사라져갔다. 녀석이 미웠다. 용서할 수 없을 정도로 얄미웠다. 하지만 그런 여동생에게 나는 이상한 감정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녀석을 참을 수 없을 만큼 증오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고백하면 나는 여동생을 좋아한다. 단지 녀석이 예쁘기 때문에 좋아한다. 단지 머리가 좋기 때문에 좋아한다. 단지 그런 이유로 나는 녀석을 좋아한다. 처음엔 나 자신을 혐오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내가 이런 혼란과 고통을 느끼는 건 전부 저 녀석이 마녀이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예쁘고,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똑똑하고,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받는다. 그건 전부 녀석이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결론 밖에 나오지 않았다. 나는 내가 미쳤다고 생각한다. 확실히 나는 미쳤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의 여동생을 죽일 생각을 할 리가 없으니까. 내가 자신의 친 여동생을 죽일 결심을 하게 된 계기는 지금까지 설명한 전부와 거의 맞먹을 정도의 충격적인 사건 때문이다. 이 사건은 2개의 잔인하고 몸서리치고 용서할 수 없는 일이 연달아 일어난 것을 말한다. 두 개의 사건은 모두 어느 날 하루 동안에 발생했다. 지금으로부터 한달 전, 나는 잔득 화가 나있었다. 중간고사 성적표가 나온 날이었다. 교실 뒤의 공고란에 붙은 시험성적 결과에서 나는 반에서는 3등, 전교에서는 19등을 했다. 전교생이 300명이 넘는 것을 감안하면 상위 10% 안에 들어가는 좋은 성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옆에서 소곤소곤 혹은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들렸다. 전교 2등인 녀석이 실실 쪼개며 웃는 걸 이빨을 갈며 참으면서 나는 성적표를 노려보았다. 나는 왜 할 수 없을까. 그렇게 노력했는데 어째서 늘 그대로일까. 내 머리는 어째서 녀석처럼 천재가 아닌걸까. 차라리 내가 공부에 전혀 의미를 두지 않거나 했으면 이렇게까지 열등감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할 줄 아는 게 이것 뿐이다. 그런데도 녀석에 비하면 이렇게까지 뒤쳐진다.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인 동환이가 와서는 친근하게 어깨위에 손을 얹는다. “너무 속상해 하지마. 니 동생이 워낙에 괴물급인거니까. 반칙인거지. 거기에다 애초에 학년도 다르잖아. 자격지심일 뿐이라고. 그만 가자.” 열다섯 나이에 비해 아는 것도 많고 속이 깊은 동환이의 위로에도 나는 전혀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 확실히 학년이 다른 여동생과 비교해봤자 의미가 없다. 하지만 비교를 당한다. 원하지 않는데도 이렇게나 말이다. 세린이는 입학과 동시에 교사들과 전교생의 주목을 받는 스타가 되었다. 얼굴도 예쁜데다 성적은 전국권이다. 이뻐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 그만큼 같은 피를 나눠가진 나와 세원이가 상처받는다. “세원이 그 녀석 또 어디서 울고 있을텐데.” 세원이는 순해빠지고 별 생각이 없어보이지만 알고 보면 엄청나게 예민한 녀석이다. 분명히 교실에서는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칭찬을 받고 있을 세린이를 멀리서 바라만 보다가 몰래 어딘가로 숨어들어가 꼼짝도 안하고 있을 것이다. 나 자신의 열등감에도 분노가 치미지만 세원이 녀석을 떠올릴 때면 출구가 막힌 답답함이 몸안을 가득 채운다. 분명 오늘 저녁 엄마아빠는 세린이의 성적표를 보며 웃음꽃을 피울 것이다. 다 같이 외식을 하러 갈게 뻔할 것이고 만나는 사람마다 딸 자랑에 열을 올릴 것이다. 두 사람은 언제나 그렇다. 늘 조용히 한걸음 물러나 관심과 애정을 바라는 우리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장미처럼 눈부신 빛을 발하는 공주님에게만 온 사랑을 쏟아넣는 것이다. 더 약이 오르는 건 그것을, 자신이 주목받고 사랑받는다는 걸 세린이 본인이 철저히 이용한다는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자신이 예쁘고 똑똑하다는 걸 잘 알고 있고 자기 때문에 피를 나눈 오빠와 남동생이 끔찍하게 상처받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녀석은 더욱더 자신을 밝은 쪽으로 향하고서 어둠에 가려진 나와 세원이를 비웃는다. 그러고서 자신은 착하고 순결한 소녀인양 미소를 짓는다. 나와 세원이 앞에서만 보이는 그 섬뜩하고 더러운 본성을 철저히 숨기는 것이다. 정말로 마녀다. 이보다 악독한 계집은 있을 수가 없다. 아마도 이때가 처음으로 여동생을 죽이고 싶다는 살기가 치솟아 오른 순간이었을 것이다. 나쁜 일은 연달아 일어나는 법인 것을 증명하듯 녀석을 죽이고 싶게 만든 계기는 그날 오후에 일어났다. 화를 식히기 위해 강변을 어슬렁거리다가 해가 떨어질 때쯤 귀가했다. 그런데 현관에 여동생 것이 아닌 못보던 구두가 한짝 보였다. 나는 잠깐 당황했지만 어차피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라 생각하고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2층의 내 방문이 열려있는 것을 보자 짜증이 확 치솟았다. 들켜선 안되는 물건들이 있다는 것 외에도 가장 보이기 싫었던 상대에게 내 치부가 보인 그럼 감정이었다. 나는 문을 벌컥 열어젖힌 후 고함을 질렀다. 아마 욕도 했을 것이다. 씩씩 거리며 나는 어깨로 숨을 골랐다. 세린이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거짓의 우는 표정을 지은 후 작은 목소리로 ‘미안해, 오빠. 함부로 방에 들어와서.’하고 말했다. 감정은 여전히 뜨거웠다. 꺼져! 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울고 싶었다. 정말로 눈물을 펑펑 쏟고 싶었다. 이아연, 1학년의 귀여운 소녀는 내가 봄부터 소중히 숨겨온 나의 짝사랑이었다. 이것이었냐. 이것이 목적이었냐. 나는 눈빛으로 외쳤다. 내가 아연이를 몰래 쫓아다니는 걸 머리 좋은 녀석이 모를 리가 없다. 그리고 이렇게 해치운다. 분명히 내방에 아무렇게나 박혀있었을 더러운 물건들을 봤겠지. 컴퓨터 바탕화면도 봤겠지. 거봐, 모니터에 불이 들어와 있잖아. 나는 이를 꽉 물었다. 죽인다. 녀석을 죽인다. 죽이고 싶다.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친 여동생을 내 손으로 죽이고 싶다. 나는 계단을 내려와 소파에 앉아 있는 세린이를 지나쳤다. 녀석은 슬쩍 나를 쳐다본 후 기분나쁜, 하지만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학원 가는거야? 오빠는 언제나 열심히네. 잘 다녀와.” 구역질이 났다. 매일 쉬지 않고 학원에 다녀야 겨우 지금 성적을 유지하는 나와 달리 자신은 이렇게 여유롭지만 성적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것을 비꼬는 말이 틀림없다. 나는 대꾸하지 않고서 집을 나섰다. 길을 걸으면서 생각했다. 어떻게 죽일까. 언제 죽일까. 어떻게 하면 더 고통스러울까. 많은 방법을 구상해보았다. 엉뚱한데다 비현실적인 방법까지 생각나는 대로 전부 끄집어 내보았다. 그리고 어제 드디어 결론에 도달했다. 역시 녀석은 죽어야 한다. 내 여동생인 세린이 죽어야 나와 세원이가 숨통이 트인다. 이것은 생존게임이다. 내가 살려면 녀석을 죽여야만 하는 정당방위인 것이다. 그리고 녀석은 녀석 답게 죽어야 한다. 결행일은 내일 오후, 엄마아빠가 외출하고 나와 녀석, 세원이만 남는 4시간 사이에 해치운다. 방법과 시체처리는 모두 완벽하게 생각해 두었다. 녀석이 사라진 세상을 예상하지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녀석이 죽고 나면 한동안은 엄마아빠도 슬퍼할 것이다. 나와 세원이가 아무리 위로해주어도 소용없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보이지 않는 것들은 잊혀진다. 아무리 특별했던 녀석이라도 10년, 20년 후에는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다.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그런데 왠지 학원에 거의 다다를 무렵 나의 기분은 다시 최악이 되어 있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세수하고 나오던 세원이를 불렀다. 사실 세원이를 끌어들이기는 싫었다. 혹여 계획이 실패하더라도 모든 책임은 나 혼자 짊어갈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불현 듯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이 완벽함에도 상대가 세린이란 것 때문인지 도저히 진정이 되지 않았다. 엄마아빠는 거실에 있고 세린이는 자기에게 일어날 일을 꿈에도 모른 채 아직 자기방에서 학교갈 준비를 하는 중이다. 나는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였다. “세원아, 너 형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해?” “으응... 착한 형아?” 단순한 녀석답게 짧고 바보같은 대답이었지만 나는 만족스러웠다. 다시 기운이 나는 느낌이었다. “그럼 세린이는?” “으응... 세린이 누나는...” 녀석은 쌍둥이인 세린이를 꼬박꼬박 누나라고 부른다. 세원이는 뭔가 고민된다는 듯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한참만에 힘겹게 말했다. “누나는 무서워.” 예상했던 답이었다. 내가 보지 못하는 동안에도 어디선가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세원이가 갑자기 말을 잇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누나는 예뻐. 헤헤.” 무슨 바보같은 말이냐, 너는. 그렇게 당하고도... 나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역시 안되겠다. 세린이 녀석의 마지막 고통스러운 얼굴을 보여주려고 했지만 안될 것 같다. 오히려 쇼크로 어떻게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건 세원이 쪽이다. “그래, 어서 준비해. 학교 가야지.” 나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후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준비는 끝났다. 계획은 완벽하고 뒤처리까지 어디하나 결점이 없다. 하지만 안심하긴 이르다. 설마 친오빠가 자신을 죽일거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있겠지만 그래도 역시 녀석의 머리는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당연히 실패할 경우를 생각해 놓지 않으면 안된다. 학교에 가는 길에도, 수업 중에도, 청소시간에도 나는 온통 한가지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 녀석을, 여동생을 죽인다. 그것도 완벽히 아무도 내가 죽인 것을 모르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집이 가까워질수록 발걸음은 점점 무거워졌다. 망설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두려웠다. 말할 수 없는 무언가가 가슴 한 구석을 콕콕 찔렀다. 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다. 엄마를 불러본다. 대답이 없다. 아빠도 불러본다. 대답이 없다. 나는 서둘러 옷을 벗고 행동을 개시했다. 우선 여동생의 방에 들어가 필기구를 꺼내었다. 그리고 준비해 두었던 말을 쓰기 시작했다. 자살편지. 나는 최대한 녀석의 말투와 글씨체를 떠올리며 정성껏 최후의 편지를 써내려갔다. 없는 것은 꾸며내고 있는 것은 더욱 부풀렸다. 완벽한 여동생에게 자살할 이유 같은 건 없지만 그건 남이 알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전교2등 녀석이 여동생에게 몹쓸 짓을 했다는 ‘거짓말’을 집어넣었다. 이것으로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여동생은 죽고 전교 2등 녀석은 한동안 고생 좀 할 것이다. 편지를 모두 쓴 후 그 상태 그대로 책상 위에 둔 후 방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 여동생이 들어오길 기다렸다. 다행히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20분도 지나지 않아 녀석이 현관문을 열고 ‘학교 다녀왔습니다.’ 하고 건강하게 인사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오랜만에 반갑게 맞아 주었다. 어차피 마지막이니까 이 정도 호사는 베풀어도 될 듯 싶었으니까. 세린이가 방으로 사라지는 걸 지켜본 후 천천히 소파에서 일어섰다. 여동생의 자살 도구로 무엇이 가장 어울릴까 고민했다. 사실 죽이는 방법 보다 이것이 더 큰 고민이었다. 나는 최종적으로 ‘가위’를 선택했다. 나는 천천히 숨을 죽이고 여동생이 옷을 갈아입고 있는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여동생은 미묘한 미소를 짓고 있다. 머릿속에 복잡하다. 그런 나와 달리 여동생은 변함없이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오빠, 부탁 하나 해도 돼?” 나의 침묵을 긍정으로 이해한건지 녀석은 자기 마음대로 소원을 말했다. “키스 해줘.” “뭐? 무슨 헛소리야.” 그 말에는 나도 깜짝 놀라 반응해 버렸다. 나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증오하고 미워하는 여동생의 부탁에 나도 모르게 심장이 두근거린 것이다. “오빠. 부탁이야. 키스해줘.” 죽어가는 여동생의 부탁.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쉰 후 눈을 감았다. 어차피 이걸로 끝이다. 증거도 남지 않는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입을 맞추었다. 입술 끝으로 느껴지는 공허한 따스함이 예상외여서 가슴이 시큰거렸다. 눈을 뜨자 눈물을 흘리며 미소를 짓고 있는 세린이의 예쁜 얼굴이 가까이 있었다. 몸이 떨렸다. 이상하게도 죽어가는 세린이가 아닌 내가 격렬하게 몸이 떨렸다. 그리고 아팠다. “오빠 내 마음 알고 있었지?” “그딴 거 몰라.” “치. 거짓말.” “........” “나... 오빠 좋아해.” 나는 침묵했다. 그것은 외면이었다. 하지만.. “나... 오빠랑 세원이 둘 다 좋아해. 그리고 사랑해. 나 자신보다 더. 오빠가 날 미워하더라도 그것만은 알아줘.” “싫어.” 녀석이 눈이 귀엽게 찡그린다. “그것도 거짓말.” “..........” “역시 오빠는 표정이 다 보여. 그나저나 역시 너무 아프네. 이왕이면 아프지 않은 방식이면 더 좋았을 텐데.” 죽으면 그게 그거지. “하지만 역시 기뻐. 나.. 오빠 손에 죽는거니까. 누구에게도 아닌... 나 자신도 아닌 오빠에게니까. 그래서 그걸로 됐어. 그리고 미안해. 오빠한테 이런 짐 지우게 해서.” 마치 내가 자기를 죽이려했다는 것도 모두 계산에 있었다는 듯한 오만한 말투다. 마지막까지 기분 나쁜 녀석이다. “안녕, 오빠. 안녕, 세원아. 그리고 안녕...나.” 그 말을 끝으로 세린이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동시에 나 역시 점점 시야가 흐려졌다. 졸렸다. 너무 졸려 거부할 수 없었다. 아마도 피곤한 탓일 것이다. 눈을 감았다. 마지막으로 내 의식의 끝에 사랑하는 여동생의 미소가 걸렸다.
그리고 나의 숨이 멎었다. ** ====================================== 성별: 여성. 그러나 서브인격인 1살 연상 오빠와 쌍둥이 남동생은 모두 남성의 인격. 어린시절부터 맞벌이였던 부부의 잦은 외출로 혼자였던 적이 많았고 그로 인해 생겨난 막대한 외로움이 아이로 하여금 스스로 형제를 만들어내도록 했다. 거기에다 학교에서 아이는 심각한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한 듯하다. 그로인해 인격분열이 더욱 가속화되었다. 각각의 인격이 서로를 질투하고 죽이려고 하는 만큼 그 문제는 심각해졌다. 원래대로라면 본체와 다른 성별인 오빠와 남동생이 아이를 사랑해주어야 했다. 아이는 두 사람을, 특히 오빠를 사랑하지만 그 사랑을 돌려받지 못했다. 부모의 몰이해로 인해 아이는 스스로 만든 인격에게 미움과 증오를 받고 말았다. 학교에서 친구들이 아이의 다중인격을 놀림의 대상으로 만드는 바람에 증세는 점점 심각해져 갔고 심지어 일부 학생들로부터 성적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그 모든 것이 결국 이런 끔찍한 결과를 만들고 말았다. 남자의 한숨과 함께 손에 쥐어져 있던 소견서는 책상위로 낙하했다. 말이 소견서지 이건 박사의 개인의견이나 다름없었다. 똑똑. 노크소리에 남자가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들어와.’하고 허락한다. 문이 열리자 30대 초반의 젊은 남성이 고개를 숙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를 보며 남자가 물었다. “아직도 부모들은 인정하지 않고 있나?” “네. 완전히 부인하는 중입니다. 믿을 수 없다고 난리도 아닙니다.” “뭐, 보통의 부모들이라면 대게 그런 반응이 당연하지.” “박사님, 그게 그 아이에 대한 최종소견서입니까? 읽어 봐도 됩니까?” 박사가 허락하자 남자는 조심스럽게 종이를 집어 들었다. 읽어 내려가는 그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잠시 후 남자는 종이를 책상위로 되돌려 놓으며 좀 전의 박사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불쌍한 아이군요. 이건 도대체 누구의 잘못인걸까요?” “일차 책임은 부모에게 있지.” “역시 그렇겠죠? 하지만 그들에게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으니까요. 게다가 요즘에 맞벌이 아닌 가정이 오히려 드물 정도 아닙니까.” 박사는 그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다 이내 시선을 돌렸다. 어쩌다 변호사 입장이 된 남자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왜 그 아이는 자살했던 걸까요? 아니 어째서 아이는 자신이 만든 가상의 형제들에게 살해당해야 했던 걸까요?” 그것이 가장 이해하기 힘들었다. “사랑했던 거겠지.” “네?” 이지적이고 논리적인 남자의 입에서 너무나도 통속적인 답변이 나오자 남자는 할말을 잃었다. “부모에게 관심을 받지 못했던 여자아이는 자신을 사랑해줄 남자형제를 만들었어. 물론 자신 역시 그 둘을 사랑했겠지.” “그런데 어째서...” “문제는 자신이 구원받길 원했던 거야. 아니 그것이 잘못이었다는 건 아냐. 하지만 결국 그것이 문제였던거지.” “그 말은...” “부모에게 관심 받지 못했던 면을 오빠에게, 학교에서 따돌림 당했던 면을 남동생에게 각각 투영했던 거지. 결국 아이 스스로 짐을 형제들에게 떠넘기고 자신만 구원받고자 했던 거지.” “하지만 어차피 자기가 만든 허상 아니었습니까?” “그러니까 좀 전에 말하지 않았나. 사랑했던 거였네. 자신의 불행을 떠넘길 더미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거지. 아이는 여자아이, 다시 말해 소녀였네. 그 감성은 남자인 자네나 나로써는 모르는 영역인 셈이지.” “결국 아이는 자신을 사랑해주고 구원해줄 오빠와 남동생의 미움을 받아 버린 거군요.” “얽히고 설킨 실타래를 결국에 가서는 스스로 풀 수 없게 된거야. 완벽한 자가당착이지. 거기에다 학교 선배에게 성폭행까지 당했으니 그것을 견딜 수 없게 되자 아이는...” 박사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가위를 들고 스스로 그 실을 끊은 걸세.” “잔인하고 슬픈 모순이군요.” 박사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남자도 이내 침묵에 빠졌다. 둘 사이에 옅은 전등 빛이 새어 들어왔다. 주변보다 약간 밝은 책상 위엔 종이 한 장과 사진 한 장이 놓여있었다. 그 안엔 아빠와 엄마, 딸아이가 서로를 끌어안고 미소를 짓고 있는 행복한 한 가정의 모습이 들어 있었다.
녀석의 등뒤에 동상처럼 얼어붙어 있는 긴 생머리의 여자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이아연 이라는 명찰과 푸른색 배찌와 무릎까지 오는 검은색 스타킹이 차례로 시선을 때렸다.
어두운 개인실 안에 흰 가운을 입은 40대 남성이 한 장의 페이퍼를 손에 들고 있다. 유심히 읽어내려가는 눈빛이 공기만큼 어둡다.
병명: 해리성 다중인격장애.
부모는 아이가 만들어낸 오빠와 남동생의 인격을 완벽히 무시했다. 그 결과 그 둘의 인격이 점점 망가져버렸다.
사랑에 목마른 아이에겐 또 하나의 시련이 있었다. 그것은 성적인 호기심과 욕망이었다. 그것을 부채질 한 것은 아이의 부모였다. 아이의 부모들은 아이가 어리다고 생각해 방음도 되지 않은 안방에서 문도 잠그지 않은 채 성관계를 가지곤 했다. 그것을 아이가 목격하였고 아이의 성관념은 극도로 왜곡되었다.
=======================================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