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나의 세번째 젖꼭지
- 작성일 2010-07-01
- 좋아요 0
- 댓글수 1
- 조회수 3,740
또야. 1.5? 아니 1.6은 되겠다. 한숨이 나왔다. 젖꼭지가 또 자라난 것이다. 이젠 어중간한 반창고로는 가리기도 힘들겠군. 병원엘 가고 싶지만 도대체 어느 병원을 찾아야 하는지도 막막했다. 성형외과를 가야하나. 젖꼭지가 자꾸만 길어져요, 어떡하죠? 라는 질문은 인터넷에도 올려봤지만 돌아오는 답변들이란 대체로 극단적인 진지함이나 비웃음 뿐이었다. 나라도 마찬가지 였을 것이다. 젖꼭지가 길어진다니 도무지 그런 일이 있을 법하지도 않을 뿐더러 있다고 한들 병원에 가보란 얘기 외에 어떤 종류의 답변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그나마 수술을 하라든가 병원에가라는 답변은 성실한 편이지. '손가락으로 꾹 눌러보세요'라든가, '나름의 매력포인트로 키워보세요'라는 답변들을 보고 있으면 실소가 나왔다. 인생은 이다지도 고독한 것이었던가. 젖꼭지가 길어지기 시작한 것은 삼일 전이었다. 삼일 만에 1.6센치. 칼 루이스가 울고 갈 속도다. 아, 칼 루이스는 약물 복용이었던가. 아무려면 어떤가. 나의 젖꼭지는 무섭게 달리고 있었다. 젖꼭지가 길어지기 시작한 이후로는, 와이셔츠를 입기가 꺼려졌다. 하얀 와이셔츠 위로 도드라진 젖꼭지는 아무리 눈을 돌리려 해도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힘들게 반창고로 젖꼭지를 가렸지만 너무 길어진 탓에 이제는 그것마저 힘들었다. 그래, 성형외과다. 듣자하니 의대를 졸업하고 가장 성적이 우수한 의사들이 간다니 뭔가 좀 낫지 않을까. - 하아.. 한숨을 쉬고 있는 척 했지만 웃음을 참고 있다는 게 보였다. 눈밑의 근육들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 이거 정말 희귀한 사례로군요. - 그렇겠죠. - 하아..이거 정말 차라리 속 시원하게 한번 웃고 시작하면 안될까요? 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나름 의사의 품위와 환자의 체면을 살려주려는 진지한 의사에게 할 말은 아닌 듯 싶어, 나는 그가 웃음을 참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는 열여섯 번이나 '하아, 이거 정말'이라는 말을 내뱉은 후에야 눈 밑에 경련을 일으키지 않게 되었다. - 여유증입니다. - 예? - 못 들어보셨나요? 남자의 가슴이 여자의 유방의 형태를 띄게 되는 것이죠. 여유증의 일종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조금 형태는 다르지만. 조금? - 하지만 제가 알기로도 아직까지 학계에 보고가 된 적은 없습니다. 여성의 유두가 남성보다 큰 것은 알고 계시죠? 남성임에도 유두가 커지는 그러니까 일종의 여유증인 셈이죠. - 치료는 가능한가요? - 물론입니다. 유두의 일부를 절개하고 봉합하고 아주 간단하죠. 그 날 오후에 나는 바로 수술을 받았다. 그의 말처럼 수술은 정말 간단했다. 삼십분도 걸리지 않았다. 마취도 국소마취였다. 나는 생생한 정신으로 나의 젖꼭지가 잘려나가는 장면을 보았다. 그것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포경 수술을 받을 때도 이렇게 이상하진 않았는데. 자신의 신체의 일부가 - 비록 젖꼭지이긴 해도- 잘려나가는 모습은 어떤 상실감을 느끼게 했다. 참으려 했지만 나는 끝내 눈물이 났다. - 수술은 성공적입니다. - 감사합니다, 선생님. 진심으로 고마웠다. - 다만.. - 다만? - 재발할 수 있습니다. - 재발이라뇨? - 수술로 절개해 낸 조직을 정밀 검사해봐야 알겠지만, 단순한 여유증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비유하자면 도마뱀의 꼬리처럼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원래대로라니 나의 젖꼭지는 원래 그렇지 않았다. - 혹시나 해서 드리는 질문이니 너무 불쾌해 하지 마시고 답변을 주시기 바랍니다. 혹시 원래 젖꼭지가 남들보다 좀 길었던 건 아닌가요? 나는 어이가 없어 의사의 얼굴을 바라봤다. 진지한 표정이었다. - 아니에요. 원래는 짧았습니다. - 그러시겠죠. 그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 거야. 당연하지. - 결과가 나오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 예.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젖꼭지 근처가 간지러웠다. 마치 옆구리를 간지르듯이 지하철 안에서도 버스 안에서도 끊임없이 간지러웠다. 의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수술 부위가 조금 가려울 수는 있습니다. 상처가 덧날 수 있으니 가렵더라도 참으세요.' 지금쯤 간호사들과 배꼽잡고 웃느라 난리가 낫겠지? 나는 불쾌한 기분이 들었지만, 젖꼭지가 원래대로 돌아온다면 그쯤은 참을 수 있었다. 이제 더 이상 가슴에 반창고를 붙이고 옷을 입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다음날, 세수를 하러 화장실에 갔던 나는 거울을 보고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수술로 잘라낸 젖꼭지 옆에 깨알 같은 알갱이가 생겨난 것이었다. 처음엔 뭔가 묻었나 싶어 떼어내려 했는데,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부위의 감각은, 그렇다. 젖꼭지였다. 나는 젖꼭지가 세 개 달린 남자가 된 것이었다. 크기가 작아 반창고를 붙일 필요까진 없었지만, 새로 생긴 젖꼭지마저 길어지면 어쩌나 불안한 생각이 들어, 참을 수가 없었다. 병원에 전화를 하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질 않았다. ' 저, 원장님과 통화를 하고 싶은데요.' '네, 어떤 용무이신가요?' 어제 수술 받은 환자인데요. 그 옆자리에 새 젖꼭지가 생긴 것 같아서 의논을 좀 드리려구요.' 아아. 상상만 해도 몸이 얼어붙는다. 아마 간호사는 그 소식을 원장에게 전달해 주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쓰러질 것이다. 그리곤 미친 듯이 웃겠지. 향후 십 년간은 안 웃어도 될 만큼. 이럴 줄 알았으면 원장의 핸드폰 연락처라도 받아둘 걸. 그렇지만 어느 누가 이런 일을 예상하겠는가. 그건 마치 치질 환자가 수술을 받고서 의사에게 '저, 핸드폰 번호 좀 주시겠어요? 혹시 다른 항문이 생길지 몰라서요.' 라고 이유를 대는 것과 다를 바 없잖은가. 고민 끝에 나는 병원으로 직접 찾아갔다. 그러나 원장은 외출 중이었다. 언제쯤 오냐는 물음에 간호사의 눈 밑은 떨리고 있었다. 그녀도 나를 알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겨우겨우 내일 오후 2시 약속을 잡아 주었다. 그래도 어제 많이 웃었는지 의사만큼이나 오래 기다리진 않아도 되어서 고마웠다. 다음 날, 의사는 반갑게 나를 맞아주었다. -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 네? - 제가 조직 검사를 하고 학계에 증례를 보고했더니 뉴기니아 원주민 가운데 환자분과 유사한 증상을 보인 원주민의 사례가 있더군요. 뉴기니아? - 그 원주민의 경우엔 유두가 3센치 가량 자라났더군요. 환자분과 마찬가지로 절개 수술을 했었습니다. - 그래서요? - 그런데 수술 후에 묘한 일이 생겼더군요. 난 불안해졌다. - 묘한 일이라면? - 수술 후 새로운 유두가 생겨난 것입니다. 아아. -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혹시? 자포자기. - 네, 저도.. - 이거 정말 놀랍군요. 나도 놀랍다. 뉴기니아라니. - 그래서 원주민은 어떻게 됐습니까. 치료가 된 건가요? - 그게 사실 그 원주민의 경우 발견 당시 이미 상당한 고령이어서 얼마 못가 암으로 사망했습니다. 이게 좋은 소식이란 말인가. 나도 웃음거리가 되기 전에 암으로 죽을 수 있다는 건가. - 별로 좋은 소식으론 안들리는데요? - 아, 물론이죠. 좋은 소식은 이게 아닙니다. 그 원주민에겐 자식들이 있었는데 일정 연령이 되자 모두들 유두가 자라났습니다. 유전이었던 거죠. - 네? - 유전자 해독 기술 덕분에 과거에는 불가능했지만 지금은 가능합니다. 어느 부분의 염색체가 돌연변이를 일으켰으며 유두를 길어지게 했는가 하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물론, 치료도 가능합니다. 좋은 소식이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의사는 처방전을 지어주었다. 이 약을 먹으면 더 이상 새로운 젖꼭지가 돋아날 일도 없을 것이고, 자라나지도 않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에게 거듭 감사를 표했다. 그는 대신 나의 사례를 학회에 정식 논문으로 발표하고 싶은데 괜찮겠냐고 양해를 구했다. 나는 흔쾌히 동의했다. 어쩌면 뉴기니아가 아닌 다른 어딘가에서도 나처럼 고통 받고 있을 사람을 생각하니 인류애마저 샘솟는 것 같았다. - 감사합니다,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고마웠다. 지금 당장 뉴기니아로 달려가 그 원주민과 가족들에게 고맙다고 인사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들이 있었기에 내가 있는 것이다. - 그런데.. 의사는 갑자기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 네? - 실은 저희 철없는 직원 한 명이, 죄송하게도 환자 분의 수술 장면을 몰래 촬영해 인터넷에 올려버렸습니다.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 네? - 이미 조회수가 십만 건을 넘었고 해외 유투브에까지 올라가 버렸다는 군요. 이거 정말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할지. 나는 잠시 유투브가 무엇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아. 유투브. 의사가 발음을 굴린 탓이었다. 이 와중에도 발음을 굴리다니, 그게 죄송한 사람의 태도인 거냐. - 아..그럼 내 얼굴은..? - 제가 그 사실을 알고 황급히 원본 동영상을 삭제 했지만, 이미...네..모두 공개되었습니다. 나는 다리가 풀려버렸다. 그는 원장실 책상을 머리로 뚫을 기세로 고개를 숙여 댔다. 문밖에서는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어떻게 나오나 궁금한 모양이지. 하지만 나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그러니까 이야기인즉슨 내가 밖엘 나가면 사람들이 나를 알아본다. 그리고 내 젖꼭지가 잘려나가는 수술 장면을 본 사람이 십만 명이나 있다는 말이다. 아아. 나는 무어라 대꾸도 비난도 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제와 이 의사 녀석을 쥐어 팬다고 한들 달라질 일도 없다. 간호사를 붙잡아다가 고소한다고 한들 오히려 내 명성만 높아질 테지. 책상 위로 고개를 처박은 의사를 뒤로하고, 나는 약을 챙겨 병원을 나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나는 세번째 젖꼭지를 만져보았다. 갓 태어난 아기 같았다. 실제로도 그랬다. 갓 만들어진 젖꼭지였으니까. 나는 문득 내가 너무 잔인한 짓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나, 젖꼭지로서의 삶을 살아가려 하는데, 단지 다른 사람보다 젖꼭지가 하나 더 많다는 것이 창피하단 이유로 그의 존재를 빼앗아도 되는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차창 밖으로 사람들이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이 저마다 가지고 있을 두 개의 젖꼭지. 그리고 조금 다른 나의 젖꼭지. 갑자기 눈물이 났다. 한 손으로 젖꼭지를 만지며 울고 있는 모습을 보며, 주위의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 중에 몇 명은 나를 알아보는 것 같았다. 그들의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나는 젖꼭지를 만졌다. 이건 누가 뭐래도 내 젖꼭지야.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숙여 젖꼭지를 향해 속삭였다. '안녕, 나의 세번째 젖꼭지.'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