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암살자
- 작성일 2010-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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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암살자>
성공하는 마왕을 위한 지침서 제26조.
반란군 중의 한 사람이 아무리 매력적일지라도, 당신을 죽이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들 중에 그와 같이 매력적인 사람이 누군가는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죄수를 침실로 보내라는 명령을 내리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라.
제국의 막강한 군사력을 등에 업고, 오도아키르 공작이 루랜드의 왕으로 즉위했다. 공작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제국에 맞서 왕국의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던 반란군이 도처에서 일어났으나, 루랜드 정부군을 총알받이로 내세우고 그 뒤에서 거대한 전쟁 기계처럼 움직이는 제국군의 힘을 도저히 당해낼 수 없었다. 루랜드의 반란군들은 산과 들로 숨어들어 내일을 알 수 없는 게릴라전으로 버텨나갔다. 일반 백성들은 그들이 처한 상황에 따라, 어떤 사람들은 재빠르게 제국의 앞잡이로 변신했고 어떤 사람들은 반란군에 들어갔으며 어떤 사람들은 제국의 앞잡이에게 빌붙었고 어떤 사람들은 반란군을 몰래 지원했으며 어떤 사람들은 이것도 저것도 하지 못했다.
오도아키르 왕이 즉위한 지 3년째 되던 해에, 루랜드 정부&제국 연합군은 반란군을 일소하기 위해 대규모 소탕전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다. 그로부터 1년에 걸쳐 루랜드 정부&제국 연합군은 왕국의 땅을 써레질하듯 밀어붙였고, 그 과정에서 걸려나온 반란군 ― 그들 입장에서는 <독립군> ― 및 그들에게 협조한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했다. 정부&제국 연합군이 한 번 지나간 땅에는 폐허 위에 목매달린 시체들이 즐비할 정도였다.
그 과정에서, 그저 루랜드의 선량한 농부에 불과했던 부모가 반란군에게 식량을 제공했다는 죄목으로 정부&제국 연합군에게 한날한시에 처참한 죽임을 당한 후 복수를 다짐한 한 소녀가 있었다.
"오도아키르 왕, 반드시 당신의 목을 따서 내 부모님의 원수를 갚겠다!"
마키아벨리는 권력자가 경계해야 할 암살의 한 유형으로 원한에 사무친 적의 단호한 결심에 의해 저질러지는 암살을 들었다. "그러한 암살은 군주라고 하더라도 방어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라면 누구나 군주를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군주론』) 물론 마키아벨리는 그 암살을 실행할 수 있는 ― 원한에 사무치지 않도록 군주가 조심해야 할 ― 사람으로 군주의 측근을 들고 있지만. 어쨌든 그 소녀 메르세데스는 자신의 원수를 갚기 위해 기나긴 대장정을 시작했다.
메르세데스는 고향인 시골 마을을 떠나 왕도로 향했다. 내전과 소탕전과 그 후유증으로 국내 치안이 온통 뒤숭숭한 와중에, 돈도 힘도 없는 어린 소녀가 긴 여행을 치르며 겪어야 했던 일은 자세히 서술하지 않겠다. 메르세데스는 악으로 깡으로 그 여행을 마치고 드디어 왕도에 도착했고, 또다시 온갖 수모와 더러운 ― 굳이 물질적인 것에 한정할 수는 없다 ― 일을 마다하지 않으며 그 왕도에서 살아남아 왕궁으로 통하는 줄을 찾았다. 마침 왕궁에서는 오도아키르 왕의 생일 잔치를 준비하느라 한창 일손이 달리는 중이었다. 메르세데스는 최하급 부엌데기 아르바이트 자리를 얻어 왕궁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악으로 깡으로 피로 땀으로 눈물로 거기까지 버텨낸 메르세데스를 하늘도 불쌍히 여겼는지, 메르세데스는 그야말로 천우신조의 기회를 얻었다. 우연히 주방 근처를 지나가던 오도아키르 왕이, 찬물과 짚수세미로 기름투성이 접시를 닦느라 이를 박박 갈며 고군분투하는 메르세데스를 보았고 마음에 든다고 여겼던 것이다. 오도아키르 왕은 그 날 밤에 메르세데스를 자기 침실로 보내라는 명을 내렸다.
오도아키르 왕의 변태성은 일찍부터 악명 높았던 것이라, 주방 하녀들은 모두 한 마음으로 메르세데스를 가엾게 여겼다. <그 애는 아직 어립니다>, <너무 천해서 왕의 품위를 깎아내립니다>, <하나도 예쁘지 않은데요> 등등으로 ― 메르세데스의 입장에서는 다 된 밥에 재 뿌리는 짓이었다 ― 왕의 마음을 돌리려 했으나 왕은 요지부동이었다. 마침내 하녀들은 눈물로 메르세데스를 씻기고 닦고 때 빼고 광 내고 새 옷을 입힌 후 왕의 침실로 들여보냈다. 부디 자신들을 원망하지 말라고 애걸복걸하면서.
왕이 변태든 똥덩어리든, 침실에서만은 자신과 독대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변태짓을 당할 거리라면 왕을 죽일 수도 있는 거리라고, 메르세데스는 내심으로 기뻐 날뛰었다. 드디어 부모의 원수를 갚을 날이 온 것이다. 왕을 죽일 수만 있다면 메르세데스는 그 후 어떻게 되든 상관 없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왕의 침실은 휑뎅그렁하니 넓었는데, 공룡 책상만큼 거대한 테이블 하나와 그 테이블에 비하면 어처구니없이 작은 의자 두 개가 한복판 등불 아래에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왕은 그 테이블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 방이 침실이라는 증거로는, 아기 요람만한 침대 하나가 한구석에 놓여 있다는 것뿐이었다. 어지간히도 변태이기는 변태인 모양이로구나. 메르세데스가 들어오자 왕은 개개풀린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래그래, 이리 오너라."
왕이 손짓하자 메르세데스는 단단히 각오하고 침대를 향해 다가갔다.
"아니, 그쪽이 아니고, 이리 오라니까."
메르세데스는 당황하여, 방향을 바꿔 테이블로 다가갔다. 왕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거기 앉아라."
메르세데스는 땀이 배어나는 손바닥을 치맛자락에 번갈아 문질렀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끈끈한 시선으로 훑으며, 오도아키르 왕은 개개풀린 눈에 더욱 썩은 미소를 지었다.
"완벽해, 정말 완벽해. 딱 내 타입이야."
메르세데스가 테이블에 앉자, 왕은 자기가 앉은 의자 아래에서 뭔가가 잔뜩 들어 있는 묵직한 궤짝을 끌어냈다. 이제 저 안에서 엄청난 변태짓 도구를 꺼내겠지. 하지만 오늘의 승리자는 내가 될 것이야! 메르세데스는 이를 악물었다.
왕은 그 궤짝 안에서, 고르디아스의 매듭같이 엉켜 있는 실뭉치를 몇 타래나 꺼내더니 테이블 위에 늘어놓았다.
"자, 어서 풀어라."
이, 이뭥미~~~~!!!!!!!
스스로도 무슨 뜻인지 모를 비명을 어금니 위에서 콱콱 씹어 으깨며, 메르세데스는 하룻밤 내내 눈에 불을 켜고 그 실뭉치 타래를 풀어내야만 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칼로 쳐서 끊어 버렸다지만, 메르세데스는 그런 편법도 쓸 수 없었다. 비비고 골라내고 당기고 때로는 열 손가락이 죄다 실타래 속으로 엉켜들어가 비명을 지르는 메르세데스를 보며, 오도아키르 왕은 넓이가 공룡 등판만한 테이블 너머에서 개개풀린 웃음을 질질 흘렸다.
"실 풀면서 끙끙거리는 저 모습, 너무 섹시해! 아, 행복해!"
성공하는 마왕을 위한 지침서 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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