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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동천사

  • 작성일 2010-08-06
  • 조회수 835

 

  계산대 위에 짜파게티 두 개와 콜라 하나를 올렸다. 그리고 말했다.
 
  “라크 한 갑 주세요.”
 
  ‘라크 한 갑 주세요.’ 오늘 하루 내가 입 밖에 꺼낸 유일한 한 마디였다. 평소도 다르지 않다. 나와 대화를 주고받는 상대는 편의점 알바로 한정되어 있었다. 지난 1년 동안 몇 명의 알바가 바뀌었는데, 성별도 달랐고 국적도 달랐고 생김새도 다 달랐지만 표정은 하나같이 비슷했다. 시큰둥한, 그리고 귀찮은듯한 목소리.
 
  “오천 원이요.”
 
  나는 호주머니를 뒤져 지폐를 끄집어낸다. 봉지에 담아 달라고 말한다. 그리고 ‘수고하세요.’ 인사하며 봉지를 들고 나간다. 유리문을 나설 때까지 알바는 ‘안녕히 가세요.’라고 인사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다.  
  방금 산 담배를 꺼내 피우며 한적한 골목길을 걸어갔다. 자정에 가까웠고 지나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열쇠를 꽂고 내가 사는 원룸으로 들어갔다. 캄캄했다. 나는 불을 켰다. 몇 번 깜빡거리며 작고 초라한 나의 보금자리가 드러났다. 흩어진 빨래 더미와 버리지 않은 쓰레기, 캔과 봉지와 가득 찬 재떨이.
  나는 컴퓨터 앞에 주저앉았다. 청소 같은 걸 할 생각은 없었다. 부팅이 되자마자 곧바로 온라인 게임에 접속했다. 레벨을 올려야 했다.
  몇 개의 퀘스트를 완료하고 수백 마리의 몬스터를 해치웠을 것이다. 경험치는 좀처럼 쌓이지 않았다. 괜찮은 아이템도 없었다. 지겨워졌다. 바보 같은 막노동을 하는 기분이었다. 이런 게 대체 무슨 의미지? 아무리 죽여도 몬스터는 다시 생겨날 것이다. 레벨이 오른다 한들 나는 여전히 똑같다.
  컴퓨터를 꺼 버리고 바닥에 떨어져 있는 소설책을 집어 들었다. 존 그리샴의 법정소설이었다. 백수생활 1년에 소설이란 것에 취미를 붙였다. 스물아홉 살의 문학청년이라…. 어쨌든 삭막한 온라인 게임보다는 나았다. 티브이는 너무 시끄러웠고, 인터넷은 혼란스러웠다. 외로워졌을 때야 소설은 재밌어지는 걸지도 몰랐다.
  침대 모서리에 기댄 채 담배를 피우며 소설을 읽었다. 주인공은 이제 막 법대를 졸업한 스물다섯 살의 풋내기였다. 대출 빚을 갚지 못해 파산신청을 하고 도서관 구석에서 몰래 키스를 나누던 여자 친구에게 차였다. 직장을 못 구하고 허둥거리다가 노력과 운이 따라준 끝에 엄청난 보험사기 사건을 떠맡아 서서히 영웅이 되어 간다. 앞부분은 나랑 비슷한데 뒤로 갈수록 달라졌다.  
  배가 고팠다. 나는 소설을 덮고 부엌으로 갔다. 냄비에 물을 담고 가스레인지에 올렸다. 아까 사온 짜파게티 봉지를 뜯었다. 갑자기 그녀가 생각났다. 그녀는 곧잘 짜파게티를 끓여주곤 했었다. 바로 이 방에 그녀와 함께 살았을 때의 일이다. 일 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이런 게 떠오른다. 스스로가 싫어졌다.
  짜파게티를 먹으며 소설을 읽었다. 얼핏 시계를 보니 새벽 4시였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낮밤이 뒤바뀐 지는 오래다. 짜파게티를 다 먹고 콜라를 마시며 담배를 피웠다. 소설을 더 읽고 싶지 않았다. 주인공이 여자를 사귄다. 나는 문득 외로워졌다. 언제나 외로운데 이렇게 문득 외로워지는 건 뭘까?
  컴퓨터를 켰다. 인터넷에 접속해서 다운로드 사이트로 들어갔다. 거기에서 영화를 받거나 다른 걸 받기도 한다. 지금은 다른 게 필요하다. 여러 가지 제목들이 떠 있었다. 식상한 제목들이다. 나는 고양이처럼 가식적인 비명을 지르는 AV배우가 싫었다. 브래드 피트보다 터프해 보이는 금발의 글래머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여자들의 섹스를 보고 있으면 올림픽이 떠오른다. 내가 원하는 건 좀 덜 예쁘고 평범해 보이는 여자였다. 군살도 있고 가슴도 별로 크지 않고 물론 엉덩이는 큰 게 좋지만 어쨌든. 가식적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익숙하고 친밀한 의미의 섹스였으면 좋겠다. 나는 변태가 되어 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강간이나 수간은 보지 않는다.
  어쨌든 나는 변태일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다. 무슨 상관인가. 여긴 나 혼자 밖에 없는데. 나는 그럴듯해 보이는 걸 하나 받았다. 두루마리 휴지를 챙겨놓고 재생을 눌렀다.
 
  사진이 나왔다. 스무 살 남짓한 키가 작은 여자애가 해변에서 손가락 브이를 하고 찍은 사진이었다. 노란색 원피스를 입었고 길고 검은 머리칼이 바닷바람에 휘날렸다. 기분이 좋은지 맑게 웃고 있었다. 뭐지 이게? 어쨌거나 나는 그녀의 미소가 마음에 들었다. 행복해 보이니까.
  사진이 바뀌었다. 레스토랑 같았다. 그녀는 이제 스파게티를 먹고 있었다. 여전히 웃고 있다. 포크를 입에 넣으려다 말고 귀엽게 눈을 치켜떴다. 크고 검은 눈동자였다. 코는 약간 낮고 얼굴선이 동그스름해서 어려 보였다. 티브이에서 본 아이돌 그룹을 조금 닮았다. 나는 예쁘다고 생각했다.
  사진이 바뀌었다. 이번엔 집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속옷 차림이었다. 찍지 말라고 손을 가린다. 기분이 이상해졌다. 뭐지 이게? 제목을 잘못 본 걸까? 이건, 그런 게 아니었다. 연인들이 자기들끼리 찍고 즐거워하는 추억의 앨범 같은 거였다. 하지만, 사진이 끝났고 동영상이 시작되었다.
  그녀의 알몸을 보았다. 동영상을 꺼 버렸다. 파일을 삭제했다. 휴지통에 들어가서 말끔히 비웠다. 나는 담배를 찾아 입에 물었다. 기분이 드러워졌다. 이걸 찍은 녀석을 찾아내서 박살내 버리고 싶었다. 질질 울면서 용서를 빌 때까지 패주고 싶었다. 나한테 말고 그 여자한테 가서 하라고!
  동영상이 시작되는 순간, 이런 문구가 스쳐지나갔다. ‘최은정 씨발년아 니가 나 없이 잘 살 거 같냐’ 녀석의 목소리가 귀에 울리는 것 같았다. 씨발놈! 진짜 씨발놈이다. 이런 걸 퍼뜨리다니. 진짜, 씨발놈이다.
  새로 담배를 물었다. 왜 이렇게 열을 받는지 이상했다. 내가 그렇게 착한 놈인가? 일년 전 내가 그녀에게 했던 짓들을 기억한다. 내가 진짜 그렇게 착한 놈인가? 나야말로 씨발놈이다. 내가 잘 알았다. 그런데 착한 척까지 하려고 하다니.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바다를 등지고 맑게 웃던 그 여자의 사진이 떠올랐다. 모르는 사람인데, 너무나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녀는 어떻게 되었을까? 저런 게 떠돌아다니는걸 알까?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어떻게, 얼마나 상처받고 부서질 수 있을까? 나는 수컷이 싫어졌다. 나 자신도 싫어졌다.
 
 
  다음 날, 열두시 넘게 일어나서 나는 오랜만에 면도를 했다. 샤워도 하고 머리도 감았다. 심지어는 드라이기로 머리도 말렸다. 청소도 하려고 했지만 너무 많아서 내버려뒀다. 왠지 모르게 외출을 하고 싶었다. 슬리퍼가 아니라 운동화를 신었다.
  지하철을 타고 시내를 나갔다. 지하철이 낯설었다. 서 있는 사람들과 앉아 있는 사람들이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한 눈에 내가 백수인줄 눈치 챘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 리 없다. 나 역시도 일 년 전까지만 해도 매일처럼 이 지하철을 타고 출근을 했다. 그때는 싫었지만, 어쨌든 내가 싫고 좋아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다. 짤렸으니까.
  지하철을 내려 중심가에 있는 대형서점으로 들어갔다. 책을 사고 싶었다. 저축해 둔 돈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사치라고 할 수 있지만 그래도 사고 싶었다. 서점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교복 입은 학생들과 아저씨와 아줌마, 손을 잡은 연인들…. 오늘이 토요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날을 잘못 잡았다. 사람들이 부담스러웠다. 모두가 나를 몰랐지만 나는 부끄러웠고 당당해질 수가 없었다.
  이층으로 올라갔다. 이층에는 소설이 진열되어 있었다. 거기도 사람들이 많았지만 책들이 더 많았다. 나는 책들 사이를 거닐다가 서머싯 몸의 소설 앞에서 멈춰 섰다. 저번에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달과 6펜스]가 괜찮았다. [면도날]이라는 제목의 낯선 책을 빼냈다. 가격표를 보았다.
  결국 13000원을 주고 [면도날]을 샀다. 하루 생활비다. 이걸 보충하기 위해서는 일주일 정도 담배를 끊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힘들었다. 서점을 나서자마자 담배를 입에 물었다.
  나는 근처의 페스트푸드점으로 들어갔다. 가게 안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주로 어린 학생들과 그리고 젊은 연인들이었다. 햄버거와 콜라를 받아서 도망치듯 맨 구석의 창가자리로 걸어갔다. 힐끔 주위를 둘러봤는데 혼자 온 사람은 나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니다, 찾아보면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냥 고개를 숙이고 햄버거를 먹었다.
  방금 산 [면도날]을 펼쳤다. 햄버거를 먹으며 그걸 읽으려 시도했지만 쉽지 않았다. 옆자리 앞자리에 앉은 사람들의 대화가 자꾸만 책장 사이를 파고들었다. 왜 이렇게 떠들어대는 걸까. 하지만 나 역시도 돌이켜 보면 일년전에는 저랬었다. 그때는 책 같은 걸 읽지 않았다. 마주 앉은 그녀와 쉴 새 없이 뭔가를 떠들어 대며 빨대 두 개를 꽂은 콜라를 나눠 마셨다.
  책을 덮었다. 체할 것 같았다. 먹다 남은 걸 들고 일어서는데 덜컥, 어떤 여자가 맞은편에 앉는다. 아직 나가지도 않았는데 자리를 잡다니…. 나는 그대로 걸어 나오려다 문득 멈춰 섰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왜 가요? 다 먹었어요?”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는 나를 보며 말한다. 긴 머리칼, 크고 검은 눈동자, 맑게 웃던 얼굴, 파랗게 빛나던 바다….
 
  “저, 저를 아세요?”
 
  “아저씬 나 몰라요?”
 
  대답할 수 없었다.
 
  “서 있지 말고 앉아요. 얘기 좀 하게.”
 
  나는 주저앉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런 건 불가능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며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일단 노란 원피스가 아니다. 체크무늬 코트를 입고 짧은 치마를 입었다. 머리는 약간 갈색이다. 그러니까 사진에서 봤던 검은 색이 아니다. 웨이브가 남아 있다. 사진에서는 생머리였는데, 그러니까 아니다,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냐! 지금은 겨울이고 미용실은 안 가나? 얼굴이 똑같잖아!
 
  “놀란 건 알겠는데 그렇게 쳐다보지 마요. 민망스럽잖아요.”
 
  그녀는 피식 웃으며 콜라를 가져다 빨대를 입에 물었다.
 
  “아~ 시원해. 오랜만에 마시니까 죽인다.”
 
  작게 트림을 한다.
 
  “앗, 쏘리 ㅋㅋ ”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 그 여자가 맞다 하더라도 그런데 나를 아는 척 하는 건 뭐야? 도대체 뭐지?
 
  “저, 근데 누구세요?”
 
  “네?”
 
  그녀는 콜라를 마시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왜 이래요, 아저씨? 제 이름 몰라요?”
 
  “내가 아가씨 이름을 어떻게 알아요?”
 
  “허, 참.”
 
  가족오락관이 떠올랐지만 지금 그런 문제가 아니고! 그녀는 기가 차다는 듯 웃으며 이젠 내가 남겨놓은 햄버거까지 손대려 했다.
 
  “먹지 마요, 그거.”
 
  “괜찮아요. 우리가 남이에요? 다 아는 사이에.”
 
  그녀는 킥킥거리며 햄버거를 입에 물었다. 그녀는 또 다시 감탄한다.
 
  “와~ 나 이것도 진짜 오랜만에 먹어요. 천국에는 이런 거 없거든요. 맥도날드는 뭐하는지 몰라, 체인점 안내고.”
 
  “천국요?”
 
  “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랄까, 감이 잡힌다. 내가 미친 건 아니야. 미친 건 바로….
 
  “맛있어. 하나 더 시키면 안돼요?”
 
  목구멍이 갑갑해지는 걸 느꼈다.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도 결국 그렇게 된 것 같았다. 그 녀석이 이렇게 만들어 놨겠지. 그 씨발놈!
 
  “욕하지 마요.”
 
  “뭐라고?”
 
  “욕하지 마라고요.”
 
  “어, 그래. 알았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녀에게 말을 놓았다는 사실과 지금 그녀가 한 말의 의미를 생각해 봤다. 아니다, 내가 너무 흥분해서 중얼거렸나봐. 그녀는 햄버거를 다 먹고 손가락을 빨았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며 나는 더 이상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생각에 잠겨 하마터면 내릴 곳도 놓칠 뻔 했다. 결국 햄버거와 콜라를 하나씩 더 시켜 주었고 그녀는 페스트푸드에 미친 초등학생처럼 먹어댔다. 불쌍해서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들려주는 얘기는 더더욱…. 자신은 2년 전에 죽었으며 2년 동안 천국에서 지내다가 어제부로 천사로 발령이 났다는, 그래서 첫 번째 도와줄 사람으로 나를 골랐는데, 내 의향은 어떤지 ‘내가 맘에 들어요? 날개는 쪽팔리니까 안 달고 다녀요.’ 그런 얘기를 나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한 마디도 반박할 수 없었다. 나는 마음에 든다고 말했고, 참으로 고맙다고 말했다. 그녀는 멋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견디기 힘들었다. 가게를 나와 오늘은 이만 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그녀를 손 흔들며 보내주었다. 웃으려 했지만 얼굴에 금만 갔다.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날개는 없었다.
  지하철역을 나오자마자 담배를 입에 물었다. 연기와 한숨을 쏟아냈다.
 
  집에 돌아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어제 그 사이트에 접속해서 그녀의 동영상을 다시 찾는 거였다. 무슨 필요가 있을지 모르지만 한 번 더 확인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하루 만에 쏟아져 나온 수많은 최신 동영상들 틈 속에서 도저히 분간해 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걸 다 받아서 틀어볼 수도 없고, 제목도 뭐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결국 난 맥주와 담배를 사러 집을 뛰쳐나갔다. 오랜만에 술을 마시고 싶었다.
  다음 날, 꿈속에서 지진이 났는줄 알았다. 뭔가가 흔들리고 있었다. 계속해서, 미친 듯이. 나는 침대 위를 기어 다니다 눈을 떴고 그게 핸드폰의 진동이라는 걸 알았다. 이 시간에 전화할 사람은… 그래, 엄마밖에 없다. 나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뺨을 때리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절대 잔 티가 나선 안 된다. 엄만 아직도 내가 출근하는 줄로 안다. 나는 핸드폰을 열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엄마가 아니다.
  “누구세요?”
  “아직도 자요?”
  누구지? 여자 목소리다.
  “저, 누구시죠?”
  “몇 신데 아직까지 자요?”
  “저 안 잤는데요.”
  “구라치지 말고.”
  “네?”
  “천사한테 구라를 쳐요, 감히 ㅋㅋ.”
  핸드폰을 닫았다.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지 생각해 봤다. 아니다. 그런데 이건 뭐야? 어떻게 전화번호를 알았지? 어제 가르쳐 줬나? 아닌데, 그런데 어떻게 알았지?  핸드폰이 울렸다.
  날개가 부서진 벌처럼 윙윙거리며 방바닥을 기어간다. 스토커라는 낱말이 떠올랐다. 내가 스토커라면 몰라도…. 나는 핸드폰을 주웠다.
  “여보세요.”
  “왜 전화를 끊어요?”
  “내 전화번호 어떻게 알았어요?”
  “천사잖아요.”
  나는 핸드폰을 귀에서 떼고 천장을 쳐다봤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알았어요, 근데 진짜 내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어요?”
  “전화번호부에 나와 있잖아요.”
  “네? 무슨 전화번호부에?”
  “천국의 전화번호부에 ㅋㅋ.”
  “장난치지 말고요!”
  “왜 자꾸 같은 걸 물어요? 빨리 나와요, 그만 물어보고.”
  “어딜 나와요?”
  “밖에요. 아침운동 해야죠.”
  “네?”
  “집 앞이에요. 운동화 신고 나와요, 기다려요 나.”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
  나는 핸드폰을 10분 정도 쳐다보다가 전원을 꺼 버렸다. 그리고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누웠다. 눈을 감았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이런 건.
  나는 눈만 감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더더욱 말도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엄습한다. 결국 일어나서 츄리닝을 입고 잠바를 걸치고 운동화를 신었다.
  건물 밖을 나왔을 때, 그녀가 서 있었다. 아래위로 연분홍색 운동복을 입고 하얀 운동화를 신었다. 머리는 묶었다. 나를 보며 싱긋 웃는다.
 
  “세수도 안했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가요.”
 
  그녀는 앞장 서 뛰어갔다.
 
  동네 체육공원에는 아침부터 사람들이 많았다. 잔디 위에서 맨손체조를 하는 노인들과 섹시한 타이즈를 입고 자전거를 타는 아줌마들, 조깅하는 사람들, 조깅하는 천사!
  나는 헉헉거리며 그녀 등을 쫓아갔다.
 
  “이봐, 이봐요. 잠깐만!”
 
  “왜요?”
 
  그녀는 돌아보지도 않는다.
 
  “전화번호, 전화번호 어떻게 알았어요?”
 
  “운동이나 해요!”
 
  그녀가 소리쳤다. 나는 결국 포기했다. 그 자리에 멈춰서 허리를 굽히고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이 빠져나올 것 같았다.
 
  “에~ 벌써 지쳤어요?”
 
  어느새 돌아와서 나를 놀린다. 고개를 들어보니, 그녀는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나만큼은 아니지만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천사도 지쳐요?”
 
  그녀는 빙긋 웃었다.
 
  “지금은 날개가 없잖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주저앉아 기도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뛰는데요, 좀 더 달려요.”
 
  “아니 왜 갑자기 나를 붙잡고 그래요?”
 
  “운동부족이잖아요, 맨날 방안에 처박혀 있으니까 그렇죠.”
 
  역시, 그녀는 다 알고 있다. 어쩌면 정말 천사인지도 모르겠다.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던 걸까? 그게 아니라면 개인정보가 유출된 걸지도 모르겠군. 난 홈피도 없고 블로그도 없는데 말야. 어쨌든 이 여자는 정상이 아니다. 나는 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렇게 엎드려 있지만 말고 몸을 쭉 펴 봐요.”
 
  “네?”
 
  갑자기, 그녀의 손이 내 등에 닿았다. 움찔했지만, 다른 사람과의 신체접촉이 너무 오랜만이라서 그런지 이상하게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녀가 시키는 대로 몸을 쭉 펴고 머리를 들었다. 그녀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상쾌하잖아요. 고개를 들어서 하늘을 좀 봐요.”
 
  맑게 웃는 그녀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결국 마지못해 목을 뒤로 젖혔다. 파랗고 하얀 공간이 펼쳐졌다. 뭐랄까, 굉장히 낯설었다. 마치 오백년 만에 다시 본 것처럼. 하늘은 무진장 넓었다.
 
  그녀와 아침을 먹으러 갔다. 근처 해장국집이었다. 도대체 얼마 만에 먹어보는 아침인지. 물론 밥맛이 있을 리 없지만 억지로 끌고 가는데 어쩌겠는가. 마주앉은 그녀는 내 앞에 수저를 챙겨주었다. 보리차를 컵에 따라주었고.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나는 그냥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하지만 솔직히, 잠깐이나마 천사 같다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이렇게 다정하게 대해 주는 것도 오백년 만에 처음 있는 일 같았기 때문이다.
 
  “아침은 꼭 챙겨 먹어야 돼요.”
 
  나는 물었다.
 
  “원래 이렇게 친절해요?”
 
  “천사니까.”
 
  그녀는 씩 웃었다. 나 역시도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원래는 좀 싸가지 없었는데, 2년 동안 반성하고 많이 착해졌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앞의 천사를 어떻게 다시 천국으로 되돌려 보낼지를 고민했다. 일단 착하긴 하니까, 이번까지만 봐주자. 그리고 다시는 상대하지 말아야지. 한 번만 더 그러면 사이버 수사대에 신고할지도 모른다. 아줌마가 해장국을 들고 왔다. 편의점 음식이 아니라니 이것 역시도 낯설었다. 나는 숟가락을 들었다. 그녀는 벌써 먹고 있었다.
 
  나는 식당 문을 나서자마자 그녀에게 선포했다.
 
  “이젠 그만합시다. 알겠죠?”
 
  “뭘요?”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모른 척 했다.
 
  “도대체 무슨 사정으로 이러는 건지 모르겠는데, 나도 그렇게 한가한 사람 아니에요.”
 
  “바빠요?”
 
  “아니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아무튼 자꾸 이런 식으로 비정상적으로 구는 건 참 뭐랄까, 비정상적이라고요. 내 말 알겠어요?”
 
  그녀는 입술을 내밀고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내가 미친 거 같아요?”
 
  “아니, 내 말은 그런 게 아니라….”
 
  “나 안 미쳤어요.”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이마에 머리를 짚고 한숨만 푹푹 내쉬다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또박또박 말했다.
 
  “다시는 연락하지 마세요.”
 
  나는 돌아섰다. 스쳐간 그녀의 얼굴이 뇌리에 남았지만 무시하고 그냥 걸었다. 그녀는 슬픈 표정을 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컴퓨터를 켰다. 쓰레기 같은 남자친구에게 배신당하고 충격 먹어서 정신이 이상해진, 날개도 없으면서 천사라고 우기게 된 여자아이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도대체 나 말고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저런 처절한 모습을 보였을까. 도대체 나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고 있고 내 전화번호는 또 어떻게 알아냈을까. 이 세상 모든 남자들이 자기 알몸을 봤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하루에도 열 개씩 날아오는 스팸문자도 있는데 그까짓 전화번호야 어떻게든 알아냈겠지. 몰라, 모르겠다. 뭐가 어찌됐든 나는 그 여자를 생각하기 싫었다. 그냥 천사라고 치자. 그러니까 제발 하느님에게 돌아가라고 난 그냥 내비 두고, 난 아직 안 죽었으니까.
  온라인 게임에 접속해서 미친 듯이 칼을 휘두르고 화살을 쏘고 마법을 퍼부었다. 들판에서 평화를 누리던 몬스터들은 똑같은 비명을 지르며 나자빠졌다. 내가 가는 곳마다 시체들이 쌓이고, 잠시 후면 사라졌다가 그들은 다시 또 나타나서 내 앞을 가로막았다. 나는 칼을 휘두르고 화살을 쏘고 마법을 퍼부었다. 경험치가 쌓였다. 아이템을 주웠다. 레벨이 올랐다.
  방 안이 어두컴컴해질 때까지 나는 레벨을 세 개나 올렸다. 별로 기쁘진 않았다. 행복하지도 않았다. 컵라면 하나와 샌드위치 하나를 먹고 콜라와 커피를 마셨다. 담배 한 갑을 피웠다. 라면과 담배, 며칠 전 붙잡힌 강간살해범도 경찰에게 도망 다니면서 라면을 끓여먹고 담배를 많이 피웠다고 한다. 나도 그렇게 되는 게 아닐까? 이 작고 어두운 방안에서 라면만 먹고 담배만 피우다가 점점 더 그렇게 변해가는 게 아닐까? 운이 좋으면 그녀처럼 천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강간살해범보단 낫겠지. 어차피 라면과 담배밖에는 먹을 게 없었다.
  몇 번 핸드폰이 울렸다. 그때마다 나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핸드폰을 열어봤지만, 전화데이트, 비아그라 염가판매, 무담보 대출…. 그녀는 아니었다.
 
  자정이 되어서야 마우스에서 손을 뗐다. 나는 토할 것 같았다. 컴퓨터를 끄고 아무것도 없는, 쓰레기밖에 없는 내 방을 둘러보았다. 이를 닦고 소변을 보고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너무나 조용했다.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떴지만 핸드폰이 울렸기 때문은 아니었다. 방 안은 여전히 조용했다. 어제 너무 일찍 자버린 것이다. 천사가 내 생활패턴을 망쳐버린 것 같았다. 나는 이불 속에서 정지해 있었다. 아무 것도 하기 싫었다. 게임은 죽어도 하기 싫었다. 침대 밑을 더듬어 그저께 산 [면도날]을 집어 들었지만 잠시 후에 덮어버리고 말았다. 다시 이불을 뒤집어썼다. 잠이 오지 않았다.
  결국 배가 고파서 꿈틀거리며 핸드폰을 주워들었다.
  “치즈버거 세트 하나요.”
  나는 전화를 끊었다.
  콜라를 마시다가 그녀를 떠올렸다. 나는 웃고 말았다.
 
  다시 어두워졌을 때, 나는 일어나서 거리로 나갔다. 한참을 걷다가 조금씩 뛰기 시작했다. 나는 체육공원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온 몸이 땀에 흠뻑 젖어서 방으로 돌아왔는데 핸드폰이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뭐했어요?”
 
  그녀였다.
 
  “아, 그냥 자고 있었는데.”
 
  “그래요? ㅋㅋ”
 
  나도 따라서 미소 짓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가 물었다.
 
  “나올래요?”
 
  “어디로요?”
 
  “우리 데이트해요.”
 
  “….”
 
  맙소사, 가슴이 설레고 있었다.
 
  샤워를 하고 옷장을 뒤져 가장 깨끗하고 괜찮아 보이는 옷을 골라 입었다. 나는 천사와 데이트를 하러 가는 것이다. 지하철 안에서 내가 얼마나 미친 짓을 하고 있는지 따져봤지만 그렇다고 다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솔직히 나는 그녀를 만나고 싶었다. 함께 놀고 싶었다.
  그녀는 서점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월요일 밤의 거리였지만 사람들은 많았다. 하지만 이 많은 사람들 중에 나를 기다리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어? 오늘은 좀 잘생겨 보여요.”
 
  그녀는 활짝 웃으며 나에게 팔짱을 끼었고,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채로 그녀를 보았다. 처음 봤을 때처럼 체크무늬 코트에 짧은 치마를 입었다. 머리가 내 어깨 정도까지 왔고 저번에 잠깐 지어보였던 슬픈 표정은 거짓말인 것처럼 기분이 무척 좋아보였다. 긴 머리칼을 찰랑거리며 길을 오가는 사람들을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왜 자꾸 나를 찾아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싫어요?”
 
  그녀는 애교가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절대 싫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를 못 믿겠으면 그냥 미쳤다고 생각해요. 그럼 되잖아요.”
 
  간단하게 말해 버리고 그녀는 걸음을 내딛었다. 나는 끌려가다시피 따라갔지만 속으로는 그래, 나도 그냥 잠깐 미쳤다고 생각하자,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기분이 좋았다.
 
  우리는 야외테라스가 있는 이탈리아 음식점으로 갔다. 나는 저녁으로 뭘 먹고 싶은지 물었고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스파게티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그녀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오렌지 빛 알전구가 열매처럼 매달린 장식용 나무 옆에 자리를 잡았다. 아직 겨울이 끝나지 않아서 약간 쌀쌀했지만 그런대로 괜찮았다. 오늘 밤은 비교적 따뜻한 것 같았다. 바로 옆에서 팔짱을 낀 연인들과 학교를 마친 고등학생들이 지나가는 걸 볼 수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안 추워요?”
 
  “괜찮아요, 상쾌하고 좋아요.”
 
  나는 그녀에게 메뉴판을 건넸다. 그리고 하얗고 깨끗한 보가 깔린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반짝거리는 은 식기들을 쳐다봤다. 이런 곳은 일년전 그녀와 헤어진 이후로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다. 이런 비싼 음식을 계속 사줄 수만 있다면, 그럼 어쩌면 헤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니, 변명에 불과했다.
  우리는 스파게티를 먹으며 콜라를 마셨다. 그녀는 콜라를 정말 좋아했다. 입을 가리고 작게 트림을 하는 그녀를 구경하다가 장난스런 기분이 들어서 이렇게 물었다.
 
  “천국에는 콜라가 없어요?”
 
  하지만 그녀는 나를 미친 놈 보듯 쳐다봤다. 나는 민망해져서 눈길을 피했지만 그녀는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연하죠. 천국에 콜라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아, 그게 꼭 없으라는 법도 없잖아요.”
 
  니가 천사라면, 천국에는 콜라도 있겠지, 라고 덧붙이고 싶었지만 나는 씁쓸하게 미소를 지으며 참았다. 그녀는 스파게티를 입에 오물거리며 말했다.
 
  “천국에는 없는 게 너무 많아요, 재밌는 건 전부 여기 있어요.”
 
  “여기에요?”
 
  “당연하죠.”
 
  “뭐가 재밌어요?”
 
  “지금 재미없어요?”
 
  나는 할 말이 없어졌다. 솔직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덧붙였다.
 
  “재미없는 것도 많아요.”
 
  “뭐가요?”
 
  “그냥 뭐랄까, 슬프고 힘들고 지겹고 짜증나고 화나고 그런 거, 그런 것들도 엄청 많아요.”
 
  “맞아요.”
 
  “맞죠?”
 
  그녀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빙긋 웃으며 덧붙였다.
 
  “그런데, 그런 건 재미없는 게 아니에요.”
 
  “그럼 뭐죠?”
 
  “불행한 거죠, 하지만 그 불행한 것도 천국에서 내려다보면 얼마나 재밌는데요.”
 
  나는 기가 막혔다.
 
  “나쁘네.”
 
  “그래도 가끔 이렇게 도와주러 오기도 하잖아요.”
 
  “자원봉사?”
 
  “그런 셈이겠네요.”
 
  나는 스파게티나 먹기로 했다. 그녀는 콜라를 한 잔 다 마셔버리고 리필을 부탁했다. 그리고 말했다.
 
  “행복한 것도, 불행한 것도 아예 아무것도 없는 것보단 낫지 않아요?”
 
  글쎄, 난 아직 죽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는데. 속으로 중얼거렸다.
 
  “맞아요! 나도 아직 살아있을 때는 그렇게 생각 안 했어요.”
 
  나는 스파게티가 목에 걸려서 컥컥거렸다. 그녀는 킥킥거리며 나에게 리필한 콜라를 건네줬다.
 
  그녀는 끝까지 자기가 계산을 하겠다고 우겼다. 하지만 나는 나대로 끝까지 우겨서 결국 계산서를 낚아채고 말았다. 물론 아주 다행이랄 것도 없었지만, 내 사흘 치 생활비가 날라 가 버렸지만 그래도 천사가 신용카드를 건네는 장면 따위는 결코 보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마치 사귄지 3년은 지난 연인들처럼, 익숙할 대로 익숙해진 식상한 데이트 코스의 전철을 밟고 있었다. 만나서 밥을 먹고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본다. 그게 나쁘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흐뭇했다. 1년 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녀가 다시 돌아온 것만 같았다.
  손님이 별로 없는 거대한 멀티플렉스 극장으로 들어서자마자 날개 없는 천사는 신이 나서 팸플릿을 뒤적거렸다. 그녀는 상영하는 모든 영화의 팸플릿을 하나씩 끄집어내서 진지한 눈빛으로 살펴봤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서 물었다.
 
  “물론 천국에는 극장도 없겠지?”
 
  “이거 어때요?”
 
  그녀는 대답도 않고 팸플릿 하나를 내밀어 보였다.
 
  <천사와 사랑을>
 
  제목이 아주 가관이었다.
 
  우리는 팝콘과 나쵸를 사고 그리고 또 역시나 지겨운 콜라를 사 들고 어두컴컴한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예고편의 불빛에 비춰진 관객석은 텅텅 비어 있었다. 조폭처럼 생겨먹은 양복 남자가 커다란 덩치를 맨 앞좌석에 쑤셔 넣은 채 주먹으로 팝콘을 뜯어 먹고 있었다. 맨 뒷좌석에는 계모임 끝나고 온듯한 아줌마들이 다섯 명 나란히 앉아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게 다였다.
 
  “엄청 재밌을 것 같지 않아요?”
 
  “별로 그럴 것 같진 않은데….”
 
  그녀와 나는 가운데 좌석 아무데나 주저앉았다. 그녀는 내 옆에 앉자마자 콜라를 꿀꺽거리며 마셨고 영화가 시작될 즘에는 폭탄처럼 트림을 터뜨렸다. 깜짝 놀랐는지 맨 앞의 조폭이 돌아보고 뒷좌석의 아줌마들은 좋다며 깔깔거렸다.
 
  “그러게 고만 좀 마시라고 했잖아.”
 
  나는 당황해서 속삭였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끅끅거리며 웃었다.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일 년 전으로 되돌아가는 걸 느꼈다. 모든 게 그대로였다. 그녀는 내 옆에 앉아 있고 우리는 함께 밥을 먹고 나서 영화를 보고 있다. 물론 나의 그녀는 이렇게 하마처럼 콜라를 마셔대진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어쩔 수 없이 한편으로는 울적해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안도와 아련한 향수 같은 걸 느끼고 있었다. 기나긴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 온 것 같은…. 나는 설마 하며 옆을 돌아봤다. 그녀가 커다란 눈동자를 물들이며 넋을 놓고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녀가 아니었다. 이 여자는 천사다.
 
  물론 나에게도 오래 전 천사처럼 바라보던 한 여자가 있었다.
 
  이상한 영화였다. 유치하고 엉성하고 뭔가 뒤죽박죽이었다. 눈부신 금발에 눈처럼 하얀 날개와 옷을 입은 프랑스 여인 천사는 우주를 떠돌다 어느 날 갑자기 인공위성에 부딪히고 만다. 날개가 찢어진 것이다. 천사는 추락한다. 결혼식을 앞두고 있던 어벙한 미국 청년의 집으로. 지붕을 박살내며 떨어진 천사의 등장에 남자는 경악하지만, 그것도 잠시 수천미터 상공에서 떨어지고도 흠집조차 나지 않은 천사의 아름다움에 홀라당 마음을 빼앗긴다. 천사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막장이군, 나는 중얼거리며 옆의 그녀를 돌아봤다. 놀랍게도 그녀는 나초를 씹어 먹으면서 아주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관람하고 있었다. 나는 기가 막혀서 그녀의 귀에 대고 말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래.”
 
  “정말요?”
 
  그녀는 깜짝 놀라서 쳐다봤다. 나는 눈웃음치며 말했다.
 
  “정말이지.”
 
  “와~ 그럼 진짜 대형 사고네요.”
 
  “그렇지.”
 
  “근데 의상이 너무 후졌어요.”
 
  “응? 뭐가? 천사라면 당연히 저렇게 입고 있어야 하는 거 아냐?”
 
  나는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을 노려보며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죠, 저런 건 오백년 전 스타일이거든요.”
 
  나는 고개를 돌리고 영화를 봤다. 그녀의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극장을 걸어 나오며 나는 영화의 엔딩을 되새기고 있었다. 분명 말도 안 되게 이상한 영화인데, 이상하게 마음속에 찌꺼기가 남아 있었다. 천사를 사랑하게 된 남자는 친구와 가족들로부터, 질투에 눈이 멀어버린 약혼자로부터 끝끝내 천사를 보호하고 지킨다. 그러다 갑자기 사고를 당해 죽어버리지만 그때쯤 마찬가지로 사랑에 빠져버린 천사는 하느님께 기도를 해서 남자를 살린다. 그리고 자신은 영원히 날개를 잃어버린다. 병원에서 눈뜬 남자의 곁에 하얀 간호사 복장의 그녀가 눈부신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한 영화야.”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맞아요, 좀 이상해요. 그런데 재밌었어요.”
 
  그렇게 대답하며 그녀는 남아있는 콜라의 얼음을 뽀드득 뽀드득 씹어 먹었다.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오래 전 그녀를 생각했다. 내가 정말로 사랑했던, 정말이지 천사처럼 바라보았던 그녀를,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현실의 벽에 부딪히면서 조금씩 그러나 모든 게 변했다. 따지고 보면 변한 건 나였다. 그녀는 항상 그대로였다. 나는 현실이 힘들다는 이유로, 취업을 하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적성에 맞지도 않는 일을 하는 게 지옥 같다는 이유로, 여러 가지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점점 더 그녀를 괴롭히고 함부로 대했다. 나는 그녀에게 상처를 주었다. 물론 지금 와서는, 내가 그랬던 게 무능력한 나 때문에 그녀가 떠나 버릴까봐, 나를 버릴까봐 두려움으로 키워갔던 강박과 조바심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그런 게 변명은 되지 못한다. 오히려 훨씬 더 부끄러울 뿐이다. 나는 그녀를 믿지 않은 것이다. 그녀는 나를 위해 날개를 버리고 지상으로 내려와 줬는데도 말이다.
 
  “무슨 생각해요?”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코트의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서 있는 뒤편으로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들이 스쳐갔다. 캄캄한 밤이었다. 그녀는 천사답지 않게, 너무나 인간적인 쓸쓸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아무 생각 안했어.”
 
  “진짜?”
 
  “진짜… 담배 하나 피워도 될까?”
 
  “피워요. 나도 하나 주고.”
 
  나는 담배를 꺼내다 멈칫했다.
 
  “천사도 담배를 피워?”
 
  “예전엔 골초였어요.”
 
  그녀의 말투가 어쩐지 조금 불량스러워져 있었다. 나는 담배 하나를 주면서 말했다.
 
  “놀았구나.”
 
  그녀는 내가 내민 라이터 불빛을 빨아들이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차들이 스쳐 지나는 가드레일 위에 팔꿈치를 기대고 나란히 담배를 피웠다. 나와 그녀가 내뿜는 연기가 밤거리의 보이지 않는 매연 속으로 뒤섞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끔거리기도 했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어느 새 나도 그녀처럼 미쳐버린 것 같았다.
 
  “아저씨, 훨씬 밝아지고 당당해진 거 알아요?”
 
  “그래?”
 
  나는 정말 그런가 생각해봤다. 그런 것 같았다.
 
  “천사 덕분이야.”
 
  “에~ 그렇게 말해도 안 믿는다는 거 알아요.”
 
  나는 움찔해서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는 담배도 참 맛있게 피웠다.
 
  “아냐, 니가 정말 천사 같다고 생각해.”
 
  “왜요?”
 
  “나를 도와주잖아.”
 
  “진짜요? 도움이 돼요?”
 
  그녀는 굉장히 반가운 표정으로 나를 봤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다른 사람을 만나서 같이 밥도 먹고 영화도 보고 얘기도 나누고 그런 거 정말 오랜만이거든.”
 
  “그럼 지금까진 뭐 했어요? 방 안에만 처박혀 있었어요?”
 
  “어.”
 
  “거기서 뭐한데요? 심심했겠다.”
 
  “외롭지, 하지만 아무리 외로워도 밖으로 나가는 게 무서웠어.”
 
  “밖은 더 외로우니까?”
 
  나는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는 길게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나도 알아요.”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신비로운 보랏빛이었다. 손톱모양의 달과 바늘구멍처럼 희미한 별들이 드문드문 새겨져 있었다. 가장 멀리 떨어진 우주로부터 싸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녀는 나의 팔짱을 끼고 걷고 있었다. 나는 그게 어색했지만, 그리고 어딘가 모르게 죄책감이 들었지만 그럼에도 사람의 온기란 이렇게 깊고 거대한 우주에서 몹시도 간절한 촉감이었다.
  거리에 늘어선 간판과 가로등 불빛 아래 사람들의 숫자는 조금씩 줄어들었다. 차도를 달리는 자동차들은 반대로 늘어난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가는지도 모른다. 나는 나의 집을 생각했다. 작고 초라한 방, 가득 찬 쓰레기, 나는 또 다시 거기에 갇혀서 컴퓨터를 켜고 마우스를 두들기는 걸까. 왠지 모르게 지옥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녀와 나는 어느새 버스 정류장에 멈춰 있었다.
 
  “이제 가야 해요.”
 
  “천국으로?”
 
  나는 물었다. 그녀는 주먹으로 내 가슴을 툭 쳤다.
 
  “놀리지 말아요.”
 
  “아니, 정말로 믿을 수도 있잖아.”
 
  정말로 믿을 수도 있다는 기분이 들어서 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방금 전 나처럼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집이 멀어서 골치 아프겠군.
  한참 동안 그렇게 말없이 서 있었다. 그녀는 하늘을 쳐다보고 나는 나의 우울한 감옥을 떠올리고 있었다. 버스는 오지 않았다. 설마 벌써 끊긴 건 아니겠지. 나는 시계를 봤다. 아직 지하철은 남아 있었다.
 
  “우리, 바다 갈래요?”
 
  그녀가 물었다. 나는 다시 시계를 봤다.
 
  “뭐야? 이 시간에?”
 
  “어때요? 가요, 밤바다 구경하러.”
 
  “안 돼.”
 
  “뭐가 안 돼요? 나는 외박 허락까지 받았는데.”
 
  “언제?”
 
  “방금!”
 
  그녀는 손가락으로 밤하늘을 가리켰다.
 
  나는 결국 그녀와 함께 버스를 탔다. 말리는 기분이었지만 그러나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었다. 뭐랄까, 조금은 구원받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우리는 작은 기차역에서 내렸고 심야로 가는 하행선을 두 장 끊었다. 초코칩 쿠키와 포테이토 칩 한 봉지, 딸기우유 하나와 바나나 우유 하나를 샀다. 그리고 노숙자가 모로 누워서 자고 있는 휑한 역 대합실에서 티브이를 보며 기차가 오기를 기다렸다. 티브이에서는 가짜수염을 잔뜩 붙인 사극을 하고 있었다.
  30분 정도 기다려서 기차를 탔다. 기차 안에는 빈자리가 많았다. 옆 자리에 짐을 잔뜩 쌓은 할머니와 이등병 모자를 눌러 쓰고 잠들어 버린 군인을 지나쳐서 그녀는 창가에, 나는 옆 좌석에 앉았다. 파리한 형광등 불빛이 밝혀져 있었다. 꿈틀거리며 기차가 출발했다.  
  그녀는 창가에 턱을 괴고 바깥의 풍경을 내다봤다. 말이 없었다. 그녀는 오른손은 나의 왼손을 붙잡고 있었다. 촉촉하게 땀이 배었지만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녀는 조금 뒤에 잠들어 버렸다. 창가에 팔베개를 하고서…. 나는 살며시 손을 놓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목에 남겨진 진한 흉터를 보았다.
  그녀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모든 게 안쓰러운 마음에 뭐라고 표현할 수조차 없는 기분이 되었다. 어떻게 그녀는 여기까지 오게 되었을까. 나는 어떡하다가 여기까지 왔을까. 얼마나 많은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난 걸까. 천사는 눈을 감고 숨을 깊게 몰아쉬었다. 작은 몸이 두근거렸다. 흩어져 있는 머리칼이 붉게 물든 뺨을 적셨다. 눈꺼풀이 희미하게 떨렸다. 캄캄한 세상의 불빛들이 기차의 반대편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다시 잡고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꿈속에서 그녀와 나는 아직 버스 안에 있었다.
  나는 버스 안에 우리 말고 아무도 없다는 것을, 운전석에는 기사도 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달리는 버스의 차창 밖으로 스쳐가는 도시의 풍경과, 그리고 하얗게 자라나는 깃털들을 보았다. 그것은 점점 더 커져서 순식간에 창밖을 뒤덮었고 어느새 우리가 타고 있는 버스는  날아가고 있었다.
  “말도 안 돼.”
  “하지만 날고 있잖아요.”
  그녀가 말했다. 버스의 양쪽 옆으로 거대한 날개가 펄럭이는 걸 보았다. 그녀는 창문을 조금 열고 틈새로 바깥을 내다 봤다. 그리고 나를 끌어당겨서 그 모습을 보도록 했다. 나는 보았다.
  검은 빌딩 숲과 곳곳에 매달린 반짝이는 불빛들을
  은빛으로 흐르는 강과 개미처럼 기어가는 자동차들과
  도시를 둘러싼 크고 작은 산들의 그림자
  멀리, 가장 멀리에 둥그스름하게 펼쳐진 거무스름한 지평선까지
  “아름다워.”
  “예쁘죠?”
  그녀가 내 볼에 가볍게 키스했다. 나는 그 입술의 감촉이 너무나 오래되고 친밀한 기억이라는 것을, 수백 번 수천 번 나에게 와닿았던 흔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고개를 돌렸을 때 그녀가 있었다. 그녀가 아닌, 그녀가 있었다. 나의 눈에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
  “울지 마, 바보.”
  그녀는 나를 비웃으며 옆에 있는 빨간 색 부저를 눌렀다.
 
 
 
 
  “다 왔어요!”
 
  나는 흠칫 놀라서 눈을 떴다. 기차 안이었다. 그녀가 나를 흔들어 깨운다.
 
  “뭐라고?”
 
  “다 왔다고요.”
 
  그녀는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 일어났는지 충전이 다 끝난 건전지 같은 생기 넘치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더니 까만 눈동자로 내 얼굴을 깊숙이 들여다봤다.
 
  “아저씨, 울었어요?”
 
  “뭐, 내가 언제?”
 
  나는 눈을 막 비볐다.
 
  “하품해서 그런 거야.”
 
  코에 닿을 정도로 가까이에 있는 그녀의 얼굴이 갑자기, 미끄럼틀에서 넘어진 나를 보는 유치원선생님의 표정처럼 변했다. 바보처럼 측은해하는 눈빛을 피해 나는 머리를 숙였다. 그녀의 손이 내 손을 붙잡아 당겼다. 씩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가요, 다 왔어요.”
 
  기차 안에는 우리 둘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낯선 땅에 발이 닿자마자 엄청난 추위와 면도날 같은 바람이 불어 닥쳤다. 자다가 일어나서 그런지 더 추웠다. 천사도 예외는 아닌 것 같았다. 우리 둘은 몸을 웅크리고 발을 동동 구르며 비명을 질렀다.
 
  “와~ 추워요!”
 
  “그러게 왜 오자고 그랬어!”
 
  “이제 와서 그런 말하기에요, 진짜?”
  “얼마나 가야 돼?”
 
  “조금만 더 걸어가면 돼요!”
 
  폭격을 피해 도망치는 피난민처럼 그녀와 나는 비틀거리며 역을 지나쳐 뛰어갔다. 아직 깜깜한 새벽이었다. 모두들 자고 있겠지, 아무도 돌아다니는 사람은 없었고, 처음 와 보는 이곳에는 헤드라이트를 치켜 뜬 택시와 덜컹거리는 화물차밖에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미친 쌍둥이 남매 같았다. 날카로운 바람에 몸부림치며 횡단보도를 건넜고, 셔터를 내린 가게들을 지나 자그맣게 파도소리가 스며드는 골목길까지 벌벌 떨며 종종걸음으로 조금씩 그렇게 육지의 끝으로 나아갔다.
  흐릿한 짠 냄새를 맡았다.
  내가 신은 운동화가 어느 순간 부드러운 모래를 밟고 있었다. 그녀가 내 손을 꼭 쥐었다.
  우리는 계속 걸어갔다.
  그녀가 외쳤다.
 
  “바다다!”
 
  그러나 나는 추웠다. 어쩌면 다시 눈물이 나올 정도로, 이게 도대체 무슨 미친 짓인지…. 하지만 누가 미쳤든지 간에, 어쨌든 분명한 사실은 그녀는 나를 도와주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게 고마웠고 그래서 가능한 함께 미치고 싶었다. 그녀가 정말로 이 바다를 보고서 그때처럼 행복해 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녀는 그걸 원하니까. 나는  눈을 꾸욱 감았다가 다시 떴고 그러자 내 앞에 검게 반짝이는 바다가 나타났다. 거대한 물, 밤하늘과 똑같은 색으로 맞닿은 그 곳을 희미한 수평선이 가르고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듯 폭풍처럼 숨결을 내뿜었고 파도의 흰 띠를 끊임없이 우리 앞으로 실어 보냈다. 우리가 걸어가는 길 앞에서 그것들은 산산이 부서지고 사라졌다. 거친 웅얼거림이 남아 귓속을 맴돌았다.
  나는 그녀가 등 돌린 채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곳으로 부들부들 떨면서 걸어갔다. 그녀도 코트의 깃을 움켜잡고 떨고 있었다. 하지만 추워서가 아니라 지금 넋을 놓고 쳐다보는 바다 때문에 감동해서 그런 건지도 몰랐다. 그녀는 천사니까. 나는 곁에 서서 함께 바다를 쳐다보며 물었다.
 
  “좋아?”
 
  “추워요.”
 
  그녀는 이를 딱딱 부딪히며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아주 조금만 더 기다리면 해가 뜨는 걸 볼 수 있을 거라면서. 나는 시계를 보고 적어도 한 시간은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증명해줬지만 그녀는 그게 바로 ‘조금’이라고 재해석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파도가 기어오르는 선을 피해서 차갑고 부드러운 모래 위에 나란히 주저앉았다. 매서운 바람이 사정없이 얼굴을 할퀴었지만 우리는 고개를 숙이고 옷깃을 있는 대로 끌어당겨서 웅크렸다. 그녀가 내 잠바의 호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나는 그걸 붙잡았고 그녀는 좀 더 바싹 나에게 붙어 앉았다. 아주 조금 따스해지는 걸 느꼈다.
 
  “우리… 담배 피워요.”
 
  그녀가 은밀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피식 웃으며 그래, 라고 대답했다.
  어쩌면 아주 조금 ‘더’ 따뜻해질지도 몰랐다. 나는 담배를 꺼내 간신히 불을 붙였고 그녀에게 건네줬다. 북극으로 추방당한 죄수들처럼 우리는 처연한 모습으로 담배를 피웠다. 흐린 연기가 밤바다를 향해 뻗어 나갔다. 그녀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녀의 서늘한 귀가 뺨을 스치며 지나갔다. 나는 손을 떨며 한숨처럼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또 다시 그런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고개를 돌리면 모든 게 돌아와 있을 것만 같은…. 하지만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바다를 쳐다보았다. 언젠가 나도 여기는 아니지만 그녀와 함께 바다로 놀러 온 적이 있다. 그때와 지금, 바다는 조금도 변한 게 없고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처럼 다 똑같은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다르다. 파도는 부서진다. 사라진다. 그리고 파도는 또 부서진다. 그리고 또, 사라진다.  
 
  “여기에 와본 적 있어?”
 
  나는 물었다. 그녀는 마치 다른 사람의 얘기를 듣고 있던 사람처럼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는 후회했다. 당연하고 또 괜한 질문을 한 것이다.
 
  “있어요.”
 
  그녀가 대답했다. 목소리가 우울하게 변해 있었고 나는 미안했다.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때는 겨울이 아니라 여름이었는데….”
 
  그녀는 말을 끊고,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에요.”
 
  “그래? 그럼 된 거야. 그 다음이 어떻든 그럼 된 거야.”
 
  “맞아요.”
 
  나는 담배를 모래 위에 짓이겼다. 똑같은 곳에 누군가 다른 사람이 버리고 간 담배꽁초가 떨어져 있었다.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저씨.”
 
  “어?”
 
  “많이 보고 싶어요?”
 
  “뭐가?”
 
  “아뇨, 그냥….”
 
  “무슨 말이야?”
 
  “다시 시작해요. 모든 게 다 달라져 있겠지만 그래도 다시 시작해요.”
 
  무슨 말이야,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고개를 숙였다. 짜증이 치밀었다. 하지만 그녀는 잠바 호주머니 안에서 내 손을 꼭 움켜쥐었다. 그리고 말했다.
 
  “옛날에 여기와 왔을 땐 정말로 행복했어요.”
 
  알고 있어.
 
  “오빠랑 처음 놀러 왔던 곳이에요.”
 
  나는 다시 고개를 들어 바다를 쳐다봤다. 캄캄한 바다는 침묵하고 있었다. 천천히, 조금씩 그녀는 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마치 아주 어릴 적 얘기를 하는 것처럼…. 나는 말없이 들었다. 그냥 바다를 보고 있었다.
 
  오빠랑 처음 놀러 왔던 곳이에요.
  사귄 지 얼마 안 되었을 땐데 나한테 되게 잘해줬어요.
  나는 학교도 때려치우고 그냥 일하면서 친구들이랑 놀고 그랬었거든요.
  친구 소개로 만났어요.
  첫인상은 좀 구렸는데 나를 너무 좋아하니까, 나 없으면 죽을 것 같다고 해서
  그냥 만났어요. 근데 나중에는 좋아하게 됐어요. 진심으로.
  같이 살았거든요. 나는 편의점에서 일하고 오빠는 술집에서 일했어요.
  재밌게 지냈는데 조금씩 안 좋아졌어요.
  오빠가 딴 여자도 만나는 것 같고 술도 너무 많이 마시고 성질도 더러워지는 것 같고 ㅋㅋ
  몇 번 용서해 줬는데,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헤어졌죠.
  욕하고 집어던지고 때리고 미친놈처럼 구는 걸 겨우겨우 때놨는데,
  그게 끝이라고 생각했어요.
  처음 친구한테 연락받고 그걸 보고 나서는
  찾아가서 죽이려고 했어요.
  근데 문제가, 어떻게 된 게 도저히 바깥을 못 나가겠더라고요.
  그냥 싫었어요.
  방문 열고 나가면 사람들이 다 쳐다볼 것 같고 전부 다 봤을 것 같고.
  나간 적도 있는데 미치는 줄 알았어요.
  사람들의 눈빛이 너무 무서워서.
  나는 그냥 방 안에만 있기로 했어요.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고, 생각나면 너무 힘드니까.
  만약 그때 그냥 뛰쳐나가서 그 사람을 두들겨 패기라도 했다면 뭔가 좀 나아졌을 것 같아요.
  그러지 못했죠. 겁이 나서.
  전화는 꺼 버리고, 친구가 찾아와서 방문을 두들겨도 쌩 까고, 엄마 아빠 생각이 나서 많이 울었어요. 그걸 보면 뭐라고 하실까. 모자 쓰고 마스크 쓰고 잠깐 나가서 먹을 것만 사들고 들어왔어요.
  티브이만 봤어요. 먹고 티브이 보다가 울다가 그냥 자고, 잘 씻지도 않고 생각이란 걸 안하고 싶었어요. 솔직히 그때는 좀 그러다 나아질 거란 생각도 했어요. 계속 그렇게 지낼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얼마나 지냈는지 모르겠는데 이상한 생각이 드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힘든데 친구들은 뭐하고 있지, 왜 이제 아무도 방문을 두들기지 않지? 엄마 아빠는 뭐하고 있지? 딸이 이렇게 힘든데 왜 아무것도 모르지?
  내가 혼자라는 걸 느꼈어요, 이 세상 다 쓰레기 같아서 아무도 믿을 수 없고 전부 다 자기밖에 모르고, 내가 이렇게 힘든데 자기네들끼리 웃고 행복할 거 아냐. 그런 생각.
  그래서 사고를 쳤어요.
  혼자 술 마시고 취해서 울다가 비틀거리며 화장실로 달려갔어요.
  엄청 토하고, 그러고 나서 거울을 보니까 내 모습이 너무 더럽고 추잡하게 느껴졌어요.
  방으로 들어가서 커터 칼을 가져 왔어요.
  변기 앞에 무릎을 꿇고 손목을 그었어요.
  피가 너무 많이 나왔어요.
  내가 토해 낸 것들 속에다가 손을 집어넣고 기다렸어요.
  깨끗해지기를. 모두 깨끗해지기를.
 
  다시 깨어나서 내가 죽었다는 걸 알았고 내 앞에 쓰러져 있는 나를 봤어요.
  나는 도망쳤죠. 화장실 문을 뛰쳐나왔어요.
  다시는 열 수 없게 잠궈버렸어요. 다시는 못 보게.
  이상한 건 여전히 내 방이라는 거였죠.
  나는 죽었는데 왜 아직도 여기에 있지?
  현관문을 열어 보려고 했지만 잠겨 있었어요.
  소리를 질러도 아무도 대답하지 않고, 창문도 열리지 않고 베란다 문도 열리지 않았어요.   뒤늦게야 알았죠. 여기가 나의 지옥이라는 걸.
 
  내가 잠군 화장실 문을 쳐다봤지만 끝까지 열진 않았어요.
  그냥 주저앉아서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티브이를 켰어요.
  티브이에 나오는 건 나를 그렇게 만든 오빠였어요. 나를 그렇게 만든 오빠가 아무렇지도 않게 친구들과 만나서 술을 마시고 있는 모습이었어요.
  나는 이를 악물고 그걸 쳐다봤어요. 2년 동안.
  2년 동안 오빠가 일본으로 도망가고 새로 직장을 구하고 새로운 여자를 만나서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는 것까지 다 봤어요.
  그런데 끝까지 그 사람은 단 한 번도 나를 생각하며 후회하지 않더라고요. 마치 내가 누구 때문에 그렇게 됐는지 모르는 것 같았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나는 끝도 없이 묻다가 결국엔 포기했어요. 사람은 그런 건가봐, 자신이 기억하기 싫은 건 그토록 간편하게 지울 수가 있나봐. 참 편리하다. 그렇다.
  채널을 돌려서 다른 사람들의 살아있는 모습을 구경했어요. 아빠와 엄마와 친구들과 그 사람들이 슬퍼하는 모습과 괴로워하는 모습과 그리고 나를 천천히 기억 속에서 지워가는 것 까지.
  그리고 나는 다시 채널을 돌려서 내가 알지 못하는 낯선 사람들의 삶을 바라보기 시작했어요. 내가 모르는 사람들, 하지만 나와 함께 살아 있었던 사람들, 그들이 행복하고 불행하게 살아가는 모습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봤어요.
  그러다가 아저씨를 보게 됐어요.
  아저씨 기억나요?
  아저씨가 속으로 씨발놈이라고 외쳤던 거.
  나 그거 보고 웃었어요.
  2년 만에 처음으로 웃었어요.
  그리고 왠지 모르게 고마웠어요. 아저씬 나를 모르는데, 나를 위해서 씨발놈이라고 대신 욕을 해줬으니까.
  아무것도 아닌 일이에요. 하지만 그 작은 방안에 갇혀있던 나에게는 믿기지 않는 일이었거든요.
  기적?
  나는 킥킥 웃으면서 일어났고 그리고 고개를 돌렸어요.
  거기에 내가 잠궈놓은 문이 있었어요.
  나는 걸어가서 그걸 열었어요.
  눈부신 햇살과,
  구름들이 보였어요.
  아래에 내가 살아 있었던 세상이 펼쳐져 있었고 이제 나에겐 날개가 생겨나 있었어요.
 
  아저씨한테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 것 같아요. 아저씨를 도와주고 싶었는데.
  그런데 어쩌면 천사처럼 도와주는 것보다 그냥 친구가 되어주는 편이 더 낫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함께 놀고 서로의 얘기를 들려주고 그런 거. 왜냐하면 내가 아저씨의 마음을 읽을 수는 있지만 아저씨의 마음을 다시 쓸 수는 없으니까.
  그건 아마도 아저씨가 새롭게 써 나가야 할 거에요.
  내가 들려준 이야기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녀가 사라져 버렸다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고개를 돌리지 않았고 그냥 바다를 보고 있었다. 추위가 조금씩 옅어져가고 캄캄했던 하늘에 신비로운 파란색이 스며들었다. 내가 보는 바다가 천천히 변해가고 있었다. 가장 먼 곳에 있는 흐릿한 수평선이 어느새 금빛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나는 저게 뭘까, 생각해봤다. 나는 그녀가 어디로 가버렸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봤다. 혹시, 화장실에 간 게 아닐까? 하지만 나는 무릎을 모으고 거기에 턱을 괴면서 중얼거렸다.
 
  “천사가 화장실에 가다니, 그런 건 거짓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