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필리아
- 작성일 2011-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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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 이제 여기까지 왔다. 고향을 떠나와 성직을 행하였고, 한 마을의 이름있는 신부로 활동하였다. 나이가 젊었던 만큼 장래도 유망했고, 나의 언변 역시 주님이 굽어 살피셔서 많은 교인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주님이 나를 이 땅에 내려 보낸 이유에 대해서 한번도 의심해본적이 없었다. 주님은 나를 이용하여 어리석은 자들을 깨우치고 그들을 옳은 길로 인도하기 위해 나를 이 세상 에 내려 보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정 어리석은 자는 나였다.
나는 주님이 주신 능력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 것에 심취하여 교만해지고 말았다. 신이 만들어 놓은 완벽한 아름다움과 완전한 존재에 대한 눈뜸은 한낱 인간에 불과한 나에게 너무나도 커다란 짐이었다. 그리고 그 것이 결국은 나를 여기까지 이끌었다.
한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 이 세상에서 내게 아름다움을 알려준 여자였고, 나를 타락하게 만들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이 만든 아름다움을 가장 완벽하게 간직한 여자였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한 때 사탄이 나를 타락시키기 위해 만든 것과 같아서 그녀를 두려워하고 또한 증오하였다. 그러나 사실 사탄이 숨어있던 곳은 내 마음속이었다. 내가 그녀를 증오한 것은 그저 나 자신의 교만함이었다. 그녀는 순수요. 진리요, 미요, 이 세상의 가장 숭고한 가치였고, 그 것은 곧 주님의 의지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것도 여기까지다. 그녀는 죽었고, 그녀가 가야할 곳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어째서 주님은 이 세상에 필요한 것을 내려주시고는 다시 가져가는 것일까? 그에 대한 대답은 항상 같았다. 주님이 필요하시기에 데려간다는 것이다. 수많은 장례식에서 그러한 주님의 뜻을 나의 혀를 통해 사람들에게 설파하였다. 그들에게 그리 말함으로써 주님의 뜻을 전달하였고 그들의 슬픔을 덜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내가 그녀를 묻게 되었을 때, 나는 그 대답을 다시금 되새겨 보았다. 이미 영혼을 취하셨을 주님께서 왜 다시금 이토록 아름다운 육신을 되가져가시려는 걸까? 재에서 재로, 먼지에서 먼지로 시작과 끝이 같다면 어찌하여 그토록 아름다운 과정을 만드셨을까?
그녀처럼 아름다울 수도 있겠고 내가 만나왔던 사람들처럼 추하기 그지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시작과 끝이 같다면 그 과정은 어찌하여 심히 다르며 그 것 때문에 사람이 울고 웃고 화내고 즐거워하게 만드는 것일까? 수십년간 주님의 뜻에 거르지 않고 살아왔지만 최근의 일들은 나를 성직자가 아닌 한낱 더럽혀진 인간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게 하였다
주님의 뜻에 의문을 품고, 그 길을 스스로 알아보려하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한 여인을 죽게 하였고, 수많은 사람들을 속여와야 했다. 나는 악마의 꼬임에 빠져 달콤한 꿀을 빨았다. 이 또한 신의 뜻이란 말인가? 아니면 내가 진정으로 무엇을 잘못했단 말인가? 그 것에 대한 해답은 얻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판단을 해야했다.
그래 그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 이 일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 그래 처음부터 생각을 다시 해봐야한다.
1: 사도의 화신
서독 메트만, 한 구석의 시골마을에서 농민들을 대상으로 연 교회가 있었다. 사람들이 많지 않았으므로 클 필요도 없었고, 도로를 타고 내려가면 그 유명한 쾰른 성당도 있었으므로 결코 커서도 안되는 교회였다.
도심에서 어지간히 떨어진 대농장에서 밀과 보리를 키우고 있었는데 근대에 들어와 기계화 되었다고 하더라도 너무나도 광활한 평원 위에 농사를 지었으므로 사람들이 많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렇게 소작을 사는 사람들 역시 넓은 땅에 사느라 모여있지 않고 드문드문 떨어져 있었으므로 그들을 위한 교회를 세우기란 여간 큰 결심이 아니었다.
하지만 만약 이 곳에 교회가 없었다면 이 사람들은 차를 타고 시내까지 나갔어야 했을 것이다. 다행히도 큰 뜻을 가지고 있었던 요한 신부의 덕으로 작지만 훌륭한 교회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분 혼자서 모든 것을 떠맡을 수 없었기에 신학교를 갓 졸업한 내가 이 곳, 트라움 성당에 오게 된 것이다.
요한 신부님은 정말로 나이가 많았다. 그는 주님을 위해서 큰 뜻을 펼쳤고, 지금까지 수많은 교회를 개척하셨지만 결정적으로 나이가 많으셔서 눈이 어두웠고, 주님의 뜻보다는 신도들의 생활에 더 큰 관심을 보이셨다. 농번기 중에는 영성체를 받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였고, 고해성사는 1 년에 한번이면 족하다고 하셨다. 그런 것들은 내가 받은 가르침과 어긋나긴 했지만 그 것이 신부님의 교만함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단지 그가 늙어가고 약해지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요한 신부님은 가끔씩 찾아오는 신도들과 술잔을 기울일 정도로 정력적이기는 했지만 성당으로 돌아와서는 항상 괴로워할만큼 약하기도 했다. 사실 그 분이 이곳에 오셨을 때부터 삶의 마지막을 정리하시고 계셨던 듯 했다.
그분은 내가 처음 트라움 성당에 왔을 때부터 말씀하셨다.
“나는 늙었고 자네는 젊어. 자네가 여기에 온 이유를 알고 있겠지?”
하지만 그 앞에서 나는 ‘네 알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그 것은 교만함이었고, 늙은이에 대해 도전하는 것처럼 비춰질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그렇게 대답을 못하는 내 모습에 요한 신부님은 오히려 나를 마음에 들어하셨던 것같다.
“이것은 내가 선택한 게 아닐세. 주님의 뜻이기도 하지. 내 자리를 대신할 사람이 필요한 걸세.”
그게 전부였다. 그 이후로 요한 신부님은 연단에 서지 않았다. 그 이후로 신도들에 대한 설교는 나의 몫이 되었다. 나는 아직 젊기에 패기가 있었고,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 실수같은 것은 없었다. 첫 설교 때부터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고 있었다. 주님의 수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도 그 것이 나의 목을 통해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인지 나의 혀가 굴러가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마치 어딘가에 홀린 것처럼 입에서 이야기는 끊임없이 터져 나왔고, 그 것은 가끔은 독일말로, 가끔은 라틴어로 그리고 가끔은 유대어로 튀어나왔다. 그 목소리가 격정적이 되어가면 그 말을 듣던 신도들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지옥의 끔찍함에 대해 이야기 할 때면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그리고 시사적인 이야기가 오고갈 때면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들이 어떻게 행동해야할지 이해하였다. 앞뒤 두서없이 쏟아져 나오는 말이라고 생각되었으나 결국에는 하나의 뜻으로 이어져 있었고, 그 것은 주님의 뜻이었다.
모든 것은 하나의 원과 같았으며, 그 원의 시작과 끝은 예수님의 행적과도 같았다. 우리 사는 인생의 모든 죄악과 고민과 고통들은 성서에 쓰여진 내용의 어느 부분과도 비교할 수 있었고, 그들의 해결책 역시 바람직하게 우리들을 이끌어 나갈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내려준 시련이고 우리에게 내려준 복음이었다.
사람들은 나의 설교를 들으면 감정이 북받쳐 올라와 눈물을 흘리고, 가끔은 웃고, 대부분은 주님을 찬양하였다. 마치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듯한 재앙 앞에서 속죄하며, =아마도 그들의 착각이겠지만= 주님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몇 번의 나의 설교가 계속 되는 동안 내 설교를 들으러 오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났고, 그 사람들 모두 나의 설교에 감동하였다. 그들이 진심으로 주님을 따르는 것인지 아니면 교구에 속해 있어서 시간을 때우러 오는 것인지 알아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성찬 의식에 참가하기 위해 적어도 한달에 한번씩 고해성사를 하러 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죄악은 심히 가벼운 것들이었다. 하지만 영성체를 받기 위해 자그마한 죄도 남겨 놓을 수 없었기에 고해성사를 받으러 오고는 했다.
농번기에 성찬 의식을 중단하고, 고해 성사도 일년에 한번이면 족하다고 하였던 요한 신부님의 규칙은 점점 허물어져 갔고, 신도들은 나의 설교에 감동하여 내게 성체를 받기 위해 고해성사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금 많은 사람들이 온다 싶었으나 어느새 고해 성사를 하기 위해 줄을 서기 시작했으며 늦은 저녁 시간의 고해성사는 또 다른 교회가 되어있었다.
고해성사를 하러 나오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나쁜 소문이 돌 정도가 되자 다음 설교 때 그들의 교만함에 대해 꾸짖어야 하기도 했다.
내가 원하는 바는 아니었으나 요한 신부님이 교민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자그마한 규칙들을 내가 어기게 되자 나 자신이 교만에 빠질세라 난 그에게 고해성사를 요청하였으나 요한 신부님은 나를 꼭 끌어안아 주셨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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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교만한 것이 아니다. 주님의 뜻이 그러했던 것을 내가 교만하여 뒤틀었던 것을 네가 바로 잡은 것이다.”
그분의 그 말을 들은 후로는 나 역시 자신감이 생겨서 더더욱 가열차게 활동할 수 있었다. 그간 내가 혹시 교만하여 내가 신의 이름으로 나의 의견을 사람들에게 퍼뜨리지 않을까 생각했던 불안감을 떨쳐버리고, 내가 원하는 대로 이야기를 진행시켜나갔다. 내가 아무리 엉터리같은 이야기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 것은 결국 주님께서 가장 완벽한 해답으로 풀어주실 것이었다. 성경에는 이미 모든 답이 있었고, 그 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나의 어리석은 질문들은 답을 찾아갔다. 이러한 나조차도 답을 깨닫고 감탄하는데 하물며 성경에 대해 나보다 지식이 덜한 사람들은 어찌할까? 그들은 세상의 진리를 얻고 감격하였고, 그동안 저질렀던 잘못에 대해 회개하였다. 그리되면 그날 저녁에는 또 한번 고해성사실 앞에 긴줄이 매워졌다.
사람들은 나를 일컬어 바울의 화신이라고 하거나 또는 불의 혀를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마치 타오르는 불길처럼 격정적이고 열정적인 설교를 하는데다가 그 말에 거침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하는 말에 거침이 없었던 것은 다름 아닌 주님의 복음에 모든 해답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내가 타오르는 불과 같았던 것은 주님의 복음을 전적으로 믿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주님을 믿지 않으면서 남을 포교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훌륭한 포교자였다.
이러한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어느 날 아침부터였다.
아침 식사 준비를 하는 동안 요한 신부님을 뵙지 못한 것이 걱정이 되어 신부님의 방으로 들어갔더니, 신부님이 싸늘한 시신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비록 우리가 같이 만난 시간은 오래되지 않았으나 나를 믿어주고, 내게 후원해줬으며, 내가 흔들리지 않게 잡아주신 분이 하루 아침에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되자 나의 머릿속은 한순간 뒤틀어지는 듯 했다.
그 날은 주일인터라 아침에 설교가 있었으나 아침 설교는 결국 요한 신부님의 장례식과 겸하게 되었다. 신부님의 시신을 관에 넣고 마지막 가시는 길에 사람들과 한번 만나시라고 사람들을 모아 놓았다. 그리고 모두 요한 신부님의 죽음에 안타까워하였고, 신부님의 관속에는 장미꽃이 꽉 들어차게 되었다.
모두 신부님과 마지막 인사를 나눈 후 주일 설교를 시작했다. 물론 주제는 신부님이었고, 신부님이 이제 돌아가셨으니 어디로 가실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 때도 평소처럼 불의 혀를 믿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면 그 해답이 성경 속에서 튀어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어째서 요한 신부님을 데려간 것인가? 그 것에 대해 어느 구절을 인용해야하는지 고민하였다. 죽은 아이를 살려달라고 부탁하던 여인의 예(누가 복음 7:14)인가? 아니면 3 일후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예(마태복음:28:10)인가? 가장 적당한 것은 마지막 날에 다시 부활 할 것이라 믿는 나사로의 여동생의 예(요한복음 11:26)인 듯 싶었다.
하지만 정작 그 이야기를 해줄 수 없었다. 말을 이어가다가도 요한 신부님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눈물이 삼켜져서 말을 이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요한 신부님과의 이별은 그 무엇보다 슬펐고, 그 슬픔이 너무 컸기에 내가 믿는 요한 신부님의 부활을 기뻐할 수 없었다. 성경에 씌어진 글귀대로였다면 나는 요한 신부님의 또 다른 영생의 시작을 기뻐하며 춤이라도 춰야했지만 정작 나는 눈물을 머금고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 때문에 모두와의 설교 대신 눈물바다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아마도 그 때부터 내 마음에 사탄이 들어서려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2 : 시골 생활
트라움 성당 반경 2 킬로미터 내에 사람이 사는 집은 몇 채나 될 것 같은가? 내가 사는 곳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여러분들에게 이러한 질문을 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막상 대답을 듣는다면 재미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한번 재미 삼아서라도 숫자를 떠 올려 보도록 해보자. 나는 통계를 모르고, 지리에 대한 것에도 문외한이다. 그래서 독일의 평균 인구 밀도같은 것도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반경 2 킬로미터 내에 5 가구보다 낮지 않을 것이다.
트라움 성당 사방 2킬로미터 내에는 오직 다섯 채의 집이 있을 뿐이었다. 각 집마다 늙은 부부가 살고, 젊은 자식들이 있었으며, 그렇지 않은 부부들은 고아를 데려다 키우고는 했다. 시골 중에 깡시골이었고, 그랬기에 요한 신부님은 이곳에 터를 잡으신 것이었다. 이 교구의 사람들이 교회를 나가려면 십 킬로미터 이상 나가서 도심까지 나와야 했다.
하지만 우리 트라움 성당에 모이는 사람은 스무 명, 서른 명 이정도가 아니었다. 백 명을 훌쩍 넘기어 이제는 앉은 자리가 부족할 정도였다. 도심 쪽이 더 가까운 집에서도 같은 시골 교구라며 우리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저 멀리 평원의 끝에서부터 자전거를 타고 교회로 들어오는 분들도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주지만 그들의 그러한 열정에는 항상 고마움을 가지고 있었다.
젊고 혈기 넘치던 나는 교회 안에서 하루 종일을 보낼 수가 없었다. 교인들이 내게 상담하고자 찾아오는 일도 적지 않았으나 교회 안에 틀어박혀서 언제 올지도 모르는 손님을 기다리는 것은 한참 활동적인 시기의 내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마련한 게 자전거였다. 수단을 입고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모습은 우스웠지만 시골의 울퉁불퉁한 길을 맛보는 건 좋았다. 누군가는 우리를 위해서 이 들판에서 뼈가 빠지게 일을 하고 있겠지만 그 경치를 아름다워하는 이유는 이 모든 게 주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한편 나는 나 자신이 힘있고, 젊고, 패기있고, 많이 배움으로써 생기는 교만함이 아닌가 하고 항상 경계하였다. 자전거를 타고 교인들의 집을 방문하는 동안 항상 나 자신이 교만에 빠진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해보았다. 당장에는 답이 내려지지 않았으나 사람들이 여전히 나를 좋아하고, 나 역시 교만에 빠지지 않으려 노력하며 요한 신부님의 마지막 말씀을 가슴에 새김으로서 내가 하는 일에 확신을 갖자고 다짐하는 걸로 결론을 내리곤 했다.
그렇게 트라움 성당에서 약 10분 정도 자전거를 타고 가면 처음으로 나오는 집이 마이어 씨네 집이었다. 그분은 아내와 함께 살아가고 있었는데 큰 아들이 전쟁에서 죽고 난 후 외롭게 살아가던 부부였다. 이분들은 신앙심이 독실하여 교회에 나와서 힘을 얻고 돌아가시곤 했는데 요즘엔 마이어 부인이 약해지셔서 가사 일이 힘드시다는 이야기를 들은 참이었다. 지난 주일에는 교회에 나오지 못할 정도로 약해지셨나 해서 오늘 이렇게 찾아가는 참이었다.
마이어 씨는 검소하였으나 집은 크기가 있는 편이었다. 그가 돈이 많고 부유해서가 아니라 대농장을 관리하느라 지어 놓은 큰 기숙사를 그의 집으로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근방의 지주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으나 전쟁 당시에는 이 넓은 땅을 관리하기 위해 수천 명의 노동자를 고용하여 보리, 밀, 사과 등등 재배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재배해다 팔곤 했다. 그 때는 농작물이 가치가 높았으므로 땅을 쉬게 하지 않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쓰곤 했다고 한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공업이 발달하면서 농토는 그저 놀게 하지 않음으로써 지원금을 얻어내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아마도 멀지 않은 미래에는 이곳도 공장이 들어서고 도시가 생길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집도 없어질텐데 그럼 이곳의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 머릿속에 가까운 미래의 일에 대한 걱정이 들어왔으나 오늘 내가 온 목적을 생각하면 그런 것은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안녕하세요? 파울입니다.”
마이어 씨 집의 문 앞에 놓여있는 손잡이를 탁탁 두드리며 벽면의 투명한 창을 들여다보자 그 안의 마이어 씨는 읽고 있던 책을 덮고 흔들의자에서 일어났다. 잠시 후 하얀 문의 빗장 끌러 내리는 소리가 나더니 머리가 하얗게 세었어도 정력이 넘치는 시골 촌부의 미소 띤 얼굴이 문틈으로 보여졌다.
“신부님, 어서 오십시오. 환영합니다.”
마치 나를 기다리던 사람 대하는 듯 반갑게 맞이한 마이어 씨는 곧장 나를 응접실에 앉혀 놓고는 2 층으로 올라가 자신의 아내를 데리고 내려왔다.
마이어 씨는 힘이 넘치는데에 비해 아내인 니콜은 지팡이를 짚어야 할 정도로 걷는 게 버거운 모양이었다. 아내를 부축하고 내려온 마이어 씨는 아내에게 큰 소리로 ‘신부님이 오셨어.’하고 말하자 니콜은 환하게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나이 드신 분이 걸어오자 그분이 쓰러질까 걱정되어 자리에서 일어나 그분의 손을 잡아드렸고 그녀는 더욱 환하게 웃으며 흔들의자에 앉았다.
“내가 요즘 걷는 게 시원찮아서 미안하우 교회 갔어야 했는데. 걷는 게 시원찮아서 미안하우.”
그녀는 자신이 한말을 바로 기억하지 못하는 듯 했던 말을 반복하며 말하였다.
“주님은 이곳에도 계시지 않습니까? 주님 앞에 기도를 올리면 그곳이 교회입니다.”
그녀가 이해할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의사 전달을 위해 두 손을 마주 잡고 두 눈을 감으며 응접실 한 쪽 벽에 매달려 있는 십자가에 기도하는 모양을 내어 보였다. 그러자 그녀는 다시 한번 미소 지어보였다.
“사실 요즘 니콜이 귀도 잘 안 들리고, 했던 말도 계속하는 게 치매끼가 온 모양입니다. 뭐 나이가 들면 어쩔 수 없는 거지요.”
“저런,”
슬퍼할만한 이야기였지만 신앙 생활을 오래한 덕에 그녀의 치매는 극단적인 행동으로까지 이어지지 않는 듯 했다. 단지 그녀는 남들보다 조금 더 행복해 보였다.
“괜찮습니다. 그녀는 지금까지 주님의 사랑 속에 살아왔고, 이제부터는 그 것만 기억할테니까요. 우리처럼 나이를 먹게 되면 이 세상의 행복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단지 우리가 가는 날까지 큰 일이 없기를 바라는 것 뿐이지요.”
“그리 되실 겁니다.”
마이어 씨는 니콜의 옆에 앉아서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 두 분은 지금의 상황이 큰 시련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듯 했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 집에 양녀를 하나 두기로 했습니다.”
“아, 그러신가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부모없이 살아가는 고아들에게 새로운 부모는 새로운 희망과도 같을테니까요. 마이어 씨 부부라면 틀림없이 좋은 부모가 되실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나니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이 두 사람은 나이가 너무 많아서 아이를 입양 받기에 적절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생각이 얼굴 표정으로 나타났는지 내 눈썹이 올라가는 표정을 읽은 마이어 씨는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지금 저희들이 나이가 많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그런데 입양을 한다니까 이상하다고 생각하셨고요.”
“아… 네, 사실은 그렇습니다. 말씀드리기 조금 죄송스럽지만 두 분이 아이를 입양하시고 얼마나 더 계실지 모르겠지만 아이가 다 크기 전에 두 분이 돌아가신다면 아이는 또 다시 곤란해질 것 같습니다.”
새로운 희망이 또 한 번의 이별로 사라져가게 된다면 고아에게는 더 큰 상처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마이어 씨의 얼굴에선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가 입양하기로 한 아이는 어린 아이가 아니랍니다. 사실 그 아이가 원해서 우리에게 오기로 한 것이기도 해요. 니콜이 이렇게 되고 나서 집안일을 거들어 줄 사람이 필요했는데, 베이비 붐으로 태어난 아이들이 고아가 되고 그들이 입양 기관에서 나이가 차서 나간 다음에는 마땅히 할 수 있는 기술이 없어서 범죄자가 된다는 뉴스를 접했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던 새하얀 아이들이 이 나라를 좀먹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예전에 신부님이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사람은 태어날 때 새하얀 도화지와 같다고요. 거기에 무엇을 그리든 자기 마음이지만 아무 것도 그리지 않는다면 누군가가 검은 물감을 떨어뜨리고 만다고… 그렇게 되어선 안되겠다 싶어서 입양 기관을 찾아갔더랬습니다.”
“아아… 훌륭하십니다.”
그는 내가 했던 설교를 모두 기억하고 있는 듯 했다. 아니 모든 것이 아니더라도 내가 한 말을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다. 이 영광은 주님의 것이다. 내가 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막상 갔더니 역시 우리 부부가 나이가 많아서 입양 시킬 수 없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다가 한 아이가 다가왔지요. 나이는 열일곱 살 정도 된 아이로 내년이면 기관을 나가야 했던 아이였습니다. 그 아이가 저와 함께 살고 싶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나와 치매 걸린 할머니가 있고, 사실 집안일을 도와줄 아이를 구하는 거라고요. 하지만 우린 사랑으로 보살 필 것이며 우리가 죽은 다음엔 내가 가진 얼마 안되는 재산을 물려줄 거라고요.”
“그래서 이야기는 잘 된 겁니까?”
“네, 관련된 서류 수속을 밟고나면 다음 주에 우리 집으로 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가 과연 잘 선택한 것일까요? 혹시 못된 아이를 집안에 들여 놓게 되는 건 아닐까요?”
거룩한 마음으로 시작하긴 했지만 역시 그 결과는 아직 알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을 그렇게 만드신 것도 주님의 뜻이다.
“그 걸 이제부터 알아가야지요. 마이어 씨. 제 앞날이 아직 많이 남은 것처럼, 마이어 씨와 니콜의 앞날도 많이 남아있습니다. 그 끝이 어떤 모양인지 우리는 알고 있지만 그 끝에 언제 도달할지는 오직 주님만이 알고 계시지요. 제가 보기엔 주님께서 마이어 씨께서 삶을 무료하게 생각하시는 걸 알고, 새로운 선물을 주신 것 같습니다.”
그런 나의 해석이 마음에 들었는지 마이어 씨는 호탕하게 웃고는 온 김에 점심 식사를 하고 가라면서 구운 소시지와 감자 으깬 것 그리고 포도주 한잔을 대접하였다. 소시지와 감자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었지만 포도주는 음주운전을 하면 안된다는 핑계로 사양하였다.
식사를 하는 동안에 니콜은 잠시 제정신으로 돌아온 듯 보였고, 우리는 비교적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 집을 나서면서 마이어 씨에게 기도하듯 한마디 남겼다.
“집안이 화목해지기를 기원합니다.”
마이어 씨는 나의 그 말에 한치의 의심도 두지 않았다. 그는 고마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시골길을 따라서 다음 집을 찾아가려다가 갑자기 하늘이 어둑어둑 해지는 것이 비가 쏟아질 것같아서 다시 트라움 성당으로 돌아가야 했다. 돌아오는 길에 하늘에 점점 검은 구름이 끼어 올라오더니 성당에 도착할 때 즈음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운 좋게 수단을 적시지 않게 되어 감사하게 여기면서 교회가 괜히 주님의 집이 아니구나 싶었다.
하지만 성당에는 아무도 없었고,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에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오늘은 이른 시간부터 또한 외롭게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주님이 곁에 계실 것이다. 그렇게 다짐하고는 있지만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하고 내일 아침까지 있는 시간은 하나의 수행을 넘어서서 짙은 외로움과 무력감을 느끼게 하였다.
도심의 교회 같았으면 내가 챙겨야 할 서류들이 여럿 있었겠지만 시골의 교회는 그저 내 입을 것 먹을 것 그리고 가끔씩 즉흥적으로 생기는 교회 행사만 챙기면 그만이었으므로 교회 안에 들어 앉아있는 동안 무료한 시간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기도하라 그리고 일하라. 나태함은 죄악이었기에 일거리를 찾아야 했다.
그래서 본당을 청소하기로 했다. 바닥의 붉은 카펫을 거두고 나무 바닥 위로 왁스칠을 해 나갔다. 시작은 별 것 아닌 것처럼 해치우려 했으나 결국 왁스 위로 내 발자국이 남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는 다시 한번 왁스칠을 해 나가야 했다.
그제서야 우리 교회에 무엇이 필요한지 생각이 났다. 나를 도와줄 복사가 필요했다. 하지만 이런 시골 마을에 과연 복사직을 행해 줄 신도가 있을까? 그리고 나 자신의 외로움을 면하기 위해서 주님의 이름으로 사람을 구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 일일까? 하지만 마음을 고쳐 먹기로 했다. 복사를 두는 것이 이기심에 의한 것이라면 복사를 둔 수 많은 사제들이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탓하는 것이었다.
하물며 요한 신부님도 나를 필요로 하셨으니까…
벽에 매달린 주님의 십자가를 깨끗이 닦으며 본당의 정리를 마무리 지었다. 여느 때보다 더욱 빛나는 예수님의 모습에 저절로 마음이 숙연해졌다. 내가 지금 받는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처하신 십자가는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무거웠을 것이다.
조심스레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기도하였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여
그 이름을 거룩히 하시어
이 세상에 나라를 세우셔서
이 세상에서 그리 이루소서
.....
3: 첫만남
여느 때와 다름없는 주일의 아침이었다. 어제 저녁시간부터 시작된 침묵은 아침의 해를 보면서도 이어져왔다. 그러다 보니 밤시간은 길고 또 길고 외로움은 점점 깊어져만 갔다. 홀로 이 교회를 꾸려나가기 전까지는 그래도 요한 신부님과 이야기를 나누며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었으나 이제는 정말로 이야기를 나눌 상대조차 없었다. 이른 저녁시간의 고해성사를 하러 온 신도들이 오히려 고마울 정도였다.
주일의 아침은 그런 무거운 마음으로 시작되었다. 오늘 사람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줘야 하는지, 무슨 일이 새로 생길지, 나는 과연 잘 해나갈 수 있는지, 고민할 수 밖에 없었다. 아니 그렇게 고민하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요한 신부님이 계셨다면 주님이 이끌어 주실거다. 라고 한마디해주셨겠지만 그런 게 없기 때문에 이런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거룩한 주일이다. 스스로 차려 먹는 아침 식사는 마른 빵에 우유 한잔 그리고 치즈 한조각이었다. 식사에 앞서 잠시간 기도를 올리면서 밤새 계속된 침묵이 깨어졌다. 상징적인 행위였으나 그 것만으로도 나는 잠시간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다. 수단을 입는 순간 세속에선 죽은 사람이라는데 침묵을 깸으로서 세속으로 들어오는 시간이 이토록 기다려지다니, 아직 수행이 부족하구나 생각되었다.
식사를 마치고 벽의 시계를 바라보자 오전 7시가 갓 넘어있었다. 미사는 9 시부터였다. 식사를 마치고 수단을 입고 오늘 어떠한 이야기로 설교를 할까 생각하였다. 오늘은 아마도 마이어 씨 댁에 새로운 양녀가 들어오는 날일 것이다. 그렇다면 양녀로 들어가 의붓아비에게 은혜를 갚은 에스더의 이야기가 적당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하게 되면 에스더의 지혜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게 된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고민에 빠졌다.
“아아, 모든 것은 주님의 뜻대로다.”
내가 고민할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주님께서 내게 해답을 내려주실 것이다. 나는 주님의 이야기를 전달해줄 뿐이다.
수단을 입고 거울 앞에 서서 나 자신에게 다짐하였다. 나 자신을 거울 속 허상처럼 부정할 필요까진 없지만 이 모든 일이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도 신도들을 감동시켜야 한다. 그게 내가 여기 있는 이유이다.
8시가 조금 넘는 시간이 되자 사람들이 한 명, 두 명 본당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트라움 성당은 자그마한 교회였으나 교회 밖에는 낡은 소형차들이 줄지어 있었고 자전거를 타고 오는 사람도 꽤 많은지 자전거가 교회 건물 벽에 줄지어 기대어져 있었다. 처음 이 건물이 들어 섰을 때에는 50 여명 정도를 수용할 생각으로 지어 놓았지만 어느새 백 명이 훌쩍 넘어버린 신자들 덕분에 의자를 더 늘려야 했지만 그래도 미사 내내 뒤에 서서 이야기를 듣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수고를 감수해주는 사람들에 대해 당연히 줄 것을 준다고 생각해선 안된다. 그 수고에 대해 감사하여야 한다. 나는 그들을 천국으로 이끄는 사람이지만 천국에 가려하는 그들의 의지에 항상 감사해야한다.
9시가 되자 평소의 그림대로 모습이 나왔다. 교구 내의 독실한 신자들이 모두 의자에 앉아있고, 의자에 앉지 못한 사람들은 서서 미사를 보았다.
연단에 올라서 사람들을 한번 훑어보며 미소를 지었다. 매번 보던 반가운 얼굴도 있고 처음보는 얼굴도 있으며 매번 보아왔으나 보이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정말 많은 분들이 오셨습니다. 이러다가 저희 교회 부자되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가벼운 농담으로 이야기를 시작하자 사람들은 하하하 하고 조용하게 웃었다. 일단 사람들 사이를 둘러보면서 내가 찾는 사람이 있나 싶었다. 주위에 왜인지 잘 섞이지 않는 사람을 찾는 건 그리 힘들지 않았다. 솔직히 조금 부담스럽기까지 했다.
마이어 노부부가 함께 교회에 찾아와 앞자리에 앉아있었고 그 옆에 아직 어색한 모습의 젊은 여자가 니콜의 한쪽 손을 잡아주고 있었다. 정말 낯설기 그지없었다.
교회 안에 젊은 도시 여자가 들어온 것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시골에서 자란 사람도 아니었고, 고아로 자라나면서 주님의 말씀이라고는 전혀 배운 적 없는 듯 자유로워보였다. 그 자유란 사역되지 않음으로 야생성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어울릴 듯 했다. 주님의 앞에 전혀 꾸며지지 않은 여인의 모습은 마치 동물원에 한 마리의 원숭이와 같았다.
나의 선입관일 것이다. 자세히 바라보면 그녀는 상당히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긴 속눈썹 안에 맑은 눈을 하고 있었고, 신이 내린 여성성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녀가 인간성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이게 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세속의 물이 짙게 배어 있어서였다.
긴 속눈썹은 짙은 눈화장으로 검게 칠하였고 하얗고 뽀얀 얼굴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짙은 분 덕분이었다. 그 사이에 유난히 빨간 입술은 보는 이로 하여금 관능을 일으킬 법하였다. 무엇보다 그녀를 오랫동안 바라보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야하디 야한 옷가짐이었다. 주님은 그녀에게 완벽한 여성성을 주셨다. 감히 표현할 수 없는 풍만한 가슴은 그 것을 떠 올리는 것만으로도 죄악을 저지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가슴이 눈에 띄도록 딱 달라붙는 상의를 입고 간신히 그 것을 가리려는 듯 걸친 자그마한 겉옷조차도 너무나도 작아서 가슴 선만 간신히 가릴 정도였다. 심지어 그 진소재의 옷은 군데군데 틑어져 있어서 불량스럽기 그지없었다.
오, 주님이시여. 마이어 씨가 내게 이 일이 제대로 된 일인지 물어본 이유가 이런 것이었습니까? 마이어 씨가 그저 젊은 여성의 색기에 넘어가서 그녀를 양녀로 받아들인 것입니까? 하지만 마이어 씨에 대한 나의 신뢰가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그녀에게서 좋은 점을 찾아낼 수 있다면 마이어 씨가 그녀를 선택한 것이 합당하다고 여길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나의 믿음을 지탱해주는 것은 그녀의 진지한 눈빛과 힘없이 고개를 흔드는 니콜의 꽉 잡은 손이었다. 겉모습에 현혹되지 말지어다. 그녀는 진실된 마음으로 저 노부부를 도와주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주신 천사일지도 모른다.
“그럼 미사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럼 모두 찬송가 05 번 알렐루야를 찬송하겠습니다.”
찬송가로 시작된 미사는 곧 신도들의 목소리를 하나로 만들었고 처음오는 신도들도 쉬운 가사를 따라하였다. 하지만 그렇게 찬양하는 내내 나의 시선은 새로운 여성이 이 노래를 따라부르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쫓고 있었고, 그녀가 수줍은 듯 입술만 벙긋거리는 것에 대해 고민하였다. 그녀는 찬송을 하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찬송을 하고 있는 것인가? 단순히 수줍어서라면 이해할 수 있지만 그녀가 주를 찬양하지 않는다면 그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고민되기 시작하였다.
본당 안을 꽉 채우는 찬양의 목소리가 노래의 끝에 맞춰 조용해지자 성당 안은 찬송의 열기에서 다시 엄숙함으로 돌아섰고 그 것은 곧 나의 설교가 시작되는 신호이기도 하였다. 사람들은 나를 불의 혀라고 하였다.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말이었지만 나는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재주가 있었다. 그 재주를 통해서 수 많은 신도들을 울고 웃게 만들었고 그들의 신앙심을 깊게 만들어왔다. 그 것은 결코 내가 잘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주님을 그만큼 믿고 따르기 때문에 내게 주신 능력이었다. 영광은 주님의 것이다.
그 날도 아침까지는 그렇게 고민을 했지만 막상 설교 시간이 되자 나의 입은 열리고 나의 혀는 움직였다. 시작은 주님을 팔아먹은 유다와 주님을 세 번 부정한 베드로의 이야기로 지금 신념을 가지지 않은 자들이 있는지 꾸짖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주님을 부정하는 자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며 아멘을 부르짖었다. 하지만 정작 맨 앞자리에 앉아있는 눈에 거슬리는 그 여자는 그 빨간 입술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그녀는 나를 깊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느끼면 느낄수록 나 자신이 시험받는 듯 했다. 그녀는 내게 도전을 하는 듯 했고, 나는 그 도전에 지지 않기 위해 더더욱 열렬히 설교하였다. 결국 에스더의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고 양녀로 키워진 아름다운 에스더가 왕의 총애를 받고 결국 죽을 뻔한 모르드개를 구하는 이야기였다. 그녀가 마이어 씨 부부에게 받은 은혜를 잊지 않고 갚아줄 것을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된 설교였으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그녀가 마치 에스더의 또 다른 잔인한 면모를 드러내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는 동안에도 그녀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드개를 죽이려 음모를 꾸민 하만이 에스더의 용감한 결단으로 오히려 모르드개를 구하고 하만을 죽음으로 내몰 때 역전의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열띤 얼굴로 아멘을 외치고 있었다.
그 뜨거운 열기 안에서 오직 그녀만이 냉정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은 하나의 바늘과 같이 나의 심장을 꿰뚫는 듯 했고 마음이 점점 불편해져 말을 계속 이어나가기 위해 숨을 쉬면 쉴수록 나의 숨통을 조이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시선은 마치 이 공간 안에 나와 그녀 단 둘만 있는 듯 느끼게 하였고, 그 안에서 나는 그녀를 무시하기 위해 혼자서 열띤 설교를 하고 있었다. 그 여자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손에 쥐인 성경책을 그녀에게 집어 던지며 물러가라 뱀의 자식아! 하고 외치고 싶었다.
어째서 그 여자가 내게 이토록 큰 고통을 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만약 내가 이성없이 본능만으로 움직였다면 벌써 그 여자에게 해코지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녀에 대해 반감을 가질 이유가 없다는 걸 이성으로 깨닫고 있었기에, 괴롭고 고통스러웠으나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진 설교는 마침을 내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날의 설교는 격정적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고 설교가 마쳐졌을 때에는 여느 때보다 큰 박수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리고 그제서야 나를 바라보던 그 여자는 잡고 있던 니콜의 손아귀에서 자신의 손을 슬그머니 빼서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럼 기도 합시다. 영원하신 성부시여, 우리는 티 없으면서도 슬픔에 잠기신 마리아의 성심을 통하여 성령 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 그리고 영혼과 신성을, 모든 시간에 제헌되는 미사와 하나되어 당신께 봉헌하나이다…”
설교하는 내내 그녀의 냉담한 반응에 나 자신이 스스로 고통을 받아왔으나 마지막 그녀의 행동에 변화를 보고 난 후에는 내 마음에도 어느 정도 안정이 찾아왔다. 그리고 기도문을 외우는 틈틈이 신도들이 진심된 마음으로 기도하는 사이에서 세속에 찌든 옷차림의 그녀 역시 두 손을 모으고 두 눈을 감고 기도 하는 모습을 발견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기도를 마쳤다.
“아멘.”
그러자 마지막의 아멘의 목소리는 성당 안에 듣기 좋게 울려 퍼졌다.
이로서 확신할 수 있었다. 주님이 내게 주신 능력, 불의 혀, 혹은 사도의 화신이라는 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나 자신이 교만해지지만 않는다면, 신도들이 붙여 놓은 별명을 믿어도 괜찮을 것같았다. 결코 우리가 주님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주님이 나를 선택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주님의 뜻을 그들에게 전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나를 당황시킨 그 여자도 결국 내가 넘어야 할 하나의 시련이었고, 오늘 그 시련을 무사히 넘긴 듯 하였다.
하지만 오늘의 미사를 마치며 모두를 돌려보낼 때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마이어 부부가 일어나 본당을 나갈 때 그 여자는 니콜을 부축하여 일어섰고, 그 세 명은 마치 한 가족처럼 다정해 보였다. 하지만 문제는 그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세속적인 옷이 나를 다시금 시험하고 있었다.
그 여자가 아무리 내게 시련을 준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주님이 만든 피조물이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나를 시험하기 위해 내려 온 듯 그녀의 악마성은 마치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아름다움과 같았다. 마치 에스더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녀는 아름답고 깊은 눈동자에 얼굴을 묻고 싶은 가슴… 그리고 차마 쳐다보기조차도 아찔한 늘씬한 다리를 가지고 있었다. 속옷이 보일 듯 아슬아슬한 짧은 치마에 나의 정신은 아득해졌고 미사를 보고 나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괴로워하며 연단에서 내려와야 했다.
“주님… 어찌 저를 시험하시는 겁니까?”
그녀가 내게 아무런 짓을 하지 않은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시험을 받고 있었다. 이미 이 세상에서 죽었어야 했을 내가 그 여자에게 정욕을 느끼고 만 것이었다. 미사가 끝나고 나면 이런 저런 사람들과 대화를 나눠야 했지만 그 날은 누가 볼새라 도망치듯 내 방으로 돌아왔다.
정말로 나의 수행이 부족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 여자에게 욕정하여 발기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떠 올리고 말았다. 그토록 아름답고 건강한 젊은 여인의 알몸을 떠 올리고 그 것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찌하여 절 시험에 들게 하시는 것입니까?”
방안에 모셔 놓은 작은 예수님께 다시금 물어보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주님의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성경의 어느 구절에서도 꼴린 자지를 가라앉혔다는 구절이 없었다. 괴로웠다. 믿음이 점점 흔들려간다.
4: 길고 긴 침묵의 밤
신도들이 돌아간 후,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욕정이었다. 그 것을 떨쳐내기 위해 성경의 내용을 열심히 되뇌었다. 욕정과 욕망이 사람을 어떻게 타락시키는가? 살로메의 아름다움은 세례자 요한의 목을 떨어뜨렸다. 욕정에 찌들어 살던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은 불의 심판을 받고 말았다. 욕정에 빠진 자들은 자신의 욕망에 따라 움직이기에 하나로 합치지 못하고 분열되기 마련이다. 욕정에 빠지는 것은 주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나 그러한 것이다.
주님은 나를 시험하시고자 그녀를 내려 보낸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내가 가장 두려워할만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며, 주님의 작품이기에, 주님이 보낸 마귀였기에 너무나도 매력적이고 달콤한 모습으로 보였던 것이다. 주님은 내가 외로움에 사무쳐 약해져 가고 있다는 걸 알고 계셨기에 바로 그 부분을 찔러 나를 시험하시려는 것이었다.
“제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복잡한 머리를 계속 가지고 다닐 자신이 없어서 방안의 십자가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기를 마친 후에는 다시 본당으로 나왔다. 지난 주에 칠해 놓은 왁스칠도 사람들이 다녀가며 빛이 많이 죽었고, 매달린 주님은 왜인지 나를 슬프게 바라보는 듯 했다. 나의 흔들림을 목격하시고 그러시는가 싶어 다시 무릎 꿇고 싶었으나 그리하면 할수록 약해지는 것만 같아 몸을 바쁘게 움직이기로 했다.
조만간의 부활절 성찬을 대비하여 축성할 포도주를 고르고 성체로 쓸 밀병을 주문하는 문서를 작성하였다. 조금 머리 아픈 일은 우리 교회의 신도가 점점 늘어나고 있어 얼마나 주문을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남으면 그나마 상황이 낫지만 모자라거나 하면 망신스러울 것 같았다. 아직 도심의 교회처럼 수 백명의 신도들이 모여 오지는 않으니 200 개 정도면 될까 싶었으나 그 중에서 과연 축성된 성체를 받아들일 신도는 몇이나 될까 생각하면 새로 온 사람들이 그 성찬 의식에 참여할지도 고려해야했다.
“주님의 뜻대로 되실 것이다.”
그 말을 되뇌이는 순간 316이라는 숫자가 멋대로 떠올랐다. 우리 교구의 사람보다 훨씬 많은 숫자였으나 그 숫자를 적어 올렸다. 모자랄리는 없고 남으면 잘 보관했다가 다음에 사용하면 된다는 심산이었다. 얼추 두 번 사용할 정도의 양이었고, 요즘은 옛날과는 달리 보존이 용이하여 오랫동안 보관해도 상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렇게 문서를 작성하여 큰 봉투에 넣어서 근처 수도원의 주소를 적어 넣었다. 이제 우체부가 오기를 기다리면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가만히 앉아있는 동안 내 머릿속을 헤 뒤집어 놓는 것이 있었고, 그 것이 무엇인지는 따로 언급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입으로 말하는 것은 물론 상상하는 것조차 불경스러운 모습을 고개를 흔들어 떨쳐내고 서류 봉투를 잘 챙겨다가 교회 밖에 세워둔 자전거를 타고 나갔다.
한적한 시골길을 바람 맞으며 자전거를 타는 기분은 아주 상쾌했다. 좌우로 넓게 펼쳐져 있는 들판에 파릇파릇한 보리 줄기가 올라와 있는데 조금만 더 기다리면 저 것들이 이삭이 열리고 그 때 즈음이 되면 바람이 불 때마다 푸른 물결, 더 익어가면 황금물결을 이룰 것이다. 예전에는 보리로 빵을 만드는 게 보통이었지만 요즘에는 죄다 공장에서 사들여서 맥주 만드는데 사용한다고 하니 세상이 얼마나 사치스러워졌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도 보리농사를 지어도 헛고생이 아니게 된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그런 파릇 파릇한 파릇비 사이를 지나며 도심 쪽을 향해 자전거를 몰았다. 원체 깡 시골이었기에 근방 3 킬로미터 이내에는 민가 한 두 채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고, 은행일이나 생필품을 구하려면 마을 어귀의 시내로 나와야 했다. 우리는 시내라고 부르지만 도시인들은 변두리라고 부르는 곳이었고, 도심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놓여져 있는 자그마한 유흥가이기도 했다.
시내에는 옷가게나 술집, 은행권, 생필품점등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이 모여있었고, 우리 교구 사람들이 현대문명을 누리기 위해서는 이곳을 들러야만 했다. 물론 각 가정마다 전기가 안 들어오고 전화가 안 된다는 건 아니다. 그런 집은 우리 교구 내에 오직 한 집 뿐이었다. 그 것도 전기세, 전화세 안내다가 끊어진 것이었다.
우체국도 이곳에 있었는데 번쩍번쩍한 술집도 위치해있던터라 되도록 낮시간에 오려고 노력하는 곳이었다. 우체국에 들어가자 수단을 입은 내 모습이 많이 낯설었는지 한순간 시선이 내게 모이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최대한 온화한 표정으로 그 시선들을 무시하고 들어가 우편물 담당 앞으로 가서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우편물을 담당하는 사람의 이름은 음… 리자 하트만… 이라고 이름표가 올려져 있었다. 그녀에게 봉투를 내밀자 그녀는 내게 아는 척을 하였다.
“아 신부님이시군요. 마야 수도원으로 보내시는 건가요?”
“네, 부탁합니다.”
그녀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컴퓨터의 타자를 쳐내려가며 주소를 써 넣었고 인쇄되어 나오는 스티커를 서류 봉투에 붙인 후 뒤에 있는 우편물 보관함에 올려놓았다. 평소에는 마구 뒤로 던져 놓는 듯 우편물이 엉망이었으나 신부가 보는 앞에서 수도원으로 보내는 우편물을 함부로 다룰 수 없었는지 직접 일어나서 우편물 보관함의 맨 위에 정성스레 올려놓는 배려심이 고마웠다.
아아 하지만 그러한 배려심에서 나는 또 한번 욕정하고 말았다. 아니 정확히는 욕정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나 자신을 시험하고 말았다. 그녀의 뒷모습을 계속해서 쳐다보았는데 그 것은 그녀에게 축복을 내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리자 하트만, 그녀는 까만 뿔테 안경을 쓰고 짙은 흑발이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비록 피로에 찌들어 있더라도 내게 말을 할 때 미소를 지어 보였으며, 마치 오늘 내게 시련을 준 그 여자와 같이 풍만하고 아름다운 가슴이 눈에 띄는 여성이었다. 우체국 직원들이 입은 제복은 묘하게 성적 매력을 드러내어 가슴은 강조되고 허리는 잘록하게 들어가는 작은 조끼를 겉에 입었고 단추 또한 타이트하게 매어서 블라우스에서부터 시작되는 몸의 라인이 허리 엉덩이를 타고 내려와 무릎 아래로 살짝 드러난 다리 라인까지 이어졌다.
세상이 어떻게 미쳐 가는지 옷을 입고 있어도 여성의 몸매를 그대로 볼 수 있고, 그 것은 마치 알몸을 상상하기 너무나도 쉬운 모습 이었다.
그렇다. 나는 저지르고 말았다. 또 한번의 불경한 상상을! 하지만 결론을 이야기 한다면 나는 욕정하지 않았다. 나를 위해 일하는 그녀의 그러한 모습을 보고도 나는 정욕을 불태우지 않았다. 단지 ‘그녀가 아름다운 신의 피조물이구나’하고 느낄 뿐이었다. 친절하고 아름답고 건강하였다. 이 사회의 바람직한 구성원이며 사람들을 악에 물들게 하지 않을 무해한 사람이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욕정으로 불타는 음란한 시선이 아니라 주님의 따뜻한 세상을 다시 한번 발견하는 아름다운 시선이었다. 그녀의 모습은 사탄과 마귀가 아니라 지금까지 자전거를 타고 오면서 본 보리밭의 풍경과 다르지 않았다.
“우편 요금 계산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수도원 측에서 계산할 것입니다.”
“네. 여기 영수증 나왔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네, 감사합니다.”
속마음으로는 그녀에게 기도를 한소절 하고 있었으나 겉으로 보여주지 않기 위해 그저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로 이야기를 끝냈다. 그녀는 충분히 아름다웠으나 오늘 본 그 여자가 그러했던 것처럼 나를 욕정에 불태우지 않았다. 지금 나는 성직자로서의 위기를 맞이할만큼 미숙한 상태가 아닌 것이다. 나는 정상이다. 마귀가 내 마음 속에 들어온 것이 아니다. 단지 그 여자가, 마이어 씨 댁의 새로 온 양녀가 내게 위협이 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내게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는데 도대체 무엇이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인가? 그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피가 거꾸로 솟는 것같았다. 가슴이 답답해지고 머릿속에 음란한 생각이 떠오른다. 물러갈지어다 물러갈지어다.
답답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없애기 위해 자전거를 몰고 시내를 벗어나기로 했다. 그 때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 잠시 멈춰 있었을 때, 횡단보도 너머로 한 무리의 여성들이 보였다. 그 여성들은 젊고 아름다웠으나 헤프고 욕망에 사로잡혀 사는 듯 했다. 나도 세속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녀들은 근처 술집 종업원들이었고, 그녀들의 옷차림은 노출이 심하였다. 아직 추운 이 계절에도 훤히 다리를 내어놓고 있었으며 상의는 짧아서 배를 드러내었다. 가슴은 깊게 파여 있어 조금 움직일 때마다 출렁이는 모습이 보일 듯 하였다.
마침내 파란불이 되어 그녀들은 내게로, 나는 그녀들에게로 다가가게 되었을 때 나는 그녀들에게 시선을 주지 않도록 노력하였고, 그녀들은 내 옆을 지나갈 때 재잘거리던 입술을 닫고 조용히 지나갔다. 아무리 욕망에 휘둘리는 여성이라 하더라도 성직자의 곁을 지날 때는 엄숙해지는구나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녀들이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너 왜 갑자기 조용해졌어?”
“야, 너도 말 안하고 있었잖아.”
“야야, 우리가 무슨 신부님 지나간다고 체면치레 하고 그러는 거냐?”
“근데 말이야. 저 신부님 정말 귀엽지 않냐?”
“응, 정말 신부인 게 아깝다. 옷 벗겨 놓으면 근육질일 것같아.”
세상에나 지금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게다가 내가 그리 생각했다가 이렇게나 괴로워하고 있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있었다. 그녀들이 무섭고 두려운 마귀들 같았다. 만약 이 도시가 불바다가 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저 여자들 혹은 저 여자들과 같은 사람들 때문일 것이다.
한참을 자전거를 타고 시골길을 달려오면서 나의 분노를 잠재우는데 시간을 소비하였다. 어떻게 나의 알몸을 상상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의 머릿속에는 나의 가장 불경한 모습들을 떠 올리고 있을 것이었다. 내가 절대로 되고 싶지 않은 모습들을 떠 올리며 그 안에 나를 놓고 있을 것이다. 화가 나는 것 이전에 두렵기도 하였고 부끄럽기까지 하였다. 누구보다 성직에 진지하게 임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욕망에 찬 더러운 자들에게는 한낱 창부의 모습에 지나지 않았다.
도대체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단 말인가? 무엇이 나를 이토록 힘들게 한단 말인가? 오늘 아침의 그 여인과, 우체국의 리자, 그리고 술집 여자들… 그들의 차이점과 공통점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셋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내는 동안 내가 원하는 해답이 나온 것 같았다. 아침의 여인과 술집의 여자들의 공통점이 그려지며 우체국의 리자와의 차이점이 떠올랐다. 그 것은 그녀들의 옷가짐이었다.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은 매우 우스운 일이었지만 그런 옷가짐을 고르는 것은 다름 아닌 그 사람의 인품이기 마련이었다. 자신을 싸구려처럼 드러내려는 마음가짐이 없다면 그러한 옷을 입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바른 옷가짐에 대해 생각을 해봄직 하였다. 디모데 전서(2:9)에 의하면 여성은 옷가짐을 바르게 하고 머리를 땋거나 사치스런 치장을 금하였다. 이것을 현대인에게 어떻게 적용시켜야 할 것인가? 그 내용으로 설교를 할 자신이 없었다.
내가 자신있을 필요는 없었다. 모든 것은 주님의 뜻이므로 주님이 내게 해답을 일러주실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나의 고민들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린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자전거를 몰아 트라움 성당에 도착했을 때 나는 내 나름 해답을 찾기 위해 계속하여 고민하고 있었다. 나의 질문에 성경은 꾸준히 답을 내려주었고, 그 것을 내가 어떻게 사람들에게 일러줘야하는지 고민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런 나의 복잡한 심경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내게 일침을 가하셨다.
“이제 오세요?”
교회 입구에 자전거를 세워놓고 들어가려는 길목에 낯선 여자가 서 있었던 것이다. 수수한 옷차림에 몸매가 드러나지 않으며 경건한 가톨릭 신도일 뿐만 아니라 시골의 순진한 처녀와 같은 모습의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녀의 그 깊고 아름다운 눈동자를 가릴 수는 없었다. 아아~ 내가 생각한 경건한 옷가짐을 한 여인의 모습이 이토록 완벽하게 서 있는데도 나는 그녀가 누군지 대번에 알아보고 말았다.
“마이어 씨 댁에 새로 오신 분이군요.”
“네, 다나라고 해요.”
그녀는 아름다운 청옥과 같은 푸른 눈을 하고 있었고 말을 할 때마다 눈빛은 빛나는 듯 하였다. 약간 열 오른 듯 보이는 붉은 얼굴 은 나로 하여금 가슴을 답답하게 하였다. 아 어찌 이렇게 되는 것인가? 그녀의 아름다움은 처음부터 부정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것이 나를 더럽히기 위해 만들어진 아름다움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를 더럽히려는 수단으로 그녀는 음란한 옷을 입고 다가왔다. 하지만 그 것에 대한 답안을 내려놓았는데 그에 맞춘 듯 완벽한 모습으로 다가온 그녀의 모습을 본 나는 크게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변했는데도 내 눈에 보이는 그녀의 모습이 무척이나 위험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아 그렇습니까. 그런데 아침과 옷차림이….”
“아, 여기 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요. 미사를 보고 돌아간 다음에 마이어 아저씨께서 새 옷을 구해주셨어요. 당황하셨죠?”
“아… 네 조금.”
“죄송해요. 다음부터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저는 철없는 철부지가 아니니까요. 그리고 이 옷도 마음에 들어요.”
그러면서 그녀는 몸을 한바퀴 휘돌리는데 그 움직임에 맞춰 펄럭이는 긴 치마는 아름다운 아치를 그리는 듯하였다. 아무리 심하게 봐 줘도 욕정을 일으킬만한 움직임이 아니었는데도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녀를 움켜쥐고 싶을 정도였다. 아아…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잘못된 것인가? 그녀는 그저 아름다울 뿐이다. 음란하지도 않다. 그렇다면 내가 어디가 잘못된 것인가?
그녀는 순진한 얼굴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계속 늘어놓았으나 나는 머릿속으로 계속해서 주님을 찾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까지 이곳에 서 계실 건가요? 저도 용건이 있어서 왔는데.”
그녀는 내게 안으로 들어가자는 듯 말하였으나 그럴 순 없었다. 지금의 내가 잘못된 이유는 어디까지나 이 여자 때문이었다. 이 여자는 부정한 자다. 주님의 집에 들여 놓을 순 없다.
“아… 아니요. 안은 지저분해서요.”
그녀가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그녀를 불편해하는 것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내게 더 이상 재촉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가 들고 온 바구니를 내게 건네주었다.
“마이어 씨가 이 걸 가져다 드리라고 했어요. 그리고 인사드리라고도 했고요.”
그녀가 가져온 바구니에는 포도주 한 병과 마이어 씨가 직접 만든 소시지가 들어있었다. 지난번에 대접받다만 음식과도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손에서 내 손으로 바구니가 옮겨지는 동안 그녀의 부드러운 손이 느껴졌다. 그 느낌은 마치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쾌감과 같아서 두렵기 그지없었다. 그녀에게 보여주어서는 안 될 당황함이 내 얼굴 위로 올라오는 걸 막을 수 없었다. 그러자 그녀 역시 말을 잃고 나를 바라보았다.
아아, 이 여자는 비록 내게 시험을 주기 위해 선택되었으나 이 여자 자체로는 아직 어떠한 죄악을 짓지도 않았거늘 그녀에게 조금은 미안한 감정이 들어 입술을 열어 말을 하려하였으나 그녀는 고개를 획 돌려버리고 말았다.
“아, 전 돌아갈게요.”
그녀는 어색하게 몸을 돌려서 타고 온 자전거를 찾아서 돌아가기 시작했다. 잠시간의 침묵을 지키며 서로를 바라보았던 시간에 우리 둘은 무언가 짧은 시간동안 큰 교감을 나눈 듯 했다. 하지만 그 것이 어떤 종류의 교감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잠시 동안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두려워 해야했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나를 불안하게 하였다. 어쩌면 내가 타락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의 믿음이 점점 흔들려가는 것이 아닐까?
그녀가 건네준 포도주와 소시지를 저녁 삼아 먹고 나면 길고 긴 침묵의 시간이 올 것이다. 그리고 날이 샐 때까지 나 홀로 있는 동안 도대체 얼마나 괴로워질지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몸이 바쁘면 머리가 쉴 수 있었지만 그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찬 저녁 시간은 마치 마귀와 싸우는 것과 같을 것이며 해가 뜨기 전까지는 끝나지 않는 밤의 저주인 것이다.
그녀가 어떠한 모습을 하더라도, 나는 그녀가 두렵다.
5: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제 정신이 아니었다 밤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 여인, 이름이 다나라고 했지. 그 다나라는 이름을 몇 번이나 되뇌었는지 모르겠다. 이름조차 외우기 쉬워서 떨쳐버릴래야 떨쳐버릴 수 없었으며, 그 이름이 떠오를 때면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고, 그녀의 얼굴이 떠 오른 다음에는 그녀의 전신이 떠올랐다. 그리고 전신을 떠 올리게 되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음란하기 그지없는 복장이 떠올랐고, 그 다음에는 그 골곡진 몸매를 떠 올리게 되고 기어코 그녀의 알몸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 때마다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서라도 계속하여 기도문을 외워내려가야 했다.
“예수님께서 사형 선고를 받으심에 묵상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에 묵상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력이 떨어져 넘어지심에 묵상합니다.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만나심에 묵상함니다…”
십자가의 길을 몇 번이나 외며 주님의 고행을 떠 올리자 지금 나의 고민들이 얼마나 초라해지는지 알 수 있었다. 주님은 목숨을 잃으시는 고통을 받으셨는데, 나는 한낱 여자를 떠 올리느라 고통받고 있었다. 이 것은 고통이 아니다. 내가 너무나도 안일하여 아무 것도 아닌 일을 마치 커다란 시험에 든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아멘.”
작은 깨달음을 얻은 후에야 겨우 안정을 되찾고 십자가의 길을 마감하였다. 홀로 방안에 틀어박혀 내일의 해가 뜰 때까지 침묵을 할 차례였다. 하지만 내가 외롭다고 생각한 것은 어디까지나 나 자신이 무지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주님이 항상 내 곁에 있었다. 지금 책상 위에서 무심한 듯한 표정의 주님의 모습이 나를 바라보는 듯 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주님 오늘 생각과 행동으로 지은 죄와 의무를 소홀히 한 죄를 살피시고 그 죄를 깨닫게 하시옵소서…”
지금까지 지내온 나의 죄악에 대해 기도하며 반성하였다. 나 자신의 교만함으로 인하여 여자들을 불경하게 보았으며, 주님이 나를 시험 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모든 것은 나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며 모든 허물은 나의 것이다. 다나, 나를 힘들게 한 그 이름도, 그녀에게 어떠한 죄가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근래 믿음이 흔들리고 증오심을 품었으며 온갖 음란한 생각을 한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고, 그로 인해 더욱 큰 배움을 얻었으니 이제 다 해결된 것이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오늘도 날이 저물었나이다. 이제 저희도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 모든 사도와 성인과 함께 주님을 숭배하며 지금까지 베풀어주신 사랑에 감사드리나이다. 전능하신 하느님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저희를 지켜주시오소서 아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그렇게 시작된 밤의 침묵은 여느날보다 편안했다. 더 이상 다나라는 이름을 떠 올리더라도 음란한 모습이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 가시밭길을 헤매이며 어린양을 찾아다니시는 주님과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을 자처하시는 주님의 모습이 떠오를 뿐이었다. 그러한 숭고 한 모습 앞에서 어떠한 정욕도 이끌어 올라오지 않았다.
하지만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죄가 사라지진 않는다. 내일은 날이 밝는대로 도시로 나가서 고해성사를 할 생각이었다.
오랜만에 고민없이 자고 일어나서 기분이 좋았다. 성당 안쪽에 위치한 내 방까지 아침 햇살이 밀려 들어올 정도였다.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지 못했으니 늦잠을 잤고 그 것은 게으름으로 질책받을 만한 일이었으나 그렇게 기분 좋게 아침을 맞이한 일도 오랜만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이렇게 좋은 아침을 맞이하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렸으며 커튼을 활짝 열어 이 세상의 빛을 만끽하였다.
이런 즐거움이라면 세속의 것이라고 하더라도 조금 누려도 주님이 화내시지 않겠지 하고 생각하였으나 너무 안일한 거 아닌가 싶어서 아침 준비를 부랴부랴 시작하였다. 그 때가 오전 7 시였다. 세면을 하면서 면도도 하였고, 엉클어진 머리 모양도 단정히 바로 잡은 후에야 수단을 입었다. 그리고 거울 너머로 비친 내 모습을 확인 한 후에야 겨우 안심이 되었다.
“나는 주님의 일을 행하는 사람이다.”
한치의 흐트러짐도 용납되지 않는다고 가슴 속으로 되뇌었다. 그리고 우유 한잔과 빵 한조각으로 끼니를 검소하게 채운 후 성경을 펼쳐 보며 그 동안 내가 놓친 중요한 교훈이 있는가 확인하였다. 그리고 9시가 넘으면 그제서야 자전거를 타고 시내로 나가서 다른 교회의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할 생각이었다. 무엇에 대해 고해성사를 하는가를 생각하는 순간 내 마음 속에 ‘다나’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그 다음에 다나의 얼굴이 떠 올라야했지만 그 대신 예수님의 고행을 떠올리며 음란한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막았다.
“아멘”
생각보다 효과가 좋아서 진작에 십자가의 길을 외웠다면 싶었다. 역시 주님은 문을 닫으실 때 항상 창문을 열어주시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그 다음 순간 떠오르는 문구는 ‘퇴로를 막고 집중포화’였다. 아아 2 차 대전 타이거 탱크가 T-34탱크들을 발견하고 그들을 몰살시키는 장면이 왜 떠올랐을까? 세상에는 우연이 없다.
“신부님 계십니까?”
아침 시간이 잘 흘러간다고 생각했을 때 나를 찾아온 방문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너무나도 익숙한 마이어 씨의 목소리였다. 그분의 방문은 그다지 특이할 것이 없었으나 최근의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이었다. 틀림없이 그분이 겪은 변화인 ‘다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러 오셨을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좇아 본당으로 나와 얼굴을 드러내자 역시나 마이어 씨가 모자를 벗어들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 옆에는 단정히 머리를 빗어 내린 아름다운 여인, ‘다나’가 가지런한 모습으로 앉아있었다. 아아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외우면 그녀의 깊고 아름다운 눈동자를 잊을 수 있을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막상 그녀의 눈길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걸 생각하면 수 십년간 외워왔던 십자가의 길의 첫 소절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조차도 기억나지 않았다. 세상에 나의 신앙 생활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그녀가 그 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신앙인이 아니게 되었다. 차라리 내가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신부님, 오늘 찾아온 이유는 다름이 아니오라. 흠흠, 일어나 보거라.”
마이어 씨가 바로 나의 퇴로를 막았고, 아아 다나, 그녀가 일어나는 순간 나는 마치 포격을 맞은 것 같았다.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내 목을 죄어오는 것만 같았다. 숨을 쉴 수 없었고, 몸에서는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녀는 본당 의자에서 일어나며 내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하였는데 그 때 잠시 그녀의 눈 대신 그녀의 머리 꼭대기가 보였고, 그 것은 그녀의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왔다.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그런 내게 현실감각을 되찾아 준 것은 마이어 씨의 목소리였다. 사실 그의 말은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졌으나 내가 정신을 잃은 짧은 시간 동안에 그녀로부터 많은 이미지를 느꼈기 때문에 그의 말이 끊어진 것처럼 느꼈다.
“이 아이를 전에 소개 시켜드린다는 게 그 때 어디 계신지 몰라서요. 전에 다나를 보냈을 때는 다나가 아무 말도 안 드렸다고 하더군요.”
“아? 무슨 말 말입니까?”
사실 마이어 씨의 이야기가 들렸던 건 아니었다. 그냥 그의 마지막 말만 간신히 따라잡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마이어 씨는 대화를 계속 이어나갔다.
“다나가 사실 아직 주님의 은혜를 입지 않았다고 합니다.”
“네?”
“영세를 받기 전이라는 겁니다.”
“아! 영세를 못 받았군요. 그러면 예비자 수행을 꾸준히 하시면 6 개월 정도면….”
하지만 내가 6 개월을 말하자 마이어 씨는 내 손을 꼭 잡으셨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씀하시기를
“조만간에 부활절 축일이 아닙니까? 그 때 모두들 성찬을 하고 있을 때 이 아이만 앉아있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신앙이란 게 우리끼리 정한다고 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다나 양의 의견도 존중을 해줘야 할 것 같습니다.”
아아 내 입을 통해서 처음으로 ‘다나’라는 목소리가 나오는 순간이었다. 그 목소리에 떨림이 조금 섞여있었고, 그 것을 알아차린 듯 다나는 나를 계속 쳐다보았다. 아 그녀의 그 시선이 나를 얼마나 괴롭게 하는지 그녀는 알고 있는 것일까? 만약 알고 있다면 그녀는 정말로 사악한 마귀일 것이다.
“저도 신자가 되고 싶습니다.”
아아, 그녀는 단호하게 그리 말하였고, 그 말에 가장 당황한 사람은 바로 나였다. 그녀가 주님의 길을 따라 걷는다면 그녀가 마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만약 그녀가 주님의 집을 어지럽히려 하는 거라면 어떻게 되는 걸까 하는 걱정도 뒤섞였다. 그런 걸 방지하기 위해서 예비자 수행 기간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마이어 씨는 예비자 수행 기간을 줄여달라고 부탁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떻습니까? 이 아이도 그리하고 싶다고 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희 부부도 가톨릭의 자녀를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아직은 건강하지만 치매끼가 있는 니콜이 조금이라도 더 기운이 있을 때 이 아이가 신자가 되는 걸 보여주고 싶습니다. 신부님!”
그는 내게 대답을 요구하듯 강하게 말했으나 나는 정말 어떻게 해야할지… 이 여자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나 자신이 어떻게 되어가는 것만 같은데… 아아 다나를 바라보자 그녀와 나는 눈이 마주쳤고, 눈을 피한 쪽은 그녀 쪽이 되었다. 하지만 이내 곧 그녀는 나를 다시금 올려다 보았다. 저 푸른 눈동자는 똑바로 쳐다보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 눈동자 속에 무엇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이 깊고 맑은 눈이었다.
“그래요. 다나, 그럼 한가지만 물어봅시다. 당신의 수호성인을 누구로 하시렵니까?”
“네 에스더입니다.”
에스더의 이름으로 영세를 받기 원하다니. 이유는 확연했다. 그녀가 나로부터 받은 첫 설교의 등장인물이었고 사실상 내가 그녀를 위해 선택한 이야기였다.
“왜 에스더를 선택하셨습니까?”
“전에 신부님의 설교 중에 들었습니다. 양녀로 들어와서 의붓아버지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고귀하신 분 아니었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녀로 인해서 득세한 유다의 사람들이 그 동안 자신들을 핍박한 자들을 살해하였고, 에스더는 그 것을 방조하였다. 주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한 살인이었으나 무차별한 학살이나 다름없었다. 에스더는 사랑받는 자이지 고귀한 자는 될 수 없었다. 그런 에스더를 선택한 것은 그녀가 고귀하지 않기 때문일까? 아닐 것이다. 내가 그녀에게 에스더의 고귀한 모습만 보여준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내가 한 말을 그대로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내게 귀를 기울였다. 그렇다면 이번에야 말로 그녀와 제대로 부딪혀 볼 차례였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부활절 축일 미사 때 이 아가씨에게 영세를 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대신 집에서 항상 아침 점심 저녁으로 기도하시고 미사 때마다 꼭 나오십시오. 그리고 부활절 전에 꼭 고해성사 하시고요.”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도 버거워하는 내가 이러한 선택을 내린 것은 다름 아닌 그녀를 성령으로 말미암아 정화시킬 수 있을까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나를 만나고 난 후 옷가짐이 변하였다. 그렇다면 성령을 접하게 된다면 그녀가 얼마나 큰 변화를 겪게 될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무엇이 되었든간에 우리 모두에게 좋은 일이 될 것이다. 주님은 우릴 버리시지 않으니까 아마도 이것을 하나의 계기로 삼아 우리를 평안케 하시려는 것이겠지.
“감사합니다. 너도 인사드려야지.”
마이어 씨와 다나는 내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였다. 그 순간 다나의 뒤통수가 보이는데 그 머리카락이 아래로 쏟아지며 새하얀 목덜미를 드러내었다. 그 순간 아찔한 기분이 들어서 현기증이 났다.
“아? 신부님 어디 편찮으십니까?”
마이어 씨는 비틀거리는 내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고 아아아… 다나… 다나 다나 다나 다나! 그녀는 내가 넘어질세라 내 한쪽 팔을 붙잡았다. 그녀의 행위에 비난을 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신체적 접촉이 내게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그녀는 모를 것이다. 게다가 그녀의 가슴이 내 팔에 닿는 바람에 생전 한번 느껴보지 못한 감촉이 내 머릿속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그냥 내버려두십시오. 요즘 잠이 부족한 것 뿐입니다.”
아아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요즘 잠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지만 어제 밤만큼은 달콤하게 잘 잤다. 하지만 그 것도 이젠 끝이다. 다나… 이 여인과 만나면 만날수록 나의 영혼이 점점 메말라가는 것이 느껴진다. 도대체 누구를 탓해야한단 말인가?
마이어 씨와 다나가 돌아간 후 나는 아무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재빨리 자전거를 몰고 시내를 거쳐 나가 도심의 가까운 성당을 찾아갔다. 수백 명 수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커다란 건물에 벽도 하얗고 아름다운 돌로 만들어진 고급스런 성당이었다. 그 안에 수단을 입은 사제가 들어서자 교회 일을 도와주시는 신자들이 내게 고개 숙여 인사하며 지나갔다. 아아 트라움은 나 혼자서 일하느라 벅차다고 생각했는데 이곳에는 서류 정리며 청소며 모두 담당자가 있는 듯 했다. 그럼 이 안에서 신부님은 도대체 무엇을 할까?
그 걸 알아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긴 의자 끝에 번호표가 있어서 그 걸 뽑고 기다려야했다. 그 앞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나보다 먼저 온 사람들이었고 그 사람들의 머리수는 내가 뽑은 번호표에 씌여져 있는 대기인 수와 같았다. 아아… 고해성사를 하기 위해 번호표를 뽑고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내 차례가 되어 고해성사실로 들어가서 지금 나의 고민들을 털어 놓았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굳게 믿으며 그 동안 지은 죄를 뉘우치고 사실대로 고백하십시오.”
“아멘, 마지막으로 고해를 한지 2 달이 되어갑니다. 제게 죄가 여럿 있습니다.”
“고백하십시오.”
“먼저 제 믿음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전에는 성경의 모든 내용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최근 가까운 사람이 돌아가셨을 때 저는 슬픔에 잠기어 성경의 뜻대로 행동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분이 새로운 영생의 길로 들어서리라는 것에 대한 의심은 전혀 없었는데 저는 슬픔에 잠기어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영생으로 들어서는 것은 기뻐할 일이나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은 슬픈 일입니다.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될 일입니다. 그 것으로 믿음을 져버리지 마십시오.”
“그리고 요즘 한 여성이 저를 시험에 들게 하고 있습니다.”
“항상 여자는 문제지요. 형제님 무엇이 문제입니까?”
“한 아름다운 여성이 있습니다. 그 여성을 볼 때마다 숨을 쉬지 못하고 심장이 멎는 것만 같습니다. 주님을 향한 마음속에 자꾸 음란한 모습만 떠오르고 심지어 오늘은 기도문조차 잊어버리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 여자가 내게 무언가를 갈구하듯 쳐다보기만 해도 저는 목이 죄어오는 것처럼 괴롭기 그지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여자가 사악하다는 건 아닙니다. 그 여자는 어떠한 잘못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여자가 깊고 맑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게 그녀의 잘못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 쯤 이야기가 진행되자 고해성사실의 건너편에서 한숨이 푸욱 쉬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는 큰소리로 꾸짖듯 말했다.
“이 멍청한 양반아! 그게 무엇인지 모르고 여기 왔단 말인가?”
“그럼 신부님은 이것이 무엇인지 아신단 말입니까?”
아아 나만 이렇게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었단 말이었나? 그가 이것이 무엇인지 안다면 해결책도 가지고 있을 것이었다. 그가 나를 질책하고 있긴 하지만 그로 인해서 나의 고민이 날아가 버린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수치스럽고 절망스러웠다.
“자네는 그 여인을 사랑하고 있는 게 아닌가?”
내가 그 여자를 사랑한다고? 그렇게 아름다운 여인을 본 것은 처음이긴 했다. 하지만 그녀로 하여금 나의 성직 생활이 이토록 위험해졌는데 내가 그녀를 사랑한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녀로 하여금 저는 이렇게 고통받고 있습니다.”
“남녀간의 사랑이 달콤하다는 건 거짓말일세. 둘이 하나가 되었을 때야 비로소 달콤해지지만 서로의 마음을 모르고 있는 동안에는 그렇게 고통스럽기 그지없지.”
“그 여자는 나로 하여금 음란한 생각을 품게 합니다.”
“그럼 남녀간의 사랑이 모여라 꽃동산에서 룰루랄라하는 거라고 생각했나? 남자랑 여자가 홀딱벗고 얼레리꼴레리하는 거란 말일세!”
“신부님… 신부님이 그렇게 말씀하셔도 되는 겁니까?”
“원래는 안되지만 자네처럼 정신 못차리고 있는 사람에게는 충분히 해줄 수 있네. 내 듣고자 하니 그 여자가 자네를 빤히 쳐다보았다고?”
“네… 그 시선이 저를 당혹케합니다.”
“그 여자도 자네한테 푹 빠진 거야! 괴로워 죽겠다고? 그 여자한테 고백하게나. 그러면 시원하게 끝나든지 아름답게 맺어지든지 할 테니까 그 다음 수순은 자네가 알아서 할 일이야.”
뭔가 명쾌하면서도 확신에 차있는 목소리에 그의 말이 믿음직했다. 하지만 그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모르고 있었다.
“신부님….”
“왜 그러는가 형제여?”
“저도 그리할 수 있으면 좋을 것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 할 수 없나?”
“네, 저도 한 교구를 이끌어 나가는 사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건너편에서 ‘세상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서야 그는 내가 어떠한 상황에 처했는지 깨닫고 말을 아끼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럴 수가 어쩌면 이럴 수가. 평신도라면 서로간의 사랑이 아무런 해가 되지 않겠으나 자네는 그럴 수가 없었던 거군. 얼마나 괴로울까나. 그래. 십자가의 길은 외워보았나?”
“오늘 아침까진 효과가 있었습니다.”
“오늘 아침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 여인을 다시금 만났고, 그 여인에게 영세를 주기로 정했습니다.”
“그나마 가톨릭의 여인이라니 다행이군.”
“그 과정에서 제 자의가 아니었으나 그녀의 가슴을 느꼈습니다.”
“만졌나?”
“아니요. 스쳤습니다. 그게 중요한 가요?”
“자네가 직접 만졌다면 그건 자네 의지로 주님을 져버린게 되잖은가?”
“그렇진 않습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그저… 그 여인으로 인해서 점점 주님과 멀어지는 기분입니다.”
그즈음에서 내 말이 멈추자 건너편에서는 한숨소리가 또 한번 들려왔다. 명쾌한 해답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것이 내게 적용되지 않는 걸 생각하고 다시금 고민하는 듯 싶었다. 하지만 그는 현명한 사람이었고 내 마음을 안정시켜주었다.
“여자라고 하더라도 주님이 만드신 피조물일세. 주님은 우리가 이겨내지 못할 시련을 주지 않으셔. 자네 요즘 외롭고, 권태롭지 않은가?”
“그렇다고 느낀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자네에게 활력을 주려고 자극을 주시는 걸세. 너무 피하려하지 말고, 그냥 즐기게나.”
“저더러 음란한 상상을 즐기란 말입니까?”
“그런 게 아니라. 그 것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말일세. 꽃을 보고 그 걸로 잼을 만들어서 먹을 것까진 없네. 그저 그 향기만 맡아도 좋고, 그저 바라만 봐도 좋지. 굳이 꽃을 꺾지 않고서도 꽃을 즐길 수 있는 걸세. 주님이 허락하는 한도 안에서 자네도 그 아름다움을 누리게나.”
“그래도 주체할 수 없으면 어찌합니까?”
“생각을 하게나. 내가 주님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항상 바른 길로 인도하실 걸세.”
아아, 그 것은 확실히 도움이 되었다. 주님이 내게 나쁜 길을 가르쳐주시진 않을테니까. 하지만 오늘의 고해성사는 왜인지 신도와 신부의 죄사함이 아니라 선배와 후배의 토론과 같은 느낌이라 죄사함을 받은 것같은 기분이 아니었다.
“그럼 죄사함을 받으려면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마음이 편치 않다면 통회기도를 읊어보게나.”
“제가 죄를 지어 참으로 사랑받으셔야 할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사오니 악을 저지르고 선을 소홀히 한 모든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나이다…”
통회기도를 마무리한 후 건너편의 신부님은 그대의 죄는 용서받았습니다. 하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우리 둘은 동시에 아멘을 소리내었고 나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고해성사실에서 나갈 수 있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토록 고마운 말을 해준 그의 이름과 얼굴을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묘하게, 힘있는 시절의 요한 신부님이 그와 같았을 것만 같았다.
6: 고행의 길
“그리스도께서 못 박혀 돌아가신 후 주님의 무덤을 찾아 갔던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을 막아두었던 바위가 치워져 있음을 알게 되고 베드로에게 이를 전하러 갑니다. 그리고 그녀는 말합니다. ‘누군가가 주님의 시신을 훔쳐갔습니다! 주님이 어디 계신지 알 수 없습니다’ 그 말을 들은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서둘러 무덤을 향해 달려갑니다. 베드로가 도착하였을 때 안에 주님의 시신은 있지 않고 다만 주님을 감싸던 수의와 수건이 잘 개어져 있을 뿐이었습니다. 주님은 어디 계셨습니까? 어디에 계신다고 하셨습니까? 죽은 뒤 새로운 생명을 얻어 영원히 사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때까지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있다가 그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주님이 다시 부활하신 것입니다!”
부활절 축일을 앞둔 미사의 주제는 역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것이었다. 설교는 점점 무르익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내용으로 넘어갔고 모두가 예수님의 고통과 핍박 그리고 죽음을 들으며 슬픔에 잠겨 눈물을 흘리다가 이제는 영광스럽게 부활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 기쁨에 넘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여기 저기에서 ‘아멘’의 목소리가 들려오며 그들의 경외심이 느껴졌다. 그리고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의 설교에 감동받았는지 두 눈을 빛내며 두 손을 꼭 맞잡고 아멘을 외치는 그녀의 모습도 보였다.
그랬다. 더 이상 다나는 내게 괴로운 존재가 아니게 되었고, 그녀는 훌륭한 가톨릭 신자로서의 길을 걷고 있었다.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였을까? 주님이라면 여자 때문에 괴로워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개인적인 마음으로는 그녀가 에스더의 이름이 아니라 마리아의 이름을 받았으면 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가 떠나간 후에도 마리아는 그 자리에 남아서 홀로 울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무덤 안에서 하얀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나와서 마리아에게 묻습니다. ‘마리아야. 왜 울고 있느냐?’ 그러자 마리아는 대답합니다. ‘누군가가 저의 주님을 데려갔습니다. 어디에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며 마리아는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 곳에 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마리아에게 물었습니다. ‘어찌 그리 슬피 우는가? 누구를 찾고 있는가?’ 그러자 마리아는 그가 무덤지기인줄 알고 물었습니다. ‘주님을 옮기신 게 당신이라면 주님이 계신 곳을 가르쳐주세요. 제가 주님을 모셔가겠나이다.’ 그러자 그 사람은 ‘마리아야’하고 외쳤습니다. 그제서야 마리아는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아보았습니다. ‘선생님!’ 지금까지 마리아와 함께 있었던 사람들은 바로 예수님과 천사들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실체를 본 마리아는 기뻐하였습니다. 주님은 돌아가시지 않고 우리 곁에 계속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알렐루야!”
그에 맞춰 아멘의 목소리가 듣기 좋게 울려 퍼졌다. 경건히 외치는 사람들도 있었고 눈물을 머금으며 통곡하듯 외치는 사람도 있었다. 이것이 모두 주님의 은총이었다. 부활절 축일 전의 성당은 미어터지듯 사람이 많았고, 처음 생각했던 200 명도 훨씬 훌쩍 뛰어넘어 앉을 자리는 고사하고 교회 안에 들어오기 조차도 힘들어 보였다. 의자는 이미 꽉꽉 들어찼고 여의치 않은 사람들은 뒤에 서서 미사를 보거나 그 것도 모자라서 좌우, 중앙 통로까지도 사람들이 들어앉아 있었다. 바닥에 앉는 일은 보기에 좋지 않아 모두들 무릎을 꿇고 미사에 참여하였으나 모두들 그러한 불편을 감수해주고 있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성령 충만한 상태로 돌아가게 되었고, 삶의 안정을 되찾은 나는 평소와 같은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더 이상 밤이 두렵지 않았다. 다나에게 영세를 주는 것도, 그녀가 매번 찾아오는 것도 그저 일상으로 누릴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고해성사로 죄를 씻은 이후에는 거짓말처럼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역시 나 자신이 죄악에 물들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오늘 미사가 끝난 후에 정리할 일은 조만간의 부활절 축일 성찬에 참가할 신도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포도주는 전에 마이어 씨가 건네 준 것으로 하면 될 것 같았고, 밀병은 316 개를 주문해 놓았던 터였다. 그리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부활절을 맞이하여 첫 영성체를 가지기도 하였다.
신도들이 모두 돌아간 후에 홀로 남은 성당을 둘러보니 바닥이 많이 지저분해져 있었다. 최근에 비가 온 탓에 땅이 질어서 진흙이 묻어왔기 때문이었다. 주님의 집을 더럽게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 대걸레를 가지러 가는 길에 내일 새로운 신자들을 위한 서류 정리를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둘 다 중요한 일이었지만 서류 작업은 서두르지 않으면 나 뿐만 아니라 다른 교회에서도 혼잡을 빚을 것이었고, 주님의 집을 더럽게 내버려두면 그 것은 또한 죄를 짓는 일이었다.
혼자서 교회를 꾸려나가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농사일에 바쁜 사람들에게 교리에 맞게 고해성사와 성찬 의식을 강요했던 나였기에 차마 그들에게 짐을 지워주고 싶지 않았다.
“아, 여기서 뭐하시는 겁니까?”
하지만 정작 대걸레를 가지러 들어갔을 때, 어째서인지 요염한 엉덩이가 눈에 들어왔다. 본당에서 떨어진 청소도구 보관함을 뒤지고 있던 다나의 모습이었다. 모두가 돌아가고 없는 교회 안에 다나가 홀로 남아서 이곳을 뒤지고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신부님… 그게 그러니까… 아 저 알고 있어요.”
“무엇을 말입니까?”
그녀가 갑자기 추상적으로 알고 있다는 말을 했을 때 그녀의 얼굴에서 열기를 느꼈다. 그녀는 혹시 내가 그녀를 부정하게 생각했다는 걸 알고 있다는 것일까? 제발 말을 할 때에는 꼭 집어서 해줬으면 좋겠다. 이렇게 툭하고 튀어나오면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안 좋은 것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러니까… 신부님 혼자서 교회에 계시잖아요.”
“네… 그렇습니다만….”
언제까지 내 빼야할까? 그녀가 혹시 나를 향한 공격을 시작하려는 것인가? 내가 그녀를 더 이상 위협으로 생각하지 않게 된 걸 깨닫고 나를 타락시키기 위한 행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려는 건가? 그렇다면 나는 어디로 도망쳐야할까? 아니면 어떻게 맞서야할까?
“신부님 바쁘신 거 알고 있어요. 그래서 청소라도 도와드릴까 하고….”
그녀가 뒤지던 곳은 다름 아닌 청소도구 보관함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뒤늦게 꺼내든 물건은 내가 찾으려던 대걸레였다. 그녀는 청소를 도와주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되도록 내 눈에 띄고 싶지 않았던 듯 그녀는 나와 마주쳤을 때 살짝 놀란 눈치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린 서로 함께 놀랐다. 차이라고는 그녀는 놀란 후에 미소를 지었고 나는 놀란 후에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 부탁합니다.”
그녀에게서 대걸레를 빼앗을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그녀를 쫓아낼 자신도 없었다. 지금 내가 가장 하고 싶은 것은 그녀로부터 도망치는 것이었고, 결국 그 방법은 그녀를 본당으로 보낸 후 나는 응접실로 도망쳐 서류 작업을 하는 것이었다.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냥 그녀에게 ‘부탁합니다’라고 말을 한마디 내어 놓고 무시하고 들어가면 되는 일이었다. 그녀는 내게 더 이상 방해가 되지 않았고 묵묵히 본당의 바닥에 걸레질을 시작하였다.
오늘 신도들이 돌아가기 전에 성찬 의식에 참가할 거라고 적어낸 명단을 정리하였다. 한 장 한 장 훑어보면서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 그들의 영세명을 하나로 된 서류에 적어 내려갔다. 그들이 제출한 손바닥만한 신청서에 내가 작성한 명단을 함께 첨부하여 근처의 수도원으로 보내면 그 곳에서 다시 더 큰 교구의 성당으로 옮겨 갈 것이며 마지막에는 교황청의 허가를 받을 것들이었다. 아아 이 조그마한 교구에서 사람 이름 적는 것조차도 이렇게 힘든데 맨 위에 계신 분들은 얼마나 힘드실까 생각하면 아찔하기도 했다. 혹시 맨 위의 분들은.... 그냥 서류를 읽어보지도 않고 사인하면 그 밑에 나 같은 사람이 수백 명이 있어서 그 사람들이 고생하는 거겠지?
불경한 생각이다.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떨쳐내고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은근슬쩍 200 명을 넘기고 250 명도 넘어가고 300 명까지 넘기는 명단에 내가 밀병 주문을 제대로 했나 싶어서 남아있는 신청서를 뒤져보았는데 남아있는 게 딱 15 장이었다. 아, 하나가 비는구나. 하지만 이 정도만 해도 주님께 받은 계시의 위대함을 찬양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완성된 서류에 우리 교구의 주소와 번호를 기입하고 담당 신부인 내 이름 파울 한을 적었다. 이것을 서류 봉투에 넣음으로서 오늘 교회에서 할 일은 끝났다. 하지만 혼자서 본당을 청소하는 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다나가 일을 어떻게 해놓았을지 궁금하여 본당으로 나가 살짝 내다보았다. 아 여긴 내가 사는 집인데도 도둑놈처럼 힐끔 훔쳐봐야한다니. 나 자신이 초라해지는 것같아서 살짝 연 문을 다시금 힘주어 밀었다. 그러자 오후의 은은한 태양이 유리창을 지나 뿌연 광선을 내리며 성당 안을 비추었고 그 안에서 걸레를 내려놓고 성경을 읽는 다나의 모습이 보였다.
아아, 고해성사 때 신부님은 내게 말했다. 내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고. 그녀가 성경을 읽는 모습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만약 내가 성직자가 아니었다면 그녀의 뒤로 다가가 그녀를 안았을 것이다. 틀림없이 그러했을 것이다. 아아 위험한 상상이다. 주님이라면 어찌하였을까. 주님이라면 어찌하였을까. 상념을 떨쳐내셨을 것이다.
“아, 신부님. 일은 다 끝나셨나요?”
“네, 덕분에 빨리 끝냈습니다. 정말 깨끗하게 청소하셨군요.”
그녀의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아아, 내가 그녀에게 어디까지 접근할 수 있을까? 내가 그녀를 두려워해야할 이유가 없다는 걸 생각하고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그리고 그녀의 이마의 땀을 닦아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두 눈을 감았다. 나의 손짓에 자신의 몸을 맡긴 것이다. 그녀의 감은 두 눈에 내 가슴은 두근두근 거렸다. 그녀가 눈을 감은 것 때문에 내 가슴이 뛰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아니 사실은 있었다. 그녀가 눈을 감았으니 내가 그녀를 어떻게 훔쳐보든 그녀는 모를 것이다.
그녀를 정말로 훔쳐보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그냥 보이는 그 자체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이마의 땀만 닦아준다는 것이 그녀의 감은 두 눈의 속눈썹에서부터 시작하여 그녀가 코로 쉬는 숨소리, 그리고 도톰한 입술에까지 눈길이 갔다. 땀을 닦아준다는 것이 잠시 정신을 놓는 바람에 마치 얼굴을 어루만지는 것처럼 되어버렸고 그 짧지 않은 시간이 계속 되면서 그녀는 눈을 뜨고 말았다. 그녀의 눈이 얼마나 매력적인지는 지금까지 계속 이야기를 해와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녀의 눈과 내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난 숨이 멎어버렸고 그녀도 당황했는지 나를 살짝 밀쳐내었다.
“아…”
그녀가 나를 거부하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까지 내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워했던 일이 지금 현실로 드러난 것이었다. 내가 그녀에게 애정을 품고 그녀에게 손을 댄 것이었다. 땀을 닦아주리라고 생각할 때까지만 해도 이런 마음이 아니었는데 그 피부에 손수건이 닿는 순간부터 내가 어떻게 되어버린 것만 같았다.
“아, 죄송합니다. 신부님. 제가 지금 좀 열이 있어서… 죄송합니다.”
그리고는 그녀는 도망치듯 성당을 빠져나갔다. 우리의 첫만남과 같았다. 그녀는 내게서 도망치고 말았다. 그녀는 나를 위험하게 하지만 그녀 자신은 무고한 여인일 뿐이었다. 그녀는 나를 타락시키기 위해 내려온 마귀가 아니었다. 마귀는 내 안에 잠들어 있을 뿐이었다.
그날 밤, 저녁 식사를 마친 후에도 계속 그 일이 마음에 걸렸다. 다나라는 이름을 떠 올릴 때마다 주님의 고난을 떠 올리고는 했는데. 이제는 주님의 고난을 떠올리면 다나의 이름이 다시금 떠올랐다. 그녀의 음란한 모습 이전에 그녀의 아름다움이 뇌리에 박혀 있었고, 그것을 가지고 싶다는 욕망이 올라왔다. 아니 그런 거창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그녀의 얼굴을 느꼈던 이 손의 촉감이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얇은 손수건 한 장의 차이로 느꼈던 그녀의 부드러운 얼굴 그리고 그녀의 숨결, 그리고 아름다운 입술, 그 입술에 내 입술을 포개는 상상을 그만둘 수 없었다. 괴롭기 그지없었다. 어떠한 조언도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니 아주 감명 깊고 절대적인 명령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육욕에 완전히 사로잡혀 타락할 것만 같았다. 사실 이미 타락하였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 서지 못하고 뒷걸음질(Entartet: 퇴보한, 타락한) 치고만 것이다.
주님이 내게 무엇을 끊임없이 말하고 있을텐데. 그 것을 들을 수 없다니… 내 몸 안의 도대체 어느 곳에 마귀가 들어와 있단 말입니까?
그 때 고해성사 중 신부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주님이라면 그리 하셨을 것이다.
2000 년전 주님이 쓰러지셨을 때를 생각하였다. 십자가의 길을 외며 주님의 고난과 역경을 생각하였다. 일단 입고 있던 수단을 벗고 옷장의 문을 열었다. 수단을 옷장에 넣어두고 잠옷을 꺼내는 대신 평상복 옷걸이에서 허리띠를 꺼냈다. 질기고 튼튼한 가죽 허리띠였다. 지금까지 그 것을 들고 옷을 입지 않은 채로 본당으로 갔다.
오른손에 묵주를 들고 왼손에 허리띠를 들고 본당의 주님이 매달린 십자가 앞에 무릎 꿇었다. 그리고 십자가의 길을 외웠다.
“예수님께서 사형 선고받으심을 묵상합니다.”
그리고 왼손을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허리띠는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내 등을 할퀴었다. 처음이라 힘조절이 되지 않아 신음소리가 날 정도로 아팠다. 하지만 이 것은 주님의 고통에 비할 바 아니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심을 묵상합니다.”
다시 한번 왼손을 휘둘렀다. 이번에도 허리띠는 내 등을 예리하게 훑고 지나갔다. 처음의 고통이 심했지만 두 번째는 더더욱 강하게 휘둘렀다. 처음의 고통이 아무리 생각해도 주님의 고통에 비하면 천분지 일, 만분지 일도 안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께서 기력이 떨어져 넘어지심을 묵상합니다.”
기도의 한 구절이 끝날 때마다 허리띠는 채찍처럼 내 등을 휘갈구었고 고통이 밀려올 때마다 주님의 고난을 떠올릴 수 있었다. 어떠한 잡념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것이 자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주님이 당해 오셨던 일을 통해서 주님을 더더욱 깊게 사랑하는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 동안 다나에 대한 정욕이 불타오를 때면 항상 이렇게 하며 견뎌왔다.
그동안 이 고통으로 말미암아 나는 그 여자를 잊고 편히 잠들 수 있었던 것이다. 더 이상 잡념이 떠오르지 않을 때까지 나 자신을 채찍질 하며…
7: 파국
부활절 축일 당일이 되었다. 2000 년 전 주님께서 직접 진행하셨던 미사를 우리는 잊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반복해 왔다. 그 것 이 벌써 2000 년이었다. 그리고 그분의 죽음 그리고 부활을 기리기 위해 우리는 그분들의 성찬 의식을 재현하는 것이었다.
흔히들 일컬어지는 최후의 만찬이 바로 그 것이었다. 유월절 행사를 지내며 아낌없이 먹고 마시는 동안 배신자 유다는 주님을 팔아 넘겼다. 즉 성찬 의식은 주님의 죽음 바로 앞에 놓인 매우 슬픈 의식이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아버지를 경배하는 방법으로 미사를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우리의 몸에 그분이 깃들게 하셨다. ‘이 밀병은 나의 살이요, 이 포도주는 나의 피로다.’ 즉 주님의 피와 살을 받아들여 그 분을 내 안에 모시고, 그 것을 약속으로 우리의 영생을 책임져 주시는 것이었다.
주님의 고결함에 대한 나의 찬양은 굳이 반복하여 적지 않아도 될 것이라 생각한다. 다만 그날 성찬 의식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사람이 더 오거나 덜 오거나 이런 걱정은 없었다. 정확하게 315 명의 신도들이 성찬의식에 참가하였으며, 어린 아이들과 함께 다나도 첫 영성체에 참여하게 되었다. 315 개인데 어째서 316 개를 계시로 받았던 것인가? 성찬 의식에 앞서 축성된 포도주를 마실 때 떠 오른 것이다. 신도는 315 명이지만 나를 포함하면 316이었던 것이다. 모든 신자들에 앞서 내가 먼저 성체를 포도주와 함께 모셨다.
입안에 들어간 성체는 깨물거나 혀로 놀리면 안되었다. 내 몸과 하나가 될 때까지 혀 아래에서 녹여서 포도주와 함께 넘겼다. 주님을 내 몸에 모시자 내 안에는 성령이 충만해졌다. 그 어떠한 부정도 내게 들어올 수 없었다. 일년 중 가장 성령이 충만한 시기가 아닌가 싶었다. 주님은 이로서 돌아가셨으나 다시 이로서 부활하셨다. 그 것을 우리에게도 나누어주시려고 이러한 의식을 가르쳐주신 것이다.
“성찬의식을 하겠습니다. 한줄로 서 주십시오.”
그러자 의자에 앉아있던 신도들은 한줄로 길게 늘어섰고 그 줄은 마치 뱀처럼 구불구불하게 의자 사이사이로 늘어졌으나 그 것으로도 모자라서 교회 밖까지 줄이 이어져 있기도 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영성체가 시작되었다.
보합에 담아 미사 내내 축성된 밀병을 꺼내들고 신도들의 입속에 직접 넣어주었다. 그리고 맑은 기름을 손에 발라 신도의 이마에 십자가를 그리며 기도하였다.
“그리스도의 몸”
“아멘.”
“우리 요셉을 굽어 살펴 주십시오.”
“그리스도의 몸”
“아멘”
“우리 빌립보를 굽어 살펴 주십시오.”
그들의 입에 밀병을 넣어주며 이마에 십자가를 긋고 기도하고 이러한 의식을 315 번을 행해야 했다. 모두 고해성사를 통해 죄가 없는 신도들이었으며, 주님을 접하기 위해 길고도 힘든 시간을 보내왔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힘들어진 것은 어디까지나 이 교회가 작고 볼품없었기 때문이었다. 주님의 집이 이렇게 초라한 것도 죄라면 죄가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모두들 성령이 충만해지는 것에 만족을 느끼는 듯 조용하고 경건하게 의식을 진행해 나갔다. 나는 그들에게 고마워해야만 한다. 그들로 하여금 주님의 집이 성령 가득해졌으니까. 그 증거로 나는 이 많은 이들의 영세명을 모두 외우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난 후에야 겨우 영성체 의식이 끝을 보였다. 마지막으로 남은 건 첫 영성체를 받는 어린이들 그리고 그 마지막에 서 있는 다나였다. 그녀는 어린아이들 사이에 서 있는 것이 어색한지 두리번거렸으며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게 힘들었는지 무릎을 자주 굽혔다 폈으나 그녀가 딱히 성찬 의식에 부정해 보이거나 하진 않았다. 오히려 주위의 아이들을 바라보며 미소 지어 보이는 것이 그녀가 순수한 어린양으로 비춰보이게 해주었다.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그녀가 얼마나 음란하게 보였던가? 그 때에 비하면 지금은 얌전한 숙녀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에 있어서만큼은 변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그녀는 매우 아름답고, 매력적이며, 사랑스럽다는 것이었다. 그녀를 향한 나의 마음이 이토록 애틋하다는 사실이 나를 괴롭혔다. 그녀는 겉모습만 아름다운 여인이 아니었다. 성실한 신도이기도 했고, 간혹 나를 도와주기도 하였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녀를 향한 내 마음이 깊어만 갔다. 어째서 내가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던가? 그 사실이 너무나도 괴로워서 나 자신에게 고통을 주어 그 상념을 떨쳐 내어왔다. 십자가의 길을 내가 걷기로 했다.
“오늘 처음 영성체를 받는 형제 자매님들 오십시오.”
나의 말에 앞니가 빠진 아이(앞으로 요한이라 불릴 것이며), 머리를 땋은 주근깨 소녀(앞으로 마리아로 불릴 것이며), 코를 훌쩍 거리는 걸 참으려고 노력하는 아이(앞으로 미하엘로 불릴 것이다)가 내 앞으로 줄을 섰다. 그리고 그 뒤에 아름답기 그지없는 다나, 그녀가 줄을 섰다. 그녀의 이름은 에스더가 될 예정이었다.
“그리스도의 몸.”
“아멘”
내가 아이의 이마에 기름을 바르고 입에 성체를 넣자 아이는 고개를 숙이였고 그 위에 손을 얹은 나는 ‘세례자 요한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하고 기도하였다. 이로서 이 아이는 세례자 요한의 가호 아래에 살아가게 되었다. 그 다음의 마리아도 그러했고 그 다음의 미하엘도 그러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차례가 되었다.
“그리스도의 몸.”
“아멘.”
그녀는 경건하게 두 손을 모아 기도하였다. 그녀의 이마에 기름으로 십자가를 그을 때, 여느 때와는 달리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의식이 계속 되어야 했기에 정신을 차리고 성체를 그녀의 입에 밀어 넣었다. 그 때가 그토록 아찔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나를 향해 그 빨간 입술을 벌리었고 그 안의 그녀의 혀를 보았다. 여성의 속살을 이토록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걸 본적이 없었다. 아니 분명히 있었다. 지금까지 영성체를 의식을 여러 번 해왔다. 하지만 이토록 관능적으로 보였던 것은 정말로 처음이었다.
오늘은 성령이 가득한 날이었다. 절대로 음란한 생각이 내 머릿속을 뒤집어 놓아서는 안 되는 날이었다. 내 몸에 주님의 성체와 주님의 성혈을 보하였는데 어찌하여 내게 이런 시련이 오는 것인가? 그녀의 입속에 성체를 넣기 위해 손가락을 넣을 때, 나도 모르게 너무 깊숙이 손을 넣어 그녀의 입술을 건드리고 말았다. 그녀는 성체를 입에 넣고 고개를 숙였으나 나는 기도를 할 정신이 아니었다.
여성의 입술을 건드리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의 입술을 건드린 것은 무척이나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그녀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려놓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신부님, 에스더입니다.”
그녀의 재촉에 정신이 들었다. 그녀의 목소리만 들어도 정신을 못 차리던 내가 그녀의 목소리로 정신이 들 정도면 내가 얼마나 정신이 나간 것이었을까?
“아, 우리 에스더를 굽어 살피시옵시소서.”
그렇게 모두의 영성체가 끝난 후에 주님의 기적이 완료되었다. 316 개의 밀병이 모두 소모되었다. 그럼으로서 나는 주님이 이 세상에 역사하심을 확신하였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나는 주님의 성령 충만한 가운데에서 욕정 해버리고 말았다.
수치스럽기 그지없었다. 성찬 의식을 마친 후의 설교도 생략하고 오늘 모두 성령 충만하시길 바란다는 겉치레 말로 사람들을 내 쫓아버렸다. 그렇게 사람들이 가는 뒷모습을 뒤로 하고 내 방으로 돌아오고서는 절망에 빠져버렸다.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어떻게 부활절 축일에 욕정할 수 있단 말인가? 그 것도 순결한 여인 앞에서… 그녀가 정말로 순결한 여인이기는 할까? 정말 그녀가 마귀가 아니란 말인가? 어떻게 그녀가 내게 이토록 불편하게 다가올 수 있단 말인가?
성직을 하면서 이토록 괴로울 수 없었다. 그녀를 단순히 사랑한다고만 생각했다. 욕정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고해성사를 할 때의 신부님의 조언대로 상황을 즐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고통으로 내 영혼을 정화 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헛수고였다.
“주님, 어찌하면 좋단 말입니까?”
그녀의 입술에 손이 닿을 때 나는… 몸의 변화를 겪었다. 그러한 일은 처음이었다.
아랫도리가 축축해지면서… 내 몸안의 정이 빠져나온 것이었다.
“정녕 어찌하면 좋단 말입니까!”
그날 내내 실의에 빠져 있었다. 더러워진 옷을 세탁하고 속옷은 태워버렸다. 몸도 여러번 씻었고 그날따라 너무나도 괴로웠기에 숨겨둔 맥주를 꺼내 마셨다. 축일에 이렇게 취하는 것은 옳지 않았으나 제정신으로 있을 자신이 없었기에 처음에 포도주로 시작한 음주가 어느새 맥주로 변해 있었다. 그 것도 얌전하게 마시는 게 아니라 취하고 싶은만큼 미친듯이 마셔댔다. 잔에 술이 비기가 무섭게 주전자를 기울였다.
얼굴이 붉어지고 화장실도 수없이 다녀왔다. 주님을 원망하는 소리도 할뻔했고, 바닥에 자빠져서 울고 싶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평상복을 입고 있으니까 수단을 더럽히진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지나간 것은 약간의 아이러니였다. 그러면서 기다리는 것은 오직 밤시간이었 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밤의 시간이라면 오직 나와 주님 단 둘이 있을 수 있었다. 누구도 방해하지 않았다. 그 길고 긴 침묵의 시간이 항상 불편했으나 지금으로서는 오직 그 시간만이 고통의 길을 걸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술로 시간을 보내고 마침내 해가 지는 걸 확인한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밥도 먹지 않았고 기도도 드리지 않았다. 그날의 목표는 오직 하나였다. 본당으로 가서 상의를 아무렇게나 벗어 제꼈다.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 앞에 무릎 꿇었다.
그토록 망나니가 되도록 술을 퍼마셨고 이렇게도 버릇없이 굴면서도 주님의 앞에 앉게 되자 눈물이 흘러나왔다. 지금의 행동들이 모두 죄악이었고 용서받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주님, 죄송합니다. 주님,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응답해주십시오. 저도 고통스러운 것이 싫습니다. 제가 어디가 어떻게 잘못된 것입니까? 길을 보여주시면 그 길로 따르겠습니다. 주님… 주님….”
하지만 주님은 말씀이 없으셨다. 그저 나홀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주님이 나를 떠나버리신 것만 같았다. 이런 망나니같은 녀석 곁에 있고 싶지 않으신 것이었다. 아니다. 아니다. 주님은 아무도 버리시지 않는다. 단지 어리석은 자들이 주님을 버리는 것뿐이었다.
허리띠를 끌러 내렸다. 허리띠의 가운데 부분을 잡고 등을 향해 허리띠를 강하게 휘둘렀다. 지금까지의 고통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한 나였다. 더욱 더 강한 고통이 필요했다. 허리띠의 버클이 등의 살을 집으며 할퀴었다. 단 한 번의 휘두름이었으나 허리띠에 피가 묻어 나왔다. 피가 나오는 건 두려웠으나 고통이 충분하지 않았기에 더욱 세게 휘둘렀다.
“으읏!”
입에서 신음소리가 나오려는 걸 입을 악 물고 참아냈다. 주님이 당하신 고통에 비하면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이로서 주님 곁으로 다가갈 수 있다면 얼마든지 참아낼 수 있었다. 이걸로도 안 된다. 다시 한 번 있는 힘껏 허리띠를 휘둘렀다. 그 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감스럽게도 그 것은 주님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증오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그와 동시에 내가 사랑하는 목소리이기도 했다.
“신부님! 왜 이러세요!”
다나, 다나… 오늘 내가 에스더라는 이름을 새로 준 그녀가 어두운 본당에 들어와 나의 이런 모습을 보고 놀라 달려왔다. 그녀는 내 손에서 허리띠를 빼앗았고 나는 무력하게 그녀의 행위에 굴복하였다. 내가 그녀에게 저항할만큼 잘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신부님, 이러시면 안돼요. 왜 자해를 하세요?”
그녀는 내 등을 어루만졌다. 내 쓰라린 상처를 만지더니 이내 곧 어디론가 사라지더니 구급함을 가져와 내 등에 연고를 발라주었다. 피가 나는 곳이 쓰리지 않도록…
“신부님, 세상에나 등이 왜 이래요? 어째서….”
다나는 내 등의 상처들을 보았다.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그녀 때문에 괴로웠던 날들이… 그 때마다 나는 등에 채찍질을 하였다. 그 모습이 어떠한지 본적은 없었으나 그녀의 반응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신부님, 여기서 이러고 있지 말고, 안으로 들어가요. 누가 볼까 두려워요.”
그녀는 나를 부축해 일으켜 본당 옆에 있는 문을 통해 응접실을 거쳐 내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나를 눕혔다. 그리고 그녀는 의자에 앉은 채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신부님, 어떻게 된 일인가요? 말씀해주실 수 없나요?”
그녀는 내게 물었다. 그녀는 집요하지 않았으며, 내가 대답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당장 꺼져버려’라고 말하지 못하였다. 아니 오히려 참을 수 없는 건 내 쪽이었다.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말을 그녀에게 하고 싶어서 참을 수 없는 건 오히려 내 쪽이었다. 당신을 사랑한다고, 당신을 갖고 싶다고, 항상 당신을 생각한다고. 그 때마다 그 것이 너무 괴로웠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것을 말하면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았기에 입을 다물었다.
다물었어야 했다.
당시의 나는 취해있었고, 외로웠고, 약해져 있었다.
울고 있었다.
그녀는 내 곁을 지켜주고 있었다.
더 이상 숨길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이야기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튀어나왔는지는 기억이 나지도 않는다. 아마도 지난 고해성사의 이야기에서부터였을 것이다.
“지난 번 고해성사를 나갔을 때 신부님이 말씀하시더군요. 제가 사랑에 빠졌답니다.”
“…… 신부님”
“한 여자에게 영혼을 빼앗긴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였다. 그 여성의 이름을 다나라고 말하기도 전에 우리는 서로의 시선을 교환하였고, 그 내용이 어떻게 이어질지 마음으로 알게 되었다. 결국 나는 내가 다나를 사랑한다고 고백한 것이 되었고, 그녀는 그런 내게 대답을 하는 대신 행위로 다가 왔다.
그녀는 내게 입을 맞추었고, 상처 입은 나의 몸을 어루만졌다. 그런 그녀를 밀쳐낼 수 없었다. 밀쳐내야 옳았으나 밀쳐내지 못했다. 그토록 내가 간절히 원하던 것을 손에 넣었기 때문이었다. 그 동안 상상으로만 이루어졌고 내가 두려워하던 일을 결국 내 손으로 저지르고 말았다. 그녀의 온몸을 이 손으로 애무하였으며, 그녀의 은밀한 곳을 맛보았다.
그 옛날 태초의 아담과 이브가 그러했든 우리는 서로 알몸이 되었고, 더 이상의 죄책감 없이 서로의 몸을 탐하였다. 내 삶의 최고의 순간을 맛보는 듯하였다. 하지만 그 것이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되는 금단의 과일이라는 걸 깨닫게 되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브뤼셀의 한 공동묘지, 벨기에=
조금 혼란스러운 걸 알고 있다. 나와 그녀의 만남이 메트만의 작은 교회 트라움에서 시작되었는데 어쩌다가 우리가 이국 땅을 밟고 그 곳에 그녀를 묻으려 하는지. 그 과정에 많은 일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녀와 몸을 섞은 일 이후로 나는 성직자가 아니게 되었고, 그녀와 목적지 없는 여행을 떠나야했고 결국 그녀는 이렇게 낯선 땅에 묻혀야만 했다.
그녀의 친부모가 누군지 몰랐고, 그녀의 고향이 어딘지도 몰랐기에 고향을 찾아준다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했고, 게다가 도망자 신세가 된 지금에 와서는 그녀에게 제대로 된 장례를 치러준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내 손에 쥐인 자그마한 권총… 이 세상의 추악함과 혐오스러움으로부터 그녀를 구하는 과정에 필요했던 것이며 내 손을 죄악으로 물들게 한 그 것이었다. 2 차 대전 중 독일군 장교들이 사용하였던 루거는 제대로 된 사람이 호신용으로 들고 다닐만한 무기가 아니었다. 수집벽에 찌들어 자신의 영혼까지 타락으로 물들인 사람들이나 집에 고이 모셔둘 법한 총이었다.
어찌되었든 우린 이 곳까지 오게 되었고 나는 그녀를 땅에 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하지? 모든 것을 잃은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하지?
조금은 의아하겠지만 사실 내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지금까지 내가 한 이야기에 의하면 마치 내가 결국 그녀를 손에 넣은 것으로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 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었다. 나는 그녀를 얻지 못했고, 지금 그녀를 이렇게 떠나보내고 있다. 그리고 나의 성직도… 산산히 부서져버렸다.
그냥 이 상황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추론하는 것도 지겨울테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실대로 이야기 하고자한다. 이 세상에 모든 것을 숨기고 살아갈 수 없다는 건 나도 알고 있다. 그래서 하물며 이 세상에서 마지막만큼은 모든 것을 남기고 가고 싶다.
그날 밤의 이야기를 계속 돌이켜보자. 도대체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녀를 이토록 추하게 만들고, 내 손에 이 총이 쥐어져 죄악에 물들게 된 이야기를…
8: 네크로필리아
어디부터 이야기 해야할지 모르겠다. 사실 그날 밤 나와 다나의 행위는 제정신으로 묘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순진한 성직자였으며, 그녀는 순결한 처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당신들이 무엇을 상상하든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실행으로 옮겼다. 아름답디 아름답게 생각할 수 있는 입맞춤과 포옹에서부터 추하디 추하게 생각할 수 있는 오직 감각적 쾌감만을 목적으로 서로의 몸을 탐하는 것까지. 주님이 가르쳐주신 방법에서부터 짐승들이나 할 법한 짓도 하였고, 심지어 우린 인간의 언어가 아닌 짐승의 울부짖음으로 대화하기도 하였다.
그동안 억압받아왔던 모든 것을 보상받기라도 원하는 듯 나는 그녀를 끝없이 탐하였으며, 그녀는 내게 모든 것을 주었다. 아무런 저항도 없었고, 오히려 그녀가 나를 탐하기도 하였다. 이른 밤부터 시작된 사랑의 행위는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라 늦은 새벽까지 계속 이어졌다.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수컷과 암컷이었으며 정욕대로 움직이는 짐승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이성은 그녀를 밀쳐내지 못하고 계속하여 탐하였다. 목마른 자가 물을 갈구하듯, 배고픈 자가 빵을 탐하 듯,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본성이었다.
하지만 목마른 자가 목을 축이고, 배고픈 자가 만찬을 대한 후에는 어찌되던가? 자신이 짐승같이 미친 듯이 먹고 마시다가도 충족된 후에는 다시금 품위를 찾으려 하지 않던가? 하지만 우리는 어떠한가? 둘 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고, 짐승처럼 숨을 헐떡이고 있으며 몸가짐은 수치스럽기 그지없었다. 품위를 찾을래야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게 더 이상 사제로서의 고결함이 없었다.
주님이 아닌 정욕에 몸을 맡겼다. 그녀와 몸을 섞었다. 천상의 이상을 물리치고 지상의 욕망에 몸을 담그고 말았다. 깨끗하지 못한 몸이 되어버린 내가 어떻게 주님을 모실 수 있단 말인가?
그녀와의 시간은 불같이 정열적이었고, 즐거웠으며, 모든 갈증을 해소 시켜주었으나 그 이후 내게 밀려오는 상실감은 내 인생 전부를 빼앗긴 것과 마찬가지였다. 오직 성직의 길에 몸을 바쳐온 내게 그 성직을 빼앗아가는 순간이었다.
이런 몸으로 주님을 뵐 수 없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가장 먼저 한 일은 십자가를 엎어뜨려 주님을 쓰러뜨리는 것이었다. 그분께 내 이런 흉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악마다. 나는 악마가 되어버린 것이다. 정욕을 참아내지 못한 것도 나였고, 그녀를 품은 것도 나였다. 모든 번뇌와 시련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왔지만 그 것에 결국 실족한 것도 나다. 용서받을 수 있겠는가? 과연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인가? 나의 사제직을 놓지 않고 계속 유지할 방법이 있단 말인가?
없다. 그런 건 없다. 내가 입을 다물고 그녀가 입을 다문다면 이 일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결국 나는 항상 거짓말을 해야만 하겠지. 그럼 그 거짓말은 누구를 향한 거짓말이란 말인가? 이 세상을 향한 거짓말이다. 그 것은 주님에 대한 거짓말이다. 주님이 속아주실 거라고 생각도 하지 않는다. 아니 주님은 바로 여기서 우리의 모든 것을 보고 계셨다!
괴로움에 가득 차 머리를 쥐어뜯다가 결국 다시 뒤를 돌아 침대에 누워있는 다나의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사랑받는 자, 에스더의 이름을 받았다. 에스더가 이방인들에게 그러했듯 그녀도 결국 나를 파멸로 몰고 가고 있었다.
그녀를 탓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끝까지 착한 사람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다만 내가 욕정하여 그녀를 욕되게 한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토록 괴로워하는 내 모습과는 달리 그녀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의 괴로움을 보고 그녀는 웃고 있었다. 어떻게 나의 괴로움을 보고 웃을 수 있단 말인가?
그녀의 미소에서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틀림없이 행복해 하고 있었다. 나의 이러한 타락에 대해 행복해 하고 있었다. 그녀는 정말로, 정말로 나를 타락시키기 위해 내려온 사탄의 종이란 말인가? 그녀의 모습을 보고 당황하는 내게 그녀는 입술을 움직여 내게 명령하였다. ‘사랑을 나눠요. 우리 한 번 더 사랑을 나눠요.’ 그 목소리는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고, 나는 저항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목소리 한구절 한구절이 나를 둘러싸는 폭력이었고, 거부할 수 없는 육욕에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고 말았다.
하지만 마지막 주님을 향한 나의 마음이 움직여졌다. 그녀를 안아서는 안 되었다. 그녀는 마귀였고, 그녀를 물리쳐야만 했다. 나의 모든 것을 앗아간 마녀야, 지금까지 나를 괴롭혀 왔으나 이제는 더 이상 당하지 않는다. 주님의 은총으로 너를 회개케 하려하였으나 뱀과 같이 요염하고 영악한 네게 천국의 자리는 마련되지 않는다.
주님을 위한 응징이었다. 나의 두 손이 그녀의 목을 감싸 쥐었고, 그녀의 목을 있는 힘껏 졸라대었다. 그녀는 괴로운 듯 발버둥을 쳤으나 내게 어떠한 해를 끼치지 못하였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내게 경고를 하였으나 그녀의 손톱이 자신의 손바닥을 찌를 뿐이었다. 그녀의 손에서 피가 흘러내려오고 그녀의 눈이 나를 죽일 듯 쳐다보고 있었어도 나는 그녀가 더 이상 저항하지 않을 때까지 계속 목을 졸랐다. 그녀가 죽을 때까지 그녀를 죽일 때까지 마귀를 응징하고, 주님의 뜻을 바로 세우며, 내가 마지막 피해자이고, 더 이상의 이 마귀 때문에 상처받는 사람이 없기를 기도하며…
마침내 그녀는 발버둥치지 않게 되었고 그녀는 마지막 경련을 하며 더 이상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녀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을 때 내가 정을 쏟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녀의 죽음에 내가 무엇 때문에 흥분을 했단 말인가? 만약에 내가 흥분할 이유가 있었다면 마귀를 극복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정을 쏟아내야했단 말인가?
하지만 항상 열기가 식은 다음에는 상황 판단이 냉철해졌다. 다시금 이 상황을 정리하고 나니 이번에야 말로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지른 셈이었다. 마귀를 죽인다고 해 놓고… 나는 사람을 죽인 것이었다.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다나를 이 손으로 목졸라 죽인 것이었다.
“아아.... 아아.... 아니야. 아니야.”
사람이 이렇게 쉽게 죽을 리가 없다. 이렇게 쉽게 죽으라고 주님이 세상에 내려보냈을 리가 없다. 그녀가 아직 죽지 않았을거라 는 희망을 품고 그녀의 새하얀 가슴에 얼굴을 묻고 그녀의 심장 소리를 확인하였다. 들릴리 없는 소리였다.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포개어 넣고 숨을 불어 넣었다. 들어갈리 없는 호흡이었다. 그녀의 몸에 남아있던 열기조차 이제는 싸늘히 식어가고 있었다.
다시 일어난다면, 다시 일어난다면,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할텐데. 차라리 사제직을 포기하고서라도 그녀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품어줄텐데. 어쩌다가 이런, 어쩌다가 이런…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성직자로서의 고결함과 인간으로서의 도리, 그 것들을 한순간에 모두 잃어버린 것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이 죄에 합당한 벌을 받는 것은… 내 목숨을 내어 놓는 것이었다. 자살을 결심했다. 사실 도망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허리띠를 천장에 매달고 의자 위에 올라가 목을 맬 작정을 하였다. 하지만 그 때 분명 쓰러뜨려 놓았을 주님의 십자가가 나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아아… 주님! 그럼 제가 어떻게 하면 좋단 말입니까? 주님이 주신 목숨을 버리지 못한다면 저는 어찌하란 말입니까? 이렇게 살아갈 수 있단 말입니까? 사제직도 버려지고, 인간으로서도 제대로 살아갈 수 없으며, 사랑하는 사람조차도 잃었는데. 제가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간단 말입니까?
하지만 주님과 싸워서 이길 수 없었기에 천장에 매달아 둔 허리띠를 끌러 내리고 의자에 앉은 채로 밤을 새워 보냈다.
그리고 아침이 되고 태양이 떠오르며,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하루가 시작되려 하였다.
창밖에는 새가 지저귀고, 창문 넘어로 새하얀 빛이 광선을 이루며 들어와 방안을 밝혔다. 살짝 열린 창문 너머로 신선한 공기가 들어오며 창밖의 신록이 주님의 은총을 받은 듯 이슬져 빛나고 있었다. 너무나도 잔인했다. 나는 지금 사람을 죽였다. 그 것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죽였다. 그런데도 세상은 이렇게도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빛은 내 침대 위에도 비춰져 올라왔다. 내 침대를 돌아보자 자연히 그 침대 위에 누워있는 다나의 모습도 보였다. 그녀의 몸 위로도 새하얀 광선이 비춰졌고, 그 하얀 빛 아래에서의 그녀의 모습도 빛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괴로워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두 주먹을 꽉 쥐고 있긴 했지만 그녀의 얼굴은 오히려 미소짓는 듯 하였다. 그녀는 더 이상 내게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내가 그녀를 어떻게 들여다보고 어떻게 만지더라도 그녀는 내게 도망치거나 나를 무안하게 만들지 않았다. 그녀는 그 자체로 아름다웠다.
아니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그녀는 더 이상 마귀나 사탄으로 몰아세울 근거가 없어졌으며, 단지 생명이 없을 뿐 이 세상의 무엇보다도 아름다웠다. 내가 바라볼 수 있는 것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이었으며 이제 더 이상 숨어서 그녀를 보지 않아도 되었다. 그녀의 눈, 코, 입, 귀, 알몸, 은밀한 곳, 발가락, 발톱, 머리사이, 피부의 땀구멍까지 모두 살펴본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나를 거부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그녀가 나를 거부할까 두려워 그녀를 흘끔 보고 말았던 세월과는 달랐다.
아아… 성직에서 벗어나게 되니 이렇게도 자유로워지는구나! 아니 내가 지금 성직에서 벗어난 것인가? 아니다. 아직 아니다. 나 자신은 성직에서 벗어났지만 이 세상에서는 아직 나는 불의 혀를 가졌으면 사도 바울의 화신이다. 아침에 미사를 보러 오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며 고해성사를 보러 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아, 바빠진다.
이 아름다움을 되도록 오랫동안 차지하기 위해서라면 지금 나의 신분을 버려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주님, 주님 저는 타락하였습니다. 하지만 제 목숨을 가져가지 않으신 것도 주님의 뜻입니다. 주님이 제게 주신 사랑과 생명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잘 보아주십시오. 저는 저렇게도 완벽한 아름다움, 주님의 피조물을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싸늘하게 식은 다나의 시신을 침대에 곱게 뉘여놓았다. 그리고 이불을 덮자 그녀는 마치 잠들어 있는 것만 같았다.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아름다웠다. 이 세상의 무엇보다도 가치 있는 모습이었다. 이것이 나의 손에 들어왔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이 하얗게 올라와서 조금은 무서웠다. 그녀의 눈을 살포시 감긴 후 그 위에 입을 맞추었다.
“다녀올게. 나의 사랑. 나의 다나.”
그녀는 죽었지만 그녀의 몸을 포기할 수 없었기에, 그녀는 내 방에서 계속 살아가야했다. 아니 계속 죽어가야했다.
9: 인형
다나가 죽은 당일, 상상도 못할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솔직히 말해서 그 당시 인간으로서의 나의 인간성이 말살되었다는 것은 인정한다. 수많은 신성 모독은 물론 인륜적으로도 수많은 금기를 행해왔다. 먼저 나는 살인을 저질렀으며, 그 것에 대한 반성에 앞서 이 아름다움을 탐하였다. 그리고 그 뒷수습을 하기 위해서 경찰을 부르는 대신 그녀를 내 방에 보관하기로 작정한 것이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내가 옳고 그름을 따질만한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의 모든 것을 걸어서라도 내가 가져야 할 것이었다. 그 것이 단순한 욕망이라고 한다면 그 것은 가장 순수한 욕망일 것이다. 만약 주님이 다시 내게 말을 걸어 ‘지금 뭐하고 있는 거냐?’라고 묻는다면, 나는 주님이 내리신 것을 따르는 중입니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나로 하여금 사제직을 포기하게 만들 정도였으며, 그 것은 내가 지금까지 생각해오던 최고의 선(善)을 대체한 더더욱 높은 선(善)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십자가를 경배해왔듯, 앞으로는 그녀의 시신을 경배할 것이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날 너무나도 혼란스러웠던 탓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이기 위해 방문을 걸어 잠그고 수단을 차려입고 본당으로 나섰다. 어제가 부활절 미사였음에도 그 다음날에도 아침에 나온 신자들이 많았다. 그들에게 아침 미사를 통해 성령으로 인도하고 설교를 통해 그들을 감복시켰다.
그들은 여전히 나의 이야기에 동화되었으며, 주님을 찬양함에 있어 비뚤어짐이 없었다. 비뚤어진 게 있다면 바로 나 자신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몰랐다. 그저 주님이 이야기하시는 대로 혀를 놀리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입을 벙긋거렸다. 그 때의 느낌이 이상했다. 내게 전혀 성령이 깃들어 있지 않다는 걸 깨닫는 한편 내 입을 통해서 나오는 것들이 내 기억의 단편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다. 성경 구절을 인용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하여 깨달음을 주었으나, 지금까지의 뜨거웠던 마음가짐과는 달리 나 자신이 타락하였음을 알고 있었기에 내가 그들을 열광케하는 것은 그들을 기만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예전의 내가 한 설교와 지금의 나의 설교는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런데 예전에는 어쩜 그렇게 성령 충만함을 느끼고 뿌듯했으며 자부심을 느꼈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사기치는 것같고 기만하는 것 같을까? 혹시 과거의 나 역시 사람들을 기만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중심이 되는 믿음이 흔들리고 나니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변해버린 건 아닌가 싶었다. 무엇보다도 몸은 교회에 있었지만 마음은 다나에 대한 생각 뿐이었다. 그녀의 아름다움이 어떻게 변해갈지 예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은 점점 급해졌다.
아침 설교를 끝으로 사람들을 돌려보냈으며 바로 교회 창고로 달려들어갔다.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 근방에 장의사가 없기 때문에 장례식이 열리는 곳은 항상 이 교회였다. 이 근역의 모든 주민들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이 교회 외에는 다른 교회가 없었으므로 장례업체 사람들은 우리에게 많은 협조를 요구했다. 그 중 하나가 그들의 창고를 마련해달라는 것이었다.
그 곳은 일종의 작업실로 시신을 교회로 옮겨 온 후 방부처리를 할 공간이었고 그에 필요한 약품과 도구들이 비치되어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시신을 장례업체로 가져간 후 방부처리를 한 후 교회로 가져와야 했지만 도심과 원체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이런 모양이 되었다.
지금의 나로서는 매우 운이 좋은 편이었다. 여러 번의 장례식 경험으로 시신이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된다는 이야기는 자주 들었다. 불과 3 일만 방치해도 안구가 수축하며 구더기가 올라온다는 이야기였다. 그 걸 방지하려면 방부처리를 해야하는데 일단은 혈액을 모두 흘려 보낸 후 체액으로 글리세린 혼합물을 넣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피부의 건조를 막기 위해 표면에 보습제를 바른다고 하였 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런 일을 해본적도 없고, 할만한 용기도 없었다. 게다가 심지어 시신을 방 밖으로 가지고 나올 용기도 없었다. 그래서 이 모든 과정은 방안에서 이루어져야 했다.
창고에서 가지고 들어온 20 리터짜리 회색 말통에 들린 글리세린 혼합물과 왜인지 보습력이 있을 것같은 아마유를 질질 끌듯 들고서 방앞까지 걸어왔다. 말통과 작은 병을 내려 놓고 방문을 여는 순간 죽은 지 불과 10 시간도 채 되지 않았으나 방안에는 불쾌한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이게 무슨 냄새인가? 시체 썩어가는 냄새 외에 익숙한 냄새도 섞여 있었다.
그 냄새의 실체를 알아보기 위해 다나를 덮어둔 이불을 들추자 아아, 이토록 아름다운 여인의 마지막은 묽고 누런 배설물이었다. 그 것을 어떻게 처리할 자신이 없어서 이불 째로 둘둘 말아서 바닥에 내려 놓았다. 그리고 욕실에서 가져온 수십 장의 수건으로 그녀의 몸을 정성스레 닦기 시작하였다. 일단 더러워진 그녀의 창피한 부분부터 더 이상 더러움이 남지 않도록 닦아 내었고 냄새가 날 법한 다리 관절, 오금치, 겨드랑이 부분은 알코올을 묻혀 닦아내었다.
비록 죽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그녀는 아름다웠고, 그런 그녀의 몸을 내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은 매우 흥분되는 일이었다. 그녀의 아름다움이 유지 되는 한 나는 몇 번이고 그녀에게 정욕을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녀가 만약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그녀의 의도를 알 수 없었으므로 그녀가 내게 어떠한 일을 저지르기 위해 이렇게 매력적으로 비춰지는지 경계하였으나 지금은 그녀가 의식이 없으므로 그녀가 날 타락시키기 위해 이렇게 아름다움을 발한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다만 타락한 쪽은 내 쪽이었다. 알코올로 그녀의 몸을 소독하는 과정에서 그녀의 몸에서 나는 역한 냄새는 지워져갔고, 오히려 알콜 특유의 상쾌한 냄새가 내 코끝을 자극하였다. 알몸의 여성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느낌에 오히려 다시 욕정하여 입고 있던 옷을 벗게 되었다. 수단을 벗고 나면 나는 더 이상 신부가 아니다. 아니 실질적으로 오늘 새벽부터 나는 신부의 몸이 아니었다. 비록 교황청에서 나를 파문하진 않았지만 나는 더 이상 주님 앞에 순결한 어린 양이 될 수 없었다. 오히려 주님의 이름을 팔아먹는 악랄한 사기꾼이 되어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것도 이 옷을 벗고 나면 그 사기꾼의 지위도 없어지고 그저 하나의 짐승이 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녀도 알몸이고 나도 알몸이었다. 그러나 알몸의 상태가 되었다고 해서 그녀를 마음대로 간음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를 간음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언제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다만 이로서 우리는 동등한 위치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몸을 깨끗이 하는 동안 욕정하지 않았느냐고 묻는다면 그 것은 아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다. 그녀는 아름다웠고,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 아쉬운 거라고는 그녀가 죽은 몸이라는 것 뿐이었고, 이제부터 그 것을 극복해나가야만 했다. 이 아름다움이 오래 지속되도록 해야만 했다. 그 것이 급했을 뿐 내가 원하기만 한다면 나는 그녀를 몇 번이고 간음하였을 것이다.
그녀의 몸을 깨끗이 한 후에는 그 빌어먹을 방부처리를 해야했다. 이것이 난감했다. 그녀의 몸은 매력적이었고, 죽음까지는 극복할 수 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잔인하고 난폭한 살인마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몸에서 피를 뽑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참으로 없었다. 무언가 펌프같은 것이 있어서 피를 뽑았다가 다시 채워넣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막막했다. 결국 생각난 방법이라는 게 그녀의 팔과 다리 그리고 목의 혈관을 잘라서 피를 뽑는 것이었다.
그나마도 큰 마음 먹고 책상위의 종이 자르는 칼로 그녀의 발목을 그었을 때=시체가 피를 잘 흘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그때= 미치고 환장하였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녀는 점점 흉한 모습이 되어 갈텐데. 발목에서 흐르는 피는 꼭 패킹이 고장나서 꼭 잠궜는데도 물이 새는 오래된 수도꼭지 같았다. 그래서 손목도 그어보고, 다른 쪽 발목도 그어보았다. 피가 어느 정도 나오기는 했지만 그 것만으로는 온 몸의 피를 뽑을 수 없을 것같았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한단 말인가? 절망에 빠져 그녀의 배를 누르는 순간 그녀는 또 한 번 배설을 하였다. 아아… 초보자의 길은 이토록 험하단 말인가? 해야 할 일이 오히려 늘어나고 있었다.
일단 그녀의 뱃속의 내용물부터 최대한 많이 빼 놓아야 했다. 그녀 위에 올라서서 배를 누르자 누르는 대로 묽은 똥이 밀려 나왔다. 사람의 장이 몸속에 어떻게 꼬여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일정한 방향으로 눌러 내려가자 배설물이 점점 밀려 나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누르는 부분이 점점 내려올수록 똥은 물론 오줌도 흘러나오곤 했다. 그 때 깨달았다. 내가 그녀를 누르는 동안 그녀의 팔다리에서 피가 조금 더 잘 뿜어져 나오는 것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비위가 약한 편이었던 나는 피가 나올 때마다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무서웠다. 그녀가 죽었을 때보다 피가 뿜어져 나올 때 더더욱 무서웠으며 그녀의 아름다움을 지키려는 숭고한 작업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더라면 벌써 기절해버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온몸이 오그라드는 듯한 불쾌감을 견뎌내며 피가 뿜어져 나오는 매커니즘을 이해하려 하였다.
그 것은 심장이었다. 그녀의 가슴(아~ 이 손에 꽉 잡히는 부드러운 촉감이여)을 누를 때마다 압박된 심장은 그녀의 혈관에 압력을 전달하여 피를 뿜어내었다. 그렇게 그녀의 가슴을 잡고 탄력있는 가슴을 내려 누르며 박자를 타자 그녀의 팔 다리에 난 상처로 피가 삐직삐직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욕정해버린 나는 더 좋은 방법을 떠 올렸다. 그녀를 간음하게 되면 자연스레 그녀의 몸에 압력이 가하리라 생각하고 그녀 위에 올라앉은 것이다.
결국 오늘 새벽의 그 일을 다시금 벌이기로 했다. 이번에는 생명이 없는 그녀였다. 그녀는 날 끌어당기지도 않았으며, 밀치지도 않았다. 다만 내가 원하는 대로 그녀를 움직일 수 있었다. 안타까운 것은 새벽 때와는 달리 그녀의 은밀한 곳이 충분히 젖어있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난 내 몸에 아마유를 바르고 그녀의 몸을 마사지 하듯 어루만졌다. 피부 보습의 과정과 내 욕구를 동시에 해결하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그녀의 몸 표면에 보습처리를 하고, 그녀의 체내의 혈액을 뽑아내었다. 그러자 그녀는 눈에 띄게 몸이 줄어있었고 그 모습은 마치 미이라와 같았다. 그런 그녀의 몸에 글리세린 혼합액을 채워 넣는 일은 쉽지 않았다. 사실 불가능에 가까웠다. 뽑아내는 거야 쥐어짜면 된다지만 넣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가?
결국 그녀의 발목을 들어올려 혈관이 뚜렷이 보일 때까지 칼로 째야만 했다. 그리고 그 혈관에 가느다란 비닐관을 쑤셔 넣은 후 사이펀의 원리를 이용하여 글리세린 혼합액을 넣으려 했다. 하지만 충분한 압력이 나오지 않아 결국 글리세린 혼합액을 입에 물고 비닐관에 입으로 불어넣으며 그녀 몸에 글리세린을 채우기로 했다. 도대체 글리세린에 뭘 섞은 건지 맛이 이상했다. 달착지근하면서도 콧김이 나오는 게 알콜 성분이 포함된 듯하였다. 전체적으로 느끼하였지만 그래도 그녀의 아름다움을 보존하기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계속 입으로 글리세린 혼합액을 밀어 넣었다.
20리터였다. 자그마치 20리터를 밀어 넣었다. 그녀 몸 속에 있던 혈액도 발목에서부터 채워지는 글리세린에 밀려 손목 쪽의 혈관으로 밀려 나왔다. 이걸 끝까지 다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중간에 포기할 생각도 없었다. 이미 내게 나 자신의 목숨같은 것은 의미가 없었다. 지금부터 나의 목숨은 바로 이 여인의 아름다움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그 것이 그럴 가치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 것보다 가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고. 심지어 내가 신을 져버릴 정도로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고.
하지만 역시 초보자의 길은 힘들었다. 애써서 밀어넣은 글리세린이 상처부위를 통해서 새어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해본적도 없는 봉합수술을 해야만 했다. 사람의 살을 바늘로 뚫고 지나가는 끔찍한 수술이었으나, 그녀는 아프다는 신음조차 없었다. 그녀는 마치… 아름다운 인형과도 같았다.
이 험난한 작업은 해가 완전히 지고 난 후에야 겨우 마무리를 지을 수 있었다. 방안은 온통 피칠이 되어있었으므로 그 것을 닦아내는데 거의 모든 수건이 들어갔다. 이 안에서 일어난 모든 안 좋은 것들, 더러워진 것들은 현대 문명을 통해서 처리되어갔다. 세탁기!
이 안에서 무엇이 얼마만큼 더러워졌든 간에 마음이 없는 기계의 5 시간 연속 세탁 기능을 사용하였고, 그에 필요한 세제를 충분히 많이 넣어주었다. 저 세탁기만 돌아가고 나면 이 안의 끔찍한 흔적들은 모두 사라질 터였다.
그리고 마침내 방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하면…
그녀가 입고 온 옷을 그대로 입혔다. 작업은 성공적이었으며 빼낸 피에 비해 넣은 용액이 부족했는지 몸은 조금 야위어져 보였으나 오히려 그 덕분에 더욱 가늘어진 그녀의 허리는 오히려 매혹적이었다. 그녀에게 생명은 없었으나 아름다움은 여전했고, 오히려 그녀에게 영혼이 없다는 측면에서 더더욱 안정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온몸을 찬찬히 들여다 볼 수 있었고, 내게서 도망치지 않으며, 또한 내게 해를 끼치지 않는 완전한 나의 여인이 되어 있었다.
“다나… 다나 다나 다나…”
내 실수로 당신을 죽였지만, 당신의 아름다움은 영원히 간직하겠소, 주님이 나를 살려둔 이유가 그 것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성공적인 작업 후, 나는 다나를 침대에 고이 눕혀 놓고, 그 옆에 누워서 그녀의 머리 아래로 팔베게를 해주었다.
아아… 나 자신이 무언가 잘못된 게 있구나 하는 걸 그 때 느꼈다. 이 아름다움을 지키려고 그토록 고생하느라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인데… 지금 내가 시체랑 나란히 누워있구나 하는 생각에 갑자기 두려움이 생겨났다. 하지만 이내 곧, 시체는 내게서 도망치지 않고, 나를 공격하지도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시체가 또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걸 확인 한 후에는 오히려 애정이 솟아올라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런 다나를 꼭 끌어안고 다짐하였다.
여자 때문에 사제직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 또한 이해될 수 있다면 그렇게 되리라.
하지만 그럴 순 없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 이해될리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10: 영광의 탈출
시들지 않는 아름다움을 손에 넣은 나는 안과 밖에서 서로 다른 삶을 살아야했다. 안과 밖이 일관되어있었던 과거에는 어려울 것이 없었다. 나는 나 자신을 세상에 보이면 되는 것이었고, 그 것만으로도 인정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변했다. 나의 사생활은 결코 인정받을 수 없는 것이었으며, 그 것을 숨기며 사람들을 대해야했다. 밖에서의 파울 한은 꾸준히 존경받고 있는 신부였으며 작은 교회에 신도 수백 명이 모이게 한 기적의 산 증인이었으며, 불의 혀를 가진 사도 바울의 화신이었다. 그러나 안에서의 파울 한은 어떠한가? 여자를 탐하였으며, 사람을 죽였고, 시체를 숨기고 살아가는 잔혹한 살인마에 지나지 않았다.
정말로 이래도 되는 것인가? 싶은 한편, 이러고도 아직 아무 일도 없는 걸 보니 지금까지 나 자신이 지나치게 순진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모두들 겉으로 보기에는 이상이 없이 살아가고 있었고, 나 역시 그 것이 가능했다. 그렇다면 그들도 집에 가면 자신에게 부끄러운 일들이 한두가지 정도는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어쩌면 다들 집에 시체 하나씩 숨겨 놓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 이었다. 들키지만 않으면 안에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겉으로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생각을 고쳐먹기 시작하자 세상의 모든 것이 불미스러워보였다. 교회에 나오는 부부가 손을 꼭 잡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옷 안에 피멍이 들어있지 않을까? 집안에서 아내를 학대한다고 하더라도 교회에 나온다면 알아챌 길이 없지 않은가? 누군가는 집에서 자신의 자식을 탐하고 있을지도 모르며, 다정해 보이는 친구 사이는 동성 간의 금지된 사랑을 이루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홀로 교회를 찾는 사람들은 집안에 들어가면 포르노 잡지가 산더미같이 쌓여있어 매일 매일을 자위로 보낼지도 모른다.
부덕한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면 구원받는다는 말에 꾸역꾸역 더러운 몸을 이끌고 나오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들의 더러운 사생활에 대해서는 단편적으로는 알고 있다. 그들이 고해성사로 내게 고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것이 과연 전부일까? 내가 주님을 버리고, 다나를 죽이고, 그녀의 몸을 탐한 사실을 어느 교회의 신부에게 고해할 거라고 생각하는가? 바로 엊그제의 나였다면 그랬을지 모르겠지만 이미 신성을 잃은 내게는 그런 거리낌같은 게 없다.
내가 따라야할 가장 최고의 선(善)이 성직에서 다나의 아름다움으로 옮겨간 후로는 무엇이든 그녀의 아름다움을 내가 간직하는 게 최선이었고 그 다음에야 모든 일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내가 성령을 잃은 상태에서도 성직을 계속 해나가는 이유도 다나의 아름다움을 유지 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온갖 잡스러운 생각을 머릿속에 담으면서도 마치 독실한 신부의 역할을 하기 위해 그날도 성실히 교회의 본당을 청소하였다. 누군가가 찾아올 때 신부가 교회를 지키고 있지 않다면 분명 내 생활의 변화가 있음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렇게 바닥을 열심히 청소를 하면서 내 몸 안에는 성령이 차오름이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는 것이 귀찮고 힘들었다. 불필요한 노동을 하는 것만 같았고 그 어떠한 보람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다나의 얼굴을 한번 더 보고 싶을 뿐이었다.
대걸레를 놓고 잠시 쉬고 있을 무렵 트라움 성당에 마이어 씨가 찾아왔다. 주님의 집에 들어온 그는 모자를 벗고 내 앞에 정중히 서서 ‘신부님’하고 불렀기에 쉬고 있던 몸을 일으켜야만 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 이 뻔뻔한 종자야! 다나가 죽었으니 그녀의 일을 물으러 온 것이 아닌가?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그를 속여야만 했다.
“사실 저희 다나가 그제 밤부터 보이지가 않습니다. 혹시나 교회에 있을까 해서요.”
“아… 그러시군요. 그제 밤에 다나가 교회에 오기는 했습니다만. 고해성사 후 그녀의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어디까지 거짓으로 꾸며야하는지 머릿속은 복잡하였으나 답변은 마치 설교할 때 그러하듯 바른 대답이 나왔다. 그 것이 바르다는 것은 내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뒤늦게 그 대답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니 유리한 대답이라는 것이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신부님께 볼일이 있다고 나간 이후로 보이질 않으니 걱정이 되어 죽겠습니다.”
“혹시 복지시설에는 전화를 해보셨습니까?”
“네, 해보았지요. 다나가 돌아가지 않았답니다. 경찰에 신고도 해보았는데 아직도 소식이 없습니다. 아무 일 없으면 좋으련만.”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난 두 달간 잘 지내오시지 않았습니까?”
그 순간 머릿속으로 정신이 퍼뜩 들었다. 마이어 씨가 처음 젊은 여자 아이를 데려왔을 때 나는 마이어 씨가 다나를 부정한 생각으로 데려온 게 아닌가 하고 의심했더랬다. 혹시 설마 정말로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다나는 내게 도움을 청하러 왔던 게 아니었을까? 전혀 근거 없는 망상에 불과하였으나 내가 다나에게 한 짓도 다른 사람들의 머릿속에서는 ‘망상’으로 밖에 의식되지 않을 일이었다.
“네… 하지만 걱정이 되어 죽겠습니다. 혹시 못된 놈들한테 잡혀간 건 아닌지….”
“주님이 지켜주실 겁니다.”
“네… 그럼 가보겠습니다.”
그렇게 돌아가는 마이어 씨의 뒷모습이 정말로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정말로 슬퍼하는 모습이었다. 그런 그에게 ‘다나의 육신만이라도 다시 볼 수 있으면 보시겠습니까?’하고 물어보고 싶었다. 다나의 생명은 꺼지고 없지만 다나의 아름다움은 여전히 이 세상에 존재하였다. 모든 것을 잃는 것보다는 절반이라도 건지는 게 더 낫고, 사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절반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것과 같았다. 그녀의 아름다움을 접하기 전의 나의 세상은 어떠했는가? 나 자신의 도덕성을 지키기 위해 그녀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했다. 진정 신이 이 세상을 위해 만든 덕목을 무시해야만 했다. 그녀의 육신은 나의 무지를 깨우쳐주었고 새로운 방식의 찬양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 것을 사람들에게 일러줄 수 없었다. 그들에게 일러주게 된다면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모세가 새로운 진정한 주님을 모신다고 하였을 때 그와 그의 민족들은 이집트를 떠나야만 했다. 그 당시, 그 세상의 법이 그들의 찬양을 금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대상이 왕의 양자가 아니라 이름없는 한명의 사나이였다면 영광스러운 탈출은 커녕 싸늘한 시신이 되어 뜨거운 사막 위에 나뒹굴고 말았을 것이다. 그의 영혼은 또한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애굽을 떠나지 아니하면 유대인의 땅도 없을 것이며 그리하면 다윗에서부터 이어지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혈통도 없을테니 모세는 주님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없는 것이다.
나 역시 그러하다. 나는 그 무엇보다 큰 덕을 얻었으나 그 것이 이 무지한 자들에게 밝혀지면 나는 어찌 되겠는가? 주님이 굽어 살피셔서 사람들에게 이 뜻을 일러주고 내가 더더욱 고귀해질 거라고 생각하는가? 마치 모세가 그러했듯이?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주님이 내게 열어주신 길은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니었다. 평생 숨어살게 내게 벌을 내려주신 것이다. 그 정도는 분별할 수 있다. 나는 죄를 지은 악인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이 세상 무엇보다 고결한 미의 결정을 보고만 것이다. 주님은 내게 다나를 내려 주셨을 뿐이었다. 고귀함은 주시지 않았다.
더 이상 기도같은 걸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원리에서 어긋난 내가 다시 그 분의 자식이기를 청한다면 그 것은 또 하나의 교만함이 아닌가? 아니 어쩌면 그분을 욕되게 하는 일일 것이다. 그 누구도 알 수 없지만 나와 주님은 알고 계신다. 그분의 이름을 팔아 세상 사람을 속일 수는 있지만 그분의 이름을 팔아 나와 그분을 속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 계시를 듣고 싶어서 주님의 십자가 앞에 무릎 꿇었다.
“전 이제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게 생겼는데 주님의 길을 따를 수 없습니다. 이대로 타락해야 합니까?”
그러나 주님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어떠한 성경 구절을 통해서도 답을 알아낼 수 없었다. 마치 바보가 된 듯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렸다. 대신 기도를 하기 위해 눈을 감는 순간에도 창백한 얼굴의 다나가 떠올랐다. 그녀의 메마른 입술을 촉촉하게 적셔주고 싶었다.
교회에서 보내는 시간이 너무 흐르지 않았다. 마치 일을 하는 기분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신부가 교회에 머무는 것은 업무라고 할 수 있었지만 그 것은 주님과 함께 하는 일이었기에 오히려 생활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제는 이것이 고통스러운 노동으로 여겨졌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따로 있었다. 다나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그녀의 아름다움을 보존하며, 그녀의 아름다움을 손에 쥐어야 했다. 나의 것 나만의 것, 남에게 빼앗길 수 없는 것이었다.
내가 그토록 주님을 실망시켰다고 하더라도 주님은 엄연히 이 세상에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어떠한 형태로든 답변을 주신다. 답이 오지 않는다고 생각한 주님의 답변은 꽤 늦은 시간에 내려왔다. 아마도 주님도 고민을 많이 하셨나보다.
“실례합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 파란 하늘이 붉어지고 그만큼 그림자도 길어진 시간에 본당 입구에서부터 길고 긴 그림자를 늘이며 한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긴 코트에 챙이 달린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그가 이런 옷을 입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가 풍겨내는 이미지는 숨길 수 없었다. 그는 마치 장발장에 나오는 자베르 형사와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어 지극히 우익적이며 원리주의자에 국가에 충실한 사람이라고 생각되었다. 그의 걸음걸이 하나하나에도 제식이 느껴졌으며 굳이 숨길 법한 경찰 배지가 걸을 때마다 펄럭이는 코트 속에서 모습을 살짝 보였다. 그는 경찰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어떻게 오셨습니까?”
그가 교회에 기도를 하러 오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에게 신앙이 없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으나 그가 여기에 기도를 하러왔다고 보기에는 자신감이 지나쳐있었다. 그는 자신을 숙이고 들어오지 않았다. 오히려 무언가를 요구하러 들어온 듯 했다. 이것이 만약 주님의 계시라면 ‘이제 나를 버리시려나보다’ 하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를 바라볼 때에는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최대한 자애로운 표정을 지어보이기로 했다.
“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경 요나스 경위입니다.”
“경찰이시군요.”
“아아…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해야할지 모르겠네요.”
분명히 들어오기 전부터 내게 물어볼 이야기를 떠올리고 들어왔을 그였다. 그의 걸음걸이가 당차고 힘이 있었으므로 그가 말하는데 뜸을 들이는 것은 오히려 수상했다. 하지만 그는 주위를 한번 훑어보고는 다시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며 결심했다는 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교회 신자 중에 다나 크라우스라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아 다나에 대한 것이었다. 그럴 줄 알았다. 경찰에 신고했다고 했으니 이제 경찰들이 조사를 할 차례였다. 도대체 그가 무엇을 물어볼 것인가? 나는 무엇을 어떻게 대답해야할 것인가? 한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으나 정작 대답을 할 때에는 생각보다 말이 먼저 나왔다.
“네, 저희 교회에 다니는 아이입니다.”
만약 내가 생각을 하면서 말을 했다면 그 대답을 과거형으로 할 뻔했다. 그녀는 더 이상 교회를 다닐 수 없는 몸이란 걸 나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능숙한 거짓말쟁이의 혀는 필요한 만큼 진실에 거짓을 풀어나갔다.
“이 아이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입니까?”
“엊그제 영세 받은 날 밤에 고해성사 하러 왔었습니다.”
“그렇군요. 혹시 다나 양이 실종된 건 알고 계십니까?”
“네, 오전 중에 마이어 씨가 다녀가셨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그 아이는 성실하게 교회에 나오는 아이입니다. 어떻게든 타락할 아이가 아니예요.”
“네 저희도 그러길 바랍니다만….”
그는 말끝을 흐리며 내게 사진을 한 장 보여주었다. 다나가 마이어 씨에게 오기 전의 사진인 듯 싶었다. 그녀는 아름다운 모습이었으나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있었다. 양말을 신지 않은 새하얀 운동화 위의 발목에서부터 주욱 이어진 희고 긴 다리는 무릎에서 구부러져있었고 그녀의 짧은 반바지로 그 다리가 끝나 있었다. 배를 훤히 드러낸 상의에 몸에 달라붙는 검고 찢어진 티셔츠 위로 가슴 위를 겨우 덮을 법한 청재킷으로 마무리 되어 있는 젊은이들의 패션이었다. 그리고 그런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청소년들 여럿이 그녀 곁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는 사진이었다.
“하지만 사람은 어찌될지 모르는 일이지요.”
“이것은 과거의 일입니다. 영세를 받고자 한 이후로는 한 번도 교회를 빠진 적이 없는 성실한 아이입니다.”
“그 사진이 무슨 문제라도 됩니까?”
나의 반응에 그는 오히려 내게 질문을 하였다. 그녀의 노출이 심한 모습은 내게는 죄악이었으나 세속의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걸 깜빡 잊고 있었다.
“아니요… 제가 모르는 다나의 모습이라 낯설어서 흥분했나봅니다.”
“뭐 그럴 만도 하지요. 젊고 풍만하고 싱싱한 여자 아이니까요.”
“형사님, 교회입니다.”
강경하게 그러나 조용하게 그에게 상기시켜주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미안함을 표시해주었다.
“사실 실종 신고는 어제부터 들어와 있었습니다. 조금 기다려보라고 했지만 마이어 씨가 하도 전화를 해대서 아침부터 여러 가지로 바빴습니다. 이렇게 이쁜 아이가 사라졌는데 걱정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게다가 요즘 세상이 많이 흉흉하지 않습니까?”
그는 내게 동의를 원하는 듯 싶었다. 그 말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감이었다. 지금의 세상은 타락해 있다. 그리고 가장 타락한 사람이 누구인지도 알고 있다. 바로 나
“그래서 저희도 할 수 있는데까지 조사를 해보았습니다. 보육원에도 연락을 넣어보고, 다나를 아는 친구들도 조사해보았지요. 그 중 몇몇은 벌써 좀도둑으로 붙들려 형을 살고 있는 아이들도 있었고, 몇몇은 주거없이 살아가더군요. 찾는데 애도 먹고 그랬습니다. 그 걸로도 부족한 것같아서 공공시설마다 그녀의 사진을 돌려보았습니다. 제가 기억력이 좋은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다나의 얼굴을 보고 뒤를 돌아다보지 않을 남자는 없을 거라고 확신하거든요.”
그녀는 눈썹을 치켜 올리며 이번에도 동의를 구하고 있었다. 그 말에 대해서도 전적으로 동감이었다.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쥐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도 알고 있다. 바로 나
“그런데 없었어요. 이 세상 어디에도 다나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곳이 없단 말입니다. 사건이 시작부터 미궁에 빠질 것 같습니다.”
“금방 돌아오길 바랍니다. 주님의 품으로.”
“불안한 소리 하지 마세요. 주님의 품이 아니라 마이어 씨의 품으로 돌아가야지요.”
“그 게 그렇군요.”
한순간 마이어 씨와 다나의 부당한 관계를 상상했던 내게는 조금 불쾌한 말이었다. 그 늙은이와 다나의 숨결 거칠어지는 행위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그녀와 사랑을 나눈 나 자신마저 더러워지는 듯 했다.
“다나가 남긴 증거라고는 이 일기장 하나 뿐이었습니다.”
그는 일기장의 마지막 페이지를 열어서 내게 건네주었다. 그 안에는 내 이름이 여러번 쓰여있었다. 도대체 이게… 글씨를 읽어 내려가자 무슨 일인지 알 것같았다.
“사라지기 마지막 일기였습니다. 사랑에 빠진 소녀의 기분이 느껴지지요.”
“…… 오 이런… 당황스럽네요.”
그녀의 일기 내용은 지극히 단순했다. 일기장에 내 이름이 한번 나올 때마다 ‘좋다’라는 단어가 두 번 세 번 나오곤 하였다.
‘파울 신부님께 오늘 영세를 받아서 기분이 좋다. 이름은 에스더로 하였는데 신부님께서 머리 위에 손을 올려주셨을 때 느낌이 좋았다. 영성체를 받을 때 손에 입술이 살짝 닿았는데 손가락을 혀로 핥고 싶었다. 파울 신부님이 너무 좋다. 그분께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좋은 건 좋은 건데 파울 신부님은 왜 신부님일까? 가슴이 너무 아프다. 그분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하고 싶다. 가톨릭 신자가 되었으니 이제 그분을 만나러 갈 핑곗거리는 갖춰줬는데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할까. 파울 신부님이 보고 싶다. 아아 너무 보고 싶다. 고해성사 받으러 간다고 하고 찾아갈까? 시간이 너무 늦지 않았을까? 아니 더 늦기 전에 갔다와야지.’
그녀는 그렇게 마지막 일기를 써 놓고 내게 왔던 것이다. 그녀는 사랑에 빠진 여인이었고, 그래서 그녀는 내게 시선을 계속 준 것이었다. 그녀에게 처음부터 악마따윈 없었다. 그저 순진하기 그지없는 건 내가 아니라 바로 그녀였던 것이다.
“교회에 나간다는 일기를 쓴 게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럼 제가 가장 의심스럽겠군요. 제가 뭘 어떻게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글세요. 신의 집을 제 멋대로 휘저을 수는 없죠. 그리고 신부님을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이 일기장에 의하면 다나가 집을 떠날 거라고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분명히 어딘가에 납치당하거나 살해당했을 것 같습니다.”
“형사님!”
내가 큰소리로 그를 윽박지르자 그는 고개를 가로로 저으며 말을 수정하였다.
“죄송합니다. 요즘 세상이 흉흉하고 제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험한 말이 나왔군요. 물론 잠시 어딘가 나갔다가 돌아오는 게 늦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이란 게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길거리에서 전혀 봤다는 사람도 없고 말이죠. 그래서 한 가지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뭡니까?”
“혹시라도 앞으로 얼굴에 상처 난 사람이 온다면 저희에게 연락 주십시오.”
“얼굴에 상처요?”
“음… 그냥 간단한 심리법칙입니다. 다나가 단순히 집을 나갔을 가능성이 희박한 만큼 납치 당하거나 살해 당했을텐데 그 경우 피해자는 저항하기 마련이지요. 손톱이 긴 여자들이 무슨 수로 저항하겠습니까? 손톱으로 얼굴을 할퀴는 거죠.”
그는 그렇게 말하며 손톱을 세워 허공을 할퀴었다. 나는 그가 말하는 대로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요나스 경위는 정중하게 두 손을 모아 기도하듯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돌아섰다.
“아, 형사님?”
“네?”
그가 돌아가는 길에 그가 잊은 것이 있어서 그를 멈춰 세웠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무엇을 잊었는지 모르는 듯 돌아다보며 말꼬리를 올렸다. 내 손에 아직 다나의 일기장이 들려져 있는 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이 일기장… 가져 가셔야하는 거 아닙니까?”
“글세요. 제가 보기에는 그 건 신부님께 더 필요한 게 아니겠습니까?”
“이것이요?”
“신부님을 향한 다나의 사랑의 시구입니다. 당신의 것이지요. 만약에 다나를 찾게 된다면 그녀에게 돌려주십시오. 원래는 그녀 것이니까요.”
“하지만 이 건 증거물 아닙니까?”
“신부님을 불리하게 할 증거물이지요.”
“……. 그렇군요.”
그 때 알 수 있었다. 그는 날 의심하지 않았다. 비록 이 안의 내용이 그녀와 마지막에 만난 사람이 나라고 기술하고 있더라도 그는 나를 믿고 있었다. 그리고 나를 믿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니 그 것은 그가 했던 말 사이에 끼어있었다.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저항을 했다면 가해자의 얼굴에 상처가 남아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했던 능숙한 거짓말 역시 그의 신뢰를 얻어내었다. 다나는 내게 고해성사를 하러 오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아침부터 꾸며냈던 나의 거짓말이 이 일기장에 기술되어 있었던 것이다. 만약 내가 그녀를 못 봤다고 했거나 왔다가 그냥 갔다고 하여 고해성사에 대해 석연찮은 반응을 보였다면 그는 여전히 나를 의심했을 것이다.
아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불의 혀가 이렇게 거짓말을 하는데 쓰여졌다. 매우 능숙하게 말이 나오는 것이 마치 신도들에게 설교 할 때와 마찬가지로 한치의 거스름없이 술술 새어나왔다. 그리고 이토록 훌륭하게 경찰의 마음을 돌려놓고 말았다.
나의 불의 혀에 대한 신뢰가 생기는 한편, 그 동안 이것이 주님의 뜻을 행하는 내게 주어진 천부적인 능력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이것이 이토록 진실을 가리고 상대를 속이는데에도 훌륭히 쓰임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 동안 내가 해왔던 주님에 대한 믿음이 사실은 진실된 것이 아니라는 걸까? 그 동안 내가 사람들에게 설교했던 것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현혹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일까?
지금 나의 말에 현혹되어 돌아가는 형사를 바라보는 것은 심히 혼란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에 남긴 말도 나를 혼란케 하였다.
“물론 신부님을 잠시나마 의심했습니다. 하지만 형사 생활을 오래하다보면, 그 사람이 진실을 말하는지 거짓을 말하는지 한눈에 알 수 있거든요. 제 눈에 의하면 신부님은 정말 좋으신 분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그럼 주님의 은총이 있기를.”
마음에도 없는 그 말을 그에게 넘겨줄 정도로 나는 나쁜 사람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나의 길이 정해졌다. 경찰이 이 주위에 내깔리게 되면 결국 어느 곳에서도 다나의 흔적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당연히 내 방에서 나오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모든 곳을 뒤진 후 오직 한군데. 내 방만 뒤지지 않았을 때 그들의 판단은 어떻게 될 것인가? 시간이 얼마나 남아있는지는 몰라도 시간이 가면 갈수록 불리해질 것이다. 그들은 결국 내 방의 문을 열고 다나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찬양하겠지 그녀의 아름다움은 완벽하니까. 하지만 그 것과 별개로 내게서 그 아름다움을 뺏어갈 것이다. 나를 차고 어두운 나락에 떨어뜨려놓을 것이며, 그녀의 아름다움 역시 차디찬 땅속으로 들어가 썩어 문들어질 것이다.
그렇게 내버려둘 수 없다. 그렇게… 내버려 둘 수 없다.
내 방으로 돌아왔을 때 이미 마음이 정해져 있었다. 이 마을을 떠나야겠다. 이 안에서 지금까지 내가 쌓아 올린 것들이 언젠가 내게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성직자로서의 나의 인생은 엊그제 이미 끝났다. 지금에 와서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은…
아아, 침대 위에 잠들 듯 누워있는 다나의 모습이 보였다. 아름답다. 정말로 아름답다. 하지만 그녀의 두 주먹이 꼭 쥐어져 있는 게 계속 걸리던 차였다. 나는 그녀가 나를 때리려고 두 주먹을 꼭 쥐었다고만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이 너무 괴롭고 분해서 손바닥에 피가 날 때까지 주먹을 쥐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진실을 알아내었다. 그녀는 자신이 내 얼굴에 상처를 낼까 걱정하였던 것이다.
아아… 그녀는 내게 죽임을 당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녀는 각오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자신이 저항하면 내게 해가 될까 봐 죽어가는 순간에도 이렇게 주먹을 꼭 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를 죽였다는 죄책감이 밀려오는 한편 그런 그녀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꼭 쥔 주먹을 천천히 천천히 펼쳐 보였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딱딱하게 굳어서 주먹을 펼 수 없었는데 지금은 손이 살살살 펼쳐졌다. 그녀의 손바닥의 상처를 혀로 핥았다. 그리고 그 손을 매 만지며 그녀의 머리를 쓸어 올렸다.
“미안해… 고마워… 이제 힘들지 않을거야. 우리 함께 여길 떠나자.”
그녀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고 준비를 시작하였다. 일단 국경을 넘어갈테니까 여권을 준비하고, 사제 신분증은 앞으로 많은 의심으로부터 나를 구해줄 것이다. 그간 모아 놓은 성금을 모아보았다. 성금함에 들어있다가 매달 수도원으로 보내지는 돈이었으나 이번 달치는 아직 수도원에 보내지 않았고, 부활절 축일 덕분에 모인 금액은 상당히 많았다. 만 마르크는 족히 되었고. 사실 그보다 훨씬 많을 것 같았다. 그 것들을 어떻게든 가져가야 했지만 10 마르크 짜리 지폐들을 긁어가기에는 돈이 너무나도 많았다. 액수가 많은 게 아니라 부피가 상당히 컸다. 이 걸 모두 들고 갈 순 없는 노릇이라 그나마 액수가 큰 100 마르크짜리 지폐만 집어 보았다. 다들 돈을 많이 버는 사람들이 아니어서 그런지 100 마르크짜리 지폐는 스무장이 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안에서 단연 돋보이는 500 마르크짜리 지폐가 있었다. 가끔 들리는 사람 중에 돈 많은 부자가 있는 모양이었다. 대략 손에 쥐고 갈 수 있을 만큼 골라내자 그 액수가 약 3000 마르크 가량 되었다. 이 거라면 한동안은 문제없을 것이다. 하지만 넉넉하지는 않았다. 큰 가방이 필요했다.
옷장의 문을 열자 그 안에 여행용 가방이 보였다. 이 가방이라면 옷 틈사이 사이로 돈을 구겨 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옷을 가져 갈 필요가 있나? 돈이 있으면 모든 걸 사면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이곳을 떠날 준비를 하다가 문뜩 중요한 것을 잊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이곳을 떠나기 위해서는 다나를 데리고 가야했는데. 그녀는 시체다. 그녀를 데리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떻게 하면 이 여자를 눈에 띄지 않게 데리고 다닐 수 있을까? 그 때 열린 옷장에서 쿵하고 떨어지는 게 있었다. ‘아아… 저거다’ 라는 생각이 바로 드는 그런 물건이 내 앞에 계시처럼 떨어진 것이었다.
내 학생 시절 취미로 사용했던 콘트라베이스였다. 그 하드 케이스가 옷장에서 튀어나오자 그 크기를 대충 계산해보았다. 그리고 곧장 케이스의 지퍼를 열고 안에 들어있는 콘트라베이스를 꺼냈다. 이런… 근 3,4 년간 한번 켜보지 않은 악기이긴 했지만 그래도 아까웠다. 이게 쓰러지면서 안에 들어있던 콘트라베이스의 모가지가 부러진 것이다. 아아 이게 무슨 일이지. 콘트라베이스가 내 눈에 띈 것이 계시였다면, 이 모가지가 부러진 것도 계시일 것이다. 이게 무슨 의미란 말인가?
하지만 시간을 더 지체할 수 없었다. 어차피 여기에 버려질 콘트라베이스다. 케이스 안에 다나의 몸이 들어갈 수 있느냐가 관건이었다. 공간은 충분해 보이는데 과연 다나를 상하지 않고 넣을 수 있을까 의심스러웠다. 그리고 그러한 나의 근심은 그녀를 안아들고 케이스에 눕히면서 깨끗이 사라졌다. 다나는 마치 어머니 뱃속에 들어있는 아이처럼 편안하고 안정된 자세로 등을 구부리고 들어갔고 뚜껑을 닫는데에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아아… 오늘 밤은 혼자서 자야할 것같았다. 내일 아침 일찍 떠나야할테니 다나를 품고 잤다가는 새벽에 일어날 때부터 짐을 싸야할텐데 그 때 다나를 옮길 정도로 여유가 있을 것같지 않았다.
잠자기 전에 내 책상 위의 주님의 십자가가 누워있는 모습을 보았다. 전 여기를 떠날 것입니다. 다음에 오는 분은 저보다 더 좋은 사람이길 바랍니다. 그렇게 생각하며 십자가를 바로 세웠다. 하지만 기도는 하지 않았다. 내일 새벽 4 시 쯤에 일어날 생각으로 시계를 맞춰 놓았다. 어디로 가야할지는 정해놓지 않았다. 어디가 되었든간에 이 동네는 떠나야했다. 메트만 밖으로, 적어도 주경 밖으로… 될 수 있다면 국경 밖으로 떠나고 싶었다. 무엇이 되었든간에 쉬운 여행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마지막이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단지 내가 모르는 세상을 만나러 가는 것만큼은 확신하였다.
내일부턴 나도 도망자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자는 마음 편한 잠을 청했다.
11: 기차 여행
콘트라베이스를 옆에 끼고 한참을 걸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어두운 새벽별을 보며 인적드문 시골길을 계속 걸었다. 콘트라베이스의 케이스에는 다나의 시신이 들어있었으나 그녀는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무겁지 않았다. 하지만 머나먼 길이었다. 일단의 목적지는 네덜란드 국경이었다. 적어도 이 나라를 뜨면 그들도 관할이라는 게 있으니 쉽게 우리를 추적하지 못할 거란 생각이었다. 트라움 성당에 서부터 도심 반대쪽으로 이어져있는 시골길을 따라가면 거의 굽어지지 않은 길을 통해 60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네덜란드 국경이 있었다.
새벽의 찬 바람에 옷깃을 여매며 고르지 못한 시골길을 걷는 동안 몇 대의 자동차가 나를 지나쳐갔는지 모른다.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 차를 얻어타고 싶은 마음도 있었으나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 않아야 했기에 멀고 먼 거리를 걸어야만 했다.
그리고 마침내 국경에 도착하자 시골길 위로 철망이 바리케이트가 쳐져 있고 자그마한 초소 앞에 두 명의 군인들이 총을 매고 있었다. 국경수비대였다. 그들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근방은 넓은 벌판에 길이라고는 이 것 뿐이었으므로 오히려 숨어서 다니다가는 금새 발견되어 체포당하기 쉬웠다.
오히려 마음 단단히 먹고 침착하게 통과하는 게 더 쉬울 것같았다. 메트만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지만 국경 근처의 주민들은 생필품을 사기 위해서 국경을 넘나드는 일이 흔하다고 했다. 국경 수비대가 검문을 하고 있긴 했지만 그들도 일일이 총을 겨누고 있는 게 아니었고 초소에 들어앉아 담배를 태우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침착하게 수상해 보이지 않게 국경을 지나가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역시 국경 앞에 다가서자 초소 안의 군인들이 졸린 눈을 비비며 걸어나와 나를 멈춰세웠다.
“멈추시오.”
그는 내게 명령조로 말했다. 그 말에 일단 꼼짝없이 멈춰서야 했다. 그들이 내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너무 이른 시간이어서였을까? 그들은 피곤하고 초췌한 모습에 지금 당장이라도 늘어지게 하품을 할 것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어디가시오?”
“성 루드비히 대학에 초청강연을 가는 중입니다.”
“선생이오?”
“가톨릭 교회 신부입니다.”
“그렇습니까? 신분증과 통행권을 제시해주십시오.”
신부라는 말이 효과가 있는지 그의 말투는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하지만 내가 준비한 것은 여권 뿐이었다. 통행권이 따로 필요한지는 몰랐다.
“죄송합니다. 이른 시간에 움직이다보니 통행권을 챙겨 올 수 없었습니다. 여권으로는 대체할 수 없을까요?”
“흐음…”
그에게 여권과 사제 신분증을 보여주자 그는 고민하듯 코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지금 고민하고 있는 것이었다. 원칙적으로 되는 일이 아니기에 고민하는 것이며, 나를 돌려보내고 싶지 않았기에 고민하는 듯 했다.
“제가 늦어지면 학생들이 실망할 것입니다. 신실한 학생들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싶진 않습니다.”
“알았습니다. 알았어요. 대신 저희가 그냥 통과시켜줬다는 이야기는 하지 마십시오. 저희야 욕 들어 먹고 말겠지만 신부님은 벌금을 내셔야 할 겁니다.”
“감사합니다.”
그는 내게 신분증과 여권을 돌려주었다. 그 것을 받아들고 태연하게 국경을 넘어가려 했는데 갑자기 그가 나를 불러 세웠다.
“잠시만요. 그거 콘트라베이스 입니까?”
“아… 네.”
“아, 저도 친구들이랑 작은 오케스트라를 만들었습니다. 저도 콘트라베이스를 맡고 있었지요.”
그러며 그는 총을 세우고 그 걸 콘트라베이스 삼아 연주하는 시늉을 내어보였다. 이런 그가 콘트라베이스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 때 제가 구입했을 때 가격이 대략 1만 마르크 가량 되었을 겁니다. 미쳤죠 제대로 켤 줄 아는 것도 아닌데 덜커덕 반년 치 월급을 쏟아 부은 겁니다. 혹시 신부님 건 어디건가요?”
“바이에른의 수도원에서 선물 받은 것입니다.”
“아아~ 대단하시네요. 좀 볼 수 있을까요?”
“여기서는 좀….”
“괜찮습니다. 동호인끼린데 어떻습니까? 여기서 불편하시면 초소 안으로 들어가실까요?”
“제가 길이 바빠서요…”
이 케이스를 절대로 열어보여줄 수 없었다. 그 안에 콘트라베이스가 들어있진 않으니까… 그 안에는 내가 죽인 여성의 시신이 들어가 있을 뿐이었다. 열어줄 수 없다고 계속 거절하자 그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변하였다.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콘트라베이스 재킷에 달린 지퍼를 내렸다. 그러자 전면부가 보이며 콘트라베이스의 머리가 드러났다. 그 아래로 길게 이어진 핑거보드가 모습을 드러내자 그제서야 그는 한숨을 쉬었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큰 짐이다 보니 수색을 해야만 했습니다. 괜히 악기로 의심해서 미안합니다.”
그는 케이스 안의 물건이 콘트라베이스라는 걸 확인한 후에는 다시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지퍼를 반쯤 열었을 때 안에서 밀려 나오는 무게에 의해 지퍼의 나머지 반이 확 열려버렸다. 그리고 케이스 안에 숨겨두었던 다나의 몸뚱이가 쓰러지듯 떨어져 더러운 흙바 닥 위에 나동그라졌다. 그 모습을 본 국경수비대원은 내게 총을 겨누었다.
“이 살인마!”
탕!!!
때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
총소리와 같은 자명종 울리는 소리에 눈이 번쩍 뜨여졌다. 방금 전에 누가 내게 총을 쏘았기에 몸의 어딘가가 잘못된 게 없나 싶어 손으로 나 자신의 몸을 더듬어 보았으나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
꿈이었다. 이 모든 게 꿈이었다. 꿈이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그리고 내가 꾼 꿈이 이 것이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육로는 위험하다. 특히나 걸어가는 건 1:1로 검문을 받게 되니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하아… 방법을 만들어야 해.”
꿈에서 너무 시달렸는지 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주님이 내려주신 계시라고 생각하였다. 부러진 콘트라베이스의 모가지를 넣고 밑판부분에 다나를 넣은 덕분에 처음 살짝 지퍼를 내렸을 때엔 잘 넘어갈 수 있었다. 그렇다면 꿈에서처럼 콘트라베이스의 부러진 모가지를 넣어가면 언젠가는 쓸모가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케이스를 열고 모가지를 넣은 후 지퍼를 닫으면서 지퍼의 중간쯤을 바느질로 꿰매었다. 지퍼가 열리지 않게 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준비하는데만 한시간을 보냈다. 벌써 새벽 4 시… 해뜨기까지 3 시간 정도 남아있었다. 그리고 새벽 4 시는 내게 자그마한 영감을 주었다. 트라움 성당에서 가장 가까운 기차역이 바흔호프 역이었다. 그리고 4 시 반이면 첫차가 있다. 기차를 타고 여행을 떠난다면 국경을 넘을 때 승무원만 넘기면 될 일이다.
“다나, 이제 출발하자.”
출발하기 직전에 다나의 얼굴을 한번 더 보고 싶어 케이스의 지퍼를 내리려다가 중간에 바늘로 꿰매어 놓은 부분에서 지퍼가 더 이상 내려가지 않았다. 아, 방금 내가 열리지 않게 해 놓았지. 바로 코앞에 있는데도 다나의 얼굴을 볼 수 없다니 조금은 아이러니하게 생각되었다. 손에 넣고 있되 그 것을 맛 볼 수 없다…. 일종의 고문과도 같은 상황이었다.
무겁지 않은 콘트라베이스 케이스를 등에 짊어지고 방을 나섰다. 해가 뜨지 않은 어두운 시골길 위로 유난히 반짝이는 새벽별이 빛나고 있었다. 이른 봄의 차가운 새벽공기는 목구멍을 얼릴 정도로 매서웠으나 멀고 먼 길을 걸어야 하는 내게는 오히려 적당히 추운 게 앞으로 흘릴 땀을 식히기에 좋았다.
시체가 담긴 케이스를 등에 매고 주님께 올린 신자들의 돈을 훔쳐서 나는 한 큰 뜻을 품은 신부님의 꿈과 같았던 트라움 성당을 떠나고 있었다. 내 처음이자 마지막 사제 생활의 보금자리였던 이 성당을 떠나며 잠시간 마음을 가다듬었다. 내가 이것을 정말 버려야하는가? 대답은 쉽게 나왔다. ‘그렇다’ 다나를 잃는 것보다 나쁜 것은 없다. 나는 그녀를 지켜야한다. 그녀의 아름다움을 지켜야만 한다.
한 동안 신을 위해 사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였던 적이 있었다. 그런 고민을 안으면서도 이렇게 사제직을 계속 해왔던 것은 주님이 어떻게든 살아계시다는 걸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믿음에 항상 적절한 답변을 내려주시고는 하였다. 하지만 이제는 알 수 있었다. 그러한 주님의 실재함을 내게 일러주시기 위해 주님은 다나를 내게 보내준 것이었다. 주님이 보내준 이 여자의 아름다움을 땅 속에 묻혀 두 번 다시 세상에 드러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트라움에서부터 등을 돌렸다. 두 번 다시 돌아보지도 않았고, 신발의 먼지까지 깨끗이 털어내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나를 살인마로 밖에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그녀의 아름다움의 가치를 알고 있는 건 아마도 이 세상에 나 혼자 뿐이겠지.
새벽녘의 번화가는 네온등이 켜져 있어 밝았으나 한산한 건 마찬가지였다. 요란한 술집 앞에서 손님을 태우려고 대기하는 택시들이 많아 그 중 하나를 잡아타고 가까운 역으로 가자고 부탁하자 택시기사는 아무 말 없이 묵묵하게 운전해 나갔다.
지루함을 덜기 위해서라도 한마디 정도는 할 줄 알았으나 택시기사는 아무 말도 없이 운전을 했고, 그가 내게 말을 걸지 않으니 나 역시 마음 편히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였다.
이제 난 어떻게 해야할까? 일단 이 곳을 벗어나는 건 벗어난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다나와 살아가기 위한 방법을 모색해야했다. 아무도 찾지 않는 깊은 산골에서 단 둘이 살아가야할까? 그러다가 내가 아프거나 그녀가 상하게 되면 어떻게 해야할까? 문명과 너무 동떨어져 있는 것은 좋지 않을 것 같았다. 모든 것을 버릴 필요는 없다. 우리가 진보되어 더 편리해진 만큼은 혜택을 누려야한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는 사생활 보장이 철저한 편이 좋았다. 도망친다면 공산국가를 피하는 게 좋겠다.
머릿속에 망상의 세상이 펼쳐졌다. 시체가 되어버린 다나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상상이었다. 그녀에게 아름다운 옷을 입힐 것이다. 따뜻한 난로 앞에 놓인 의자에 그녀를 앉히고 아름다운 발에 힐을 신길 것이다. 길고 보드라운 나일론 스타킹 위로 레이스가 하늘거리는 흰 드레스를 입히고 머리를 정성스럽게 땋을 것이다. 비록 주님은 여자들이 아름답게 꾸미는 것을 금하였으나 그 것은 그녀의 의지가 아니므로 그녀의 순수한 아름다움에는 전혀 해가 되지 않는다.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죄악을 일삼는 것은 오직 살아있는 사람들의 욕망에 기인한 것이다. 그녀는 욕망도 없고 생명도 없다. 그녀의 아름다움이야 말로 가장 순수한 형태의 아름다움인 것이다.
하지만 이상적인 그러한 생각과는 달리 현실의 내 모습을 돌아다보면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은 깊게 느껴졌다. 이상 속에서의 나는 순수의 아름다움을 찾아낸 프로메테우스이나 현실의 나는 힘없는 여자를 간음하고 또한 살해하였으며 그 시신을 은닉하고 있는 흉악한 범죄자 이다. 그녀에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하지만 지금의 나는 흉악한 범죄자이며 동시에 실업자이다. 따뜻한 난로 앞의 의자에 앉히기 위해서는 아늑한 집이 있어야 하는데 나는 흉악한 범죄자이며 동시에 실업자이고 또한 홈리스이기도 하다.
꿈을 꾸기 위해서는 마땅한 댓가를 지불해야했다. 돈이 필요했다.
“도착했습니다. 20 마르크입니다.”
하지만 한동안 돈을 벌 방법이 없었다. 그저 지갑에서 나갈 일만 있었다. 지갑을 열어 지폐를 세다가 주머니의 5 마르크 동전 네 장을 꺼내어 택시기사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콘트라베이스 케이스를 등에 짊어지고 택시에서 내리자 하얀 페인트로 칠해진 낡고 허름한 목조 건물이 보였다. 바흔호프 역이었다. 변두리 시골역답게 대합실은 넓지 않았고, 난방도 되어 있지 않았다.
“테넨 행 기차는 몇 시에 들어옵니까?”
기차표 발매처에 대고 묻자 새벽에 출근하느라 아직 생기가 없는 여성이 투명 아크릴 너머에서 대답했다.
“5 분후 출발 합니다.”
아 시간을 제대로 맞춰서 온 모양이었다. 그녀에게 좌석권을 두장을 끊어달라고 하자 그 여자는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혼자 아니세요?”
“아, 이 게 자리를 차지해서요.”
등에 맨 콘트라베이스를 보여주자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냥 짐칸에 올려 놓으시면 되잖아요.”
“소중한 물건이라 걱정이 되네요.”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가로로 저으며 표 두 장을 끊어서 아크릴 너머의 구멍으로 밀어내었다.
“320 마르크입니다.”
“네 감사합니다.”
아아 순식간에 돈이 나가는구나 하지만 다나를 위한 자리도 하나 마련하는 게 도리에 맞다. 그들은 비록 이 것이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지만 나는 이 안에 사람이 들어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들에게 합당한 댓가를 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것이 다나에게도 옳을 것이다.
개찰구의 역무원에게 표를 보여주고 기차위에 올라타자 내가 앉을 자리의 번호를 금새 찾을 수 있었다. 이 기차를 타고 일단 뒤셀도르프로 빠져나간 후 국경을 넘어 테넨 쯤에서 내릴 생각이었다. 자동차를 타고 가면 200 킬로미터 남짓 밖에 되지 않는 거리였으나 기차를 타면 동쪽 방향으로 달려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다시 서쪽으로 쾰른을 거쳐 테넨까지 가는 길이었다. 이동거리도 두배 가량 길어지고 시간도 5 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였다.
무엇이 되었든 편안한 여행은 아니었다. 아침에 기차역까지 오느라 너무 피곤했다. 지금 시간이 5 시 20 분, 커다란 케이스를 등 에 매고 돌아다닌지도 한시간이 넘어갔고, 시체를 가지고 다닌다는 긴장감에 많이 피로했다. 등에 맨 짐을 내 좌석의 창가 쪽에 앉혀 놓은 후에야 겨우 안심이 되어 그 옆에 앉았다.
새벽의 기차는 아무도 없었고, 이제 이대로 국경을 넘어가는 일만 남았기에 부족한 수면을 앉은 채로 취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래도 혹시 걱정이 되어 악기 케이스의 어깨끈을 손목에 한번 휘어감은 채로 기차에 놓여 있는 탁자 위로 팔베개를 한 채 쓰러져 잠을 청했다.
앞으로의 일은 앞으로의 일이다. 벨기에에서 일단 집을 하나 구하고, 그 안에서 직업을 구해서 일을 하며 살아가면 될 일이었다. 진실의 댓가가 현실에서의 배척이라니, 하지만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불확실한 미래는 사람을 피로하게 하였으나 귀찮은 것은 한낱 도구에 불과한 내가 신경쓸 게 아니었다. 열심히 노력하기만 한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주님께서 길을 열어주실 것이다.
기차 안의 따뜻한 공기가 훈훈하게 차오르자 피로한 내 몸은 점점 공기에 녹아들어갔고 노곤함은 이내 곧 이른 봄의 춘곤증마냥 늘어지게 하품하게 하였다. 졸립다. 다시 눈을 떴을 때 테넨에 도착해 있으면 좋을 것같았다. 아니 그냥 이대로 자다가 깨어나면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은 에덴의 한켠에 자리를 마련하고 있었으면 좋겠다. 아니… 사실은 이 모든 것이 꿈이기를 바라고 있기도 했다. 그냥 눈을 뜨면 트라움 성당이고, 아침 미사에 또 다나가 참가하여 나를 바라보면 그 앞에서 벌벌 떨고 있는 파울 한 신부가 되어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나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지는 듯 하더니 이내 내가 숨을 쉬는지도 알 수 없게 되었을 무렵, 정신이 흐려지고 마침내 잠들어 버렸다.
12: 노부부
옅은 잠 속에서 주위의 수군거림을 들었다. 처음에는 그 것이 이 세상에 잔뜩 끼어 있는 잡음이라고 생각되었다. 마치 텔레비전 수신을 방해하는 노이즈와 다름없었다.
그 것은 엄연히 이 세상에 존재하지만 아무런 쓸모없고 누구 하나 관심 가지지 않으며 더 나아가 해석할 수 없는 연속성을 가진 파장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정신이 들고 집중을 하자 잡음은 점점 똑똑한 독일어로 변하여 내 귓가에 들어왔다.
“선생님 표 좀 보여주시죠?”
나를 흔들어 깨운 목소리는 승무원의 표 확인 절차였다. 테이블에 엎드려 앉아 잠들어 있던 나는 긴장된 몸을 일으켜 주머니에 꽂아 넣은 표 두 장을 꺼내 그에게 보여주었다. 내가 내민 표가 두 장이란 사실에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크게 신경쓰지 않고 다음 승객의 표를 확인하러 떠나갔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콘트라베이스였고 그 다음은 맞은 편의 노부부였다. 내가 잠들어 있는 동안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몰라도 건너편에 다른 손님이 오는 줄도 모르고 퍼질러 있었던 것이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자는 바람에…·”
테이블 위에 엎드려 자느라 내가 자리를 다 차지하여 맞은 편의 노인들은 테이블 위에 손도 올려놓지 못하고 있었다. 버릇없는 청년의 모습으로 비춰보일까 싶어 정중하게 사과하였으나 그 둘에게는 굳이 테이블 위로 손을 올릴 필요가 없었다. 그 두 분이 내게 보여준 손은 꼭 맞잡은 두 손이었고 그 손은 다시 테이블 아래로 내려가 마치 은밀히 교감을 나누는 젊잖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우린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오.”
노부인의 배려 있는 말에 감사를 표하기 위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매우 다정해 보였을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연인이기도 하였다. 머리가 하얗게 세었을지언정 남자 쪽은 아직 힘이 넘치는 듯 정력적인 모습이었고, 여자 쪽은 입술 화장을 곱게하여 나이를 잊으려는 모양새가 역력했다. 하지만 그런 아름다움 속에서도 옅은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
내 앞에서 그렇게 다정하게 손을 꼭 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둘은 한마디도 말을 나누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그 둘을 관찰하는 수 분 동안 두 내외는 대화 한번 없었고, 나 역시 그들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그들에게 말을 건네지 않는 이유는 당연히 내 속에 옳지 않은 것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숨기는 것이 많은 도망자였다. 그렇다면 그들이 이야기를 하지 않는 이유도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오전의 태양이 점점 높아져가는 따뜻함 속에 다정한 미소를 짓는 두 사람이었으나 그 것은 결국 따스한 느낌의 긴장감에 지나지 않았다. 이미 한번 호기심의 문을 열어버린 나였다. 내가 더 이상 지체할 이유는 없었다. -한번 그 것을 열었을 때 내가 무엇을 보았는지 기억해 냈다면 이런 바보같은 생각은 하지 않았을텐데-
“두 분은 어디로 가십니까?”
결국 호기심의 욕망에 넘어간 나는 건방진 젊은이에서 오지랖 넓은 젊은이를 연기하게 되었다. 그러자 노부인은 햇살만큼이나 따사로운 미소를 띠고 대답을 해주었다.
“목적지같은 건 없어요. 이렇게 가다가 마음에 드는 곳에 내려 관광하며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는 거랍니다. 그러는 젊은이는 어디로 가십니까?”
“네 저는…”
막상 내가 질문을 받게 되었을 때 이쪽도 마땅한 목적지가 없었던 터라 대답이 막혀버렸다. 하지만 그 동안 능숙하게 이어 나왔던 말솜씨는 당황한 나의 생각과는 달리 거짓말을 지어내기 시작했다.
“테넨으로 가는 길입니다. 중간에 성 루드비히 대학에 들러 강연을 할거고요.”
거짓말이었다. 그 것은 매우 능숙한 거짓이었다. 꿈에서 본 내용을 그대로 읊은 것에 불과한 그 대답은 매우 그럴 듯하게 들렸으나 나는 테넨으로 가는 것도 아니요, 강연을 할 예정도 아니었다.
“선생님이신가보오?”
“아니요. 사제입니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설교를 하곤 합니다.”
최대한 정중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하자 노부부는 의외라고 생각했는지 잠시 놀란 얼굴을 하였다. 하지만 이내 곧 두 사람의 표정은 평온을 되찾았다. 사제의 말은 신용할 수 있는 말이었고 의심할 수 없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그 것이 성직자의 지위였다.
“그러시군요. 신부님을 상대로는 숨길 게 없지요. 신부님의 지혜를 빌려주셨으면 해요.”
그러면서 노부인은 손목에 걸어 놓은 묵주를 보여주셨다. 그녀도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듯 했다. 하지만 당황스럽게도 그녀의 이야기는 고해성사로 시작되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아….”
갑자기 성호를 그으며 내게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그런 그녀의 믿음에 답해줄 수 없었다. 이 곳은 교회도 아니고, 우리가 주님 아래의 단 두 사람도 아닐뿐더러 무엇보다 내가 그녀의 고해성사를 진행할 수 있는 신분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여기서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지금 저는 여행을 떠나온 객이지 주님의 대리인이 아닙니다.”
“그렇군요. 하지만 이야기는 들어주실 수 있지요?”
“네…”
도대체 이 노부인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시작부터 나를 당황하게 하였다. 그것은 그녀가 비밀 이야기를 털어 놓을 것이며 그 것이 결코 제대로 된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알아챌 수 있는 단서이기도 했다.
“신부님이 보시기에 우리가 어떤 사람인 것같습니까?”
“아… 사이 좋은 부부 아니십니까?”
“사이 좋은 부부라…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네요. 그럼 신부님은 황혼 이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황혼 이혼이라, 요즘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노령화 사회의 문제 중 하나였다. 사람들의 수명이 길어짐에 따라 노인들의 사회적 활동이 잦아지고, 또한 젊은이들의 철없는 문제인 가정 해산의 문제 역시 노인들에게까지 번져 있는 것이었다. 좋게 보자면 노인들에게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지만 나쁘게 말하자면 나이 들어서 바람이 나는 것이다. 하지만 꼭 바람이 나서가 아닐 수도 있었다. 사랑으로 살아온 세월에서 사랑이 식었다는 이유만으로 결혼 생활을 끝낸다는 지극히 실용주의적인 생각일 수도 있다. 얼핏보면 낭만적으로 비춰질 수 있는 일이었다.
“개인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겠으나 사제로서는 반대하는 바입니다. 굳이 황혼 이혼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결혼은 주님 앞에 맹세하는 사회적 절차가 아닙니까? 이혼하는 사람들이 어떠한 절차로 결혼을 맹세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교회에서 결혼한 사람이라면 하객들과 신부, 그리고 주님 앞에서 결혼을 맹세하고 그 축복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한 결혼을 파기한다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신뢰는 물론 주님의 신뢰마저 배신하는 행위입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주님은 실수를 하시지 않지만 만약 사람들이 실수로 맺어진 경우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둘은 열렬히 사랑했으나 그 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니었고 진정한 사랑을 너무 늦게 찾았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모르겠다. 주님의 실수가 아니라 인간의 실수라면 응당 바로 잡음이 옳다. 하지만… 인간의 실수가 주님 앞의 약속을 어길 정도로 중요한 것일까? 그리고 인간의 실수를 주님이 과연 허용하실 것인가? 물론 이 세상에는 잘못된 결혼이 분명 존재한다. 그러한 불완전성을 주님이 인간에게 시련으로 내려준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하는 것인가?
“곤란한 질문을 하시는군요. 하지만 확실한 것은 주님과의 약속은 이행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약속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한 약속을 이행하시려면 최소한 우리도 주님의 약속을 지켜야하지 않을까요? 물론 이 세상에 참기 힘든 시련이 주님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 때마다 옳은 길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럼 이런 건 어떨까요? 주님은 항상 가장 낮은 사람으로 가장하여 오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가장 낡고 허름해 보이는 사람에게 극진히 대접을 했는데 그 뒤에 그보다 더 낡고 허름해 보이는 사람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 경우 저는 나중에 나타난 사람에게 무엇을 주어야 합니까? 아니면 제가 대접하던 사람에게 최선을 다 해야 합니까? 먼저 사람에게 준 것을 빼앗아 새로운 사람에게 주어야 하는 걸까요?”
아아 주님의 말씀을 패러독스로 해석하고 있었다. 그 이상의 답변은 글씨가 아닌 마음 속에 새겨져 있을텐데, 하지만 그러한 고민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이상과 현실이 충돌할 때 현실을 보완하기 위해 이상을 일그러뜨리는 경향이 있다. 그런 경우 어떻게 이 상황을 헤어나가는지는 알고 있다. 아래에서부터 위로 올라간 사람들에게는 다시 그 길을 돌이키게 만들면 된다.
“그렇다면 부인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부인의 마음 속의 답을 듣고 싶습니다.”
“… 그렇지요. 제 마음 속의 답은 역시 더 완전한 쪽을 따르는 것이랍니다.”
“주님도 그러기를 바라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것에 대해 이토록 고민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더 완전한 쪽을 따른다는 말에 확신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 것도 그렇군요. 사실 저희 부부는 곧 이혼할 예정이랍니다. 신부님이 보시기에는 우리가 정말 천벌 받을 사람으로 보이시겠지요. 이렇게 묵주를 가지고 다니면서도 이혼을 입에 올리는 걸 보면 저희가 싫어지실 수도 있겠어요. 하지만 서로 같이 산지 30 년이 넘어가고 더 이상 우리 사이에서 뜨거운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도 없으며, 아이를 키우는 일도 이제는 모두 마무리 되어 더 이상 함께 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답니다. 그 상황에서 우리 부부가 헤어지기로 마음먹은 일은 자연스러운 건 아닐까요? 사랑으로 이어진 관계에 그 의무가 모두 해소 되었고 사랑마저 식어버렸다면, 우리를 이어줄 것은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는 것같아요.”
“하지만 두 분은 지금 함께 여행을 떠나고 계신 거 아닙니까?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면서 어째서 유럽 전역에 걸친 여행을 하시는 겁니까?”
“그 건, 그렇네요. 우리가 살아온 세월이 너무나도 길었는데. 사랑 없이 너무 오랜 세월을 살아와서 서로에게 죄책감이 있었던 거예요. 젊어서 서로 고생만 하고, 한 번도 삶의 여유를 가진 적이 없다보니 자식 키우는 게 최고인 줄로만 알았지요. 그 동안 우리 자신을 위해 시간과 돈을 써본 적이 없다보니 이번 기회에 마지막으로 서로에게 아름다운 추억을 남겨주기로 하고 이렇게 여행을 떠나온 거랍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헤어짐은 슬프고 추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름다운 추억을 남겨준 후 서로에게서 떠나겠다니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잊고 있는 듯 했다.
“서로에게 아름다운 추억을 남겨주고 싶다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까? 주제넘게 제가 어떻게 참견할 일일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가톨릭 신자의 이혼은 긍정할 수 없는 입장인 걸 감안해주십시오. 제 상식으로 서로가 상대에게 노력하는 것은 사랑하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새로운 사랑을 찾을 수도 있고, 뜨거웠던 열정이 식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토록 마지막까지 사랑을 남겨왔다는 것은 그동안의 관계가 소원해졌다기보다는 서로 간의 입장을 너무 당연한 듯 생각해와서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던 게 아닐까요? 물론 새로운 사랑이 더욱 가깝고 애틋하게 와 닿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것이 먼저의 사랑보다 더 크나큰 사랑이 될 수 있을까요? 마지막을 이렇게 아름답게 장식해주고자 하는 사랑이야 말로 상대를 너무나도 사랑했기에 떠나보낼 수 있을 정도로 숭고한 게 아닐까요? 그리고 다시금 생각해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사랑을 떠나보낸 사람이 과연 새로운 사랑을 영원히 간직할 수 있을까요? 한번 결혼에 실패한 사람이 다음 결혼에도 실패하는 경우를 많이 봐왔습니다. 그 중에서도 부인의 예는 조금 이상합니다. 이혼의 이유가 서로에 대한 악감정이 실려있고, 서로를 힘들게 해서가 아니라 이렇듯 넘치는 사랑을 알아채지 못해서라니, 그렇다면 새로운 사랑을 찾았을 때에도 그 사랑이 익숙해지면 또 한 번 사랑을 떠나보내지 않을 거란 확신이 있으십니까?”
이야기가 설교처럼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러한 나의 이야기는 노부인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게 해주었다. 그녀는 나의 이야기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다정해 보이지만 실상으로는 위기감에 빠져 있는 부부를 하나 구한 것같아서 여전히 내가 성령의 축복을 받고 있구나 하고 생각되기도 하였다. 살인자에 도둑에 도망자이지만, 주님의 뜻을 설파하는데에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듯 했다.
“신부님의 말씀 잘 들었어요.”
한참을 달리던 기차는 어느새 뒤셀도르프 역에 다다랐고 두 부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부인은 흡족한 미소를 띄고 있었으나 남자 쪽은 여전히 한마디도 하지 않고 오히려 심기가 불편해진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이혼을 적극적으로 생각한 쪽은 남편 쪽이었던 모양이었다.
“여기서 내리십니까?”
“네, 성 안토니오 대학의 학생들은 정말 운이 좋네요. 이렇게 훌륭한 신부님의 강연을 듣게 되다니.”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좋은 여행이 되길 바래요.”
“저도 두 분이 이혼 하시는 걸 다시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욕심에 지나지 않았으나 노부인은 고개를 끄덕여서 답하였고 남편은 그런 노부인의 팔을 잡아당기듯 끌고 나갔다. 그리고 기차 칸에서 나서며 그 동안 꾹 다물고 있던 입을 열며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는 독일어가 아닌 프랑스어가 튀어나오고 있었다. 두 부부는 여러 나라를 돌아다닌다고 했으니 꼭 독일 사람일리는 없었지만 부인과 대화를 할 때 이야기가 너무 능숙해서 독일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건 나의 선입관인 모양이었다.
뒤셀도르프 역에 한참 정차해 있는 동안에 차창 너머로 사람들이 몰려드는 걸 볼 수 있었다. 무슨 일일까 싶어서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어 보았다. 하지만 내가 볼 수 있는 건 사람들의 뒤통수 뿐이었고, ‘총소리’라는 단어를 얼핏 들은 것같았다. 밖에서 총격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무서운 마음에 창밖으로 내민 머리를 집어넣고 대신 성호를 그어서 방금 기차에서 나간 노부부의 안전을 기도하였다. 하지만 정작 창 너머로 보인 들것에 실려가는 사람은 안타깝게도 방금 전까지 함께 앉아있던 노부부의 남편 쪽이었다.
“아아….”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알 방법이야 없었으나 갑자기 내 앞에 앉았던 사람들이 이러한 일을 당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지 않았다고 말할 순 없었다. 도망자로 다니는 내 앞에 어떠한 시련이 생길지 암시를 주는 게 아닐까? 내가 아무리 노력하여 하나의 가정을 지킨다고 하더라도 아주 간단한 외력만으로도 그 것이 무너질 수도 있었다. 그들에게 어떠한 사정이 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것이 무너지기 위해서는 단 한발의 총탄이면 충분했던 것이다.
여러 가지로 생각할 게 많은 사건이었고, 콘트라베이스 안의 다나에게도 끊임없이 신경을 써야 했지만 기차는 그러한 세상사의 고민거리와는 별개로 출발 시간에 맞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한 새로 들어온 승객들로 채워진 기차 안은 새로운 연인들 새로운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했고, 방금 전의 끔찍한 사건 사고는 그들의 잠시간의 가십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 조차도 오래가진 않았다.
“저기 실례합니다.”
그러던 중 한 젊은 연인이 또 내 앞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노부부 다음은 젊은 연인인가 싶어서 약간의 아이러니를 느꼈으나 세상은 모든 것이 연관되어 돌아가는 것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내게 자신의 표를 보여주었다.
“이 좌석이 저희 좌석인 것같은데요.”
“아… 그러십니까?”
나도 내 표를 꺼내서 확인해보았다 사실 확인할 것도 없었다. 첫차를 탔고 너무 피곤했던 터라 아무 자리나 골라 앉았기 때문이었다. 아아, 그 때 승무원이 나를 한번 쳐다본 이유가 이제야 알 것같았다. 작은 역에서의 첫차는 승객이 별로 없었으나 뒤셀도르프 역에 아침 시간의 기차는 서로 자리를 챙겨 앉아야 했다.
“죄송합니다.”
결국 나는 젊은 연인에게 사과를 하고 콘트라베이스를 등에 짊어지고 일어나야 했다. 방금전까지 내가 앉아있던 자리를 차지한 두 연인은 어느 새 서로에게 손길을 건네며 다정한 연인들이 그러하듯 얼굴을 더듬어갔다. 방금 전까지 맞은편에 앉아있던 노부부도 젊었을 적에는 저랬을 거라 생각하니 가슴 한켠이 뻥 뚫린 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것은 그 노부부에 대한 측은지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 등 뒤에 매달린 시신이 되어버린 여인, 다나와 나 역시 저런 시절을 가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자그마한 소망 혹은 망상 때문이었다. 정작 실상은 시체를 등에 짊어지고 끊어온 표의 번호를 확인하며 다음 칸으로 또 다음 칸으로 옮겨가는 신세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내 자리를 찾아서 앉았을 때.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방금 전까지 내 맞은편에 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던 노부인이 이번 내 자리의 맞은편에 앉아있고 그 옆에는 또 다른 남자가 앉아있었던 것이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서 멍하니 서 있는 통에 처음 보는 노인이 내게 말을 걸었다.
“사람이 들어차있는데 자리가 비어있어서 궁금했는데 이제야 자리 주인이 나타나셨구먼, 어서 앉으시오.”
그는 독일어를 똑똑히 구사하였다. 그의 말에 따라 일단 자리에 앉자 노부인은 얼굴이 굳어갔지만 남자 쪽은 싱글벙글 하였다.
“그래 젊은이는 어디로 가시나?”
“아, 네 저는 성 안토니오 대학에 강연을 하러 가는 길입니다.”
“선생인가?”
“아니요. 사제입니다.”
“아, 사제님이시군요. 저 또한 가톨릭 신도입니다. 제 이야기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
도대체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앞으로 내가 들을 이야기가 어떤 이야기인지는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저희 부부는 방금 전까지 매우 힘든 관계였답니다. 사실 황혼 이혼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더랬지요. 결혼이 주님 앞의 맹세라는 걸 생각하면 천벌을 받을 일이었으나 저는 제 아내의 뜻을 존중하기에 그녀에게 새로운 사랑이 생긴다면 고이 보내주려 생각하던 차였습니다. 하지만 젊어서 이이를 너무 고생 시킨 게 미안스러워서 마지막으로 제가 가진 전 재산을 털어서 마지막 여행을 떠나던 참이었지요. 그런데 갑자기 기적이 일어났지 뭡니까? 합의 아래에 이혼을 하기로 한 저희 부부였는데 아내가 마음을 돌렸습니다. 그 동안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저의 간절한 기도가 주님께 닿은 모양입니다. 사실 저는 아내 없으면 못사는 애처가라서 말입니다. 하하하하”
주접을 떠는 남편의 모습과는 달리 아내 쪽은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이야기들이 정리 되어갔다. 이 사람이 진짜 남편이라면… 그 남자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너무나도 다정해보였다. 그 것은 두 사람이 부부가 아닌 연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총소리, 그리고 쓰러진 그 남자, 남편에게 돌아간 노부인, 이야기를 하나로 종합하면 하나의 결과가 나왔다.
“부인, 어째서 그런 일을 하셨습니까?”
정중하게 그렇게 노부인에게 묻자 그녀는 남편의 눈치를 한번 보더니 내게 대답해주었다.
“신부님이 가르침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저는 제 남편을 선택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항상 일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주진 않더라고요. 그이는 저를 놓아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남편을 해하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 걸 빼앗아서 내 손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었어요.”
무서운 이야기였다. 아무 것도 모르고 아내가 돌아왔다고 좋아하는 이 늙은이는 하마터먼 죽을 뻔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이야기를 이해도 못하면서 듣고 있었다.
노부인은 남편에게 돌아가기 위해, 남편을 지키기 위해, 애인에게 총을 쏜 것이었다. 그리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렇게 자리에 앉아있었던 것이었다.
내가 다시 그녀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 사실을 알아챌 방법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치 운명이라고 밖에 표현 못할 우연은 계시처럼 다가와 내게 진실을 알려주었다.
“그렇게 하시고 이 세상을 편히 사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신부님만 조용히 하시면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저는 행복을 잡기 위해서 선택을 하였고, 그 길을 가르쳐주신 건 신부님이십니다.”
“하지만 그런 방법을 가르쳐준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손 치더라도 제 마음을 흔들어 놓은 것은 신부님이십니다. 제게 분명 죄는 있습니다만 그 것을 신부님이 판결 내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만약 신부님이 정 제게 돌을 던지시고 싶다면, 그리하십시오.”
당황스러웠다. 사람에게 총을 쏘고도 남편의 곁에 돌아온 행복을 놓지 않기 위해 스스로의 죄책감과 죄악감을 덮어버리고 정당화 시키다 못해 그 죄악을 타인에게 전가 시키려고 하기까지 했다. 여기까지 알게 되었다면 응당 그녀를 경찰에게 고해 바쳐야 했으나 나는 그러하지 못했다. 내가 그녀의 죄를 캐묻기 이전에 나 역시 죄악으로 물든 손을 가지고 있었다. 너희들 중 죄가 없는 자가 먼저 그녀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 하지만 나는 돌을 던질 수 없었다. 경찰을 부를 수 없었다.
그러한 나의 모습을 본 노부인은 내가 갈등하는 것을 보고는 오히려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여주었다.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부님이 원하는 대로 살아갈 순 없는 것입니다.”
아아아… 죄를 짓고도 저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주님과의 약속을 이행 중인 사람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나 역시 시체를 짊어지고 다니는 사람이었으니까.
13: 유리눈
네덜란드 루르몬트
열차로 네덜란드 국경을 넘을 때 여권을 내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무사히 국경 밖으로 넘어올 수 있었다. 무작정 국경을 넘는데까지는 성공했으나 앞으로의 일이 막막했다. 처음부터 예정을 가지고 떠나온 여정이 아니었으므로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었으나 바로 코 앞에 놓인 문제 만큼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비록 등에 시체가 들어있는 콘트라베이스를 매고 있으며 생전 처음 밟아보는 낯선 땅에 언어마저 색다른 공기 속에서도 쪼그라드는 듯한 시장기를 느끼고 있었다.
네덜란드의 소도시 루르몬트는 메트만에서 불과 60 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동네였으나 나라를 뛰어넘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식재료들이 많이 바뀌어져 있었다. 감자와 소시지 그리고 맥주 한잔으로 한끼니를 때웠던 때와는 달리 정작 네덜란드 땅에 도착하자 온갖 잡스러운 음식들이 늘어서 있었다. 익숙한 핫도그, 햄버거에서부터 고등어구이, 청어구이 등등의 생선 요리와 이국적인 동양 음식점도 여러 집 길게 늘어서 있었다.
국경을 넘어섰다는 안도감과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동시에 교차하였으나 그 것보다 음식 냄새를 맡을 때마다 내 안을 욕망으로 가득 채우는 허기가 더 가깝고 크게 느껴졌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으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도망자 인생을 새로 시작한 이방인인 내게 제대로 된 식당보다는 눈 앞에 놓여 있어 손이 가는 대로 먹어치울 수 있는 핫도그가 더욱 끌렸다.
솔직하게 말하겠다. 사실 귀찮았던 것이다. 내 눈에 가장 먼저 띤 음식이 핫도그가 아니라 치즈 덩어리였다면 바로 그 것을 먹었을 것이다. 내 배를 채울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 되었든간에 일단 입으로 넣었을 것이다. 내 몸에서 욕망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 것인지 시장기를 통해 깨달아갔다.
환전소에서 잔뜩 환전 해 놓은 돈으로 핫도그 하나를 사고는 터무니없이 많은 거스름돈을 받아 버려서 그 걸 주머니에 구겨 넣으며 딱딱한 빵 사이에 기다란 소시지 하나를 끼워받았다. 길거리 음식들이 보통 그러하듯 따로 먹을 곳이 없어 마치 노숙자와 다름없이 근처 벤치에 앉아서 입가에 머스터드를 묻혀가며 소시지를 베어 물었고, 옆에 놓인 커다란 콘트라베이스는 벤치 위에 눕혀 놓을 수 없어 세워둔 채였다.
아아, 이렇게 길거리 한 가운데에 앉아서 하얀 종이에 싸인 쓰레기같은 음식을 먹고 있는 신세라니, 사제 생활하면서는 생각조차 못한 일이었다. 내가 사제의 길을 포기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배고픔이 내게 욕망을 채우라고 재촉해서였을까? 뱃속에 음식이 들어가는 동안에야 겨우 ‘나는 사제였구나’하는 생각이 났고, 동시에 식사 전에 기도를 하지 않기로 했다는 다짐을 떠올렸다. 아마도 정확한 시간을 말하라고 한다면, 뱃속에 딱딱한 빵이 들어가고 목이 매어 마신 콜라 덕분에 뱃속의 빵조각이 부풀어 올라 더 이상 배가 고프지 않았을 때였을 것이다.
아니다. 나는 사제가 아니다. 나는 한명의 도망자이며, 살인범이다. 하지만 살인범은 이 사회에 살아갈 수 없으므로 사제의 신분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니다. 나는 사제가 아니다. 사제로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으므로 이렇게 도망자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사제도 아니고 도망자가 아닌 이방인으로 살아가야 한다.
도대체 어쩌란 말이야.
어쩌기는 내게 선택이 남아있을 리가 없다. 그저 살아갈 권리를 간신히 허락 받은 내가 할 일은 반드시 지켜야할 최고의 아름다움을 지키는 것 뿐이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내가 무엇을 해야할지 내가 살아가는 원동력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주님을 위해 살아가던 때에 내가 흔들릴 때면 주님이 나의 길을 바로 잡아주셨다. 지금은 주님의 뜻이 이 아름다운 여인의 육신을 통해 보여지고 있었다. 내게 있어 그녀는 신앙이요, 곧 종교였다.
내가 나 자신이 이 세상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하는지는 아는 게 없었으나, 그녀를 안락하고 편안하게 잘 보호하기 위해서 해야 할일은 금새 떠 올릴 수 있었다.
나는 그녀를 따뜻한 벽난로가 있는 방에 앉혀두고 아름답고 순결한 새 하얀 옷을 입힌 후 그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이 세상의 빛과 같은 그녀의 모습에 취해 살아갈 것이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바로 집 그리고 옷, 하지만 그 무엇보다 그 것이 결국은 돈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최고로 아름다운 가치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 사랑과 용기와 이성과 이념, 그리고 진리가 아닌 가장 더럽디 더러운 사람의 물욕의 상징인 돈, 그것도 돈다발이 아닌 손에 쥐이는 푼돈 쪼가리조차도 아쉬워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 아이러니 했다.
돈에 울고 돈에 웃고, 돈으로 사람을 내리 누르며, 돈을 쥐기 위해 더럽게 살아왔던 자들을 경멸했던 적도 있었다. 나 자신의 교만을 깨닫기 전의 일이었으나 얼마전까지도 그 것들은 이해할 대상이었지 긍정할 대상은 아니었다.
결국 아쉬워야 모든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작게는 배가 고팠을 때 내 위치를 잊고 사제인 척 기도를 하며 지저분한 빵조각을 꾸역꾸역 넘겨댔고, 크게는 내 손으로 아름다운 다나, 그녀를 죽인 후에야 그녀의 아름다움이 너무나도 눈부셨음을 알게 되었다.
정신을 차려야한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남은 빵조각을 더 먹으려다가 마음이 조급해진 나머지 먹던 빵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콘트라베이스를 등에 매자 행색이 남루한 옷차림의 부랑자가 내 곁을 지나쳐 가더니 방금 내가 버린 핫도그를 쓰레기통에서 주워 입에 밀어넣고 있었다.
아아… 내가 배가 덜 고팠구나. 주님이 내려주신 일용할 양식을 소중히 생각하지 않고 마구 버리다니, 그 것이 다나에 대한 걱정에서 나온 행동이라고 할지라도 저렇게 배가 고픈 사람이 있는 줄 알면 이렇게 사치스러운 행동을 하지 않았을텐데…
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내 시선을 느낀 부랑자는 나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며 ‘단크(고맙수)’하고 떠나는 걸 보니 생각이 또 복잡해졌다. 만약 내가 음식을 버리지 않았다면 저 거지는 도대체 어디서 끼니를 때웠을까?
이 세상이 하느님으로부터 설계된 것이라면 사실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하더라도 신이 원하시는 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타락을 하든 살인을 하든 세상은 어떻게든 돌아가게 되어 있다. 다만 그로 인해 불이익을 받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겠지.
어쨌든 당장에 필요한 것은 좁디좁은 콘트라베이스 케이스에 들어있는 다나를 위한 안락한 성전(聖殿)이 필요했다. 몸을 쉬일 집이 필요했다.
소도시의 자그마한 역을 지나쳐 시가지를 걸어 나가자 수많은 모텔들이 보였다. 이곳은 사람들이 자주 들락날락 거릴테니 나와 다나의 임시 거처로 맞지 않았다. 조금 더 도심으로 들어가자 사람이 점점 많아질 뿐만 아니라 여관비도 미묘하게 오르고는 했다. 단지 5 길더 더 비싼 방이라고 하더라도 일주일이면 35 길더 한 달이면 150 길더나 더 내야 했다. 여관방이 30 길더라고 친다면 35 길더 40 길더짜리 방을 한 달간 쓰기 위해 1200 길더를 내야했고 그 것은 곧 네덜란드 일용직 근무자의 한 달 월급과도 같았다.
주님을 찬양하는데 돈을 아끼는 자들을 야속해 했던 적도 있었다. 사후의 천국을 위해서라면 살아 생전의 재산같은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더 이상 세속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겠지. 결국은 사제 생활이 생각보다 부족할 것없는 풍요로운 생활이었던 것이었다. 항상 나보다 어려운 사람을 돌이켜보라는 가르침은 전혀 틀리지 않았다. 사제 생활이 고귀하지 않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으나 그 것이 풍요롭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풍요로운 생활을 탐하는 것이 죄악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나락에 떨어진 자. 살인자에 도망자로서 어떠한 거처와 안면도 없는 내게는 그 것조차 사치스럽기 그지없는 생활이었다.
번화가를 피해 가장 좁고, 더럽고, 외진 곳을 찾아보았다. 사람 한명이 간신히 들어갈 법한 골목을 지나고 간판없는 가게를 지나쳐 빛이 들지 않고 아무도 오지 않을 법한 낡은 여관을 찾아내었다.
여관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여관 주인은 담배를 뻑뻑 빨아대는 나이든 노인이었다. 장사가 될리 없는 터에 놓인 여관인터라 노인네는 힘이 없어보였고 사실 그가 입에 대고 있는 것도 담배가 아닌 듯 했다. 아마도 선입견이겠지만 네덜란드라고 하면 뒷골목에서 얼마든지 아편을 구할 수 있을 것같았다.
“안녕하십니까?”
아직 입에 제대로 익지 않은 네덜란드 말로 인사를 건네자 노인장은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다시 허공을 바라보았다. 내가 그에게 무슨 용건이 있든 신경쓰지 않는 듯했다. 이대로라면 정말로 방을 얻지 못할까 싶어서 그에게 원하는 것을 말하였다.
“묵을 방을 구하는데 얼마면 되나요?”
신학교에 있을 때 배운 네덜란드 어를 설교가 아닌 용도로 사용하려니 여간 어색한 게 아니었다. 모르는 단어를 독일어로 때워가며 물었으나 그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다만 다시 한번 손에 든 궐련을 입에 가져갈 뿐이었다.
“영감님! 담배는 몸에 해롭습니다. 그리고 찬 이슬을 맞고 자는 것도 몸에 해롭습니다. 저 좀 살려주십시오.”
그렇게 부탁하듯 말하며 손에 들린 담배를 빼앗아 들자 그제서야 그는 내게 시선을 주었다. 그의 시간을 방해한 내게 그는 어떠한 불만도 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말없이 그는 벽에 매달린 키 하나를 떼어서 내게 던져 주었다. 그 것은 마치 인질 교환이라도 되는 듯 열쇠를 받아듦과 동시에 그에게 담배를 건네주는 식이 되었다.
“숙박료는 어떻게 되죠?”
그러나 그는 대답이 없었다. 말하는 대신 담배 연기를 깊게 빨아들일 뿐이었다. 대답을 듣기는 틀렸나 싶어서 받아든 키에 쓰여있는 2 층 3 호로 올라가기로 마음먹었다. 콘트라베이스를 등에 짊어진 채 삐걱 거리는 계단을 올라가자 담배를 빨아대던 노인은 내게 잘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루에 10길더.”
그게 숙박료라는 걸 알아챈 나는 그와 흥정을 시작했다.
“오래 투숙할 겁니다. 한달이면 얼마죠?”
“하루에 10 길더. 한달에 300 길더.”
“장기 투숙이면 좀 저렴하게 해주셔야하지 않나요?”
“하루에 10 길더. 한달에 300 길더.”
그는 흥정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난 아니었다.
“한달에 200 길더요.”
역시나 그는 흥정할 생각이 없었다. 한달에 200 길더. 그 자리에서 지불하고 올라가자 그는 나를 더 이상 부르지 않았다.
그렇게 다시 삐걱거리는 계단을 올라갔다. 허름해 보이는 여관이었지만 그래도 한 때는 저 늙은이의 꿈과 희망을 살펴볼 수 있었다. 청소를 대충해서 바닥은 깨끗했지만 말라비틀어진 화초와 먼지 낀 괘종시계 그리고 검은 얼룩진 카펫의 모습에서 세월을 읽을 수 있었다. 이것들의 처음 모습은 어떠했을까? 푸르고 싱싱한 화초와 고급스런 원목의 재질이 빛나는 괘종시계 그리고 처음 깔았을 때 애지중지 아끼며 발자국이 남을 때마다 세척제를 뿌려대었을 법한 밝고 또한 붉은 카펫이었을 것이다. 걸을 때마다 나는 나무 삐걱거리는 소리 대신, 두터운 카펫 덕분에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헐거운 문고리 역시 처음에는 튼튼하게 고정된 새하얀 은빛을 내고 있었을 것이다.
문을 열고 들어간 여관방은 생각보다 상태가 안 좋았다. 아니 실내의 모습은 마음에 들었다. 낡고 오래된 침대, 있으나마나한 화장대, 그리고 채널이 나오지 않는 텔레비전, 그리고 앞의 커다란 건물에 꽉 막힌 풍경을 보여주는 넓은 창까지… 만약 이 창을 통해서 수십년전 루르몬트의 도심의 풍경이 보이고 동시에 떠오르는 아침 햇살을 받을 수 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지금처럼 초라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이 불가능해보이지만 않았다. 바로 이 창을 통해 보이는 쓸데없이 크기만 하고 화려한 앞모습과는 달리 쓰레기 더미를 쌓아둔 이중적인 상가 건물만 없었더라면, 이 여관도 생각보다 훨씬 아름다웠을 것이었다.
아마도 입구에서 담배만 뻑뻑 빨아대며 정신나간 좀비같은 여관 주인도 이 여관이 보여준 가능성만큼이나 깔끔한 사람, 하다 못해 지금보다는 훨씬 나은 사람이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눈에 보이는 대로이다. 그가 형편없는 만큼이나 여관도 형편없었다. 도시의 장관을 보여주고 태양빛을 받는 대신 건물에 가로 막혀 빛이라고는 전혀 들지 않고, 대신 상가에서 쌓아둔 쓰레기 더미를 바라봐야 했다. 그런 곳에 몸을 맡기게 되었다. 그런 곳에 다나를 모셔놓아야 했다.
“아, 다나.”
지금까지 좁아 빠진 콘트라베이스 안에서 마치 엄마 뱃속에 들어있는 태아와 같은 자세로 수시간을 버텨온 그녀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녀가 죽은 시체라는 게 다행스러웠다. 살아있는 상태로 그런 불편함을 감수했다면 아마 그 중간에 시체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일단 방문을 걸어 잠그고 다나의 안위를 살펴보았다. 그녀의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해 이러한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되었다. 그녀의 얼굴을 한번이라도 더 보아야 했고, 그녀의 아름다움에 한번이라도 더 젖어야만 했다. 그 것이 나 자신의 인간성을 무너뜨린다고 하더라도 거부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마치 아담이 먹은 선악과와도 같았다. 그 자체가 결코 용납되는 것이 아니었으나 그 자체만으로도 터무니없이 강한 매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로 인해 인간은 비로소 살아가는 지혜를 얻고, 그 지혜를 사랑하게 되었다.
나의 아름다운 선악과를 다시금 확인하기 위해 콘트라베이스의 지퍼를 열고 그 안의 덮개를 열었다. 세상에나 나의 아름다운 여인을 확인하기도 전에 방안을 가득 메우는 냄새에 코를 잡아야 했다. 아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에게 이런 썩은 냄새가 날줄은 정말 몰랐다.
“이게 도대체 뭐야!”
아 실패해버렸다. 이럴 수가 그녀의 죽음으로부터 아름다움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내가 했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과 몇 시간 만에 상상도 못할 모습을 보고 말았다. 그녀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이미 죽은 그녀에게 잘못이 있다면 도대체 그 것을 뭐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까? 붙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었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체였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였던 그녀는 기가 막힌 악취와 함께 세상에서 가장 흉한 모습이 되어 있었다.
전체적으로 본다면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콘트라베이스 케이스 안에서 다소 흔들리긴 했지만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생생한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그와 대조되는 추한 악마성은 그녀의 눈에서 드러났다. 눈이 마음의 창이라고 하였지만 그렇다면 지금 그녀의 마음은 파리 대왕 바알세불의 그 것과 같았다.
아름답고 순결한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다나의 시신은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이었으나 지독한 시체 냄새와 동시에 닫은 눈꺼풀 사이로 구더기가 기어 나오고 있었다.
자신이 가장 숭배하던 존재가 이토록 추한 모습을 보이고 있을 때 사람들은 어떠한 반응을 보여야 할까? 그 것으로부터 힘껏 도망치려 하는 것일까? 만약 그렇게 상대를 쉽게 저버릴 수 있다면 그 것은 숭배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좋아서 쫓아다니던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나는 다나를 사랑했으며, 또한 그녀의 아름다움을 숭배하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이 이렇게 엉망이 된 것에 대해 가슴어린 슬픔을 느끼고 있었다. 미안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그녀에게 사과하고 싶었으나 그녀는 죽은 시신일 뿐이었다. 이 슬픔, 그리고 미안한 마음을 어떻게 풀어낼 수 있단 말인가?
용서받을 방법이 없었기에 속으로 삭일 수 밖에 없었다. 속이 상하고 그 걸 풀 방법이 없으니 눈물이 흘러 나올 뿐이었다. 미안해. 미안해… 아름다움을 지키지 못해서 미안해, 이렇게 고생 시켜서 미안해, 널 죽여서 미안해…
그래도 여전히 아름다워서 고마워. 눈에서 벌레가 나오는 그녀를 침대 위에 눕히고 손가락으로 그녀의 눈가의 벌레를 주워 개수대에서 가져온 컵에 담아 넣었다. 처음에는 눈가에서 나오는 구더기만 닦아내면 될 줄 알았는데 혹시 설마 싶어서 눈꺼풀을 열자 눈 안에 구더기가 가득 차 꾸물거리고 있었다.
한때 나를 쳐다보던 아름다운 눈동자는 이제 없었다. 안구는 이미 형체를 찾아볼 수 없었고 눈구멍을 가득 채운 구더기들이 마치 다나의 몸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얻어가려는 듯 힘차게 꿈틀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숫자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구더기들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활기차게 움직여대고 있었다. 더러우면서 동시에 두렵고 또한 죄스러웠다.
화장대 옆에 놓여있던 구급상자에서 핀셋을 하나 찾아내어 다나의 눈구멍에서 기어나오는 구더기들을 건져내기 시작했다. 이 일이 언제 끝날까 싶을 정도로 많은 구더기들이었으나 일단 표면의 한꺼풀을 걷어내자 구더기의 숫자는 점점 줄어가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컵의 절반을 채운 구더기들을 돌이켜보면 그렇게 적은 숫자도 아니었다. 대신 구더기들이 먹어치워 어떠한 흔적도 남지 않은 다나의 눈구멍을 보며 벌레는 죽은 살만 먹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다. 눈구멍 안에 눈알이 휑하니 비어있는 모습에 또한 시커멓게 죽은 뇌조직도 보였다.
그녀의 눈구멍을 통해 보이는 뇌조직이 남아있다면 결국 다시 한 번 이러한 일을 겪을 것같았다. 결국 그녀의 머리 속의 뇌조직을 긁어내기로 마음먹었다. 이집트인들이 코를 통해서 뇌를 빨아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다나의 코를 통해 뇌를 빨아낼 필요가 없었다. 이미 눈구멍을 통해 남아있는 뇌조직이 훤히 보였다. 문제는 저 걸 어떻게 들어내느냐인데 역시 입으로 빨아낼 수 밖에 없나 싶었다.
지금까지 그녀를 위해 내가 하지 못한 일같은 건 없었다. 개수대를 엉망으로 뒤지며 간신히 찾아낸 빨대로 그녀의 곤죽이 되다 못해 다 썩어버린 뇌조직을 입으로 빨아내었다. 그 다음 그 것을 뱉어내야 했는데…
그녀의 흔적을 이대로 쓰레기 취급하며 버릴 수가 없었다. 아아…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 옳았단 말인가? 결국 큰마음 먹고 썩은 냄새에 썩은 맛이 나는 다나의 부패한 뇌조직을 목구멍으로 꿀꺽 넘겨버렸다.
식인 행위에 대한 증오심과 거부감으로 구토가 나오려 하였고, 실제로도 화장실로 들어가서 다시 토해내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욕지기가 올라오는 걸 간신히 참아낸 후에는 흐르는 침과 눈물을 닦으며 스스로에게 한마디 하였다.
“괜찮아. 이로서 우린 한 몸이 된 거야.”
남녀간의 사랑은 결국 하나가 되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 것으로 일이 대충 끝마쳐졌으면 다행이었으나 눈을 잃은 그녀의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감은 눈꺼풀이 축 주저앉아 그녀의 얼굴은 이미 사람의 얼굴로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썩은 냄새가 난다는 건 그녀의 몸에 세균이 자라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또 다시 소독을 하고 손이 가는 일들을 해주지 않으면 그녀의 몸은 천천히 혹은 빠르게 썩어갈 것이었다. 그녀의 아름다움이 점점 빛을 잃을 것이었다.
그녀의 몸에서 냄새가 나지 않게 하는 방법은 알고 있었다. 또 다시 소독약과 보습 오일로 몸을 소독하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이 이렇게 엉망이 된 건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눈이 없다면 어떻게 하는지 생각하자 ‘의안’이 바로 떠올랐다. 사람이 죽으면 눈이 없어진다는 걸 예상하지 못했지만 눈이 없는 사람들이 유리눈을 끼운다는 사실은 이전부터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유리눈을 얻기 위해서는 망가진 눈이 필요했다.
그녀를 위해 내가 못할 일은 없었다. 망가진 눈이 필요하다면 멀쩡한 눈을 망가뜨려도 될 일이었다. 가장 먼저 생각한 일은 내 눈을 찌르는 것이었다. 물론 거리낌없이 행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한쪽 눈이 없어짐으로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것과 잃는 것들을 비교해보았다. 그 결과 내게 한 눈이 없다면 세상사람 사이에서 신부로 숨어있기도, 도망자로 숨어있기도, 또한 그 누구도 아닌 보통의 사람으로 숨어살기도 힘들거라는 판단이 일어섰다.
내 손으로 내 눈을 찌를 수 없었다.
결국 문을 잠그고 여관방을 나와 길거리를 걸어다니다가 생활용품 할인점에 들러서 싸구려 햄 통조림과 자물쇠 한세트, 보습용 오일, 소독용 알콜 그리고 전동 드릴을 샀다. 그리고 오는 길에 골목길에서 만난 길 잃은 개 한 마리를 햄 통조림으로 꼬여내었다.
그리고 여관에 들어오자마자 여관문에 새로운 자물쇠를 달았다. 나만 열수 있도록… 어차피 여관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주인이란 건 개를 데리고 들어올 때부터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잘 잠긴 방안에서 개와 나 그리고 다나는 하나의 가정 비슷한 모습을 꾸며보려 애썼다. 그녀의 옷을 벗긴 후 몸에 냄새가 가시길 바라며 소독약을 구석구석 발랐다. 그리고 다시 옷을 입힌 후 다시 눕혀 놓았다.
아아 하지만 사람의 얼굴이 아닌 푹 꺼진 눈꺼풀을 가진 그녀는 아름다움이 아닌 흉물과도 같았다. 아니 눈을 가린다면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녀의 곡선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 것이었다. 게다가 가느다란 팔 다리 역시 이 세상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천상의 아름다움이었다. 하지만 저 푹 꺼진 눈만큼은 그러지 못했다. 저 눈을 볼 때면 구더기 득실거리는 눈구멍이 떠올랐고 그러면 동시에 내가 먹은 다나의 일부분, 그녀의 정신이며, 생각이었던 그녀의 검붉은 뇌조직이 떠올랐다.
다나는 내 정성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나 말을 못하는 짐승을 데리고 온 덕분에 나의 외로움은 어느 정도 해소 되어갔다. 햄을 얻어먹은 길거리의 개는 벌써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내 곁에서 꼬리를 치며 얼굴을 핥아 대었다.
“그래, 너라도 살아있어서 정말 다행이구나.”
게다가 개의 몸에서 나는 역한 냄새도 다나의 냄새와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이 개는 마치 다나가 그러했듯 맑고 큰 눈망울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 목욕을 하자.”
냄새나는 개는 누구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일단 개를 샤워실로 데려가서 미지근한 물로 개의 몸을 씻겼다. 비누로 몸을 문지르고 따뜻한 물이 담긴 욕조에 밀어넣자 역시 길거리 개답게 목욕을 싫어하여 발버둥 치긴 했지만 몸을 손가락으로 문질러주자 기분이 좋아졌는지 움직이지 않고 마지막 비누거품을 씻어낼때까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씻으니까 훨씬 보기 좋은 걸.”
말 못하는 짐승과의 대화라니. 하지만 확실히 씻고 나니 욕조에 시커먼 비눗물이 남은 걸로 봐서는 많이 깨끗해진 건 사실이었다. 회색 개가 원래는 하얀 개였다.
흰색은 어떠한 이유로든 회색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회색은 다시 흰색으로 돌아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것이 어떠한 의미를 가는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중요하지도 않았다.
“그래, 이제 깨끗해졌구나.”
깨끗하게 씻긴 개를 욕실에 두고 나는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일을 쉽게 끝낼 도구를 찾아왔다.
“네게는 미안하지만, 네 눈이 필요하단다.”
전동 드릴을 들고 욕실로 들어오자 하얗게 된 개는 나를 멍하니 올려다 보았다. 하지만 이내 곧 드릴이 회전하며 소리를 내기 시작하자 개는 당황하여 내게 멀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욕실은 좁았고, 문은 닫혀 있었다.
그녀를 위해 내가 못할 일은 없었다. 망가진 눈이 필요하다면 멀쩡한 눈을 망가뜨려도 될 일이었다. 가장 먼저 생각한 일은 내 눈을 찌르는 것이었다. 물론 거리낌없이 행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한쪽 눈이 없어짐으로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것과 잃는 것들을 비교해보았다. 그 결과 내게 한 눈이 없다면 세상 사람 사이에서 신부로 숨어있기도, 도망자로 숨어있기도, 또한 그 누구도 아닌 보통의 사람으로 숨어살기도 힘들거라는 판단이 일어섰다.
그래서 개 한 마리를 구해서 내 눈 대신 개 눈을 이용하여 유리눈을 얻으려 하였으나
결국 내 손으로 나를 따르는 개의 눈을 찌를 수 없었다.
결국 내 손으로 내 눈을 찌를 수 밖에 없었다.
14: 도피 생활
“한쪽눈은 백내장이 좀 있는 것 같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어지럽게 보였을텐데 어떻게 생활하셨습니까? 그나마 나머지 한쪽눈은 완전히 깨끗하네요.”
의사가 내 눈을 치료할 때 한 말이었다. 한쪽 눈을 유리 눈으로 교정하면서 자꾸 두통에 시달리며 앞이 잘 보이지 않는 것같아서 병원에 갔더니 의사라는 사람이 하는 소리가 내 눈에 수술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세상에 한 쪽은 나의 부모님(그분들이 정확히 어떤 사람이여 심지어 그들의 이름도 알지 못하지만)이 만드셨고 더욱 깊이 생각한다면 세상을 만든 사람 즉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택할 수 없는 가장 순수에 가깝고 선천적인, 그래서 가장 아름다워야할 주님의 피조물인 나의 눈은 백내장에 의해 더럽혀졌으니 수술이 필요하고 인간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나의 새로운 눈(그 것은 나의 손에 의해 부수어진 원래의 눈을 대신하고 있는) 유리눈은 더할 나위 없이 깨끗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 눈이 굳이 유리눈이라고 의사 선생에게 밝힐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지금 내 상태에서 백내장에 걸려 있는 건강한 눈을 치료했다가는 한동안 눈뜬 장님이 될 거라고 생각하니 섣불리 치료를 감행할 수 없었다. 이 눈이 사라진다면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나의 시체를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녀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은 일시적일지 몰라도 내게는 이 세상 가장 소중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것으로 끝날 이야기가 아니었다. 내가 앞을 보지 못하면 그만큼 노동을 할 수 없을 것이며 내가 다나에게 편의를 제공하지 못할 것이었다. 제발 시신에게 무슨 편의를 제공하려 하는 것인가? 하고 묻지 않기를 바란다. 지금까지 내가 묘사한 이야기에 의하면 나는 다나를 위해서 무엇이든 하고 싶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심지어 내가 나 자신의 눈을 포기 해가면서까지 말이다.
노동을 해야한다는 사실이 조금은 새롭게 다가오기는 하였다. 사제 생활을 하면서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었으나 근력을 사용하는 노동은 사제 생활의 일상을 유지하기 위한 노동과는 다른 면이 있었다. 나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닌 타인을 위한 일이라는 게 첫째였고, 내가 한 일로 인해 그가 벌어들이는 재화에 비하면 별것 아닌 대가를 받는다는 것이 둘째였다.
세상이 얼마나 불공평한지 머리로만 배운 피라미드 구조의 계급층같은 것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사장은 돈을 많이 벌고 일용직 노동자들은 돈을 많이 벌지 못한다는 것은 바깥 세상, 그러니까 이제부터 내가 속한 세상에서는 당연한 일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노력의 댓가가 정당하지 못하다고 생각되는 한편 그 것이 이 사회가 원하는 노력이 어떤 종류의 노력인지 알게되는 계기가 되었다.
세상은 돈으로 돌아가고 있었고, 고결함과 고귀함은 돈에 의해 눈앞이 가려져 있었던 것이다.
루르몬트에 정착하면서 시작한 일은 방적 공장의 직물을 하역하는 일이었다. 기차에 실려 어딘지 모르는 곳에서부터 실려 온 직물을 어디로 가져가는지는 모르는 트럭에 실어주고 하루에 50 길더 씩 받아가는 일이었다. 제 몫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되었으나 그로 인해 사회가 지탱이 되고 일꾼들 역시 생활이 유지되는 것을 보면 손에 쥐어지는 적은 보수도 의외로 합당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막상 일을 시작하기 전에 이러한 모습은 무언가 곤충들의 생활과 다름없어 보였다. 피라미드의 맨 위에는 사장이 있겠고, 그 밑으로는 간부들이 있으며, 그들이 누리는 특권을 위해 가장 아래에 위치한 노역자들이 개미처럼 일을 하고 그들의 배를 불리워주는 것이다. 조금 딱딱하게 생각을 해보자면 전체는 부분의 합과 같아야 한다. 즉 발생되는 재화는 원재료와 노동력의 합만큼 발생하여야 하고 그 가치는 결국 노동력에 합당하게 분배되어야 한다. 즉 백명의 노동자들이 일을 하여 100만 마르크의 수익을 얻었다면 모두에게 1만 마르크의 보수가 주어져야한다. 하지만 그들의 손에 쥐어지는 것은 일당 50 마르크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 먹고 하루 살 정도의 돈을 쥐고 집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그날의 피로를 풀기 위해 술집에 들어가 뼈 빠지게 번돈의 일부를 떼어서 술을 퍼마시는 것이었다.
이러한 생활의 반복은 야생의 곤충 사회와 다를 것 없어 보였다. 하지만 막상 그 안에 뛰어 들게 되자 나의 좁아 빠진 시야를 확인할 수 있었다.
왜 깨닫지 못했던 것일까? 그들 또한 인간이고 인간은 자연과는 다르다는 것을, 그저 열심히 일한다는 것을 문장으로만 이해하던 것과 달리 그들과 함께 노역을 하며, 그들의 욕망을 느끼고 그들의 꿈, 그들의 허풍, 그들의 생활을 듣다보면 세상에 같은 인생은 하나도 없고, 또한 다른 삶도 없었다. 그들은 모두 인간이었고, 동료였고, 또한 인생이었다.
하역 일을 하면서 친해진 사람이 몇몇 있었다. 그들은 나를 도이치라고 불렀고, 나는 그들을… 미안하지만 난 그들에게 별명을 붙이진 못했다. 나는 언제는 듣는 쪽이었고, 그들에게 있어 나는 그저 일만 묵묵히 하는 외국인 뜨내기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일주일간 계속 얼굴을 보게 되면서 그 안에서도 사회적 상호작용이 일어나 일이 끝날 때 같이 술을 마시러 들어가고는 하였다.
그들의 벌이가 시원찮은 만큼 그들이 누리는 자그마한 사치는 보잘 것 없었으나 그들도 인간이며 더욱 큰 꿈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었다. 일반적으로는 통장 또는 저축이라고 부르는 것이었고, 몇몇 사람들은 크게 한번 놀아보기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바람직한 것은 앞의 것이겠지만 이 사람들이 이 바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대부분은 뒤의 것을 꿈꾸고 살아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과거의 나였다면 그 것을 세속적인 일들이라고 생각하며 무시하고 지나쳤을 일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느낀 삶의 에너지와 열정 그리고 악착스러움과 미래에 대한 비전은 오히려 삶의 치열함 없이 주어진 것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상위 계층, 사무실에서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는 소장과 그를 그렇게 만든 사장들보다 훨씬 인간다웠고 아름답기까지 하였다. 더 나아가 주님의 뜻을 받들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더 이상의 것을 꿈꾸지 않고 그 안에서 안주하기 위해 노동이라고는 본당 청소와 서류 작업만을 해왔던 나 자신 역시 부끄러웠다. 그 일이 전혀 가치가 없었다는 건 아니다. 다만 지금에 와서 알게 된 사실이 주님의 뜻을 따르는 방법이 그 안에 안주하는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것을 알게 해준 다나가 있었다. 그리고 내게 다나가 있었던 것처럼 이들에게도 다나가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삶을 더욱 확장시켜줄 거라고 믿는 무언가가…
그날의 이야기는 술집 더치맨에서 펼쳐졌다. 그들은 자신의 꿈에 대해서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을 좋아했다. 그날 있었던 소장과의 말싸움과 누가 일을 잘하니 못하니 하는 이야기가 끝나고 술기운이 돌기 시작하면 언제나 그런 이야기가 돌곤 하였다.
“고향에 봐둔 땅이 있더라고, 땅주인이 미쳐서 그런지 평방킬로당 10000 길더씩에 판다는 거야. 그 것도 내가 원하는 만큼 살 수 있다는 거야.”
“그런 땅이 요즘 시대에 어디있어? 말만 그렇게 하고 사실은 불모지나 산 하나 떠맡기는 거 아니야?”
“불모지면 어때? 근데 그 땅을 사려면 최소 100 킬로는 사야한다는 게 문제지 키로당 10000 길더라면 거저주는 거나 다름없지만 백만길더는 말이 달라진다고. 그래서말인데 어때? 부동산에 투자할 사람 없나?”
“뭐 결국 그 소리로군. 아서라 아서, 그런 걸 피라미드식 사기라고 하는 거야.”
“아니 직접 눈으로 보지도 않고 왜 다들 사기라고 하는 거야? 땅도 정말 있고, 파는 사람도 있단 말이야.”
한몫잡아보겠다고 항상 들떠서 사는 더기, 그리고 항상 그런 허영심을 박살내고야 마는 요한, 그리고 구석에서 음담패설을 할 타이밍을 잡는 스뷔트, 그리고 도이치 바로 나. 이 네명이 일이 끝나면 모이는 멤버였다. 내가 이곳에 끼게 된 것은 지극히 최근의 일로 하역을 같이 하기 때문에 묶인 인연이었다.
“그런데 그거 알아요?”
스뷔트의 농담은 사실 내게는 잘 맞지 않았다. 그의 농담의 대부분은 여자들을 얕잡아보는 이야기들이었고, 그 주제는 성에 관련된 것이었다. 그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한다면 구멍이란 구멍은 모두 무언가를 찌르거나 넣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이 세상의 웬만한 것들은 모두 구멍으로 보이는 듯 하였다. 쓰레기통의 입구라든지, 도로의 터널, 심지어 당구대의 포켓도 구멍으로 표현하였다. 그리고 결국 그 구멍들은 여성들을 비하하는 목적으로 밖에 사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그가 농담을 하려는지 입을 열었다.
“말을 해줘야 알지. 뭐?”
“이번에 새로 생긴 샵에 엄청난 미인이 들어왔다고 하더라고요.”
샵이라면 물건을 파는 곳일텐데, 종업원이 이쁘다는 것일까? 하고 생각하다가 이 사람이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할 리가 없다는 게 떠올랐다. 틀림없이 계산대의 동전넣는 구멍이 어쩌구하고 이야기가 나올 것같았다. 하지만 내 생각은 근본부터 잘못되어 있었다. 오랜만에 주님의 이름을 머릿속으로 떠 올렸다.
‘오 신이시여, 여긴 더치(네덜란드)입니다.’
“그래? 언제 한 번 가봐야겠구만, 얼만데?”
“짧은 건 60 길더고 밤새는 건 120 길더라더라고요.”
그들이 말한 샵은 여자들이 몸을 파는 가게였다. 하루 꼬박 번 돈보다 더 비싼 돈을 들여서라도 여자와 하룻밤을 보내고 싶은 사람들의 욕망이었고 일주일치 급여를 모아서라도 긴밤을 보내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을 나쁘게 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이 사회를 잘 들여다보면 그러한 도덕적 해이가 유독 하층민, 즉 노동자 계급에서 쉬이 드러남을 알 수 있었다. 정말로 돈 많고 능력있는 사람들은 굳이 그런 여자들을 사지 않아도 되었다. 오히려 합법적인 수단으로 여자들과 가볍게 만남을 가질 장치가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더럽고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수단은 피라미드의 가장 아래 부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아! 그리고 간과하고 있었던 또 하나. 네덜란드에서는 이러한 일들이 불법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짧은 건 네 물건 길이냐?”
“웃기는 소리 마시고요. 어때요? 오늘 가볼까요?”
“뭐, 우린 상관없지만 도이치는 어때?”
그들과 하나가 된다는 것을 어디까지 선을 그어야 하는 걸까? 그들의 호의에서 나온 제안이었으나 내키지 않는 게 사실이었다. 내 비록 지금의 이 모습이 되었으나 한 때는 주님을 모시던 몸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그다지 내켜하지 않는 나의 바디 랭귀지를 읽은 그들은 더 이상 내게 권하지 않는 듯 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내 생각 자체가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스뷔트가 건넨 새로운 샵의 판촉물의 그림에서 터무니없는 것을 보고 말았다.
“어때요? 애들 괜찮은 거 같지 않아요?”
지명할 수 있는 여성들의 사진이 붙어있는 자그마한 16절지의 광고지에는 남성의 성욕을 자극시키는 노출이 심한 옷차림이 보였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나의 성감은 물론 나의 의무감을 동시에 자극시키는 모습을 보았다.
“핫!”
순간 숨이 막히는 듯한 느낌에 겨우 숨을 내어쉬느라 신음소리를 내었는데 그 모습에 세명의 동료는 하하핫 하고 웃음을 내어질렀다.
“이 친구 순진하기만 한 줄 알았더니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닌가보네. 그래? 이 중에 누가 마음에 드는데?”
거짓을 말할 생각도 없었다. 그저 내가 생각하는 가장 선한 선택을 하려하였다. 나의 손가락이 전단지 위의 한 여성을 가리켰다. 그 여성은 충분히 아름다웠으며 무엇보다 옷차림이 마음에 들었다. 나와 다나가 처음 만났을 때, 그녀의 옷차림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짧은 튿어진 진 소재의 반바지에 몸에 달라붙는 자그마한 티셔트 그리고 그 가슴 라인을 제대로 가리지 못하는 짧은 진소재의 상의를 입은 채 검고 긴 생머리를 늘어뜨린 여인이었다. 그 것을 보고 내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었단 말인가?
살아있는 버전의 다나 크라우스. 내 아무리 그녀를 죽이고 그녀의 시신을 사랑하여 이렇게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그녀가 살아있기를 바라지 않는 것이 아니다. 죽음보다 삶이 더 가치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어쩌면 더 나은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 순간 내 머릿속에 겹쳐지는 이미지가 있었다. 언젠가 내 알몸을 떠 올리던 길거리의 싸구려 여자들이 바로 그 것이었다.
어떻게 그녀들에게서 이 세상의 진리와 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그런 그녀들과 다를 것없는 몸 파는 여성 중에 다나와 비슷한 외형을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왜 이렇게 끌리고 있는 것일까? 실제로 만나지도 않았는데…
“근데 가격표는 80 길더에 160 길더라고 써있잖아.”
“아 그게, 아는 형이 운영하는 샵이거든요. 그래서 제가 좀 깎아 달랬죠. 어때? 도이치, 너도 여윳돈 좀 있어? 같이 갈까?”
그의 제안에 나는 주머니에서 120 길더를 세어서 그의 앞에 내어 놓았다. 나 자신의 갈등과는 관계없었다. 오늘밤 나는 그녀를 봐야했고, 그녀를 가질 수 있다면 최대한 오래 유지하길 원했다.
“어허허허 세게 나오는데. 한번 싸고 나면 생각 바뀌는 거 아니야?”
“모르지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잖아.”
“자! 정해졌으면 일어나죠.”
스뷔트는 모두를 설득하여 더치맨에서 일어서게 하였다. 아, 스뷔트 이 인간이 삐끼라고 불리는 족속인 걸 알게 된 것은 훨씬 후의 일이었다.
이야기는 거창하게 진행되었다. 일주일 내내 번돈을 쏟아붓는 일이 되다보니 이들에게 여자를 사는 일은 매우 신성한 일인 듯 싶었다. 항상 신중하고 항상 잘 고르려 하였다. 이 집은 좋지 않다. 저 집은 괜찮다. 그들 나름의 정보를 가지고 있었고, 왜 그 집이 좋은지, 어떠한 서비스가 나오는지 나름의 체계성 있는 정보를 관리하고 있었으나 오늘은 새로운 집을 찾아가는 것이라 모두 신중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거창하게 이야기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 것은 결국 여러 남자를 상대하는 여자에게 들러붙어 그 많은 남자 중에 하나가 된 후 서로의 기억에서 지워지고 마는 것이다. 그토록 아름다운가 하면 짐승같기도 한 그 행위를 취한 후에도 서로의 이름도 묻지 않고 묻는다고 하더라도 기억하지 못하고 그렇게 잊혀져가겠지.
그러한 생각 이상으로 이 일은 덧없어 보이기도 했는데 더치맨에서 불과 100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사창가가 모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후 6 시가 되자마자 영업을 시작한 여성들은 사창가를 서성이는 네 명의 남자에게 추파를 던졌고, 어떤 곳에서는 지나가는 사람의 팔을 붙잡고 가슴을 비벼대며 유혹하였다. 만약 우리가 술에 더 취해있었고, 뚜렷한 목적지가 없었다면 마치 지옥에서 마귀에게 살점이 뜯기듯 우리는 그 손아귀에 이끌려 그녀들이 원하는 대로 일이 이루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자 다 왔습니다.”
스뷔트의 안내 끝에 도착한 새하얀 건물은 다른 곳에 비해서 매우 깔끔해 보였다. 입구에서부터 개업을 축하한다는 메시지가 붙어있는 화초 따위가 놓여 있는 것으로 봐서는 정말로 번영하기를 바라는 것인가 싶은 한편, 네덜란드 특유의 쾌락을 찾는 문화가 돋보였다. 염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저질스러운 동네였다.
일단 입구에 들어서자 웨이터가 각자의 방으로 안내하였고, 방에 들어가기 전에 원하는 여성을 지명할 수 있었다. 사진뿐인 메뉴판에서 마치 음식을 고르듯 여자를 고르면 방으로 그녀가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처음부터 생각해 둔 사람이 있었기에 가장 먼저 방에 들어간 사람은 나였다. 여자에 안달이 나있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것은 사실이었다.
다나의 목을 조르고 나서 정신이 들었을 때 내가 가장 바라던 일은 그 것이었다. 단 1 분 전으로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다나의 숨이 끊어지기 1 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 때 그 손을 놓았더라면, 그녀는 죽지 않았어도 되었을텐데. 그 아름다움이 나를 위협한다고 하더라도 살아 숨 쉴 수 있었을텐데.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아름다움을 죽음으로 소유해야한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괴로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었기에 지금에까지 온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살아있는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방에서 기다리는 시간은 초조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이 가게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여자가 남자에게 욕망을 해소해주는 일이었고, 그 방법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 목적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분명 나의 아름다움에 대한 강한 욕구는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 것은 단순한 성행위와는 다른 것이었다. 그랬기에 나는 방 안에 마련되어있는 샤워시설을 사용하지 않았다. 초조하게 앉아서 누군가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양손을 깍지를 낀 채로 엄지손가락을 빙글 빙글 돌려가며 숫자를 세기도 했고, 침대 앞, 텔레비전 위에 놓인 콘돔을 만지작거리기도 하였다.
정말 성행위에는 아무런 기대가 없었다. 하지만 콘돔을 만지는 순간 생각하였다. 그토록 완벽한 아름다움, 아, 다나 크라우스를 만났을 때 나는 그 아름다움을 통해서 정욕을 불태웠다. 그렇다면 내가 살아있는 다나 크라우스를 만나게 된다면 과연 순수하게 그 아름다움을 감상만 할 수 있을까? 과거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단 말인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가 성행위 이외에는 없는 물건을 만지작거리면서 나 역시 조금은 몸이 달아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시간이 되어 방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너머로 들어온 여성, 아아 아름답다고 하더라도 아름답게 부를 수 없구나, 몸 파는 여자라는 의미의 창녀가 가장 적당한 호칭이었다. 그런 창녀는 내 기대와는 달리 사진에 나온 것과 같은 옷을 입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빛나는 입술하며 검고 맑은 눈동자 그리고 윤기 나는 흑발은 그대로였다. 아름다웠다. 이런 곳에서 일한다고 하더라도 그녀의 혈통은 하와의 것과 다를 것이 없었고 그 것은 곧 그녀가 창녀 마리아와 같이 아름답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전 킴이라고 해요. 잘 생기신 분은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요?”
처음 각오했던 것과는 달리 그녀는 비교적 정중하게 접근해왔다. 바로 침대에 달려들지도 않았고, 남성의 정욕을 이끌어내기 위해 도발적인 언사도 건네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상대의 이름을 물어보았다. 수많은 사람 중에 하나에 지나는 사람의 이름을… 그 것이 ‘정책’이었다는 건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당시에는 조금은 기뻤다.
“파울, 파울 한.”
“아아… 독일분이시군요. 걱정 마세요. 히틀러 취급하진 않을테니까요.”
결코 네덜란드 말이 서투른 게 아니었다. 하지만 되도록 입을 열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독일인 특유의 악센트는 곧잘 인종 학살과 관련된 농담이 되기 일쑤였다.
“그래, 오늘 밤새 저와 하실 일이 있으시다고요?”
“당신을 보고 싶었어요.”
“아아, 진도 너무 빨리 빼는 거 아니에요? 밤은 길잖아요. 천천히 알아가자고요. 어떤 거 좋아하세요?”
“이야기.”
“음… 저도 이야기 좋아해요.”
그녀는 날 피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여기에 왔다. 킴, 그녀는 다나와 매우 닮은 모습이었다. 내가 제대로 봤다. 그녀는 이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여성의 모방이었고, 꼭 닮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아름답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또한 살아있었다. 숨을 쉬고 있었다. 그리고 말라가지도 않으며 부패한 냄새를 풍기지도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의 냄새는 좋았다. 지독한 알콜 혼합물의 싸구려도 그렇다고해서 너무 비싸지도 않을 법한 향수 냄새였다. 아마도 물어보면 샴푸 냄새라고 하겠지.
“만져 봐도 돼요?”
“네, 얼마든지요.”
그녀는 웃옷을 벗으려 하였다. 내가 가슴을 만지고 싶어하는 줄 알았나보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살아있는 온기를 느끼기 위해서였다. 따뜻했다. 마치 더운 여름날 땀 흘리는 다나의 땀을 닦아주다가 우연히 손이 닿았을 때의 그 따뜻함과 같았다.
“아, 손님, 좀 무서운데요.”
내가 그녀의 얼굴을 너무나도 사랑스럽게 쓰다듬자 그녀는 당황한 듯 보였다. 그녀는 내게 성행위를 제공할 생각이었지만 지금의 내 모습은 그 이상의 것을 원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 것은 어떤 의미로는 사실이고, 어떤 의미로는 사실이 아니었다.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요. 싫으면 그만둘게요.”
그녀가 날 경계하자 나는 그녀의 얼굴에서 손을 떼었다. 아, 바로 이 것이었구나. 그녀는 살아있다. 그녀에게는 엄연한 마음이 있고, 의견이 있다. 그녀가 만약 나를 받아들이지 않고자 한다면, 나는 그녀를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 것이 바로 생명이었다. 진정 생명이 있다면 나는 그녀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일까?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여자 또한 내 마음대로 하기 위해서는 죽여야만 하는 것일까? 나 자신이 무섭고 두려워졌다. 그러한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끔찍했다. 아름다움을 발견할 때마다 살해해야하는 것인가? 그리하여 아름다움을 얻는다면, 다나 크라우스의 새로운 버전 혹은 그보다 더 나은 아름다움을 얻을 수 있다면 응당 그러함이 옳다는 걸 나 스스로가 깨닫고 있었다.
다시금 깨달아야 했다. 나는 살인마같은 게 아니다. 내가 다나를 죽인 것은 우발적인 것이었고 내가 살인마가 아닌 오히려 성직자였기 때문에 그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가 나빴던 게 아니라 내가… 그 무엇보다 고귀하였던 나의 성직이 무너졌기 때문에 내가 잠시 미쳤던 것이다.
나는 지금의 나는 이성을 가지고 있다. 다나의 죽음에 대해 깊게 후회하고 있다. 그러한 일을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와 약간의 거리감을 두자 그녀는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다가왔다. 이 일도 그녀의 나름의 직업이니 남자를 다루는 법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내가 어떠한 타입의 남자인지도 함께…
“음… 아저씨 귀엽다. 혹시 여자 친구 구하러 온거예요? 어쩌지, 우린 그런 건 좀 안되는데. 자주 오시면 단골 해드릴 수는 있어요. 그럼 이건 어때요? 열 번 오시면 한번 데이트 해드릴게요.”
그런 그녀의 말에 어떻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녀가 내 얼굴을 쓰다듬으며 다가왔다.
“그 것도 싫어요? 근데 말이죠. 아저씨 정말 잘 생겼어요. 원하시는 게 이야기라고 했죠? 그럼 이야기부터 해보시겠어요?”
하지만 내가 과연 그녀에게 무슨 이야기를 한단 말인가? 내 살아온 30 여년의 세월은 성직이었고, 그 이후 나를 변화 시킨 사건은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끔찍한 살인과 변태같은 성욕,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도피 생활 뿐이었다. 이 중 무엇을 그녀에게 이야기한단 말인가? 내가 말한 이야기란 성행위가 아닌 다른 것을 뜻한 것에 불과하였다.
“이야기가 잘 안나오세요? 그럼 입으로 할 수 있는 다른 걸 해드릴게요.”
그녀는 내게 얼굴을 포개며 입을 맞추었다. 너무 빠르지 않게 너무 탐욕스럽지 않게 너무 음란하지 않게 자연스러운 연인들의 키스처럼 그리고 살며시 서로 상대의 호흡을 나누듯 숨소리를 내었고 길지 않은 키스의 시간은 더 이상 복잡한 것을 생각하지 않게 해주었다. 가슴 속에서부터 애정이 솟아 올랐다. 다나에게 품었던 그러한 감정이 다시금 올라오는 듯 하였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길거리의 여성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다니… 그러면 안되는 거였다. 그럴 순 없었다. 하지만 그러고 있었다.
거리를 두고 어색한 키스의 시간을 평가하듯 그녀는 입맛을 다셨다. 순진해 보이는 손님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녀는 웃음을 지어보였고, 나는 어떠한 표정도 짓지 못했다. 아니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나 자신이 평가하기에 나 자신은 어떤가? 나는 과연 정말로 순진한 사람인가? 여자를 어떻게 다뤄야하는지 모르는 사람인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고 하여서 내가 순진한 사람인가? 나는 다나에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였다. 심지어 죽음까지…
“자, 이제 마음이 생기셨나요?”
킴… 창녀의 이름은 킴이었다. 그리고 그 이름에서 나는 사랑을 느끼고 있었다. 다나에게 느꼈던 감정을 그녀에게 느끼고 있었다. 성직의 업을 벗어던진 나였기에 그녀의 몸을 탐하는데 거리낌이 적었다. 그녀가 이끄는 대로 나는 그녀의 몸을 어루만졌고 언제나 머릿속으로만 생각했던 만약 이 아름다움이 살아있었다면… 의 환상을 즐겼다. 내가 안고 있는 것은 길거리에서 몸을 파는 여자가 아니었다. 나는 살아있는 다나를 품에 안고 사랑하였다.
15: Wahren Liebe
킴과 나는 사랑을 나누었다. 그 것이 진실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육욕에 가득 찬 나 자신이 그러한 것인지 구분할 수는 없었다. 나의 마음은 진실된 것이었다. 문제는 그 대상이었다. 만약 내가 안은 여성이 킴이 아닌 다나였다면 나는 진실된 사랑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나가 아닌 여성을 다나로 생각하고 안은 것에 불과하였다.
결과부터 이야기 하자면 좋았다. 그날 밤, 새벽까지의 이야기는 나와 다나의 이야기만큼이나 대범했고, 기억 속에서 지울래야 지울 수 없는 경험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나의 모든 것을 내어주려 노력하였고, 그녀 역시 나를 위해 헌신하였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고, 결코 끝날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열기가 식고 피로해진 그녀는 내게서 떨어져 조용히 코를 골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았을 때, 내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난 이 여자와 헤어져야한다. 다시 만날 기약도 없고, 다시 만날 돈도 없었다. 그리고 다시 만난다고 하더라도 이 사람과 이런 기분으로 다시 만날 거라는 보장도 없었다. 킴, 그녀가 길거리의 여자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내가 그녀를 만났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녀는 내게 돈을 받았기에 나에게 잘해준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돈이 효과를 낼 수 있는 시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해가 뜨자마자. 아니면 해가 뜨기도 전에, 내가 그녀를 떠나거나 그녀가 나를 떠날 것이다. 마치 어제 밤의 일은 아무 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잊혀지고 말 것이다.
한순간의 마음이 진실된 마음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이대로 떠나버리고 나면 나는 전혀 진실되지 않은 것이다. 다른 어떠한 변명을 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하룻밤 불장난에 지나지 않은 일을 저지른 것, 그 이상이 될 수 없다.
나는 그녀를 소유하고 싶었다. 나 자신의 진실성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그녀를 나의 사람으로 만들어야 했다. 내가 사랑한 여인 다나. 다나… 그녀에 대한 나의 마음이 진실했던 것처럼 킴에 대한 나의 마음 또한 진실해야했다. 그녀가 나를 거절하지 못하도록, 내가 그녀의 모든 것이 될 수 있도록…
하지만 내가 그녀를 사랑하게 된 이유가 살아있는 다나 크라우스라는 사실이 머릿속에 번쩍 들어오면서 내 몸의 힘이 빠져나갔다.
그녀의 목을 조르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세상에나… 나는 또 한명의 여성을 죽일 뻔하였다. 한참 숨이 막혀 괴로워하던 잠든 여인은 내 손이 풀어지자 그제서야 편한 얼굴이 되었다. 지금 자신이 죽임을 당할 뻔했다는 사실 자체도 모르는 듯 하였다. 사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내가 그녀의 목을 조른 시간은 찰나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목을 조르기까지 걸린 시간은 매우 길었다. 나의 머릿속의 이성과 논리가 그녀의 목을 조르라고 나 자신의 본성을 설득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설득 당했다. 오히려 그러한 나 자신을 말린 것은 다름 아닌 다나에 대한 깊은 사랑, 즉 본성의 역할이었다.
나는 흥분하여 이성을 잃었던 적이 있다. 그리고 그 때 다나를 살해하였다. 만약 그 당시에 이성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었다면 나는 다나를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흥분이 가신 후 이성이 돌아오자 나는 그녀를 죽이려 하였다. 만약 내가 잠시나마 다나를 떠 올리지 않았다면 나는 그녀를 죽이고 말았을 것이다.
도대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도대체 내게 무엇이 변하였기에 같은 사건에 다른 것들이 다르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지? 혼란스럽다. 나 자신이 제대로 생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옳은 일을 하자’
내 몸이 식은 것도 사실이고, 더 이상 정욕이 오르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녀는 내게 돈을 받았고, 나는 욕망을 해소하였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녀에게 험한 일을 하느라 뒤척여진 이불을 바로 잡아 그녀의 몸을 덮어주고 자리에서 일어나 내 옷을 챙겨 입었다. 그토록 뜨겁게 사랑을 했지만 마음을 정한 이후에는 가슴이 싸늘하게 식어버려 심지어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녀를 두고 방에서 나왔고 불 켜진 복도를 지나 잘 가라고 인사하는 사람도 없는 가게를 떠나 나왔다. 새벽녘의 홍등가는 불 꺼진 냄새나는 골목에 불과하였고, 더 이상 아무도 내다보지 않는 골목을 터덜터덜 걸어 내가 묵는 여관을 향해 걸었다.
그렇게 허무할 수가 없었다. 싸지르고 난 후에는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었다. 난 그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고, 무엇보다 열중했고, 그 시간이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내게는 무엇이 남아있는가? 하룻밤의 시간, 가슴 두근거리는 사랑, 그리고 나의 인간성… 심지어 주머니에 들어있던 나를 지탱해주던 적지 않은 돈까지 잃었다.
짐승의 뜻을 받아 자신의 신의를 버린 자들로 하여금 칼로 죽었다 다시 살아난 짐승들의 우상을 만들게 하였다(요한계시록 13:14)
내 비록 주님의 뜻을 버렸어도, 성경의 구구절절 옳음은 부정할 수 없었다. 킴, 그 여자는 나로 하여금 다나가 아닌 자신을 섬기게 만든 유혹에 지나지 않았다.
여관에 도착하자마자 2 층으로 걸어 올라갔다. 내가 직접 달아놓은 자물쇠를 열고 방에 들어가 다시 문을 닫았다. 막상 집에 들어오자 나갈 때 켜 놓은 향초가 아직도 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나를 기다리는 듯 침대에 기대어 앉아있는 다나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그녀의 까맣고 투명한 눈 대신 푸르고 맑은 눈이었다. 이 아름다운 눈을 얻기 위해 나 역시 한쪽 눈을 버려야했다.
아름답다. 아름답다. 그 이상 그 이하 어떠한 말도 필요 없었다. 이 세상의 아름다움은 그녀에게서부터 시작되는 것이었고, 만약 오늘 만난 킴이 아름다웠다면 그 것은 다나를 많이 닮아서였던 것이다. 검고 윤기 있는 이 머리, 맑고 푸른 두 눈도, 그리고 지금 입고 있는 하얀 슬립과 새하얀 스타킹도, 그녀에게 순결이라는 단어가 어울리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다나는 그러한 모습으로 나를 기다려 주었다.
바라보기만 해도 눈물이 날 것 같은 아름다움에 벅차올라 그녀를 안았다. 하지만 힘없는 그녀는 내게 안기는 것이 아니라 쓰러져 왔다. 내 몸 위로 기대어있는 그녀는 너무나도 가벼웠다. 처음보다 훨씬 더 가벼웠다. 그녀는 아름다웠다. 그렇게나 아름다웠다. 지금도 물론 아름답다. 하지만…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했다.
그녀는 처음과 같지 않았다. 눈빛도 바뀌었고, 점점 메말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냄새가 났다. 살아있는 모습과 최대한 비슷하게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일개 도망자의 신분으로는 그녀에게 충분한 환경을 제시할 수 없었다.
젠장, 젠장젠장젠장… 이러한 생각이 오늘 갑자기 떠 오른 이유는 따로 있다.
“미안해… 미안해. 다나.”
죄책감이었다. 나는 이토록 아름다운 사람을 두고 똑같은 조건, 똑같은 상황이라면 이 사람을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결국 확인한 것은 다나를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내 마음을 휘어잡은 이 완전한 사랑이 그렇게 쉽게 바뀌게 된다면… 그 동안의 나의 행동이 모순이 되었다. 나는 다나를 사랑한다. 그렇기에 다나 이외의 것을 사랑할 수 없었다.
“미안해… 잘못했어. 두 번 다시, 두 번 다시 이런 일은 없을 거야.”
그녀에게 사과를 했다. 들을 리 없는 그녀에게 사과를 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감추는 것은 더더욱 못할 일이었다. 들을 리 없는 그녀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야 말로 도대체 누구를 속이기 위함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다나를 끌어안고 조용히 생각을 하였다. 오늘은 일을 나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너무 피곤했다. 내가 없어도 일은 잘 돌아갈 것이다. 난 사실 그 곳에서 별로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여관방에 틀어박혀 있으면서 다나의 몸을 닦고 향초를 갈고, 온도와 습도를 체크하였다. 냄새는 알콜로 지울 수 있었고, 세균도 소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날이 가벼워져가는 몸무게만큼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습도가 높으면 부패가 시작될 것이고, 습도가 낮으면 그녀가 점점 말라갈 것이다. 존재와 아름다움 사이에서 고민하여야 했다.
하지만 그러한 고민을 싹 날려버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우연찮게 켜둔 텔레비전에 TV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내용은…
‘독일의 메트만 지구에서 일어난 실종 사건을 조사하던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경은 피해자인 다나 크라우스 양이 살해당할 가능성이 크다고 발표하였습니다. 용의자는 파울 한 (31)으로 해당 교구의 사제이며, 매우 위험한 인물로 국경을 벗어났을 경우를 대비하여….’
아무래도…
발각된 모양이었다.
“다나, 여기 너무 오래 머물렀나봐.”
배신과 거짓, 그리고 죄책감에 대해 생각해보기도 전에 물건들을 주섬주섬 모으고 콘트라베이스의 케이스를 열어 다나를 그 안에 넣었다. 정말로 얼마 남지 않은 돈을 세어보며, 국경에서 되도록 멀리 떨어질 만한 곳을 생각해보았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일단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16: 이해될 수 없는 아름다움
나갈 준비를 하고 여관 방문을 나서는 순간 여관 주인 영감과 마주쳤다. 평소에 대마초인지 담배인지 모를 것에 취해서 멍한 모습과는 달리 조금은 정신을 차린 듯한 모습에 손에는 청소도구가 쥐어져 있었다. 보아하니 복도를 쓸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디 가십니까?”
“네, 오래 머무른 것같아서 이제 나가 보렵니다.”
“아, 그러시군요. 하지만 방삯은 한 달치를 치르셨는데 아직 열흘 밖에 안 되지않았습니까?”
“방을 제 멋대로 뜯어고친 데가 있습니다. 차액은 수리비로 써주세요.”
“네….”
처음에는 말도 제대로 걸지 않을 것 같았던 그였으나 지금은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그를 변화시킨 사람은 바로 나였다. 퇴근시간이 되어 여관으로 들어오면 사실상 항상 보는 얼굴이었던 것이다. 그 동안 사람과 만나는 것을 피해왔던 그였으나 매일같이 들어오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새로운 활력이었다.
그리고 그가 대마를 피울 때마다 그 옆에서 나는 그 행위가 옳지 않음을 이야기 해주었다. 모두가 옳은 이야기였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나는 말을 잘한다는 것이었다. 상대를 설득하고 그 사람으로 하여금 부족함을 일깨우는데 특출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 대마는 왜 하시는 것입니까? 삶의 의욕이 없어서 입니까? 그로 인해 얻는 쾌락이 그렇게나 대단한 것입니까? 하지만 그 안에 빠져들고 나면 그로 인해서 잃는 것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지금까지 잃은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과연 어느 쪽이 더 가치 있는 것입니까? 그 중에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걸 행하십시오.’
첫날에는 소귀의 경읽기였으나 그 다음 날에 전해준 이야기는 더욱 길었고 그 다음 날에는 대마초 맛이 떨어질 때까지 옆에서 귀찮게 이야기를 하였다. 그는 나를 무시하는 듯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그 눈에 점점 생기가 도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10 분간의 대화는 어느새 1 시간의 대화가 되었고, 나 혼자 질문하던 대화는 간혹 답변을 들을 수 있기도 하였다.
‘제발 입 좀 닥치시오.’
그리고 딱 5 일이 지나자 그는 대마초를 피우면서도 여관의 청소를 시작하였고, 말라비틀어진 화초도 내다 버렸다. 내가 방삯으로 지불한 얼마 안되는 돈으로 새로운 화초를 들여 놓았고, 오랜만에 여관문을 활짝 열고 환기를 시켰으며 듣기로는 오후 시간에는 햇빛을 쬐며 시간을 보냈다고 들었다.
그 후에는 그도 점차 말이 많아지더니 우린 함께 이 여관을 어렵게 만든 앞의 대형 빌딩을 욕하였다. 일조권이라든가 상권이라든가 하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었으나 내 쪽에서 해준 이야기는 그래도 언제나 희망은 있기 마련이라는 이야기였다. 심지어 살인을 했더라도 주님은 어떻게든 길을 마련해줄 거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 이야기는 나 자신을 위한 이야기였지만 말이다.
겨우 생기를 되찾은 여관에서 내가 나간다고 하니 여관 주인은 서운한 눈치였다.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콘트라베이스 케이스 하나 달랑 등에 매고 나가는 내 모습이 조금은 안쓰러웠는지 그는 결국 내게 돈 몇 푼을 쥐어주었다.
“선생이 나가면 이곳은 다시 전처럼 암울한 곳이 될텐데… 며칠 더 머물면 안되겠습니까?”
늙은이의 간청은 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였으나 아침의 뉴스는 나의 몸을 움직이게 하였다.
“죄송합니다. 가봐야 할 곳이 많아서, 예정대로 움직이는 게 아니다 보니 급하게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렇군요.”
“대신, 이 걸 놓고 가겠습니다.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여관방의 늙은이를 위해 신학교에서부터 소중히 다뤄온 성경책을 내어주었다. 그걸 받아든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는 지금까지 내가 그에게 오지랖 넓게 참견한 이유를 알아차린 듯 보였다.
“그렇구려. 성경책을 항상 가지고 다니는 분이시니 항상 옳은 말을 하셨구먼.”
그런 그에게 나는 짧은 눈인사를 남기고 여관을 떠나와야 했다. 그에게 딱히 정이 들거나 한 것은 아니었으나 인연이란 무서운 것이었다. 지난 2 주간 한 번도 주님에게 기도를 드린 적이 없었는데…. 그 늙은이를 위해 기도를 남겼으니 말이다.
콘트라베이스를 등에 맨 채로 이제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지도 못한 채 기차역을 서성였다. 하지만 경찰이 지나칠 때마다 골목 안으로 숨어야 했다. 도무지 불안해서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되도록 국경에서 멀리 떨어져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국경 바로 옆에 붙어있는 루르몬트에 머물러 있다가는 언제 추적해 나오는 경찰들에게 붙들릴지 알 수 없었다.
사실 언젠가는 내가 쫓기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경찰들이 이 것 저 것 뒤지다가 결국에 찾지 못한다면 찾지 않은 곳을 뒤질 것이고, 그 곳이 트라움 성당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친절하게도 성금함을 뒤집어 놓고 나왔으니 어디론가 도주했다고 여겨지기 딱 좋았을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진실로 답할 수 있었다. 나는 살인자이다.
내가 아는 한에 살인자가 받을 벌은 감옥에 들어가는 일이다. 그리고 그 것은 옳은 일이다. 죄를 지은 자는 죗값을 치러야 한다. 나 역시 동의한다. 하지만 나는 들어갈 수 없다. 나 자신이 지은 죄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만약 여기서 감옥에 들어가게 된다면 이 아름다움은 도대체 어떻게 된단 말인가? 말할 것도 없이 썩어 문들어져 벌레에게 파먹히고, 이 세상에 두 번 다시 모습을 드러낼 수 없도록 6척 지하의 어둠 속에 영원히 묻히게 될 것이다. 신이 만든 가장 완벽한 아름다움이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될 것이며 영원히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 것을 견뎌낼 수 있을 것인가? 나의 대답은 ‘절대로 그렇지 못한다.’ 이다. 단 한번의 경험으로 사람은 바뀔 수 있는 것이다. 단 한번의 경험만으로도 더 이상 그 것이 없는 세상을 꿈꿀 수 없는 것이다. 이 아름다움을 만약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았다면 어떻게 이 것을 포기할 수 있을까? 아니 포기할 수 없다. 그 어떠한 댓가를 치르더라도 지켜내고자 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내가 그러하였다.
다나의 아름다움을 지켜나가기 위해 나는 어디까지라도 도망칠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르기는 힘들었다. 이렇게 큰 콘트라베이스를 등에 짊어매고 역 근처를 두리번거리는 건 난 수상한 사람입니다. 하고 떠드는 것 같아 근처 가까운 술잔모양의 간판을 찾아들어갔다.
역 앞의 술집인터라 뜨내기 사람들이 여럿 모여 술을 마시고 있지만 그래도 술집 특유의 시끌벅적한 느낌이 있었다. 얼핏 관찰하기에도 이 안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끼리 같은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면서 서로에게 관심이 없을 법한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막 들어온 나로서는 어디에 속할 수 없었기에 한적한 테이블을 찾다가 결국 찾지 못하고 이미 세 사람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곳에 앉게 되었다.
“어이쿠, 어서 오시게나.”
“여기 앉아도 되겠습니까?”
“아~ 독일인이구만! 악 악 악 악 악악악!”
처음보는 사람에게도 독일인이라는 이유로 한손을 높이 들며 히틀러 흉내내는 게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기분이 상할 일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만 독일인이라면 누구에게나 이렇게 대할 거라고 생각하니 여간 걱정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전혀 닮지 않은 흉내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두 사람이 배실배실 웃고 있었다는 사실이 걱정스러웠다.
“입을 다물고 다녀야겠군요.”
“아하하하 너무 기분 상하지 말게나. 농담 아닌가?”
“유대인이 한명이라도 있었다면 농담이 아니었겠지.”
“음… 그렇구만, 혹시 우리 중에 유대인 있나?”
“난 아니야.”
“나도 아니야.”
“그리고 이 친구는 독일이니 없구만! 히틀러!”
지나치게 유쾌한거 아닌가 싶어서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마땅히 그런 일에 화를 낼 정도로 속이 좁지 않았다. 사실 짜증나는 사람들을 상대하는 건 익숙한 일이었다. 하루에 몇 시간이고 자신의 죄를 회고하면서도 자신의 잘못을 줄여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 당시에는 그 모든 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했는데… 주님의 이름 아래에 모든 것이 완벽하리라고 믿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모든 것이 의심스러웠다.
“어차피 이방인인 건 마찬가진데 너무 그러지 마셔. 그래, 선생은 어디로 가는 길이오?”
그나마 점잖아 보이는 신사가 내게 물었다. 그가 신사로 보인 이유는 그의 앞에 놓여있는 중절모 때문이었다. 관찰의 결과로 봐서 그는 어딘가에 들어 앉아있기 보다는 나돌아다니는 일이 더 많은 사람으로 판단되었다. 번쩍이는 시계며, 다려 입은 와이셔츠며, 목에 두른 스카프며, 모든 것이 고급으로 보였다.
“마땅히 정해진 곳이 없습니다. 여행 중인데 어디 좋은데가 없나 해서요.”
“여행 중이라. 좋구먼, 목적이 뭔가?”
“여행에 목적이 있겠습니까?”
“글세 말이지. 저 친구는 섹스 관광이라던데.”
“처음 보는 사람한테 무슨 소린가?”
“왜? 처음 보는 사람이니까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 아닌가? 들어보게. 저 친구 정말 말끔하게 하고 다니잖아. 시계도 명품이고 스카프도 고급이지. 그리고 멀쩡하게 생긴 척하고서 하는 일이 뭐 같나?”
“글세요. 사업가처럼 보이는데.”
“바로 그걸세. 잘 나가는 신생 사업가라고 자기를 소개하고 젊은 여자들을 혹 해가지고 따먹고 버리는 거지.”
이야기만 들으면 정말 인간 쓰레기가 따로 없었다. 여자들을 혹해서 하룻밤을 보낸 다음 사라져버린다니. 문제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왜인지 스스로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는 것이었다. 아아, 저런 게 정말로 통하는구나. 남자도 악당이지만 그런 악당의 겉모습에 쉽게 넘어가는 여자들도 걱정이었다. 단순히 누가 잘못하고 누가 잘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무엇이 중요하고 그렇지 않은지, 가치의 혼동이 이 사회에 퍼져 있는 듯 싶었다. 창피하고 밝혀지기 두려워 할 일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게 과연 옳은 것일까? 이 사회는 그러한 것을 용인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젠장, 그야 그 쪽이 이상성애 브로커라고 해서 이야기가 나오다가 자연스레 나온 이야기잖수?”
“이상성애요?”
“이를테면 판타지 클럽같은 거지, 각종 페티시에 대해서 다루는 거야. 자 명함 받아두시고, 혹시 여기 머물다가 생각 있으면 전화하라고. 사실 사업가는 나야. 섹스 사업이야 말로 절대로 마르지 않는 샘물이지. 자지에서 좆물이 마르지 않는 한 말이야.”
결국 사람을 하나로 만드는 이야기는 그 것이었다. 섹스, 말초적이고 즉각적이며 더럽고 천하지만 버릴 수 없는 바로 그 것이었다. 결국 여기 모여 앉아서 이야기 하는 사람들은 결국 벗은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셈이었다.
“난 스타킹 신은 여자가 좋더라. 완전히 덮는 거 말고 허벅지 근처에 두툼한 레이스가 살짝 드러나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
가장 안 쪽 자리에 앉은 뚱뚱한 남자는 자신의 성취향에 대해 이야기 하였다. 결국 그런 인간들이 모여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상성애라면 나도 알고 있는 게 하나 있었기에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그들의 이야기를 계속 듣기로 했다.
“스타킹 페티시로구만, 너무 대중적이라서 굳이 우리 클럽이 아니라도 충분히 찾아볼 수 있겠군 그래 하하하하!”
“혹시 젊은 애들도 있나? 좀 순진해 보이는 애들로.”
모자를 앞에 놓은 신사, 아니 이제는 사기꾼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남자는 어린 여자를 좋아하는 듯 하였다.
“몇살 정도를 원하나?”
“대략 15에서 16 세?”
“하아~ 큰일날 친구로군. 미성년자를 따먹을 생각을 하다니.”
“없나?”
“없긴 왜 없나? 원한다면 14 살이나 12 살도 가능하다네.”
충격이었다. 12 살 짜리 꼬마가 몸을 팔다니. 12 살 어린 소녀의 섹스라니. 법이고 뭐고를 떠나 주님이 과연 그런 것이 가능하게 만들었을까 싶을 정도였다. 게다가 12 살이면 도대체 얼마나 되었을까? 키가 내 허리만큼이나 올까? 그런 어린 아이가 스스로 무언가를 판단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리고 판단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것이 옳은 판단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런 아이가 성매매 현장에 놓여 있다니… 이것은 섹스가 아니라 강간이고, 감금이고, 학대이다.
“세상에나, 정말 대단하구만. 애 생긴 건 참하고?”
“수질 관리야 언제나 확실하지. 게다가 12 살이야. 조임부터가 다르다고.”
“하긴, 나도 그 꽉 조이는 느낌을 못 잊어서 이러고 다니고야 있지만…. 좀 된 것들은 허벌창이 되어놔서 허공에 좆질 하는 느낌이지 뭔가?”
“난 나이가 좀 많은 편이 좋은데.”
“물론 노련하고 말타기 잘하는 년들도 있지.”
“입으로도 해주나?”
“내 장담한다니까. 우리 클럽에서 불가능한 것은 하나도 없어.”
아아… 진짜 변태들을 위한 이상성욕자들인 듯 싶었다. 강간을 하는 듯한 느낌이 들도록 심하게 반항하는 여자도 구할 수 있고, 말과 같은 인형을 쓰고 성관계를 맺을 수도 있으며, 만화 영화의 인물처럼 분장한 변태적인 성관계도 가질 수 있다고 했다. 듣기만 해도 역겹고 무섭고 더러운 이야기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서 어느 정도의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나 역시 이상성애에 눈을 떴고, 그들의 이야기 못지않게 역겨운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조금만 더 용기를 낸다면 그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가지고 있다. 그 아름다움은 마땅히 찬양되어야 하며 대대손손 물려 내려가 영원한 가치를 획득하여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유할 수 있어야 했다. 다나의 아름다움은 마치 고르기아스의 명제와도 같았다.
‘진리는 없다. 있다고 하더라도 알 수 없다. 안다고 하더라도 전할 수 없다.’
이러한 아름다움 자체를 부정하던 때도 있었고, 코 앞에 있음에도 내가 취할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하던 때도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아름다움을 느끼고 찬양하고 손에 넣었을 때는 이것에 대해서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같이 공유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가능성이 보였다.
“그래, 제국 청년은 어떤 취향인가? 들고 온 물건을 보아하니 꽤나 고상한 취미를 가진 모양인데. 물론 얌전한 애들도 있어. 하지만 내가 알기로는 고상한 친구들이 더 변태같더라고. 수줍어하지 말고 말해봐. 내가 괜히 이렇게 펍까지 나와서 이렇게 홍보하는 게 아니라니까. 이 세상에는 분명히 지상 낙원이라는 게 있어. 만약 그런 게 없다면 우리는 그런 말을 알고 있을 리가 없잖아. 다만 그 것이 어디에 있는지 모를 뿐이야. 내가 제공할 수 있는 낙원은 뭐든지 제공할테니 어디 자네 취향을 말해보게나.”
그리고 마침내 들어온 그의 질문에 나는 답을 해야하는지 말아야하는지 선택의 기로에 섰다. 그 것은 마치 쥐덫 위에 올려진 냄새나는 치즈와 같았고, 나는 그 것을 탐하는 쥐와 같았다. 이 아름다움을 알릴 수 있는 기회로 보이는 동시에, 자칫 잘못하면 나 자신을 매장시켜버리고 더 나아가 경찰에 붙들려갈 만한 이야기였다. 쥐덫의 치즈를 가로채면 어떻게 되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쥐는 너무 배가 고팠다.
“혹시 죽은 여자와도 잘 수 있습니까?”
쥐는 치즈를 물었고, 결과는 예상을 벗어나지 못했다. 한 순간 테이블은 싸늘해졌다. 역시나 그 누구도 이해 못해주는 성취향이었던 것이다. 죽은 자와의 섹스…
“어어어어… 이런 친구는 처음이네. 설마 시간(屍姦)을 말하는 건가?”
“아니요. 그냥 못 들은 셈 치세요.”
“아니야. 아니야. 난 섹스에 대해서 폭 넓은 이해를 가진 사람이라고, 단지 그게 돈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결국에는 돈이었다. 하지만 조금은 더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자네 정말로 시체와 하는 게 좋은 건가?”
시계를 번쩍이는 사기꾼이 내게 물었다. 나는 굳어진 얼굴로 어떠한 대답도 하지 못했다. 분위기가 이렇게 된 마당에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궁금한 것은…. 시체와 하려면 죽은 여자가 있어야 하잖아. 아니면 여자를 죽이든가… 그 건… 섹스와 다른 거라고. 섹스는 엄연히 생산적인 활동이야. 하지만 살인은… 불법이잖나?”
“미성년자 밝힘증 환자가 불법같은 소리 하는 것도 우습게 들리는군 그래. 자네도 법망을 피해서 국경을 돌아다니는 거 아닌가?”
“내가 하는 일은 재미를 좀 보는 거지만, 시체랑 하는 건… 자칫 잘못하면 재미로 끝나지 않을 일이야. 섹스는 서로 재밌지만 살인은 당하는 쪽은 죽는다고.”
“굳이 살인을 한다는 건 아니잖나? 이미 죽은 여자일 수도 있잖은가?”
사기꾼과 브로커 사이에서 의견 충돌이 나고 있었으나 사기꾼의 편협한 생각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은 나를 괴롭히기 충분했다. 그가 나를 비방하는 내용들은 모두 타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를 변호하는 브로커의 이야기도 나를 괴롭혔다. 그가 하는 말이 틀렸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나는 살인을 했고, 그녀를 안았다. 그의 변호는 나를 변호해주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에게는 재미를 좀 보는 걸지 몰라도. 인생 망쳤다고 생각하는 어린 애들도 있다는 생각은 안하시나요?”
결국 나는 그에게 한마디 하고 말았다.
“수도원에 갓 들어온 수녀님들 중에, 그런 분들이 여럿 계셨어요. 더 이상 남자 따위는 보고 싶지 않다고. 그 더러운 짓거리를 당한 이후로는 악몽에 시달리다가 미칠 것같아서 자해를 하다가 겨우 주님의 품으로 들어왔다고… 그렇게 고백하시는 분들도 계셨어요. 당신이 지금까지 그저 재미를 보기 위해 하룻밤 관계를 갖고 떠나왔을 때. 그 것이 연분이라고 생각하고 당신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소녀가 하나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나요? 반대로 원치 않는 관계로 스스로 타락했다고 생각하고 꿈 많았던 소녀들이 좌절에 빠져 길거리 여자로 나앉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하셨나요? 심심해서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는다는 이야기를 이해하세요.”
거기까지 이야기하자 정말로 우리 테이블은 싸늘한 분위기가 되었다. 결국 술 한잔 안 마시고 취한 모양이 되었고, 사기꾼 녀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술집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가 화가 나서 나갔는지 아니면 창피함을 조금이라도 깨달아서 나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한 말이 그의 머릿속에 언제까지고 남아있게 된다면 그 걸로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정말 나를 창피하게 만드는군. 자네가 말한 그 좌절에 빠진 아이들을 이용해서 장사를 해 먹으니 말이야.”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뭐 소수라는 건 참 가슴 아픈 일이지. 자신의 취향을 이해 못해주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너무나도 많고, 나와 닮은 사람은 참으로 적으니까 말이야. 사실 내가 이런 일을 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거야. 뭐 받아들여지느냐 받아들여지지 않느냐의 문제지만 말이야.”
“그렇다고 해도 어린 아이에게 성매매를 강요하는 건 받아들이기 힘든데요.”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잖은가. 자네의 성취향이야 말로 내게 쇼킹했다는 것도 알아두게나.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그는 테이블 밑에서 자그마한 가방을 꺼내들었다. 툭툭 소리를 내며 열린 가죽 가방 안에는 여러 홍보용 전단들이 들어있었고, 대부분은 벗은 여자들이 인쇄되어 있는 그림이었다.
“이 바닥도 나름 연구가 필요하고 정보가 필요한터라 새로운 형태의 섹스가 생길 때마다 바빠진다네. 원숭이나 개랑 하는 곳도 있고, 동성간의 섹스도 있고, 가지가지 있지. 그 중에 자네랑 맞을 만한 것도 있더라고.”
그는 전단지 사이에서 가장 어둡고 검고 기분 나쁜 종이를 몇장 꺼내어 내게 건네주었다. 검은 바탕에 창백한 여성이 붉은 입술에서 피를 흘리는 채로 전신의 절반을 드러내는 모습이었다. 나머지 절반은 마치 커튼과 같은 검은 바탕 속에 숨겨져 있었다.
“뭡니까 이게?”
“네크로필리아.”
“네?”
“고딕 박물관이라는 거야. 벨기에 브뤼셀에 고딕 문화라면 사족을 못 쓰는 귀족이 한 분 계시지. 죽음과 고통, 그리고 고독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정신병자인데 그래도 돈이 많으니 어떤가? 게다가 여자들을 시체처럼 창백하게 화장을 시켜 놓아도 그렇게 예쁘니까 사람들의 시선이 한번 더 가게 되는 거지. 자네에게 딱인 것같네.”
“네크로필리아…. 고딕 박물관….”
“난 자네의 취향을 이해 못하지만, 그래도 이런 식으로 자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지 않나? 언젠가 자네도 내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같으면, 그 때 날 찾아주게나.”
그는 내게 전단지를 내어주고 다시 가방을 닫고는 옆 테이블로 옮겨갔다. 그리고 지금까지 했던 이야기를 그대로 반복하듯 새로운 성애의 세계에 대해 사람들에게 전하였다. 성매매 의 호객 행위라니… 정말 여기는… 더치(네덜란드)였다.
=현재, 벨기에, 브뤼셀의 한 공동묘지=
네크로필리아… 고딕 박물관… 벨기에의 브뤼셀…
바로 여기에 오게 된 이유였다.
17: Jete
=2 일전 브뤼셀=
세시간의 기차 여행이 재미있었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이국 땅의 수도를 찾아오는 동안 어떠한 봉변을 당했는가 하면, 처음에는 좌석 티켓을 끊어서 자리에 앉아 배경을 바라보며 편히 여행중이었다. 그러나 커다란 콘트라베이스를 가지고 다니면서 여권 검사 받기란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그래서 잠시 화장실에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화장실에 있는 손님에게 까다롭게 굴지는 않을테니 말이다.
국경 근처에서 역시나 여권 검사가 있었다. 그 때 머릿속에 딱 떠오르는 게 내가 지금 수배중이라는 사실이었다. 국경 근역에서 내 이름이 공지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물론 운 좋게 어설피 검사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그런 행운에 기댈 수 없었기에 화장실 안에서 여권을 건네주는 것은 곤란했다. 그래서 생각한 게 화장실에서 여권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었다.
대충 상황은 이러했다. 화장실에 미리 들어가 있고, 승무원이 지나다니면서 티켓과 여권을 확인한다. 그리고 화장실에 노크를 할 때 티켓을 내미는 것이다.
“손님, 국경을 지나고 있는데 여권도 보여주셔야겠는데요.”
“아 급해서요. 제 자리에 가방을 두고 왔거든요. 나중에 보여드릴게요.”
끌어낼 것도 아니고 갈길도 바쁘고 하니 결국 자리를 뜨게 될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막상 화장실에서 나와 내 자리를 찾아갔을 때에 한동안 승무원이 기다리고 있었고, 승무원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입석칸으로 건너가 있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에는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이 내 자리에 앉아있었다.
서로 표를 확인을 해보니 같은 좌석이 표시 되어있는 불량 티켓이었다. 그 걸 가지고 승무원에게 따지러 간다는 그 남자를 뜯어 말려서 그를 앉히고 나는 브뤼셀까지 서서 올 수 밖에 없었다.
브뤼셀 중앙역에 간신히 발을 내 딛었을 때 어둑어둑 해진 하늘만큼이나 내 얼굴도 어둑어둑했다. 하물며 내 마음은 어떠했을 것인지 모두들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브뤼셀은 매우 화려한 도시였다. 일단 왕성이 있는 도시이며, 수 많은 공원과 정원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왕립 미술관의 뾰족한 지붕이었다. 누군가가 보았다면 저 것이 성당이나 왕성이 아닐까 생각할 정도로 멋진 첨탑이었으나 진짜 성당과 진짜 왕성은 그보다 더 화려할 것이 분명하였다.
내 손에 쥐어진 목적지에 대한 정보는 너무나도 간결하였다. 약도 하나 그려져 있지 않은 네크로필리아라고 쓰여져 있는 검은 종이 한 장이었고, 그 것으로 어딘지도 모르는 곳, 누구인지도 모르는 백작을 찾아가야 했다.
무작정 타고 올라간 버스는 수도도시 브뤼셀을 가로 질렀고, 뒤를 향한 좌석은 멀어져가는 광경 너머로 유명한 구조물들을 보여주었다. 오줌싸개 분수를 지나쳤나 하면 자그마한 정원도 지나쳤고 그 다음에는 큰 공원도 보였다. 그렇게 정처없이 버스를 타고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관광이 되는 것같았다. 재밌는 것은 그러한 유명한 건물들을 다 지나치고나서 한적한 길목에 들어섰을 때야 말로 정말 오래된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는 것이다. 마치 100 년이나 200 년 정도 된 건물에 아직도 사람이 살고 있는 듯 하였다. 근대화에서 밀려나 재개발을 받지 않은 덕분에 자신을 보존하여 이러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게 된 것이다.
그런 길을 돌아다니다가 결국에는 발견하였다. 시내 관광 버스처럼 보였던 이 버스가 돌아가는 길은 비교적 외진 길이었고, 빠르지 않은 속도로 모퉁이를 돌아갈 때 가로등에 붙어있는 보기 흉한 전단지… 그 중 내 손에 들려있는 검은 종이와 비슷한 것을 보았다.
그 다음 정거장에서 내린 것은 물론이고, 그 곳이 제테 공원 묘지였다는 사실에 어느 정도 길을 제대로 들어섰다는 느낌이 들었다. 중앙역에서 브뤼셀 외곽까지 나오느라 해는 완전히 졌고, 조문객 한명 없는 묘지 공원은 그야 말로 오싹함 그 자체였다. 그 곳에 평상복이라고는 해도 성직에 있을 때 사둔 옷이라 검은 색으로 맞춘 옷을 입은 남자가 커다란 콘트라베이스를 등에 지고 내렸으니 충분히 수상하게 보였을 것이다.
문제는 ‘보인다’는 것은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이 있을 때에나 사용할 수 있는 단어였다. 아무도 없는 묘지 공원 입구에 철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만약 이 안에 용건이 있었다면 나무 사이로 들어갈 수 있었으나 굳이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쪽인가 하면 죽은 사람이 안식을 취하고 있는 이곳이 내게는 많이 불편하였다. 죽은 자들이 일어나 나를 괴롭힐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아무도 없는 공원에서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매우 불쾌한 일이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그러한 불쾌한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묘지 공원의 길 모퉁이를 돌아 전단지가 붙어있는 가로등을 찾아가는 길에 끔찍한 사람들과 마주쳤던 것이다.
길거리에 앉아서 담배를 태우는 네 댓명의 청소년으로 보이는 사람들이었으나 그들이 멀리서부터 걸어오는 내 발걸음 소리에 고개를 돌렸을 때 한순간 심장이 멎는 듯 하였다. 그들은 인간의 모습을 하지 않고 오히려 악마나 사탄의 하수인과 같은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심한 경우 그들은 죽은 자들이나 죽음 그 자체로 볼 수도 있는 사람들이었다.
“아저씨도 집회 참가하러 왔어요?”
당황하여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들이 나를 올려다보며 말을 걸었다. 목소리는 틀림없는 사람의 것이었다. 이 밤거리 묘지 앞에서는 두렵고 끔찍한 악마의 자식들로 보였으나 사실 태양 아래에서도 흔히 보이는 불량아들의 모습과 다름이 없었다.
코와 입술 그리고 눈썹에 해 놓은 피어싱에 하얗게 분칠을 한 얼굴, 그리고 검고 곧은 머릿결, 갈기갈기 찢어진 듯한 검은색 재킷과 몸에 딱 달라붙는 티셔츠…. 이모 키즈였다. 아직 성숙하지 못한 정신으로 인생의 모든 고통을 겪었다고 생각하는 멍청한 녀석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간혹 악마숭배 쪽으로 빠지는 고스 족들도 있었다. 아마 이들이 그러한 아이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이들이 이렇게 비뚤어지게 된 것도 결국은 어른들의 잘못이다. 이들이 충분한 사랑과 관심을 받고 자라났다면 밤 늦은 시간에 공동 묘지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앉아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난 여길 찾아가려하는데.”
내가 입을 여는 순간 억양에서부터 차이가 나는 네덜란드어에 그들이 나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 내가 그들과 같지 않음을 알아차린 것같았다. 하지만 내가 내민 전단지를 받아든 그들 중 하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다시 전단지를 돌려주었다.
“에드먼드 백작을 말하는 거군요. 그런데 혹시… 경찰은 아니죠?”
“아니. 아니야. 그 건.”
“오늘 집회에 그분이 계실 거예요. 저희와 함께 가시면 만나실 수 있을 거예요.”
왜인지 그 집단의 리더 정도로 되어보이는 소년이 그리 말했으나 주위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내가 그들 사이에 끼는 것을 원치 않은 모양이었다. 그들은 은밀하고, 반사회적이며 더욱이 어른에 대한 반감이 컸다.
“롭, 그 아저씨 막 데려가도 되는 거야? 엉뚱한 사람이면 어쩌려고 그래?”
“괜찮아. 독일에서부터 여기까지 온 사람이야. 이 전단지 하나만 믿고 말이야.”
내가 그렇게 독일 사람인게 티가 나는 모양이었다. 짐이라고는 어깨에 맨 콘트라베이스 하나가 달랑이고 손에 전단지 한 장 들고 다니는 모습이 꽤나 허술해 보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것이 오히려 그 아이에게 신뢰감을 주었다.
“하지만 아저씨, 미리 말해두겠는데. 우리가 하는 일을 방해하려 하거나 하지마세요. 우리가 앞으로 하는 일이 어떤 건지 말씀을 드리자면, 무덤에서 시체를 파내고, 악마에게 제를 올릴 거예요. 그리고 악마로부터 힘을 얻기 위해 옷을 다 벗고 난교 파티를 할 건데. 그래도 되겠죠?”
구석 자리의 검은 옷을 입은 소녀가 배실 배실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입에 담기조차도 두려운 말들이었다. 게다가 늦은 밤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의 그러한 미소는 검은 입술 너머에서 가장 사악한 주술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 것이 또 다른 일종의 유혹으로 느껴졌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나는 악마에게 영혼을 판적은 없다. 단지 주님 대신 다나의 아름다움을 섬기게 된 것에 불과하였다. 그 것이 교만이고 이단인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단지 그 것을 포기할 수 없었고, 다른 것을 선택할 수도 없었다.
“그러면 안 돼.”
내가 과연 이들을 설교할 자격이 있나 싶었지만 입에서는 그 말이 먼저 튀어나갔다. 그 말로 인해 내가 그들에게 신뢰를 얻을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으나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다. 하지만 결과는 그들이 웃음을 참지 못하는 것으로 나왔다.
“풉… 이 아저씨 진짜로 믿는 것같은데?”
“아저씨 놀리지마라. 요즘 아저씨들이 얼마나 변태같은데, 너랑 빠구리 뜨는 거 생각하고 흥분하고 있으면 어쩌려고 그래?”
“까짓것 대주지 뭐. 늬들보다 이 아저씨가 더 나은 것같은데.”
“뭐야?”
이야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 여자애가 한말은 거짓인 듯 싶었다. 진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몰라도, 그런 무시무시한 일은 아닌 모양이었다.
“오늘 집회는 시청에 다 허가 맡고 하는 거예요. 파는 무덤은 가짜 무덤이지만 연출은 리얼할테니까 괜히 오바하지 마세요. 우리가 되고 싶으면, 우리처럼 행동해요.”
리더로 보이는 소년은 그렇게 말하며 검지와 중지손가락으로 입을 옆으로 쓸어내었다. 조용히 하라는 의미일까? 아니면 입가에 묻은 무언가를 닦아내는 모양이었을까? 알 수 없는 행동이었으나 그 행위를 나머지 아이들도 따라하였다. 아마도 그들만의 제스쳐인 모양이었다. 그 행위를 한 이후로 모두들 말이 없이 조용해졌고, 시계만 자꾸 확인하였다.
“잠깐만 난…”
여기서 한가하게 기다릴 수 없다고 말하려 하였으나 그 아이는 ‘쉬’ 하며 내가 말하는 것을 막았다. 더욱 기가 찰 노릇은 그 침묵의 표시가 지속적인 효과를 가지며 동시에 모두에게 유효했다는 것이었다. 그 집단 내에서 침묵은 매우 큰 비중을 차지했고, 서로 재미있게 놀기 위해 모였을 터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침묵을 유지하였고 그 것을 매우 중요시하는 듯 했다.
그리고 그들의 침묵이 어떠한 의미인지 알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이 집단 외에도 또 다른 고쓰 족들이 슬금슬금 모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들 역시 시끄러운 이들이 아니었으나 이들은 침묵으로 그들과 구분지어지고 있었다. 서로 신경 쓰지 않고 아는 체도 하지 않으며 집단적이나 또한 개별적인 덩어리 덩어리가 되어 서로 섞이지 않고 있었다. 마치 컵속에 들어 있는 모래 알갱이와 같았다. 이들의 모임은 무언가의 구심점에 의한 것이지만 그들끼리는 전혀 섞이지 않았다.
처음에 하나 둘 모이는 듯 싶었던 어두운 옷차림의 사람들이 열 명, 스무 명, 서른 명, 백 명 가까이 모이게 되자 조금씩 불안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공동 묘지 앞에 죽음의 분위기를 풍기는 창백한 피부의 남녀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은 죽은 자들의 축제와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것은 현실이었다.
지금까지 굳게 닫혀 있던 제테 공원묘지의 문이 활짝 열리면서 검은 드레스에 검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키가 크고 깡마른 여인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집회가 시작됩니다. 손님들께서는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그녀는 절제된 목소리로 말했고, 그제서야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던 아이들은 내 어깨를 툭 치며 묘지 안으로 들어갈 것을 권했다.
젊은이들의 어긋난 이단 숭배 행위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18: 고성의 백작
Jete 공원묘지 안으로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줄지어 들어갔다. 그들 사이에서는 어떠한 의사소통도 없었으나 마치 무언가가 그들을 강제하듯 혹은 그들 스스로가 절제하듯 한 줄로 길게 이어져 걸어 들어갔다. 전혀 급할 것도 없이, 아니 그 이상으로 그들 자신에게 어떠한 욕구도 드러내지 않은 채 조용히 조용히 한 줄로 선두의 여성을 따라 들어갔다. 침묵은 그들에게 있어서 일종의 질서였고, 의사표현이었으며, 정체성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막상 공원묘지 안쪽에서는 붉은 조명과 그 주위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가 마치 악마에 대한 의식을 치르는 듯 공포스럽게 보였으나 유치한 연출 이상의 것이 되지 못했다. 음향도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는 듯한 노랫소리가 기분 나쁘게 들렸을 뿐 본격적인 악마 숭배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은 그 것을 보러 온 것이었다. 고스 키즈들의 연령대가 20 대를 넘어가지 못하는 이유를 생각해보니 유치한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깊이 없는 나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이들에게는 이 행위들이 매우 큰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몰려 든 것이겠지.
“어둠에 속한 주민들이여 여기 모여주어서 감사한다. 둘로 나뉘어진 이 세상에서 빛과 삶, 그리고 행복을 탐하는 자들과 달리 우리는 어둠과 죽음 그리고 고통에 사무쳐 살고 있고, 그래야 하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다. 영원한 빛도 없고 영원한 삶도 없으며 영원한 행복은 없다. 아니 그 무엇도 영원할 수 없다. 보라 이 땅에 묻힌 사람들도 한 때는 빛 아래에서 행복하게 살았던 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모습을 보아라! 어둠과 고독 속에서 영원히 죽어 있을 그들의 모습을! 하지만 영원한 것은 없다. 그 무엇도 영원할 순 없다!”
붉은 조명과 그 조명을 받은 붉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중앙에 서서 연설하듯 소리치는 검은 옷의 사나이가 있었다. 그는 이 집회에 모인 사람들 중에서는 나이가 가장 많은 편이었고, 심지어 나보다도 연배가 많아보였으나 늙은이로 보이지는 않았다. 40 대 가량? 그 나이에도 이러한 일을 하는 걸 보니 철이 덜 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검고 풍성한 옷을 입고 있는 그는 이 아이들에게 꽤나 카리스마 있는 인물로 비춰진 모양이었다. 그의 행동과 말투는 어디선가 교육을 받은 사람처럼 상대를 압도하거나 그 깊이와 무게는 없다고 치더라도 기품은 느껴졌다. 하지만 그러한 이미지와는 달리 그는 직접 손에 삽을 들고 땅을 파기 시작하였다.
검고 풍성한 연회복을 입은 채로 삽질을 하는 모습은 부자연스럽게 비춰졌으나 모두 그 행동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가 하는 일은 대단한 일임이 틀림없었고, 그러한 옷차림으로 이러한 행동을 한다고 해도 전혀 품위에 손상이 가지 않을 일이 틀림없었다. 마치 다나의 아름다움을 위해서라면 막노동도 서슴치 않았던 나의 모습과도 같았다. 고귀함은 행위가 아니라 결과로 인해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는 힘들게 삽질을 여러번 하였고, 땅에 삽이 박힐 때마다 유치한 음향 효과로 사람의 비명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땅에서 연기가 솟구쳐 올라 마치 화산지대를 방불케하는 효과를 내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땅을 파내려가는 동안 모습을 드러낸 것은 새하얀 피부였고, 아름다운 여성의 유방이었다. 그런 거친 삽질에도 피부에는 흠집하나 나지 않았다. 그렇게 피부가 드러나기 시작하자 그 남자는 손에 쥐인 삽을 집어 던지더니 그 가슴을 쓰다듬다가 얼굴을 부비더니 다시 흙을 파헤쳐 그 밑에 묻혀 있던 여성의 얼굴을 파헤쳤다. 흙더미 밑에 누워있던 여성의 상반신이 드러나며 곧 하반신도 쑥 잡아 빼듯 꺼내어 앞에 마련해둔 탁자 위에 여성의 시신을 눕혀 놓았다.
세상에… 지금 저 남자는 무덤을 파헤쳐서 시체를 꺼낸 것이었다. 새하얗게 창백하며 움직임없고 심지어 숨을 쉬지 않는 여성의 몸은 틀림없는 시체였다. 그리고 그 시체는 벌거벗었고 또한 아름다웠다.
“샤마 인치트 아샤마! 라칼 코르 테 아갈레!! 이흐르 게이스테르 데스 무레스.... 에르쉐인트!”
남자는 탁자위의 여성의 이마에서부터 시작하여 알 수 없는 글귀를 새겨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접시 위에 담긴 붉은 액체로 글을 내려 적어가는 그는 입으로는 한마디 한마디 이교적인 주문을 외쳤고 아마도 지금 쓰고 있는 글귀가 그 것인 듯 보였다. 머리에서부터 시작해 내려가는 글귀는 두 가슴을 거쳐 명치, 배, 단전 그리고 국부에서 갈라져 양 다리에까지 이르렀고, 가슴부분에서는 양 어깨로 갈라져 나갔다. 인간의 몸을 일종의 나뭇가지 모양으로 사용하였고, 그 것은 마치 가계도와 같은 모습이었다. 만약 내 추측이 맞다면 저 것은 신들의 계보와도 같은 것이다.
“정을 다오~! 정을 다오~! 저항하지 말고 영이 시키는 대로 하라! 에트메덴 라우치 운드 라세 디치 트레이벤, 에트메덴 라우치 운드 라세 디치 트레이벤! 에테메덴 라우치 운드 라세 디치 트레이벤!”
그는 같은 말을 반복하였다. 그리고 그 말은 점점 여러 개의 목소리로 갈라지더니 마치 교회에서 설교를 할 때 복사들이 도와주는 것처럼 울림이 느껴졌다. 그 것은 누군가가 주위에서 도와주는 정도의 것이 아니었다. 내 옆에서 울리는 소리였고, 내 앞에서 울리는 소리였으며, 내 뒤에서 울리는 소리였다. 나를 둘러싼 모두가 마치 최면에라도 걸린 듯 주문같은 소리를 따라 읊었고, 모두들 바지의 지퍼를 내리고 성기를 꺼내고 있었다. 모두들 수음 중이었다. 그리고 여자 아이들은 그러한 수음을 도와주기 위해 입으로 해주거나 대신 손으로 만져주기도 하였다.
세상에나 이게 무슨 일인가? 정말로 난교파티라도 벌이려는 모양인가? 하지만 그 사이에서도 돌아다니면서 옷을 벗으려는 여자 아이들을 제지하는 사람들도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마도 주최측에서 고용된 사람인 듯 하였다. 그들도 이 사이에 섞이기 위해 검은 옷을 입고 문신을 했지만 이 아이들을 제압할 정도의 육체적 우월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랬기에 아이들 사이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사람들이기도 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은 다름 아닌… 너무 흥분하여 옷을 벗고 성관계를 맺으려는 커플들을 떼어 놓는 일이었다. 도대체 수음은 되는데 왜 간음은 안된다는 것일까?
“에테메덴 라우치 운드 라세 디치 트레이벤! 저항하지 말라! 영이 시키는 대로 하라! 무레스 에르쉐인트!”
그의 주문과도 같은 명령은 점점 무르익어갔고, 그 것은 마치 신비가들의 주문처럼 효과를 발휘하는 듯 하였다. 갑자기 붉은 빛이 하얀 빛으로 바뀌는 순간 5 분 가량 수음을 하던 청년들이 모두 정을 쏟아내었다. 모두가 마치 하나가 된 것처럼 빛 안에서 동시에 절정을 맞이하였고, 그 빛 안에서 작은 단도를 꺼내든 남자는 그들의 반응을 보고서 칼로 시체의 배를 찔렀다. 그러자 배에서 피가 솟아오르며 누워있던 시체같은 여자는 갑자기 ‘끼아아아아아악’ 하고 비명을 지르며 일어났다. 그녀의 비명은 죽음을 체험하고 있는 것처럼 소름끼치고 무서웠으나 모두의 감탄하는 목소리 ‘오오오오오’ 하는 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새로운 생명을 경외하라! 살아 움직이는 죽음을 목격하고, 무레스의 위대함을 찬양하라!”
지금까지의 침묵은 서서히 깨져갔다. 죽을 것처럼 비명을 지르며 일어난 여성을 목격한 이들은 한껏 흥분하였고, 수음을 끝낸 후에도 옷을 챙겨 입지 아니하였다.
“오늘의 집회는 여기서 마치겠다.”
그가 선언을 하자 주위를 둘러보던 덩치들도 물러섰고, 그 이후부터는 완전히 개판이 되었다. 흥분한 무리들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서로의 몸을 탐하기 시작하였고, 심지어 성행위를 시작하는 무리도 있었다. 도저히 봐줄 수 없는 모습에서 나와 함께 들어온 아이들도 이러한 모습일까 싶어서 돌아다보자 그 아이들은 비교적 냉정한 모습으로 옷을 고쳐 입고 있었다.
“좋았어?”
“최고야.”
그리고 틱톡 거리던 남자애와 여자애는 서로 무언가를 주고 받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이 주위의 사람들처럼 미쳐 날뛰지 않는 모습이 대견하였다.
“지금 의식을 진행한 사람이 바로 에드먼드 백작이예요.”
“지금 죽은 사람이 일어난거야?”
“연출이라니까요. 죽은 척하고 있다가 살아난 척하는 거예요. 어쨌든 저 사람 만나러 온 거면 따라가보세요. 우린 애들이라서 만나주지 않지만 아저씨라면 만나 줄지도 몰라요.”
“…… 그래… 고맙다. 그런데 왜 나한테 이렇게 도와주는 거니?”
도움을 받아놓고서도 이렇게 사람을 의심하게 되다니. 나도 조금은 세속의 때가 묻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가 들어야 할 이야기를 듣게 된 것같았다.
“아저씨에게서 냄새가 나니까요. 죽음의 냄새 그리고 그 걸 감추려는 냄새요. 저렇게 자기 욕구에 못 이겨 이곳에 왜 왔는지 전혀 깨닫지 못하는 쓰레기들과는 다르다고 느꼈어요.”
이 아이는 집단 성행위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내 곧 그 아이도 옆에서 달라붙는 여성들에 의해 키스를 당하게 되었고 그 아이도 그 것을 거부하진 않았다. 이 곳에 더 버티고 있다가는 나도 저렇게 알지도 못하는 여성 혹은 남성의 성적 대상이 될까 싶어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먼저 앞서 간 검고 풍성한 옷을 입은 남자는 두 명의 경호원과 함께 Jete 공원 묘지를 떠나고 있었고, 막 앞에 놓여져 있는 리무진에 몸을 실으려던 참이었다. 내가 생전 처음 보는 그 사람을 잡을 용기가 있었는가? 그리고 한때 가톨릭에 몸을 담았던 내가 그와 대화를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그가 정말로 내가 찾던 사람인가? 모든 질문에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막상 리무진 앞에 서서 차를 막았을 때 그 질문은 의미를 잃었다.
“파울 한 신부…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가 나를 알고 있었다.
19: 네크로필리아 2
그는 아무런 경계심없이 나를 자신의 리무진에 태워주었고, 그가 침묵을 지키는 만큼 나 또한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사실 가장 큰 걱정은 그가 나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파울 한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도 거의 한달 만이었고, 신부라고 불리기도 한달 만이었다. 나 자신을 움직이는 패러다임이 바뀐 이후로 그 것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던 것들이 떠 올랐으나, 사회의 족쇄는 생각보다 질긴 것이었다.
리무진은 교외 한적한 곳을 벗어나 오히려 험한 지형을 타고 올라가 산속에 위치한 성 앞에서 잠시 멈추는 듯 하더니 성문이 열리자 그 안으로 차가 들어갔다. 아이들이 그를 백작이라고 칭했듯 그는 정말로 유서 있는 가문의 백작인 듯 싶었다. 자동차 도로가 끝나는 곳에서 차가 멈추었으나 정작 우리가 내린 곳은 넓은 잔디밭 앞의 돌로된 보행로가 깔려 있는 곳이었고 쉽게 말하자면 허허벌판이나 다름없었다. 지나칠만치 큰 부지에 벽돌로 된 저택이 줄을 맞추어 네 채가 세워져 있었고 중앙에 가장 큰 본채가 자리 잡고 있었다. 마땅히 누군가가 찾아오는 곳 같지는 않았으나 한 때는 매우 큰 규모의 저택인 듯 싶었다. 방이 열 개 이상 되어보이는 별채가 네 개에 본채는 단단하고 아찔한 느낌의 고딕성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중앙 정원을 가로 질러 말라버린 분수를 돌아지나 굳게 닫힌 나무문의 본채 앞에 서자 검은 옷의 백작은 나를 한번 돌아보더니 힘차게 문을 열었다.
“에드먼드 성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미스터 한.”
그는 내게 미스터라고 하였다. 사실 그의 어색한 네덜란드 어에서부터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는 이 고장 사람이 아니었다.
“초대해주신 건 감사합니다만 갑작스럽고 또한 걱정스럽네요.”
“걱정일랑 붙들어 매십시오. 저는 이 고장에서 영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경찰을 부를 생각은 없고, 선생을 그들에게 내어줄 생각도 없습니다. 단지 이야기를 듣고 싶을 뿐입니다.”
그는 내가 범죄자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고, 나의 정체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까지 만난 외국인 중에 유일하게 히틀러 개그를 하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가 별난 사람이고 우리가 섞일 수 없는 관계라는 건 미리부터 알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호감을 자아내는 인물이 아니란 건 아니었다. 침묵을 깬 이후부터 그의 태도는 갑자기 돌변하여 입가에 광대같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으며 눈에는 장난끼가 배어나왔다. 말하자면 그는 호감을 불러일으킬만한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이야기라면 무슨….”
“아이들이 선생을 내게 보내준 걸 보면 알 수 있어요. 죽음의 냄새를 감추기 위해 옅은 포르말린 용액을 사용하셨군요. 사실 그 냄새에는 매우 익숙하답니다. 일단 들어가시죠. 제 컬렉션을 보여드리고 싶군요.”
포르말린 용액을 사용한 곳은 그 곳 뿐이다. 그는 내가 어깨에 매고 있는 콘트라베이스를 의식한 모양이었다.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단연 다나 크라우스…. 내가 사랑한 여인이며 동시에 아름다움의 근원이고 또한 죽은 시체였다.
“제 말투에 대해 조금은 의아하실 겁니다. 미스터. 사실 저는 벨기에 사람이 아닙니다. 영국에서 굴러 먹던 졸부지요. 높으신 분들의 광대 역할을 하다가 권력다툼에 희생되어 여기까지 몰려온 불행한 망명자랄까? 하지만 전 이곳이 좋습니다. 사실 좋으니까 여기에 온 거지만 말이죠. 저는 양면성을 매우 사랑합니다. 모든 것은 앞면이 있으면 그 뒷면이 있지요. 마치 파울 한, 당신이 인정 받는 젊은 신부였고 동시에 사람을 죽인 살인범인 것처럼 말이죠. 아, 경계하진 마세요. 흥미가 동해서 조사해본 것 뿐입니다. 어쨌든 양면성은 저를 정의내리기에 참으로 편한 단어지요. 한 때는 권력을 멋대로 휘두르던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이렇게 어둠 속에 숨어지내게 된 신세랍니다. 세상의 밝은 면만 바라보고 사람을 재밌게 해줘야 했던 저의 지금의 모습을 보십시오. 사람을 두렵게 하고 가장 어두운 곳에 숨어있어야 하며 동시에 죽음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보세요, 보세요. 벨기에가 어떤 나라입니까?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이 치고 들어와 건물들이 모두 부서져 나간 나라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는 건물을 보십시오! 제가 말한 건 다름 아닌 고딕 시청을 말하는 것입니다! 온갖 손으로 만들어진 정교한 디테일, 화려함, 그리고 거침없이 뻗어 올라간 웅장함! 아아… 고딕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더럽혀지기 전까지는 그토록 화려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화려함보다는 이 더럽혀진 의미가 더 마음에 들었던 것입니다. 화려함이 저의 과거였다면 타락은 저의 현재와도 같으니끼 말입니다. 그래서 구석 구석진 곳에 아무도 관리하지 않는 오래된 고성을 사들여 이런 모양으로 만든 것입니다! 환영합니다! 여기가 바로 고딕 박물관입니다!”
그는 쉬지 않고 계속 말을 하였다. 그의 말은 억양의 고저가 반복되었고, 필요한 부분에서는 몸을 이용해서 말할 줄 알았다. 마치 그는 연극을 하는 듯 하였고 그의 인생 자체가 연기로 살아가는 듯 하였다. 그의 진심이 느껴지는가 하면 그의 연기로 보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기나긴 말이 만약 연기라면 그는 애드리브에 능숙한 연기자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만약 이것이 그의 진면목이라면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그는 자신의 진실을 털어놓은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한 이야기를 하면서 나를 데리고 간 곳은 건물의 지하층이었다. 어두운 계단을 걸어 내려가는 동안 가스등 모양의 전등을 켜고 한 층을 모두 내려간 후에는 두터운 나무문이 가로 막혀 있었다. 그리고 그 문을 힘주어 연 백작은 내부의 스위치를 켜며 자신의 수집품들을 내게 보여주었다.
어둠이 밝혀지며 모습을 드러낸 것들은 끔찍한 것들이었다. 레버를 돌려 사람의 몸을 조이는 죔틀과 레버를 돌려 사람의 몸을 늘여 찢는 고문대가 놓여 있었다. 무엇보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한쪽 구석에 잘 매어져 있는 겸형의 진자였다. 지금 당장에라도 줄을 풀면 누군가를 해치기 위해 움직일 것만 같았다.
“고문실이군요.”
“죽음과 가장 가까운 삶이고, 삶에서 가장 먼 죽음이기도 하죠. 그래 어떻던가요? 약하고 힘없는 아름다운 10 대의 여성을 살해할 때의 기분은 피가 튀고 칼이 살을 베고 그 아름다운 형체 자체를… 오오… 오오오 경찰의 발표가 틀렸군요. 당신은 흉기로 그녀를 죽이지 않았어요. 목을 졸랐군요. 그래 당신의 손에서 삶과 죽음이 갈라질 때, 그녀의 반응이 어떻던가요? 당신은 어땠고요?”
그는 혼자서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그 이야기는 틀린 방향이었으나 그는 곧 옳은 방향으로 이야기를 바꾸었다. 그의 그 한마디는 그 날밤의 끔찍한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하였다. 내가 정신이 나가 다나의 목을 조르는 순간 나는… 정을 쏟아 내었다. 기분 좋았던 것이다. 내 정신이 그리 느끼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나의 육신은 그렇게 반응하였다. 괴로웠다. 한 마리 괴물로 전락해버린 나 자신이 두려웠고, 그러한 기억을 계속 떠오르게 하는 백작이 증오스러웠다.
“그만해요!”
“왜요? 당신은 내가 미처 건너지 못한 강을 건넌 사람이예요.”
“그만하라니까요!”
“난 돈으로 대리 만족을 느낄 뿐이지만 당신은 그 것을 손에 쥐었다고요!”
“제발 그만 두라면 그만 좀 해요!”
나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고 격양되어 가던 그의 목소리도 마지막의 그만 하라는 소리가 지하층 전체에서 울릴 정도가 되자 멈추고 말았다. 하지만 메아리치는 내 목소리가 사라지자 마자 그는 다시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다지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던 모양이군요.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손에 피를 묻힌 당신이 나보다 더 더러운 건 변함없는 사실이예요. 물론 나 자신도 신께 용서 받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말이죠. 양면성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인 이후로는 편해지더군요. 당신에게도 말씀 드리지요. 양면성에 대해서 말이죠.”
그는 고문대들이 모여있는 방을 가로질러 걸어가 아치형의 문을 지나쳤다. 그러자 복도가 주욱 늘어서 있었고 그 양 옆으로는 습도계와 온도계가 붙어있고 에어콘 시설이 붙어있었다.
“항상 화씨 70도 이하에 습도는 40 도 이하를 유지하지요. 이유가 뭘까요?”
복도를 지난 후 새로 나타난 방은 그의 설명대로 공기 냄새부터 달랐다. 약간은 싸늘한 느낌에 건조한 공기, 머릿속은 복잡했으나 기관을 타고 넘어오는 공기는 청량했다.
“미스터 한. 당신은 제게 없는 걸 가지고 있고 저는 당신에게 없는 걸 가지고 있어요. 보아주세요.”
그는 방의 한쪽 가장자리에서부터 둥글게 쳐져 있는 커튼을 조금씩 걷어내었다. 그러자 그 너머에 숨겨져 있던 검은 모습들이 드러났다. 썩지 못해 말라 비틀어진 사람의 형체를 한 그 것들은 나 역시 잘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내가 결코 원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가 네크로필리아를 자청하는 이유들이었다.
“죽은지 500 년에서 2000 년까지 되는 미라들입니다. 골격을 통해서 안면을 복원해내는 기술이 발명된 이후로 이들의 생전 모습을 추측할 수 있게 되었지요. 지금의 이들은 말라비틀어진 살가죽에 지나지 않지만 이들의 생전에는 틀림없이 아름다웠을 겁니다.”
그는 미이라 앞에 놓여 있는 초상화를 들어 내게 보여주었다. 그의 말대로 아름다운 여성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쉽게 눈을 뗄 수 없는 그런 미인이었다. 하지만 그 것이 화가의 상상력이 보태어져 있음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내 앞의 미라는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 미소 짓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것들은 모두 과거의 이야기지요. 지금 이들의 모습을 보세요. 추하고 흉하고 검습니다. 삶의 반대편의 것을 사랑하여 이렇게까지 왔으나 그들에게서 미적 감각을 찾기는 쉽지 않아요. 게이 변태들이 아름다운 파트너를 찾지 못해 뚱뚱하고 못생긴 남자 친구를 데리고 사는 것과 같은 거죠. 어떻습니까? 당신 눈에도 이들이 아름다워 보입니까?”
그는 죽은 미라들을 수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아름다움을 찾으려 하였다. 하지만 솔직한 심경으로는 도저히 그 것들을 아름답게 보아줄 수가 없었다. 입술이 말라비틀어져 치아를 드러내고 있는 모습, 눈 부분이 움푹 패인 모습, 그리고 물기 없이 말라 버려 뼈대 뿐인 시체를 누가 아름답다고 할 것인가?
“아니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죽음의 매력을 부정할 수 없기에 언젠가는 아름다운 미라를 만날 거라고 기대하며 살아왔지요. 그럼 보여주실까요? 당신의 콘트라베이스….”
그는 내 어깨에 맨 이것이 무엇인지 아는 듯 하였다. 이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그리고 그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당황스럽군요. 제가 왜 이 걸 보여드려야하지요?”
“이 세상에서 당신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지금 앞에 있으니까요.”
그는 손을 뻗어 콘트라베이스를 향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이 것을 열면 어찌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를 얼마나 믿어야 할지…
“이봐요. 나는 내가 가진 걸 모두 보여주었는데 당신은 도대체 무엇을 그렇게 숨기시나요?”
“이게 당신의 전부라고요? 그럼 내가 가진 전부는 어떤 것인데요? 그 것이 같은 거라고 생각하실 수 있는 겁니까?”
그러자 백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뭔가를 이해한다는 시늉을 하였다. 그리고 그는 무서울 정도로 예리하게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내가 당신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죽음의 팬으로서 죽음에 관련된 것들은 모두 관심의 대상이 되지요. 엽기적인 살인사건 그 것은 정말로 질 나쁜 냄새를 풍기지요. 냄새가 강하면 강할수록 눈에 띄기 쉽지만 결국 썩은 고기가 요란한 냄새를 내는 것과 다름없어요. 먹을 수 없는 거죠. 그렇기에 눈에 띄지 않는 은밀하고 신선한 고기를 찾는 일이 제게는 가장 우선시 되는 거랍니다. 당신의 기사를 보았습니다. 내 구미를 당기기에 충분했지요. 사람이 죽었는데. 시신을 찾을 수 없다! 그 시신을 찾는 사람이 되길 원했어요.”
“제 뒷조사를 하셨군요.”
“굳이 당신의 뒷조사라고 표현할 것까진 없어요. 저는 죽음의 냄새를 쫓은 것입니다. 알는지 모르겠지만 재력이 있고 의지가 있다면 참 많은 것을 할 수 있게 된답니다. 당신의 뒤를 쫓고 있는 독일 경찰 요나스 경위의 사건 보고를 손에 넣고 나니 확신이 들더군요. 깨끗이 치워져 있는데 혈흔을 발견했다더군요. 그 것도 방 전체에 발라져 있었다고 말이죠.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당신 자신은 알고 있겠죠?”
물론 잘 알고 있다. 경험 없는 내가 시신에 방부처리를 하기 위해 혈액을 뺄 때의 일이었다. 괴롭다. 다나의 죽은 모습을 떠 올리는 건 괴롭다. 하지만 그보다 더 괴로운 것은 그 추억이 너무나도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과정은 힘들었으나 지금보다 훨씬 빛나는 아름다움을 떠 올리게 되었고 그 것은 이상 그 자체였다. 나와 함께 다니면서 고생을 한 다나의 모습은 어떻게 되었던가? 냄새를 풍기고, 마르고, 눈도 잃었다. 그래도 여전히 아름답긴 하지만 그 모습이 점점 상해가는 것은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확신할 순 없었습니다. 그 이후의 일은 모르는 거니까요. 하지만 한 조력자의 협력을 얻었습니다. 루르몬트에 계셨죠? 그 곳의 한 중계업자에게 제 집회에 대해 소개 시켜준 적이 있었더랬죠. 그는 이런 종류의 섹스를 원하는 사람이 있겠냐며 반문했지만 그래도 내가 나눠준 팜플렛을 챙겨가더군요. 그리고 그가 당신에게 그걸 나눠준 후 그도 깨달은 겁니다. 당신이 수배된 사람이란 사실을 말이죠. 그래서 제게 경고를 해주더군요. 자기가 살인마를 내게 보낸 것같다고요.”
그가 나를 처음 봤을 때 한말이 떠올랐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내가 그를 찾아올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의 인상착의에 대해 물었을 때, 콘트라베이스가 걸리더군요. 그리고 당신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을 때도 콘트라베이스 케이스를 어깨에 걸어매고 있을 때. 확신한 겁니다. 그 안에 다나 크라우스의 시신이 있을 거라고 말이죠. 그리고 우린 좋은 거래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에 그가 콘트라베이스를 쓰다듬을 때 그의 손을 저지할 수 없었다. 그는 어떠한 형태로든 진실에 닿았다. 현장에 있지는 않았으나 투영된 사실을 종합하여 현실을 추측해 내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내가 죽은 그녀에게서 무엇을 발견했는지, 설령 모른다고 하더라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말한 대로, 이 사람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나를 이해하는 사람이었고, 또한 유일하게 이 아름다움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더욱이 그는 내게 살인의 죄를 묻지 않을 사람이기도 하였다.
참으로 뒤틀리고 괴이하고 사악한 이 사람이 그 누구보다 나와 닮은 사람이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저질러 버렸다. 어깨에 맨 케이스를 바닥에 놓고 열리지 않게 고정한 바느질을 억지로 지퍼를 당겨 풀어 버렸다. 그리고 서서히 내려진 지퍼 너머로 단단한 하드 케이스가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하드 케이스를 열자 검은 콘트라베이스의 핑거 보드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사건 현장에 핑거 보드가 사라진 콘트라베이스가 있었다고 했어요. 그게 여기 있었군요.”
그는 마치 퍼즐 조각을 풀 듯 진실을 알아가는 재미에 손뼉을 짝하고 쳤다. 그 것이 나의 기분을 상하게 하여 그를 한번 눈치로 바라보았고 그 것을 알아챈 백작은 즐거워하는 얼굴빛을 감추었다. 내가 이것을 감추고 싶어 했는지, 보이고 싶어 했는지. 왜 보이고 싶어 했는지 알 수 없게 되었으나 결국은 케이스를 완전히 열어보였다.
안에서 짙은 살냄새가 풍겨 나오자 나도, 그도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이 냄새를 감추기 위해 포르말린 용액을 얼마나 뿌려댔는지 알 수 없다. 죽음의 냄새, 그리고 죽음을 감추는 냄새… 추상적인 표현처럼 보였던 그 이야기는 사실 가장 형이하적인 표현이었던 것이다. 세련됨도 감춤도 상징도 비유도 아니었던 것이다.
“아름답군요. 세상에 정말로 아름답군요!”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러한 냄새가 결코 그녀의 아름다움을 퇴색시키지 못한다는 걸, 그리고 그 또한 알고 있었다. 정말로 분하고 동시에 기쁘기도 하였다. 내가 느끼는 걸 그가 느낀다는 사실에 그녀의 아름다움이 조금은 더 넓은 세상에 알려진 것 같아서 기뻤다.
“이 세상의 아름다움은 이것에서부터 비롯되었을 거예요. 세상에 정말로 아름답군요. 기대 이상이예요. 고대의 철학자들이 찾으려던 아름다움의 이데아의 형이하적 존재 아니 이것은 아르케(근원)라고 쳐도 좋아요.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라도 보존할 가치가 있어요. 아아… 파울 한 신부, 당신이 왜 이 아가씨를 차마 버리지 못하고 이곳 저곳 방랑하며 내 앞에까지 오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독일 땅을 벗어난 독일인과 영국 땅을 벗어난 영국인이 전혀 낯선 땅인 벨기에에서 만나게 된 이유가 있다면 바로 이 아가씨를 만나기 위해서 였을 것입니다. 아 이런 이런 죄송합니다. 눈물이 멈추질 않는군요. 이런 걸 내 눈으로 직접 보게 될 줄이야. 사랑하고 싶은 육신입니다. 고귀하고 아름답고, 완벽하군요.”
그는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그녀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그녀를 죽인 후에도 차마 묻지 못한 내가 느끼는 감정을 지금 막 다나의 모습을 본 이 사람도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그도 다나에게 사랑을 느끼고 있는 듯 싶었다. 그 때 내가 질투를 느껴야 함을 깨달았다. 케이스를 닫고 더 이상 그가 볼 수 없게 하자 그는 눈물 흘리던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런 걸 당신 혼자 누려서는 안돼요.”
“하지만 나누어 줄 수도 없어요. 세상에 나 말고도 그녀를 사랑할 수 있다는 걸 안 이상 더 이상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어요. 떠나겠습니다.”
“아… 안 됩니다. 그럴 순 없어요. 단 한 번의 경험… 내가 그녀를 본 이상 어떻게 그녀를 포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그녀는 죽음이고, 동시에 아름다움입니다. 그 것은 제게 있어서 신이고, 진리이며 또한 종교입니다. 확신합니다. 누구라도 이 아름다운 육신을 보면 사랑에 빠질 것입니다. 하지만 장담컨대 우리는 그것이 확연한 미의 화신이라는 것을 알지만 사람들은 도덕적 관념과 미처 벗어나지 못한 관습에 얽매여 어리석은 판단을 하고 말 것입니다. 말했다시피 이 세상에 당신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나 밖에 없어요.”
그의 말은 사실일 것이다. 내가 가장 무서워하던 일이었다. 다나의 아름다움을 사람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 아름다움을 그들이 누릴 것인가? 아니면 6 척 지하의 땅속에서 썩어문드러지게 할 것인가? 그들의 선택은 관습을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민중은 예수님조차 십자가에 매달았으며 소크라테스에게 독배를 마시게 하였다.
“다행히도 그 아가씨의 보존 상태는 매우 좋습니다. 아직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눈동자… 유리눈이겠지요. 그리고 적당히 마른 몸을 가지고 있으며 초보적이기는 하지만 방부처리 역시 잘 되어 있어요. 자, 이제 거래를 하도록 하죠. 당신이 그 아가씨를 계속 가지고 다니면 그 마지막에는 어떤 모양이 될지 아실 겁니다. 당신은 똑똑한 사람이니까 판단이 잘 서겠지요 그렇죠?”
그의 이야기는 그런 것이었다. 내게 시체가 있고, 그에게는 시체를 보관하는 장소가 있다. 즉 그는 내게서 다나를 빼앗아갈 생각이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그는 다나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었던 듯 싶었으나 그는 다나를 보자마자 그 아름다움에 대한 경외감을 숨길 수 없었다. 지금에 와서 그가 선심을 쓰듯 이야기하는 것은 별로 설득력이 없어 보였다.
“당신도 그 시신이 썩어가길 원하지 않을 것 아닙니까? 그 아름다움은 영원히 보전 되어야 할 가치가 있어요. 아니 그래야만 해요! 동의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그 건 동의합니다.”
하지만 내 품을 벗어난다면… 견딜 수 있을까?
“흐음… 당신의 마음을 알 수는 없지만 나의 마음에 당신의 마음을 투영할 수는 있습니다. 당신은 질투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죠?”
“내가 왜 질투를 해야 하죠?”
“왜냐하면 내가 당신을 질투하고 있으니까요.”
그의 말은 다름 아니라 결국에는 내가 그에게 다나를 넘겨주게 될 거라는 말이었다.
“모르시는 건 아니겠죠? 소유하는 것만이 사랑이 아닙니다. 그 대상을 위해 기꺼이 고통을 감수하는 것이 바로 사랑인 겁니다. 당신과 함께 있으면 그 아가씨가 어찌 될지 아시겠죠? 그리고 나와 함께 있으면 어떻게 될지도 알고 계시죠? 옳은 판단을 하세요.”
“어떻게… 어떻게… 내가 다나를 얻기 위해서 어떠한 댓가를 치른지 모르는 겁니까? 난 모든 것을 버렸어요. 더 이상 버릴 게 없다고요! 내겐 오직 다나 뿐이예요.”
“…… 그렇지 않을 겁니다. 충분한 대가를 지불하겠어요. 원하시면 언제라도 이 아가씨 아니 다나 양을 보러 오셔도 됩니다. 빠른 판단을 부탁드려요. 1분 1초마다 다나는 썩어가고 있어요. 그리고 그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겠지요.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곳 어디로든 보내드리겠습니다. 돈도 필요한 만큼 드릴거고, 독일 경찰이 당신을 찾지 못하게 해드리겠어요. 당신은 모든 것을 잃었지만 다시 시작하기에는 충분하게 보상해드리겠어요.”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그런 게 가능할까? 누누이 말하지만 단 한 번의 경험이 사람을 바꾸어 놓는다. 난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다. 하지만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콘트라베이스를 다시 열어서 그에게 밀어 넣었다. 마치 엄마 뱃속에 들어있는 태아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는 다나의 새하얀 육신이 망막 위에 새겨지기를 바라며 계속 쳐다보았다.
“백작… 당신 말이 옳아요. 처음 다나를 보았을 때 느낀 내 감정은 사랑이었어요.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아름다움이고, 가장 순수한 미였어요. 그 목숨을 앗았어서는 안됐어요. 어떻게보면 그 때부터 전 신부자격 박탈이었네요. 부디… 그녀의 아름다움이 영원하도록 부탁해요.”
“저 또한 영원성을 바라고 있습니다. 미스터 한.”
그리고 그는 그 자리에서 수표를 한 장 끊어 주었다. 결코 적은 액수는 아니었으나 내가 기대한 액수 또한 아니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신을 건네주고 받은 돈은 5만프랑(약 120 만원)이었다.
“일단 이 걸로 여독을 푸십시오. 제 차를 타고 나가시면 변두리에 킴스라는 바가 있을 겁니다. 2 층은 여관을 하고 있고, 감자, 소시지, 맥주 다 있습니다. 독일인이 좋아할만한 곳이니 에드먼드 백작이 소개해줬다고 하면 섭섭하진 않게 대우할 겁니다.”
그 돈이 전부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이 정도 액수가 그저 하룻밤 접대용이라고 생각하니 더 많은 것을 누릴 수 있겠구나 싶었다.
“일단 오늘은 물러가겠습니다.”
그동안 어깨를 내리 눌렀던 콘트라베이스 케이스를 놓고 나오는 기분은 생각 외로 쾌적했다. 다나… 그녀는 완벽한 아름다움이며 동시에 내게 채워진 족쇄와 같았다. 분명히 앞으로 우울해질 것이다. 그러나 지금 당장에는 왜인지 모를 해방감을 느끼고 있었다. 무거운 짐을 벗어던졌다.
나의 아름다움이여… 나의 여인이여… 다나 크라우스… 헤어진 연인에게 그러하듯 울며 돌아서 행복을 빌어주는 일 같은 건 내게 가능하지 않았다.
20: 양면과 신뢰
백작의 운전사가 나를 태우고 성에서 나와 산어귀의 한적한 거리에 내려주었다. 브뤼셀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지간히 먼 곳까지 온 모양이었다. 앞으로 어디를 더 가야할지 알 수 없었기에 기사에게 요청할 것도 없었고, 그 역시 일을 잘 알고 있는지 마을 적당한 곳에서 나를 내려주었다.
“혹시 필요하신 게 없으시면 돌아가 보겠습니다.”
“네 수고하셨어요.”
그는 정중히 인사하고 다시 기다란 리무진을 타고 돌아갔다. 결국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에 아무도 없는 거리에 홀로 남겨지게 되었다. 항상 매고 다니던 콘트라베이스도 없다. 다나도 없다. 그야 말로 아무 것도 남지 않은 모습이 되었다.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하는지, 왜 살아가는지… 다나에게 옳은 일을 하기 위해 그녀를 두고 왔으나 정작 나 자신에게는 가혹한 일이 될 뿐이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 모든 것을 버려서 얻은 것을 또 잃었으니 내가 얻는 공허감은 당연한 것이었다. 맨몸으로 온 인생, 맨몸으로 가는 것. 그 동안의 경험들이 유쾌하고 즐거웠다면 감사할텐데… 난 그게 좋았던 것인지 끔찍했던 것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래도 확실한 것은 몸이 가벼웠다는 것이다. 멍에와 같은 콘트라베이스 케이스를 더 이상 가지고 다니지 않으니 평소보다 발걸음도 빨랐고 더 먼거리도 아무렇지 않게 갈 수 있을 것같았다. 원한다면 다시 트라움 성당으로 걸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와서 다시 돌아가면 무엇이 남아있을까? 없다. 아니 없는 것만 못하다. 돌아간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마이어 씨의 분노, 요나스 경위의 처벌, 그리고 메트만 시 당국의 반응, 독일의 사법체계와 종교적 책임. 파면, 해임, 징역… 그리고 매장.
신을 버리고 미를 찾아다녔으며 이제는 미도 잃어버려 내가 살아가는 의미 자체가 없게 되었다. 오직 지옥의 불구덩이가 내가 있을 그 곳이었고, 그 곳에서조차 나를 버릴까 두려워하게 되었다. 하늘 아래 내 몸 하나 누일 곳이 없었다.
그 때 발견한 곳이 킴스라는 간판의 술집이었다. 백작이 말한 그 곳이었다. 내 고향 메트만을 대신할 만한 곳이 될까 싶었다. 구운 소시지 냄새가 얼핏 나는 것같았다. 아니 그 것은 공기를 타고 온 냄새가 아니라 내 기억 속의 그리움이었다. 그 냄새를 기대하며 들어간 바에서 처음 맡은 냄새는 좋게 말하자면 짙은 맥주 냄새였고, 나쁘게 말하자면 토해 놓은 맥주 냄새였다. 백작이 말한 것처럼 소시지가 있고 맥주가 있고 구운 감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결코 고향과 같을 순 없는 냄새였다.
“어서오세요. 혼자신가요?”
하지만 문 앞에 들어섰을 때 마중을 드는 여인은 검고 깊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도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것이 내게 어떠한 의미를 주지는 못하였다. 그녀는 다나가 아니었고, 다나의 일부를 가지고 있을 수는 있었으나 내가 아는 아름다움에 비하면 열등한 복사본에 지나지 않았다.
“네, 에드먼드 백작의 소개로 왔습니다.”
“아… 네.”
에드먼드 백작의 이름은 그녀로 하여금 어떠한 반응을 이끌어내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반응은 길지 않았다. 평범한 절차와 다름없이 혼자서 앉기 위해 가장 작은 4인용 테이블로 안내 되었고, 그녀는 주문도 받지 않은 채 돌아섰다.
평소 같으면 콘트라베이스를 위해 두 사람분의 자리를 차지해야했지만 지금은 홀가분하게 앉기만 하면 되었다. 책임과 의무를 벗어던지고 받은 댓가였다. 육신의 평안인 셈이다.
자리에 앉은 채 주머니를 뒤져서 은행에서 환전한 지폐를 세어보았다. 장수로는 두둑해보였지만 정작 금액은 단촐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했으니 더 기대해야 하는 것인가 생각되었으나 다나를 돈으로 팔아넘긴 모양새는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그냥 떠나버릴까? 그렇다면 물질에 이끌리는 듯한 초라한 모습은 보이지 않아도 될 것이다.
보인다고? 도대체 누구에게 그렇게 보인다는 건가? 다나는 죽었다. 신으로부터는 도망쳤다. 사람들은 무지하다. 결국 나 자신의 문제였다.
돈을 세는 나 자신이 초라해보여 다시 지폐를 추슬러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 모습이 주위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였는지는 몰라도 조금은 관심을 끈 모양이었다. 돈을 꺼내 놓는 일은 그다지 좋은 모양새가 아니었다.
웨이트리스는 바의 카운터에 앉아있는 주인에게 뭐라고 이야기를 나누더니 바로 주방에서 이슬 맺힌 포트를 꺼내와 내게 내어 주었다. 희고 두터운 맥주잔에 노란 오줌줄기처럼 맥주를 따라낸 그녀는 무표정하게 내게 시선을 주고는 돌아섰다. 주문을 하지 않았는데도 맥주가 나왔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인스턴트 소시지가 나왔고, 알루미늄 호일에 싸인 구운 감자도 나왔다.
에드먼드 백작이 말한 대로의 메뉴였으나 내 고향의 냄새는 전혀 나지 않았다. 무엇이 되었든 이 곳 안에서는 싸구려 복제품 그 이상이 되지 못했다.
소시지를 누런 소스에 찍어먹다 보니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에드먼드라는 이름이 섞이면서 시선이 내게 간혹 넘어오기도 하였다. 나와 눈이 마주쳐도 그들은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고, 내용은 내가 도대체 그에게 무엇을 넘겨주었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남의 이야기를 안주거리로 삼아 넘기는 사람들이 내게 어떠한 영향을 끼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 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착각이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게 되어 있었다. 매우 사소한 호기심 혹은 실수가 주체할 수 없는 결과를 만들게 되는 것이었다.
그 것은 그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고 내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더 나아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으로 일종의 진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서로 다른 것들이 만나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
건넌 테이블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생판 모르는 남인 나를 안주거리로 삼아 농짓거리를 하던 두 남자가 있다.
이들이 만약 두 사람이 아니라 각각의 개인이었다면 농담 자체가 성립하지 않았을 것이고, 호기심이 외부로 표현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혼자가 아니었다. 서로간의 정보 교환의 결과로 하나의 가정을 이끌어 내었고, 그 가정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정보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 것이 바로 나였다. 그들은 자신의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내게 접근해왔던 것이다.
“안녕하쇼?”
“네?”
생판 처음 보는 사람의 테이블로 다가온 두 남자는 점점 다가오면서 그들의 모습을 구체화 시켰다. 그저 두 사람이었던 그들은 이내 곧 나이가 들어 보이는 한명과 그에 비해 젊어 보이는 한명으로 비춰졌다. 그들의 접근은 우호적이진 않았으나 위협적이지도 않았다. 그저 원하는 걸 묻고 돌아가겠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쪽의 허가 없이 멋대로 내 맞은편 자리에 앉는 것은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결국 그들은 불쾌한 두 사람이 되었다.
“에드먼드 백작을 만났다고 들어서요.”
“네? 아… 네.”
“별 뜻이 있는 건 아니고, 이 친구랑 내기를 해서 그런데. 백작한테 혹시 뭘 주시지 않았나 해서요.”
“그게 무슨 뜻이죠?”
“아니 대답만 해주세요. 돈이 3천 프랑 걸린 일입니다.”
자기들끼리의 내기에 나를 끌어들이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내가 백작에게 무엇을 주었는지는 말할 수 없었다. 그저 추상적인 대답 외에는…
“굳이 준 게 있다고 한다면 아름다움을 주고 온 것같군요.”
“아! 여자!”
젊은쪽의 한명은 아름다움이라는 말에 바로 여자를 떠 올렸다. 세속인의 아름다움이라고는 오직 여자 밖에 없구나 싶었다. 그리고 그것은 진실에 너무나도 가까워 나 자신을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나를 더더욱 놀라게 한 것은 그러한 논리의 과정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이었다.
“백작이 또 하나 물었군. 그래, 형씨는 도대체 어떤 말에 속아 넘어갔수?”
“속다니요?”
“이 아저씨 아직 감을 못 잡으신 모양일세. 에드먼드 백작을 만나고 왔대서 뭔가 한몫 잡으러 온 모양이구나 싶었는데 순해 빠진 범생이였구려.”
나이가 든 한명은 나를 어리석은 사람으로 판단하였고 나이가 적은 나머지 한명이 백작의 비밀을 이야기 하였다.
“저기 이 술집 말이죠, 사실은 백작이 지어다 준 겁니다. 이 바의 주인인 저 치가 백작한테 홀딱 넘어간 거죠.”
“넘어가다니요?”
“서빙 보는 여자 있죠? 이 집 주인의 부인인데 보시다시피 꽤나 미인이잖아요. 그게 미인이라면 환장하는 백작에게 하루 빌려줬다는 소문이예요.”
“불결한 이야기군요! 차라리 듣지 않는 게 낫겠어요!”
결국 백작의 사생활이 더럽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떠벌이들이었다. 그들의 말이 사실이고 아니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그들이 옳은 사람으로 비춰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것이 내가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진실이었다.
“그래요? 우린 형씨가 백작에게 뭔가를 줬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 것이 과연 형씨에게 좋은 일일 거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백작의 변태적 변덕에 하나의 수집품을 늘린 것에 불과하다고 확신해요.”
백작의 변태적 변덕이란 말에 불쾌한 상상이 떠 올랐다. 알몸이 된 다나의 몸에 백작이 그 육중한 몸으로 밀어붙이는 모습이었다. 시신에 대한 모독이며 동시에 아름다움에 묻는 오물과도 같았다.
“그렇다면, 왜 저 남자는 백작의 명령을 듣는 거죠? 자기 아내와 놀아난 사람이란 걸 당신들이 알고 있다면 그도 역시 알고 있을텐데요.”
“물론 알고 있지. 하지만 그 댓가로 받은 것을 보시오. 비록 큰 집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동네에서 몇 안되는 바를 운영하게 되었잖수?”
“그 사람 완전 변태예요. 자기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어떻게든 쏙 빼먹는다니까요. 그래, 아저씨도 백작한테 여자 두고 온 건가요?”
“난 그렇게 말한 적 없어요!”
하지만 사실이었다. 다나는 아름다움 그 자체지만 변태의 시선에서는 한낱 여자로밖에 보이지 않을 수도 있었다. 백작의 신뢰감은 깊지 않았으나 이들에 대한 신뢰감 역시 바닥을 치고 있었기에 조금씩 갈등이 생겨났다. 아니 사실 다나가 관련된 문제였기에 머릿 속에서부터 가슴 속까지 방망이질 치는 듯 하였다. 아니 오히려 상투적인 표현이 도움이 되었다. 피가 거꾸로 솟았다. 단지 그 것을 몸밖으로 표현하지 않을 정도의 이성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럼 백작이 그런 쓰레기같은 인물인데 왜 이 마을에서 그를 내 쫓지 않는 거죠?”
“글세 말이올시다. 사실 백작이 굳이 쓰레기라면 재활용 쓰레기 축에 낀단 말이오. 그렇게 안 좋은 이미지로 도배가 되어 있으면서도 이 마을을 유지 시켜주는 건 백작의 노력이라오, 그는 한가지 과오를 저지를 때마다 한가지 보상을 내려주곤 했으니 사람들로서는 백작의 행보에 관심을 보이게 되어 있소.”
한가지 과오에 한가지 보상 그 것은 그가 그렇게 말하던 양면성을 떠 올리게 해주었다.
“이 가게가 한 여인과의 불륜으로 만들어 낸 것이라면, 공동묘지에 병신 새끼들을 몰아오는 대신 고아원을 하나 차려주기도 했지요. 그리고 간혹 공사현장에 나타나서 육체노동을 자처하기도 하며 크게 회식을 시켜주기도 한다오. 그 다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사람들은 불안해 하곤 했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크게 한바탕 마셨으니 다음날 길거리에 쓰러진 채로 발견되었고 역시나 실컷 마셨으니 바지에 오줌을 지렸지 뭐요! 그 다음 그가 한 일은 자신을 비웃은 사람들을 모욕죄로 고소하는 거였소! 물론 뒤늦게 공소기각이 되었지만 백작의 의지인지 법관의 의지인지는 아직도 모르는 일이고 말이오.”
그의 양면성은 깊은 심연의 것이 아니었다. 형이상적인 사유의 형태에서 나오는 정반합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의 행위 자체가 둘로 갈라져 있는 것이었다. 불쌍한 사람, 머리도 몸도 둘로 갈라져 어느 쪽의 행동을 하더라도 서로 반대되는 면에서는 자신의 행동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 일관성이란 자신을 파괴하는 요소인 셈이었다.
한순간 그는 나를 이해하고 나를 동정하였으며 내게 애걸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것은 그 순간의 일일 뿐이었다. 그가 양면성을 사랑하는 이상 그는 나를 파괴하고 싶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내가 이들에게 들은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전제 아래에서의 이야기였다.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와는 상관없는 이야기 같군요.”
“에? 백작의 고성에서 나오신 거 아니었습니까?”
“그 말은 사실이지만 고딕 박물관을 관람하러 간 것 뿐입니다.”
“이런… 그냥 병신… 아니 여행자였군.”
나이 든 남자는 그렇게 말하더니 그냥 자리를 떠나기 싫었는지 내 테이블에 맥주 한 잔을 더 시켜놓고 시간을 빼앗아서 미안하다고 사과 한마디를 남겨 놓고는 서둘러 가게에서 나갔다. 나가면서 그는 어린 남자에게 지폐를 몇 장 세어서 주었다.
“썩어빠진 게이 놈들.”
그들이 지나간 자리를 청소하던 웨이트리스는 내 자리로 옮겨 와서 그들이 마신 잔을 거두었다. 그러면서 내게 시선을 주는데 그녀의 시선이 나에 대한 경멸인지 아니면 추가 주문을 위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녀의 앞으로 숙인 모습에서 풀러진 목소매 단추 너머로 그녀의 늘어진 가슴이 아름다웠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저 사람들의 쓸데없는 소리 들을 거 없어요. 잠깐 백작이랑 사귀었던 거고, 우리 부부는 자유 연애 서약을 한 것 뿐이라고요. 내가 원한다면 당신이랑 잘 수도 있어요. 알았어요?”
“아니 전 그러고 싶진….”
“그럼 내 가슴 쳐다보는 거 그만두세요.”
이제 알 것 같았다. 그녀의 시선은 경멸이었다.
“아, 여기 여관도 한다고 들었습니다.”
“숙실이 필요하시면 2 층으로 올라가세요. 다 비어있으니까 끝방에 들어가 계시면 나중에 올라가서 체크인 할게요.”
“몇호실이죠?”
“끝방이요.”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녀가 완고하게 말한 터라 더 이상 묻지 못하였다. 다만 내가 먹은 음식 값이나 다시 묻고 팁과 함께 그 가격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을 뿐이었다.
불친절한 주민과 불친절한 가게를 경험하고 계단을 통해 2 층으로 올라섰다. 그제서야 맨 끝 방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2 층에는 마주보는 두 개의 문과 복도 맨 끝의 문, 이렇게 문이 달랑 세 개 뿐이었다. 방이 달랑 세 개 뿐인 여관이라니… 그러다보니 방에 호실을 적어둔 패도 걸려있지 않았다.
끝 방이라고 했으니 복도 끝의 저 방을 말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침대와 화장대 말고는 볼게 없는 허름한 방이 나타났다. 그래도 시트는 깨끗했고, 테이블 앞에 의자가 놓여 있어 다리를 올려놓고 독서를 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독서라… 웃옷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계속 심장 곁에 담아 둔 책이 한권 나왔다. 이 세상에 내가 의미를 둘 수 있는 유일한 책이었다. ‘다나의 일기’ 여행하는 동안 마음에 여유가 없어 진득하게 읽어볼 수 없었던 그 책이었다. 사실 읽을 내용이 별로 없기도 했다. 한 소녀의 나에 대한 애정에 대한 기록이었다. 그녀는 나를 사랑했다. 나도 그녀를 사랑했다. 하지만 동시에 미워하였다. 미워할 이유가 있었는지, 사랑해도 되는 것이었는지 이제는 알 수 없게 되었고, 나는 해서는 안 될 선택을 하였다. 어쩌면 그러하였기에 그 사랑을 깨닫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 내가 성직자를 계속 선택하였다면… 절대로 그러한 아름다움을 깨달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것을 몰랐다면… 그녀는 살아있었을 것이고, 또한 그녀를 타인에게 놓아주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책의 마지막 장을 열었다.
‘파울 신부님께 오늘 영세를 받아서 기분이 좋다. 이름은 에스더로 하였는데 신부님께서 머리 위에 손을 올려주셨을 때 느낌이 좋았다. 영성체를 받을 때 손에 입술이 살짝 닿았는데 손가락을 혀로 핥고 싶었다. 파울 신부님이 너무 좋다. 그분께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좋은 건 좋은 건데 파울 신부님은 왜 신부님일까? 가슴이 너무 아프다. 그분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하고 싶다. 가톨릭 신자가 되었으니 이제 그분을 만나러 갈 핑곗거리는 갖춰졌는데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할까. 파울 신부님이 보고 싶다. 아아 너무 보고 싶다. 고해성사 받으러 간다고 하고 찾아갈까? 시간이 너무 늦지 않았을까? 아니 더 늦기 전에 갔다와야지.’
그리고 그녀는 내게 죽임을 당했다. 만약 그 일이 없었더라면… 지금 내가 손에 잡고 있는 이 하얀 빈 페이지에 어떤 이야기가 쓰여졌을까? 내가 영원히 알 수 없었던 이야기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보고만 있어도 눈물이 나는 다나의 시신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 것조차 기억을 뒤져야 했다.
“다나… 다나 다나…”
이름을 여러 번 부르는 것으로 기억을 되짚어갔고,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 자신에 대한 참회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저 그리움에 사무쳐 괴로운 시간이 나를 울게 하였다. 그런 울쩍한 마음에 창을 열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산골마을의 맑은 공기에 밤하늘의 별은 밝았다. 가장 밝은 별에서부터 시작하여 가장 어두운 별까지 모두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멀리서부터 빨갛고 파란 불을 교대로 깜빡이며 다가오는 경찰차 역시 볼 수 있었다.
“그의 양면성이 나를 팔아넘겼구나.”
결국 술집에서 만난 사람들보다 더 못믿을 사람이 바로 백작이었던 것이다.
21: 다르다는 것은 같지 않다는 것이다
백작이 권해준 여관에 들어가자마자 경찰이 들이닥쳤다.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은 무엇이며 내가 할 수 있는 생각은 무엇이었겠는가? 오직 한가지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도망치는 것과 동시에 백작에 대한 배신감을 느끼는 것이 그 것이었다.
경찰들이 계단으로 오르는 동안 창문을 통해 가게 밖으로 나가야했고, 어두운 골목길을 선택하여 경찰들을 따돌리느라 한 시간 가량을 알지도 못하는 동네의 미로를 빙글빙글 돌았다. 분노는 내가 가야할 방향을 정해주었으나 그와 동시에 평정심을 잃게 하여 옳은 방향으로 가는 것을 방해하였다.
혼란 속에 잡히지 않으려고 정신없이 뛰었고, 분명히 똑같은 길목도 여러 번 드나들었다. 되도록 백작의 저택 방향을 향하려 노력하였으나 익숙지 못한 길을 돌아다니면서 오히려 야경꾼들과 몇 번이고 마주치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죄책감과 위기감 그리고 동시에 배신감으로 가슴이 두근거렸으나 그들은 자기들끼리의 대화에 열중하였고, 맨몸으로 걸어지나가는 이방인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아아… 만약 내게 콘트라베이스가 있었다면 그들은 나를 불러 세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 것을 두고 온 지금의 나는 딱히 수상한 사람도 아닐뿐더러. 내가 저지른 여러 죄 중 하나를 드러나지 않게 해주었다. 더 이상 나는 시체를 지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게 된 것이었다.
킴스 바의 종업원과 주인을 만나지 않는다면 길거리에서 나를 알아볼 사람이 없다고 판단되자 그제서야 큰 길로 나설 용기가 났다. 대로에 나선 후에는 내가 가야할 길을 판단할 수 있었다. 여기저기에 길의 이름이 적혀 있는 표지판이 있었고, 현재 나의 위치도 알 수 있게 작은 마을 지도도 있었다.
무엇보다 도움이 되는 것은 벽에 붙어있는 검은 포스터였다.
‘고딕 박물관 찾아오시는 길’
이라고 약도까지 친절하게 그려져 있는 포스터였다. 그 포스터를 쥐어뜯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마치 백작의 얼굴이 비춰 보이는 듯한 느낌에 증오를 담아 확 찢었기에 포스터는 약도부분을 제외하면 보기 흉하게 찢어져버렸다.
만약 내가 그를 찾아간다면 그는 나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아니 그 것보다 나는 그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바에서 만난 두 사람의 말에 의하면 그는 변태적 성취향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는 다나를 안을 것이다. 그녀는 죽은 시체이며, 동시에 아름답기에 그의 욕구를 채워줄 것이다. 왜 그럴 것이라는 걸 생각 못했을까? 그녀의 아름다움이 형이하로 표현된 형이상의 근원이라고 생각하였기에 너무나도 고귀하게 여겼던 것이다. 내게는 틀림없이 그러했다. 하지만 그에게도 그러하리라고 생각했던 게 실수였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도 분명히 그녀에게서 아름다움을 찾아내었고, 감동을 받았다. 그는 나와 같았다. 하지만… 그는 결국 나를 배신했다. 더러운 속임수를 썼다. 결국 내가 본 그의 모습은 전부가 아니었던 것이었다.
양면성, 웃는 얼굴로 칼을 꽂는 모습이었다. 그는 아름다움을 숭배함과 동시에 아름다움을 더럽히고자 하는 욕구를 품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유지와 파괴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혹은 번갈아가며 유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가 죽음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그 것을 알아챘어야 했다. 사랑은 삶이지 죽음이 아니다.
생각의 정리가 끝났다. 그에게서 다나를 돌려받을 것이다. 그에게 있음으로 인해 다나가 유지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러기에는 다나의 순수성이 파괴될 것이었다. 만약 그 것을 막는다면 난 두 번째 살인도 감수할 것이다. 솔직히 그렇게 하고 싶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빼앗아가고도 나를 또 한번 배신까지 하였으니, 그 것을 지키기 위해서 어떠한 행동을 하든 정당하다고 판단되었다.
결코 짧지 않은 거리의 꼬불꼬불한 산길을 따라 올라갔다. 오직 백작의 성에 다다르기 위한 포장도로였으니 그 길을 따라 걷는 사람은 나뿐이었고, 심지어 그 길에 마주친 자동차 한 대 없었다. 달도 절반뿐인 어두운 길거리에 어두운 옷차림을 한 나는 마치 스스로 사신이라도 된 듯한 환상에 젖어 백작을 때려눕힐 생각을 하였다. 그 것은 가학적 쾌감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나의 분노를 해소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분노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사그라든다고 하였으나 다나의 새하얀 알몸에 매달려 꼴 보기 싫은 짓을 하고 있을 그의 모습을 떠 올리면 오히려 새로운 분노가 치솟는 듯하였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그를 죽이고 싶어졌다. 성 안에 들어가면 나무를 하나 분질러 막대기를 만들어 들어갈 생각이 들었다. 그 것으로 머리를 때리면 정신이 번쩍 들것이며 또한 그는 공포에 사로잡히고 자신의 행동이 그르다는 걸 깨달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한 댓가가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살아있을 가치가 없다.
시간이 지나 해가 뜨기 시작할 무렵 나는 백작의 성 안에 들어왔다. 뾰족한 창살로 가로막은 문을 넘어 들어와 이슬 맺힌 풀밭을 지저분한 신발로 밟으며 백작의 저택을 향해 걸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었기에 나를 저지하는 사람도 없었다. 마치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을 아무도 모르는 듯 했다. 백작의 계산으로는 내가 경찰에 잡혀있었을테니 나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겠지. 하지만 난 지금 이 곳에 서 있다.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주변의 나무를 둘러보았다. 적당한 나뭇가지가 있나 싶었으나 생각보다 사람을 때려 죽일만한 나무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나뭇가지가 힘이 있고 곧은 것들은 너무 키가 컸고, 키가 작달만한 것들은 대부분 상록수인데다가 가지에 힘이 없었다. 이 자연을 그리 만든 분이 다름 아닌 주님이라고 생각하니 조금은 아이러니하였다. 사람을 죽일 상황에서 신을 떠 올리다니.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나의 주님은 나를 말리지 아니하셨다.
사람이 만들어 놓은 물건, 풀밭 구석에 쓰러져 있는 삽자루를 부러뜨리자 사람을 때려잡기 훌륭한 몽둥이가 되었다.
그 몽둥이를 어깨에 매고 굳게 닫혀있는 백작의 저택의 문을 살짝 열어보았다. 문이 잠겨 있을 거라고 생각하였으나 사실은 반쯤 열려 있었다. 모든 것이 나를 위해 상황이 마련된 듯 싶었다. 백작의 방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기에 복도를 지나가면서 문을 하나씩 하나씩 열어보았다.
긴 복도에 여러 개의 방이 있었고, 그 방은 모두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방문을 열 때마다 보이는 것은 나를 경악케 하였다.
처음으로 연 방 안에는 한 여인이 손발이 묶인 채로 눈가리개가 되어 있었다. 벌거벗은 알몸으로 누군가에게 학대당하는 듯 보였으나 그 피부만큼은 새하얗고 아름다웠다. 아무래도 백작의 성취향이었을 것이다.
그 다음방은 온몸에 달라붙은 검은 옷을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숨도 쉴 수 없을 정도의 갑갑함으로 입고 있는 여인이 있었다. 그 여인은 침대 위에서 마치 거미가 그러하듯 네발로 기면서 문이 열리는 소리를 닫고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 모습이 무서워 문을 닫고 말았다.
그 다음방도 그 다음방도, 백작의 수많은 변태적 성취향으로 가득한 것들이 나왔다. 사람을 꼭 닮은 인형도 있었고, 팔다리가 없는 미인도 있었다. 가장 놀란 것은 수조 안에 들어있는 해우(Sirenia)였다. 물고기와의 섹스까지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그는 변태였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방을 열었을 때 내가 기대한 모습, 아니 내가 절대로 보고 싶지 않았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에드먼드!”
나는 그의 이름을 크게 불렀고, 그런 내 목소리에 놀란 그는 잠에서 화들짝 깨어나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돼지같은 알몸 아래에 다나의 알몸이 눕혀져 있었고 그녀의 깨끗하고 아름다웠던 몸 위로 보기 싫은 하연 정이 여기저기 묻혀져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도, 입에도, 배에도 도대체 무슨 짓을 얼마나 몇 번이고 더럽혀진지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내가 제정신으로 있을 수 있었을까?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말한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냥 정신줄이 끊어지면서 손에 잡힌 거라면 무엇이든 집어던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내 손에는 좋은 게 들려 있었다.
“이 쓰레기 같은 놈!”
“살려줘… 네가 보는 게 모든 게 아니야!”
크게 휘둘러진 몽둥이는 둔탁한 타격감을 내며 피를 튀어내었다. 하지만 그 일은 일어나선 안되는 일이었다. 돼지같은 백작은 몸을 움츠리다 못해 침대 밑으로 데굴데굴 굴러 몽둥이를 피했고 휘두른 몽둥이는 미처 멈추지 못하고 침대 위에 누워있는 다나… 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다나의 머리를 박살내고 말았다. 더 이상 아름다운 다나는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었다.
“이… 개새끼가~!”
그가 피하지만 않았어도… 다나는 여전히 아름다웠을 것이다. 비록 더럽혀졌다고 하더라도 가릴 수 있는 아름다움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완전히 없어져버렸다. 그리고 남겨진 거라고는 내게 이러한 고통을 준 장본인 뿐이었다.
“진정해, 진정해. 내가 그런 거 아니잖나?”
“죽여버릴테다!”
그를 향해 달려들자 그는 옷도 챙겨입지 못한 알몸으로 복도를 지나쳐 도망쳤다. 그의 뒤를 몽둥이를 든채 쫓아갔고 결국 그도 복도 끝 막다른 길까지 달아났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 방으로 들어갔고, 그 방을 따라들어가자 그는 벌거벗은 몸으로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하고 있었다.
이 집의 마지막 방은 예배당이었고, 그는 지금 주님의 십자가 아래에 앉아 주기도문을 외고 있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여 그 이름을 거룩히 하시어 이 세상에 나라를 세우셔서 이 세상에서 그리 이루소서…”
하지만 그러한 기도문이 끝나기도 전에 나의 몽둥이가 그를 후려갈기자 그의 등에 깊은 상처가 나며 피가 튀었다. 그러자 그는 고통으로 몸을 일으켜 앞에 보이는 주님이 매달려 있는 십자가를 들고 내게 집어던졌다.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주님이 내 가슴을 강타하였으나 힘이 없는 십자가는 내게 큰 고통을 주지 못했다. 다시 그를 쫓아가 그를 끝장내려 하였으나 약빠르게 내 옆으로 빠져나와 다시 방을 빠져나가 도망치는 그를 잡아 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역시 어디로 도망쳐야 할지 몰랐기에 결국 빠져나갈 길이 없는 지하 감옥으로 몸을 향하고 있었다.
수많은 죽음과 관련된 고문 기구와 미이라들 사이에 들어간 그의 뒤를 쫓아 몽둥이를 들고 들어가자 컴컴한 어둠이 기다리고 있었다. 손에 잡히는 대로 전등의 스위치를 올리자 그는 지금까지의 비굴하게 도망치던 모습과는 달리 나와 마주하고 있었다. 그 순간에도 눈에 띄는 것은 그의 볼폼없는 자그마한 성기였다.
“왜 날 죽이려는 거지? 날 죽이면 이 세상에 널 이해해줄 사람이 없어지는 거잖아? 우린 함께 있어야 한다고.”
“다나에게 그런 짓을 해놓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냐? 게다가 나를 경찰에 팔아넘겨?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죽음을 네게 주러 왔다. 기뻐서 소리라도 질러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죽음을 좋아하긴 하지. 그럼 누가 죽을까?”
그러면서 그는 내게 총을 겨누었다. 수많은 고문도구들 사이에 끼어있는 무기 중에 2 차 대전 때 독일 장교들이 사용했던 권총이 있었던 것이다.
“독일군 총으로 독일인을 죽이게 되다니 아이러니하군!”
그는 갑작스러운 역전에 쾌감을 느끼는 듯 그 초라한 남성의 심볼에서 정을 흘리고 있었다. 그 순간 그의 총에 내가 죽겠구나 하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왜인지 그렇기에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이 세상에 내가 더 이상 남아있을 이유가 있던가?
내 삶의 모든 것을 바꾼 다나였다. 그리고 그러한 다나 역시 이제는 이 세상에 없다. 여기서 죽는 것이야 말로 가장 깔끔한 앤딩이었다.
그래서 손에 든 몽둥이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두 팔을 벌리고 가슴을 열었다.
“자, 그리하도록 해. 이 세상에 내가 남아있을 이유가 없어. 날 죽이면 너도 참 편해지겠군.”
조금 걸리는 게 있다면 죽음이 두려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것은 두 눈을 감으면 해결 되는 일이었다. 내가 다나에게 준 고통이 있는데, 그 걸 내가 감수하지 못하면 안될 일이었다.
시익 웃으며 방아쇠를 천천히 당기던 그는 갑자기 입을 열고 말하기 시작하였다.
“난 당신과는 달라.”
그 목소리에 눈을 떴을 때 그는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울고 있었다.
“당신도 나와 다르기를 바라겠어.”
그러더니 그는 자기 목에 총을 겨누고는 방아쇠를 당겼다.
‘탕’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싶었다. 그리고 상황을 어느 정도 추정할 법한 물건은 나중에 백작의 방에서 다나의 시신을 수습하면서 찾아낼 수 있었다. 그의 방의 욕실에서 나온 약병들이 죄다 항우울제였던 것이다.
그는 우울증을 갖고 있었고, 항우울제를 통해서 유쾌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오직 약기운만으로 사람처럼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죽음과 가장 가까운 거리의 사람이었고, 스스로의 변태적인 모습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가 양면성에 빠져 들었던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을 둘로 나누지 않고서는 도저히 자신을 살릴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세상을 이해하려하는 고귀한 정신과, 온갖 쾌락에 몸을 맡기고 금기에 빠져 허우젹거리는 육신을 분리하지 않고서는 그 육신을 죽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내가 그를 부추킨 것이었다. 그 육신을 죽이라고…
추한 인생을 자신의 손으로 마감하라고…
그의 손에 들린 권총은 혹시 어디에 쓸모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빼앗아 들고 지하층에 아무렇게 버려져 있던 콘트라베이스 케이스에 다나의 머리가 깨진 시신을 추려 넣었다. 더 이상 아름답지도 않고, 추하고 썩어가는 시신이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이제 끝났다.
=현재, 브뤼셀, Jete 공원묘지=
아무도 없는 새벽녘에 손으로 직접 땅을 파기 시작해 시신을 하나 묻을 정도의 깊이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 콘트라베이스를 통째로 넣어두었다.
자, 이게 나의 이야기이다. 한 여인을 사랑하고, 살해하고, 그러면서도 사랑하고, 마지막에는 내 손으로 파괴하게 된 이야기이다. 그 과정에서 추하면 추하고 아름답다면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나왔다. 그저 스쳐지나가는 사람들도 있었고, 어떻게든 나와 연관이 된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바로 오늘 이 순간을 위해 모두 필요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모든 것은 재에서 재로, 먼지에서 먼지로, 흙에서 흙으로….”
결국 마지막에는 다나도 이렇게 묻힐 것이었다. 그녀가 사라지고 나니 막상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또한 이 세상을 만든 주님 밖에 남지 않았다. 아니 하나가 더 남아있었다. 그런 혼란속에서 건져온 유일한 것이 남아있었다.
아직 탄환이 남아있는 걸 확인한 권총이었다.
마지막의 나는 죽음을 원하였다. 그 것이 가장 옳다는 결론도 내렸다. 하지만 그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하고 다시 의문을 갖게 되었다. 이 세상의 아름다움인 다나를 잃었으니 당연히 나도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되었으나 다나가 사라진 지금 나를 지배하는 다나의 규칙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주님이 주신 목숨을 내 손으로 거두어도 될까?하는 기독교적인 교리가 떠 올랐을 뿐이었다.
“참으로 간사하도다.”
지금까지의 모든 상황들이 결국 내 중심으로 서술되었으니 이 이야기를 듣는 여러분들은 가끔 내가 서투른 판단을 한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 한가지만 물어보겠다. 내가 어찌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는가? 그 대답을 듣기 전까지는 행동을 멈추도록 하겠다. 물론 어떤 대답이 나오느냐에 따라 내 행동이 달라지기야 하겠지만 그 대답이 내 행동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칠 순 없겠지. 말했다시피 나는 서투르니까.
=보고=
성직자가 여자를 강간하고 살해한 후 그 시체를 유기하는 사건이 있다고 하면 여러분들은 믿을 것인가? 성직자라는 단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이지. 그렇기에 나는 성직자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다. 그냥 강간 살인마가 시체를 유기하는데 성직자의 껍데기를 쓴 것 뿐이다.
그런 흉악한 범죄가 실제로 일어났고, 난 그놈을 잡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이 사건은 독일의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 메트만이라는 도시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가출 청소년 사건으로 인식되었으나 어디에서도 그녀를 찾지 못하자 우리는 살인사건이 아닐까 생각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사건이 생긴지 며칠도 되지 않아 그 동네의 신부가 사라졌다. 불안감이 생긴 건 그 때부터였다.
신부의 방을 수색하였을 때 목이 부러진 콘트라베이스와 쓰러진 십자가 그리고 뒤헤쳐진 모금함이 있었을 때, 난 신부가 강도라도 당한 줄 알았다. 하지만 잠시 후 불을 끄고 적외선을 통한 혈흔 검사를 하였을 때. 방 전체에 피가 묻었던 자국이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의 방 안에서 시체 하나가 난도질당한 것이었고, 콘트라베이스 케이스가 사라진 것이었다.
내가 무엇을 생각하여야 했을까? 콘트라베이스에 시체를 넣고 다니는 변태 살인마, 그 것이 바로 그 신부의 정체였던 것이다.
그 신부를 추적하기 위해 관할을 넘나드는 수사를 하였고, 수사 공조를 통하되 현장에는 항상 내가 입회하기로 하였다. 국경을 넘는 콘트라베이스를 가진 신부을 찾다보니 루르몬트의 총기 사건이 하나 걸려 들어왔다. 그 녀석은 움직이면서 계속 살인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공개수사로 방침을 바꾸게 되었으나 그는 오히려 더욱 기민하게 움직였다. 더 이상 신부 행세를 하지 않았기에 콘트라베이스나 장기 투숙객을 중심으로 수사를 펼쳐 나가다가 그 녀석이 머물던 여관을 찾아내었다. 그러나 이미 한발 늦었다. 그러나 그 녀석의 방에서 단서를 찾아내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고딕 박물관의 팜플렛을 발견하였고, 그 녀석이 브뤼셀로 간다는 걸 알아내었다.
결국 벨기에까지 쫓아갔더니 고딕 박물관에서 발견한 것은 고딕 박물관의 소유주인 에드먼드 테런스 백작이 죽어있는 모습이었다. 흉기도 남아있지 않았으며 등에 깊은 상처도 나있었기에 타살로 추정함이 옳았다. 결국 놈은 두나라에서 세 명을 죽인 셈이었다.
결국 주위의 탐문 수사 끝에 새벽부터 무덤을 파헤치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출동해서 나와봤더니…
그 놈은 결국 자기 턱 밑에 총을 겨누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말릴 틈도 없이 총이 발사되었고, 힘을 잃은 시체는 그대로 무덤 속으로 털썩 쓰러져버렸다. 깊이 파인 구덩이 안에는 놈의 시신과 콘트라베이스가 들어있었는데 콘트라베이스의 시신은 지문 검사 결과 놈의 첫 번째 희생자인 다나 크라우스 양으로 밝혀졌다.
이로서 장장 한달에 걸친 다나 크라우스 실종 사건이 해결되었으나, 처벌할 대상이 없어져 더 이상 사법부에서는 손 댈 거리가 남아있지 않았다.
그대로 사건은 종결되었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경위 하인리히 요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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