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시간
- 작성일 2011-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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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시간
그가 다가온다. 눈을 감아도 그가 느껴진다. 뒷목을 뱀이 타고 오르듯 차갑고 서늘한 공포. '저벅 저벅‘ 그의 발걸음이 조심스러우면서도 거침없다. 초겨울 새벽 2시, s시 대학교 맞은편 슈퍼는 셔터가 내려져 있다. 담배냄새가 짙게 밴 검정 가죽장갑이 J의 왼쪽 어깨에 닿는다. 그녀의 하얀 목덜미가 순간 움찔한다.
“여기, 도 도 돈, 돈이요!”
J는 핸드백을 높이 추켜든다. 그녀의 외침이 차가운 새벽하늘에 허망하게 울러 퍼진다. P의 억센 손아귀가 순식간에 J의 목을 나꿔챈다. 진갈색의 핸드백이 열리며 돈 봉투가 공중에 뿌려진다. J가 한 손을 공중에 뻗어 그걸 잡으려 한다. 핸드백속 흰 봉투가 공중으로 뛴다. 푸른 지폐가 차가운 새벽거리에 진눈깨비처럼 흩날린다. P의 손아귀에 J의 목덜미가 잡혔다. 그녀는 사지를 부르르 떨며 한동안 버둥거린다. P의 억센 손아귀가 이번엔 그녀의 입을 틀어막는다. 눈물이 뒤범벅된 그녀의 얼굴에 경련이 인다.
“이 미친 년, 너 이리 와!”
술 취한 P의 거친 말투가 그녀의 귓전을 때린다. 가로등이 깨진 어두운 골목길에 J의 구두 한 짝이 벗겨진다. 골목길에 접어들자 J에게 달려드는 검은 운동화들. 담배를 꼬나문 한 녀석이 뒤에서 J의 긴 머리채를 휘어잡는다. 동시에 P의 주먹이 그녀의 얼굴을 강타한다.
“제발, 살려줘······”
검고 차가운 골목길 구석에 J가 풀썩 주저앉는다. 그녀의 흰 블라우스가 찢어진다. 담배를 꼬나문 검은 운동화가 J의 움켜쥔 손을 발로 걷어찬다. 뺨을 번갈아 맞은 그녀의 입가로 피가 줄줄 흐른다.
“넌 당해도 싸, 이년아!”
P가 생식기를 내밀고 J의 피 묻은 입가에 쑤셔 넣는다. 뒤에서 머리채를 붙든 한 녀석이 P의 생식기를 강제로 J의 입에 물린다.
“세게 빨아, 얼른.”
터진 입가로 빨간 피가 흐른다. 피비린내가 역하게 올라온다. "읍 읍' 소리를 내며 그녀가 P의 생식기를 물고만 있다. 한 녀석이 찢어진 블라우스 사이로 손을 넣어 그녀의 가슴을 움켜쥔다. 무릎을 꿇은 그녀의 입과 손은 자유롭지 못하다. 반항의 표시로 가슴만 이리저리 흔들어댈 뿐이다. 오히려 그게 P를 더 자극한다.
“아, 흥분돼. 눕혀.”
J가 P의 생식기를 있는 힘껏 꽉 문다. 그의 주먹이 그녀를 내리친다. J의 오른쪽 귓바퀴에 P의 주먹이 사정없이 내리꽂힌다. 정신을 잃은 J가 바닥에 고꾸라진다. 한 녀석이 그녀를 엎드리게 하고는 뒤에서 들어간다. 아악 비명을 지르자 녀석이 그녀의 등짝을 세게 올려붙인다. 뒤에서 갑자기 P가 녀석을 잡아챈다. 그들이 뒤엉켜 주먹질을 해댄다. 순간 그녀 알몸으로 일어나 절뚝거리며 골목길 끝을 향해 뛴다.
이튿날, 그 골목길엔 어지러운 운동화 자국이 선명하다. 끈 떨어진 여자 구두 한 짝이 가로등전신주 아래 처박혀있다. 오렌지색 방한복을 걸친 늙은 청소부의 손에 피 묻은 여자 팬티와 찢어진 옷가지들이 힘없이 들려있다. 늙은 청소부가 고개를 들어 잠시 어두운 하늘을 본다. 떨리는 손으로 라이터를 꺼내 담배에 불을 붙인다. ‘반짝’ 어둠이 물러나는 듯하다. 골목길을 벗어난 지구대 앞에는 푸른 지폐가 벌레먹은 낙엽더미와 함께 뒹굴고 있다. 이슬에 젖은 낙엽더미를 늙은 청소부가 빗자루로 쓸고 지나간다. 노란 별 몇 개가 알약처럼 겨울 새벽하늘에 드문드문 박혀있다.
J의 자취방에 아침햇살이 여릿하게 뻗쳐 들어온다. J가 피멍든 얼굴에 부르튼 입가를 흰 마스크로 가린 채 슬리퍼를 신고 방을 나선다. 자취방을 나가 오 분도 안 되어 그녀가 도착한 골목길은 말끔하다. 골목길 구석에 검은 운동화 자국들이 선명하다. 깨진 가로등 아래 채 치우지 못한 그녀의 검은 구두가 눈에 들어온다. 가져간 봉지에 끈 떨어진 구두 한 짝을 주워 담는다. 골목길 바닥 검은 발자국들이 겨울햇빛을 받아 물빛처럼 어른거린다. 잠시 현기증이 인다. 욕지기가 밀려온다. J의 입에서 피와 함께 말간 토사물이 왈칵 뿜어져 나온다.
오는 길에 공중전화로 학원에 전화를 걸어 병가를 낸다. 걸어오는 내내 가슴이 두근거린다. 얼굴에 열이 오른다. 한쪽 귀가 먹먹하다. 아무래도 고막이 터진 것 같다. ‘넌 당해도 싸, 이년아!’ 하던 거칠고 낯익은 P의 음성이 들려오는 듯하다.
자취방으로 돌아온 J, 문을 안쪽에서 걸어 잠그고 또 다시 확인한다. 전기장판 위로 간신히 몸을 눕힌다. 부은 눈 위로 두 줄기 뜨거운 눈물이 흐른다. 부르튼 입가를 아무렇지도 않게 지그시 깨문다. 아랫도리가 저릿저릿하며 하복부의 통증이 심각하게 느껴진다. 엉거주춤 일어나 팬티에 생리대를 붙이고 다시 눕는다. 째깍거리는 시계소리만이 방안의 차가운 공기를 갉아먹고 있다. 누런 벽지 위 소국 한 다발이 철지난 가을 풀처럼 시들어가고 있다. 두 달 전 P에게 받은 꽃다발이다. 병원에 먼저 가야할지, 경찰서로 향해야 할지 제대로 판단이 서질 않는다. 멍든 팔을 천천히 들어 올려 소맷부리로 눈물을 훔친다. 그녀에겐 증거물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그녀의 아랫도리에 씻지 않고 남겨둔 P의 정액이 서서히 말라붙어가고 있다.
대학교 앞 Pc방 한구석에 담배연기가 자욱하다. 먹다 만 컵라면이 나무젓가락이 꽂힌 채 놓여있고 콜라병에 담배꽁초가 수북하다. 붉고 퀭한 눈으로 P가 컴퓨터 모니터 화면을 노려보고 있다. 그의 굵은 손가락이 수음하듯 정신없이 방향키를 누르고 있다. “씨발년, 뒈져라. 씨발년!” 그의 입가로 거친 욕설이 마구 튀어나온다. 잠시 후 운동화 뒤축을 꺾어 신은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남자 둘이 P옆에 멈춰 선다. 뚱뚱한 Pc방주인이 카운터에서 고개를 쭉 내밀어 그들의 동태를 살핀다. P가 담뱃갑에서 담배를 꺼내준다. 담배개비를 손가락에 낀 녀석들이 다시 문밖으로 나간다. P가 다시 컴퓨터 게임에 집중한다. 그의 검지에 바짝 힘이 들어가 있다. 모니터 화면에 나뒹구는 가상의 시체들 사이로 J의 멍든 얼굴을 보기라도 한 걸까. 그의 입가에 이기죽거리듯 비열한 표정이 스쳐 지난다. 게임을 마친 그가 담뱃갑을 기울어 담배 한 대를 꺼낸다. 담배 끝을 살짝 찢어 벗겨낸 다음 연두색 라이터로 불을 지핀다. 그리고는 담배를 한 모금 깊이 빨아들인다. 그의 검붉은 입에서 하얀 담배연기가 뿜어져 나온다.
오후의 여린 햇살이 J의 자취방을 비춘다. 오후 2시 J는 이를 악물고 벽을 짚고 일어선다. 시들은 소국 한 다발을 벽에서 내려 쓰레기통에 처박는다. 부엌으로 건너가 일회용 가스레인지 위에 놓인 노란주전자를 손에 든다. 주전자 목에 입을 대고 차가운 보리차를 들이킨다. 작은 편수냄비를 꺼내어 가스레인지 위에 올린다. 일회용 수프를 넣고 물을 붓는다. 먹다 남은 우유도 냄비에 붓는다. 잠깐 핑 하고 현기증이 인다. 싱크대를 붙잡고 간신히 버틴다. 수프 냄새가 방안에 퍼진다. 흐릿한 눈으로 시계를 본다. 오후 2시 15분, 뭐든 먹고 기운을 차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냉기가 서린 방바닥에 신문지를 한 장 펴고 앉는다. 데운 수프를 놓고 그녀가 힘겹게 수저질을 한다. 수저를 꽉 깨무는데 수프가 침과 함께 바닥에 줄줄 흘러내린다. P의 정액 같다. 그의 성기가 그녀 입에 강제로 물릴 때의 역겨운 느낌이 되살아나며 몸서리가 쳐진다. J는 냄비를 들어 싱크대에 쏟아 버린다.
부엌 창가에 놓아둔 허브화분이 말라 죽어 있다. 끝부분만 푸른 잎을 몇 개 매달고 있다. 머그잔에 물을 받아 화분에 뿌려준다. 싱크대 옆 검붉게 말라가는 사과껍질 사이로 끝이 날카로운 과도가 그녀의 눈에 들어온다. 멍든 손목을 들어 부엌창가에 비춰본다. 그리고 과도를 집어 든다. 창 너머 하교하는 초등생 아이들의 웃음 섞인 말소리가 들려온다. 창문을 조금 열자 골목길 풍경 하나가 그녀의 눈에 들어온다. 작은 가방을 등에 멘 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초등생 아이들이다. 가방을 멘 여자애 손을 꼭 잡고 걸어가던 남자애가 귓속말로 뭐라 속닥거린다. 아이들을 바라보던 J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번진다.
J가 처음 P의 시골집을 찾던 일 년 전 여름, 그 해는 유난히 무덥고 가뭄이 심했다. 어느 주말, J는 P가 즐겨 타던 검정 오토바이 뒤에 올라탔다. 처음엔 그가 어디 유원지라도 데리고 가려는 모양이라고 느꼈다. 평소와는 다르게 P는 약간 들떠 있었다. 대학교 앞 슈퍼에서 두유 한 상자를 사 들고 나온 P가 휘파람을 불었다. 시내에서 멀지않은 소읍으로 오토바이가 달렸다. 길은 건조했고 모래알 같은 뿌연 먼지가 자욱하게 퍼졌다.
시골 노인정 앞에 이르렀을 때 누군가 그들의 오토바이를 향해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그의 어깻죽지가 춤을 추듯 흔들거렸다. 한쪽 다리를 약간 절고 있었다.
“우리 형이야, 인사해.”
오토바이에서 내린 P가 그녀를 향해 어색하게 웃었다.
고개를 까딱하며 인사를 건네자 그가 웃었다. 그의 입가로 말간 침이 흘러내렸다. P가 그의 형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뭐라 속닥거렸다.
“우리 형이 너 이쁘대.”
그녀를 향해 돌아서며 어색한 듯 P가 말했다.
“형이 있다고 왜 진작 말하지 않았어?”
따지듯 묻는 그녀에게 P는 “보다시피······” 하며 어깨를 한번 으쓱했다.
“배다른 형이야.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를 절게 됐고, 그리고 좀 모자라.”
P가 그녀에게 목소리를 낮춰 재빨리 말했다.
노인정 가까이 면해 있는 좁은 골목을 들어서자 집 한 채가 보였다. 서까래가 기울어져 가는 초가집이었다. 집 앞을 싸리나무로 얼기설기 엮어놓았다. 대문도 없이
흙 마당으로 이어졌다. 그의 형이 다리를 절뚝이며 그녀 뒤를 바짝 붙어 따라왔다. 그들이 집에 들어서자 여러 마리의 개가 동시에 컹컹 짖었다. 사료가 담긴 개 밥 그릇이 마당 여기저기 뒹굴고 있었다. 마루를 향해 다가선 J는 코부터 감싸 쥐었다. 마루 밑에 하얀 부유물이 떠 있는 노란 오줌이 절반 넘게 차오른 오강이 보였다. 나무 마루 한쪽에 내팽개쳐진 걸레에선 쉰 옥수수냄새가 풍겨났다.
“엄마, 엄마 계셔?”
“거, 누구여?”
찢어진 창호지 문이 덜컥 열리며 반백의 노파가 모습을 드러냈다. 모시적삼이 반쯤 벗겨진 노파의 메리야스 사이로 늘어진 가슴이 훤히 드러났다. P가 마루에 두유상자를 내려놓았다. 노파는 J를 보자 실눈을 더욱 가늘게 떴다. 병색이 완연했다.
“장 미, 인사해. 우리 엄마, 친 엄마.”
평소 그 답지 않게 P는 몹시 들떠 J의 어깨를 두드렸다. 얼떨결에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어여, 어여 이리 올라와.”
방으로 들어간 그녀에게 전기장판위로 올라오라며 노파가 손짓을 했다. 그녀가 머뭇거리자 노파가 머리맡에 놓여 있던 두유와 요구르트 빨대를 건네주었다. 검버섯 핀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J가 노파의 손에서 그것들을 얼른 받아 들었다.
“엄마, 우리 각시, 예쁘지?”
P의 말에 J가 흠칫 놀라며 눈을 흘겼다. 노파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녀의 등 뒤에 서 P의 이복형 L이 헤헤거리며 웃었다. J가 순간 몸을 움찔하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불깃에 누런 얼룩이 보였다. 방안에 작은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갔던 L이 그녀의 손에 카스텔라를 건넸다. J는 그 방을 나오면서 뜯지 않은 두유와 빵을 마루 한쪽에 내려놓았다. 두유는 유통기한이 한참 지나 있었고 카스텔라 귀퉁이에는 곰팡이가 끼어 있었다.
“자주 올게.”
P가 더러운 걸레로 마루를 한번 쓱 훔치더니 노모를 향해 웃었다. 어서 가라며 노파가 손짓을 했다. L이 뒤따라 나왔다. 마당 가운데 빨랫줄이 낮게 걸려 있었다. 수건 몇 장과 노파의 메리야스와 늘어진 팬티가 불볕더위에 메말라 가고 있었다. 그들이 나오자 개들이 다시 컹컹 짖었다. 얼핏 마루 밑에 강아지들이 웅크리고 있는 게 보였다. J는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샌들에 개똥이 한 무더기 달라붙어 있었다.
그 집을 나오면서 J는 흙 마당에 샌들바닥을 문질렀다. 좁고 경사진 골목길을 오토바이를 끌고 내려오면서 P는 끙끙 댔다. L이 절름거리며 뒤따라 나와 노인정에서 그들을 배웅했다. 그녀는 P의 오토바이 뒤에 올라타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문득 J는 개똥이 뒤범벅된 마당과, 마루 밑 절반 넘게 차있던 병자의 누런 오줌과, 유통기한이 한참 지나있었던 두유와, 미간을 잔뜩 좁혀 그녀를 위 아래로 훑어보던 노파의 의뭉스런 눈빛을 떠올렸다.
그 뒤로 2주에 한 번 J는 P의 오토바이를 타고 시골집을 찾았다. 그녀가 집을 치울 동안 P는 노모를 노인정에 데려다 준다며 자주 집을 비웠다. 그럴 때면 집에는 L이 남아 그녀의 행동을 주시했다. 빨랫감을 챙겨들고 수돗가에 나와 앉으면 L이 마루에 앉았다가 걸레를 던져주었다. J가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나오면 문 앞에서 L이 “큰 거, 큰 거?”하며 헤헤거렸다. 고개라도 끄덕여주지 않으면 그는 그녀 뒤를 졸졸 따라왔다. 한번은 방을 치우다 마루로 나오니 L이 마당가에 심겨진 말라빠진 고추나무를 뽑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J가 달려드니 L이 흙 묻은 손을 무심결에 그녀 허리에 갖다 대었다. J가 놀라 몸을 움찔하자 L의 덥고 끈끈한 입김이 그녀의 귓바퀴에 달라붙었다. 그때부터였을까, 그녀의 행동거지를 살피는 L의 눈길이 예전과는 많이 달랐다.
추석이 멀지 않은 시월의 첫 주말이었다. 마침 그날 동네잔치가 있어서 P는 노모를 부축하고 노인정에 다녀온다며 나가버렸다. 어쩐 일인지 L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가고나자 J가 안방을 치우러 들어갔다. 전기장판을 걷어내고 이불을 개키는데 인기척이 느껴졌다. 방 안쪽 미닫이문이 덜컥 열렸다. 낮잠을 자다 깬 듯 L이 부스스한 모습을 드러냈다. 잠시 머뭇거리던 L이 다가와 홑이불을 걷어내 마루로 나갔다. 그러더니 다시 들어와 안방 문을 잠갔다. 순식간에 L이 그녀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다른 한 손이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J는 그의 억센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려 고 몸을 버둥거렸다. 연두색 파리채가 J의 눈에 들어왔다. 그가 다리를 절었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파리채 손잡이로 L의 한쪽 다리를 세게 후려쳤다. L이 잠깐 움찔하더니 벽 쪽으로 그녀를 거세게 밀어붙였다. “이뻐, 이뻐······” L이 그녀의 입술을 거칠게 비벼대며 이상한 신음소리를 냈다. 그녀의 감색 주름치마가 걷어 올려졌다. 팬티가 사정없이 벗겨졌다. 방바닥에 엎드러진 J가 반항하면 할수록 L은 더욱 흥분하는 것 같았다. L의 생식기가 그녀의 구멍으로 밀고 들어왔다. 생리가 가까워 탱탱하게 불은 그녀의 가슴에 통증이 밀려왔다. L이 하던 짓을 멈추고 그녀의 윗도리를 벗겼다. 가슴에 더운 입김을 불며 L이 J의 유두를 세게 빨았다. J의 엉덩이가 요동을 쳤다. 마루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그때 방문이 덜컥 열리며 눈부신 햇빛이 방안으로 뻗쳐 들어왔다. 문 앞에 P의 검은 그림자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형, 혀엉, 형.” P가 J의 몸에서 L을 가까스로 걷어냈다. 정신을 차린 J가 옷가지를 수습해 몸에 걸쳤다. P와 L이 엉켜 붙는 사이 J는 팬티도 걸치지 못한 채 마루로 뛰쳐나왔다. 마루 한 구석에 놓인 핸드백을 들고 J가 마당에 내려서는 데 P의 노모가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다. 놀라서 황망히 멈춰선 노파를 지나쳐, 흙 마당을 지나쳐, 싸리나무로 얼기설기 엮은 대문을 지나쳐, 개똥이 구두에 묻은 줄도 모르고 J가 뛰었다. 등 뒤에서 개들이 요란하게 짖어댔다.
그날 P는 그녀를 배웅하지 않았다. 노인정을 지나 버스정류소까지 가는 길은 아득히 멀기만 했다. 검은 아스팔트를 건너다 J의 구두굽이 부러졌다. 그녀는 절뚝거리며 정류소에 이르렀다. J가 작은 간이의자에 앉았을 때 큰 트럭이 하얀 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갔다. 덥고 끈끈한 바람이 그녀의 감색 주름치마를 들추며 맨살의 다리를 훑고 지나갔다. 한참을 기다려도 버스는 오지 않았다. 물론 P도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문득 그녀는 아스팔트에서 물빛아지랑이가 어지럽게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멀리서 짐을 가득 실은 트럭이 달려오고 있었다. ‘이렇게 살아서 뭐해?’ 그녀는 도로에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J가 휘청거리며 도로로 나왔다. 트럭 대신 그녀 앞에 시골버스 한 대가 멈춰 섰다. 문을 열어도 타지 않고 서 있는 J에게 운전기사가 역정을 냈다. 그녀가 버스에 올랐다. 희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그녀의 시야에서 P의 집이 점점 멀어져 갔다. 그 후 P와는 연락이 끊어졌다. 그게 끝일 거라고 J는 믿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J는 이듬해 봄 입시학원에 취직을 했다. 그즈음 P는 여전히 공부한답시고 대학 도서관에 들러붙어 있었다. P는 가끔 그의 오토바이에 술집 아가씨들을 태우고 돌아다녔다. 언젠가 대학교 앞 정류소에서 P를 딱 한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P의 기분 나쁜 웃음을 J는 모른 척 외면했다. 그가 무슨 말을 건넬 것처럼 건들거리며 J에게 다가왔다. J는 마침 정류소에 멈춰 선 버스에 급히 올라타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녀는 L과의 찝찝한 기억을 머릿속에서 점차 지워갔다. P와 그의 노모도 J의 기억 속에서 희미하게 잊혀져갔다.
가을이 저물어 가고 있을 무렵 그녀는 L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날 오후 J의 자취방에 자잘한 안개가 섞인 소국 한 다발이 놓여있었다. 하필이면 그날 밤 L의 장례식이 s시 의료원 장례식장에서 치러졌다. 그녀는 그곳에 가지 않았다. P의 형은 누전 사고였다. 전깃줄이 끊어져서 땅바닥에 깔린 것을 형이 미처 보지 못하고 밟아서 생긴 사고였다. 비온 뒷날 L은 누군가를 마중 나와 있었다고 했다. P는 그의 형의 죽음이 간접적으로 그녀와 관련된 것이라 믿었다.
P는 평소 J가 헤픈 여자였음을 떠올렸다. 연애 시절에 관계를 가질 때면 적극적인 그녀에게 P가 “배란기야?”라고 몇 번이나 되물었던 기억이 났다. 그녀는 성에 있어서만큼은 거침이 없는 여자였다. 자신과 섹스를 할 때 그녀는 정열적으로 돌변했다. 그날 일도 J가 그의 이복형을 유혹해 관계를 가진 것으로 P는 단정 지었다. 지능이 모자라고 다리가 불편한 형은 절대 여자에게 그런 짓을 할 위인이 못된다. 더구나 형은 그날 이후 자주 노인정 앞을 기웃거리지 않았는가. 마치 J가 다시 형 자신에게로 돌아와 줄 것처럼. P는 그때부터 J를 향해 앙심을 품었다. L의 죽음을 J의 책임으로 돌리는 일만이 형의 돌연한 죽음에서 P가 자유로워질 수 있는 길이었다. 형의 장례식이 치러진 다음날 P는 평소 동생처럼 여겨왔던 두 녀석과 함께 골목길을 사전 답사했다. 그 날 가로등 전신주에 돌을 던져 전구를 깨뜨렸다. 이튿날 새벽, 늦게 귀가하는 J를 그들이 덮친다는 시나리오는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J는 그녀의 자취방이 멀지 않은 캄캄한 골목길에서 P와 두 녀석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돌이킬 수 없는 장미의 시간이었다.
J는 한쪽 귀를 손으로 감싸 쥐고 동네 이비인후과를 나왔다. 진눈깨비가 날리는 추운 날씨였다. 속이 헛헛해 자취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슈퍼에 들러 1.5리터 생수 한 병과 컵라면을 샀다. 문득 그녀는 발걸음을 돌려 친구 원룸으로 향했다. 속 깊은 친구는 J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일주일간 학원에 병가를 냈는데도 방학이 멀지 않아 바쁜 지 원장으로부터 계속 문자가 들어왔다. J는 열흘이 지나도록 학원에 전화 한통 걸지 않았다. 학원은 그녀가 일을 포기했다고 느꼈는지 더 이상 연락을 취해오지 않았다. 2주일 지난 뒤 J는 친구 원룸을 나와 무슨 생각에서인지 P가 자주 가던 Pc방을 찾았다. 그날 피시 방 주인과 몇 마디 나눈 다음 J는 돈을 건넸다. 사흘 후 J는 그에게서 사진 몇 장을 건네받았다. P와 녀석들이 찍힌 사진이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자주 눈이 내렸다. 전날 내린 눈 위로 또다시 눈이 쏟아져 도로는 빙판이 되었다. J는 자취방에 들러 등산화를 신고 나왔다. 하얀 마스크와 벙거지 모자를 깊이 눌러 쓰고 J는 시내 여기저기를 떠돌았다. 시내 외곽에 위치한 K고등학교에 들러 몇몇 남학생들을 만났고, P가 머물렀던 대학 도서관의 선배들을 만났다. J가 그를 찾으면 찾을수록 P의 행방은 더욱 묘연했다.
그녀가 다가온다. 눈을 감아도 그녀가 등 뒤에서 느껴진다. ‘저벅저벅’ 그녀의 발걸음이 조용하면서도 민첩하다. 뒷목을 뱀이 훑고 지나가는듯한 차갑고 서늘한 공포. 골목길은 눈 천지다. P가 그녀의 자취방이 멀지 않은 골목길에 멈춰 서서 가로등을 올려다본다. 노란 불빛에 진눈깨비가 하루살이처럼 어지럽게 날고 있다. P는 담배 하나를 꺼내 끝을 뾰족하게 벗겨낸다. 연두색 라이터로 불을 지펴 담배를 한 모금 깊이 빤다. J의 가죽장갑이 P의 어깨에 가 닿는다. 순간 그의 검은 목덜미가 움찔한다. 마취제가 뿌려진 하얀 손수건이 그의 입을 틀어막는다. 정신을 잃고 P가 휘청거린다. 그 날 깨진 가로등 아래 버려져 있던 구두 한 짝이 J의 손에 들려져있다. 뾰족하고 날선 구두 굽으로 J가 P의 뒤통수를 세게 두 번 내리친다. 으윽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P가 골목길 바닥에 쓰러진다. J가 희미하게 웃는다. P의 몸 위로 소리 없이 눈이 쌓인다. P의 머리에서 흘러나온 핏물이 차가운 골목길에 번진다. 하얀 눈길 위에 붉은 장미 꽃잎들이 점점이 흩어진다. 자정이 가까운 시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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