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수「유월에」
- 작성일 2008-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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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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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춘수
빈 꽃병에 꽃을 꽂으면
밝아 오는 실내의 그 가장자리만큼
아내여,
당신의 눈과 두 볼도 밝아 오는가,
밝아 오는가,
벽인지 감옥의 창살인지 혹은 죽음인지 그러한 어둠에 둘러싸인
작약
장미
사계화
금잔화
그들 틈 사이에서 수줍게 웃음짓는 은발의 소녀 마아가렛
을 빈 꽃병에 꽂으면
밝아오는 실내의 그 가장자리만큼
아내여,
당신의 눈과 두 볼에
한동안 이는 것은
그것은 미풍일까,
천의 나뭇잎이 일제히 물결치는
그것은 그러한 선율일까,
이유없이 막아서는
어둠보다 딱한 것은 없다.
피는 혈관에서 궤도를 잃고
사람들의 눈은 돌이 된다.
무엇을 경계하는
사람들의 몸에서는 고슴도치의 바늘이 돋치는데,
빈 꽃병에 꽃을 꽂으면
아내여,
당신의 눈과 두 볼에는
하늘의 비늘 돋친 구름도 두어 송이
와서는 머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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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김춘수시전집』, 현대문학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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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詩 - 김춘수: 1922년 경남 충무에서 태어남. 시집『구름과 장미』『꽃의 소묘』『처용』『김춘수 전집』등이 있으며, 2004년 11월에 타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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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낭송- 김인석: 개그맨, 2001년 KBS 공채 개그맨 16기. <개그콘서트> <오션스 세븐> <생방송 임성훈의 오천만 송이 장미> 등에 출연.
빈 꽃병은 표정 없는 정물에 불과하지만, 거기에 꽃을 꽂는 순간 실내는 환하게 밝아옵니다. 꽃병과 꽃이 만나 무슨 화학작용이라도 일으킨 것일까요. 꽃병 근처에는 둥근 성채가 돋아나고, “밝아오는 실내의 그 가장자리만큼” 그걸 바라보는 사람의 눈과 두 볼도 환해지지요. 아름다움은 이처럼 전염성이 강한 선율 같은 것. 그런 미풍 같은 순간이 없다면, 방은 감옥에 불과하고 사람들의 눈은 아마 돌처럼 딱딱해졌을 거예요. 환한 심지처럼 어둠을 밝히는 한 다발의 꽃이 없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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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16일. 문학집배원 나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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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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